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와 뉴욕의 서로 다른 매력...

▲필라델피아의 개척자인 윌리엄 펜의 동상이 시청사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데,

리츠칼튼 스위트룸에서 바로 내다볼 수 있다 

이름만 알던 도시 필라델피아와 누구나 아는 도시 뉴욕. 인지도부터 다른 두 곳은

여행마저 제각각이다. 

 

뿌리 깊은 역사와 교육의 도시, 필라델피아가 느긋하고 고상한 여행지라면 빛의

속도로 걸어야 하는 뉴욕은 바쁘면서도 짜릿하다.

 

▲필라델피아는 초고층 빌딩이 많지 않아 여유로운 분위기를 지녔다. 필라델피아의

건축법에 윌리엄 펜의 동상보다 높게 지을 수 없도록 명시한 조항 때문이다

“필라델피아에 간다니까 다들 치즈를 먹으라고 하더군요. 필라델피아 치즈가 왜 유명

한가요?”시티투어를 하며 가이드에게 물었다. 

 

“치즈요?

 

그건 필라델피아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필라델피아에서 만든 것도 아니구요.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우리도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필라델피아관광청 담당자인 제프리에게 그 이유를 다시 물어봤다. 제프리역시

양손을 하늘로 내보이며 모르겠다는 표시를 했다.


사실 필라델피아 치즈는 뉴욕에서 만들어졌다. 1880년에 뉴욕의 유제품 업자인 윌리엄

로렌스가 더 진하고 부드러운 치즈를 개발했는데, 그 이름을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로 붙인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필라델피아가 가장 질 좋은 유제품을 만들기로 유명했기 때문.“그럼

필라델피아에서 유명한 건 뭐죠? 뭐가 자랑할 만한가요?”

 

“역사요! 필라델피아가 가진 역사.”

 

제프리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지만, 필라델피아를 처음 온 여행자로서는 꽤

난감했다.자칫하면 지루한 어감을 지닌 단어, 역사. 왜 제프리는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역사를 꼽았을까.


다음날 미국독립혁명박물관(Museum of American Revolution)을 둘러보고 나서

야 그 의아함을 단박에 떨쳐 낼 수 있었다. 더불어 큰 감동마저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의 막바지 무렵,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이야기 나눌 때 미국독립혁명박물관을

꼽는 사람도 많았다.

1776년, 미국 13개 주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마침내 영국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이끌어 냈다.

 

미국 최초의 수도였고, 7월4일 미국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조지 워싱턴을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훗날에는 헌법의 초안을 다지는 등 미국 역사의 중대한 사건

들이 모두 이 도시에서 일어났다.

 

박물관은 그 일련의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해 놓았다. 동시에 자유와 평등을

역설한 독립선언이 아메리카의 주인이었던 인디언과 흑인노예들에게는 적용되지

못했던 모순과 자유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물음까지 전해 주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올드시티(Old City)에 가면 이 역사의 현장들을 다 만나 볼 수 있다.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인디펜던스홀, 우아하면서 웅장한 시티홀, 최초의 백악관 부지, 최초의

성조기를 만든 베시 로스 부인의 집, 미국 독립전쟁과 노예 해방의 상징이 된 자유의

종까지. 많은 역사 유적지가 잘 보존돼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공간들은 커다란 울림을 준다. 가능하다면 독립역사공원에서 시작하는

역사 가이드 투어나 2층 시티투어를 꼭 해 볼 것을 추천한다. 

▲미국독립혁명박물관(Museum of American Revolution)

 

올해 4월에 문을 연 신생 박물관이다. 미국 혁명의 시대를 다룬 예술 작품을 비롯해,

당시 회화, 인쇄물, 독립전쟁에 쓰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군의 무기들, 군복, 군인들

의 일기까지 다양한 500여 가지의 수집품들을 만나 볼 수 있다.

 

미국의 독립 이후, 혁명의 정신이 인디언, 흑인, 여성 인권의 혁명으로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과정도 담았다.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먼저 가 봐야 할 곳이다. 

▲올드시티 중앙에 있는 시청사는 사각형 구조의 고딕양식 기법으로 지어졌다.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 중 하나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아래 세워져 있는 록키 동상

▲계단에 새겨진 록키의 발자국 위에 서면 눈앞에 필라델피아가 펼쳐진다

▲필라델피아미술관(Philadelphia Art Museum) 

▲펜실베니아대학교 인류고고학박물관

▲전 세계 광고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뉴욕의 명소, 타임스퀘어

▲원 월드 전망대에서 바라본 뉴욕 도심

▲타임스퀘어에 가면 영화에서 막 튀어나온 캐릭터와 거리 예술가들이 줄지어 서 있다

▲휘트니 미술관 부근에서 그림을 팔고 있는 작가들

▲빌딩에 걸린 거대하고, 현란한 전광판이 타임스퀘어를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올해 5월 타임스퀘어에 오픈한 새 어트랙션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미니어처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계획된 걸리버스 게이트는 약 430m2(130여 평)에 전 세계

50개국, 300여 개의 명소를 미니어처로 만들어 놨다.

