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아의 노르웨이, 오만 무산담 반도( Musandam Peninsula)

▲오만으로 국경을 넘기 전 눈길을 끄는 아랍에미리트 선전물들

◆아랍에미리트에 오만이 있는 이유?

 

아랍 지역은 17~18세기 유럽 열강간의 세력다툼에 휘말렸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7개의 토후국들이 모여 결성된 아랍에미리트.

 

이 지역을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영국의 의도와는 달리 일부

지역은 다른 나라로의 복속을 원했다.

 

무산담의 경우는 각 지역별 토후국간의 정치적,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얽힌 신경전

끝에 오만이 얻어 낸 결과물이다. 

 

무산담 반도(Musandam Peninsula)라는 생소한 이름과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

이었다. 두바이의 호텔 로비에서 무심코 여행상품이 소개된 팸플릿을 보게 되었다.

 

그중 이웃나라 오만으로 가는 무산담 반도 투어가 눈길을 끌었다. 부랴부랴 검색

해 보니 무산담은 아랍에미리트의 북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반도였다.

 

마치 페르시아만을 막아버리겠다는 듯, 이란 쪽으로 삐져나온 반도가 호르무즈

해협(Strait of Hormuz)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오만에 속한 영토지만, 정작 오만 본토와는 뚝 떨어져 마치 아랍에미리트 내에

섬처럼 위치하고 있었다. 무산담뿐이 아니었다.

 

무산담에서 오만으로 이르는 지역에는 마드하(Madha)라는 오만 영토 역시 섬

처럼 존재했다. 이들 지역이 어떠한 연유로 이렇게 자리 잡고 있는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다음날 아침, 숙소 주변을 지나는 E611번 고속도로를 타고 오만 국경으로 차를

몰았다. 잘 정비된 고속도로 덕분에 아랍에미리트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라스 알 카이마(Ras Al-Khaimah)까지는 금방이었다.

 

국경에 가까워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도로에는 승용차보다는 분주하게 움직이

는 화물트럭들이 많아졌고, 무엇보다 온통 사막뿐이던 풍경에 변화가 생겼다.

거친 산악 지형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만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오만 위치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사막은 온데 간데없고 황량한 암벽산과 모스크가 풍경을 압도한다

마침내 도착한 아랍에미리트-오만 국경. 붐비는 것도 아니건만 국경 통과는 시간을

꽤나 잡아먹는 절차였다. 우선 아랍에미리트 측 사무소를 통과해 출국을 한 상태로

중립 지대에서 필요한 절차를 마친 후 다시 오만 측의 입국 심사를 받아야 했다.

 

이때, 오만 영토에서 필요한 차량 보험을 가입해야 했는데, 체류 기간에 관계없이

최소 보험기간이 일주일이었다. 고작 반나절의 여정을 계획한지라 금액을 떠나

억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뭐든 남들과 다른 것을 하려면 대가가 필요한 법. 자유를 누리려면 이정도

쯤은 감수하기로 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마침내 오만 영토에 들어섰다. 무산담 반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하사브(Khasab)로 향했다.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험한 지형이라 길은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것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

게 편하게 차를 타고 무산담으로 향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라

고 했다.

 

이전에는 오직 배편으로 바다를 통해서만 다닐 수 있었다. 도로가 생기면서 아랍

에미리트로부터의 접근이 쉬워졌고, 덕분에 무산담은 두바이 사람들에게 인기

주말 여행지로 부상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산들이 병풍마냥 서 있는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이슬란드에서 해안 도로를 달렸던 기억이었다.

 

깊은 피오르를 따라 끊임없이 굴곡진 바로 그 해안도로의 모습이었다. 과연 ‘아라비

아의 노르웨이’라 불릴 만했다.

 

시각적으로는 신기하리만큼 비슷하지만 사실 형성된 원인은 완전히 다르다. 북유럽

의 피오르가 빙하가 깎아 낸 침식 지형인 반면, 이곳은 지각운동, 즉 아라비아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해 생긴 지층의 융기 현상으로 만들어진 지형이다.

 

과연 드러난 절벽 면에는 지층의 라인이 그대로 살아있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건드

리면 화석이 우수수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지층이 드러난 절벽과 만난 해변이 노을에 젖어들고 있다

▲아랍 스타일의 하사브 요새

국경에서 1시간 정도의 운전 끝에 마침내 무산담 반도의 끄트머리인 하사브에 도착했다.

오늘날 하사브는 휴양지로 기능하고 있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무역과 보급지로서의 역할이 컸다.

 

17세기 초 해군력이 강했던 포르투갈은 물과 식량을 보급하는 중계 기지가 필요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곳이 바로 하사브다. 오늘날에도 지리적으로 이란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어서 밀수를 포함한 무역이 성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멋진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정작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중심 도시라 했기에 활기찬 분위기를 떠올리며 왔건만, 시즌이 아니어서인지

거리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나마 찾아낸 여행사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냥 와도 뭔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완전 오판이었다! 

원래 무산담 반도의 대표적인 여흥은 뱃놀이다. 바다로 떨어지는 해안의 석회암 절벽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배를 타고 나가 바다 쪽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스노클링과 다이빙으로도 인기가 높다.

 

잘 보존된 산호와 쥐가오리, 리프 상어 등 다양한 어종이 삭막해 보이는 지형의 푸른 바다

속에 은밀히 숨겨져 있기 때문. 특히, 전 세계에 알려진 80여 종의 돌고래 중 20여 종이

이 지역에 나타난다니 놀랍기만 하다.

 

알면 알수록 사전에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저

이곳에 다시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당일치기 ‘깜짝 투어’는 여기까지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국경을 넘기 위해 두바이로의

‘귀경길’을 서둘렀다. 불확실성이 드리워진 국경 통과는 은근히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서는 올 때 놓쳤던 풍경들이 또다시 우리의 발걸음을 잡았다. 마음

은 바빴지만 도저히 차를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그중에서도 어느 이름 모를 해변

에서 맞이한 아라비아 반도의 석양은 기대하지 않았던 무산담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여행   수첩

 

자동차로 국경을 넘으려면 사전에 렌터카 회사에서 허가증을 받아서 국경 검문소에

제출해야 한다. 또한, 오만에서는 차량보험이 의무적인데, 국경에서 가입하면 된다.

단, 몇 시간만 머물더라도 최소 가입기간은 일주일이다.  

무산담은 오만 영토이지만 아랍에미리트 화폐인 디르함AED을 그대로 쓸 수 있다

 

하사브는 스쿠버다이빙, 스노클링, 뱃놀이 등의 액티비티가 발달한 곳이므로

사전에 알아보고 간다면 알찬 여정을 즐길 수 있다.

렌터카 업체는 식스트 렌터카Sixt Rent-a-car를 이용했다. 독일의 메이저 렌터카

업체로 가격대비 차량의 상태가 좋다. 두바이 공항 터미널에서도 차량 인수하는

곳의 위치가 편리하다. 예약할 때 국경을 넘을 계획이 있다고 알려 두면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준다. 


 

겨울 생선인 줄 알았는데 지금이 제철?…알 톡톡 도루묵의 반전. 

▲고성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의 산책로를 따라 화암사를 거쳐 신선대로 오르는 

방법도 있다. 켄싱턴리조트 산책로는 울산바위를 배경 삼을 수 있는 덕에 요즘

 젊은 러닝족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찬바람이 불면 고성에 갈 이유가 늘어난다. 신선대(645m·성인대)에 오르면 단풍 물든

울산바위의 압도적인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포구로 내려가면 막 올라오기 시작한

도루묵으로 마음마저 든든해진다.

 

햇메밀 막국수에 뜨끈한 문어국밥까지, 산행 뒤 먹을 것을 고르는 일도 즐겁다. 단풍

산행에 제철 별미를 곁들여 늦가을 고성 여행을 즐겼다. 

▲강원도 고성 신선대에서 본 설악산 울산바위의 가을 풍경. 가을빛 번진 숲 위로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울산바위를 정면으로 조망할 수 있어 신선대는

사계절 발길이 이어진다. 화암사를 들머리 삼아 한시간쯤 오르면 신선대에 닿는다.

 

고성에서는 으레 동쪽으로 눈길이 간다. 포구와 바다가 있는 쪽이다. 가을에는 

바다를 잠시 등져도 좋겠다. ‘높은 산을 낀 고을(高城)’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내륙으로 들수록 풍경이 깊어진다.


