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문연 극장, 흑백TV 늘어섰던 소리사…여기가 찐 ‘레트로 마을’

 

◆지도에 없는 지명… 느릅내

 

경북 청도의 남쪽에 ‘유천(楡川)’이 있다. 유천은 지명(地名)이지만, 지도에는 안 나온다. 공식 행정

지명은 청도읍 ‘내호리’와 ‘유호리’다. 그런데도 일대의 가게들은 죄다 ‘유천’이란 상호를 이마에

달고 있다.

 

유천극장, 유천주막, 유천우체국, 유천정미소, 유천농업사, 유천식육식당, 유천국수집…. 지도에는

없는 지명이, 어찌 된 일인지 가게 간판과 입말로 성하게 살아남아 있다.

 

유천은 조선 시대 동창천과 청도천이 T자로 만나는 곳에 있었다는 ‘유천역(楡川驛)’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유천역은 1905년 놓인 경부선 철도의 기차역이자 근대 영남대로의 길목이기도 하지만, 열차가

놓이기 전에도 여기는 유천역이었다.

 

조선 시대 숙박과 공문전달 등을 담당하던 교통 통신기관인 역원(驛院)의 그 ‘역’ 말이다. 느릅

나무가 우거진 천변에 있다고 해서 ‘느릅나무 유(楡)’ 자에 ‘내 천(川)’ 자를 써서 역 이름을

지었다. 유천. 우리 말로 하면 ‘느릅내’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죽바위. 윗부분이 운동장처럼 평평하다. 기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지형이 독특하다.

 

조선 시대 유천역이 사라지고 없는 거야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일. 기차역 유천역도 2000년

경부선 철로 이설로 2.5㎞ 떨어진 밀양 쪽으로 옮겨져 ‘상동역’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유천은 ‘아무 데도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지명은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유천에 가서 보면 대번에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변하지 않아서’다.

 

‘유천’이란 예전 지명의 상호를 걸고 있는 가게들이 늘어선 내호리와 유호리 골목에는 ‘세상의

속도에 따라붙으려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낡은 간판만 남기고 문 닫은 유천의 가게들은

‘어느 날, 산소호흡기를 떼고 고요하게 맞이한 죽음’ 같은 모습이었다.

 

상권이 무너지고, 시장이 빠져나가고, 기차역이 떠나면서 이미 승부는 갈린 셈. 허물고 다시

지을 엄두도, 살아남으려는 의지도, 문 닫고 업종을 전환할 마음도 내지 못했던 가게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작동이 중단된 기계처럼 어쩌지 못하고 그저 형태로만 남겨진 것이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다. 예전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과 가게를 둘러보다 떠올린

건 ‘포르말린을 넣어 보존처리한 곤충채집 표본’이었다.

 

‘진공의 공간 속에서 정물처럼 멈춰버린 벽걸이 시계’를 생각하기도 했다. 하찮다거나 초라한

신세라는 뜻이 아니다.

 

곤충표본이 ‘진짜 곤충’으로 만든 것이듯, 이곳의 오래전 풍경도 ‘진짜’를 방부 처리해 보존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천이 보여주는 ‘레트로’가 살아있거나 작동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본 뼈대와 틀만큼은 진짜라는 얘기다.

▲풍각장날 옷가게에 걸어놓은 옷.

 

◆정미소와 양조장, 그리고 한약방

 

유천은 40∼50년 전쯤에서 시간이 멈춰 선 것 같은 곳이다. 한때 장터였던 반듯한 마을 중심 골목

양쪽으로 줄 맞춰 늘어선 가게에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함석지붕에 흙벽을 두른 영신정미소, 돌로 지은 독특한 건물에 들어선 구생당한약방, 사료판매소

간판을 걸고 있는 박공지붕의 옛 양조장, 독학으로 공부해 익힌 기술로 흑백TV를 고쳐줬다는

중앙소리사. 단조·밀링·판금·베어링 등을 진열장에 적어놓은 자그마한 철공소….

 

놀랐던 건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었다는 영신정미소가 아직 나락과 등겨 먼지를 날리며 도정기계를

돌리고 있는 현역이라는 사실이었다.

 

유천의 오래된 가게는 ‘그냥 구경거리’가 아니다. 어디를 열고 들어가든지 누군가가 일생을 바친

노고가 느껴지는 듯해서 때로 뭉클한 감동이 느껴진다.

 

가게마다 잠겨있는 시간의 지층이 다 다르다. 영신정미소에는 90년 시간이 깃들어 있고, 옛 유천

소주 양조장은 70년쯤, 중앙소리사는 50년쯤의 시간이 있다.

 

2000년에 대구서 이곳으로 옮겨와 개업했다는 ‘새천년이용소’가 유천에서는 가장 젊은 막내뻘인데,

그래도 자리를 지켜온 세월이 사반세기가 넘었다. 이발사 최흥식(71)이 이용소를 내면서 함께

샀다는 ‘100년은 족히 됐을 것’이라던 살림집 안방을 보여줬다. 벽지 대신 신문지로 도배한 방이다.

 

세월을 훈장처럼, 혹은 흉터처럼 달고 있는 가게들 사이에는 지금은 없어진 것들과 그 시절 삶의

풍경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이불을 나눠 덮고서 군고구마를 먹으며 브라운관TV를 보는 대가족의 모습도 있고, 장날 뻥튀기

장수의 ‘뻥이요’ 하는 순간도 그려져 있다.

 

소달구지를 타고 가며 활짝 웃는 아이들과 쌀가마니를 머리에 이고 나르는 아주머니의 노동을

그린 그림도 담벼락에 생생하다.

 

오일장이 섰던 골목을 따라서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양과점, 양장점,

정육점, 대폿집, 사진관 그림도 그려졌다. 유천에 남아있는 ‘진짜 레트로’를 문화공간으로

다듬은 ‘유천문화마을’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새마을테마파크에 재현해놓은 1970년대 대폿집 모습.

 

늙은 극장이 옛 모습 그대로 남은 이유

 

유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유천극장이다. 1967년 문을 연 극장은 청도읍의 청도극장이나

중앙극장과 경쟁했을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

 

한창때는 멀리 청도 매전면 동곡에서도, 밀양에서도 ‘극장구경’을 하러 밀려들었다. 극장 위치

가 장터 한쪽 끝이어서 장날이면 관객들로 극장이 터져나갈 정도였단다.

 

극장에서는 영화를 주로 상영했지만 유랑극단 쇼도 보여줬고, 간혹 약장수가 극장을 빌려 공연

을 하며 약을 파는 일도 있었다.

 

유천극장은 TV 보급으로 관객이 서서히 줄면서 1990년대에 문을 닫았다. 문 닫은 극장은 방치

되다가 화재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8년 극장 안에서 놀던 아이들이 불을 내는 바람에 지붕과 내부 일부가 타버렸던 것. 오래전에

문을 닫은 데다 불까지 났지만 유천극장은 반세기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남아 있다.

 

극장이 원형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문 닫은 극장 건물이나 부지의 ‘쓸모’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오래된 극장은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안쓰러웠다. 문 닫은 극장이 온전하다는 건 그만큼 쇠퇴한 곳이라는 걸 말해주는 징표이기

때문이었다.

 

근대건축물과 오래된 골목 풍경을 보여주는 유천문화마을의 중심은 단연 극장이다. 문화마을을

조성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영화관 간판을 거는 것이었다니까. 간판에는 김지미, 남진 주연의

1968년영화 ‘별아 내 가슴에’의 장면과 신성일, 박노식 주연의 1969년 영화 ‘상해 임시정부’

장면을 그렸다.

