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억새가 수놓은 ‘조선의 명당’ 동구릉(東九陵),  한서린 단종 비 사릉(思陵).

▲경기 구리 동구릉의 건원릉.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봉분을 억새로 덮었다. 봉분

아래로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이 차례로 늘어섰고, 그 둘레를 가을빛 숲이 감쌌다.

해마다 억새 만개 시기에 맞춰 시행하는 능침 특별개방 때 찍은 사진이다. 

 

건원릉(健元陵)의 봉분은 억새를 이고 있다. 조선 왕릉 가운데 잔디 대신 억새로 덮인

무덤은 이곳 하나뿐이다.

 

가을이 깊어 억새 이삭이 풍성해지면 봉분 전체가 은빛으로 일렁인다. 그 아래 태조

이성계가 누워 있다. 올가을 그 봉분 곁에 오를 수 있는 날은 단 엿새. 11월 3일부터

8일까지다.

 

국내 여행이 갈수록 짧아진다는 통계가 있다. 멀리 가지 않고, 오래 머물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고,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은 탓이리라. 떠날 형편이 넉넉지 않다지만

그래도 가을은 온다.

 

어디로 떠나도 좋은 계절이다. 서울 동쪽 경계를 넘자마자 600년 동안 함부로 베지

못한 숲이 있고, 그 숲 깊숙이 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다.

 

경기 구리의 동구릉(東九陵)과 남양주의 사릉(思陵). 이곳에는 침묵과 평온이 고여

있다. 억새가 아니어도 가을을 흠뻑 들이기에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가깝고, 가는

길도 쉽다.

 

반나절이면 두 곳을 다 걷는다. 왕릉을 잔디 언덕과 석상 몇 기로만 기억한다면 그건

소풍의 기억이다. 언덕 하나하나에는 곡절이 묻혀 있다.

 

동구릉의 두 왕은 끝내 바라던 자리에 눕지 못했고, 사릉에 누운 왕비의 남편은 멀리

영월에 묻혔다.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과 남양주시 사릉(思陵) 위치도.

▲곡장(무덤 담장) 뒤쪽에서 내려다본 건원릉 봉분. 오후에 가면 역광을 받아 빛나는

은빛 억새를 볼 수 있다.

 

◆억새로 뒤덮인 무덤

 

동구릉 매표소를 지나면 갈참나무와 소나무가 길 쪽으로 기울어 터널을 이룬다. 두꺼운

마른 잎이 발밑에서 부서진다. 가을이 바삐 오는 중이다.

 

동구릉은 도성 동쪽(東)의 아홉(九) 능. 1408년 태조가 처음 이 숲에 묻힌 뒤, 아홉 능이

다 차기까지는 447년이 걸렸다.

 

재실(齋室) 앞에서 길이 갈린다. 여러 갈래 길이 저마다 숲을 가르고 능으로 든다.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은 그 가운데 가장 깊숙이, 동구릉의 한가운데 있다.

 

건원릉 앞에 다가서면 봉분은 보이지 않는다. 사초지 언덕이 높아서다. 능마다 사정이

비슷해, 언덕이 낮은 곳에서도 풀밭 위로 문인석과 무인석의 어깨와 석마(石馬)의

잔등이 겨우 보일 뿐이다. 무덤은 산 사람의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놓였다.

 

그 높이에서 왕은 정자각과 홍살문을, 그리고 수백 년 뒤의 사람을 내려다본다.곡장

(봉분 담장) 뒤로 올라서야 건원릉은 제 얼굴을 드러낸다. 봉분은 억새 덤불에 묻혀

있다.무덤 위의 억새가 바람의 결을 따라 한쪽으로 기운다.

 

정면에서는 누렇게 바래 보이던 억새가 뒤편에 서서 해를 마주 보자 솜털 하나하나가

희게 빛난다. 봉분 아래로 흘러내린 억새는 병풍석을 반쯤 가렸다.

 

병풍석에 새겨진 구름과 문인상이 선명하다. 돌 양과 돌 호랑이가 봉분을 등지고 바깥

을지키고, 석물들은 정자각 쪽으로 줄을 섰다. 그 너머로 산줄기가 겹치고, 지평선

끝에 아파트 몇 동이 걸렸다. 600년째 왕이 내려다보는 풍경이다.

 

태조가 죽어서 눕고 싶었던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간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곁을 원했다. 생전에 지금의 서울 정동, 영국대사관 근처에 있던 정릉(貞陵) 곁에 자기

자리까지 잡아 두었다. 그러나 아들 태종은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태종에게 신덕왕후는 계모였다. 자기와 왕위를 다툰 두 이복동생의 어머니. 태종은

아버지 태조를 정릉에 묻어주긴커녕, 계모가 묻힌 정릉을 파헤쳐서 도성 밖으로

쫓아 보냈다. 성북구 정릉동이 그 자리다.

 

계모 무덤을 둘렀던 돌은 홍수에 무너진 광통교를 다시 놓는 데 썼다. 거꾸로 박힌

그 돌을 지금도 청계천 광통교 아래에서 볼 수 있다.

 

태종의 친모 신의왕후는 조선을 세우기 전에 죽어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개성 땅에

누워 있다. 그 무덤의 제사를 해마다 가을, 건원릉 정자각에서 대신 지낸다.

▲동구릉 역사문화관에 전시된 건원릉의 옛 고석. 600년 넘게 혼유석을 받치다

깨진 채 2024년 새 돌에 자리를 내줬다.

 

◆활과 칼을 내려놓은 왕

 

말년의 태조는 쓸쓸했다. 아들들이 서로 칼을 겨눈 뒤 왕위를 내놓고 한동안 고향 함흥

에 머물다 돌아왔고, 궁 안에다 덕안전을 지어 불도에 마음을 붙였다.

 

1408년 일흔넷으로 창덕궁에서 숨졌다. 그의 자리는 죽은 뒤에야 정해졌다. 몇 곳의

후보지가 퇴짜를 맞은 끝에 검교참찬(명예고문격) 벼슬의 김인귀가 말했다.

 

“내가 사는 검암에 길지가 있다.” 가 보니 과연 좋았다고 실록은 적었다. 충청과 풍해,

강원에서 장정 6000명을 불러 모았고, 자리를 정한 지 석 달 만에 장례를 치렀다.

나라를 세운 왕의 영원한 거처가 그렇게 정해졌다.

 

건원릉의 억새에는 사연이 붙어 다닌다. 고향 함흥에 묻어 달라는 태조의 유언을

태종이 함흥의 흙과 억새로 대신했다는 이야기다.

 

기록은 그보다 한참 늦다. 무덤을 쓰고 221년 뒤인 1629년, 인조실록이 처음으로

태조의 유언에 따라 ‘북도(北道)의 억새’를 썼다고 적었다. 함흥이라는 지명은 없다.

억새는 해마다 한식날 단 한 번 베이고, 가을이면 다시 봉분을 뒤덮는다.

 

비각 안에는 신도비가 웅장하게 서 있다. 태조의 일대기를 새긴 비문은 권근이 왕명

을받아 지은 것이다. 비문은 그의 죽음을 ‘활과 칼을 내려놓은 일’로 적었다.

 

1398년 왕자의 난에 이르면 비문은 정도전이 ‘어린 서얼’을 끼고 일을 꾸몄다고 적는

다. 그 서얼은 태조가 세자로 점찍었던 막내 방석이다. 방석과 그 형 방번에 대해서

는 ‘먼저 죽었다’는 한마디뿐이다.

 

그해 가을 이방원이 군사를 일으켰고, 궁에서 쫓겨난 두 형제는 귀양길에서 죽임을

당했다. 비석을 세운 이가 바로 두 형제를 죽인 이방원, 태종이다.

 

비각 옆 작은 밭에서는 억새가 자란다. 봉분에서 받은 씨앗을 길러, 한식날 베어낸

빈자리를 메운다.

 

봉분 앞 혼유석(혼이 나와 노닌다는, 제단을 닮은 돌)을 받치던 북 모양의 고석(鼓石)

하나가깨진 채 그 무게를 견디다 2024년 새 돌에 자리를 내줬다.

 

600년을 버틴 그 돌은 입구의 역사문화관에 놓여 있다. 한쪽이 크게 떨어져 나갔고,

새겨두었던도깨비 얼굴은 닳아 윤곽만 남았다. 왕릉을 지키다 박물관으로 내려온

유일한 물건이다.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한 동구릉 숲길. 갈참나무와 소나무가 길 쪽으로 기울어

터널을 이룬다.

 

◆지금 열려 있는 숲길

 

건원릉 곁 휘릉에서 원릉까지 숲길이 이어진다. 봄이면 종 모양의 흰 꽃을 다는 때죽

나무가 많아 ‘때죽나무 숲길’로 불리는 1.4㎞다. 좁은 흙길이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가는 줄기의 나무들이 제법 빽빽하다. 갈참나무와 쪽동백나무 사이에서 복자기나무

가 붉어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단풍 드는 나무 가운데 가장 붉다는 나무다.

 

태조를 묻은 이듬해 처음 소나무를 심은 뒤로, 이 숲은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벨 수

없던 땅이다.숲길은 봄과 가을, 정해진 시기에만 열린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 원릉(元陵)이 있다. 영조가 두 번째 왕비와 나란히 누운 무덤이다.

영조 역시 바라던 자리에 눕지 못했다. 쉰 해 넘게 함께 산 첫 왕비 정성왕후가 먼저

세상을 뜨자, 영조는 고양 서오릉에 아내의 무덤 홍릉(弘陵)을 짓고 그 오른쪽을

비워 두었다.