지난 22일 고성 신선대에 올랐다. 설악산 북쪽 신선봉(1204m)의 허리께 자리한 

암봉이다. 비교적 짧은 산행으로도 울산바위의 웅장한 자태를 마주할 수 있어 

MZ세대 ‘산린이(등산 초보)’ 사이에서 퍽 유명한 코스다.

오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산 중턱의 화암사 주차장에서 출발하거나, 켄싱턴

리조트 설악밸리에서 산책로를 따라 사찰로 접어들거나. 

▲육중한 수바위 아래 화암사가 들어앉아 있다.

▲화암사가 신선대 산행 코스의 들머리다. 화암사 종각에서 본 수바위의 모습.

 

단풍철에는 화암사 진입로부터 차가 밀리니 리조트 쪽이 대안이겠다. 1시간가량

 더 걷지만, 차 안에 갇혀 있을 시간에 대신 가을 풍경을 누린다. 

 

이 산책로는 뜻밖에도 걷는 이보다 달리는 이가 더 많다.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달

리는 모습을 담을 수 있어 전국의 러닝 크루가 꾸준히 찾는단다.

켄싱턴리조트 관계자도 “러닝족이 늘면서 가족층 중심이었던 리조트가 확 젊어

졌다고 소개했다. 울산바위 아래서 달리기 인증 사진을 찍는 시대라니. 오래된

명산 앞에서도 유행은 부지런히 바뀐다.

화암사 일주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金剛山 禾巖寺(금강산 화암사)’라고

적힌 현판이 선명했다.

 

알고 계시나. 신선봉은 금강산 1만2000봉의 남쪽 첫 봉우리로 꼽힌다. 화암사

주지 대현 스님이 “오늘 보니까 단풍이 제법 예쁘게 내려왔다”며 “금강산 줄기

에 자리해 정기가 남다른 곳이니, 좋은 기운을 얻어 가시라”고 덕담을 건넸다. 

▲올가을은 늦더위의 영향으로 단풍이 예전만 못하다. 신선대에서 본 설악산

울산바위 일대의 가을 풍경. 

 

화암사 입구에서 수바위와 시루떡바위를 거쳐 1시간쯤 만에 신선대에 닿았다. 숲에 

가렸던 시야가 단숨에 트였다. 운동장처럼 너른 바위 지대에 올라서자 울산바위의 

여섯 봉우리가 정면을 가로막았다.

산 아래에서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지만, 이곳에서는 봉우리마다 다른 얼굴이

보였다.암벽에 새겨진 주름과 깊이 파인 골짜기까지 선명했다. 고개를 돌리니

화암사 너머의 고성 앞바다까지 단번에 펼쳐졌다.

▲신선대에 오르면 고성·속초 시내와 푸른 동해 바다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늦더위 탓에 올해는 설악산도 단풍이 예년만 못하다고들 한다. 그 아쉬움은 신선대에 

두고 내려왔다. 울산바위에 동해까지 한눈에 담고 나니 단풍 빛깔을 따질 마음이

 사라졌다.

▲순메밀 막국수 

 

▲고성 ‘산북소나무막국수’ 의 순메밀막국수. 메밀을 껍데기째 갈아 면에

거뭇거뭇한 빛깔이 도는 것이 특징이다. 

 

산행 끝의 허기는 반갑다. 막국수 고장에 왔으니 메밀국수부터 한 그릇. 이른바 

‘면 성애자’들이 기다리는 계절이 늦가을과 겨울이다. 햇메밀로 만든 국수를 

맛볼 수 있어서다.

고성에서 3대를 잇는 ‘산북소나무막국수’를 찾았다. 메밀 함량 100%의 순메밀 

막국수(1만1000원)를 내는 집이다. 글루텐이 없어 쉽게 끊어지는 순메밀은

 반죽부터 까다롭다. 

 

뜨거운 물로 단단하게 반죽한 상태로 세 시간 넘게 나뒀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다시 여러 번 치대 면을 뽑는다.

전철재 사장이 “메밀을 껍데기째로 갈아 면에 거뭇거뭇한 빛깔이 도는데, 이를

고성에서는 ‘토면(土麵)’이라 부른다”고 알려줬다.

 

갓 뽑은 메밀국수에 동치미 국물을 붓고 들기름과 설탕을 조금 더해 입에 넣었

다. 한 젓가락만으로도 면의 차이가 느껴졌다. 툭툭 끊어지는 식감 뒤로 담백

한 맛이 따라왔다.

▲아야진항 위판장. 갓 잡아 온 도루묵이 대야마다 가득 찼다. 

▲고성 아야진항의 어민들. 도루묵은 자망을 이용해 떼로 건져 올린다. 부두로 

돌아오면 손으로 일일이 그물에서 생선을 떼어내야 한다. 

 

다음 날 아침 8시 아야진항을 찾았다. 꼭두새벽부터 바다에 나갔던 고깃배들이 

부두로 돌아와 곰치(미거지)와 대구 등을 부려놓고 있었다. 부두 곳곳에서 

반가운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가득 쌓아 올린 도루묵 더미다.

찬물을 좋아하는 도루묵은 산란기인 10월 말부터 12월 사이 얕은 연안으로

몰려온다. 어부들이 이때에 맞춰 자망(가로로 긴 사각형 그물)을 놓는다.

 

어부 박영철씨는 “많이 잡힐 때는 한 배에서 200두름(4000마리)도 건진다”고

말했다. 이날은 도루묵 한 두름이 4만2000원 선에 거래됐다. 

▲도루묵구이 

▲아야진항 앞 ‘어부밥집’의 도루묵찌개. 도루묵은 이맘때부터 12월까지만 맛볼 

수 있는 한정판 별미다. 도루묵찌개는 해장용으로도 술안주로도 제몫을 

톡톡히 한다.

 

항구 앞 ‘어부밥집’은 선장이 잡아 온 생선으로 밥상을 차린다. 도루묵찌개와 도루묵

구이(각 4만원)를 하나씩 주문했다. 이맘때 도루묵은 살보다 알이 더 푸짐하다.

알을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톡톡 터졌다. 고소한 맛에 자꾸 젓가락이 갔다.
유영미

사장은 “도루묵은 겨울 생선으로 알려져 있지만, 끝물로 갈수록 알이 단단해

진다”며 “오히려 늦가을 도루묵이 더 야들야들하니 맛있다”고 설명했다. 

▲고성 ‘베짱이 문어국밥’에서 맛본 문어국밥.

 

요즘 고성을 찾는 젊은 여행자에겐 ‘문어국밥’이 인기란다. 말 그대로 문어를

올린국밥이다.

 

문어야 봄부터 두루 잡히지만, 뜨끈한 국밥으로 즐기기에는 찬바람 부는 이맘

때가 제격이다.

 

삶은 피문어를 얇게 썰어 올리는데, 샤부샤부 먹듯이 먼저 문어와 숙주를 건져

먹고 다음에 국밥을 뜨는 게 순서다. 국밥을 한 그릇 비우고 나니 고성의 차가운

바닷 바람도 한결 견딜 만했다. 

▲화암사에서 수바위와 시루떡바위를 거쳐 신선대에 오른 뒤 화암사 숲길로 

돌아오는 코스는 약 3.2㎞ 길이다. 

 

쉬엄쉬엄 두세 시간을 잡으면 된다. 짧은 산행이지만, 등산화를 챙기는 게 좋다. 

화암사와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 모두 입장료가 없다. 아야진항 앞에 갓 잡은

 도루묵을 내놓는 식당이 몰려 있다.

 

 

파키스탄 훈자마을ㅡ관광객 대부분이 건너길 포기한다는 다리..

▲세계적인 오지, 파키스탄 훈자 심샬 마을.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가을이 깊었다.

▲여행을 하는 관광객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여행을 즐깁니다. 어떤 관광객들은

아름다운경치를 다른 관광객들은 패러글라이딩 같은 여행 스포츠를 원해서 

여행을 하게되죠. 

 

그들 중에서 독특하게 남들이 하지 못하는 특별한 여행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익스트림 애호가들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많은 지역들이 있는데 오늘 소개드리는 이곳,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중도포기하는 위험천만한 다리도 그런 곳 중 하나입니다.

전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훈자마을 위치도

▲카라코람 하이웨이중 훈자마을과 국경지역 쿤자랍 고개 위치도 

▲파키스탄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카라코람 하이웨이 & 훈자마을

 

1984년 영국 런던의 공항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출입국심사를 하던

직원이 한 외국인의 출입증을 보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죠.