 

간판을 걸어놓은 옛 극장 모습을 어찌나 감쪽같이 재현해 놓았던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사기

로 상영하는, 자주 필름이 끊기는 오래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유천문화마을의 벽화. 주택가 담에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영도 시인의 얼굴을 그렸다.

 

◆시인의 사랑과 레트로 정서

 

유천에는 또 오누이 시인 이호우·이영도 시인이 태어나 자란 생가가 있다. 시인은 모른다 해도 중년

이상의 나이라면 교과서에 실렸던 이호우 시인의 시조 ‘살구꽃 핀 마을’을 모를 수는 없겠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여동생 이영도는 작품보다는 청마 유치환이 짝사랑해 수천 통의 편지를 보냈던 마음속의 연인으로

유명하다. 유부남이었던 유치환과, 남편과 사별한 이영도와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었다.

 

사회 분위기도 그랬고, 하물며 둘은 교사였다. 유치환이 마음속의 연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편지

밖에 없었다. 편지를 부치는 장면이 등장하는 유치환의 시가 있다.

시에 등장하는 편지의 수신인은 당연히 이영도였을 터.

 

“…/ 사랑하는 것은 / 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

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유치환 시 ‘행복’ 부분)

 

오누이 시인의 생가 근처 기와집 벽에 이 시와 함께 두 사람의 얼굴과 우체통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유천에서 경험하는 이른바 ‘레트로 감성’은 문 닫은 극장이나 누추한 골목, 문 닫은 가게에서만

있는 건 아니다.

 

우체국에서 부친 연애편지, 마음속에 꾹꾹 담아야 했던 연정이야말로 디지털 세상에서 레트로 감성

일깨우는 정서적 풍경이다. 안타깝고 절절한 사랑의 서사는, 이제는 절대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

사랑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추억하게 한다.

 

유천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주민의 진심 어린 선의(善意)와 호의적인 태도다. 카메라를 들고 골목을

찍고 있는데, 주민 네댓 명이 다가와 안내를 자청하더니 앞장서서 ‘이곳도 찍으라, 저곳도 찍으라’며

훈수를 뒀다.

 

텅 비다시피 했던 마을에 관광객이 찾아오는 게 반갑고 한편으론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가게의 내력

거기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던 주민들이 자신들의 추억이 묻은 오래된 가게며 공간을 짐짓

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청도읍 신도리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공원의 새마을테마파크 전시관.

 

 ◆새마을운동 시절의 유물

 

유천에서 5㎞쯤 떨어진 청도읍 신도리에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이 있다. 새마을운동을

대하는 태도나 평가는 정권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칭송하는 쪽이든, 비판하는 쪽이든 새마을운동 자체가 아니라 통치자 쪽에게 조명을 맞추고 있어

서다.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던 가난을 극복하고자 협동과 울력으로 펼쳤던 잘살기 운동의 노력

성취를 그것 그대로 평가하기보다는, ‘통치자의 결단’을 앞세워 칭송하거나 반대로 ‘정치적

동원수단’이었다며 폄훼한다는 얘기다.

 

청도가 신도리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자처하는 건 1969년 8월 경남지역 수해복구 현장시찰

때 벌어진 작은 사건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 전용열차 편으로 경남을 향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신도1리 앞을 지나다가 주민들이 제방복구와 지붕과 담장을 개량하는 모습을 목격하곤 기차를

세웠다.

 

주민들로부터 ‘자발적으로 협동해 좋은 마을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대통령은, 이듬

해인 1970년 4월 열린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신도 1리를 예로 들어 “농촌 자조 노력의 진작 방안을

연구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게 바로 새마을운동의 태동이었다.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공원에는 두 가지 시설이 있다. 하나는 새마을운동의 변천을 기록과 사진

이용해 전시한 기념관이고, 다른 하나는 새마을운동 당시 농촌 모습을 세트장과 소품 등으로

재현해 놓은 ‘새마을테마파크’다.

 

유천마을의 레트로 공간과 짝을 이루는 곳은 마을 뒤 언덕을 끼고 초가집, 슬레이트집, 기와집, 구판장,

왕대폿집, 식당 등을 촬영세트장처럼 지어놓은 새마을테마파크다.

 

세트장은 허름하고 띄엄띄엄 들어선 관람공간이 비탈에 있어 불편한 데다 동선도 제대로 정돈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쯤을 세트장처럼 재현해놓은 학교 교실이며 그 시절의 대폿집·구판장 등을

둘러보는재미가 제법이다. 특히 성냥통과 책가방, 소주병, 영화포스터 등 오래된 소품들이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청도 풍각장 노점에서 풀빵을 굽는 모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너 곳이 있었다는데 풍각장의

풀빵집은 딱 한 곳만 남았다.

 

◆추억으로 멈춰 서다… 풍각장 국밥집

 

청도에는 과거의 경관이 남아있거나 어제의 이야기가 스며있는 곳들이 참 많다. 애써 찾아가야

할 만큼 이름난 명소는 아니지만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멈춰 서게 하는 장소가 많다는 얘기다.

 

청도에는 풍각면이 있다. 청도 서부지역의 교통과 물산이 모이던 곳이다. 이웃한 각북면은

‘풍각의 북쪽’이라 붙여진 지명. 각남면은 ‘풍각의 남쪽’이란 뜻의 지명이다. 인접한 면 단위

지명의 방위를 정하는 ‘기준점’이 됐을 정도니까, 풍각면의 과거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풍각의 중심은 5일마다 서는 풍각장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위세가 눈에 띄게 줄어

데다, 오전에만 반짝 붐비다 손님이 빠져나가 금세 헐거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2·7일 장날이면

군것질거리를 사 먹으며 장 구경을 할 만큼은 된다.

▲풍각장 부근의 소머리국밥집에서 국밥을 토렴하는 모습.

 

풍각장의 명물은 소머리국밥을 푸짐하게 내는 노포(老鋪)다. ‘어디’라고 딱 짚기 어려운

상호가 불확실해서다.

 

가게 현수막과 유리창에는 ‘맛있는 소머리국밥’이라고 붙였는데, 가게 이름인지 아니면 그냥

‘소머리국밥이 맛있다’는 진술인지가 불분명하다.

 

네이버 지도에 나오는 식당 상호는 ‘풍각소머리국밥’. “이게 가게 이름이냐”고 물었더니, 대답

‘그렇다’도 아니고 ‘아니다’도 아니다. ‘그냥 풍각장의 소머리국밥집’이란다.

 

이 식당에서 국밥을 말아내기 시작한 지는 70년이 넘는다. 이 정도 내력이면 자랑도 할법한데

도무지 그런 게 없다. 특별한 고집이나 전통 같은 것도 없다.

 

우선 식당부터가 샌드위치 패널의 간이건물이다. 국밥을 담아내는 뚝배기도 묵직한 오지그릇이

아니라 싸구려 멜라민 재질이다.

 

메뉴는 딱 두 개. 국밥 아니면 수육. 주문도 받기 전에 뚝배기 아래 밥을 깔고 그 위에 고기를 가득

담아 열 번 가까이 토렴해서 국밥을 낸다.

 

국밥집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간이건물의 허름한 분위기도, 인심 좋게 넣어주는

고기도, 여러 번 토렴해 밥알에 스민 국밥 맛도 여전하다.

