허베이성 서부ㅡ장자커우(張家口)ㅡ계명역(雞鳴驛)과 난천고진(暖泉古镇)
▲서태후와 광서제가 하룻밤 묵은 장자커우 계명역의 하가대원에 둘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서태후의 직위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광서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 있다
허베이성은 베이징과 톈진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싸고 있다. 황하를 기준으로 허난(河南)과 허베이(河北)로 구분한다. 기원전 역사 지리를 다룬 ‘상서(尚書)’ 우공(禹貢) 편을 보면 중원을 구주(九州)로 구분했다. 허베이는 기주에 포함된다. 그래서 성의 약칭은 기(冀)다.
허베이 서부의 장자커우·바오딩·스자좡·한단·창저우로 발품 기행을 떠난다. 계명역·난천고진·공중초원·청서릉·삼의궁·조운사·융흥사·포독채·오교잡기·여선사·조왕성 등을 나눠 소개한다.
1421년 명나라 영락제가 베이징 천도를 선언했다. 수도 방위를 공고히 하고 몽골 민족의 남하를 방어할 목적으로 경사북방선(京師北防線)을 구축했다. ‘경사’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수도’라는 뜻이다. 만리장성의 관문인 거용관 바깥으로 요새, 보루, 봉화대를 세웠다.
북방선 남쪽으로 자연스레 군사도로이자 무역로가 생겨났는데 경사북로(京師北路)라 부른다. 이 길을 따라 이자성의 민란 군대가 하늘을 찌를 듯 깃발을 펄럭이며 수도로 진군했고, 몽골계 오이라트 부족을 정벌하러 청나라 강희제의 전마(戰馬)가 출정했다. 1900년 8월 15일 새벽, 서방 8개 연합군이 침공하자 자금성을 다급하게 떠난 서태후와 광서제가 도피한 길이기도 했다.
◆징기즈칸이 개설한 역, 민란군이 진격한 길
▲베이징 서북쪽에 위치한 민둥산 계명산.
베이징 서북쪽 도시 장자커우(张家口)로 가다 보면 계명산(雞鳴山)이 있다. 베이징 시내에서 140㎞ 지점이다. 북위의 학자 역도원이 저술한 ‘수경주(水經注)’에 조나라를 세운 조양자의 고사가 있다. 누이동생이 대국(代国) 왕에게 시집을 갔다.
조양자는 만찬으로 유인해 왕을 살해했다. 누이동생은 비녀를 칼처럼 날카롭게 갈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산에 사당을 지었는데 매일 산계(山雞)인 꿩이 슬피 울었다. 지방 현지(縣誌)에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등장한다.
동돌궐을 토벌하기 위해 산 아래에 주둔했다. 한밤중에 꿩이 요란하게 울며 기습을 미리 알렸다. 꿩은 둘째치고 풀도 나무도 없어 생명이 살만한 땅이 아니다. 민둥민둥하게 생긴 계명산 아래에 대형 역참(驛站)이 있다.
▲계명역으로 들어가는 역성의 동쪽 대문
▲계명역 안내문과 지도
경사북로의 첫 역참 계명역(雞鳴驛)은 13세 초엽에 칭기즈칸이 서역으로 진출할 때 건설했다. 명나라 초기에 역참 밖으로 성벽을 쌓아 역성(驛城)을 구축했다.
성벽 길이가 거의 2㎞에 이르며 22만㎡로 현존하는 고대 역참 중 가장 크다. 동문을 통과하니 지도가 보인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객잔과 마구간 수준이 아니다.
지금은 공터로 남았으나 대형 창고인 역창(驛倉)이 동북쪽에 있었고 서북쪽에는 대마(大馬), 서쪽에는 서마(西馬)가 있었다. 대마는 민간인, 서마는 군인이 사용한 마구간이었다. 직선으로 말이 다니는 마도(馬道)가 있고 인도는 약간 꼬불꼬불하다.
▲역참 최고 관리가 거주하며 업무를 보던 역승서
▲역승서 이전 관공서였던 지휘서.