 

이유는 그 사람의 나이가 무려 160세였기 때문입니다.하지만 그 노인은 외관상

으로 50세 정도에 아주 또렷이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체 건강상태가 좋아 큰

화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미디어들이 그의 이력을 조사해보았는데 실제로 그가 사는 마을에

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고향은 파키스탄의 북부에 있는 ‘훈자’라는 마을로 히말라야산맥

부근에 있는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곳입니다.

▲145세 할머니들

 

산맥 근처의 마을이다 보니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많은 현지인들은 고립된 생활을하고 있었고, 자신들만의 고유언어를

따로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죠.

 

재미있는 사실은 이 훈자마을에 주민들 중에는 100세가 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이 마을의 평균수명 역시무려 120세가넘을 정도라고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풍경

▲이 마을로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수마을의 비결은 무엇일까'에 대해

궁금해 하곤 합니다. 그러다 이 마을에 도착하면 '아~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죠.

 

 그들이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의 풍경입니다. 가보지 않고는 믿기 힘든 

아름다운 설산의 풍경과 마을 곳곳을 수놓고 있는 푸른 나무들의 향연을

 볼 수 있는 이곳.

▲사이에 뒤로는 울타르피크라고 하는 7300미터 산과 앞으로는 라카포시라고 하는

 7788미터 산으로 둘러쌓여 매일 같이 아름다운 자연에 감동하게 되는 이곳. 

훈자는 바로 그런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마을 자체가 자연인 그런 곳입니다.

▲훈자마을에서 흔히 보이는 집

 

아름다운 자연, 그러나 익스트림한 관광지까지....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은

그 자체만 으로도 힐링이 되는 천연 관광지라고 할 수 있어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죠.

 

그러나 익스트림한 경험을 원하는 관광객들도 매년 이곳을 찾는다고 하는데

그들이 찾는 것은 바로 이곳의 다리라고 합니다

▲북부 파키스탄에서 큰 도시로 나가고자 할 때 이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나갈 방법이 없어 계속해서 이용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훈자마을 보통 사람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특히 강을 가로지르는 높은 다리들은 일단 안정적이야 하죠. 그러나 세계에는 위험하

더라도 건너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곳 훈자 마을 근처의 후사이니 보리스

(Hussaini-Borith) 호수를 건너는 다리가 그런 다리입니다

▲위험천만이고 아찔한 다리를 건너는 현지 여자주민.

▲안타깝지만 실제로 최근까지 이 다리를 건너다 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들이 매년 

수명이 넘는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다리라고 알려진 다리. 

 

현지인들은 다리 자체는 안전하다고 하며 매일 같이 건너지만 보는 사람들은 

정말로 큰 위협을 느낄 정도이죠.

▲드문드문 걸쳐놓은 부실한 널판은 단지 보는 사람조차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에게  이 다리는 매우 중요한 다리로 실제 북부 파키스탄에서 큰 도시로 

나가고자 할 때 이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갈 방법이 없어 계속해서 이용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최근에 리모델링을 진행하여 이전보다는 안전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위험해

보이긴 하죠.그래도 파키스탄에 와서 주변의 마을과 계곡을 보러온 관광객들은 

한 번은 가봐야 할 명소로 손꼽히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겠죠. 비가 와서 다리 밑에 강물이 불거나

 특별히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에는 처음 이용하는 관광객들은 최대한 이용을 

자제하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신대륙 수입 5% 받기로 하고 대장정… 260명 중 18명만 살아 돌아와

▲1970년대 제작된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초상화.

​

504년 전 오늘(1519년 9월 20일), 세계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한 인물의 항해가 시작

됐습니다.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입니다.

​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필리핀 한 섬에서 생을 마감

했어요. 그와 함께 간 원정대 중 극히 일부만 유럽으로 돌아왔죠

​

마젤란은 출항하기 이틀 전 유서를 썼을 정도로 이 원정이 험난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도 목숨 걸고 원정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원정은어떠했을까요?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항해 경로

▲스페인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서쪽으로 항해" 인도로 가자

​

16세기를 흔히 '대항해시대'라 부릅니다.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이 바다를 거쳐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갔죠. 그들이 항해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아시아에서 나는 향신료를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

향신료는 고기 누린내를 없애고 감칠맛을 돌게 해 귀족의 수요가 컸어요. 그러나 중동에서

이슬람 세력이 팽창해 무역로가 막히는 바람에 향신료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

이에 새로운 무역로로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가는 바닷길이 개척됐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전 항로 대신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물론 인도에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죠. 유럽인들은 이 길고 거대한

대륙 때문에 서쪽으로 계속 항해해 인도에 닿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깨고 도전에 나선 이가 바로 마젤란이었습니다.

▲마젤란이 원주민과 싸우다 사망한곳 으로 알려진 필리핀 세부섬 부근

 

◆스페인 궁정 후원받아 5척으로 출항

​마젤란은 포르투갈 귀족 계급 출신으로, 초대 인도 총독 프란시스쿠 드알메이다 함대의

일원으로 해상 생활을 시작했어요. 사병 1500여 명 중 이름 없는 한 병사에 불과했죠.

하지만 이후 여러 차례 항해에 참여하며 견문을 넓혔어요.

​

귀국 후 승승장구할 듯하던 마젤란의 앞날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건 1513년, 모로코의

무어인 해적 소탕에 참가했을 때였어요. 마젤란은 전투 도중 다쳐 왼쪽 다리가 거의

마비됐어요.

​

상이용사(군에서 복무하다 부상을 입어 전역한 병사)가 된 그는 모로코에서 무어인

에게빼앗은 가축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됐어요.

​

그러다 가축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마젤란은 가축 일부를 무어인에게 되팔거나

무어인이 훔쳐 가도록 방조했다는 혐의를 받았어요.

​

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국왕 마누엘 1세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죠. 마젤란

은 더는 고국에 있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됐습니다.

​

당시 희망봉을 돌아가는 항로는 이미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어요. 마젤란은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 이른바 '향료 제도'라 불린 말루쿠제도까지 갈 수 있다면 막대한 수익을

얻으리라 생각했죠.

​

마침내 1517년 스페인 세비야로 이주해 스페인 궁정의 후원을 얻어낸 마젤란은 곧이어

카를 5세와 정식 계약을 했어요.

​

그 내용은 '발견될 나라에서 얻는 수입 전부의 20분의 1을 마젤란과 팔레이루(마젤란의

친구)에게 주며, 섬을 6곳 이상 발견할 경우 그 가운데 두 곳에 대한 특별권을 인정한다.

​

발견한 모든 육지와 섬의 귀족이나 총독 지위를 당사자와 그 자손에게 세습할 것을 인정

한다'는 내용이었어요.약 1년 5개월을 준비한 마젤란 함대는 1519년 8월 10일 세비야항

을 떠나 산루카르 데바라메다항으로 이동해 약 한 달을 더 준비했어요.

​

선단은 배 5척으로 구성했고 승무원 260여 명이 탔습니다. 원주민이 좋아하는 거울은

900개, 종은 2만개 이상 준비했답니다. 준비를 마친 마젤란 함대는 1519년 9월 20일

역사적 탐험길에 올랐습니다.

​

◆3년간 대장정 끝에 1척만 귀환

​

대서양을 건너 적도를 지난 함대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잠시 머문 후 다시 남쪽바다

로전진했어요. 겨울을 나려고 1520년 3월 아르헨티나 푸에르토 산훌리안에 입항해 거의

5개월을 보내기도 했죠. 지친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마젤란은 이를

진압하고 앞으로 나아갔어요.

​

마젤란 함대는 1520년 10월 한 해협(후에 '마젤란해협'이라 부름)을 통과하기 시작했어요.

약 350마일(약 563㎞)밖에 안 되는 이 해협을 통과하는 데 약 40일을 보냈습니다.

▲페르디난도 마젤란의 항해 경로

▲남아메리카 마젤란 해협 위치도

 

험난한 해협을 건너 처음 마주한 대양은 매우 잔잔했어요. 마젤란은 이를 보고'잔잔한 바다'

라는뜻의 '오세아노 파시피코', 즉 오늘날 우리가 아는 '태평양'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바다는 잔잔했지만, 약 3개월에 걸친 태평양 항해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한 선원은 '굶어

죽지 않으려고 닻줄을 덮어씌운 소가죽도 먹었다.

​

가죽이 여러 해 동안 비바람에 절어 돌처럼 딱딱해졌기 때문에 네댓새를 바닷물에 담가놓

아야 했다. 그런 다음 불에 약간 구워 삼켰다'는 기록을 남겼어요.