 

국밥 가격은 7000원. 가격은 올랐지만 고깃국치고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국밥집뿐 아니라 풍각면에 이제 세 곳만 남았다는 중국집도, 칼칼한 맛의 추어탕 집도 시간의

깊이만 조금 다를 뿐,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매전면 덕산리의 폐업한 방직공장 자리에 문을 연 빈티지 카페 ‘덕산방직’에 전시한 포니 자동차.

 

◆포니승용차와 고향에 심은 벚나무

 

매전면 덕산리에는 1990년대 방직공장을 개조해 만든 빈티지 카페 ‘덕산방직’이 있다. 향토역사

문화 단체인 대구경북근현대사연구소 강철민 소장이 문 닫은 방직공장을 인수해 그동안 수집한

근현대의 다양한 물품을 전시하는 ‘기억의 공간’ 프로젝트로 시작한 카페 겸복합문화공간이다.

 

공장은 리모델링을 거쳐 절반은 카페 공간으로, 나머지 절반은 레트로 오락실, 만화방, 문방구,

비디오가게 등을 재현한 체험공간으로 나눠 조성했다.

 

체험공간에는 카세트테이프와 통성냥, 분유통, 공중전화기 등 소품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

하고 많다. 브라운관TV와 짐자전거, 포니 승용차, 포니 픽업트럭 등도 체험공간에 들여놓았다.

오래전의 추억에 젖어 과거를 되새김할 수 있는 곳이라 레트로 테마의 청도 여행 코스에

이어붙이기 딱 좋은 곳이다.

 

마침 벚꽃이 한창이라서 청도의 꽃구경 얘기를 덧붙인다. 풍각장에서 멀지 않은 각북면에 터널을

이룬 벚꽃길이 있다.

 

각북면 우회도로(각북면 우산∼이서면 가금) 2.4㎞ 구간이 ‘각북벚꽃길’이다. 지난주에는 벚꽃

길에 꽃이 없었는데 며칠 만에 연분홍 벚꽃이 활짝 피어 만개했다.

 

각북벚꽃길에는 사연이 있다. 그 얘기가 각북면에서 벚꽃길 입구에 세운 ‘각북벚꽃길 유래비’

에 새겨져 있다.

 

사연의 주인공은 각북면 명대리 출신의 이창상(73) 유신산업 창업주. 그는 열일곱 나이에

어머니가 쥐여준 삶은 달걀 5개를 들고 상경해 공장 일을 하면서 모진 고생 끝에 가구

회사를 창업해 지금의 규모로 키웠다.

 

사업이 안정궤도에 오른 1999년 이 씨는 ‘성공해 돌아와서 고향을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했다.

 

어머니의 유훈을 지키고자 그는 명대리 마을 앞 청도천 둑에 3년생 벚나무 묘목 630그루를

사비로 사서 심기 시작했다. 이 씨가 벚나무를 심자 자연스럽게 마을 주민들도 합세하면서

지금처럼 울창한 벚나무 터널이 만들어졌다.

 

청도에는 이른바 ‘무작정 상경’ 시대에 타지에서 성공한 이들의 고향 사랑 흔적이 유난히 많다.

마을회관마다 지역 출신 출향 인사의 경제적 지원을 기리는 송덕비 하나쯤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은 고된 노동을, 고향을 지켜온 이들은 지독한 가난을 견뎌야 했던

시절 얘기다. 너나없이 모두 다 어려웠던 시절을 위로하듯 각북벚꽃길의 벚꽃은 올해도

화사하게 피어났다.

 

◆죽바위▼

▲청도에 있지만 청도 사람도 잘 모르는 곳이 있다. 각남면 녹명리 구만마을의 ‘죽바위’다. 테이블

형상의 거대한 바위는 평평하지만, 바위 끝은 수직 직벽의 벼랑이라 오금이 저린다.

 

이곳을 왜 ‘죽바위’라 불렀을까. 첫 번째 전설은 이곳에 있었던 고대국가가 신라로부터 침공을

당하자 바위에 숨어 죽(粥)을 먹으며 견뎠다는 이야기.

 

두 번째는 바위 형상이 죽그릇을 빼닮아 불렀다는 설. 세 번째는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 바위에

기운이 스민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며 ‘죽(粥)바위’란 지명 대신 ‘죽(竹)바위’로 개명했다는 얘기다.

데살로니가 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Thessaloniki)

▲하기아 소피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를 기반으로 서기 8세기에

세워졌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는 도시 내 15개의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성스러운 지혜)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그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입니다.

 

이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테살로니키의 여러 기념물 중 하나입니다. 3세기

부터 현재의 하기아 소피아 위치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8세기에 현재의 건물이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를 기반으로 세워졌

습니다.

 

1205년 제4차 십자군 원정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하기아 소피아는 테살로니키 대성당으로 개조

었으며, 1246년 도시가 비잔틴 제국에 반환된 후에도 그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1430년 3월 29일 오스만 술탄 무라드 2세가 테살로니키를 점령한 후, 이 교회는 모스크로 개조

었습니다.1912년 테살로니키 해방 후 교회로 재개조되었습니다.

 

평면은 돔형 그리스 십자가 바실리카 형태입니다. 이스탄불의 굴(Gül)과 칼렌데르하네 모스크,

니케아의 파괴된 승천 교회(Church of the Dormition)와 함께 비잔틴 중기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 예시 중 하나이다.

 

성상파괴 시대에는 교회의 후진이 평범한 금색 모자이크와 단 하나의 큰 십자가만 장식되었는데,

이는 콘스탄티노플의 아이레네 성당과 니케아의 성모승천 교회와 유사합니다.

 

십자가는 787-797년 성모 마리아(신을 전하는 자, 마리아)의 이미지로 대체되었으며, 이는 성모

기사단의 승리 이후였습니다.

 

돔 안의 모자이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나타내며, 사도행전 1장 11절의 "갈릴리 사람

들이여, 왜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는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돔은 열두 사도, 성모 마리아, 그리고 두 천사의 형상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1917년 테살로니키

대화재 이후 내부 장식의 대부분이 회반죽으로 덮였습니다. 돔은 1980년에야 복원되었습니다.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 있는 비잔틴 성당으로 ‘성스러운 지혜’의 뜻이다건축은 8세기

초의 것으로 봄원개십자형식(⇒그리스 십자식 성당)의 초기작의 하나로서 원상을 잘 보존

하고 있다

 

아프시스의 천정은 최초로 인상 표현을 꺼린 성상논쟁(이코노클래즘시기에 대십자가 만을

나타냈으나 논쟁종료 후에는 오늘날에 보이는 성모자상으로 대치되었다

 

또한 돔도 같이 9세기의 『성천』도로 장식되고 있다그 양식은 레온 6세(Leon VI, Philosophos, 

재위 886~912) 때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나르텍스 장식에

가까우며 마케도니아 조 초기회화를 아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아기아스 소피아스 광장 에서 본 전망 

▲아기아스 소피아스 광장 에서 본 뒤쪽 전망 

▲성당 입구.

▲하기아 소피아 내부 전경

▲인상적인 모자이크가 있는 돔 (9세기)

▲지성소 내부.

▲아치의 모자이크 성 모자(11세기)

▲교회 내부 모자이크 화.

데살로니가 성 디미트리우스 성당(Church of Hagios Demetrios)

▲하기오스 데메트리오스 교회는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로, 4세기에 지어졌으며,

그리스에서 가장 큰 대성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고기독교 유적 중 하나입니다.