 

가장 먼저 만나는 도시는 뉴욕. 입구에서 나눠 주는 브로셔 맨 뒤에는 나라별 아이템들

을 찾는 미션이 있는데, 브루클린 브리지를 오르는 스파이더맨이나 크라이슬러 빌딩

에 있는 배트맨 등 쏠쏠한 재미를 준다.

 

지금 당장 몽골에 가야 할 이유. 몽골에 왠 온천이....

▲물 웅덩이 부근에서는 방목중인 좀 더 많은 동물들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몽골의 온천, 순한 눈을 끔벅이는 낙타를

타고 오르는 사막에 투명한 어기호수까지. 몸과 마음을 몽실몽실하게 녹여 버린

겨울 몽골을 가 보자.

▲몽골리아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뽀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쳉헤르 온천의 아침.

 

“저 몽골 여행 갈 거예요.” 느닷없이 겨울 몽골 여행을 선언한 내게 지인들은 “왜 하필 지금?”

이라는 의문을 던졌다. 몽골 여행의 성수기인 여름을 훌쩍 넘겼으니 그럴 수밖에.

 

길고 긴 몽골의 겨울은 혹독한 추위 탓에 여행자의 수도 급감한다. 하지만 추위를 감수하면

서도 몽골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유는 바로 쳉헤르(Tsenher)온천 때문이다. 

하지만 쳉헤르 온천까지는 울란바토르(Ulaanbaatar)에서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5시간 이상

달려야 했다. 웬만한 열정으로는 가겠다고 결심하기도 쉽지 않은 강행군. 그렇지만 수고를

들인 보람이 있었다.

 

유황 냄새가 진하게 나는 순도 높은 유황 온천에서의 시간은 긴 여정으로 뭉쳐 있던 근육을

사르르 풀어 줬다. 

사방으로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기에 온천욕을 즐기며 소가 풀을 뜯는 풍경을 감상하기도
제격

이었다. 주변에 어둠이 드리우면 별들이 반짝이는 환상적인 하늘이 펼쳐졌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몽골의 밤하늘을 오래도록 감상했다. 촘촘히 박힌 저 별들

을 뭐라고 표현할지 한참을 고민했지만, ‘낭만’이라는 단어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내 시원한 맥주가 간절해졌다.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근 채로 얼음장 같은 맥주 한 잔. 겨울

몽골을 방문한 이유였다.

▲낙타 위에서 바라본 엘승 타사르해. 고운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엘승 타사르해(Elsen Tasarhai)는 몽골어로 ‘고립되고 찢어진 모래조각’이라는 의미.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에 놓인 작은 사막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곳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모래에

맨발을파묻는 것. 차갑고 보드라운 감촉의 모래가 발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오고 빠져

나가기를반복한다. 마치 발을 스쳐간 모래가 중력을 앗아간 듯, 구름 위로 붕 뜬

기분이다.


사막의 매력을 알아 가는 데 첫걸음 떼었다면, 다음 걸음은 낙타에게 맡겨야 한다. 몽골

에서 소와 말은 지겹게 보겠지만 낙타는 그리 흔한 동물이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예외다. 엘승 타사르해에서는 유목민들이 낙타를 키우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모래 언덕을 오르는 낙타의 혹 위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자. 드넓은 풍경에서

거짓말 같은 정적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될 테니.


언덕을 모두 올랐다면 이제 단번에 내려갈 차례. 가이드가 자신 있게 꺼내 드는 물건의

정체는 어릴 적 눈썰매장에서 보았던 플라스틱 재질의 썰매다.

 

그래 봐야 얼마나 빠르겠냐며 코웃음 쳤던 것도 잠시, 높은 경사와 부드러운 모래 입자

가 만들어 내는 속도는 여느 익스트림 스포츠 못지않게 짜릿했다.

 

▲에르덴조 사원의 전경. 푸른 하늘과 더불어 멋진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몽골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아르항가이 아이막(Arkhangai Aimag)에는 몽골인이 사랑

하는 보물이 있다. 바로 25.7km² 규모의 어기호수(Ugii Nuur)가 그 주인공.

 

물이 귀한 몽골에서 특히나 사랑을 받는 어기호수는 성수기가 되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농어 낚시와 일광욕을 즐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건기인 가을과 겨울에는 호수가

가물어 고요한 호수의 풍경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호숫가에서 조우한 건 사람에 관심 없는 말 한 마리와 꼬리를 흔들어 대며 다가오는

개 한 마리뿐이었다.

 

하늘을 담은 호수 표면은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닮았다. 평화로운 호수에서

도시에서는 좀처럼 경험할 수 없던 고요한 시간을 마음껏 누렸다.