​

망망대해 끝에서 마침내 육지(현재의 괌)를 발견한 마젤란 함대는 곧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어요.

​

하지만 마젤란의 항해는 필리핀에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1521년 3월 필리핀 제도에 도착

한 함대는 세부섬으로 이동했어요.

​

마젤란은 세부 통치자 라자 후마본에게 '카를로스'라는 세례명을 주며 우호 관계를 유지

했죠. 맞은편에 있는 막탄섬이 세부에 대항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해 4월 부하 60여

명을 이끌고 막탄을 정복하러 떠났습니다.

​

하지만 그곳에서 1500여 명이나 되는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최후를 맞이했습니다.마젤란

함대 선원은 약 100명만 생존했고, 남은 배도 2척뿐이었어요.

​

다행히 남은 이들은 11월 말루쿠제도 티도레섬에 도착해 배 2척 가득 향료를 실을 수 있었

어요.그런데 돌아오는 과정에서 배 한 척은 포르투갈인에게 나포돼 난파되고,'빅토리아호'

단 한 척만 인도양을 건너 희망봉을 돌아 1522년 9월 세비야항으로 돌아왔어요.

​

약 3년 대장정에서 돌아온 선원은 단 18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배 한 척이 싣고 온 향료

는 모든 항해 비용을 충당 하고도 이익을 남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 1519년 9월 20일 스페인에서 출항하는 마젤란의 함대를 그린 목판화.

▲대항해시대의 대서양.태평양 항해 경로

▲1612년 재간(再刊)된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의 지도책 '세계의 무대'에 표시된 '빅토리아호'.

은빛 억새가 수놓은 ‘조선의 명당’ 동구릉(東九陵),  한서린 단종 비 사릉(思陵).

▲경기 구리 동구릉의 건원릉.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봉분을 억새로 덮었다. 봉분

아래로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이 차례로 늘어섰고, 그 둘레를 가을빛 숲이 감쌌다.

해마다 억새 만개 시기에 맞춰 시행하는 능침 특별개방 때 찍은 사진이다. 

 

건원릉(健元陵)의 봉분은 억새를 이고 있다. 조선 왕릉 가운데 잔디 대신 억새로 덮인

무덤은 이곳 하나뿐이다.

 

가을이 깊어 억새 이삭이 풍성해지면 봉분 전체가 은빛으로 일렁인다. 그 아래 태조

이성계가 누워 있다. 올가을 그 봉분 곁에 오를 수 있는 날은 단 엿새. 11월 3일부터

8일까지다.

 

국내 여행이 갈수록 짧아진다는 통계가 있다. 멀리 가지 않고, 오래 머물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고,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은 탓이리라. 떠날 형편이 넉넉지 않다지만

그래도 가을은 온다.

 

어디로 떠나도 좋은 계절이다. 서울 동쪽 경계를 넘자마자 600년 동안 함부로 베지

못한 숲이 있고, 그 숲 깊숙이 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다.

 

경기 구리의 동구릉(東九陵)과 남양주의 사릉(思陵). 이곳에는 침묵과 평온이 고여

있다. 억새가 아니어도 가을을 흠뻑 들이기에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가깝고, 가는

길도 쉽다.

 

반나절이면 두 곳을 다 걷는다. 왕릉을 잔디 언덕과 석상 몇 기로만 기억한다면 그건

소풍의 기억이다. 언덕 하나하나에는 곡절이 묻혀 있다.

 

동구릉의 두 왕은 끝내 바라던 자리에 눕지 못했고, 사릉에 누운 왕비의 남편은 멀리

영월에 묻혔다.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과 남양주시 사릉(思陵) 위치도.

▲곡장(무덤 담장) 뒤쪽에서 내려다본 건원릉 봉분. 오후에 가면 역광을 받아 빛나는

은빛 억새를 볼 수 있다.

 

◆억새로 뒤덮인 무덤

 

동구릉 매표소를 지나면 갈참나무와 소나무가 길 쪽으로 기울어 터널을 이룬다. 두꺼운

마른 잎이 발밑에서 부서진다. 가을이 바삐 오는 중이다.

 

동구릉은 도성 동쪽(東)의 아홉(九) 능. 1408년 태조가 처음 이 숲에 묻힌 뒤, 아홉 능이

다 차기까지는 447년이 걸렸다.

 

재실(齋室) 앞에서 길이 갈린다. 여러 갈래 길이 저마다 숲을 가르고 능으로 든다.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은 그 가운데 가장 깊숙이, 동구릉의 한가운데 있다.

 

건원릉 앞에 다가서면 봉분은 보이지 않는다. 사초지 언덕이 높아서다. 능마다 사정이

비슷해, 언덕이 낮은 곳에서도 풀밭 위로 문인석과 무인석의 어깨와 석마(石馬)의

잔등이 겨우 보일 뿐이다. 무덤은 산 사람의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놓였다.

 

그 높이에서 왕은 정자각과 홍살문을, 그리고 수백 년 뒤의 사람을 내려다본다.곡장

(봉분 담장) 뒤로 올라서야 건원릉은 제 얼굴을 드러낸다. 봉분은 억새 덤불에 묻혀

있다.무덤 위의 억새가 바람의 결을 따라 한쪽으로 기운다.

 

정면에서는 누렇게 바래 보이던 억새가 뒤편에 서서 해를 마주 보자 솜털 하나하나가

희게 빛난다. 봉분 아래로 흘러내린 억새는 병풍석을 반쯤 가렸다.

 

병풍석에 새겨진 구름과 문인상이 선명하다. 돌 양과 돌 호랑이가 봉분을 등지고 바깥

을지키고, 석물들은 정자각 쪽으로 줄을 섰다. 그 너머로 산줄기가 겹치고, 지평선

끝에 아파트 몇 동이 걸렸다. 600년째 왕이 내려다보는 풍경이다.

 

태조가 죽어서 눕고 싶었던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간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곁을 원했다. 생전에 지금의 서울 정동, 영국대사관 근처에 있던 정릉(貞陵) 곁에 자기

자리까지 잡아 두었다. 그러나 아들 태종은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태종에게 신덕왕후는 계모였다. 자기와 왕위를 다툰 두 이복동생의 어머니. 태종은

아버지 태조를 정릉에 묻어주긴커녕, 계모가 묻힌 정릉을 파헤쳐서 도성 밖으로

쫓아 보냈다. 성북구 정릉동이 그 자리다.

 

계모 무덤을 둘렀던 돌은 홍수에 무너진 광통교를 다시 놓는 데 썼다. 거꾸로 박힌

그 돌을 지금도 청계천 광통교 아래에서 볼 수 있다.

 

태종의 친모 신의왕후는 조선을 세우기 전에 죽어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개성 땅에

누워 있다. 그 무덤의 제사를 해마다 가을, 건원릉 정자각에서 대신 지낸다.

▲동구릉 역사문화관에 전시된 건원릉의 옛 고석. 600년 넘게 혼유석을 받치다

깨진 채 2024년 새 돌에 자리를 내줬다.

 

◆활과 칼을 내려놓은 왕

 

말년의 태조는 쓸쓸했다. 아들들이 서로 칼을 겨눈 뒤 왕위를 내놓고 한동안 고향 함흥

에 머물다 돌아왔고, 궁 안에다 덕안전을 지어 불도에 마음을 붙였다.

 

1408년 일흔넷으로 창덕궁에서 숨졌다. 그의 자리는 죽은 뒤에야 정해졌다. 몇 곳의

후보지가 퇴짜를 맞은 끝에 검교참찬(명예고문격) 벼슬의 김인귀가 말했다.

 

“내가 사는 검암에 길지가 있다.” 가 보니 과연 좋았다고 실록은 적었다. 충청과 풍해,

강원에서 장정 6000명을 불러 모았고, 자리를 정한 지 석 달 만에 장례를 치렀다.

나라를 세운 왕의 영원한 거처가 그렇게 정해졌다.

 

건원릉의 억새에는 사연이 붙어 다닌다. 고향 함흥에 묻어 달라는 태조의 유언을

태종이 함흥의 흙과 억새로 대신했다는 이야기다.

 

기록은 그보다 한참 늦다. 무덤을 쓰고 221년 뒤인 1629년, 인조실록이 처음으로

태조의 유언에 따라 ‘북도(北道)의 억새’를 썼다고 적었다. 함흥이라는 지명은 없다.