 

데살로니카와 베레아에서 바울과 관련되는 동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그러나 데살로니카에서

찾아볼 만한 곳 중에 하나가 이 지역 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디미트리우스 교회일 것이다

 

성 디미트리우스는 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 치세 때 아니면 306년 막시미아누스 치세 때 헝가리

시르미움에서 순교한 분인데어쩌다 데살로니카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5세기에 지은 성당은 7세기에 재건되었으나 이것도 1917년 화재로 타버리고 1948년 지금의 성당

이 재건되었다

 

이 바실리카풍의 교회는 크게 로마식 집회장소용 홀과 세례 욕조가 있는 유적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특히 세례터는 성 디미트리우스가 갇혀 있다가 순교했던 장소 위에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그의 제자 네스토가 이교도 리아에우스와 싸웠다가 패전했던 AD 303년에 이 곳에 묻혔

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성전은 밀란의 종교적 관용에 관한 포고가 있었던 313년후에 작은 기도처소로 처음에는 설립

되었었다

 

백년이 지난후에 레온티우스일라리쿰의 주교 때에 큰 세 개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성전으로 같은

장소에 더 크게 지어지게 된다이 당시 성전 제단 밑으로 성 디미트리우스가 순교했던 장소와

동일한 세례욕조가 있었다.

▲키예프 황금지붕 수도원에서 제작된 12세기 성 데메트리오스 모자이크

▲성 데메트리오스 ▼

▲데메트리오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

▲살로니카의 성 데메트리우스(18세기). 월터스 미술관 소장품.

▲하기오스 데메트리오스 교회

 

교회는 나르텍스와 십자형교회의 뒷자석이 높은 바실리카풍으로 다섯 개의 측랑이 있다우리는

교회가 한 개의 안뜰만 갖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르텍스가는 입구는 안마당 안있는 두 개의 문으로 통과하게 되어있다두 개문을 통과하여

나르텍스로 들어가면 교회의 서쪽벽을 따라 북과 남으로 가는 통로가 나온다

 

나르텍스는 교회보다 좁고 짧은 폭으로 되어있다왜냐하면 북쪽구역이 계단으로 할애되었기

때문이다

 

네줄로 된 열주들은 하나의 중심을 두고 회중석사이로 양쪽에 두 개씩 나있는 다섯 개의 통로를

나누어주고 있다그 원주기둥들은 바실리카고유양식을 기초하여 다양한 변화를 주어 장식

되었다

 

교회측면 넘어의 교차랑 설계는 두 개의 날개처럼 되어있는 모양이다중앙의 지성소로 측면은

날개로 구성되어 있다지성소는 크고 밝은 다섯 개 창문을 통해 밝게 비추어주고묘지와는 높은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다

 

이것의 중앙에는 성찬대가 있고 십자가 모양으로 움푹팬 바로 아래엔카니온석관 형태의

대리석 궤로 이루어진다건조된 혈액의 작은 유리병이 이 대리석 궤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교회는 독창적으로 지붕을 가로질러 교차하는 빔이 대들보로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회중석

위를 덮고 있는 지붕은 다른 지붕보다 더 높으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그 중심부 구역 또한 십자형의 날개로 일정한 간격을 지붕과 유지하고 있다대리석 장식이

디미트리우스교회 전체를 형성하며 방사형창이 있다

 

그리고 원주들과 제단감실등의 사이를 석판들과 대리석판으로 덮어놓았다독특한 점은

회중석과 나르텍스부분에 대리석장식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5세기의 바실리카 성전의 형태에 속하는 모습으로 동쪽 벽에는 스카이로스 석판

장식이 북쪽에는 트라이빌론 장식이 되어있으며 각각 그들의 틈에 한 줄로 기도손모양

장식이되어있다.

 

 이 교회의 주요한 특징은 초기로마건축양식과 5세기 바실리카풍 양식을 한쌍으로 잘 어울

도록 배열하였다는 것이다.

▲교회 밖 세례대.

▲아치의 어두운 배경이 붙은 본당 내부.

 

교회 본당 회중석의 북서쪽 모퉁이문설주와 열주의 첫 번째 기둥사이이탈리아에서

고안 되어진 듯한 기념묘가 존재한다

 

이것은 1481년 교회에 사적으로 안치하도록 허가를 받은 부요한 데살로니가 귀족 누가

스판티누스의 것이다이 교회에 유명한것은 모자이크이다

 

그러나 작은 북쪽 열주에 서쪽면을 장식했던 모든 모자이크들이 1917년 화재로 소실

되었다

 

교회에 남아 있는 무덤에서는 단지11개의 모자이크가 나왔고 5세기-9세기의 연대에 속한다

그들은 노아와 두 개의 지성소 문설주홀과 나뉜 동쪽 파샤드의 벽에서 붙여진 것이다

 

남쪽 통로 내부의 서쪽 벽의 상단에 성 데메트리우스가 기도하는 형태를 낮은 받침대 위에

초상화를 새겨져 있다그의 손바닥은 금 모자이크 세공으로 덮여있고 화가가 오래된

독실한성인의 아이콘을 모방하는 것임을 표시하고 있다

 

오른쪽 여자는 아이를 그에게 건네고 있으며 두 번째 아이의 발이 왼쪽에 보이는 동안무대

문 한쌍과 성 데메트리우스에게 아이들의 헌신을 표현한다이것은 5세기의 것이다.

 

 북쪽 통로에 유사하게 위치해 있는 다른 모자이크는 성 데메트리우스를 향하여 트럼펫을 구부

리고 있는 천사의 초상화로 이 초상화는 원래대로 남아 있지 않다.

 

 누가 스파누트스의 무덤 곁에 본당 회중석의 서쪽 벽의 다른 모자이크는 7세기의 것으로 도시

벽 흉벽 앞 두 목사 사이에 서있는 성 데메트리우스를 보여준다

 

북면 문설주의 성 데메트리우스는 도시 벽의 정면인 감독과 주교 사이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

되어지고 있다그림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여기 당신은 미래한 사람들의 흐름과 남겨진 도시의 난잡한 섞임을 막은 그 유명한 집의 창시자

데메트리우스를 보고 있다

 

이것은 7세기 초반에 노예의 입장이던 데살로니가의 세 번째 포위기간을 언급한 것이다동쪽

면 문지방의 모자이크 성 테메트리우스와 성인이 그의 오른팔로 끌어안은 두드러진 얼굴의

특징을 지닌 데메트리우스를 보여준다.

 

 그 그림 밑에 한 구절이 쓰여 있다. (그리스도의 순교자도시의 친구시민과 객을 돌보는 자는

복이 있다.) 이 모자이크에서 초상화를 그렸던 성직자는 629-34년에 붕괴된 이후 교회의

재건축의 의무를 맡은 집사이다

 

서편 문설주의 성 세르기우스는 담 정면에 기도하는 형상으로 표현되어진다이 문설주의 서면

두 명의 아이와 함께 있는 성인의 모자이크로 그들의 손은 헌금하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남면에는 소원을 담은 모자이크를 동정녀 마리아가 전사성인과 함께 있다이 모자이크 아래에

이런 글이 있다.

 

<인간으로써 나는 실망했다그러나 당신은 내 삶에 가장 큰 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감사함

으로 이것을 드립니다.> 

 

이 그림의 상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흉상으로 축복하시는 그림이다이 모자이크는

 9세기에 속한다.