▲에르덴조 사원 입구에 있는 기념품 좌판대 모습. 오래된 골동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칭기즈칸 시대 옛 수도였던 하라호름(Karakorum). 이곳에는 몽골 최초의 티베트

사원인 에르덴조 사원이 있다.

 

에르덴조 사원은 몽골 화폐인 1만 투그릭약 4,600원 지폐에 등장하는 곳으로 몽골

인들에게도 특별한 장소다. 몽골이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여 1586년 ‘백 개의 보물’

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덴조 사원을 세웠는데, 당시 1,000여 명의 수도승이 생활했

을 정도로 번성했다.

 

그러나 17세기 중국의 침공으로 사원은 불태워져 폐허가 되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 복구되었으나 1930년대 공산정권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이후 현재의 모습

으로 복원됐다.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던 상처를 짐작하며 건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15m 간격으로 세워진 티베트 양식의 불탑 초르텐. 108개의 탑으로 빙 둘러싸인

초원의 풍경은 번성했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바롱사원, 골조사원, 중사원이 있는데 각각 오른쪽, 중심, 왼쪽 사원이라는

뜻이다.부처의 초기, 중기, 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불상과 그림으로 채워진 사원은

미처 파괴의 상흔을 감추지 못한 낡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은은한 미소를 띤 불상의 얼굴에서만큼은 칭기즈칸 시대의 영광과 후광을

누렸던 시기를 여실히 엿볼 수 있었다.  

▲자이승 승전기념탑(Zaisan Memorial)

 

소련과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45년

세운기념탑이다. 이곳에서 울란바토르의 시내 전경과 그 사이를 흐르는

톨Tull강의 전망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이태준 기념공원

 

몽골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이태준 선생은 몽골의 마지막 칸인 복드 칸의 주치의

였고, 1919년 몽골 국가 훈장인 ‘에르데니인 오치르’를 받았을 만큼 몽골인에게

존경 받는 한국인이다.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반대하던

백군에 의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와 기념관이 있는

이태준 기념공원이 울란바토르에 조성되어 있다.


아라비아의 노르웨이, 오만 무산담 반도( Musandam Peninsula)

▲오만으로 국경을 넘기 전 눈길을 끄는 아랍에미리트 선전물들

◆아랍에미리트에 오만이 있는 이유?

 

아랍 지역은 17~18세기 유럽 열강간의 세력다툼에 휘말렸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7개의 토후국들이 모여 결성된 아랍에미리트.

 

이 지역을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영국의 의도와는 달리 일부

지역은 다른 나라로의 복속을 원했다.

 

무산담의 경우는 각 지역별 토후국간의 정치적,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얽힌 신경전

끝에 오만이 얻어 낸 결과물이다. 

 

무산담 반도(Musandam Peninsula)라는 생소한 이름과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

이었다. 두바이의 호텔 로비에서 무심코 여행상품이 소개된 팸플릿을 보게 되었다.

 

그중 이웃나라 오만으로 가는 무산담 반도 투어가 눈길을 끌었다. 부랴부랴 검색

해 보니 무산담은 아랍에미리트의 북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반도였다.

 

마치 페르시아만을 막아버리겠다는 듯, 이란 쪽으로 삐져나온 반도가 호르무즈

해협(Strait of Hormuz)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오만에 속한 영토지만, 정작 오만 본토와는 뚝 떨어져 마치 아랍에미리트 내에

섬처럼 위치하고 있었다. 무산담뿐이 아니었다.

 

무산담에서 오만으로 이르는 지역에는 마드하(Madha)라는 오만 영토 역시 섬

처럼 존재했다. 이들 지역이 어떠한 연유로 이렇게 자리 잡고 있는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다음날 아침, 숙소 주변을 지나는 E611번 고속도로를 타고 오만 국경으로 차를

몰았다. 잘 정비된 고속도로 덕분에 아랍에미리트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라스 알 카이마(Ras Al-Khaimah)까지는 금방이었다.

 

국경에 가까워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도로에는 승용차보다는 분주하게 움직이

는 화물트럭들이 많아졌고, 무엇보다 온통 사막뿐이던 풍경에 변화가 생겼다.

거친 산악 지형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만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오만 위치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사막은 온데 간데없고 황량한 암벽산과 모스크가 풍경을 압도한다

마침내 도착한 아랍에미리트-오만 국경. 붐비는 것도 아니건만 국경 통과는 시간을

꽤나 잡아먹는 절차였다. 우선 아랍에미리트 측 사무소를 통과해 출국을 한 상태로

중립 지대에서 필요한 절차를 마친 후 다시 오만 측의 입국 심사를 받아야 했다.

 

이때, 오만 영토에서 필요한 차량 보험을 가입해야 했는데, 체류 기간에 관계없이

최소 보험기간이 일주일이었다. 고작 반나절의 여정을 계획한지라 금액을 떠나

억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뭐든 남들과 다른 것을 하려면 대가가 필요한 법. 자유를 누리려면 이정도

쯤은 감수하기로 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마침내 오만 영토에 들어섰다. 무산담 반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하사브(Khasab)로 향했다.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험한 지형이라 길은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것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

게 편하게 차를 타고 무산담으로 향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라

고 했다.