억새는 해마다 한식날 단 한 번 베이고, 가을이면 다시 봉분을 뒤덮는다.

 

비각 안에는 신도비가 웅장하게 서 있다. 태조의 일대기를 새긴 비문은 권근이 왕명

을받아 지은 것이다. 비문은 그의 죽음을 ‘활과 칼을 내려놓은 일’로 적었다.

 

1398년 왕자의 난에 이르면 비문은 정도전이 ‘어린 서얼’을 끼고 일을 꾸몄다고 적는

다. 그 서얼은 태조가 세자로 점찍었던 막내 방석이다. 방석과 그 형 방번에 대해서

는 ‘먼저 죽었다’는 한마디뿐이다.

 

그해 가을 이방원이 군사를 일으켰고, 궁에서 쫓겨난 두 형제는 귀양길에서 죽임을

당했다. 비석을 세운 이가 바로 두 형제를 죽인 이방원, 태종이다.

 

비각 옆 작은 밭에서는 억새가 자란다. 봉분에서 받은 씨앗을 길러, 한식날 베어낸

빈자리를 메운다.

 

봉분 앞 혼유석(혼이 나와 노닌다는, 제단을 닮은 돌)을 받치던 북 모양의 고석(鼓石)

하나가깨진 채 그 무게를 견디다 2024년 새 돌에 자리를 내줬다.

 

600년을 버틴 그 돌은 입구의 역사문화관에 놓여 있다. 한쪽이 크게 떨어져 나갔고,

새겨두었던도깨비 얼굴은 닳아 윤곽만 남았다. 왕릉을 지키다 박물관으로 내려온

유일한 물건이다.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한 동구릉 숲길. 갈참나무와 소나무가 길 쪽으로 기울어

터널을 이룬다.

 

◆지금 열려 있는 숲길

 

건원릉 곁 휘릉에서 원릉까지 숲길이 이어진다. 봄이면 종 모양의 흰 꽃을 다는 때죽

나무가 많아 ‘때죽나무 숲길’로 불리는 1.4㎞다. 좁은 흙길이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가는 줄기의 나무들이 제법 빽빽하다. 갈참나무와 쪽동백나무 사이에서 복자기나무

가 붉어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단풍 드는 나무 가운데 가장 붉다는 나무다.

 

태조를 묻은 이듬해 처음 소나무를 심은 뒤로, 이 숲은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벨 수

없던 땅이다.숲길은 봄과 가을, 정해진 시기에만 열린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 원릉(元陵)이 있다. 영조가 두 번째 왕비와 나란히 누운 무덤이다.

영조 역시 바라던 자리에 눕지 못했다. 쉰 해 넘게 함께 산 첫 왕비 정성왕후가 먼저

세상을 뜨자, 영조는 고양 서오릉에 아내의 무덤 홍릉(弘陵)을 짓고 그 오른쪽을

비워 두었다.

 

훗날 자신이 누울 자리였다. 하지만 손자 정조가 할아버지를 모신 곳은 효종이 묻혔다

떠난바로 이 빈터였다. 영조가 죽어서 가려 했던 홍릉의 오른쪽은 지금도 비어 있다.

 

원릉 곁 경릉에서는 숲길이 한 갈래 더 갈라진다. 경릉에서 시작해 ‘나무 키우는 곳’까지

오르는 길이다. 궁과 능에 심을 나무를 기르는 묘포로, 길 끝에 너른 터가 열린다.

 

비닐을 덮은 이랑마다 어린 나무가 줄지어 섰고, 그 뒤로 억새밭이 펼쳐진다. 오후 햇살

을 등지고 선 억새 이삭이 분홍빛을 머금은 채 희게 빛났다. 한시적으로 열리는 두 숲길

을 합치면 2.7㎞,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원릉에서 서쪽으로 더 들면 동구릉에서 가장 외진 숭릉이다. 숭릉으로 드는 길은 자로

잰 듯 곧다. 굵은 나무들이 양옆에서 그늘을 드리워 숲은 어둑한데, 길 끝만 햇빛 속에

환하다.

 

거기 붉은 홍살문이 서 있고, 그 너머로 정자각과 봉분이 차례로 겹친다. 휠체어를 탄

여성과 휠체어를 미는 남성이 그 빛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입구 쪽으로 돌아 나오면 현릉이다. 문종과 현덕왕후가 한 정자각을 두고 두 언덕에 따로

누웠다. 단종의 부모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며칠 만에 숨졌는데, 아들이 왕위에서

쫓겨난 뒤에 이미 죽은 몸인데도 왕후 자리를 빼앗겼다. 72년이 지나서야 복위돼 남편

곁으로 왔다.

 

그때 두 무덤 사이의 소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어 베어내니, 두 무덤이 서로 마주 보게

됐다고 중종실록은 적었다.

 

그 아들 단종은 서울에서 가장 먼 왕릉인 영월 장릉에, 며느리는 남양주 사릉에 따로

묻혔다. 사릉은 동구릉에서 차로 20분 남짓이다.

 

동구릉을 반나절 걷고 나면 해가 기울 무렵이 되는데, 그 시간에 닿기 좋은 곳이다. 찾는

이가 드문 작고 한적한 그 능에 평생 단종을 그리워한 한 사람이 누워 있다.

▲동구릉 입구의 세게문화유산 기념비.

▲각 능을 연결하는 길은 울창한 숲길이다.

▲동구릉(東九陵)  각릉 위치도

◆9개의 능과 그 주인들

능 이름
능의 주인
생애와 업적
건원릉
태조
조선을 세운 제1대 임금이다.
현릉
문종과 현덕 왕후
문종은 세종 대왕의 맏아들이자 조선의 제5대 임금이다. 학문이 깊고 어진 임금이
었으나몸이 약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2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목릉
선조와 의인 왕후, 인목 왕후
선조는 제14대 임금이다. 인재를 등용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지만, 붕당이
생겨나 갈등이일어나고 일본의 침공으로 임진왜란을 겪었다.
휘릉
장렬 왕후
제16대 임금인 인조의 두 번째 왕비이다.
숭릉
현종과 명성 왕후
현종은 제18대 임금이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활자를 만드는 등 좋은 정치를
펼쳤지만,당쟁이 더욱 심해졌다.
혜릉
단의 왕후
제20대 임금인 경종의 왕비이다.
원릉
영조와 정순 왕후
영조는 제21대 임금이다. 당쟁을 막는 탕평책,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여
주는 균역법,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듣는 신문고의 부활 등 좋은 정치를 펼쳤다.
수릉
문조와 신정 왕후
문조는 제23대 임금인 순조의 아들이다. 세자의 자리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나
나중에추존된 임금이다. 익종으로도 부른다.
경릉
헌종과 효현 왕후, 효정 왕후
헌종은 제24대 임금이다. 8세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순원 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천주교 박해와 삼정의 문란 등 정치가 어지러웠다.

▲남양주 사릉 능역 안 진산군 부인 묘터에 홀로 남은 문인석. 묘는 1983년 옮겨 가고

석물만 남았다.

 

◆사릉(思陵)의 여윈 소나무

 

해 질 무렵 사릉에 닿았다. 낮게 기운 해가 사초지에 소나무 그림자를 줄무늬로 깔았다.

정자각 앞을 노부부 한 쌍이 천천히 지났다. 맞배지붕을 얹은 정자각은 ‘丁’ 자라기보다

네모에 가까울 만큼 아담하다. 언덕 위 봉분은 작다.

 

곡장은 낮고, 석물은 봉분 앞에 오종종하게 모였다. 무석인이 없고, 병풍석도 난간석도

없다. 억새를 이고 병풍석을 두른 건원릉을 보고 온 눈에 사릉은 유난히 단출하다.

 

정순(定順)왕후는 열다섯에 왕비가 됐다. 남편 단종은 한 살 아래였다. 혼례를 서두른

이는 숙부 수양대군이었다. 이듬해 단종은 그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겼고, 2년 뒤

영월에서 죽었다.

 

왕비는 열여덟이었다. 군부인으로 낮춰져 궁을 나와, 왕실 여인들이 출가해 머물던 동대

문밖 정업원에 몸을 붙였다.

 

거처와 양식을 주겠다는 세조의 뜻을 물리치고, 왕비는 옷감에 자줏물을 들여 댕기와

저고리 깃,고름과 끝동을 지어 팔며 살았다고 전한다.

 

물을 들였다는 샘은 서울 창신동에 ‘자주동샘’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바위 아래 돌을

둘러 샘 자리를 표시해 두었다.