▲드미트리우스 교회안의 성화

 

성 데메트리우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벽화는 교회의 남쪽 벽에 있다이것의

대부분은 현재 큰 아치형의 개막으로 인해 파괴되어져 있다

 

초상의 왼손부분에서 한 임금이 그의 군대의 호위아래 말 등에서 따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뒷 배경으로 서 있는 큰 건물은 도시 경기장 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왼손부분은 크게 손상되어 있다이것은 교회의 실내현관 부분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불꽃과 연기가 보이는 지붕위이다

 

땅에서 창을 가진 형상이 홀로 걷는다반대로 외부로 퍼져 나가는 날개를 가진 천사가 내려

와 복종하고 있다현관 위에서 두려워하는 여성은 그들뒤에 군인과 함께 묘사되어 진다.

 

 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진다. (경기장에 의한 거룩한 교회도시 경기장 가운데 서 있어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를 표시하고 있다

 

이 벽화는 8세기 초반에 속한다본당 회중석의 남쪽 통로에 있는 서면의 최서단 문설주는

성 요셉의 벽화이다

 

그는 짧은 머리에 수염이 없는 젊은 남자로 묘사되어져 있고 그의 오른 손에는 더블 십자가

를 잡고 그의 왼손은 미세화에서 한 조상을 보호하고 있다

 

미세화에서 성경과 향로를 들고 있는 이 벽화는 수도사가 되어 요셉의 이름을 가졌던 황제

존 4세 칸타쿠네를 다룬 것이다

 

같은 열주에서 남면의 두 번째 최서단 문설주에는 수도사 복장과 모가달린 옷의 성 누가

스테리어트스의 초상이 있다

 

이것은 11세기에 속한다트빌로의 남쪽 붙임기둥은 알레고리컬한 장면으로 한 남자가

유니콘에게 쫓기고 북쪽 기둥은 유월절로 1474-93년의 것이다.

▲테살로니키의 성 데메트리우스의 유해,

▲성 데메트리우스의 유해가 보관된 교회 내부의 작은 성소

▲지하 성전

 

이 지하성전은 교차랑 아래 지하동굴이며 남향날개쪽으로 들어간다. 계단의 왼쪽

에서 아래로 작은 예배실로 가게되는데 두방 은 순교자의 몸을 즉시

넣어두었던 칸막이로 된 성도의 전형적인 납골당이다.

 

 아칸서스와 월계수 나뭇잎과 야자나무무늬의 대리석으로 아치를 장식했다. 성합의

기본 앞면에는 대리석으로 된 원형 세면대가 있었다. 지하실의 중앙은 나무로

둘러싸여있다

▲원래 5세기 교회의 조각상과 부조 장식이 있는 기둥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 지하 납골당

▲원래 성묘의 잔해.

왜 미국의 국가(國歌)는 호전적인가?

1808년 대선을 통해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이 제4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헌법과 권리장전을 작성하고 검토하는 등 헌법 이해의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헌법의

아버지(Father of the Constitution)’였지만, 그가 대통령 취임 후 당면한 첫 번째 과제는

영국과의 갈등이었다.

▲1812년 매디슨은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승인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제2의 독립전쟁’

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림은 뉴올리언스 전쟁(1815)에서 앤드류 잭슨이

지휘하는 모습.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제2의 독립전쟁이 시작되다

미국의 해상운송 문제를 둘러싸고 영국과 미국 사이의 긴장 상태가 초래된 가운데, 인디언과의 분쟁

에서 캐나다에 있는 영국 관리들은 인디언들의 반란을 고무하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주었다.

 

이것도 미국을 화나게 만들었지만, 미국이 영국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스페인령

플로리다에 대한 근심과 더불어 욕심이었다.

 

당시 스페인령 플로리다는 현재의 플로리다주를 포함하여 앨라배마주, 미시시피주, 루이지애나주의

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플로리다지역은 남부 미국 백인에게 끊임없는 위협이었다.

 

노예들이 플로리다 국경을 넘어 도망갔으며, 플로리다에 있는 인디언들은 국경 북쪽에 있는 백인 정착

촌을 자주 기습했기 때문이다. 플로리다는 위협인 동시에 꼭 갖고 싶은 보물단지처럼 여겨졌다.

 

플로리다에 여러 강이 흐르고 있어 남서부 주민들에게 멕시코만의 매우 유용한 항구를 이용할 수 있도

해주었기 때문이다.

 

1810년 미국 정착민들은 루이지애나 배튼루지(Baton Rouge)의 스페인 항구를 장악하고 연방정부

에게 이 지역을 미국에 합병시킬 것을 요구했다. 매디슨은 기꺼이 동의하였으며 플로리다의 나머지

지역까지도 확보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스페인은 영국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영국과의 전쟁은 영국의 영토뿐 아니라 스페인의 영토

를 탈취 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속셈이었다.

 

1810년 중간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요구하는 많은 의원들을 초당적으로 선출했다.

이들의 지도자는 켄터키주 출신의 헨리 클레이(Henry Clay, 1777-1852)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출신의 존 칼훈(John C. Calhoun, 1782-1850)이었다.

 

이들은 호전파로서 영국과의 전쟁을 촉구하고 나섰다. 클레이는 1811년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자 자신

의 주전론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각종 하원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신처럼 호전적인 칼훈을 외교

위원회에 임명했다.

 

이들은 캐나다의 정복까지 선동함으로써 미국의 북부 국경지역과 남부 국경지역에선 전쟁의 열기가

뜨겁게달아 올랐다. 매디슨은 평화를 선호했지만 의회와 민심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1812년 6월

의회에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이에 의회는 하원에서 79표 대 49표, 상원에서 19표 대 14표로 선전포고를 통과시켰으며, 매디슨은

18일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승인했다. 이 전쟁은 반대파들에 의해 ‘매디슨의 전쟁’으로 불려졌지만,

역사적 으론‘제2의 독립전쟁’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미국의 입장에서 ‘매디슨의 전쟁’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선 전쟁이었다. 전쟁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1812년 여름 미국은 디트로이트를 거쳐 캐나다를 침략했으나 곧 디트로이트로 철수해야 했고

8월에는 그곳에서도 항복하고 말았다. 다른 침략전도 실패로 돌아갔다.

 

포트디어본(Fort Dearborn)에선 인디언의 공격에 굴복했다. 포트디어본은 오늘날의 시카고가 된 지역

이다. 전세가 불리하건 유리하건 전쟁 시 민심은 집권자의 편이기 마련이다. 1812년 대선에서 매디슨

은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매디슨이 의도적으로 전쟁을 연장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성조기여 영원하라!

 

미국은 1813년 5대호에서 주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은 온타리오호를 장악해 오늘날 토론토가

된 캐나다수의 수도 요크를 기습하여 불태워버리고 호수를 건너 미국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미국은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유럽의 전세는 미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유럽에서 나폴

레옹과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던 영국은 미국의 선전포고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1812년 가을 나폴레옹

이 러시아와 자멸적인 전투를 벌여 프랑스군이 산산조각이 나자 여유가 생겼다.

 

1813년 말에 이르러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최후의 패전을 맞이하고 1814년 4월 나폴레옹이 항복

하자, 영국은 주요 군사력을 미국과의 전쟁에 투입하였다.

▲1812년 미 함선(USS Constitution)이 영국국의 함선(HMS Guerriere)를 침몰시키는 장면.

 

1814년 8월 24일 영국군은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진입하여 백악관을 비롯한 여러 정부청사

들을 불태웠다. 캐나다 수도 요크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복수였다. 영국군은 볼티모어를 향해

체사피크만으로 나아갔다.