 

훗날 자신이 누울 자리였다. 하지만 손자 정조가 할아버지를 모신 곳은 효종이 묻혔다

떠난바로 이 빈터였다. 영조가 죽어서 가려 했던 홍릉의 오른쪽은 지금도 비어 있다.

 

원릉 곁 경릉에서는 숲길이 한 갈래 더 갈라진다. 경릉에서 시작해 ‘나무 키우는 곳’까지

오르는 길이다. 궁과 능에 심을 나무를 기르는 묘포로, 길 끝에 너른 터가 열린다.

 

비닐을 덮은 이랑마다 어린 나무가 줄지어 섰고, 그 뒤로 억새밭이 펼쳐진다. 오후 햇살

을 등지고 선 억새 이삭이 분홍빛을 머금은 채 희게 빛났다. 한시적으로 열리는 두 숲길

을 합치면 2.7㎞,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원릉에서 서쪽으로 더 들면 동구릉에서 가장 외진 숭릉이다. 숭릉으로 드는 길은 자로

잰 듯 곧다. 굵은 나무들이 양옆에서 그늘을 드리워 숲은 어둑한데, 길 끝만 햇빛 속에

환하다.

 

거기 붉은 홍살문이 서 있고, 그 너머로 정자각과 봉분이 차례로 겹친다. 휠체어를 탄

여성과 휠체어를 미는 남성이 그 빛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입구 쪽으로 돌아 나오면 현릉이다. 문종과 현덕왕후가 한 정자각을 두고 두 언덕에 따로

누웠다. 단종의 부모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며칠 만에 숨졌는데, 아들이 왕위에서

쫓겨난 뒤에 이미 죽은 몸인데도 왕후 자리를 빼앗겼다. 72년이 지나서야 복위돼 남편

곁으로 왔다.

 

그때 두 무덤 사이의 소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어 베어내니, 두 무덤이 서로 마주 보게

됐다고 중종실록은 적었다.

 

그 아들 단종은 서울에서 가장 먼 왕릉인 영월 장릉에, 며느리는 남양주 사릉에 따로

묻혔다. 사릉은 동구릉에서 차로 20분 남짓이다.

 

동구릉을 반나절 걷고 나면 해가 기울 무렵이 되는데, 그 시간에 닿기 좋은 곳이다. 찾는

이가 드문 작고 한적한 그 능에 평생 단종을 그리워한 한 사람이 누워 있다.

▲동구릉 입구의 세게문화유산 기념비.

▲각 능을 연결하는 길은 울창한 숲길이다.

▲동구릉(東九陵)  각릉 위치도

◆9개의 능과 그 주인들

능 이름
능의 주인
생애와 업적
건원릉
태조
조선을 세운 제1대 임금이다.
현릉
문종과 현덕 왕후
문종은 세종 대왕의 맏아들이자 조선의 제5대 임금이다. 학문이 깊고 어진 임금이
었으나몸이 약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2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목릉
선조와 의인 왕후, 인목 왕후
선조는 제14대 임금이다. 인재를 등용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지만, 붕당이
생겨나 갈등이일어나고 일본의 침공으로 임진왜란을 겪었다.
휘릉
장렬 왕후
제16대 임금인 인조의 두 번째 왕비이다.
숭릉
현종과 명성 왕후
현종은 제18대 임금이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활자를 만드는 등 좋은 정치를
펼쳤지만,당쟁이 더욱 심해졌다.
혜릉
단의 왕후
제20대 임금인 경종의 왕비이다.
원릉
영조와 정순 왕후
영조는 제21대 임금이다. 당쟁을 막는 탕평책,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여
주는 균역법,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듣는 신문고의 부활 등 좋은 정치를 펼쳤다.
수릉
문조와 신정 왕후
문조는 제23대 임금인 순조의 아들이다. 세자의 자리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나
나중에추존된 임금이다. 익종으로도 부른다.
경릉
헌종과 효현 왕후, 효정 왕후
헌종은 제24대 임금이다. 8세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순원 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천주교 박해와 삼정의 문란 등 정치가 어지러웠다.

▲남양주 사릉 능역 안 진산군 부인 묘터에 홀로 남은 문인석. 묘는 1983년 옮겨 가고

석물만 남았다.

 

◆사릉(思陵)의 여윈 소나무

 

해 질 무렵 사릉에 닿았다. 낮게 기운 해가 사초지에 소나무 그림자를 줄무늬로 깔았다.

정자각 앞을 노부부 한 쌍이 천천히 지났다. 맞배지붕을 얹은 정자각은 ‘丁’ 자라기보다

네모에 가까울 만큼 아담하다. 언덕 위 봉분은 작다.

 

곡장은 낮고, 석물은 봉분 앞에 오종종하게 모였다. 무석인이 없고, 병풍석도 난간석도

없다. 억새를 이고 병풍석을 두른 건원릉을 보고 온 눈에 사릉은 유난히 단출하다.

 

정순(定順)왕후는 열다섯에 왕비가 됐다. 남편 단종은 한 살 아래였다. 혼례를 서두른

이는 숙부 수양대군이었다. 이듬해 단종은 그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겼고, 2년 뒤

영월에서 죽었다.

 

왕비는 열여덟이었다. 군부인으로 낮춰져 궁을 나와, 왕실 여인들이 출가해 머물던 동대

문밖 정업원에 몸을 붙였다.

 

거처와 양식을 주겠다는 세조의 뜻을 물리치고, 왕비는 옷감에 자줏물을 들여 댕기와

저고리 깃,고름과 끝동을 지어 팔며 살았다고 전한다.

 

물을 들였다는 샘은 서울 창신동에 ‘자주동샘’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바위 아래 돌을

둘러 샘 자리를 표시해 두었다.

 

끼니를 대 주던 이웃 여인들을 조정이 막아서자, 여인들이 남자는 드나들 수 없는 채소

시장을 열어 몰래 먹을거리를 건넸다는 이야기가 19세기 서울지리지 ‘한경지략’에 실려

있다.정순왕후가 날마다 동쪽 봉우리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 봉우리가 지금의 종로구 동망봉이다. 두 세기 반이 지난 1771년, 일흔여덟의 영조가

정업원 옛터를 찾아 손수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비를 세웠다.

 

동망봉바위에도‘동망봉’ 세 글자를 새겼지만, 일제강점기 그 자리에 채석장이 들어서며

바위째깨져 나갔다. 영조는 같은 해 사릉 앞에도 표석을 세웠다. 아내 곁에 빈자리를

남겨 둔 채 늙어 가던 왕은 왜 이렇게 마음을 썼을까.

 

정순왕후는 남편 단종을 잃고 64년을 더 살았다. 세조와 예종, 성종, 연산군을 지나 중종

때인1521년 여든둘로 눈을 감았다. 임금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이었다. 말년은 남편의

조카 정미수의 집에서 보냈다.

 

왕비가 아니었으므로 장례는 대군 부인의 예를 따랐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시집간

해주 정씨 집안이 제 선산에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냈다.

 

◆생각할 사(思)

 

1698년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그도 왕비의 자리를 되찾았다. 숨진 지 177년 만이다.

무덤은 능이 됐고, 남편을 평생 그리워했다 하여 ‘생각할 사(思)’ 자를 받았다.

 

능역 안의 남의 무덤은 옮기는 것이 법도였지만, 숙종은 해주 정씨의 묘들을 그대로 두게

했다. 그 무덤들은 지금도 사릉 능역 안에 있다. 왕비의 마지막을 지킨 정미수의 무덤도

능침 아래 있다.

 

정씨 집안은 그 뒤로 조상 무덤가의 나무 한 그루를 베려 해도 나라에 허락을 구해야 했다.

조선 왕릉 가운데 능역에 사가(私家)의 무덤이 남은 곳은 여기뿐이라고 한다.

 

능역 깊숙한 풀숲에 문인석 한 쌍이 서 있다. 중종의 아들 해안군의 첫 부인 진산군 부인의

묘가있던 자리다. 1983년 묘는 고양으로 옮겨 가고 돌만 남았다. 관모와 어깨를 검은 이끼

가 덮었고,발치에는 쓰러진 돌 하나가 누워 있다.

 

올봄 사릉의 들꽃이 영월로 갔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한 뒤 두 사람을 한데 묻어

달라는 청원이 잇따랐지만, 세계유산인 왕릉을 옮길 수는 없는 노릇. 대신 국가유산청은

사릉 양묘장에서 기른 쑥부쟁이와 벌개미취, 맥문동 같은 들꽃 800여 본을 영월

장릉에 옮겨 심었다.

 

보랏빛 꽃만 골랐다. 자줏물을 들이며 살았다는 왕비를 위해서다. 꽃이 심긴 자리 옆에는

1999년 사릉에서 기른 묘목을 옮겨 심은 소나무, 정령송이 먼저 자라고 있었다. 앞으로

는 해마다 가을이면 두 능에서 씨앗을 받아 이듬해 한식날 서로 바꿔 심는다고 했다.

 

사릉의 능침 뒤로 775m의 소나무길이 돈다. 봄과 가을에 개방하는 이 길은 지금 열려 있다.

키 크고 여윈 소나무들이 붉은 줄기를 엇갈려 세웠고, 그 발치를 활엽 관목이 초록으로

덮었다.해가 더 기울자 그림자가 사초지를 건너 동쪽으로 길게 누웠다. 왕비가 날마다

바라봤다는 쪽이다.

 

◆두 명의 정순왕후

 

동구릉의 원릉에서 영조 곁에 누운 왕비와 사릉의 주인은 둘 다 ‘정순왕후’다. 영조의 계비

는貞純, 단종의 왕비는 定順이다. 둘 다 열다섯에 왕비가 됐다는 것까지 닮았다.