 

끼니를 대 주던 이웃 여인들을 조정이 막아서자, 여인들이 남자는 드나들 수 없는 채소

시장을 열어 몰래 먹을거리를 건넸다는 이야기가 19세기 서울지리지 ‘한경지략’에 실려

있다.정순왕후가 날마다 동쪽 봉우리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 봉우리가 지금의 종로구 동망봉이다. 두 세기 반이 지난 1771년, 일흔여덟의 영조가

정업원 옛터를 찾아 손수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비를 세웠다.

 

동망봉바위에도‘동망봉’ 세 글자를 새겼지만, 일제강점기 그 자리에 채석장이 들어서며

바위째깨져 나갔다. 영조는 같은 해 사릉 앞에도 표석을 세웠다. 아내 곁에 빈자리를

남겨 둔 채 늙어 가던 왕은 왜 이렇게 마음을 썼을까.

 

정순왕후는 남편 단종을 잃고 64년을 더 살았다. 세조와 예종, 성종, 연산군을 지나 중종

때인1521년 여든둘로 눈을 감았다. 임금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이었다. 말년은 남편의

조카 정미수의 집에서 보냈다.

 

왕비가 아니었으므로 장례는 대군 부인의 예를 따랐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시집간

해주 정씨 집안이 제 선산에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냈다.

 

◆생각할 사(思)

 

1698년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그도 왕비의 자리를 되찾았다. 숨진 지 177년 만이다.

무덤은 능이 됐고, 남편을 평생 그리워했다 하여 ‘생각할 사(思)’ 자를 받았다.

 

능역 안의 남의 무덤은 옮기는 것이 법도였지만, 숙종은 해주 정씨의 묘들을 그대로 두게

했다. 그 무덤들은 지금도 사릉 능역 안에 있다. 왕비의 마지막을 지킨 정미수의 무덤도

능침 아래 있다.

 

정씨 집안은 그 뒤로 조상 무덤가의 나무 한 그루를 베려 해도 나라에 허락을 구해야 했다.

조선 왕릉 가운데 능역에 사가(私家)의 무덤이 남은 곳은 여기뿐이라고 한다.

 

능역 깊숙한 풀숲에 문인석 한 쌍이 서 있다. 중종의 아들 해안군의 첫 부인 진산군 부인의

묘가있던 자리다. 1983년 묘는 고양으로 옮겨 가고 돌만 남았다. 관모와 어깨를 검은 이끼

가 덮었고,발치에는 쓰러진 돌 하나가 누워 있다.

 

올봄 사릉의 들꽃이 영월로 갔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한 뒤 두 사람을 한데 묻어

달라는 청원이 잇따랐지만, 세계유산인 왕릉을 옮길 수는 없는 노릇. 대신 국가유산청은

사릉 양묘장에서 기른 쑥부쟁이와 벌개미취, 맥문동 같은 들꽃 800여 본을 영월

장릉에 옮겨 심었다.

 

보랏빛 꽃만 골랐다. 자줏물을 들이며 살았다는 왕비를 위해서다. 꽃이 심긴 자리 옆에는

1999년 사릉에서 기른 묘목을 옮겨 심은 소나무, 정령송이 먼저 자라고 있었다. 앞으로

는 해마다 가을이면 두 능에서 씨앗을 받아 이듬해 한식날 서로 바꿔 심는다고 했다.

 

사릉의 능침 뒤로 775m의 소나무길이 돈다. 봄과 가을에 개방하는 이 길은 지금 열려 있다.

키 크고 여윈 소나무들이 붉은 줄기를 엇갈려 세웠고, 그 발치를 활엽 관목이 초록으로

덮었다.해가 더 기울자 그림자가 사초지를 건너 동쪽으로 길게 누웠다. 왕비가 날마다

바라봤다는 쪽이다.

 

◆두 명의 정순왕후

 

동구릉의 원릉에서 영조 곁에 누운 왕비와 사릉의 주인은 둘 다 ‘정순왕후’다. 영조의 계비

는貞純, 단종의 왕비는 定順이다. 둘 다 열다섯에 왕비가 됐다는 것까지 닮았다.

 

그 뒤의 삶은 딴판이었다. 영조의 계비는 훗날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스스로

를 ‘여주(女主)’라 칭했다. 조정을 쥐고 흔든 왕실의 어른이었다. 단종의 왕비는 열여덟에

남편을 잃고 궁 밖으로 쫓겨나 64년을 살았다. 305년 차이로 ‘두 명의 정순왕후’가차로

20분 떨어진 두 능에 누워 있다.

◆ 여행 정보

 

◇동구릉=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지하철 8호선 동구릉역에서 가깝다. 11월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1000원인데,

10월 29일부터 11월 15일까지는 무료다.

 

주차는 승용차 기본 30분 500원, 이후 10분마다 200원으로 출차 때 신용카드로 낸다.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은 하루 네 번. 오전 10시, 10시 30분, 오후 1시와 3시에

있다. 031-579-4900

 

◇건원릉 능침 특별개방= 11월 3∼8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각 1시간. 사전 예약은 마감

됐고 회차마다 현장에서 10명을 선착순으로 받는다. 억새는 해를 마주 보는 오후

회차에 더 희게 빛난다.

 

◇숲길 개방= 동구릉의 휘릉∼원릉, 경릉∼나무 키우는 곳(육묘장) 구간(2.7㎞)과 사릉의

능침 뒤 소나무길(775m)이 11월 29일까지 열린다.

 

◇사릉=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동구릉에서 차로 20분 남짓. 대중교통으로는

경춘선 금곡역이나 사릉역에서 버스로 갈아탄다. 월요일 휴관. 031-573-8124

 

 

강경 젓갈시장ㅡ들리느냐? 젓갈 익어가는 소리!”...김장철 맞아 찾아간 강경엔...

▲매달 4·9일로 끝나는 날 오일장까지 더해지는 '강경 대흥시장'의 젓갈 골목. 짭짜름한

젓갈 냄새가 손님을 먼저 반긴다. 인심 좋게 생긴 젓갈집 주인이 새우젓을 담고 있다.

 

​“감칠맛 내려면 이 정도는 넣어줘야 혀유~.” 한 강경 젓갈 상인의 말에 서울 손님이 받아

친다. “소금도, 젓갈도 비싸져서 김장해 먹기 겁난다니까! 아유,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

데 좀더 담아줘요.

 

 주거니 받거니 흥정하는 사이에 새우 등 터지고 있는 내 이름은 새우젓. 그중에서도

몸값 비싼 ‘육젓’이올시다.

​

살이 통통하게 올라 ‘리즈 시절’ 아니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던 작년 6월쯤 서해 신안

어느 바다에서 젓새우잡이 어망에 포획된 나는 선상에서 바로 천일염 샤워를 하고서

그 길로 경매를 거쳐 이곳 강경으로 오게 되었지.

​

강경의 한 젓갈상에 정착한 후 줄곧 저온 저장고에서 지내다가 밖으로 내주기에 ‘특별

사면이라도 되나?’ 잔뜩 기대했는데, 아니 글쎄 김장철이라잖아!

​

언제 팔려갈지 모르는 신세지만, 드럼통에 담겨 따스한 가을볕을 쬐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 한편이 몽글몽글해지네. 짭조름한 짠내가 나는 강경은 나 같은 젓새우들에게

낯설지가 않은 도시라네.

​

곰삭은 맛과 풍경이 공존하기에 시간 여행자들이 사랑하는 이 소도시, 강경 이야기

를 ‘전지적 새우젓 시점’으로 들려주리다.

▲충남 논산 강경 젓갈시장 위치도.

 

◆서해 젓갈 일번지

​

금강을 곁에 둔 강경은 유유히 흐르는 강처럼 잔잔하고 평온한 풍경이 이어져. 그러다

매년 10월 중순쯤이면 금강 둔치 일원에서 ‘논산 강경 젓갈 축제’가 떠들썩하게 열리지.

​

올해로 27회째인 이 젓갈 축제를 시작으로 이 도시는 11월 말까지 김장철에 ‘젓갈 투어’

를 위해 찾는 발걸음이 늘어나. 마트나 새벽 배송으로도 김치를 쉽게 사먹는 시대에

누가 여기까지 와서 젓갈을 사가느냐고?

​

손님들 연령대가 높기는 해. 대체로 50~70대 주부가 많아. 염도가 어느 정도인지, 군내

가 나는지, 싱싱한 새우를 썼는지 직접 맛보고 고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야.