 

영국 함대의 접근을 막기 위해 미국 수비대는 볼티모어의 항구 입구인 패탭스코(Patapsco)강에

선박 여러 척을 침몰시켜 놓았다. 따라서 영국군은 요새를 원거리에서 포격할 수밖에 없었다.

 

9월 13일 밤 어떤 미국인 포로의 석방을 요청하기 위해 영국 함선에 타고 있던 워싱턴 법률가

프랜시스 스캇 키(Francis Scott Key, 1779-1843)는 이 포격을 목격하였다.

 

다음날 아침 그는 ‘새벽 여명까지’ 요새에서 성조기가 여전히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자랑스럽게 마침 몸에 지니고 있던 편지봉투 뒷면에 [맥헨리 요새의 방어

(The Defense of Fort McHenry)]라는 시를 지어 적었다.

▲“성조기여 영원하라” 시의 초판본.

 

이 시는 9월 20일자 볼티모어 신문에 발표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곧바로 영국 아마추어

음악가 클럽의 애창곡조에 실려 “성조기여 영원하라(The Star-Spangled Banner)”는 새로운

제목으로 미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졌다.

 

이 시가 가장 먼저 발표된 볼티모어의 당시 민심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민주주의

긍정하면서도 ‘다수의 횡포’를 염려했던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

[미국의 민주주의]에 다수의 횡포로 일어날 수 있는 폐단의 놀라운 사례가 1812년의 전쟁 기간

동안에 볼티모어에서 발생했다고 썼다.

 

“당시에 볼티모어에서는 그 전쟁이 대단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입장을 취한 어느 신문은

그 반대 입장 때문에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군중들은 인쇄시설을 부수고 편집인들의 가옥을 습격했다. 민병대가 소집되었으나 그들은 소집령에

응하지 않았다. 미쳐서 날뛰는 군중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은 가련한 신문인들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그들을 형사범으로 수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예방 조처마저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군중들은 그날 밤 다시 운집했다. 관리들은 다시

민병대 소집령을 내렸지만 헛일이었다. 감옥이 강제로 열려 편집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현장에서

피살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죽도록 구타당했다. 재판에 회부된 범인들은 배심원들에 의해서

형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은 호전적인 열정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미국은 1814년 9월 11일 플랫츠

버그(Plattsburgh)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 육해군을 무찌르고 미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보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곤 미국의 군사작전은 굴욕적인 패배로 점철되었다.

 

전쟁에 대한 여론도 나빠진데다 연방파의 전쟁 반대 목소리도 높아졌다. 특히 뉴잉글랜드의 반대가

격렬했다.영국도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빚더미 위에 올라서게 되어 별 의미도 없는 전쟁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1814년 8월부터 벨기에의 겐트(Ghent)에서 미-영 평화협상이 개최된 이유다. 미국은 존 퀸시 애덤스,

헨리 클레이, 알버트 갤러틴이 이끄는 대표단을 파견했다. 양 측은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조인했다.

이렇다 할 내용도 없이 그저 전쟁 종식이 주요 목적이었다.

 

▲1814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대표단이 겐트 조약에 사인하는 모습.

 

그러나 아직 평화조약 서명 소식을 듣지 못한 미국에선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에게

최대 규모의 승리를 안겨준 지상전이 1815년 1월 8일 뉴올리언스에서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 장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영국군은 사망자 7백명, 부상자 1천4백명, 포로 5백명의 손실을 입은 반면, 잭슨 부대의 손실은 8명

의 사망자와 13명의 부상자가 전부였다. 미국인들은 이 승리를 “미국이 전세계의 여러 국가들 가운데

에서 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징조”로 생각했다.

 

반면 유럽은 어떠했던가? 1815년 2월 나폴레옹이 유배 10여개월만에 엘바섬을 지키던 영국 해군의

눈을 피해 프랑스로 몰래 잠입하는 데에 성공했고, 잠시 왕권을 회복했던 루이 18세(루이 16세의 동생)

는 영국으로 도망쳤다.

 

다시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18일 일요일 아침 프랑스 북부(지금은 벨기에 중부) 워털루

(Waterloo) 평원에서 영국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이때 영국군을 이끈 인물은 웰링턴 공이라고도 하는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1769-1852)였다.

워털루 전역에 웰링턴은 6만7661명의 병사와 156문의 대포를 배치했고, 나폴레옹은 7만1947명의

병사와 246문의 대포를 배치했다.

 

전투에 동원된 말만도 3만마리나 됐다. 나폴레옹은 “간단히 점심을 먹는 것 정도로 쉬울 것”이라고 생각

했고, 바로 이런 방심 때문에 전투는 반나절 만에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 전투로 유명해진 웰링턴은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의 운동장에서 시작됐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는 날조된 것이며, 공부를 못하는 아들에 대해 어머니가 “말 안 듣는 우리 아들 아서는 총알

받이 밖에 못 된다”라고 한 적은 있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총알받이감으로 평가받았던 웰링턴이 그런 공적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거시적

으로 보자면, 그건 바로 ‘민족주의’였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10년 동안이나 정복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 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국민’과

그들의 민족주의였듯이, 그러한 정복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선 힘도 바로 다른 나라들의 민족주의였다.

나폴레옹 법전(1804)으로 절정을 이룬 법률의 통일, 유럽대륙의 대부분에서 서서히 채택한 도량형 제도,

표준통화제 등 유럽통일을 향한 많은 제도들이 나폴레옹 집권 시기에 도입되었지만, 민족주의 의식

만큼은 통일되기 어려웠다.

 

거의 없다시피 했던 독일 민족주의를 일깨운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의 그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1807)이라는 연속 강연이 상징하듯이, 나폴레옹의 정복은 잠자고 있던 유럽의

 

민족주의를 흔들어 깨운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미국, ‘제국’으로 거듭나다

 

미국이 어찌 이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랴. 이제 곧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다.1812년 전쟁으로 인해 탄생한 여러 용어 중엔 ‘엉클 샘(Uncle Sam)’과 ‘eat crow’가 있는데,

이 또한 그런 흐름을 반영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모병을 목적으로 제작된 엉클 샘 포스터.

 

엉클 샘은 샘 윌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실존인물이다. 1812년 전쟁때 윌슨은 뉴욕의 트로이에 주둔했던

군부대에 고기를 납품했는데, 병사들에게 보낸 고기에는 미국을 표시하는 ‘U.S.’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정부 검사관이 ‘U.S.’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상상력이 풍부한 윌슨 상점의 직원은 그것이 윌슨의

별명인 ‘엉클 샘’을 의미한다고 대답했다.이때부터 연방정부에 납품하는 모든 군수물자엔 ‘엉클 샘’이

라는이름이 붙게 되었다.

 

‘엉클 샘’은 1852년그림으로 형상화되는데, 염소 수염을 가진 백발노인의 모습으로 1812년 전쟁의 영웅

인 앤드류 잭슨을닮았다. 이후 ‘엉클 샘’은 미국을 의인화한 인물의 위상을 갖게 된다.

 

‘eat crow’란 ‘앞서 한 말을 취소하거나 잘못을 인정하다’‘하기 싫은 일을 하다’‘굴욕을 당하다’는 뜻인데,

1812년 전쟁에서 영국과 미국간 휴전이 성립되었을 때 발생한 일에서 유래되었다.

