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여행ㅡ비극과 절망이 할퀴고 간 땅…그럼에도, 끝내 희망은 이긴다

▲그단스크가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구도심의 90%가 파괴됐던 그단스크는

철저한 복원을 거쳐 ‘유럽의 자랑’이자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는 도시로 거듭났다.

 

“온 유럽의 자랑인 여러분의 도시가 옛 모습을 되찾은 것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냅니다.”(샤를 드골)

발트해의 잔잔한 물결과 맞닿은 도시, 그단스크. 낯설고도 아름다운 이곳은 한때 건물도, 사람들의

마음도 온통 허물어져 내린 폐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포성이 울려 퍼진 뒤 전쟁이 끝나기까지 6년. 그사이 도시는 잿더

미가 됐고 사람들의 일상 역시 잿빛 절망에 갇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곳의 시간은 멈춰 버리지 않았다. ‘단치히’라는 독일 이름 대신 ‘그단스크’라는

폴란드이름을 되찾았고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사라진 거리의 모습을 되짚었다.

피폐해진 일상에 다시 차곡차곡 삶을 채워 넣자 사라졌던 도시의 온기도 조금씩 되돌아왔다.

 

1967년 9월 그단스크를 찾은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이곳에 깃든 시간을 다시 불러낸 사람

들의 헌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폐허와 절망 위에 세운 희망의 도시

 

2차 대전은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함이 그단스크의 베스테르플라테에

있던 폴란드군 보급기지를 포격하면서 시작됐다.

 

폴란드군이 일주일간 결사항전을 펼친 이 작은 전투는 유럽 전체를 집어삼킨 참화의 서막이 됐다.

비극의 불길은 곧 유럽 전체로 번졌고 총성이 멈출 무렵 그단스크는 옛 도심의 90%가 파괴됐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상상으로 과거를 덧칠하지 않기 위해 예전

모습이 담긴 사진과 그림, 도면 같은 자료를 꼼꼼히 대조하며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도시를 일으켜

세웠다.

 

다만 내부 공간은 현대적으로 설계해 과거의 도시가 오늘을 사는 이들의 삶으로 유연하게 이어지

게했다. 드골 대통령은 “여러분들은 전통과 미래를 결합하기 위해 필요했던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이뤄냈다”고 칭찬했다.

▲폴란드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동유럽 폴란드 위치도.

▲그단스크의 상징과도 같은 주라프문을 중심으로 모트와바강을 따라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지금의 그단스크는 전쟁이 관통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반짝인다. 해가 기울면 붉은 지붕들은 노을

빛을 머금은 채 그윽한 자태를 뽐내고 모트와바강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에 하나둘 조명이 켜지며 물

드는 저녁은 평범하게 저무는 하루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드우가 거리를 중심으로 뻗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폐허 위에 삶을 일으켜 세운 이들의 다정한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곤 한다.

2차 대전의 흔적은 그단스크에서 배나 버스를 타고 베스테르플라테에 도착하면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무너진 병영의 잔해, 군인들이 목숨 걸고 저항하던 참호, 전사자들의 무덤을 지나 해안수비대

기념비까지 이어지는 길은 시간을 1939년에 묶어둔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그단스크 시내에 있는 2차 세계대전 박물관, 우체국 직원들이 독일군과 친나치 세력과 맞서 싸운 일을

기념한 우체국 박물관 역시 과거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공간이다.

 

◆죽음의 수용소, 인간의 존엄을 묻다

▲폴란드 남부 도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2차 세계대전 당시 끌려왔던 희생자들의

신발이 전시돼 있다.

 

전쟁의 상흔을 희망으로 채색한 그단스크의 반대편에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가 있다. 폴란드 남부

소도시 오시비엥침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는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등을 겨냥했던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뼈아프게 직시하게 만드는 장소다.

아우슈비츠를 찾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엄을 어디까지 짓밟을 수 있는지를

가감 없이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죄 없이 끌려온 여자들의 잘린 머리카락, 때 묻고 구겨진 채 주인을 잃은 작은 신발, 마지막 사진을 남긴

채 사라진 사람들의 얼굴 등 건물 내부 전시물들은 가볍게 지나쳐도 오래 남는 비참함을 느끼게 한다.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의 철로 위에 추모하는 꽃이 놓여져 있다. 당시 많은 이가 열차에 실려

비르케나우로 실려와 가스실로 끌려갔다.

 

특히 대규모 집단 학살이 이뤄진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에 들어서면 쉬이 떨쳐내기 힘든 참담함이

엄습한다.

 

어떤 운명이 닥칠지도 모른 채 열차에 내린 사람들은 죽는 일만 남은 수용소에 왔다는 것을 알고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닭장처럼 좁고 열악한 막사에 모여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지냈을 이들의

하루를 상상하노라면 먹먹해지는 여운에 당시의 고통이 더 또렷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신체적 고통도 만만치 않았던 터라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성인 여성의 몸무게는 23~27㎏ 정도

였다고 한다.

▲영화 ‘쉰들러리스트’로 잘 알려진 오스카 쉰들러가 운영했던 공장에 전시된 생존자들의 사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봤다면 함께 둘러봐야 하는 장소가 바로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에 위치한

쉰들러 팩토리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곳이자 오스카 쉰들러가 당시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운영했던 공장이다.

쉰들러 팩토리 역시 2차 대전 당시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있지만 아우슈비츠보다는

희망적이다. 그곳에 전시된 사람들의 사진이 죽음과 연결된 것과 달리 쉰들러 팩토리에 놓인

사람들의 사진은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부를 다 둘러보고 난 뒤 마주하는 “사람을 구하는 한 삶은 의미가 있다”는 쉰들러의 말은 인간이

인간을 파괴했던 시대에도 끝내 타인을 살리고자 했던 이의 숭고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쇼팽의 영혼을 따라가는 음악 여행

▲폴란드는 또한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 성십자가 성당 기둥.

 

폴란드 여행의 또 다른 축은 바로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을 따라가는 음악 여행

이다. 그 중심에는 그의 심장이 안치된 도시이자 생전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도시 바르샤바가 있다.

1810년 바르샤바 인근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난 쇼팽은 생후 몇 달 만에 가족과 함께 바르샤바로 옮겨

와 성장했다. 세계적인 음악가의 감수성이 이 도시에서 여문 셈이다.

바르샤바를 걷다 보면 쇼팽은 오래전 떠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어딘가에 머무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항상

어딘가에서 쇼팽 콘서트가 열리고 곳곳에 배치된 음악 벤치의 버튼을 누르면 그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낯선 도시를 걷다 문득 익숙한 선율이 들려오는 순간 쇼팽의 시간이 현재의 바르샤바와 포개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쇼팽이 사랑한 도시 바르샤바의 구시가지가 시작되는 잠코비 광장.

 

특히 와지엔키 공원의 쇼팽 동상 근처에서 열리는 노천 음악회는 쇼팽의 영혼을 가장 선명하게 만날

수 있는장소다. 이곳에서는 매년 5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일요일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쇼팽의 곡을 연주한다.

 

쇼팽 동상 역시 전쟁으로 파괴됐다가 1958년 복원됐고 이듬해부터 연주회가 시작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국을 떠나 활동하면서도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던 쇼팽은 자신의 심장만큼은 고국으로 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그의 소원대로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 성십자가 교회 기둥에 영원히 안치돼 이 도시를 지금도 뛰게

하고 있다. 많은 이가 쇼팽의 혼을 기리기 위해 순례자처럼 기둥 앞에 서서 묵념의 시간을 갖는다.

근처 쇼팽 박물관에는 쇼팽의 친필 악보, 마지막 피아노, 데스마스크 등이 전시돼 있어 전 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다만 2026년은 내부 수리 및 전시물 재단장을 위해 휴관 중이다. 박물관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바로옆에 프레데리크 쇼팽 음악 대학교(구 바르샤바 음악원)가 있고, 그곳에서 미래의 쇼팽을

꿈꾸는청년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으니 잠시 멈춰 귀를 기울일 만하다.

 

▲동화적 상상력을 품은 브로츠와프

▲폴란드 제3의 도시인 브로츠와프에서는 도심 곳곳에서 난쟁이 동상들을 만날 수 있다.

 

오드라강이 도시를 감싼 브로츠와프는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동화적 상상력이 숨 쉬는 도시다. 동시에

한국인 여행자에게는 낯선 타국 땅에서 뜻밖의 반가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LG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어 한국인도 많고 한식당도 여럿 있기 때문이다.