​

얼마 전 아내·처제와 함께 다녀간 박한기(70)씨는 “10년째 단골인데, 겨우내 먹을 김장

에 쓸 젓갈이다 보니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같은 곳에서 사게 된다”며 “매년 이

시기쯤 젓갈 사러 이곳에 다녀가야 겨울 맞을 채비를 한 기분”이라고 했어.

▲6월에 잡은 젓새우로 담근 '육젓'은 시중에서 '오젓'이나 '추젓'보다 비교적

몸값이 높다. 잘 숙성돼 뽀얀 국물을 머금은 육젓이 맛이 좋다.

​

‘강경전통맛깔젓협동조합’에 따르면 강경은 전국 젓갈 유통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네. 젓새우 어선에서 1차 염장을 한 젓갈들은 이곳 강경이나 곰소, 광천, 강화도

등 대형 젓갈 도매상으로 불뿔이 흩어져서 저장·숙성 과정을 거쳐. 도매상들은

집집이 저온 저장고나 대형 냉장고를 갖추고 있는데, 염장해온 젓새우들을 일정

기간 숙성시킨 후 꺼내다 팔지.

​

강경은 젓갈들을 익히는 장독대 같은 곳이야. 현재 강경 젓갈 시장과 젓갈 거리를 중심

으로 140여 젓갈 점포가 밀집돼 있고 주종목은 나 같은 새우젓. 멸치 액젓과 황석어젓,

까나리젓, 갈치젓을 비롯해 밥반찬으로 즐겨 먹는 양념 젓갈까지 없는 게 없어. 내륙

강경에 이처럼 많은 젓갈 집이 들어서 성업하게 된 이유가궁금하다고? 그건 금강

그리고 ‘강경 포구’와 관계가 깊어.

 

◆강경 젓갈의 내력

​

강경 포구는 조선 시대 후기 서해를 누비던 어선들이 금강 물길을 통해 이곳까지 들어와

서해 수산물을 풀어 파시(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를 형성하며 일찌감치 ‘수산물

핫플’이었다네.

​

강경 포구는 조선 후기부터 해방 전후까지 원산항과 함께 2대 포구에 꼽혔고, 강경시장은

평양·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자리 잡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지.

​

한때 하루 100여 척이 물길 따라 수산물과 소금을 싣고 드나들었고, 상인들의 손을 거쳐

전국 각지로 공급됐다고 해. 저장고가 마땅치않던 시절, 객주들이 공급 후 남은 수산물

을 보관하기 위해 염장하기 시작한 게 강경 젓갈의 시발점이래.

​

좀 더 자세한 얘기는 내가 정착해 있는 ‘심씨네 젓갈(신진상회)’ 주인아저씨에게 들을 수

있어. ‘신진상회’라고 이 구역 젓갈 원조 집으로 통하지. 우리 선대 할아버지의 할아버

지도 이 집을 거쳐갔다나 뭐라나.

​

창업주이자 1대 심희섭(90)씨에게 가업을 물려받은 2대 주인 심철호(63)씨에 따르면 “

강경포구 마지막 객주였던 아버지가 1952년 지금의 심씨네 젓갈 자리에서 생선과

젓갈을 팔기시작했는데 일대에 젓갈 좌판, 점포들이 20여 곳으로 늘면서 젓갈 거리가

형성됐다”고 하네.

​

‘신진상회’란 이름으로 세무서에 신고한 것은 1957년. 2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오

던 젓갈을 상품화해 본격적으로 내다 팔기 시작한 집이란 얘기지.

▲1952년 강경 염천교 부근에서 '신진상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젓갈을 판매하기

시작한'심씨네 젓갈'. 강경 포구의 마지막 객주였던 1대 심희섭씨에 이어 2대

심철호씨의아내 안효주(왼쪽)씨가 저온 저장고에서 직원과 함께 젓갈을 통에

나눠 담고 있다. 

​

6·25 전쟁 후 배고팠던 시절 열두 달 반찬으로 상에 오르는 건 김치와 젓갈뿐

이었으니 맛이 소문나면서 전북 등 인근 지역에서도 가을철이면 젓갈을 사러

모였다”는 게 주인 심씨의 얘기야. 당시엔 커다란 들통을 들고 기차 타고 와서

젓갈을사 손수레로 운반해 다시 기차에 오르는 풍경이 흔했다고.

​

머리에 고무 대야를 이고 다니던 젓갈 행상들도 강경에만 50~60명이나 될 정도

로 젓갈로이름을 떨쳤대. 심희섭씨를 비롯해 이 동네 산증인인 ‘옥녀봉 구멍

가게’ 주인 송옥례(89)씨 등 노인들은 “1970년대까지 강경에 배가 드나들던

때가 호시절이었다”고 기억하더라고.

▲시집 와서 50년 째 이 집에 살고 있다"는 '옥녀봉 구멍가게' 송옥례씨는 "포구로

배가 드나들던 시절에는 이 구멍가게 근처로도 집이 많았다"며 누구에게나

포구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80년대 말 금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강경은 포구 기능을 상실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나 싶었어. 강경 젓갈이 다시 알려지게 된 건 1997년, 강경 젓갈 시장 번영회 상인

들이 강경 젓갈 되살리기 운동의 하나로 십시일반 기부금을 모아 ‘강경 맛깔젓

축제’를 열면서 부터였다네.

​

28개 젓갈 점포가 참여해 시작한 축제가 해를 거듭하며 전국 축제로 알려지면서 강경

은 젓갈로 다시 떠오른 거야. 지금은 도로변마다 ‘젓갈’ 간판을 단 도소매 점포가 이어

져 있고,매달 4·9일로 끝나는 날 오일장이 서는 ‘대흥시장’의 젓갈 골목에는

소매상들이 밀집해 있어.

​

점포마다 산지에서 만든 젓갈을 가져오니 숙성 환경과 시간에 따라 맛의 차이가 약간

나는데 일반인들은 구별하기 어려울 거야. 다만 저마다 ‘조미료를 넣지 않은’

‘저염’을 내세우고 있어.

​

다 같은 새우젓 아니냐고? 잡은 시기에 따라 새우젓은 5월에 잡은 ‘오젓’, 6월에 잡은

‘육젓’, 가을에 잡은 ‘추젓’ 그리고 첫 서리가 내리고 잡은 ‘동백하젓’으로 구분하는데

그중 나처럼 천일염으로 염장한 육젓이 시중에선 비싸게 팔려. 육젓은 오젓보다

크기가 크고 통통한 게 특징이야.

​

새끼손가락 한마디만 한 크기로 잘 숙성되면 뽀얀 우윳빛을 띠지. 11월 초 강경 젓갈

시장 육젓은 500g 기준 대략 5만원이야. 하지만 잡은 시기에 따라 육젓을 높이 평가

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는 쪽도 있어.

​

28년 차 식품 MD이자 ‘오는 날이 장날입니다’ 등의 저자 김진영 MD에 따르면 “발효

맛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새우젓은 잡는 시기나 크기보다 숙성 기간이 중요하다”

며 “최소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일정한 온도에서 잘 숙성시킨 새우젓을 쓰면

더욱 맛있는 김장을 담글 수 있다”고 하니 새우젓 고를 때 참고를.​

▲금강과 대흥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강경 갑문'이 남아 있다. 강경이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음을 알려주는 흔적이다.

 

◆포구 흔적 간직한 강경 갑문

​

염천교쯤에서 천변 따라 금강변으로 10분 정도 걷다 보면 등록 문화재인 ‘강경 갑문’과

만날 수 있어. 1924년 금강과 만나는 대흥천에 설치한 이 갑문은 조석(潮汐)에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 천으로 흘러드는 물줄기 수위를 조절해. 가둔 물을 담수화해서 농업

용수로 공급하는 목적도 있었는데, 주로 안정적인 하역을 위해 설치한 것이래.

​

이 갑문은 강경이 포구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흔적이기도 해. 강경 포구가 성시를

누릴당시엔 물을 가두는 게 신기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몰려들기도 했대.

하지만금강 하굿둑이 생기고, 수해 방지용 수문이 설치되면서 강경 갑문 역시 기능을

상실하게 됐어.

​

지금은 세월을 입고 천변에 낡은 구조물처럼 자리해 있는데 한쪽 벽면에 그려진 배 그림

이나 문화재 안내판이 없다면 모르고 지나치기 쉬워. 내가 정착해 있는 이곳 강경은 강경

갑문을 포함해 근대 역사 투어, 성지 순례 코스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

▲강경을 대표하는 '근대'와 '젓갈'이 공존하는 길. 강경역사관으로 활용 중인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오른쪽)과 젓갈상회가 마주 보고 있다.