 

그 뒤의 삶은 딴판이었다. 영조의 계비는 훗날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스스로

를 ‘여주(女主)’라 칭했다. 조정을 쥐고 흔든 왕실의 어른이었다. 단종의 왕비는 열여덟에

남편을 잃고 궁 밖으로 쫓겨나 64년을 살았다. 305년 차이로 ‘두 명의 정순왕후’가차로

20분 떨어진 두 능에 누워 있다.

◆ 여행 정보

 

◇동구릉=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지하철 8호선 동구릉역에서 가깝다. 11월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1000원인데,

10월 29일부터 11월 15일까지는 무료다.

 

주차는 승용차 기본 30분 500원, 이후 10분마다 200원으로 출차 때 신용카드로 낸다.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은 하루 네 번. 오전 10시, 10시 30분, 오후 1시와 3시에

있다. 031-579-4900

 

◇건원릉 능침 특별개방= 11월 3∼8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각 1시간. 사전 예약은 마감

됐고 회차마다 현장에서 10명을 선착순으로 받는다. 억새는 해를 마주 보는 오후

회차에 더 희게 빛난다.

 

◇숲길 개방= 동구릉의 휘릉∼원릉, 경릉∼나무 키우는 곳(육묘장) 구간(2.7㎞)과 사릉의

능침 뒤 소나무길(775m)이 11월 29일까지 열린다.

 

◇사릉=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동구릉에서 차로 20분 남짓. 대중교통으로는

경춘선 금곡역이나 사릉역에서 버스로 갈아탄다. 월요일 휴관. 031-573-8124

 

 

강경 젓갈시장ㅡ들리느냐? 젓갈 익어가는 소리!”...김장철 맞아 찾아간 강경엔...

▲매달 4·9일로 끝나는 날 오일장까지 더해지는 '강경 대흥시장'의 젓갈 골목. 짭짜름한

젓갈 냄새가 손님을 먼저 반긴다. 인심 좋게 생긴 젓갈집 주인이 새우젓을 담고 있다.

 

​“감칠맛 내려면 이 정도는 넣어줘야 혀유~.” 한 강경 젓갈 상인의 말에 서울 손님이 받아

친다. “소금도, 젓갈도 비싸져서 김장해 먹기 겁난다니까! 아유,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

데 좀더 담아줘요.

 

 주거니 받거니 흥정하는 사이에 새우 등 터지고 있는 내 이름은 새우젓. 그중에서도

몸값 비싼 ‘육젓’이올시다.

​

살이 통통하게 올라 ‘리즈 시절’ 아니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던 작년 6월쯤 서해 신안

어느 바다에서 젓새우잡이 어망에 포획된 나는 선상에서 바로 천일염 샤워를 하고서

그 길로 경매를 거쳐 이곳 강경으로 오게 되었지.

​

강경의 한 젓갈상에 정착한 후 줄곧 저온 저장고에서 지내다가 밖으로 내주기에 ‘특별

사면이라도 되나?’ 잔뜩 기대했는데, 아니 글쎄 김장철이라잖아!

​

언제 팔려갈지 모르는 신세지만, 드럼통에 담겨 따스한 가을볕을 쬐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 한편이 몽글몽글해지네. 짭조름한 짠내가 나는 강경은 나 같은 젓새우들에게

낯설지가 않은 도시라네.

​

곰삭은 맛과 풍경이 공존하기에 시간 여행자들이 사랑하는 이 소도시, 강경 이야기

를 ‘전지적 새우젓 시점’으로 들려주리다.

▲충남 논산 강경 젓갈시장 위치도.

 

◆서해 젓갈 일번지

​

금강을 곁에 둔 강경은 유유히 흐르는 강처럼 잔잔하고 평온한 풍경이 이어져. 그러다

매년 10월 중순쯤이면 금강 둔치 일원에서 ‘논산 강경 젓갈 축제’가 떠들썩하게 열리지.

​

올해로 27회째인 이 젓갈 축제를 시작으로 이 도시는 11월 말까지 김장철에 ‘젓갈 투어’

를 위해 찾는 발걸음이 늘어나. 마트나 새벽 배송으로도 김치를 쉽게 사먹는 시대에

누가 여기까지 와서 젓갈을 사가느냐고?

​

손님들 연령대가 높기는 해. 대체로 50~70대 주부가 많아. 염도가 어느 정도인지, 군내

가 나는지, 싱싱한 새우를 썼는지 직접 맛보고 고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야.

​

얼마 전 아내·처제와 함께 다녀간 박한기(70)씨는 “10년째 단골인데, 겨우내 먹을 김장

에 쓸 젓갈이다 보니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같은 곳에서 사게 된다”며 “매년 이

시기쯤 젓갈 사러 이곳에 다녀가야 겨울 맞을 채비를 한 기분”이라고 했어.

▲6월에 잡은 젓새우로 담근 '육젓'은 시중에서 '오젓'이나 '추젓'보다 비교적

몸값이 높다. 잘 숙성돼 뽀얀 국물을 머금은 육젓이 맛이 좋다.

​

‘강경전통맛깔젓협동조합’에 따르면 강경은 전국 젓갈 유통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네. 젓새우 어선에서 1차 염장을 한 젓갈들은 이곳 강경이나 곰소, 광천, 강화도

등 대형 젓갈 도매상으로 불뿔이 흩어져서 저장·숙성 과정을 거쳐. 도매상들은

집집이 저온 저장고나 대형 냉장고를 갖추고 있는데, 염장해온 젓새우들을 일정

기간 숙성시킨 후 꺼내다 팔지.

​

강경은 젓갈들을 익히는 장독대 같은 곳이야. 현재 강경 젓갈 시장과 젓갈 거리를 중심

으로 140여 젓갈 점포가 밀집돼 있고 주종목은 나 같은 새우젓. 멸치 액젓과 황석어젓,

까나리젓, 갈치젓을 비롯해 밥반찬으로 즐겨 먹는 양념 젓갈까지 없는 게 없어. 내륙

강경에 이처럼 많은 젓갈 집이 들어서 성업하게 된 이유가궁금하다고? 그건 금강

그리고 ‘강경 포구’와 관계가 깊어.

 

◆강경 젓갈의 내력

​

강경 포구는 조선 시대 후기 서해를 누비던 어선들이 금강 물길을 통해 이곳까지 들어와

서해 수산물을 풀어 파시(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를 형성하며 일찌감치 ‘수산물

핫플’이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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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포구는 조선 후기부터 해방 전후까지 원산항과 함께 2대 포구에 꼽혔고, 강경시장은

평양·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자리 잡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지.

​

한때 하루 100여 척이 물길 따라 수산물과 소금을 싣고 드나들었고, 상인들의 손을 거쳐

전국 각지로 공급됐다고 해. 저장고가 마땅치않던 시절, 객주들이 공급 후 남은 수산물

을 보관하기 위해 염장하기 시작한 게 강경 젓갈의 시발점이래.

​

좀 더 자세한 얘기는 내가 정착해 있는 ‘심씨네 젓갈(신진상회)’ 주인아저씨에게 들을 수

있어. ‘신진상회’라고 이 구역 젓갈 원조 집으로 통하지. 우리 선대 할아버지의 할아버

지도 이 집을 거쳐갔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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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이자 1대 심희섭(90)씨에게 가업을 물려받은 2대 주인 심철호(63)씨에 따르면 “

강경포구 마지막 객주였던 아버지가 1952년 지금의 심씨네 젓갈 자리에서 생선과

젓갈을 팔기시작했는데 일대에 젓갈 좌판, 점포들이 20여 곳으로 늘면서 젓갈 거리가

형성됐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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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상회’란 이름으로 세무서에 신고한 것은 1957년. 2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오

던 젓갈을 상품화해 본격적으로 내다 팔기 시작한 집이란 얘기지.

▲1952년 강경 염천교 부근에서 '신진상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젓갈을 판매하기

시작한'심씨네 젓갈'. 강경 포구의 마지막 객주였던 1대 심희섭씨에 이어 2대

심철호씨의아내 안효주(왼쪽)씨가 저온 저장고에서 직원과 함께 젓갈을 통에

나눠 담고 있다. 

​

6·25 전쟁 후 배고팠던 시절 열두 달 반찬으로 상에 오르는 건 김치와 젓갈뿐

이었으니 맛이 소문나면서 전북 등 인근 지역에서도 가을철이면 젓갈을 사러

모였다”는 게 주인 심씨의 얘기야. 당시엔 커다란 들통을 들고 기차 타고 와서

젓갈을사 손수레로 운반해 다시 기차에 오르는 풍경이 흔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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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고무 대야를 이고 다니던 젓갈 행상들도 강경에만 50~60명이나 될 정도

로 젓갈로이름을 떨쳤대. 심희섭씨를 비롯해 이 동네 산증인인 ‘옥녀봉 구멍

가게’ 주인 송옥례(89)씨 등 노인들은 “1970년대까지 강경에 배가 드나들던

때가 호시절이었다”고 기억하더라고.

▲시집 와서 50년 째 이 집에 살고 있다"는 '옥녀봉 구멍가게' 송옥례씨는 "포구로

배가 드나들던 시절에는 이 구멍가게 근처로도 집이 많았다"며 누구에게나

포구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80년대 말 금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강경은 포구 기능을 상실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나 싶었어. 강경 젓갈이 다시 알려지게 된 건 1997년, 강경 젓갈 시장 번영회 상인

들이 강경 젓갈 되살리기 운동의 하나로 십시일반 기부금을 모아 ‘강경 맛깔젓

축제’를 열면서 부터였다네.