브로츠와프의 진짜 매력은 발밑에 있다. 브로츠와프에는 구석구석에 우체부, 음악가, 농부, 시각장애

인 등 각양각색의 난쟁이 동상 수백개가 숨겨져 있다.

 

무심코 발길을 옮기다 저마다의 일상을 변함없이 살아가는 귀여운 난쟁이들과 눈이 맞닿으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행복에 젖게 된다.


이 사랑스럽고 익살스러운 난쟁이들에게는 묵직한 역사의 숨결이 서려 있다. 1980년대 공산주의

정권의억압에 맞서고자 한 청년들이 공권력의 감시를 피하고자 귀여운 난쟁이 그림을 벽에

그리며 비폭력 저항(오렌지 대안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 그 시초다.

 

유쾌함과 해학으로 희망을 그려낸 이들의 유산이 오늘날 도시를 대표하는 동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브로츠와프는 12개의 섬이 100여개의 다리로 연결돼 있어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낭만을 선사한다.

 

브로츠와프는 백개가 넘는 다리로 연결된 12개의 섬을 이리저리 오가는 재미가 있다. 특히 해가 저물

무렵 램프라이터가 직접 긴 장대를 들고 오래된 램프에 불을 밝히는 툼스키 섬에 가면 시간여행의

낭만을 제대로 선물 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폴란드는 잔혹한 전쟁의 상흔도, 차가운 억압의 시절도 결국 인간이 지닌 유쾌함과 삶을 향한 의지를

꺾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라다.

 

비극을 기적으로 바꾼 그단스크와 인간의 존엄성을 되새기게 하는 아우슈비츠, 쇼팽의 심장이 뛰는

바르샤바, 난쟁이가 미소 짓는 브로츠와프까지. 폴란드가 건네는 감동은 바로 끝끝내 꺾이지

않았던 인간의 희망이 이토록 찬란하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데 있다.

▲해질녘 유람선 관광을 즐기는 브로츠와프 관광객들.

 

◆여행 수첩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올해부터 전면 온라인 예약제로 바뀌어 현장에서 대기표 구매가 불가능하다.

폴란드어, 영어 가이드투어와 가이드 없는 투어가 있는데 충분한 설명이 당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니 가격이 있더라도 웬만하면 가이드와 함께하기를 권한다.

 폴란드는 핵심 여행지를 정해두고 일정에 맞게 중간 경유지를 잘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고향이자 튜튼 기사단이 세운 도시 토룬, 두 마리의 염소

동상이 지키는 도시 포즈난, 폴란드의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자코파네 등도 둘러볼 만하다.

 폴란드의 교통은 야크도야데(Jakdojade) 앱을 이용하면 편하게 시간표를 확인하고 예매할 수

있다. 다만 첫 충전만 무료이고 유럽경제지역(EEA) 이외에서 발급된 카드로 재충전할 경우

수수료가 3%씩 붙기 때문에 처음에 많이 충전하거나 아예 현장 구매만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베트남의 숨겨진 산수화...소도시 ‘닌빈’에서 그림 같은 풍경

▲베트남 ‘닌빈의 지붕’으로 불리는 항무아산 전망대. 바위에 새겨진 약 500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전망대에 닿는다.

 

번잡한 대도시를 벗어나 소도시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곳, 자연의 아름다움과 농촌마을의 고즈

넉한 분위기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는 곳, 바로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소도시‘닌빈’이다.

수도 하노이에서 차로 2시간이면 도착한다.

 

대다수의 베트남 사람들은 이 거리를 오토바이로 오간다. 자동차 외에 두 도시를 잇는 기차나 시외

버스, 셰어택시 등의 다양한 이동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토바이의 편리성을 뛰어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닌빈 여행을 계획한 날이 베트남의 법정공휴일과 맞물렸는데, 휴가 인파를 예상

했던 것과 달리 기차 내부 좌석은 반쯤 비어 있었다. “미리 기차표를 예매하지 않아도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던 호텔 직원의 말이 과연 옳았다. 

▲베트남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무궁화호를 떠올리게 하는 베트남 기차

 

무궁화호를 떠올리게 하는 예스러운 베트남의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번잡한 대도시를 벗어나 소도시에 도착한 기쁨도 잠시, 소박한 닌빈역을 지나 도심에 가까워지자

시끌벅적한 소음과 환경이 귓가를 때렸다. 이틀간의 법정공휴일을 맞아 나들이 온 현지인들의

수만큼이나 길가에 주차된 오토바이가 많다.

 

닌빈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닌빈 중심부 끼란 호수에 숨겨진 보석이라 일컬어지는 ‘호아루 옛 시

가지’다. 베트남 북부의 가장 영적인 지역 중 하나에 자리잡은 이곳은 호아루 고대 도시 경계 내에

위치한다. ‘호아루(Hoa Lu)’는 968년부터 1010년까지 베트남의 수도였던 곳이다.

▲닌빈 중심부 끼란 호수에 숨겨진 보석이라 일컬어지는 ‘호아루 옛 시가지’

 

닌빈은 수년간의 내전과 격렬한 분리주의 운동 끝에 건립한 베트남 독립 국가의 수도이자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지다. 토성과 궁궐, 사원 등이 석회암 산으로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형국인데, 오늘날

고대 성채는 파괴되어 10세기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나무로 된 건물 외관, 붉은 등불, 기와지붕으로 딘 왕조와 레 왕조 시대의 무역 거리를 고스란히

복원해 당시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새해나 국경절 등의 주요 명절 기간에는 전통 공연과

왕실 의상 체험 등의 행사가 열리는 주무대이기도 하다.

▲호아루 옛 시가지에서 눈에 띄는 건축물인 탑뚜안은 부모, 스승, 국가, 인류에 대한 감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석탑이다.

 

호아루 옛 시가지에서 눈에 띄는 건축물 중 하나는 탑뚜안이다. 반얀트리와 이끼 덮인 오솔길 사이

한적한 장소에 자리잡은 이 탑은 베트남의 기본 도덕적 관념인 네 가지 핵심 요소 ‘부모, 스승, 국가

그리고 인류’에 대한 감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석탑이다. 마음의 평화를 찾거나 얻기 위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탑투안 석탑 내부 전경

 

또한 보름달이 뜨는 날이나 전통 의식이 있을 때면 지역 승려들과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신앙심을

기리고 나누는 행사가 진행되기도 한다.

 

호아루 옛 시가지 일대는 등불이 켜진 산책로를 거닐고, 호숫가를 배경으로 인생 사진을 찍기도

하며, 노천식당을 즐기는 등 해가 진 후 한층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장소다.

▲호아루 옛 시가지에 자리한 아름다운 건축물과 호아루 고대 시대 마을을 복원한 무역 거리 전경

▲끼란 호수 일대는 해가 진 후 한층 화려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장 오래된 동굴 마을, 탐콕

 

사실 닌빈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탐콕’이라는 명칭으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그만큼 탐콕은 닌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전거는 탐콕 마을을 둘러보는 최고의 교통수단이다(좌측 위). 강 주변을 따라 호텔과 카페, 레스

토랑이 들어서 있는 탐콕 마을 중심부 전경과 소박한 농촌마을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탐콕 풍경들.

 

닌빈 중심부인 호아루에서 동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탐콕은 동굴 복합체로 이루

어진 마을이다. 정확한 명칭은 탐콕-비크동(Tam Coc-Bich Dong), ‘세 개의 동굴’이라는 뜻을 가진다.

 

말 그대로 탐콕은 세 개의 동굴로 이루어진, 닌빈에서 가장 오래된 동굴 마을로, 보트 관광 코스가

최초로 개발된 지역이기도 하다.

 

보트 관광은 구불구불한 응오동 강을 따라 절벽과 물이 가득 찬 동굴, 논밭 사이를 지나는 코스로유유

히 이어진다.여기에 노 젓는 소리,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등 자연의

아름다운 선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영화 ‘인도차이나’의 배경지인 탐콕 비크동 사원 입구 전경

 

시원하고 어둑한 동굴을 지나는 동안 만나는 활기 넘치는 논밭과 잔잔한 수로, 웅장한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고요하며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절로 느끼게 한다.