비뚜름한 길이지만 마차가 지날 정도로 넓고 평탄하다. 천천히 걸어 역참 중심에 역승서(驛丞署)가 나온다. 명나라 시대 가옥으로 강희제 33년 후부터는 역참 최고 관리가 머물던 사무실이다. 처음 건축한 시기가 명나라 시대일 터이고 당연히 여러 번 고쳐 지금에 이르렀다.
너무 낡아서 명나라 시대에 지었다고 해도 믿겠다. 몇 걸음 더 지나니 지휘서(指揮署)다. 역승서 이전에 사용한 관공서였다. 강아지와 장난치며 놀던 아가씨가 입장권 검사를 한다. 오른쪽 문 위에 ‘자희(慈禧) 일야행궁(一夜行宮)’이라 적혀 있다.
▲계명역 지휘서 안쪽 하가대원 마당.
▲서태후와 광서제가 하룻밤 묵은 하가대원 침실.
지휘서의 안쪽 주거공간은 하가대원(贺家大院)이다. 마당이 나오고 삼면에 단층 건물이 있다. 광서제와 서태후는 자금성을 떠나 며칠이 흐른 후 계명역에 도착했다. 당시에는 가장 좋은 숙소였겠지만 지금은 아주 허름하다.
광서제는 자립하고 자강하려 했지만, 서태후의 서슬 퍼런 권세에 밀려 숨조차 쉴 수 없던 시절이다. 총애하던 진비(珍妃)는 황궁을 떠나는 날 서태후의 명령에 의해 우물에 산채로 던져졌다.
칸막이도 없이 서너 발자국 떨어져서 양쪽으로 침실이 있다. 피난 당시 여름이긴 해도 산골이다. 아래에 아궁이가 있어 불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여닫는 창문이 있지만, 사방이 막힌 답답한 공간이다. 광서제의 속마음처럼 숨이 막혔을 하룻밤이 떠오른다.
▲하가대원의 '홍희접복(鸿禧接福) 서태후가 감사한 마음으로 남긴 글귀다
서태후는 ‘홍희접복(鸿禧接福)’을 써서 감사한 마음을 남겼다. 민폐를 붓으로 갚았으니 영광을 남기고 명분도 세웠다. 건물 벽에 세로로 새겨놓았다.
방안에 나란히 서태후와 광서제의 초상화가 걸렸다.조각과 초상화가 아니라면 도무지 황제와 황후가 머물렀던 장소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남루하다.
느닷없던 까닭에 피난 초기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초상화에 문종자희황후(文宗慈禧皇后)와 덕종광서황제(德宗光緒皇帝)라 쓴 글자가 약간 이상하다.
물론 정품이 아니다. 서태후는 왼쪽으로, 광서제는 오른쪽으로 썼다. 누구 장난인지 모르나 둘이 서로 적대하던 사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등 돌리고 하룻밤 보내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계명역의 문창궁
▲계명역의 태산행궁.
역참이 번창했던 시기에 종교 시설이 많았다. 동문에서 서문까지 500m 거리다. 서문까지 걷다 보면 재신묘(財神廟)가 나타난다.서문에 이르러 북쪽으로 100m 정도 간 후 다시 동쪽으로 걷는다. 꼬불꼬불 골목을 따라가면 문창궁(文昌宮)에 이른다.
역참 관리의 자제가 사용하던 책방이었고 해방 이후에 초등학교로 사용한다. 계명산 방향으로 도교의 태산행궁(泰山行宫)이 자리 잡고 있다. 태산 신령인 동악대제(東嶽大帝)의 딸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봉공한다.
‘살아있는 관음보살’이라던 서태후는 허명이었기에 사라졌고, 도교의 원군은 여전히 백성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영녕사 보도사 성황묘 용신묘 괴성루도 있다. 참으로 대형 역참의 명색이다.
◆부자 3대 없다는데 8대까지... 마음까지 따스해지는 토담 보루
▲난천고진 서고보 북문
▲난천고진 서고보 북문 옹성.
장자커우에서 남쪽으로 150㎞가량 떨어진 위현(蔚县)으로 간다. 다시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약 30분을 달리면 난천고진(暖泉古镇)에 이른다. 고진 서쪽에 16세기 명나라 가정제 시대에 축성된 토담 보루인 서고보(西古堡)가 있다.
