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성(河北省) 탕산(唐山) 쭌화(遵化)현
도굴로 폐허가 된 서태후.(西太后: 1835~1908) 무덤
▲건륭황제릉(乾隆皇帝陵)
▲1903년 베이징 서쪽에 새로이 지은 여름궁전(이화원)에서 환관들에게 둘러쌓인 서태후. / 북폴리오 제공
▲서태후(西太后) 무덤입구
▲이 무덤들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무덤은...... 서태후(西太后)의 무덤일겁니다...
◆서태후(西太后)....
함풍제(咸豊帝.청나라 제9대 황제.1851-1861)의 후비가 되고 그가 낳은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권력을 잡기 시작합니다. 남편 함풍제(咸豊帝)가 죽은 후 동치제(同治帝.청나라의 제10대 황제.1862-1874)년 광서제(光緖帝.청나라 11대황제 1785-1908)년까지 엄청난 권력을 휘두른 여인입니다. 그러나 죽고 이곳에 묻히고 군벌들은 이곳의 무덤을 도굴합니다.
서태후(西太后).... 어디서 태어났는가???? 출생의 비밀이 많습니다....일반적으로 알려진 서태후는....1835년 산서성 장치현(山西省.長治縣) 서파통의 한 가난한 한족 농민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름은 왕소겸... 4살때 양녀로 팔려가 이름을 송령아로 바꾸고 12세때 다시 시녀로 팔려가 이름을 옥란으로 고쳤다고 합니다.1852년 혜징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합니다.
이때 이미 서구 열강들은 중국을 아편의 도가니에 밀어넣고 침탈을 일삼습니다 궁에 들어간 서태후(西太后)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위해 일년동안 부단히 노력합니다
황제를 모시는 내시들에게 부탁해 황제가 산책할 무렵 서태후(西太后)는 자기 장기중 하나인 노래를 합니다.산보를 하던황제가 은은한 노래를 따라가고. 이쁘장한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하는 모습에.... 뿅~~~ 함풍황제가 갑니다....
나중에 서태후(西太后)는 황태후(皇太后)가 된후 매일 경극을 보았다고 합니다....중국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 평가를 받습니다...1855년 2월 귀인에 책봉되었다가 의빈으로 승격됩니다....
1856년 3월 자희(西太后)는 아들 재순(동치황제)을 출산하여 의비에 봉해지고... 다음에 귀비에 책봉됩니다...서태후(西太后)는 신분이 계속적으로 상승되자 마음속에 정권을 장악하고픈 욕망이 일어납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옵니다(영화. 북경의 55일) 남편 함풍황제(咸豊皇帝)를 따라 승덕(承德.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庄)으로 피신을 합니다. 1861년 8월 함풍제(咸豊帝)는 이곳 피서산장(避暑山庄)에서 병사하고.... 서태후(西太后)의 6살난 아들이 황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이에 함풍황제(咸豊皇帝)의 황후는 황태후(皇太后)로 추대되고 자안태후(慈安皇太后) 동태후(동쪽에서 살았기에)라 하였고.서태후(西太后)는 자희태후(慈禧皇太后) 동태후(東太后)의 반대인 서태후(西太后)라 불립니다
제1태후가 동태후(東太后) 제2태후가 서태후(西太后) 그러나 서태후는 동치제의 생모였습니다 그래서 6살의 동치제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는데 드디어 동치황제가 17살이 되고 결혼하고 두 태후의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결정했지만....동치황제도 지 엄마 성격을 닮았는지 폭주가이고 성격도 날카롭습니다...
서태후(西太后)....항상 정치에만 관심이 있고.무슨일이나 보고 받기를 원하고.아들 동치황제의 정사에 이리저리 끼어들어 황제의 결정을 번복하고 충돌이 잦아들게 됩니다...동태후(東太后)는 조용하기에 동치황제는 차츰 생모인 서태후(西太后)를 멀리하고...동태후(東太后)를 가까이 합니다....
황후를 택할때도 동치황제는 양모인 동태후가 좋아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아들입니다.이에 서태후(西太后)는 동태후(東太后)때문에 자기아들과 관계가 벌어진다고 동태후를 눈에 가시처럼 생각합니다 어느날 동태후(東太后), 서태후(西太后)... 궁중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함풍제의 릉에 제사를지내러 갑니다
제사 지낼때 동태후(東太后), 는 서태후(西太后)더러 한발자욱 뒤에 서라고 합니다...이유는 동태후(東太后), 가 황비(皇妃)였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한 서태후는 동태후를 살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함풍황제가 죽기 전에 동태후에게 준 밀서가 있었습니다...
서태후의 됨됨이를 알고 있는 함풍제는 서태후가 자기 아들이 황제가 되었다하여 동태후를 무시하면 이 밀서의 내용대로 서태후를 죽여버리라는 것입니다....별 밀서를 다 남기고 죽습니다이... 밀서... 서태후(西太后)도 알고 있었습니다이 밀서를 없에야 되는데 하고 서태후(西太后)는 꾀를 생각해 냅니다 한번은 동태후가 감기몸살로 앓아 눕습니다...