 

이전에는 오직 배편으로 바다를 통해서만 다닐 수 있었다. 도로가 생기면서 아랍

에미리트로부터의 접근이 쉬워졌고, 덕분에 무산담은 두바이 사람들에게 인기

주말 여행지로 부상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산들이 병풍마냥 서 있는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이슬란드에서 해안 도로를 달렸던 기억이었다.

 

깊은 피오르를 따라 끊임없이 굴곡진 바로 그 해안도로의 모습이었다. 과연 ‘아라비

아의 노르웨이’라 불릴 만했다.

 

시각적으로는 신기하리만큼 비슷하지만 사실 형성된 원인은 완전히 다르다. 북유럽

의 피오르가 빙하가 깎아 낸 침식 지형인 반면, 이곳은 지각운동, 즉 아라비아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해 생긴 지층의 융기 현상으로 만들어진 지형이다.

 

과연 드러난 절벽 면에는 지층의 라인이 그대로 살아있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건드

리면 화석이 우수수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지층이 드러난 절벽과 만난 해변이 노을에 젖어들고 있다

▲아랍 스타일의 하사브 요새

국경에서 1시간 정도의 운전 끝에 마침내 무산담 반도의 끄트머리인 하사브에 도착했다.

오늘날 하사브는 휴양지로 기능하고 있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무역과 보급지로서의 역할이 컸다.

 

17세기 초 해군력이 강했던 포르투갈은 물과 식량을 보급하는 중계 기지가 필요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곳이 바로 하사브다. 오늘날에도 지리적으로 이란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어서 밀수를 포함한 무역이 성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멋진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정작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중심 도시라 했기에 활기찬 분위기를 떠올리며 왔건만, 시즌이 아니어서인지

거리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나마 찾아낸 여행사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냥 와도 뭔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완전 오판이었다! 

원래 무산담 반도의 대표적인 여흥은 뱃놀이다. 바다로 떨어지는 해안의 석회암 절벽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배를 타고 나가 바다 쪽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스노클링과 다이빙으로도 인기가 높다.

 

잘 보존된 산호와 쥐가오리, 리프 상어 등 다양한 어종이 삭막해 보이는 지형의 푸른 바다

속에 은밀히 숨겨져 있기 때문. 특히, 전 세계에 알려진 80여 종의 돌고래 중 20여 종이

이 지역에 나타난다니 놀랍기만 하다.

 

알면 알수록 사전에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저

이곳에 다시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당일치기 ‘깜짝 투어’는 여기까지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국경을 넘기 위해 두바이로의

‘귀경길’을 서둘렀다. 불확실성이 드리워진 국경 통과는 은근히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서는 올 때 놓쳤던 풍경들이 또다시 우리의 발걸음을 잡았다. 마음

은 바빴지만 도저히 차를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그중에서도 어느 이름 모를 해변

에서 맞이한 아라비아 반도의 석양은 기대하지 않았던 무산담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여행   수첩

 

자동차로 국경을 넘으려면 사전에 렌터카 회사에서 허가증을 받아서 국경 검문소에

제출해야 한다. 또한, 오만에서는 차량보험이 의무적인데, 국경에서 가입하면 된다.

단, 몇 시간만 머물더라도 최소 가입기간은 일주일이다.  

무산담은 오만 영토이지만 아랍에미리트 화폐인 디르함AED을 그대로 쓸 수 있다

 

하사브는 스쿠버다이빙, 스노클링, 뱃놀이 등의 액티비티가 발달한 곳이므로

사전에 알아보고 간다면 알찬 여정을 즐길 수 있다.

렌터카 업체는 식스트 렌터카Sixt Rent-a-car를 이용했다. 독일의 메이저 렌터카

업체로 가격대비 차량의 상태가 좋다. 두바이 공항 터미널에서도 차량 인수하는

곳의 위치가 편리하다. 예약할 때 국경을 넘을 계획이 있다고 알려 두면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준다. 


 

겨울 생선인 줄 알았는데 지금이 제철?…알 톡톡 도루묵의 반전. 

▲고성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의 산책로를 따라 화암사를 거쳐 신선대로 오르는 

방법도 있다. 켄싱턴리조트 산책로는 울산바위를 배경 삼을 수 있는 덕에 요즘

 젊은 러닝족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찬바람이 불면 고성에 갈 이유가 늘어난다. 신선대(645m·성인대)에 오르면 단풍 물든

울산바위의 압도적인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포구로 내려가면 막 올라오기 시작한

도루묵으로 마음마저 든든해진다.