베이징대학교 출판사 미술 편집책임자인 린성리가 1995년에 보루를 소개한 책을 출판했다. ‘1950년대 베이징고성에서 놀던 때가 생각나 흥분되는 곳’이라는 소감을 남겨 유명해졌다. 2000년에는 장원이 연출하고 주연배우로 출연한 영화 ‘귀신이 온다(鬼子来了)’를 촬영했다.
항일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 악랄한 일본군과 비열한 장제스 군대를 적나라하게 담아낸 흑백 영화다. 이야기 구조가 치밀하고 끝까지 반전이 이어지는 감동적인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북문으로 들어서니 옹성 안에서 반사판 조명까지 비추며 사진을 찍고 있다.
▲난천고진 서고보 북문 옹성 위에 설치된 고루.
▲난천고진 서고보 지도.
성벽 위에 삼관묘(三官廟)가 있다. 천관·지관·수관을 봉공하는 도교 사당이다. 양쪽에 종과 북이 걸린 누각이 설치돼 있다.
아침에 종을, 저녁에 북을 치면 성문을 열고 닫는다.
보루 지도를 보니 거의 정사각형이다. 옹성 위에서 바라보니 남북으로 약 250m에 이르는 정가(正街)가 한눈에 보인다. 중간 즈음 사거리에서 동항과 서항으로 나눠진다.
성벽을 따라 이동하는 갱도항(更道巷)이 있는데 영어로 ‘more way lane’이라 쓰여 있다. 구석구석 길이 많다는 뜻인가 보다.
▲난천고진 서고보의 동가대원
▲난천고진 서고보의 민가 마당.
사거리에서 동항으로 접어드니 동가대원(董家大院)이 보인다. 명나라 말기 마을이 조성될 당시 최고의 상인인 동여취가 거주한 저택이다. 청나라 말기까지도 금융기관인 표호를 운영한 상인 집안이다. 부자 3대를 넘지 못한다고 하는데 무려 8대에 걸쳐 부를 만끽했다.
오랫동안 부를 유지한 상인이 마을에 있어 여전히 주민의 반 이상이 동씨다. 지금은 쇠락해 문도 굳게 닫혀 있어 아쉽다.
대문이 열린 민가로 살짝 들어가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마당에는 옥수수가 쌓여있다. 지금도 주민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다.
심심한 더우푸간에 말리 고추를 얹어 먹는다.
난천고진에는 특별한 먹거리가 있다. 말린 두부인 더우푸간(豆腐干)이다온 동네가 두부 공장이다. 조씨두부방(曹氏豆腐坊)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이 없다. 어묵과 비슷하게 생긴 두부를 쇠솥에 담아 물에 불리고 있다. 몇 분 기다리니 주인이 나타난다.
“콩으로 만든 고기냐?”고 물으니 그저 웃는다.두부 만드는 방법은 비슷할 터, 물에 불린 후 햇볕에 말리면 딱딱하게 굳어진다. 이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한다.
약한 불로 데우며 불린 상태로 두고 주문을 받는다. 두부를 3개 꺼내준다. 하나에 1위안(약 170원)이다.쫄깃쫄깃한 두부가 약간 심심해 매운 고추를 올려 함께 먹었다. 잘근잘근 씹을수록 식감이 살아나는데 그야말로 콩으로 만든 고기라 할만하다.
▲난천고진 서고보의 전지 전시관
▲난천고진 서고보의 전지 공예 작품
남쪽 끝에 전지(剪紙) 전시관이 있다. 가위로 종이를 오려 작품을 만드는 공예다. 종이 오리기 공예를 볼 수 있는 지방이 꽤 많은데 난천고진도 발원지 중 하나다. 서민이 좋아하는 인물이나 경극 주인공, 열두 띠 등 다양한 주제로 만든 전지 공예가 전시돼 있다. 물론 판매장이기도 하다. 창문에 전지를 잔뜩 붙여 놓았는데 붉고 하얀 벽지 때문인지 더 예쁘게 보인다.