 

강경 역사관(구 한일은행 강경 지점) 앞 왕복 2차로 도로에서 보면 길을 사이에 두고 근대

건축 유산인 구 한일은행 강경 지점과 대형 젓갈 상회가 마주 보고 있어. 강경의 대표적인

명소와 명물이 마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듯 공존하는 것도 이곳만의 풍경이야.

​

강경 역사관으로 활용되는 구 한일은행 강경 지점은 1905년 문을 열어 해방 후 한일은행

강경지점으로 사용됐다지. 붉은색 벽돌조의 고풍스러운 건물 안에는 옛 강경역 열차

시각표와기증 유물들이 있는데, 아담한 근현대사 박물관같아. 반공 소년 한완봉의

이야기 등 강경의 인물 이야기도 살펴볼 수 있어.

▲강경 역사관의 전시물. 강경 관련 기증품과 함께 강경 포구의 번성기

풍경 사진도 볼 수 있다.

▲강경 역사관 뒷마당은 '강경구락부'란 이름으로 꾸며져있다. 근대를 테마로 한

드라마 세트장 같은 공간에 카페와 호텔이 들어서 있다.

​

강경 역사관 뒷마당 강경 구락부엔 근대를 주제로 꾸민 카페, 호텔이 들어서 있지.

앉아서 커피 한 잔만 마셔도 근대 ‘모단 걸’이 된 것처럼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일

것만 같아.현재 ‘강경 역사 문화 안내소’로 쓰는 ‘구 강경 노동조합’도 강경의

번성기를 추측해볼 수 있는 건물이야.

​

이곳 문화 해설사는 “인천항이나 부산항처럼 노동조합이 설립됐다는 건 당시 포구

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더라고. 그거 알아?

 

충남 지역에서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 강경이었다는 거. 강경포에서 시작해

강경 포구, 강경 갑문, 구 강경 노동조합 등 ‘근대 역사 길’ 코스는 젓갈 거리와 젓갈

시장을 두루 지나니 슬슬 걸어볼 만해.

​

젓갈 이야기를 들으니 뜨끈한 쌀밥 생각이 절로 나지? 젓갈 정식은 젓갈을 쉽게 맛

볼 수 있는 강경의 대표 음식이야. 양념 젓갈의 세계에서 사실 난 별로 인기가 없어.

​

‘큰손식당’ 등에서 젓갈 정식을 주문하면 지금부터 제철인 시원한 어리굴젓부터

씹는 맛이 좋은 꼴뚜기젓, 짭조름하고 담백한 명란젓, 고소한 청어알젓까지 최소

십여 가지에서 스무 가지 정도 젓갈을 맛볼 수 있어.

​

식당에 따라 삼겹살이나 생선구이, 누룽지 등을 추가해 먹을 수 있는데, 강경에선

삼겹살에 쌈장 대신 새우젓을 곁들여 먹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흰쌀밥에 양념 젓갈을 골고루 맛볼 수 있는 '젓갈 정식'은 강경의 별미다.

​

◆달고 시고 쓰고 짠 인생 반찬

​

식후 금강을 내려다볼 강경 제일 전망대를 찾는다면 옥녀봉에 올라봐. 김무길 연구

부장은“고작 해발 44m 낮은 언덕이지만 옥류봉 전설과 신사의 흔적, 성지 순례

코스를 품고 있는 곳”이라고 했어.

​

평야 지대인 강경에선 산이나 다름없는 곳이라서 주민들도 즐겨 찾아. 계단과 산책

로가 이어져 남녀노소 오를 만해. 옥녀봉 정상엔 봉수대와 커다란 느티나무가

기다리고 있어.

​

이 계절에 가면 옥녀봉 바로 맞은편으로 떨어지는 근사한 일몰을 감상할 수 있지.

맑은 날엔 얼마나 황홀한지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하고, 얼굴까지 불그레하게 물들

이는 것 같다니까. 소도시에 눅진하게 녹아드는 이 빛은 시간을 녹이고

삭히는 힘을 가진 것만 같아.

▲해 질 녘 옥녀봉은 가을볕을 배웅하기 좋은 장소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두커니 서 강과 포구의 시간을 추억하는 듯하다.

▲강경 일대를 배경으로 쓴 박범신 작가의 작품 '소금' 등과 만나는 '강경산 소금문학관'.

문학 산책을 하고 나올쯤 금강 너머 노을이 지고 있었다.

▲헤드폰을 착용하면 박범신 작가가 육성으로 작품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소금'을 두고 "인생의 맛"이라고 했다.

 

오르내리는 길 ‘소금집’ 툇마루나 ‘강경산 소금 문학관’에 앉아 잠시 쉼표를 찍어가는 것도

좋아.논산 출신 박범신 작가가 강경 일대를 배경으로 쓴 장편소설 ‘소금’ 속 이야기를

녹여놓은 공간이야.

​

가만히 둘러보면 소설 속 이야기가 짠내 실은 바람에 들려오는 듯해. “인생의 맛이

달고 시고 쓰고 짠 소금 같다”고. 그런 소금으로 맛깔나게 숙성시킨 젓갈이야말로

한 점의 인생 반찬 아니겠어?

 

◆강화도 ‘외포항’은 추젓, ‘곰소항’은 잡어젓 천국

​

▶그 밖에 가볼 만한 젓갈시장

▲새우젓 등 젓갈은 '밥상 위의 조연'이란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하지만

김장철만큼은 주연이다.

 

​전국으로 제철 식재료를 찾아다니는 28년 차 김진영 MD는 “서울과 가까이 있는 김포

‘대명항’이나 인천 ‘소래포구’, ‘외포항젓갈수산물직판장’도 김장철 가볼 만한 곳”

이라고 추천했다.

​

“강화도를 비롯해 서울과 수도권에선 김치를 담글 때 달큼한 생 젓새우를 갈아 넣는

집도 많은데 추천한 곳들은 싱싱한 젓새우를 바로 사 가져갈 수 있는 게 장점”이

라고 했다.

​

선주가 판매하는 곳도 있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젓갈을 살 수도 있다. “6월에 잡은

젓새우로 담근 ‘육젓’이 최고라고들 이야기하지만, 김치를 담글 때는 잘 숙성시킨

‘오젓’이나‘추젓’도 괜찮습니다. 가을에 잡은 젓새우로 담근 추젓만큼은 강화도

것을 알아주니 멀리 갈 필요 없습니다.”

​

김진영 MD에 따르면 새우젓 만들기는 간단하다. 젓새우에 천일염을 약 30% 넣고

저온에서 숙성시키면 끝이다.

 

“새우젓을 고를 땐 멀건 국물이 많이 들어 있는 것 대신 뽀얀국물이 자박하게 깔린

새우젓을 고르세요. 멀건 국물이 많다는 건희석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

‘식탁 위의 조연 같은 주인공 젓갈’을 펴낸 국내 1호 젓갈 소믈리에 강지영 명인은

전북 부안군 ‘곰소젓갈시장’을 추천했다. 우리나라 3대 어장 중 하나인 ‘칠산 어장’,

천일염 생산지 ‘곰소염전’과도 가까이 있어 믿을 만하다.

​

“곰소 젓갈은 입자가 고와 빠른 숙성이 가능한 곰소 천일염을 쓴 젓갈로 김치를 담

그면 맛이 일찍 들고 발효가 잘된다”는 게 강 명인의 설명이다.

​

전북 지역에서 즐겨 먹는 황석어(황새기)젓 등을 비롯해 잡어로 젓을 담근 잡어젓은

곰삭은 맛을 내기에 좋다. 곰소는 다양한 젓갈류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강 명인은 “멸치젓이 유명한 부산, 꽁치젓을 쓰는 포항 등 각 지역의 항 주변에 형성

된 젓갈상도 가볼 만 하다”고 했다.

​

이 밖에 ‘토굴 새우젓’을 내세우는 충남 홍성 광천도 ‘젓갈’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다.

1950~60년대 새우젓을 숙성시키려고 ‘정 하나 들고 팠다’는 젓갈 저장용 토굴

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

꾸덕하게 말린 우럭에 잘 숙성시킨 새우젓을 넣고 끓여낸 우럭젓국이나 새우젓으

로 양념한 간재미회무침 등 젓갈 투어에 더해 식도락을 주는 음식을 덤으로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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