 

햇메밀 막국수에 뜨끈한 문어국밥까지, 산행 뒤 먹을 것을 고르는 일도 즐겁다. 단풍

산행에 제철 별미를 곁들여 늦가을 고성 여행을 즐겼다. 

▲강원도 고성 신선대에서 본 설악산 울산바위의 가을 풍경. 가을빛 번진 숲 위로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울산바위를 정면으로 조망할 수 있어 신선대는

사계절 발길이 이어진다. 화암사를 들머리 삼아 한시간쯤 오르면 신선대에 닿는다.

 

고성에서는 으레 동쪽으로 눈길이 간다. 포구와 바다가 있는 쪽이다. 가을에는 

바다를 잠시 등져도 좋겠다. ‘높은 산을 낀 고을(高城)’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내륙으로 들수록 풍경이 깊어진다.


지난 22일 고성 신선대에 올랐다. 설악산 북쪽 신선봉(1204m)의 허리께 자리한 

암봉이다. 비교적 짧은 산행으로도 울산바위의 웅장한 자태를 마주할 수 있어 

MZ세대 ‘산린이(등산 초보)’ 사이에서 퍽 유명한 코스다.

오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산 중턱의 화암사 주차장에서 출발하거나, 켄싱턴

리조트 설악밸리에서 산책로를 따라 사찰로 접어들거나. 

▲육중한 수바위 아래 화암사가 들어앉아 있다.

▲화암사가 신선대 산행 코스의 들머리다. 화암사 종각에서 본 수바위의 모습.

 

단풍철에는 화암사 진입로부터 차가 밀리니 리조트 쪽이 대안이겠다. 1시간가량

 더 걷지만, 차 안에 갇혀 있을 시간에 대신 가을 풍경을 누린다. 

 

이 산책로는 뜻밖에도 걷는 이보다 달리는 이가 더 많다.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달

리는 모습을 담을 수 있어 전국의 러닝 크루가 꾸준히 찾는단다.

켄싱턴리조트 관계자도 “러닝족이 늘면서 가족층 중심이었던 리조트가 확 젊어

졌다고 소개했다. 울산바위 아래서 달리기 인증 사진을 찍는 시대라니. 오래된

명산 앞에서도 유행은 부지런히 바뀐다.

화암사 일주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金剛山 禾巖寺(금강산 화암사)’라고

적힌 현판이 선명했다.

 

알고 계시나. 신선봉은 금강산 1만2000봉의 남쪽 첫 봉우리로 꼽힌다. 화암사

주지 대현 스님이 “오늘 보니까 단풍이 제법 예쁘게 내려왔다”며 “금강산 줄기

에 자리해 정기가 남다른 곳이니, 좋은 기운을 얻어 가시라”고 덕담을 건넸다. 

▲올가을은 늦더위의 영향으로 단풍이 예전만 못하다. 신선대에서 본 설악산

울산바위 일대의 가을 풍경. 

 

화암사 입구에서 수바위와 시루떡바위를 거쳐 1시간쯤 만에 신선대에 닿았다. 숲에 

가렸던 시야가 단숨에 트였다. 운동장처럼 너른 바위 지대에 올라서자 울산바위의 

여섯 봉우리가 정면을 가로막았다.

산 아래에서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지만, 이곳에서는 봉우리마다 다른 얼굴이

보였다.암벽에 새겨진 주름과 깊이 파인 골짜기까지 선명했다. 고개를 돌리니

화암사 너머의 고성 앞바다까지 단번에 펼쳐졌다.

▲신선대에 오르면 고성·속초 시내와 푸른 동해 바다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늦더위 탓에 올해는 설악산도 단풍이 예년만 못하다고들 한다. 그 아쉬움은 신선대에 

두고 내려왔다. 울산바위에 동해까지 한눈에 담고 나니 단풍 빛깔을 따질 마음이

 사라졌다.

▲순메밀 막국수 

 

▲고성 ‘산북소나무막국수’ 의 순메밀막국수. 메밀을 껍데기째 갈아 면에

거뭇거뭇한 빛깔이 도는 것이 특징이다. 

 

산행 끝의 허기는 반갑다. 막국수 고장에 왔으니 메밀국수부터 한 그릇. 이른바 

‘면 성애자’들이 기다리는 계절이 늦가을과 겨울이다. 햇메밀로 만든 국수를 

맛볼 수 있어서다.

고성에서 3대를 잇는 ‘산북소나무막국수’를 찾았다. 메밀 함량 100%의 순메밀 

막국수(1만1000원)를 내는 집이다. 글루텐이 없어 쉽게 끊어지는 순메밀은

 반죽부터 까다롭다. 

 

뜨거운 물로 단단하게 반죽한 상태로 세 시간 넘게 나뒀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다시 여러 번 치대 면을 뽑는다.

전철재 사장이 “메밀을 껍데기째로 갈아 면에 거뭇거뭇한 빛깔이 도는데, 이를

고성에서는 ‘토면(土麵)’이라 부른다”고 알려줬다.