​

28개 젓갈 점포가 참여해 시작한 축제가 해를 거듭하며 전국 축제로 알려지면서 강경

은 젓갈로 다시 떠오른 거야. 지금은 도로변마다 ‘젓갈’ 간판을 단 도소매 점포가 이어

져 있고,매달 4·9일로 끝나는 날 오일장이 서는 ‘대흥시장’의 젓갈 골목에는

소매상들이 밀집해 있어.

​

점포마다 산지에서 만든 젓갈을 가져오니 숙성 환경과 시간에 따라 맛의 차이가 약간

나는데 일반인들은 구별하기 어려울 거야. 다만 저마다 ‘조미료를 넣지 않은’

‘저염’을 내세우고 있어.

​

다 같은 새우젓 아니냐고? 잡은 시기에 따라 새우젓은 5월에 잡은 ‘오젓’, 6월에 잡은

‘육젓’, 가을에 잡은 ‘추젓’ 그리고 첫 서리가 내리고 잡은 ‘동백하젓’으로 구분하는데

그중 나처럼 천일염으로 염장한 육젓이 시중에선 비싸게 팔려. 육젓은 오젓보다

크기가 크고 통통한 게 특징이야.

​

새끼손가락 한마디만 한 크기로 잘 숙성되면 뽀얀 우윳빛을 띠지. 11월 초 강경 젓갈

시장 육젓은 500g 기준 대략 5만원이야. 하지만 잡은 시기에 따라 육젓을 높이 평가

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는 쪽도 있어.

​

28년 차 식품 MD이자 ‘오는 날이 장날입니다’ 등의 저자 김진영 MD에 따르면 “발효

맛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새우젓은 잡는 시기나 크기보다 숙성 기간이 중요하다”

며 “최소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일정한 온도에서 잘 숙성시킨 새우젓을 쓰면

더욱 맛있는 김장을 담글 수 있다”고 하니 새우젓 고를 때 참고를.​

▲금강과 대흥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강경 갑문'이 남아 있다. 강경이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음을 알려주는 흔적이다.

 

◆포구 흔적 간직한 강경 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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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천교쯤에서 천변 따라 금강변으로 10분 정도 걷다 보면 등록 문화재인 ‘강경 갑문’과

만날 수 있어. 1924년 금강과 만나는 대흥천에 설치한 이 갑문은 조석(潮汐)에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 천으로 흘러드는 물줄기 수위를 조절해. 가둔 물을 담수화해서 농업

용수로 공급하는 목적도 있었는데, 주로 안정적인 하역을 위해 설치한 것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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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갑문은 강경이 포구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흔적이기도 해. 강경 포구가 성시를

누릴당시엔 물을 가두는 게 신기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몰려들기도 했대.

하지만금강 하굿둑이 생기고, 수해 방지용 수문이 설치되면서 강경 갑문 역시 기능을

상실하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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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월을 입고 천변에 낡은 구조물처럼 자리해 있는데 한쪽 벽면에 그려진 배 그림

이나 문화재 안내판이 없다면 모르고 지나치기 쉬워. 내가 정착해 있는 이곳 강경은 강경

갑문을 포함해 근대 역사 투어, 성지 순례 코스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

▲강경을 대표하는 '근대'와 '젓갈'이 공존하는 길. 강경역사관으로 활용 중인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오른쪽)과 젓갈상회가 마주 보고 있다.

 

강경 역사관(구 한일은행 강경 지점) 앞 왕복 2차로 도로에서 보면 길을 사이에 두고 근대

건축 유산인 구 한일은행 강경 지점과 대형 젓갈 상회가 마주 보고 있어. 강경의 대표적인

명소와 명물이 마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듯 공존하는 것도 이곳만의 풍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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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역사관으로 활용되는 구 한일은행 강경 지점은 1905년 문을 열어 해방 후 한일은행

강경지점으로 사용됐다지. 붉은색 벽돌조의 고풍스러운 건물 안에는 옛 강경역 열차

시각표와기증 유물들이 있는데, 아담한 근현대사 박물관같아. 반공 소년 한완봉의

이야기 등 강경의 인물 이야기도 살펴볼 수 있어.

▲강경 역사관의 전시물. 강경 관련 기증품과 함께 강경 포구의 번성기

풍경 사진도 볼 수 있다.

▲강경 역사관 뒷마당은 '강경구락부'란 이름으로 꾸며져있다. 근대를 테마로 한

드라마 세트장 같은 공간에 카페와 호텔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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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역사관 뒷마당 강경 구락부엔 근대를 주제로 꾸민 카페, 호텔이 들어서 있지.

앉아서 커피 한 잔만 마셔도 근대 ‘모단 걸’이 된 것처럼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일

것만 같아.현재 ‘강경 역사 문화 안내소’로 쓰는 ‘구 강경 노동조합’도 강경의

번성기를 추측해볼 수 있는 건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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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문화 해설사는 “인천항이나 부산항처럼 노동조합이 설립됐다는 건 당시 포구

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더라고. 그거 알아?

 

충남 지역에서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 강경이었다는 거. 강경포에서 시작해

강경 포구, 강경 갑문, 구 강경 노동조합 등 ‘근대 역사 길’ 코스는 젓갈 거리와 젓갈

시장을 두루 지나니 슬슬 걸어볼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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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갈 이야기를 들으니 뜨끈한 쌀밥 생각이 절로 나지? 젓갈 정식은 젓갈을 쉽게 맛

볼 수 있는 강경의 대표 음식이야. 양념 젓갈의 세계에서 사실 난 별로 인기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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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손식당’ 등에서 젓갈 정식을 주문하면 지금부터 제철인 시원한 어리굴젓부터

씹는 맛이 좋은 꼴뚜기젓, 짭조름하고 담백한 명란젓, 고소한 청어알젓까지 최소

십여 가지에서 스무 가지 정도 젓갈을 맛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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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 따라 삼겹살이나 생선구이, 누룽지 등을 추가해 먹을 수 있는데, 강경에선

삼겹살에 쌈장 대신 새우젓을 곁들여 먹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흰쌀밥에 양념 젓갈을 골고루 맛볼 수 있는 '젓갈 정식'은 강경의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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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시고 쓰고 짠 인생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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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후 금강을 내려다볼 강경 제일 전망대를 찾는다면 옥녀봉에 올라봐. 김무길 연구

부장은“고작 해발 44m 낮은 언덕이지만 옥류봉 전설과 신사의 흔적, 성지 순례

코스를 품고 있는 곳”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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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야 지대인 강경에선 산이나 다름없는 곳이라서 주민들도 즐겨 찾아. 계단과 산책

로가 이어져 남녀노소 오를 만해. 옥녀봉 정상엔 봉수대와 커다란 느티나무가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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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에 가면 옥녀봉 바로 맞은편으로 떨어지는 근사한 일몰을 감상할 수 있지.

맑은 날엔 얼마나 황홀한지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하고, 얼굴까지 불그레하게 물들

이는 것 같다니까. 소도시에 눅진하게 녹아드는 이 빛은 시간을 녹이고

삭히는 힘을 가진 것만 같아.

▲해 질 녘 옥녀봉은 가을볕을 배웅하기 좋은 장소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두커니 서 강과 포구의 시간을 추억하는 듯하다.

▲강경 일대를 배경으로 쓴 박범신 작가의 작품 '소금' 등과 만나는 '강경산 소금문학관'.

문학 산책을 하고 나올쯤 금강 너머 노을이 지고 있었다.

▲헤드폰을 착용하면 박범신 작가가 육성으로 작품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소금'을 두고 "인생의 맛"이라고 했다.

 

오르내리는 길 ‘소금집’ 툇마루나 ‘강경산 소금 문학관’에 앉아 잠시 쉼표를 찍어가는 것도

좋아.논산 출신 박범신 작가가 강경 일대를 배경으로 쓴 장편소설 ‘소금’ 속 이야기를

녹여놓은 공간이야.

​

가만히 둘러보면 소설 속 이야기가 짠내 실은 바람에 들려오는 듯해. “인생의 맛이

달고 시고 쓰고 짠 소금 같다”고. 그런 소금으로 맛깔나게 숙성시킨 젓갈이야말로

한 점의 인생 반찬 아니겠어?

 

◆강화도 ‘외포항’은 추젓, ‘곰소항’은 잡어젓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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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가볼 만한 젓갈시장

▲새우젓 등 젓갈은 '밥상 위의 조연'이란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하지만

김장철만큼은 주연이다.

 

​전국으로 제철 식재료를 찾아다니는 28년 차 김진영 MD는 “서울과 가까이 있는 김포

‘대명항’이나 인천 ‘소래포구’, ‘외포항젓갈수산물직판장’도 김장철 가볼 만한 곳”

이라고 추천했다.

​

“강화도를 비롯해 서울과 수도권에선 김치를 담글 때 달큼한 생 젓새우를 갈아 넣는

집도 많은데 추천한 곳들은 싱싱한 젓새우를 바로 사 가져갈 수 있는 게 장점”이

라고 했다.

​

선주가 판매하는 곳도 있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젓갈을 살 수도 있다. “6월에 잡은

젓새우로 담근 ‘육젓’이 최고라고들 이야기하지만, 김치를 담글 때는 잘 숙성시킨

‘오젓’이나‘추젓’도 괜찮습니다. 가을에 잡은 젓새우로 담근 추젓만큼은 강화도

것을 알아주니 멀리 갈 필요 없습니다.”

​

김진영 MD에 따르면 새우젓 만들기는 간단하다. 젓새우에 천일염을 약 30% 넣고

저온에서 숙성시키면 끝이다.