동태후의 병이 낳은 후 서태후는 자기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동태후를 만나러 갑니다.. 동태후... 서태후의 팔을 보고... 어찌된 일이냐고 묻습니다... 서태후 왈~~~'언니가 아파 눕자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점쟁이 하는 말.... 약에 사람의 피를 타서 먹이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니 저의 팔의 피를.... '이 말을 듣고 감격한 동태후는 밀서를 당장 불에 태워 버립니다
이 후로 서태후(西太后)의 태도는 180도 바뀌게 됩니다.... 불쌍한 동태후...쯔쯔쯧~~~~동치황제.... 18세가 되어 결혼을 하나....서태후의 등살에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밤마다 몰래 변복을 하고 기생집을 들락달락 거리다.1874년 12월 매독인지 천연두인지 하여간 병세가 악화되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이 죽자 서태후(西太后)는 수렴청정을 위하여 남편을 죽였다는 죄명을 씌워 동치황제의 황후인 며느리를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4살밖에 안된 여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삼고 광서황제로 옹립하고 수렴청정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 광서황제(光緖皇帝)는 서태후의 여동생과 서태후의 시동생이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청왕조의 부계세습이 끝장나게 되고. 1881년 동태후(東太后)도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 이 동태후(東太后)의 죽음은 아직까지 정확하지 않습니다...병으로 죽었다는 설....서태후(西太后)의 강요로 자살했다는 설....서태후(西太后)가 독살했다는 설....
서태후(西太后)의 일인 독재가 계속되다가 광서황제(光緖皇帝)가 19살이 되자.군정 실권을 잡기위해 개혁에 나섭니다 1898년 이를 무술변법이라고 하는데....103일만에 서태후에 의하여 무술변법을 추진한 개혁파들은 살해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게 되고 광서황제(光緖皇帝)는 서태후(西太后)에 의해서 가택연금 상태가 됩니다
광서황제가 갇혀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고 합니다 10년간이나 갇혀 살았습니다.1900년 8월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공합니다...서태후(西太后)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피신하였다가 1901년 9월 (신축조약)을 체결합니다...
1902년 1월 서태후는 광서황제(光緖皇帝)를 데리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다시 중남해 영대에 갇어 버립니다.그러나 영원한 인생은 없는 법....1908년 10월 13일 서태후는 74세의 생일을 기하여 큰 연회를 베풉니다... 여러 날 동안 과식하여 5일째 되던 날 이질이 발병하게 됩니다 아편을 평소보다 배로 복용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서태후(西太后)가 죽기 하루전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光緖帝)가 죽습니다.불쌍한 광서황제(光緖皇帝) 평생 서태후(西太后)의 그늘아래 제대로 자기 뜻대로 정치하면 못해보고 서태후(西太后)보다 하루 앞서 세상을 등지게됩니다....
1908년 11월 15일....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던 서태후(西太后).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傅儀)를 후계자로 세운 다음날.점심식사를 받고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의자에서 쓰러지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서 대신들에게 말합니다....
이 후로 아녀자가 정사에 간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반드시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각별히 대비해야 하오. 특히 내시가 대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명나라 말기에 내시가 전횡하였던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할것이오.' 라는 말을 남기고....73년의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서태후(西太后) 살아생전 권력을 이용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는데...한끼 식사의 주식이 60가지 였다고 합니다..... 점심때는 빵 종류만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 였다고 하는데.... 쩝... 거... 서태후의 밥상한번 보고 싶네요.....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하루 식사비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고...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합니다....옷만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입는 사치꾼이였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일화는....자기의 권위를 위하여... 이화원에 전화 설치를 동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전화로 이야기하면....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을 긇고 전화를 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궁녀들이나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지 무서워 하였다고 합니다...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는데.... 머리카락이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났다고 합니다...그래서 머리좋은 내시가 있었는데....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줄때는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안으로 떨어지기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한 내시의 일기에.....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 하고....자신은 매일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었다고 합니다...
애기 엄마 두명이 목욕을 하고 몸에 붉은 천을 감고 젖만 내놓고 다 감싸고 서태후는 침대에 눕고 젖먹이는 애기 엄마는 무릎을 끓고 젖을 먹였다고 전해집니다....서태후는 중국 최초로 철로를 깔아 중남해까지 기차가 다니게 하고....기차타고 점심을 먹으로 가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48년간이나 이런 호사스런 생활과.... 엄청난 권력을 누렸지만....황제도 아니요...황후도 아니었기에.....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정문.... 오문의 중간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위폐가 있는 제단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중간의 조각입니다.이를 丹陛石(단폐석) 이라고 하는데...보통 용이 중심이 되어 있는데...이 서태후의 단폐석은 봉황이 용의 위에 조각이 되어 있습니다....