 

갓 뽑은 메밀국수에 동치미 국물을 붓고 들기름과 설탕을 조금 더해 입에 넣었

다. 한 젓가락만으로도 면의 차이가 느껴졌다. 툭툭 끊어지는 식감 뒤로 담백

한 맛이 따라왔다.

▲아야진항 위판장. 갓 잡아 온 도루묵이 대야마다 가득 찼다. 

▲고성 아야진항의 어민들. 도루묵은 자망을 이용해 떼로 건져 올린다. 부두로 

돌아오면 손으로 일일이 그물에서 생선을 떼어내야 한다. 

 

다음 날 아침 8시 아야진항을 찾았다. 꼭두새벽부터 바다에 나갔던 고깃배들이 

부두로 돌아와 곰치(미거지)와 대구 등을 부려놓고 있었다. 부두 곳곳에서 

반가운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가득 쌓아 올린 도루묵 더미다.

찬물을 좋아하는 도루묵은 산란기인 10월 말부터 12월 사이 얕은 연안으로

몰려온다. 어부들이 이때에 맞춰 자망(가로로 긴 사각형 그물)을 놓는다.

 

어부 박영철씨는 “많이 잡힐 때는 한 배에서 200두름(4000마리)도 건진다”고

말했다. 이날은 도루묵 한 두름이 4만2000원 선에 거래됐다. 

▲도루묵구이 

▲아야진항 앞 ‘어부밥집’의 도루묵찌개. 도루묵은 이맘때부터 12월까지만 맛볼 

수 있는 한정판 별미다. 도루묵찌개는 해장용으로도 술안주로도 제몫을 

톡톡히 한다.

 

항구 앞 ‘어부밥집’은 선장이 잡아 온 생선으로 밥상을 차린다. 도루묵찌개와 도루묵

구이(각 4만원)를 하나씩 주문했다. 이맘때 도루묵은 살보다 알이 더 푸짐하다.

알을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톡톡 터졌다. 고소한 맛에 자꾸 젓가락이 갔다.
유영미

사장은 “도루묵은 겨울 생선으로 알려져 있지만, 끝물로 갈수록 알이 단단해

진다”며 “오히려 늦가을 도루묵이 더 야들야들하니 맛있다”고 설명했다. 

▲고성 ‘베짱이 문어국밥’에서 맛본 문어국밥.

 

요즘 고성을 찾는 젊은 여행자에겐 ‘문어국밥’이 인기란다. 말 그대로 문어를

올린국밥이다.

 

문어야 봄부터 두루 잡히지만, 뜨끈한 국밥으로 즐기기에는 찬바람 부는 이맘

때가 제격이다.

 

삶은 피문어를 얇게 썰어 올리는데, 샤부샤부 먹듯이 먼저 문어와 숙주를 건져

먹고 다음에 국밥을 뜨는 게 순서다. 국밥을 한 그릇 비우고 나니 고성의 차가운

바닷 바람도 한결 견딜 만했다. 

▲화암사에서 수바위와 시루떡바위를 거쳐 신선대에 오른 뒤 화암사 숲길로 

돌아오는 코스는 약 3.2㎞ 길이다. 

 

쉬엄쉬엄 두세 시간을 잡으면 된다. 짧은 산행이지만, 등산화를 챙기는 게 좋다. 

화암사와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 모두 입장료가 없다. 아야진항 앞에 갓 잡은

 도루묵을 내놓는 식당이 몰려 있다.

 

 

파키스탄 훈자마을ㅡ관광객 대부분이 건너길 포기한다는 다리..

▲세계적인 오지, 파키스탄 훈자 심샬 마을.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가을이 깊었다.

▲여행을 하는 관광객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여행을 즐깁니다. 어떤 관광객들은

아름다운경치를 다른 관광객들은 패러글라이딩 같은 여행 스포츠를 원해서 

여행을 하게되죠. 

 

그들 중에서 독특하게 남들이 하지 못하는 특별한 여행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익스트림 애호가들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많은 지역들이 있는데 오늘 소개드리는 이곳,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중도포기하는 위험천만한 다리도 그런 곳 중 하나입니다.

전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훈자마을 위치도

▲카라코람 하이웨이중 훈자마을과 국경지역 쿤자랍 고개 위치도 

▲파키스탄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카라코람 하이웨이 & 훈자마을

 

1984년 영국 런던의 공항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출입국심사를 하던

직원이 한 외국인의 출입증을 보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죠.

 

이유는 그 사람의 나이가 무려 160세였기 때문입니다.하지만 그 노인은 외관상

으로 50세 정도에 아주 또렷이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체 건강상태가 좋아 큰

화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미디어들이 그의 이력을 조사해보았는데 실제로 그가 사는 마을에

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고향은 파키스탄의 북부에 있는 ‘훈자’라는 마을로 히말라야산맥

부근에 있는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곳입니다.