 

“새우젓을 고를 땐 멀건 국물이 많이 들어 있는 것 대신 뽀얀국물이 자박하게 깔린

새우젓을 고르세요. 멀건 국물이 많다는 건희석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

‘식탁 위의 조연 같은 주인공 젓갈’을 펴낸 국내 1호 젓갈 소믈리에 강지영 명인은

전북 부안군 ‘곰소젓갈시장’을 추천했다. 우리나라 3대 어장 중 하나인 ‘칠산 어장’,

천일염 생산지 ‘곰소염전’과도 가까이 있어 믿을 만하다.

​

“곰소 젓갈은 입자가 고와 빠른 숙성이 가능한 곰소 천일염을 쓴 젓갈로 김치를 담

그면 맛이 일찍 들고 발효가 잘된다”는 게 강 명인의 설명이다.

​

전북 지역에서 즐겨 먹는 황석어(황새기)젓 등을 비롯해 잡어로 젓을 담근 잡어젓은

곰삭은 맛을 내기에 좋다. 곰소는 다양한 젓갈류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강 명인은 “멸치젓이 유명한 부산, 꽁치젓을 쓰는 포항 등 각 지역의 항 주변에 형성

된 젓갈상도 가볼 만 하다”고 했다.

​

이 밖에 ‘토굴 새우젓’을 내세우는 충남 홍성 광천도 ‘젓갈’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다.

1950~60년대 새우젓을 숙성시키려고 ‘정 하나 들고 팠다’는 젓갈 저장용 토굴

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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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덕하게 말린 우럭에 잘 숙성시킨 새우젓을 넣고 끓여낸 우럭젓국이나 새우젓으

로 양념한 간재미회무침 등 젓갈 투어에 더해 식도락을 주는 음식을 덤으로

맛볼 수 있다.

이 가을 꼭 봐야 하는 영남 알프스 억새군락지. 가장 합리적인 코스

▲경남 밀양 표충사.

 

밀양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영남알프스다. 산내면에 위치한 얼음골

케이블카를 타면 쉽게 오를 수 있다.

 

밀양버스터미널에서 3회 운행하는 농어촌버스(1,500원)나 6회 다니는 시외버스로

1시간 여 이동한후 얼음골정류소에서10여 분을 걸으면 케이블카 승강장에 닿는다.

 

영남알프스는 밀양시·양산시, 경북 청도군·경주시, 울산 울주군에 걸친 해발 1,000m

가 넘는9개 봉우리와 능선을일컫는다. 산세와 풍경이 유럽의 알프스에 견줄 만큼

아름답다고 해서불려온 명칭이다.

 

케이블카를 타자 거의 수직으로 오른다. 초속 4m,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약

1.8㎞ 거리를 새처럼 날아 해발 1,020m 고지에 닿는다.

 

수려한 경치가 눈앞에 펼쳐진다.착한 사람에게만보인다는 백운산 중턱의 백호바위도

보인다. 영남알프스의 진짜 묘미는 등산에 있다.

▲영남알프스 등산객들이 억새가 핀 천황재에서 쉬고 있다. 영남알프스 얼음골케이블카를

타고, 천황산에서  재약산으로 발길을 옮기면 고산의 억새평원이 펼쳐진다.

▲사자평에 처음 오르면 국내에 이런 비경이 있었는지 깜짝 놀란다. 특히 억새꽃이 피는

10~11월이 좋다. 표충사쪽에서 출발하면 절집도 둘러보고, 경치 좋은 층층폭포도

볼 수 있다.

 

영남알프스는 영남 중심부에 자리한 산악지대로 울산과 경북(경주, 청도), 경남(밀양, 양산)

의 3개 시도에 걸쳐있다.

 

산정에는 억새초원을 이룬 고위평탄면이 많아 유럽의 알프스에 빗대어 ‘영남 알프스’로 부르

는데, 억새가 장관을 이룬 산상고원이 이국적인 곳이다. 지금은 주요 지역이 가지산도립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땅 위에서 치는 파도, 억새. 영남알프스하면 억새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넓은 산군 곳곳에

억새군락이 펼쳐져 있다. 가장 넓은 곳은 약 125만 평의 사자평이며, 이외에도 50만 평의

신불평원, 10만 평의 간월재 등이 있다.

 

가을이 되면 산꾼들뿐만 아니라 평소 산을 즐겨 찾지 않던 이들도 홀린 듯 영남알프스에

올라 황금빛, 혹은 은빛 파도 속에 몸을 던진다. 억새 서핑이다. 

 

◆간월재


간월재는 간월산과 신불산 사이에 위치한 고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억새군락지 중

한 곳으로 산악사진가들에게는 일출일몰 사진 포인트로도 각광받고 있다.

 

일출일몰 사진을 찍기 좋다는 것은, 그만큼 접근성이 좋다는 의미. 배내2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하면 초보자들도 쉽게 오를 수 있다. 간월재까지 5.4km 임도길이 완만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산행보단 산책에 가까운 걷기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반대편 영남알프스복합웰컴센터에서 오르는 길은 4.5km로 거리는 더 짧지만 고도를

약 700m를 올려야 해서 훨씬 어렵다. 

휴게소도 있다. 매일 10~16시30분 운영되며 컵라면(2,000원), 아이스크림(2,000원),

햇반 (2,000원), 생수(1,000원), 초코바(1,000원) 등을판다

▲코스 배내2공영주차장~사슴농장 입구~임도~간월재

거리 편도 5.5km(왕복 11km) 소요시간 2시간(왕복 3시간 30분)

 

◆신불산 억새평원

신불산과 영축산 사이의 고개인 신불재 일대의 억새평원이다. 신불산 정상에서 영축산

으로 이어지는 약 4km의 능선을 따라서 길고 넓게 펼쳐져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해 울산 12경 중 제4경을 떠맡고 있다.

코스는 여러 가지다. 먼저 가장 빠른 건 신불산자연휴양림에서 곧바로 오르는 길이다.

약 3km로 고도는 약 600m 올려야 한다. 보통 산꾼들은 간월산과 신불산, 혹은

신불산과 영축산을 연계하는 식으로 산행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원점회귀 동선은 신불산휴양림 하단지구에서 출발해서 영축산을 먼저

오른 뒤, 신불산을 거쳐 간월재에서 신불산휴양림 상단지구로 내려서는 것이다. 

간월산과 신불산, 영축산을 한 번에 타는 코스도 가능하다. 넷플릭스 <대체 왜 등산을

하는 건데>에서 출연자들이 산행했던 코스다. 

▲코스 신불산자연휴양림~영축산~신불재~신불산~신불산자연휴양림
거리 15km  소요시간 6시간

 

◆ 사자평

재약산 8부 능선에 위치한 사자평은 국내 최대 억새군락지로 꼽힌다. 밀양8경 중 하나로,

워낙 넓고 나무 간벌도 잘돼 있어 광활한 억새밭에 폭 안겨 걸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재약산에 붙어 있지만, 꼭 힘든 산행을 하지 않아도 사자평에 이를 수 있다. 표충사에서

출발해 흑룡폭포와 층층폭포를 거쳐 오르는 계곡 길을 이용하면 된다.

 

수십m에 달하는 시원한 폭포를 보며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곧 사자평이 나온다. 사자평

일원은 여러 갈래의 산책로가 나 있어 입맛대로 돌아보면 된다.

되돌아오는 길은 그대로 계곡길을 되짚어 나와도 되지만 대개 남쪽 임도를 택한다. 무릎이

편하기 때문이다. 임도를 어느 정도 따르다보면 흑룡폭포 인근 지점에서 다시 표충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산길과 임도 등 자전거로 갈 수 있는 대표적인 코스는 천황산 사자평과 신불산

간월재 두 곳이다. 두 곳 모두 장엄한 산세와 산상 억새고원을 감상할 수 있다.

 

여기서는 천황산 사자평 코스를 소개한다.사자평은 천황산과 재약산 정상 부근

해발 800~1100m에 펼쳐진 국내최대 규모의 억새고원이다.

 

북쪽의 배내고개나 서쪽의 표충사 쪽에서 진입할 수 있다. 표충사에서 배내고개

구간은 19km인데, 사자평까지 올랐다가 반대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할 경우,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20km 이상

잡아야 한다.

▲코스 표충사~흑룡폭포~층층폭포~사자평~임도~표충사
거리 10km  소요시간 3시간 30분

 

◆천황재

앞선 군락에 비교하면 작고 아담한 규모다. 하지만 근육질 암릉을 자랑하며 출렁거리는

영남알프스산군과 함께 담을 수 있다는 묘미가 있어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 명소다.

 

최단코스는 표충사에서 치고 오르는 것이지만 이 길을 이용해 오르는 이는 거의 없다.

대개 표충사에서 출발해 천황산과 재약산을 연계한 뒤 사자평을 거쳐 원점회귀한다.

영남알프스 얼음골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등산의 어려움을 획기적으로 줄인 채 천황산

주능선 일대의 억새군락지를 한 번에 볼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상부승강장에 내리면 바로 해발고도 1,000m니 거저먹는 산행이다. 재약산까지 반나절

일정으로 다녀오기 좋다. 1,000m 넘는 산을 두 개나 올라도 획득고도가 500m에

불과하다.

▲영남 알프스는 전체 면적이 약 255㎢이며, 한국 100대 명산에 포함된 신불산 등

9개의 산으로 연결된 산악관광지이다.

 

사계 모두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가을이면 산 곳곳이 억새로 가득한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여 전국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통도사, 운문사, 석남사, 표충사 등 역사 깊은 문화 유적지가 있고, 아름다운 기암

절벽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가지산에는 현재 760여 종의 식물과 우리나라 전체

조류 450여 종 가운데 100여 종의 새가 살고 있어 자연이 만든 거대한

동·식물원이라 불리고 있다.