서태후가 봉황...황제가 용...봉황이 용의 위에 있다 !!!!! 한마디로 황제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서태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지요!!!!!
1928년 중국의 군벌이었던 손전영(孫殿英)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나라 서태후(1835~1908)의 묘를 파헤치고 있었다.
직접 현장으로 내려온 그는 서태후의 관 근처에 누워있는 병사 하나를 보게 된다.
관을 열 때 시신을 보고 기절한 병사였다.이에 손전영은 욕을 하며 쓰러진 병사의 배를 걷어찼고, 그 병사의 몸은 서태후의 시신 위로 쓰러졌다.
이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막대기처럼 굳은 시체가 충격에 반동하면서 강한 쪽빛이 자희(서태후)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이 빛은 서북쪽 귀퉁이에서 동남쪽 귀퉁이의 벽까지 닿고, 거의 30걸음 밖에 있는 병사들의 머리에까지 비쳤다."
이 빛은 더위를 막아 몸을 서늘하게 해주고, 죽은 사람들에게 물리면 시신이 절대 썩지 않는다고 알려진 구슬, `야명주`의 빛이었다. 그리고 이 구슬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손전영은 부하에게 구슬을 입에서 꺼낼 것을 지시했지만, 막상 서태후 입속으로 손가락을 넣자 구슬이 시신의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결국 일당은 구슬을 잡기 위해 서태후의 시신을 칼로 심하게 욕보였다. 손전영은 `야명주`라는 보물을 얻었지만 중국 문화사에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남겨지는 순간이었다.
▲서태후의 능 앞에 다 왔습니다
청나라 말기 40여 년을 섭정으로 권력을 휘두른 자희태후(서태후: 1835~1908)의 무덤도 온전하지 못했다.태후는 죽어서 화려한 부장품과 함께 지하궁에 모셔졌다하지만, 중국은 곧 군벌의 시대가 되었고, 이 가운데 한 군벌의 부장이던 손전영(孫殿英)이라는 자가 장개석의 국민당 부대에 귀순해 들어갔다.
그는 군량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나라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 즐비한 동릉(황제와 황후의 능묘군)에 눈독을 들인다. 이때에 이르러 동릉은 이미 청황실의 보호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군벌과 지역의 도둑떼인 토비(土匪)들이 주변 나무와 전각을 뜯어가고, 지하궁에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손전영은 “어차피 우리가 손을 쓰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가져간다”며 능을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능원지구 전체에 계엄령을 내려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때부터 그의 본색이 드러났다.
손전영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서태후의 무덤이었다. 서태후 무덤에 부장된 진귀한 보물은 손전영의 손에 들어가고, 서태후의 시신은 보물 찾기하는 병사들에게 옷이 벗겨진 채 이리저리 능욕당했다.
다른 청나라 황제의 무덤도 손전영의 지시를 받은 부대에게 이런 식으로 도굴당했다. 그가 사흘 밤낮으로 도굴한 동릉의 보물은 짐수레 30대 분량이라고 한다.
도굴에 성공한 손전영이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자, 이번에는 외곽에 숨어 있던 토비와 다른 반대 세력의 부대들이 소문을 듣고 동릉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이들이 다시 한번 지하궁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바구니와 마대자루를 들고 벌떼처럼 몰려가 깨진 그릇과 흩어진 보석 조각들을 긁어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청황실과 유신들은 비통함에 잠겼다.
마지막 황제 부의는 하얀 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매일 세 번씩 종실과 유신들을 이끌고 대상(大喪)을 당한 의식을 치뤘다
서태후...
베이징 자금성이나 이화원에 가면 맨날 듣는 소리가...서태후...서태후...근데 정작 서태후의 무덤속에는 이렇게 한적합니다...
서태후 자신은... 살아생전이 꿈이요..... 꿈꾸는 죽음이 현재의 현실이 아닌지????
▲서태후와 손전영 부대의 도굴도./ 이미지: 봉황망
▲도굴된 서태후의 무덤과 남아 있는 관곽(棺椁). / 이미지: 중국 중수닷컴
'■동북 아시아****국가들 > ⊙중국****화북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베이성(河北省)ㅡ만리장성시작점ㅡ천하제일문 산하이관(山海關) (0) | 2022.10.10 |
---|---|
허베이성(河北省)ㅡ청나라 황제들의 무덤을 떠나며 (0) | 2022.09.14 |
허베이성(河北省)ㅡ淸나라 황제의 무덤을 찾아ㅡ황제들의 지하무덤 (0) | 2022.09.14 |
허베이성(河北省)ㅡ장자커우(張家口)ㅡ실세 황후와 허수아비 황제의 숨 막히는 하룻밤 (0) | 2022.09.14 |
허베이성(河北省)ㅡ청더(承德)ㅡ청나라 황제들의 피서산장(여름궁전) (0) | 2022.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