 

탐콕에서 빠질 수 없는 명소 중 하나는 바로 비크동 사원이다. 이곳은 영적인 의미와 건축미,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1428년 응우낙 산의 석회암 절벽에 지어진 이 고대 사원은 베트남

불교 건축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비크동 사원은 15세기 응우낙 산의 석회암 절벽에 지어진 고대 사원이다.

 

이후 1705년 불교 승려가 이 탑을 재발견하기 전까지 전쟁으로 인해 정글로 뒤덮여 거의 잊혀지고

버려진채로 남았던 비크동 사원은 베트남은 물론 주변국가에서 당시 많은 불교 승려들이 줄지어

방문하며 하탑과 중탑, 상탑의 세 층으로 재건됐다.

 

여러 세대에 걸친 관리인들은 수 세기 동안 이곳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왔다.산기슭에 자리한 하탑

은 각기 불상이 모셔진 여러 개의 방을 갖추고 있으며, 이곳에서 약 120개의 계단을 오르면 응우낙

산 중턱에 위치한 중탑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기와지붕과 중국 한자로 장식된 벽이

특징이다.

▲(좌로부터 시계방향)비크동 사원 중탑 일부는 동굴과 이어져 있다. 동굴 내부에 서식하는 박쥐들,

독특한 종유석과 석순 등이 빼곡한 석회암 동굴 내부.

 

다시 중탑에서 가파른 돌계단 50여 개를 오르면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탑에 닿는다. ‘트엉탑’

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깥쪽 방에는 앞뜰과 돌 제단이 있고, 안쪽

방에는 보살 사당이 있다.

 

비크동 사원이 전 세계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기 시작한 건 1993년 미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

‘인도차이나’의 배경지라는 점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인기 관광명소로 인식되어 ‘승려들의 산속 은둔처’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름진 감나무 아래 털썩 주저 앉아 사색에 잠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임에 분명하다.

▲짱안 일대 동굴과 수생 생태계를 둘러보는 보트 관광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짱안’ 혹은 ‘트랑안(Trang An)’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동굴 마을은 탐콕과 더불어 닌빈의 인기 관광지

로꼽힌다.

 

이곳 또한 한때 영화 배경지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차츰 관광명소로 발전했는데, 영화 ‘블러드

레터’‘땀깜: 언톨드 스토리’, ‘콩: 스컬 아일랜드’ 등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에 촬영장소로 쓰였다.

 

짱안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지정한 ‘베트남 최초의 복합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타이틀을 가

진다. 짱안의 생태 경관 단지는 2,000헥타르가 넘는 면적에 걸쳐 수로와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

많은 수의 동굴 등이 어우러져 있다.

 

탐콕과 마찬가지로 짱안 일대 동굴과 수생 생태계를 둘러보는 보트 관광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석회암 절벽과 한적한 산책로, 탁 트인 전망대가 어우러진 짱안 생태 경관 단지

 

3만 년이 넘는 석회암 산맥으로 이루어진 짱안 생태 경관 단지의 지질학적 지형은 침수림과 석회암 산,

고고학적 문화 유적지 등 다양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또한 수십 개의 건식 및 수중 동굴로 이루어진 데다 동굴의 모습 또한 관통형부터 지하 통로, 연결된

방의 형태 등 다양성이 두드러진다.

 

탐콕이 낡고 오래된 작은 농촌마을의 모습을 띠고 있다면, 짱안은 현대적인 테마파크 시설에 가깝

다고 할 수 있다. 이곳 생태 경관 단지 입구에 닿으면 현대적으로 단장된 여러 건물이 자리하고,

그곳 내부에는 인포메이션센터와 박물관, 카페, 레스토랑 등이 들어서 있다.

▲현대적으로 단장된 짱안 생태 경관 단지 내부.

 

여건상 3시간 이상 소요되는 보트 투어에 참여하기 어렵다면 강으로 둘러싸인 노천 카페나 레스토랑

에서 잠시나마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보자.

 

에메랄드 빛 강을 바라보며 고풍스러운 돌길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다. 산속에서 울려 퍼지는 사찰

종소리를 들으며 잠시 멈춰 서서 자연과 교감하는 강한 울림이 심신을 포근히 감싸 안는다.

▲고대 시대 풍습과 전통을 재현한 마을 테마파크(좌), 자갈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우)

 

‘진정한 휴식’이란 욕망을 덜어내는 행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어느 순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의 상태로 나아가는 자신을 마주하며

자연의 소중함을, 휴식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긴다. 짱안에서 덜어내고 비우는 여행을 경험

해보기를 추천한다.

 

닌빈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 최고의 전망을 자랑한다고 알려진 항무아산으로 향했다. ‘닌빈의 지붕’이라

불리는 항무아산은 전망대에서 닌빈 지역의 거대 논밭 풍경과 석회암 봉우리가 어우러진 절경을

파노라마 형태로 감상할 수 있다.

▲바위에 새겨진 약 500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항무아산 전망대에 닿는다.

 

특히 해질 무렵 석회암 산맥 너머로 지는 석양이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항무아산 전망대는 높이

142미터, 폭 800미터로 2000년 보수공사를 마치고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현재에 이른다.

 

전망대의 역할은 122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원나라가 몽골 침략군을 추적하고 격퇴

하는데 있어서 이곳 전망대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수 세기 동안에는 왕조들이 국정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이곳

은 베트남 불교 승려들의 명상 수행의 장소로도 인식되었으며, 산 정상과 주변 동굴 등지에서 불교

축제나 잔치가 열리기도 했다.

▲항무아산 초입에 조성된 드넓은 연꽃 연못 전경

 

항무아산 입구에 들어서면 드넓은 연꽃 연못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반긴다. 연꽃이 무성하게 핀 연못

위를 가로지르는 대나무 산책로는 산책과 동시에 포토존을 위한 곳이다.

 

초록빛 연꽃 세상을 지나쳐 몇 미터 걷다 보면 정상으로 향하는 돌계단이 용 조각상과 함께 시야에

담긴다.

 

이곳에서 정상까지 약 500개의 돌계단이 이어져 있다. 그중 약 3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면 산 중턱에

다다르고 길이 양쪽 두 개로 갈라진다. 두 길 모두 전망대로 이어지는데, 둘 중 더 높은 봉우리는

왼쪽에 위치한다.

▲전망대 인근 바위 틈에 우뚝 솟은 불교 탑

 

나머지 돌계단을 하나도 빠짐없이 올라간 뒤 바위 틈에 우뚝 솟은 불교 탑을 마주 바라봤다. 마을 전역을

굽이 내려다보고 있는 듯 자리한 작은 불교 탑은 예로부터 마을과 마을사람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물이었다.

 

불교 탑의 시선대로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절경은 마치 붓으로 그린 ‘산수화’의 한 작품 같았다.

탐콕과 짱안에서 보았던 울창한 논과 밭, 구불구불 흐르는 강과 석회암 산맥의 경치와는 또다른 거대

한 풍경이 닌빈 여행의 마지막 코스를 완벽하게 장식했다.

▲항무아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

 

전망대를 가득 메운 인파를 피해 구석진 한편에서 일몰을 간절히 기다렸다. 허나 맑았던 하늘이 일순간

구름으로 뒤덮여 결과적으로 기대했던 일몰을 두 눈에 담지 못했지만 실망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오히려 구름이 잔잔한 바람을 일으켜 피부에 닿는 기압의 변화와 공기의 움직임을 체감하는 순간이

호사로 느껴졌다. 그 순간 절로 ‘행복하다’는 말을 읊조리며, 자연의 위대함에 다시금 머리를

숙이게 됐다.

대구 관광 명소. 대구 벚꽃 명소. 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동화사 일주문(一柱門)

▲동화사는 유서 깊은 신라 고찰로 팔공산 폭포골, 빈대골, 수숫골이 좌우로 몰려든 동학동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신라 493년(소지왕 15)

극단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하였다.

 

신라 832년(흥덕왕 7) 왕사 심지가 중창하였는데, 그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 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영조 때 중창 시에 세워진 건물로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연경전, 천태각,

영산전, 봉서루, 심검당, 칠성각, 산신각, 응향각, 원음각, 천안문 등이 있다. 또한 동화사는 팔공산

국립공원의 다양한 탐방로가 시작되는 관문이다.