▲코스 케이블카상부승강장~천황산~천황재~재약산~천황재~샘물상회 터~ 케이블카상부승강장
거리 8km  소요시간 3시간


2026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앤 카슨이 스웨덴에 반드시 가야 할 이유?

▲스웨덴 스톡홀름 감라스탄 풍경, 노벨박물관 앞 광장의 모습

◆문학의 별이 뜨는 도시, 스톡홀름

올가을 문단의 가장 뜨거운 키워드는 ‘앤 카슨(Anne Carson)’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2026년 노벨 문학상의 주인공으로 캐나다 작가 앤 카슨을 호명했다.

 

한림원은 그녀가 구축한 세계를 ‘고전 전통과 유희적으로 대화하며 현대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업’이라 설명했다.

▲스웨덴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스칸디나비아 반도 3국 위치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스톡홀름의 전경

그녀는 낡은 클래식을 해체해 다시금 재단 후 오늘의 언어로 새롭게 매만졌다. 유희와

대담함, 그리고 독창성이란 세 단어는 앤 카슨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우리나라의 한강 작가도 같은 자리에 선 적이 있다. 2024년, 한강 작가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이 꼽은 18번째여성 수상자였고,

앤 카슨이 그 뒤를 이어 19번째 여성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앤 카슨 일러스트 초상화

▲노벨박물관 외관

올해 일흔여섯인 앤 카슨은 수상 소식 앞에서도 뜻밖에 담담했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청소를 하려던 참이었단다.

 

그런 그녀에게 날아든 노벨 문학상의 소식에 카슨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다들 미친 게 아닐까요?” 평생 문학의 언어와

형식을 새롭게 빚어온 작가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세계가 자신의 작품에 보내는 찬사 앞에서도, 그녀의 아침은 차 한 잔과 밀린 집안

일로 시작되고 있었다.

▲노벨 박물관 내부에 위치한 노벨 레스토랑. 시그니처 메뉴는 노벨상 모양의 초콜릿 디저트

▲노벨박물관 내부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1786년 스웨덴 국왕인 구스타브 3세

가 세운 기관이다. 종신회원 18명으로 구성되며, 문학상 심사와 선정을 맡는다.

 

한림원은 스톡홀름 구시가지 감라스탄에 있는 옛 증권거래소 건물에 자리한다. 같은

건물에 ‘노벨박물관’이 있다.

 

노벨박물관에는 역대 수상자들이 수상 후 기증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한강 작가가 기증한 작은 찻잔.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필하던 시절, 그녀는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찻잔에 홍차를 우려 마시는

일상을 반복했다.

 

하루에도 예닐곱 번씩 들여다보던 찻잔은 어느새 집필 루틴이자 창작의 시간을 지탱

하는사물이 되었다. 한강 작가는 본인의 찻잔과 당시 생활습관을 적은 메모를 함께

기증했다. 세계적인 문학상의 영예 뒤에는 이처럼 조용하고 사적인 일상이 있었다.

 

▲노벨박물관에는 다양한 전시품중 하나이다 

▲노벨박물관에 전시중인 수상자들의 물건들.

▲노벨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한강 작가의 메모.

 

▶작은 찻잔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동안 몇 개의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1.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가장 맑은 정신으로 전날까지 쓴 소설의 다음을 이어 쓰기.
2. 당시 살 던 집 근처의 천변을 하루 한 번 이상 걷기
3. 보통 녹차 잎을 우리는 찻주전자에 홍차잎을 넣어 우린 다음 책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한 잔씩만 마시기 


그렇게 하루 예닐곱 번, 이 작은 잔의 푸르스름한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이 당시 내 생활의

중심 이었다.

-노벨박물관에 기증한 한강 작가의 메모

▲스톡홀름의 올드 타운 풍경.

2026년 노벨 문학상 시상식은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릴 예정이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은 그날 밤 어떤 표정으로 한자리에 모일까.

 

평생의연구와 집필을 인정받은 기쁨에 들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믿기지않는 얼굴일까.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시상식을 마친 이들은 스톡홀름 시청으로 향하게된다.노벨상

의 밤은 이곳에서 비로소 축제로 바뀌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스톡홀름 시청사 안쪽, 블루홀에서는 수상자와 왕실 가족,세계 각국

의 초청 인사 등 약 1,300명이 모여 특별한 만찬을 즐긴다

▲스톡홀름 시청의 내부 모습

▲스톡홀름 시청사

스톡홀름 시청사는 건축가 ‘라그나르 외스트베리(Ragnar Östberg)’가 설계했다.

1923년 문을 연 이곳은 스웨덴의 국가적 낭만주의 건축과 북유럽의 전통,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의 영향을 한데 녹여낸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이 시청사에서 가장 유명한 공간이 바로 만찬 장소, 블루홀(Blue Hall)이다.

이 만찬행사는 노벨상의 상징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스톡홀름 시청사를 건축한 라그나르 외스트베리(Ragnar Östberg)

 

사실 블루홀에는 그 이름에 흥미로운 반전이 있다. 블루홀이라는 이름과 달리 내부는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 벽돌로 가득하다.

 

처음 설계할 때 외스트베리는 벽과 공간을 파란색으로 마감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하지만 벽돌 자체가 만들어내는 색감과 질감이 아름다워 이를 그대로 드러내기로

했고, 처음 구상했던 이름은 그대로 남은 것이다.

 

이름과 실체가 다른 이 공간은 오히려 시청사를 대표하는 독특한 건축적 특징이

되었다.

▲노벨상 만찬이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의 블루홀

외스트베리가 이 공간을 설계하며 품었던 생각은 실내에 있으면서도 야외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천장이 있지만, 안뜰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지도록 공간을 구성했고 창과 벽,

천장의 관계를 세심하게 조율했다.

 

이 설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궁전, 특히 베네치아의 건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사실 외스트베리는 블루홀을 이탈리아 궁전의 안뜰처럼 하늘이 열린 공간

으로 설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혹독한 겨울 추위와 폭설을 고려해 결국 지붕을 씌우게 된 것

이다. 블루홀의 넓은 계단 역시 베네치아 도제 궁전의 기념비적인 계단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톡홀름 시청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

계단 맞은편 벽면 위쪽에는 12각 별 하나가 새겨져 있다. 계단을 내려오며 이 별을

바라보면 시선이 가장 자연스럽게 정돈돼 사진을 찍기 좋은 순간이 만들어

진다고 한다. 노벨상의 밤은 이 붉은 벽돌의 푸른 홀에서 절정에 이른다.


 

 

해발 3,650미터,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고산 도시. 수도 ‘라파스(La Paz)

▲해발 약 3,650미터에 위치한 볼리비아 라파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다.

 

볼리비아는 남아메리카 중부에 위치한 내륙국이다. 이곳 행정수도인 라파스는 해발

약 3,650미터 고원에 자리잡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다.

 

도시지만 가파르고 복잡한 지형이 험준한 산길 못지 않은 이곳에서 하늘을 가로지르

는 케이블카는 인기 대중교통수단 중 하나다.

 

멋들어진 관광명소는 많지 않지만,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고산 도시’라는 타이틀이

라파스 여행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볼리비아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남아메리카 볼리비아 위치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중남미 국가들 중  스페인어를 자국의 공용어로 사용하는 지역들.

 

▶남미에서 스페인어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

과테말라, 니카라과,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우루과이, 적도기니, 칠레, 코스타리카,콜롬비아,

쿠바,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푸에르토리코.

▲쾌청한 날에는 케이블카에서 주변 설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생애 가장 높은 곳을 여행한 건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때였다. 최고 높이가 해발 4,200미터

쯤 됐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말 그대로 험준한 산길을 오르는 여행이었으니, 주변이 죄다

하늘에 닿을 듯 쭉 뻗은 거대 산맥이 배경이었다.

 

도시는 물론이고 작은 마을조차 쉬이 찾을 수 없는 매우 높고 가파른 길, 그러니 어느곳을

가더라도 해발고도가 수천 미터에 달한다고 하면 그다지 놀랄 만한 요소가 되지 못했다.

 

라파스에 닿자마자 불현듯 히말라야 트레킹의 추억이 되살아난 건 예상하다시피 이 도시

의 ‘해발고도’ 때문이다.

 

볼리비아의 행정수도인 라파스는 해발 약 3,650미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다. 때문에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고산 도시’라는 별칭이 붙는다.

▲라파스 도로나 길은 평지가 거의 없고 가파른 경사로가 대부분이다.

 

안데스 산맥의 협곡과 알티플라노 고원에 자리 잡고 있는 라파스는 가파르고 복잡한

지형이 험준한 산길 못지 않다. 반면 다른 대도시에 걸맞게 각 지역마다 촘촘히 들어

선 빌딩과 주택, 상점가 등이 얽히고설켜 수치상의 해발고도를 자칫 잊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진 않는다. 도시를 구성하는 도로나 길은 평지가 거의 없는 데다

경사가 다소 가파르다 보니 발걸음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금세 가쁜 숨이 차올라 산속

트레킹의 경험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라파스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엘알토 지역은

해발 약 4,000미터에 달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라파스가 서울이고 엘알토가 인천쯤 된다. 이곳에 위치한 엘알토

국제공항은 세계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국제공항으로 유명하다.

 

남부 외곽 지역은 나름 ‘저지대’라 불리는데 그래 봤자(?) 해발 3,100미터를 웃돈다.

우스갯소리로‘ 라파스 중심부에 머물다 고산병에 걸리면 남부 저지대로 피신하라’

라는 말이 있다.