 

어떤 미국 군인이 영국령 초소를 지나 나이아가라 강을 건너서 한 마리의 까마귀를 총으로 쏘았다.총소리

를 들은 영국군은 국경을 침범한 미국인을 혼내주기로 결심하고 까마귀를 입으로 뜯어 먹으라고

명령했다.

 

미국인은 굴욕을 참고 까마귀를 한 입 뜯어먹고 나서야 총을 돌려 받았다. 돌려받은 총으로 이번에는

미국인이 영국인에게 총을 겨누고 남은 까마귀를 마저 먹게 했다는 이야기다.

 

‘엉클 샘(Uncle Sam)’과 ‘eat crow’는 1812년 전쟁의 결과를 놀라울 정도로 잘 상징해준다. 엉클 샘의

얼굴을 제공한 앤드류 잭슨은 전쟁 영웅이 되어 얼마 후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1812년 전쟁은 사실상 제2차 독립전쟁으로, 이제 미국은 영국에 대해 그 어떤 경우에도 ‘eat crow’를

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이 전쟁을 통해 서부로의 팽창을 방해해온 전통적인 억제력, 즉 인디언 침입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이제 서부로의 진군 나팔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지역 거주자는 1810년 백인 7명

중 1명 꼴에서 1820년 4명 중 1명꼴로 늘게 되며, 미국 전체 인구는 1790년의 400만명에서 30년만인

1820년 1천만명을 돌파한다. 이제 미국은 곧 플로리다도 먹고 텍사스도 먹어 치우는 엄청난 식욕을

과시하게 된다.

 

1812년 전쟁의 와중에 탄생한 “성조기여 영원하라”의 노랫말은 ‘포화의 붉은 섬광’이라거나 ‘공중에 작열

하는 폭탄’ 등 전투장면을 묘사하는 호전성이 두드러진다.

 

1889년 해군에서 이 노래를 국기 게양 시에 공식 사용한 것까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느 모로 보건 국가

(國歌)로 채택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노래였다.

 

가사 내용도 문제지만, 부르기도 어려운데다 가사를 외우기도 어렵다. 4절이나 되는 긴 노래라 외우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내용이 복잡해 1절만이라도 외우는게 영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1916년 우드로 윌슨 행정부에서 공식 행사 때마다 사용하는 사실상의 국가로, 그리고

1931년 허버트 후버 행정부에서 의회의 결의를 거쳐 국가로 채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충격을 이겨내자는 전투성이 필요해서 그랬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미국

이 노랫말을 따라가면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외치는 제국으로 발돋움 하게 된다. 국가적 차원의

‘자기이행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sy)’이라고나 할까?

 

공식 행사에서 가수들이 국가를 부르다 실수를 하는 일도 자주 벌어져, 오늘날엔 미리 녹음을 해놓고 립싱크

하는 게 관례가 되고 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미국인들의 지지도는 매우 낮지만, 중요한 건 ‘제2의 독립전쟁’을 음미하면서 호전성

키워 미 제국의 영광을 지속시키자는 결의를 다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인천항에서 1시간…덕적도엔 사람마저 따돌린 숨은 피서지가 있다

▲옹진 덕적도 전경

 

인천 앞바다에 자리잡고 있는 섬들 중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덕적도이며, 그 다음이

바로 이작도와 백령이다. 1994년 5월 인천~덕적도 행 쾌속선을 운항하면서 2시간 거리가

50분으로 단축되어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게 되었다.

 

덕적도는 관광명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입맛을 충족시킬 먹거리마저 풍부하여 피서객들의

입에서는 즐거운 탄성이 끊이지 않는다. 관광 섬으로 탈바꿈해 가면서 덕적도의 중심지는

북리에서 면소재지인 진리로 넘어간 상태이다.

 

 

▲도우선착장에 펼쳐진 해산물 장터

 

진리해변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보면 진리해변과 바로 옆에 붙은 ‘밧지름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에도 소나무군락지가 있고, 해수욕장으로 진입하는 신작로에는 천리향이 참으로 아름답게 피어

있다.밭을 가로질러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밧지름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의 길이는 1.2km, 폭은 100m, 수심은 1.5m 내외로 가족 야영장으로 그만이다. 규모는

서포리에 비해 작다.

▲밧지름 해변

▲인천 옹진군 덕적도 밧지름해변(왼쪽 아래), 진리해변(왼쪽 위)과 소야도(오른쪽)가 보인다.

인천항에서 배로 1시간 10분 가면 덕적도에 도착하며 여러 해변이 조용히 펼쳐져 있습니다.

▲옹진군 덕적도 위치도.

▲덕적도 위치도.

▲덕적도 밧지름해변에서 작은 집게가 먹이를 찾고 있다.

 

600m 길이의 해변은 전체 몸길이가 1㎝에 불과한 작은 집게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만찬장과 같다.

흰 고둥 껍데기를 지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작은 집게발과 입이 다리보다 분주하게 움직인다.

 

해변을 즐기기 바쁜 주민은 집게 혼자가 아니다. 목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펄 모래를

찍어대는 갈매기, 갈매기 눈치를 보면서도 자기만의 사냥 삼매경에 빠진 꽃게… 불과 몇 걸음

떨어져 수면을 깨뜨리는 피서객의 물장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천항에서 여객선에 몸을 싣고 1시간 10분을 이동하면 덕적도에 도착한다. 인천 옹진군 일대

41개 섬으로 구성된 덕적군도의 대장 격이다. 섬의 사면마다 백사장, 복합사장, 몽돌해변이

나란히 펼쳐져 있고, 길고 짧은 바다갈림길은 신비로움을 더한다.

 

피서지로 더할 나위 없고 생태관광이나 야영을 하기에도 좋지만 인파가 북적이는 섬은 아니다.

짧지 않은 배편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터. 하지만 한번 입도한 이들은 다시 배에

오를 날만 꼽는다.

▲밧지름해변과 근처에 신설된 덕적도 자연휴양림.

덕적도 남쪽 밧지름해변에는 2025년 3월 공립 휴양림이 생겨 숙박과 야영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덕적도 자연휴양림에서 밧지름해변으로 넘어가는 다리에서 바라본 송림.

 

덕적도 남쪽 밧지름해변은 비교적 최근에 주목받기 시작한 피서지다. 주변에 음식점도 작은

식료품점도 없어 여러모로 머물기 불편했기 때문. 섬의 대표 해수욕장인 서포리해변에 비해

숙박시설도 변변치 않았다. 지명부터가 마을 외곽의 해변이라는 뜻이다.

 

과거 수군(水軍)의 진(鎭)이 설치돼 있던 마을 '진리(鎭里)'의 '바깥'이라며 '바깥진리'로 부르던

것이 '밧지름'으로 변한 것. 현재도 섬의 주항구는 진리의 진리항이다.

 

이런 밧지름에 지난해 3월 덕적도 휴양림이 새로 들어섰다. 섬 전체에서 가장 신식인 숙박

시설과 편의시설을 갖춘 야영장이 조성된 것. 한결 아름답고 깨끗한 바다를 누리는 대신

열악한 숙박 환경을 감수해야 하는 도서 지역 여행의 단점이 해소된 셈이다.

 

연륙교로 연결돼 있지 않은 섬에 조성된 최초의 공립 휴양림이라고. 섬의 도시 옹진군 최초의

휴양림이기도 하다.

▲밧지름해변은 펄과 모래가 섞인 복합해변이지만 고운 모래만으로 쌓인 언덕도 있다.

▲밧지름해변은 각종 바다생물의 보금자리다.