▲난천고진 서고보의 지장사
▲서고보 지장전의 두 마리 용.
남문에 2층 규모의 지장사(地藏寺)가 있다. 청나라 순치제 때 동여창이 세웠다. 안으로 들어가 옆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니 가운데가 비어있는 장방형 형태다.
언뜻 봐도 드문 형태로 740㎡ 규모다. 1층과 2층 사면에 전각이 조성돼 있다. 지장전·관음전·보살전·노군묘·대사전(大士殿)·십대염왕전(十大閻王殿) 등으로 모두 74칸에 이른다.
지장전 앞 기둥을 용 두 마리가 휘감고 있다. 발톱을 드러내 구슬을 잡으려는 모습이다. 안에서 보니 어느 용이 구슬을 낚아챌지 금방 보인다.
전각 안을 골고루 들여다보니 신상 대부분이 신비하고 생경하다. 말만 사찰이지 지장보살과 아무 상관이 없다. 도교와 민간신앙이 대우하는 신이 많다.
▲서고보 지장전의 다양한 신상. 불교와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난천고진 서고보 남문 밖에서 본 토담 보루.
전설이 있는데 신령스럽기도 하거니와 재미도 있다. 어느 날 남방에서 10명의 가난뱅이 노인이 더위를 피해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이 “여기에 염왕전(閻王殿)을 세우는 게 좋다”며 동여창에게 설계도 한 장을 건넸다. 몇 년 후 설계도처럼 전각을 완성하고 불공을 드리는 날이 됐다.
노인 10명이 다시 나타났다. 신화는 감동을 데리고 다닌다. 감개무량한 동여창이 노인들에게 사원을 살펴보라고 했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서야 염라대왕의 현신이란 것을 깨닫게 됐다.
1층 입구에 현성암(顯聖庵)이라 새긴 이유다. 현신의 깨우침을 따라 널리 선행을 펼치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상인이 됐다는 후기도 있다. 남문 밖으로 나가니 토담으로 보루를 감싼 모습이 보인다. 벽돌로 쌓은 성벽보다 훨씬 순박한 느낌이다.
난천고진의 북관보.
보루가 2개 더 있어 난천삼보(暖泉三堡)라 한다. 서고보에서 북쪽으로 걸어서 3분 거리에 중소보(中小堡)가 있다. 다시 북쪽으로 3분 거리에 북관보(北官堡)가 있다. 북관보 남쪽 성문 입구에 ‘수화(树花) 발원지’라는 글자가 보인다.
‘타수화(打樹花)’라는 전통 풍습을 말한다. 1,500도 이상의 온도에서 녹인 쇳물을 하늘을 향해 쏟아내면 나무를 때리며 꽃처럼 떨어져 내린다. 전통 불꽃놀이다. 대낮이 아니라 당연히 밤에 진행한다. 500여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민속 행사다.
1년에 한 번이라, 음력 정월 대보름인 원소절에 가야 볼 수 있다. 허베이성 무형문화유산으로 해마다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올 정도로 유명하다. 다시 와서 꼭 보겠다는 다짐은 여전히 공수표다.
▲난천고진 야시장에서 먹은 펀퉈.
버스를 기다리다가 야시장을 찾는다. 오후인데도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모두 펀퉈(粉坨)를 먹는다. 직역하면 그냥 ‘가루 덩어리’로 난천고진만의 특별 간식이다. 완두를 재료로 가루를 내고 묵처럼 만들었다.
묵사발 비슷하다. 한 그릇에 2위안(약 350원)이다. 양이 적지 않아 주식이라 해도 될 듯싶다. 할아버지가 젓가락으로 죽죽 금을 그으니 약간 굵은 면발로 변모한다.
할머니는 고추기름을 슬쩍 뿌린다. 젓가락을 이용하는데 자꾸 끊긴다. 다들 그냥 후루룩 마신다. 옆자리에 젊은 친구는 세 그릇째 먹는다고 자랑이다.
고진 반나절을 보루에서 보냈다. 토담의 구수한 풍경이 담백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분 좋은 기행이다. 다른 지방에서 보기 힘든 두부와 완두 묵까지 먹었으니 발보다 입이 호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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