▲차량과 인파로 높은 혼잡함을 나타내는 라파스 중심부 거리 풍경

 

히말라야 트레킹에 맞먹는 수준의 해발고도 적응기는 라파스 여행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부분이다. 산소가 부족한 이 도시에서 ‘빨리빨리’로 통하는 한국인의 행동양식은 매우

적절치 않다. 나무늘보의 몸놀림과 자세가 필요한 이유다.

 

어차피 라파스 중심부 어디든 혼잡하기 이를 데 없어 속도를 바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인파, 경적을 울려대며 디젤 매연을 뿜어내는 차량들, 여기에 노점

상들의 행렬로 가득한 라파스 도심의 거리는 마치 맥시멀리스트의 세상 같다.

 

도시의 특성은 비단 해발고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마다 폐 속에 미세먼지

가 한가득 들어찬 것 같은 답답함이 가슴을 누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펼쳐

진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고산 도시의 모습은 실로 놀랍고 특별하다.

▲차량과 인파로 높은 혼잡함을 나타내는 라파스 중심부 거리 풍경

 

라파스에서는 대중교통수단도 특별하다. 전망대까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케이

블카가이곳에선 일상을 움직이는 대중교통시스템 중 하나다.

 

현지인에게는 매일같이 출퇴근을 돕는 이동수단이지만, 관광객에게는 최고의

액티비티가따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세계 최고 높이의, 가장

긴 공중 케이블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케이블카 시스템으로 매일 30만 명의 승객을

수송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의 케이블카 시스템은 라파스와 엘알토를 포함하는 광역권의 과도한 교통

체증을해소하고자 건설되었다.

 

무엇보다 교통체증이 야기하는 대기 오염과 소음 공해 등의 심각한 환경 문제가

케이블카 시스템 건설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첫 노선인 레드 라인 운행이 시작된 건 2014년부터다. 이후 거의 매년마다 신규

라인이 하나씩 개통되면서 현재 총 노선은 10개로 늘었다.

▲해발 3,600~4,100미터를 오가는 세계 최고 높이의 가장 긴 공중 케이블카

 

케이블카를 타고 라파스와 엘알토를 오가는 여정은 일상적인 대중교통이라기보다 놀이공원

에서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경험을 안긴다.

 

형형색색의 케이블카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도시와 산비탈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데 생각

보다 아찔함이 상당하다. 케이블카에 탑승한 승객 가운데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현지인으로 추정된다. 케이블카가 수시로 덜컹거릴 때마다 요동

을 치는 승객은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높이의 케이블카를 타는 횟수가 늘어나면 현지인들처럼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무’의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게 뻔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고산 도시 라파스의 아름다운 풍경

 

케이블카를 타고서 바라보는 고산 도시의 낮 풍경도 훌륭하지만 밤 풍경은 또 얼마나

대단한지, 순간 심장이 쪼그라들 뻔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으로서 고산 도시

에서 케이블카를 타는 행위는 낮보다 밤에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렇기에 그 위대한 풍경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어둠 속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를 장식한 전구가 반짝반짝 불을 밝히는 그 모습이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보는

라파스 밤의 풍경과 꼭 닮아 있다.

 

칠흑 같은 도시의 밤을 밝히는 건 수많은 주택의 조명과 사람들의 온기로 채워진다.

▲매일 30만 명의 승객을 수송하는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케이블카 시스템 

 

한 가지 조언을 건네자면, 라파스 여행에서 케이블카 탑승 횟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떠나고 난 뒤 ‘그때 한 번 더 탈 걸’하는 후회가 남아선 절대 안 된다. 이건 실제 여행자의

경험담, 그러니까 그 후회가 아직도 내 가슴을 때린다는 뜻이다.

 

라파스 도심의 랜드마크는 산 프란시스코 광장이 대표적이다. 최대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광장 면적이 상당히 크다.

 

광장의 핵심이 되는 대성당을 중심으로 이를 둘러싼 세 개의 작은 광장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형국이다. 이는 사가르나가 거리, 마리스칼 산타 크루즈 거리, 피게로아

거리, 란자 시장 등으로 연결된다.

▲라파스 도심의 랜드마크는 산 프란시스코 광장이 대표적이다.

 

규모가 크고 접근성이 용이하기 때문에 산 프란시스코 광장은 예로부터 정치적, 시민적

축제 행사 및 박람회, 전시회 등이 열린 장소로서 수세기 동안 주요 정치적 사건과 시위

의현장이 됐다.

 

특히 1952년 혁명을 승리로 이끈 3일간의 4월 봉기 동안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1971년

부터 1982년까지 독재 정권 이후 선출된 대통령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는 망명에서 돌아

오자마자 이 광장에 가장 먼저 발을 들이며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기도 했다.

 

오늘날의 광장은 시민의 휴식을 위한 장소에 더 알맞다. 16세기와 18세기 사이에 지어진

산 프란시스코 대성당은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시설로 시민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라틴 십자형 평면과 아치형 지붕이 특징인 안데스 바로크 스타일의 대성당 건축 양식은

식민지시대 라파스에서 발전한 건축 기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산 프란시스코 대성당은 라파스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시설이다.

 

대성당과 이어진 사가르나가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행자의 거리’라 불리는 이곳은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숙박시설부터 카페와 식당, 기념품 가게, 여행사, 환전소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환전소다.

 

사실 환전소라기보다 ‘암시장’에 가깝다. 볼리비아 정부는 지난 6월 변동환율제를 도입

하면서15년 만에 달러 고정환율제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시 말해 지난 15년간은 암시장이 성행했다는 의미다.이는 볼리비아의 심각한 경제

위기를 불러온 가장 큰 원인으로 외화 부족은 물론 여기에 에너지 생산 감소까지

겹치자 볼리비아 정부가 변동환율제 도입을 선언한 바 있다.

 

이 선언이 있기 직전, 암시장이 성행할 당시에 볼리비아 여행을 했다면 사가르나가 거리

곳곳에서 달러 거래 현장을 목격하는 일이 일상이었단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여행자의 거리’라 불리는 사가르나가 거리에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가르나가 거리 곳곳에 자리한 환전소.

▲지역 무당들이 운영하는 마녀 시장

 

사가르나가 거리에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바로 ‘마녀 시장’의 존재다. ‘야티리’라고 불리는

지역 무당들이 바로 시장의 상인들이다.

 

해골과 악마의 눈을 막는 물약, 말린 개구리, 빗자루풀 같은 약용 식물, 안데스 의식에 사용

되는 동물의 태아 등을 판매한다. 그중 상점마다 가판대에 매달린 동물의 태아가 마치 인형

같아 충격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태아는 산악 지역의 추위로 죽은 어린 동물의 태아 또는 도축장에서

어미의 자궁에서 발견된 태아가 대부분이라지만, 그럼에도 마녀 시장은 동물 거래에

따른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장소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시장은 볼리비아 정부의 환경 보존 및 보호 정책에 의해 통제와

감시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사막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달의 계곡 입구 전경

 

라파스 도심에서 남쪽으로 초케야푸 강 협곡을 따라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달의

계곡’이 있다. 라파스의 번잡하고 시끌벅적한 도심에서 벗어나 피크닉 삼아 당일치기

로 여행하기 좋은 장소다.

 

광장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말라사 마을로 가는 미니밴 버스를 잡아탔다. 라파스의 대중

버스는 미니밴이 대다수인데, 대중버스라고 하기에는 정확한 버스경로나 안내도 없다.

 

승객이 하차 의사를 밝히면 그제서야 버스가 멈춘다. 그리곤 도로에 버스를 타려는 승객

이 나타나면 또 멈춘다. 셰어택시나 다름없다.

 

그러니 현재 위치를 확인하는 일은 승객의 몫이다. 달의 계곡 입구에 가까워지자 예상과

달리 버스기사가 먼저 내게 하차 의사를 묻는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장소라

버스기사가 발 빠른 행동을 보인 것이다.

▲달의 계곡이란 지명은 1969년 볼리비아를 방문했던 아폴로 우주선 선장

닐 암스트롱이 지은 것이다.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그가 이곳 풍경을 본 뒤 달 탐사 당시 보았던 분화구와 매우

흡사하다고 표현하며 그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계곡’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과대평가된 면이 없지 않다. 전문가들은 ‘황무지’에

가까운 곳이라 평하기 때문이다.

▲달의 계곡 곳곳에는 페드로 선인장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선인장이 자란다.

침식된 비탈면의 미로 같은 협곡과 뾰족한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달의 계곡

가장 높은 지점에 전망대가 위치해 있다.

 

어쨌든 달의 계곡은 침식 작용으로 산 정상부가 깎여 나간 장소다. 지반이 단단한 암석이

아닌 점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황무지라 일컫는 이유다.

 

수세기 동안 자연의 힘이 작용하여 침식된 비탈면의 미로 같은 협곡과 뾰족한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지형은 독특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보면 볼수록 ‘매우 특별한 거친 땅’이라는 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동굴 천장을 장식한

고드름 모양의 종유석이 사막화 버전으로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풍경이다.A와 B코스로

구성된 두 개의 산책코스가 제법 잘 조성되어 있다.

▲두 개의 코스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A코스는 30분, B코스는 1시간가량 소요된다.

 

그 코스를 걸으며 바라보는 풍광은 색의 변화가 가장 눈에 띈다. 산의 광물 함량이 산마다

다르기 때문에 산 면의 색깔이 다양하여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것. 연한 살색부터 갈색,

붉은색, 짙은 보라색까지 색의 미세한 변화를 관찰하는 것도 꽤 쏠쏠한 재미를 안긴다.