 

염불암을 지나 염불봉이나 동봉으로 향하는 코스, 빈대골 계곡을 따라 능선을 오르는 코스, 템플

스테이 입구에서 폭포골을 따라 도마재(신령재)나 바른재로 향하는 코스까지, 사찰 곳곳에서

자연으로 향하는 탐방로가 열려 있다. 사계절 내내 산과 계꼭의 풍경을 따라걷기 좋아 많은

이들이 찾는다.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인 극달이 창건하여 유가사라고이름붙힌 사찰로 흥덕왕 7년에 심지왕사가

중건할 당시 사찰 주변으로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여 있어서 동화사라 개칭을 하였다고 전합니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중창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찰경내에는 1732년에 8번째로 중건

한대웅전과 극락전 연경전과 천태각 등 20여 채의 건물들이 대부분 조선조 영조때에 중창되어

지어져 있습니다

 

전해오는 문화재는 보물 6점이 있습니다 1992년에낙성된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과 함께 새로운

당우들도 많이 지어졌습니다 또한이곳은 산사체험 템플스테이가 인기가 높습니다 봄이면 상춘객

과 출사객의 발길도 끊이지 않습니다.

▲사천왕상(四天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봉서루(鳳棲樓)

▲대웅전(大雄殿)

▲대웅전 삼존불(三尊佛)

▲산신각(山神閣)

▲산신각 내부

▲조사전(祖師殿)

▲조사전 내부

▲칠성각(七聖閣)

▲칠성각 내부

▲영산전(靈山殿)

▲영산전 내부

▲범종루(梵鐘樓)

▲금강계단(金剛戒檀)

▲근자에 조성된것으로 보인다

▲마애석가여래 좌상 

 

공무원 도시 세종시 여행ㅡ밤이 되면 별자리처럼 반짝인다…

▲독창적인 디자인의 금강보행교. 세종시의 이른바 ‘랜드마크’다. 둥근 고리형 도시구조를 형상화한

ㅇ자 모양이라 ‘이응다리’로 더 많이 불린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1446년을 기념해 다리

둘레를 1446m로 정했다. 다리는 복층으로 상부층은 보행전용, 하부층은 자전거 전용이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따져보자. 풍경도 음식도 쇼핑도 이유가 되겠지만, 결국은 ‘다른 도시’

를 보고 싶어서다.

 

날마다 오가는 지루하고 익숙한 도시를 벗어나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 어떤 나라에서는 우리

가 이미 지나온 어제를 보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본다. 여행의 흥분은 대개

그 시간의 낙차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비행기를 타지 않고 ‘내일’을 보러 가는 여행은 어떨까. 세종으로 간다. 정부청사와 아파트

뿐인 공무원의 도시쯤으로 여겼다면, 한번 가보시라. 생각이 달라진다.

 

도시를 짓는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진화해왔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가 끝도 없이 늘어섰던 노원·

상계, 그 뒤에 들어선 일산·분당의 표정이 다르다.

 

그리고 세종에 이르러서는 경이로울 지경이다. 녹지는 넉넉하고, 공연장과 도서관, 미술관이 동네

마다 들어섰다. 동선은 매끄럽고 건축은 저마다 미감을 뽐낸다.

 

행복도시 건설에 2030년까지 들어가는 돈이 22조5000억 원. 목표 인구 50만 명으로 나누면 한

사람 앞에 4500만 원꼴이다. 민간투자 빼고 공적 투자금액만 그렇다. 공원만 270곳을 계획했고,

벌써 204곳을 지었다.

 

한 도시에다 돈을 이렇게 써도 되나 걱정될 만큼 도시 생활의 여가를 위한 인프라를 촘촘하게

깔았다.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지는 도시다.

 

 ◆49층에서 내려다본 미래

 

근사한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소가 어디일까. 답은 싱겁다. 그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세종 나성동에 그런 자리가 셋이나 있다. 49층의 카페 ‘플레져’, 45층의 ‘카페45’,

그리고 해가 지면 문을 여는 라운지 바 ‘라운지46’이다.

 

플레져의 창가에 서면 세종이 통째로 들어온다. 호수공원의 물빛과 중앙공원의 너른 초지가 펼쳐

지고, 그 둘레로 아파트 단지들이 둥글게 도시를 감싼다. 도시가 설계도처럼 선명하다. 자로

잰 듯 반듯한 데도딱딱하지 않다. 초록이 넉넉해서다.

 

압권은 밤이다. 라운지46에서 본 야경은 태국 방콕의 이름난 루프톱 바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

불 켜진 아파트 창들이 별자리처럼 흩어지고, 금강 위 둥근 다리에 빛이 돈다.

 

칵테일 한 잔을 앞에 두고 있으면 여기가 충청의 신도시라는 사실을 잠깐 잊게 된다. 그러니까

세종은, 미래 도시로 떠나는 ‘유사 해외여행’의 목적지로 손색이 없다.

 

아, 그런데 이 얘기는 해야겠다. 사람들로 붐비는 49층 카페가 입주한 주상복합 건물의 저층

상가는 처참할 정도로 비어 있었다.

 

불 꺼진 유리창마다 ‘임대’ 안내문이 붙었고, 텅 빈 복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꼭대기 층은

줄을 서는데 1층은 불이 꺼진 건물. 그 풍경이 어쩐지 기괴해 보였다. 미래 도시에도

그늘은 있다.

▲전의면의 시멘트 장승. 여러 번 색이 칠해지는 동안 여장승의 뜬 눈이 감겼고 족두리가 없어졌다.

 

◆도시락 한 개가 남긴 기록

 

미래는 넘치는데, 이 도시에 모자란 게 있다. 없는 건 ‘어제’다. 2012년 출범했으니 올해 겨우

열네 살. 오래된 골목도, 수백 년 묵은 명승도 없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역사가 모자라니 오히려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손톱만 한 사연에도 의미를 부여

하는데, 그게 뜻밖에 재미있다. 결핍이 오히려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이런 재미를 보여주는 곳이 연동면의 ‘연동문화발전소’다. 1984년 지어져 35년 동안 면사무소로

쓰이다 2019년에 면사무소가 새 청사로 옮겨가면서 빈 건물이다.

 

지금은 한쪽은 젊은 화가들이 머무는 레지던시 겸 미술관이고, 다른 한쪽에는 마을기록문화관

‘다담(多談)’이 있다. 호적과 토지대장을 떼어주던 면사무소에, 이제는 주민들이 기억을 적은

기록이 모인다.

 

여기서 마을기록가가 찾아낸 흥미진진한 사건 하나를 만났다. 1970년 10월, 연기군 남면의 두

국민학교 6학년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

 

여관 근처 식당에서 산 도시락을 창경원에서 점심으로 먹었는데, 오후 용산역에서 열차를 기다

리던 아이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집단 식중독이었다. 아이들을 보살핀 건 경찰이었다.

용산경찰서장이 직접 호송차를 지휘해 아이들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고향에서는 난리가 났다. 치료를 받은 아이들은 다행히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교장은 용산경찰서

에 전보를 쳤다. “넘치는 친절과 호의로 전원 무사 도착.” 학교는 용산경찰서와 자매결연을 맺고,

용산서는 앞으로 이 학교 아이들의 서울 수학여행을 안내하기로 했다.

 

마을기록관에 전시된 흑백사진이 걸작이다. 사건 뒤 학교를 찾은 서장의 목에 꽃목걸이가 겹겹이

걸렸다. 서장은 쑥스러운 듯 모자챙을 매만지며 웃고, 한복 차림의 할머니들이 허리를 굽혀 반기고

있다. 길가에 줄지어 선 아이들은 손뼉을 친다.

 

◆왕처럼 다섯 끼를 먹자고?

 

도시락 얘기가 나온 김에 먹는 얘기를 좀 해보자. 요즘 세종이 앞세우는 여행 테마가 ‘미식’이다.

세종시문화관광재단은 ‘세종을 찾은 외지인이 내비게이션에 찍은 목적지의 60%가 음식점이었다’

는 자료를 근거로 든다.

 

‘세종사랑맛집’을 100곳까지 늘리고 있고, 조선 왕실이 하루 다섯 번 상을 올렸다는 데서 이름을

딴 1박2일짜리 여행상품 ‘세종오식(五食)’도 내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세종의 음식은 그저 그랬다. ‘밥 먹으러 세종에 가자’고 권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내비게이션얘기도 곱씹어 볼 만하다. 식당은 누구나 주소를 찍고 가는 곳이다. 출장 온 공무원도

하루 세끼는 먹는다. 사람들은 밥 먹으러 세종에 가는 게 아니라, 세종에 간 김에 밥을 먹는다.