▲145세 할머니들

 

산맥 근처의 마을이다 보니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많은 현지인들은 고립된 생활을하고 있었고, 자신들만의 고유언어를

따로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죠.

 

재미있는 사실은 이 훈자마을에 주민들 중에는 100세가 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이 마을의 평균수명 역시무려 120세가넘을 정도라고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풍경

▲이 마을로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수마을의 비결은 무엇일까'에 대해

궁금해 하곤 합니다. 그러다 이 마을에 도착하면 '아~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죠.

 

 그들이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의 풍경입니다. 가보지 않고는 믿기 힘든 

아름다운 설산의 풍경과 마을 곳곳을 수놓고 있는 푸른 나무들의 향연을

 볼 수 있는 이곳.

▲사이에 뒤로는 울타르피크라고 하는 7300미터 산과 앞으로는 라카포시라고 하는

 7788미터 산으로 둘러쌓여 매일 같이 아름다운 자연에 감동하게 되는 이곳. 

훈자는 바로 그런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마을 자체가 자연인 그런 곳입니다.

▲훈자마을에서 흔히 보이는 집

 

아름다운 자연, 그러나 익스트림한 관광지까지....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은

그 자체만 으로도 힐링이 되는 천연 관광지라고 할 수 있어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죠.

 

그러나 익스트림한 경험을 원하는 관광객들도 매년 이곳을 찾는다고 하는데

그들이 찾는 것은 바로 이곳의 다리라고 합니다

▲북부 파키스탄에서 큰 도시로 나가고자 할 때 이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나갈 방법이 없어 계속해서 이용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훈자마을 보통 사람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특히 강을 가로지르는 높은 다리들은 일단 안정적이야 하죠. 그러나 세계에는 위험하

더라도 건너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곳 훈자 마을 근처의 후사이니 보리스

(Hussaini-Borith) 호수를 건너는 다리가 그런 다리입니다

▲위험천만이고 아찔한 다리를 건너는 현지 여자주민.

▲안타깝지만 실제로 최근까지 이 다리를 건너다 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들이 매년 

수명이 넘는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다리라고 알려진 다리. 

 

현지인들은 다리 자체는 안전하다고 하며 매일 같이 건너지만 보는 사람들은 

정말로 큰 위협을 느낄 정도이죠.

▲드문드문 걸쳐놓은 부실한 널판은 단지 보는 사람조차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에게  이 다리는 매우 중요한 다리로 실제 북부 파키스탄에서 큰 도시로 

나가고자 할 때 이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갈 방법이 없어 계속해서 이용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최근에 리모델링을 진행하여 이전보다는 안전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위험해

보이긴 하죠.그래도 파키스탄에 와서 주변의 마을과 계곡을 보러온 관광객들은 

한 번은 가봐야 할 명소로 손꼽히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겠죠. 비가 와서 다리 밑에 강물이 불거나

 특별히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에는 처음 이용하는 관광객들은 최대한 이용을 

자제하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신대륙 수입 5% 받기로 하고 대장정… 260명 중 18명만 살아 돌아와

▲1970년대 제작된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초상화.

​

504년 전 오늘(1519년 9월 20일), 세계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한 인물의 항해가 시작

됐습니다.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입니다.

​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필리핀 한 섬에서 생을 마감

했어요. 그와 함께 간 원정대 중 극히 일부만 유럽으로 돌아왔죠

​

마젤란은 출항하기 이틀 전 유서를 썼을 정도로 이 원정이 험난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도 목숨 걸고 원정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원정은어떠했을까요?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항해 경로

▲스페인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서쪽으로 항해" 인도로 가자

​

16세기를 흔히 '대항해시대'라 부릅니다.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이 바다를 거쳐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갔죠. 그들이 항해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아시아에서 나는 향신료를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

향신료는 고기 누린내를 없애고 감칠맛을 돌게 해 귀족의 수요가 컸어요. 그러나 중동에서

이슬람 세력이 팽창해 무역로가 막히는 바람에 향신료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

이에 새로운 무역로로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가는 바닷길이 개척됐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전 항로 대신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물론 인도에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죠. 유럽인들은 이 길고 거대한

대륙 때문에 서쪽으로 계속 항해해 인도에 닿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깨고 도전에 나선 이가 바로 마젤란이었습니다.

▲마젤란이 원주민과 싸우다 사망한곳 으로 알려진 필리핀 세부섬 부근

 

◆스페인 궁정 후원받아 5척으로 출항

​마젤란은 포르투갈 귀족 계급 출신으로, 초대 인도 총독 프란시스쿠 드알메이다 함대의

일원으로 해상 생활을 시작했어요. 사병 1500여 명 중 이름 없는 한 병사에 불과했죠.

하지만 이후 여러 차례 항해에 참여하며 견문을 넓혔어요.

​

귀국 후 승승장구할 듯하던 마젤란의 앞날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건 1513년, 모로코의

무어인 해적 소탕에 참가했을 때였어요. 마젤란은 전투 도중 다쳐 왼쪽 다리가 거의

마비됐어요.