 

입지가 나아졌다지만 주위에 여전히 식음 시설이 없다 보니, 휴양림 등 해변 인접 시설에서

숙박하지 않는 한 밧지름해변에 머물기란 여전히 만만치 않다.

 

휴양림 일일 숙박 인원은 기껏해야 41명, 넓은 해변을 붐비게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더위가절정에 이른 이달 초중순, 기자가 취재를 위해 해변을 찾았을 때에도 물놀이

인원은 4인 가족 1팀뿐.

 

그런데 이런 적당한 고립감이 밧지름해변을 특별하게 한다. 개인 섬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것과 같은 사치스러운 기분이 든다. 해변 주위는 오래된 해송림으로 둘러싸여 바다와

숲을 제외한 모든 번잡스러움을 차폐한다.

▲밧지름해변 오른편은 왼편에 비해 물이 빠르게 빠진다.

▲밧지름해변 인근 자연휴양림의 소나무숲이 울창하다.

 

휴양림에서 남쪽으로 3분만 걸어 내려오면 작은 개천을 넘는 보도교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

송림의 장막을 지나면 밧지름해변이 시야에 들어온다.

 

모래와 펄이 섞인 복합 해변이지만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 같은 갯벌은 썰물 때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해변의 오른편(서쪽) 지대가 살짝 높아 물이 빨리 빠지고, 왼편(동쪽)은 물때와 상관

없이 일정 깊이 이상의 수위가 유지된다.

 

이 때문에 피서객은 보통 해변의 왼편에 더 집중된다.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인적이 더 드문

해변 오른편은 바다생물의 보고다. 물길이 팬 모래 골짜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조가비가

쌓여 있다.

 

인접한 모래 언덕에 삼삼오오 모인 갈매기 무리의 움직임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조가비

무덤은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듯한 이들의 작품이지 싶다.

 

무덤 사이에서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해 허리를 숙여 보니 바다의 청소부 집게도 곳곳에서

꼬물거리고 있다. 일대에 산재한 갯지렁이집은 이들에게 고고한 해송처럼 드높게

느껴질 것이다.

▲덕적도 능동자갈마당에 수많은 몽돌이 쌓여 있다.

▲덕적도 이개해변과 인근 목섬을 잇는 길 양옆으로 작은 모래사장이 있다.

 

밧지름해변이 ‘아는 사람들만 찾아가는’ 떠오르는 바다라면 덕적도 피서의 중심은 늘 서포리

해변이었다.

 

진리항 일대가 마을 행정·교통 중심지라면 서포리해변 일대는 관광 중심지다. 적송 800여

그루로 조림된 숲이 해변가에 있어 해수욕을 즐기지 않는 이들은 산림욕을 즐긴다.

 

섬 북편에 위치한 능동자갈마당과 목섬도 매력적이다. 자갈마당은 몽돌해변, 목섬은 진입로

양옆에 쌓인 모래사장이 주목점이다.

 

능동자갈마당은 몽돌해변치고 면적이 제법 넓고 인근 기암괴석과 선바위가 절경이라 눈과

귀로 즐기는 해변이다. 목섬은 이개해변 방면에서 넘어올 때 진입로 위로 서서히 드러나는

바다 풍경이 일품이다.

▲덕적도 서포리해수욕장

▲서포리 해변

2018년 5월에 개통된 덕적소야대교

▲소야도 갓섬-간뎃섬(아래)-물푸레섬(위)을 잇는 모랫길이 아직 썰물이 아님에도 선명히 보인다.

▲옹진군 소야도 위치도.

▲소야도 간뎃섬 해변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소야도는 진리항 인근 덕적소야교로 덕적도와 이어져 있다. 덕적소야교 설치 전까지는 여객선이

두 섬에 각각 기항했지만, 현재는 덕적도 진리항에만 선다. 때문에 덕적도와 같은 생활·관광권

으로 묶인다.

 

소야도의 자랑은 1.3㎞에 달하는 바다갈라짐길이다. 섬의 동북편 선촌항에서 시작되는 모랫길이

갓섬, 간뎃(가운데)섬, 물푸레섬을 잇는다. 이 섬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해변이 유독 하얀 것을

볼 수 있다.

 

모래가 아니라 굴 껍데기가긴 세월 햇볕을 쬐면서 백화된 것이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아낙들이

굴을따던 곳이었다.

 

석간만 차가 큰 덕에 굴의 풍미가 좋아 상품으로 거래된다. 흔히 ‘덕적굴’로 판매되는데 실제로는

소야도에서 채집되는 것이다. 바다가 맑아 물때를 정확히 맞추지 못하더라도 수면 아래 비치는

길을 볼 수 있다.

▲하얀 모래와 에메랄드빛 바다를 자랑하는 소야도 떼뿌리해변이 아름답다.

▲소야도 죽노골해변과 뒷목섬이 마치 각궁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떼뿌리해변과 죽노골해변도 둘러보면 좋다. 떼뿌리해변은 모래가 곱기로 이름나 덕적도·소야도

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힌다. ‘에메랄드빛 해변’의 정석이다.

 

떼뿌리해변에 인접한 죽노골해변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각궁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해변 앞

무인도 목섬이 마침 시위에 걸고 당긴 화살의 깃 위치에 있어 더 그렇다.

 

차태현, 손예진, 이은주 주연 영화 ‘연애소설’(2002)에서 주인공 일행의 섬여행 장면이 두 해변

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네팔 대규모 홍수에 한국인 8명 연락두절…사망자 19명

▲26일(현지시간) 네팔에 발생한 홍수로 진흙탕 물에 잠긴 집들을 바라보고 있는 주민들.

/ AFP 연합뉴스

 

히말라야 산악지대에 있는 네팔 중북부 지역에서 대규모 홍수가 발생해 한국인 8명이 연락

두절되고 또 다른 한국인 10명은 고립됐다. 아울러 외국인 290여명을 포함한 여행객

380명가량이 실종 상태다.

 

26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네팔 중북부 바그마티주 일대에서

폭우로 인해 대규모 홍수가 발생했다.

▲네팔 홍수 현장

 

이 사고로 19명이 숨지고 네팔인 93명과 외국인 291명을 포함한 여행객 384명이 실종

됐다고 네팔 관광청은 밝혔다.

 

사고 지역은 수도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120㎞가량 떨어진 곳으로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중국 티베트 자치구 국경 지역이다.

 

한국 외교부도 네팔 바그마티주 라수와 지역에서 발생한 홍수로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던

한국남동발전과 두산에너빌리티 소속 한국인 직원 8명이 연락 두절됐다고 밝혔다.

▲네팔홍수에 흙더미가 함께 떠내려가는 모습. [X]

 

두산에너빌리티 소속 또 다른 한국인 10명도 현지에서 고립돼 구조를 기다리고 있으며

네팔 정부는 사고 현장에 헬기를 투입했다.

 

정부는 외교부 장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재외국민보호대책본부를 설치했다.이재명 대통령

의 국민 안전 확보를 위한 총력 대응 지시에 따라 외교부·소방청·경찰청으로 구성된

정부합동 신속대응팀도 최단 시간 내 현지에 파견할 예정이라고 외교부는 밝혔다.

▲네팔 홍수에 도심이 물에 잠기는 모습. [X]

▲한국남동발전이 주도하는 네팔 어퍼 트리슐리-1 수력발전 사업에서 두산에너빌리티가

EPC 시공을 맡고 있는 댐 붕괴 영상. X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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