 

그래도 재미있는 한 끼가 있긴 했다. 세종오식의 마지막 프로그램. 조치원 시장에서 참가자들이

제각각 장을 봐 와서 한 상에 모아놓고 나눠 먹었다. 음식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흥정하고 덤을 얻고, 서로 사 온 걸 나눠 먹는 그 방식이 즐거웠다.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을 먹었느냐’

보다 ‘어떻게 먹었느냐’였다.

 

왕의 밥상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정작 세종은 유난한 고기 마니아였다. 아버지 태종이

“주상은 어려서부터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걱정했을 정도다. 몸 쓰는 걸 즐기지

않았고, 밤늦도록 책을 붙들었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세종은 오늘날 당뇨로 짐작되는 소갈증에 시달렸고, 눈병도 심했다.

“안질을 얻은 지 10년”이 됐고,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 없이 걷기 어렵다고 스스로 털어

놓기도 했다. 고기를 너무 좋아했던 임금이 결국 찾은 건 ‘물’이었다.

▲국립세종도서관. 경쾌한 곡선의 미감이 인상적이다. 유럽기반의 디자인 웹진 ‘디자인 붐’이 세계

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톱10에 선정하기도 했다.

 

◆임금은 오지 않았다

 

세종시의 북쪽 끝, 천안과 맞닿은 전의면 관정리. 공장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느닷없이

잘 깎인잔디밭이 나온다. 한가운데 둥근 초록 펜스가 섰고, 그 안에 몇 그루 나무가 섬처럼 작은

숲을 이뤘다.

 

파란 조끼를 입은 마을 노인들이 펜스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층층이 쌓은 돌담 아래 깊숙한 곳에서

물이 솟는다. 노인들은 ‘이 물은 못 먹는다’고 했지만, 돌 위에는 분홍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물이 ‘왕의 물’, 전의초수(椒水)다. 전의면에서 나는 초수란 뜻인데, 초수는 톡 쏘는 맛이 후추(椒)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세종 26년, 그러니까 1444년 정월에 청주와 목천, 전의에 후추 맛 나는 물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세종은 반색했다. 그런데 무턱대고 매달리진 않았다.

 

초수로 효험을 봤다는 사람도 있고 한 달을 마셔도소용없었다는 사람도 있으니, 누가 낫고 누가 안

나았는지 자세히 조사하라고 명했다. 병든 몸으로도 ‘치유 사례’부터 모으는 임금. 과연 세종이다.

 

그해 7월, 조정은 이 물을 서울로 나르는 규칙을 만들었다. 날마다 해 질 녘 옹기에 물을 담아 ‘무령설기

(毋令泄氣)’, 기운이 새지 않게 단단히 봉하고 뜬 시각을 적어 역마(驛馬)에 실었다.

 

물은 하룻밤 사이에 서울에 닿아야 했다. 늦으면 역을 맡은 관리가 벌을 받았다. 해 질 녘에 뜬 물 한 동이

가 밤새 역참을 갈아타며 북으로 달리는 모습을 떠올려 보시라. 조선판 ‘새벽 배송’이다.

 

이듬해 충청감사 김조가 ‘차라리 직접 오시라’고 세종에 청했다. 이유가 그럴듯하다. ‘물은 근원을 떠나면

본성을 잃는다(水離源則失性)’는 것. 밤새 달려온 물은 이미 그 물이 아니라는 얘기. 세종의 답은 짧았다.

“다시 말하지 말라.” 그 뒤로 실록에 전의초수는 나오지 않는다. 임금은 끝내 전의에 오지 않았다.

 

펜스 앞 안내판은 1년 넘게 이 물을 받은 임금의 “병이 다 나았다고 한다”고 적었다. 실록은 끝내 나았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효험을 줄줄이 적은 안내판 뒤에는 아무도 마실 수 없는 물이 있다.

 

마시지 말라는 물을 순전히 궁금해서 맛을 봤다. 톡 쏘는 맛은 거의 없었다. 580여 년 전에는 기운이 샐까

봉해서 달렸던 물이, 근원을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지금 오히려 기운이 빠져 있었다.

▲수학여행 중 집단 식중독에 걸린 학생들을 보살핀 보답으로 초청받아 학교를 방문한

서울 용산경찰서장.

 

◆에비앙을 꿈꾼 100m 관정

 

약수터에서 몇 걸음 떨어진 뒤쪽에 초록 천막을 두른 가건물이 있다. 간판에는 ‘전의 탄산수’라 적었다.

약수를 파는 곳이다. 요즘 세상에 약수를 돈 주고 사 먹는 손님이 있을 턱이 있나. 가게 안에 김주원(84)

·김점임(73) 부부가 무료하게 앉아 있다.

 

40여 년 전 얘기부터 해야겠다. 서울에서 건설업으로 제법 돈을 번 김 씨는 누군가에게 빌려준 돈을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빚진 이는 돈 대신 이 땅을 내놓으며 말했단다. “머잖아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시대가 온다.

 

여기서 물만 나오면 떼부자가 된다.” 프랑스 에비앙 얘기까지 꺼냈다. 그때만 해도 생수를 국내에서

마음대로 팔 수 없던 시절. 생수 판매가 합법이 된 건 1990년대 중반이었으니 빚진 이는 아직 열리

지도 않은 시장에 베팅했던 셈이다.

 

김 씨는 그 말을 믿고 땅을 팠다. 100m 깊이까지 땅을 파서 세 번 만에 물을 얻었다고 했다. 예언은

반만 맞았다. 물을 사 먹는 시대는 정말 왔다. 다만 떼부자는 되지 못했다.

 

약수는 누구나 떠 가게 두고 ‘관정약수식당’을 차려 칼국수와 닭백숙을 팔았다. 서울의 손꼽히는 냉면

집이 ‘육수용 물을 대 달라’고 찾아온 적도 있었지만, 허가 절차가 까다로워 포기했다. 누구나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냉면집 상호를 김 씨가 말했지만, 무산된 일이니 그건 쓰지 않기로 한다.

 

손님이 줄어 식당은 문을 닫았다. 지금은 물만 판다. 큰 말통이 3000원, 중간 것은 2000원, 작은

생수병은 300원이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탄산은 거의 없고 철분의 쇠 맛도

없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혀끝에 단맛이 느껴진다. 물이 좋으면 ‘물맛이 달다’고 하지만, 그게 ‘진짜로

달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물은 달았다.

▲폐쇄된 왕의 물 ‘전의초수’. 물은 이제 먹을 수 없다지만,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고 바가지도 놓여 있다.

 

◆다실에서 우동을 파는 이유

 

세종의 동쪽 끝, 청주와 맞닿은 부강면으로 간다. 부강면 소재지 주택가에 ‘가네코후미코 다실’이 있다.

다실(茶室)이라지만 우동을 판다. 찾아간 날, 가게에는 일본에서 온 여행자들이 앉아 있었다.

 

중년 여성도 있었고, 머리를 물들이고 팔에 문신을 새긴 젊은 여성도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자취를

찾아 부강까지 오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고 했다. 나이도 차림새도 제각각인 이들을 이 작은 면 소재지

까지 불러들이는, 가네코 후미코는 누구일까.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호적없는‘무적자(無籍者)’였다. 학교에 다녀도 학력을 인정받지 못했고, 국가도 가족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1912년, 아홉 살 후미코는 조선에 사는 고모 집에 양녀로 왔다. 고모 집이 여기 부강에 있었다. 당시

부강은 금강 뱃길이 열차와 이어져 하루 수천 명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철길 위쪽 고지대에는 일본인 부자들이, 아래쪽에는 조선인들이 살았다. 고모 집은 윗마을에 있었다.

그 집에서 후미코는 하녀나 다름없었다. 할머니의 폭언과 매질을 견디며 집안일을 떠맡았다.

 

헌병 파견소 마당에서는 옷이 벗겨진 조선인이 채찍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서 쫓겨나면 아이

는 아랫마을 조선인들의 공동 우물가로 내려갔다.

 

거기서 한 조선인 아낙이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일본인 눈에 조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

지만, 윗마을에서 쫓겨난 이 아이에게는 아랫마을이 보였다.

 

1919년 봄, 열여섯 살 후미코는 부강에서 만세 소리를 들었다. 훗날 법정에서 그는 그때 “남의 일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솟았다고 했다.