​

상이용사(군에서 복무하다 부상을 입어 전역한 병사)가 된 그는 모로코에서 무어인

에게빼앗은 가축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됐어요.

​

그러다 가축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마젤란은 가축 일부를 무어인에게 되팔거나

무어인이 훔쳐 가도록 방조했다는 혐의를 받았어요.

​

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국왕 마누엘 1세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죠. 마젤란

은 더는 고국에 있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됐습니다.

​

당시 희망봉을 돌아가는 항로는 이미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어요. 마젤란은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 이른바 '향료 제도'라 불린 말루쿠제도까지 갈 수 있다면 막대한 수익을

얻으리라 생각했죠.

​

마침내 1517년 스페인 세비야로 이주해 스페인 궁정의 후원을 얻어낸 마젤란은 곧이어

카를 5세와 정식 계약을 했어요.

​

그 내용은 '발견될 나라에서 얻는 수입 전부의 20분의 1을 마젤란과 팔레이루(마젤란의

친구)에게 주며, 섬을 6곳 이상 발견할 경우 그 가운데 두 곳에 대한 특별권을 인정한다.

​

발견한 모든 육지와 섬의 귀족이나 총독 지위를 당사자와 그 자손에게 세습할 것을 인정

한다'는 내용이었어요.약 1년 5개월을 준비한 마젤란 함대는 1519년 8월 10일 세비야항

을 떠나 산루카르 데바라메다항으로 이동해 약 한 달을 더 준비했어요.

​

선단은 배 5척으로 구성했고 승무원 260여 명이 탔습니다. 원주민이 좋아하는 거울은

900개, 종은 2만개 이상 준비했답니다. 준비를 마친 마젤란 함대는 1519년 9월 20일

역사적 탐험길에 올랐습니다.

​

◆3년간 대장정 끝에 1척만 귀환

​

대서양을 건너 적도를 지난 함대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잠시 머문 후 다시 남쪽바다

로전진했어요. 겨울을 나려고 1520년 3월 아르헨티나 푸에르토 산훌리안에 입항해 거의

5개월을 보내기도 했죠. 지친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마젤란은 이를

진압하고 앞으로 나아갔어요.

​

마젤란 함대는 1520년 10월 한 해협(후에 '마젤란해협'이라 부름)을 통과하기 시작했어요.

약 350마일(약 563㎞)밖에 안 되는 이 해협을 통과하는 데 약 40일을 보냈습니다.

▲페르디난도 마젤란의 항해 경로

▲남아메리카 마젤란 해협 위치도

 

험난한 해협을 건너 처음 마주한 대양은 매우 잔잔했어요. 마젤란은 이를 보고'잔잔한 바다'

라는뜻의 '오세아노 파시피코', 즉 오늘날 우리가 아는 '태평양'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바다는 잔잔했지만, 약 3개월에 걸친 태평양 항해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한 선원은 '굶어

죽지 않으려고 닻줄을 덮어씌운 소가죽도 먹었다.

​

가죽이 여러 해 동안 비바람에 절어 돌처럼 딱딱해졌기 때문에 네댓새를 바닷물에 담가놓

아야 했다. 그런 다음 불에 약간 구워 삼켰다'는 기록을 남겼어요.

​

망망대해 끝에서 마침내 육지(현재의 괌)를 발견한 마젤란 함대는 곧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어요.

​

하지만 마젤란의 항해는 필리핀에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1521년 3월 필리핀 제도에 도착

한 함대는 세부섬으로 이동했어요.

​

마젤란은 세부 통치자 라자 후마본에게 '카를로스'라는 세례명을 주며 우호 관계를 유지

했죠. 맞은편에 있는 막탄섬이 세부에 대항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해 4월 부하 60여

명을 이끌고 막탄을 정복하러 떠났습니다.

​

하지만 그곳에서 1500여 명이나 되는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최후를 맞이했습니다.마젤란

함대 선원은 약 100명만 생존했고, 남은 배도 2척뿐이었어요.

​

다행히 남은 이들은 11월 말루쿠제도 티도레섬에 도착해 배 2척 가득 향료를 실을 수 있었

어요.그런데 돌아오는 과정에서 배 한 척은 포르투갈인에게 나포돼 난파되고,'빅토리아호'

단 한 척만 인도양을 건너 희망봉을 돌아 1522년 9월 세비야항으로 돌아왔어요.

​

약 3년 대장정에서 돌아온 선원은 단 18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배 한 척이 싣고 온 향료

는 모든 항해 비용을 충당 하고도 이익을 남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 1519년 9월 20일 스페인에서 출항하는 마젤란의 함대를 그린 목판화.

▲대항해시대의 대서양.태평양 항해 경로

▲1612년 재간(再刊)된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의 지도책 '세계의 무대'에 표시된 '빅토리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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