 

최근 들어 도시 개발로 인해 달의 계곡의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니, 실로 안타까운

소식이다. 수세기 동안 켜켜이 쌓여온 자연의 힘은 관광명소 이상의 의미를 만들고

있는건 자명한 사실이다. 아무쪼록 달의 계곡이 영원하길 빈다.

▲달의 계곡 너머로 보이는 말라가 마을, 안타깝게도 개발로 인해 달의 계곡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지구서 가장 아름답다” 극찬받은 섬ㅡ요즘 핫한 허니문 여행지.

▲지중해 한복판에 자리한 섬, 스페인 마요르카는 유럽인이 사랑하는 휴양지다. 단애(斷崖)가

발달한 섬 남쪽에 멋진 해변이 즐비하다. 이 사진은 다이빙, 스노클링을 즐기기 좋은 갯마을

‘칼라 살모니아(Cala S’Almonia)’ 

▲유럽인이 사랑하는 휴양지 스페인 마요르카는 찬란한 바다뿐 아니라 웅장한산도 품은 섬이다.

 트라문타나 산맥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트레일 '카미 드 보케르'를 걷다가 마주친 풍경.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 자연이 가진 선명함과 신비로움이

 이곳 바다와 하늘에 모두 녹아 있다.” 

1838~39년 쇼팽과 함께 스페인의 섬 마요르카(Mallorca)에서 넉 달을 지낸 
소설가 

연인 조르주 상드가 남긴 문장이다. 마요르카는 유럽인이 사랑하는 휴양지다. 

봄부터 가을까지 섬으로 몰려드는 유럽인이면 상드의 저 문장에 동의할 테다.

요즘은 한국인도 마요르카를 많이 찾는다. 바르셀로나·마드리드 같은 도시에서
문화

와 미식을 탐닉하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열심히 걷던 한국인이 스페인이 자랑하는

휴양 섬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난달 중순, 마요르카에서 1주일을 지냈다. 정말 도처에 신비가 깃들어 있었다. 

▲스페인 마요르카 섬 전도.

▲스페인 마요르카 위치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마요르카 팔마 항구

▲마요르카 남쪽에는 멋진 해변이 많다. 가족 여행객이 많이 찾는 칼라 페티타 해변.

 

마요르카 하면 바다다. 제주도 곱절 크기의 섬이 쪽빛 찬란한 지중해 한복판에 자리

하고 있으니 얼마나 멋진 해변이 많겠나.

 

칼라도르(Cala dor).

 

팔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렌터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칼라(Cala)’ 혹은

‘칼로(Caló)’는 좁은 만(灣)과 갯마을을 뜻하는 스페인어다.

 

단애(斷崖)가 발달한 섬 남쪽에‘칼라’가 많다. 호텔에 짐을 풀고 달려간 해변 ‘칼라

페티타(Cala petita)’는 과연 눈부셨다.

 

옥빛 바다에 뛰어들어 스노클링을 즐겼다. 낮 기온이 25도였는데도 살갗이 아릴 만큼

볕이 따가웠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스페인 사진가 요시고의 작품 배경으로 유명한 칼로 델 모로. 

해안 절벽과 동굴, 에메랄드빛 바다가 어우러진 모습이 눈부시다.

 

서쪽으로 15분쯤 차를 몰아서 ‘칼로 델 모로(Caló del moro)’를 찾아갔다. 한국

에도 팬이 많은 스페인 사진가 요시고의 작품 배경으로 유명한 해변이다. 

 

주차장에서 마을 길을 약 15분 걸은 뒤 아찔한 벼랑을 10분 더 걸으니 작품 같은 

절경이 펼쳐졌다.

U자 모양의 아담한 만과 절벽, 해식 동굴과 영롱한 빛깔의 바다, 둥둥 떠 있는 
사람

들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한국인 신혼부부가 유난히 많았다. 

 

칼로 델 모로에는 화장실, 샤워실, 카페 같은 편의시설이 없다. 수건과 물을 챙겨

가길 권한다. 불법 주차도 엄격하게 단속한다.

▲마요르카 중부 소도시 '마나코르'에 자리한 라파 나달 아카데미. 나달을 추억하고 

테니스를 배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바다를 원 없이 즐긴 뒤 섬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스페인의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이 그의 고향 ‘마나코르(Manacor)’에 세운 테니스 훈련장 ‘라파 나달 

아카데미’를 찾아갔다.

 

 2018년 개장한 아카데미는 박물관, 기념품 가게, 호텔도 갖췄다. 나달의 흔적을 

둘러보고, 그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도 샀다. 언젠가 이곳에서 라켓을 휘둘러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카데미는 강습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폴렌사 지역 농가 숙소의 조식 뷔페에는 다양한 종류의 햄과 치즈가 올라온다.

 

마나코르에서 북쪽으로 다시 1시간을 달려 폴렌사(Pollença)라는 소읍의 농가 숙소로

 이동해 이틀 밤을 묵었다.

 

 9유로(약 1만3500원)라는 가격이 황송한 조식부터 염소와 조랑말이 뛰노는 열대정원,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꿀잠을 선사한 300년 묵은 고택까지. 사흘이 아니라

 한 달을 머물고 싶은 낙원이었다.

폴렌사 도심에서 열리는 일요시장도 정겨웠다. 올리브유와 와인, 수제 햄 등 
지역에서 

생산한 농축산물과 수공예품이 저렴했다.

 

 마요르카가 스페인에서 가장 물가가 비싸다는 말은 여기서 통하지 않았다. 단, 줄지어

선 차를 따라서 노상에 주차했다가 40유로짜리 과태료 딱지를 

받은 건 속쓰린 기억이었다.

▲마요르카 팔마 스페인 마을.

▲칼바리오 계단에서 내려다본 폴렌사 구도심 풍경

 

365개로 이뤄진 ‘칼바리오(El Calvari) 계단’은 꼭 걸어봐야 할 마을의 명물이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줄지어 선 언덕을 다 걸어 오르니 아담한 예배당이 나왔다.

여기서 굽어보는 마을 풍경이 딱 그림엽서였다. 

▲왕복 6km 거리의 트레일 '카미 드 보케르' 반환점은 칼라 보케르 해변이다.

석회암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광이 근사하다. 

 

마요르카 북부에는 ‘트라문타나(Tramuntana) 산맥’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최고봉(1445m)을 오르지 않더라도 걸을 만한 트레일이 수두룩하다. 폴렌사

 인근, 왕복 6㎞ 거리의 트레일 ‘카미 드 보케르(Camí de Bóquer)’를 걸어봤다.

건조한 석회암 협곡이어서 미국 서부의 사막을 닮았는데, 반환점인
‘칼라보케르’

에 도착하니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누런 석회암 계곡과 쪽빛 바다가 기묘하게 어우러졌다. 길을 걷는 내내 야생

염소를 마주쳤다. 어떤 녀석은 간식을 내놓으라며 졸졸 따라붙었다. 

▲트레일을 걷는 내내 야생 염소를 마주쳤다.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는

염소도 많다.

 

산맥 북서쪽 자락, 쇼팽이 지냈던 마을 ‘발데모사(Valldemossa)’는 관광객이

꼭 찾는 곳이다.

 

그가 요양했던 수도원은 밖에서 봐도 멋지고, 안에서 내다보는 풍광도 근사하다.

쇼팽은 여기서 ‘빗방울 전주곡’을 비롯한 숱한 명곡을 만들었다.

 

인근 항구도시 ‘소예르(Sóller)’는 나무로 만든 트램이 다니니 함께 들러볼 만하다.

당장 쇼팽과 상드가 손잡고 트램에서 내릴 듯 고풍스럽다.

 

소예르 항구에서는 황홀한 석양도 감상했다. 이곳에서도 다정한 포즈로 기념사진

을 찍는 한국 허니무너를 자주 마주쳤다. 

▲트라문타나 산맥 북쪽에 자리한 소도시 소예르는 고풍스러운 목조 트램으로 유명하다.

도심뿐 아니라 해변까지 트램이 운행한다. 

▲소예르 항구에서 본 낭만적인 석양.

 

섬 최대 도시 ‘팔마’는 서울 명동 뺨칠 만큼 어수선했다. 고층 빌딩과 명품 숍

늘어선 거리가 하도 요란해 농가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우디가 내부를 개조했다는 ‘팔마 대성당’은 의외로 천재 건축가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가우디는 훨씬 획기적인 인테리어를 계획했으나,

교회 보수파와 갈등을 빚어 현장 감독을 중도 하차했다고 한다. 

◆ 여행 수첩

마요르카의 여행 최적기는 5~6월, 9~10월이다. 7~8월은 너무 덥고 유럽 바캉스 

여행객이 들끓어서 항공, 숙소가 비싸다.

 

한국에서 마요르카를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유럽의 주요 허브 공항을 경유해 

바로 섬으로 가거나, 바르셀로나·마드리드 같은 스페인 도시에서 저비용항공을 

타거나. 이번에는 KLM 네덜란드항공을 이용했다.

 

 KLM의 자회사인 트랜스아비아가 3~10월 팔마를 취항해서 인천~암스테르담~팔마

 연결이 가능하다.


마요르카에서는 렌터카가 있어야 편하다. ‘레코드고’라는 스페인 렌터카 업체
를

이용했다.

 

할인 기간에 예약해서 쌌지만(1주일에 약 12만원) 공항 대기 줄이 무척 길었고,

추가 요금 문제로 직원과 실랑이도 벌였다.

 

허츠, 유럽카 같은 글로벌 업체가 비싸긴 해도서비스가 좋다. 무작정 렌터카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최저가 만찾지 말고, 계약 내용과 이용자 후기를 살피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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