 

그해 일본으로 돌아간 후미코는 도쿄에서 신문팔이와 식모살이로 고학하다가, 조선 청년 박열의

시를 읽고 단숨에 매료됐다.

 

둘은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를 꾸렸고,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일왕 암살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사형을선고받았다. 그리고 1926년 7월, 스물셋의 나이로 옥중에서 숨졌다.

 

2018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다. 일본에도

조선에도 속하지 못했고, 국가라는 틀 자체를 거부했던 사람. 올해가 후미코가 세상을 뜬 지

꼭 100년 되는 해다.

▲가네코후미코 다실’ 벽에 걸어놓은 후미코의 생전 사진. 우동을 먹으러 온 젊은이들이 여기서 후미코를

알고 간다.

 

◆닷새 동안 넘긴 토지대장

 

우동집에서 이규상(68) 가네코후미코 선양사업회장을 만났다. 그가 후미코를 알게 된 건 40대 초반

공무시절, 우연히 손에 든 책 한 권 때문이었다. “내 고향 얘기가 나오니까 관심이 갔는데, 보면 볼수

록 매력적인 인물이었어요.” 불쌍해서가 아니라 매력적이어서…. 그 말이 오래 귀에 남았다.

 

2008년 부강면장(당시 청원군 부용면장)으로 부임한 그는 곧바로 후미코 학술대회를 열었다. “우리

에게 이런 공간이 있고,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그는 후미코의 자취를 찾았다. 군청 지적과에서 1920년대 토지대장을 뒤진 지 닷새 만에 후미코가

얹혀살던 고모부 집 주소를 찾아냈다.

 

그걸 지금의 지도와 대조해 집터를 알 수 있었다. 부강역 뒤쪽 150m쯤.정원 딸린 집의 대문과 언저

리가 후미코가 살던 자리다. 팻말 하나 없다.

 

이 회장은 기념관을 짓고 싶었다고 했다. “기념관이나 뭐 그런 걸 만들고 싶었는데, 결국 아들이 만든

공간에 자리를 잡았어요

 

 아들 형제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에 5층짜리 연립주택을 올렸고, 1층에다 협동조합 이름으로

가게를 내고 아버지가 20년 넘게 붙들고 있는 후미코를 기억하는 다실을 만든 것이다.

 

다실에서는 일본에서 6개월 동안 우동을 배워 온 작은아들 혁진(34) 씨가 우동을 팔고 있다.아들의

우동은 서울까지 소문이 났다.

 

젊은이들은 우동을 먹으러 왔다가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후미코라는 이름을 처음 알고 간다. 후미코

를 아는 이들은, 부강에 이런 곳이라도 있어 고맙다며 일부러 찾아온다.

 

의무감이 앞선 기념관은 관심이 식으면 잊히고, 여행상품은 지원금이 끊기면 없어진다. 이 우동집

은 제힘으로 너끈히 굴러가며 한 사람의 기억을 떠받친다. 한 사람의 삶을 기념하는 이른바 ‘지속

가능한 방식’이다.

 

세종에서 만난 건 이런 것들이었다. 창경원에서 먹은 수학여행 도시락, 펜스 안 돌 위에 놓인 분홍

바가지, 팻말 하나 없는 대문. 누가 붙들지 않았다면 진작 흩어졌을 것들이다.

 

그걸 붙든 건 옛 신문을 뒤져 수학여행 사연을 찾아낸 마을기록가, 왕의 물 곁에서 늙어가는 노부부,

닷새 동안 토지대장을 넘긴 면장, 그리고 아버지가 20년 넘게 붙든 이름을 간판에 내건 아들이다.

 

미래는 넘치는데 어제가 모자란 도시. 도시의 내일을 보러 간 세종에서 정작 오래 발길을 붙든 건

어제였다.

 ◆신식 장승’의 정체

 

세종 전의면 읍내리 북암천 변의 전의성당 옆에는 시멘트로 만든 ‘신식’ 장승이 있다. 알록달록

색까지 칠해 무속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1970년 무렵 아들 낳기를 원하던 부부가 시멘트 10포대를 사서 기술자에게 부탁해 만들어 본디

목장승이 있던 자리에 세웠다.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방치된 장승을, 이번에는 부동산업을 하던 이가 큰돈을 들여 채색

했단다. 그것도 색이 다 바랜 뒤에 서울 대학생의 마을 담벼락 그리기 자원봉사 과정에서

새로 그렸다.

“광화문 가을 하늘 수놓은 공연”…120m 상공 외줄 묘기에 ‘탄성’

▲1일 에스토니아 출신 레드불 슬랙라인 선수 얀 루스가 서울 광화문 사거리 약 120m 상공에서

‘레드불 서울 줄타기’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슬랙라인은 두 지점 사이를 이어 팽팽하게 설치한 폭 2.5~5cm 안팎의 줄 위에서 균형을 잡아

걷거나 점프, 회전 등의 기술을 선보이는 스포츠로, 이날 얀 루스는 코리아나호텔을 출발해

동아미디어센터를 반환점으로 돌아오는 편도 160m 구간의 고공 왕복 횡단에 도전했다.

 

“와, 진짜 높네요. 3주간 한국을 여행 중인데 이 외줄타기 퍼포먼스가 하이라이트입니다.”

라트비아에서 온 여행객 리에네 자쿨레 씨(30)는 1일 오후 1시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 앞 120m

상공에서 펼쳐진 슬랙라인 공연을 보며 연신 탄성을 질렀다.

 

슬랙라인은 두 지점 사이를 이어 팽팽하게 설치한 폭 2.5~5cm의 줄 위에서 균형을 잡아 걷거나

점프, 회전 등의 기술을 선보이는 스포츠다.

 

자쿨레 씨는 “한국에 사는 호주 친구에게 공연 소식을 듣고 일부러 시간을 맞춰 왔다”며 “이렇게

높은 곳에서 펼쳐진 공연은 평생 처음 봤다”고 말했다.


 ◆40층 높이에 160m 외줄 걸어 왕복

▲얀 루스 선수가 1일 광화문 상공에서 고공 줄타기(슬랙라인)를 하고 있다. 스포츠 음료 업체 레드불이

주최한 이번 행사는 사람이 아파트 40층 높이(120m)에 설치된 외줄 위를 걸으며 묘기를 부린다.

한국 도심에서 슬랙라인 행사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광화문에서는 서울시가 후원하고 레드불 코리아가 주최한 슬랙라인 공연이 오후 1시와 4시

두 차례 펼쳐졌다.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슬랙라인 세계챔피언을 3차례 차지한 얀 루스 선수(34)가 광화문 동아미디어

센터와코리아나호텔 사이 상공 120m에 설치된 줄을 걸어 왕복했다. 아파트 약 40층 높이로, 국내

에서 고공 슬랙라인 공연이 펼쳐진 것은 처음이다.


루스는 첫 편도 160m 구간을 출발하기 전 줄을 손으로 흔들어 점검하고 몸에 안전장치를 연결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으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공연을 시작하자 긴장한 모습이 점차 사라진 그는 줄 위에 눕거나, 동작을 바꿔 가랑이 사이에 줄을

끼우기도 했다.

 

약 15분 만에 동아미디어센터에 도착해 손을 흔들자 청계광장과 세종대로 사거리 일대를 메운 관중

은 박수 갈채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반환점에서 다시 160m 구간을 되돌아가는 길에서 더 속도를 낸 루스는외줄 위에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발가락을 줄에 건 뒤 마치 박취처럼 몸을 거꾸로 늘어트리는 등 한층 과감한 동작을 선보여

관중의 탄성을 자아냈다. 공연은 27분 동안 진행됐다.

 

 ◆“처음 보는 광경” 광화문의 시선이 한곳에

▲1일 서울 광화문광장을 찾은 시민들이 에스토니아 출신 슬랙라인 선수 얀 루스가 코리아나

호텔과 동아미디어센터 사이에 설치된 슬랙라인을 건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이날 오후 1시와 4시 세종대로 사거리 일대를 메운 시민들의 시선은 일제히 하늘을 향했다. 120m

상공의 루스는 지상에서 올려다보면 작게 보였지만 동아미디어센터에 마련된 국내 최대 규모의

미디어 사이니지‘룩스(LUUX)’에는 그의 표정과 동작이 실시간으로 송출됐다.

 

루스가 줄 위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시민들은 “어떻게 해” “바람이 부는데 괜찮나”라며 탄성을

지르거나 박수를 보냈다. 아찔한 공연을 펼치는 선수를 향해 손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서울시 실시간 도시데이터에 따르면 행사가 펼쳐진 오후 1시와 4시에는 광화문광장 인근에만

1만~1만2000여영의 인파가 몰렸다.

서울시청 인근에서 슬랙라인 공연을 본 강동완 씨(59)는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너무신한 공연을 하길래 사진은 물론 동영상까지 찍었다”며 “이런 공연은 처음이라 너무 신선

했고 이런 행사가 또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직장인 양하영 씨(30)는 “엄청 높은 상공에서 공연이 펼쳐진다는 예고 기사를 보고선 ‘위험하지

않은가’라며 걱정했는데 안전장치를 한 것을 보니 안심됐다”며 “입장료 없이 광화문 곳곳에서

자유롭게 공연을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직장인 서아름 씨(45)는 “광화문과 청와대가 한 눈에 보이는 장소에서 이색적인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니 눈이 즐겁다”고 말했다.

▲1일 에스토니아 출신 레드불 슬랙라인 선수 얀 루스가 서울 광화문 사거리 약 120m 상공에서

‘레드불 서울 줄타기’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슬랙라인은 두 지점 사이를 이어 팽팽하게 설치한 폭 2.5~5cm 안팎의 줄 위에서 균형을 잡아 걷거나

점프, 회전 등의 기술을 선보이는 스포츠로, 이날 얀 루스는 코리아나호텔을 출발해 동아미디어

센터를 반환점으로 돌아오는 편도 160m 구간의 고공 왕복 횡단에 도전했다. 

 

서울시와 레드불은 비가 오거나 강풍이 불 경우 선수의 안전을 고려해 행사를 연기하려 했지만 이날

날씨가 맑아 예정대로 공연을 진행했다. 서울시는 인파에 대비해 경찰 등과 함께 안전관리 인력

약 290명을 현장에 배치했다.

 

 

가고시마현(鹿兒島縣)ㅡ바다는 거대한 庭園...화산을 수반위에 얹고 있네.

▲일본 가고시마시 사쿠라지마의 온타케산 아래 유노히라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가고시마만의 모습.

햇빛을 받아 금박지처럼 반짝이는 오키코지마 주위의 바다 위로 페리호가 지나고 있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일본 땅 규슈(九州). 규슈 지방의 남쪽 끝에 가고시마(鹿兒島)가 있습

니다. 한겨울에도 좀처럼 영하로 내려가지 않아 남국의 정취가 느껴지는, 그리고 연기를

내뿜는 활화산 하나가 섬이 돼서 바다에 떠 있는 이국적인 여행 목적지입니다.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국내 저비용 항공사의 일본 중소도시 취항이

크게 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비싼 요금의 국적기만 드나들었던 가고시마에도 드디어

저비용 항공사의 비행편이 닿았습니다.

 

번잡스러운 대도시 여행도 좋지만, 일본의 지방 중소도시 여행도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도시는 고즈넉하고물가는 저렴하며 주민들은 더 친절합니다. 항공료도, 숙박비도 대도시

보다 싼 건 따로 말할 필요도없지요.

 

그러나 이런 비용 대비 편익 따위로는 잴 수 없는 매력이 일본 중소도시에는 있습니다. 그

매력을 찾아 가고시마로 떠났습니다.

▲가고시마현의 남쪽 끝 이부스키 해변의 야마카와 제염공장 유적지. 온천 열을 이용해서 소금을

만들던 곳이다.1944년부터 1964년까지 소금을 생산했다.

 

제염공장 유적지를 가운데 두고 한쪽에는 검은 모래 찜질을 즐길 수 있는 해변이, 다른 쪽에는

바닷가 노천온천이 있다.

▲사쿠라지마(Sakurajima) 행 카페리를 탄다

 

◆땅에 뿜어낸 熱에 몸을 담그고. 탁트인 바다에 눈을 맡기다

 

▶기리시마(霧島)를 지나칠 수 없는 이유

▲ 가고시마를 다스리던 영주의 별장 센간엔에서 본 사쿠라지마

 

가고시마 공항은 가고시마시가 아니라 기리시마시에 있다. 공항에서 가고시마 시내 중심

까지는 40㎞에 달하지만, 기리시마까지는 10㎞가 조금 넘는다.

 

기리시마는 그래서 가고시마로 들고 날 때 들르면 좋다. 가고시마에 앞서서 기리시마 얘기

를 꺼내는 건 그래서다.

두 곳 모두 가고시마현에 속하지만, 가고시마와 기리시마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가고

시마가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 중심의 여행지라면 가고시마현의 중앙에 있는 기리시마

는 첩첩한 산과 계곡, 그리고 수많은 온천을 거느린 자연 중심의 여행지다

.

제주 올레가 수출한 ‘규슈 올레’의 가고시마 도보 코스도 기리시마에 있다. 가고시마와 기리

시마가 다르다는건 저마다 갖고있는 매력으로 서로를 채워줄 수 있다는 얘기다.

 

가고시마 여행에서 기리시마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 더 귀띔하자면, 일본의

다른 도시에비해 가고시마가 물가가 싼 편인데, 기리시마는 그런 가고시마보다 더 물가가

저렴하다.


기리시마를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기리시마 신궁이다. 일본에서는 신을 모신 곳을 신사라고 하는

데 그중에서 왕실의 선조이거나 왕족과 인연이 있는 신사만을 따로 ‘신궁’이라고 부른다.

 

기리시마 신궁은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을 모시고 있다. 1500년 전

창건됐다는데, 당시의 신궁은 화산 폭발로 불에 탔고 지금의 건물은 171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신궁에서 인상적인 건 경내 곳곳에 심어진 어마어마한 크기의 삼나무다. 수령 700년이 넘는 삼나

무들의 거대한 위용 앞에서는 탄성이 절로 터진다이름난 온천지구가 여럿 있다는 점도 기리시마

의 매력이다.

 

크고 작은 9개 온천이 모여 있는 기리시마 온천마을도 있고, 신궁 주변에서 운치 있는 여관부터

대형 호텔까지 다양한 종류의 온천을 갖춘 기리시마 신궁 온천마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신혼여행 때 묵은 온천 등 오래된 여관들이 늘어선 신카와(新川) 계곡

온천마을,강을 끼고 스무 채의 여관이 들어선 히나타야마(日當山) 온천에 이르기까지 선택의

폭이 넓다

▲배로 약 15분 정도 걸린다.

 

 ◆기리시마 신궁. 수령 700년이 넘는 삼나무들로 꽉 차 있다

◆ 바다 위의 화산섬, 사쿠라지마(櫻島)

가고시마의 아이콘이라면 단연 ‘사쿠라지마’다. 가고시마 시내 어디에서나 바다 건너로 보이는

사쿠라지마는 화산 폭발로이뤄진 섬의 지명이다.

 

1914년과 1946년 대분화 당시 흘러내린 용암으로 지금은 육지와 붙은 땅이 됐지만, 완도보다

조금 작은(80㎢) 면적에 4000여 명이 거주하는 사쿠라지마는 여전히 ‘섬(島)’으로 불린다.

 

사쿠라지마는 땅 전체가 살아 있는 화산이다. 섬 중앙에 검은 흙이 드러난 해발 1117m 온타케

(御岳) 산정 일대의 황량한 모습도 그렇고, 미나미타케(南岳) 분화구에서 김이 펄펄 나고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가고시마 쪽에서 바라보면 진청색 바다 위에 연기를 뿜으며 떠 있는 화산은 압도적이다. 사쿠라

지마는 그것 그대로 가고시마의 상징이다.

 

그러니 사쿠라지마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가 곧 가고시마의 명소가 되는 건 당연한 일.

가고시마의 가장 이름난 관광지이자, 사쿠라지마를 조망하는 최고의 명소가 바쿠후(幕府)

시대 사쓰마번(薩摩藩·지금의 가고시마현) 영주였던 가문의 별장인‘센간엔(仙巖園)’이다.

 

센간엔은 수년 전 방송된 일본의 인기 대하드라마의 배경이 된 곳이라, 이곳을 찾은 일본인 관광

객들은 자못 감회가 깊은 모양이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 이곳은 그저 풍경으로 소비할 따름

이다.

 

일본의 정원은 자연 경치를 빌려서 정원의 일부처럼 활용한다는데, 과연 이곳 센간엔도 푸른

바다와 사쿠라지마를 마치 정원의 연못과 동산처럼 배치해 놓고 있다.

 

바다를 거대한 정원으로, 거친 화산을 수반 위에 얹은 기이한 수석으로 삼고있는 저택이라니….

 

사쿠라지마를 바라보는 가고시마의 두 번째 명소는 시로야마(城山) 전망대다. 언덕 아래 주차장

에 차를 세우고 10쯤 걸으면 해발 107m의 전망대에 닿는다.

 

센간엔 정원이 바다에 바짝 붙어서 사쿠라지마의 위용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면, 여기 시로야마 

전망대는 뒤로 물러나서 도시의 시가지와 그 너머의 바다, 사쿠라지마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같은 곳을 보는데도 거리와 높이에 따라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 가고시마의 명물은 흑초. 수만 개의 흑초 발효항아리를 둔 생산공장도 있다.

 

◆ 화산의 발치에서 불의 산을 보다

사쿠라지마는 섬은 아니지만 가고시마에서 육로로 가려면 가고시마만을 빙 둘러서 가야 한다.

이렇게 가려면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육로로 사쿠라지마로 들어가는 길 곳곳에는 흑초

공장이 있다.

 

가고시마의 특산물 중의 하나가 흑초다. 흑초란 현미를 자연 발효해 빚은 검은색 식초를 말하

는데, 주로 물에타서 먹는 건강식품으로 소비된다.

 

흑초는 일본 전역에서 빚지만 에도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제조방식으로 만드는 가고

시마산의 품질이 월등하다.

 

긴코(錦江)만의 가장 깊숙한 지역에 모여 있는 흑초 공장들은 제품 시음 등을 할 수 있는 전시장

등을 무료로 공개하고 있는데, 흑초의 새큼하고 깊은 맛도 맛이지만,

 

그보다 놀라웠던 건 수만 개가 넘는 발효 항아리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늘어선 모습이었다. 줄을

맞춰 놓은 항아리들이 해안의 구릉을 가득 메운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사쿠라지마는 대부분 가고시마항에서 페리호를 타고 건너간다. 육로로 가면 2시간 30분이나 걸리

는데 배를타면 불과 15분 만에 사쿠라지마로 건너갈 수 있다. 사쿠라지마에는 곳곳에 전망대가

있다.

 

섬 안의 화산을 바라보는 전망대도 있고, 건너편 가고시마를 바라보는 전망대도 있으며, 화산 분출

로 이뤄진 기이한 바위의 형상을 보는 전망대도 있다.

 

그중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 화산의 분화구에서 가장 가까운 해발 373m 높이에 있는 유노히라(湯之平)

전망대다.여기서보면 두 개의 산이 겹쳐져 보이는데, 앞쪽의 산자락은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진 기괴

한 모습이다.

 

분화구의 연기는 뒤쪽의 산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구 깊숙한 곳에

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숨소리가 느껴지는 듯하다.

 

사쿠라지마 남쪽의 아미무리(有村) 용암전망대에서는 용암이 흘러 굳어진 바위와 연기를 뿜어내는

‘불의 산’인 미나미다케(南岳)를 정면에서 볼 수 있다.


화산을 등 뒤로 놓고 돌아서면 긴코만의 바다 건너편으로 가고시마의 도시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바다 쪽 전망대 안내판에는 화산 분출로 만들어진 해안가 지형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걸 실제 지형과 비교해가며 읽다가 하나의 들판도, 하나의 구릉도 이유 없이 만들어지는 건 없다는

데생각이 닿는다. 자연도, 사람도 그럴 것이었다. 오후 나절의 볕을 받아 금박지처럼 반짝이는 바다

위로 유유하게 배가 지나갔다.

 

◆ 모래찜질과 바다 온천…이부스키(指宿)

가고시마에서는 모래찜질(스나무시·砂むし)로 이름난 이부스키도 유명한 관광명소다. 가고시마 시내

에서이부스키 까지는차로 1시간 30분 남짓. 가고시마에서 이부스키까지는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해안

도로와 내륙의 산자락을 타고 넘는 유료도로가 있다.

 

해안도로는 앞을 막는 저속 차량 때문에 답답하지만, 유료 도로는 구불구불 곡선구간이어찌나 많은지

핸들을 붙잡고도 멀미가 날 지경이다. 굳이 통행료를 따로 내고 유료 도로를 택할 이유는 없겠다.

▲ 사쿠라지마의 유노히라 전망대에서 본 온타케의 위용

▲유노히라(湯之平) 전망대.

▲ 가고시마만을 돌아 육로로 가는 길가의 공원에서 본 사쿠라지마 모습.

 

이부스키의 명물 모래찜질은 바다 쪽을 흐르는 온천수가 덥혀 놓은 뜨거운 모래로 해변에서 찜질

하는 것을 말한다. 이부스키역에서 가까운 사라쿠(砂樂) 등 몇 곳의 모래찜질 명소가 있지만,

최근 인기를 누리는 곳이 사유리(砂湯里) 모래찜질 시설과 다마테바코(たまて箱) 온천이다.

 

모래찜질 해변과 온천은 1944년부터 1964년까지 온천 열로 소금을 생산하던 제염소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있다.


사유리 모래찜질 시설과 다마테바코 온천에서는 각각의 입장권도 팔지만, 모래찜질과 온천욕을

다 할 수 있는 통합권도 판매한다. 통합권 가격은 1130엔(약 1만700원)이고, 온천만 한다면

510엔(4800원)이다.

 

모래찜질과 온천욕은 순서가 있다. 해안가의 검은 모래에서 모래찜질하는 게 먼저고 온천욕이 나

중이다 이부스키에서 이름난 건 모래찜질이라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래찜질보다는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다마테바코 온천에서의 온천욕의 감동이 몇 배나 컸다.


해안가 모래사장에서의 모래찜질은 손님이 누우면 삽을 든 직원들이 적당한 깊이에서 파낸 적당한

온도의 모래를 덮어주는 노련함이 필수. 하필 여중생쯤 돼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모래를 덮어줬

는데, 몸의 반쪽은 뜨겁고 다른 반쪽은 차가워서 견딜 수 없었다.

 

모래찜질의 만족도는 삽을 든 이의 솜씨에 전적으로 좌우했다. 모래찜질이 기대 이하였다면 모래찜

질 후에 들어간 다마테바코 온천은 별다른 시설 없이 노천탕 딱 하나만 있었을 뿐이었는데도 운치

가 각별했다.

 

탁 트인 바다를 보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즐기는 온천욕의 운치라니…. 아니나 다를까. 다마테바코

온천은 인터넷 기반의 여행사 트립어드바이저 일본 법인이 고객 평판으로 선정한‘당일치기 온천

및 스파 부문’에서 4년 연속 1위를 한 곳이란다.

▲다시 순환버스를 타고 사쿠라지마 Visitor Center로 간다.

▲이 곳에는 약 100m애 달 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족욕탕이 있다.

▲ 사쿠라지마 미나미다케산(南岳)

▶가고시마 가는 길 = 지난 6일부터 제주항공이 가고시마에 인천발 노선을 주 3회 운항하고 있다.

이에 앞서 이스타항공이 가고시마 정기편을 운항해 오고 있다.

 

날짜별로 다르지만 저비용 항공의 경우 특가운임을 적용받으면 20만 원 안쪽에 왕복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기리시마에서는 주택가에 있는 회전초밥집 메츠케몬 고쿠부점

(國分店·0995-47-2008)을 추천한다. 회전초밥집인데도, 원하는 메뉴를 일본어로 적어서

주문해야 하는 게 번거롭지만 놀랄 만큼 재료가 신선하다.

 

흑초를 만드는 공장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 가쿠이다(0995-55-3231)는 흑초를 넣어 만든

음식을 내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기리시마 최고의 맛집이다.

가고시마는 흑돼지 요리로 유명한데, 흑돼지 샤부샤부와 돈가스가 대표 메뉴다. 가고시마 중앙

역의 상가 아뮤 플라자의 이치니산(099-252-2123)은 가고시마에서 가장 유명한 샤부샤부

체인점이다.

 

덴몬칸의 아지모리(099-224-7634)도 못지않은 명성을 누리는 식당이다. 가고시마의 흑돼지

돈가스는 부드러운 비계가 많은 고기를 튀겨내 취향에 따라 평가가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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