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츠월드지역ㅡ영국의 서북부 코츠월드지방 시골마을 정경

▲양떼들의 우리(Cots)와 언덕을 뜻하는 고대영어 월드(wold)가 합해진 코츠월드(Cotswolds)는

특정한 한 지역이 아닌, 런던 서북부 작은 마을 100여개를 총칭한 이름이다.

 

최소한 500년 이상 된 돌로 쌓은 양들의 축사였으나 현재는 이 곳에서 현지인들이 살고있고, 

관광객이 방문해 사진 촬영하기 좋게 개조해 꾸며져 있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런던에서 두어시간 거리의 코츠월드는 도회지의 화려함이 아닌, 말 그대로 양떼들이
노니는

언덕의 목가적 풍경이 펼쳐진 영국의 속살이라 할 수 있다.

 

덕분에 영국의 유명 인사들의 농장식 별장이 많고 그 가운데에는 찰스 왕세자의 유기농장도

있다.

▲잉글랜드 코츠월드지역 위치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6월 초부터 8월 초까지 약 두 달간, 코츠월드의 부드러운 구릉지는 온통 보랏빛 라벤더로 물든다

▲‘양들의 언덕’이라는 귀여운 뜻의 코츠월드는 완만한 구릉지와 꿀빛 석조 건물이 다정하게

어우러진 영국의 전원 지역이다.

 

영국인들이 진심으로 아끼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데, 데이비드 베컴, 휴 그랜트 등 유명 인사들도

저택을 구매해 종종 이곳에서 머문다. 코츠월드에는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50개 이상의

마을이 띄엄띄엄 위치하고, 저마다 예술, 문화유산, 정원 등을 품고 있다.

▲코츠월드의 집들은 연한 꿀 빛을 띤 코츠월드 스톤(석회암)으로 지어져 있다. 돌 특유의

따스한 색감이 마을 전체의 분위기를 사랑스럽게 만든다.

▲수많은 마을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곳들이 있다. 먼저 중세의 낭만을 고스란히 간직한

캐슬 쿰(Castle Combe)과 맑은 수로가 흐르는 버튼 온 더 워터(Bourton-on-the-Water)다.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불리는 캐슬 쿰은 영화 <워 호스>와 <스타더스트>의 배경

이 될 정도로 고즈넉한 매력이 강하다.

특히 과거 영주의 저택이었던 14세기 건축물을 개조한 ‘더 매너 하우스(The Manor House)’는

정원과 벽난로가 타오르는 라운지를 갖춰 영국 시골 마을의 기품 있는 정취를 선사한다.

 

한편, ‘코츠월드의 베니스’라 불리는 버튼 온 더 워터에서는 마을을 관통하는 수로를 따라 거니

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이 된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들고 하염없이 걷다가 마을을 1/9 크기로 축소해 놓은 모델 빌리지

(The Model Village)나 소품 전문점을 구경하는 것도 좋겠다. 

▲발걸음을 돌려 ‘코츠월드의 수도’라 불리는 시런세스터(Cirencester)로 향한다. 중세 시대에는

양모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던 시장 도시로, 유서 깊은 거리들이 남아 있어 코츠월드 탐방을

위한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된다.

 

심지어 평범한 건물조차 성처럼 근엄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눈이 즐겁다. 일요일이면 교회

(St. John Baptist Cirencester) 앞 광장이나 뒤편 공원에서 열리는 로컬 마켓도

들러 볼 만하다. 

▲남쪽에는 영국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우아한 시장 마을, 테트버리(Tetbury)가 자리한다.

감각적인 골동품 상점과 갤러리,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보물찾기하듯 모여 있어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아울러 찰스 3세 국왕의 확고한 유기농 철학과 자연 친화적 비전이 오롯이 반영된 개인 정원

‘하이그로브 가든(Highgrove Gardens)’ 역시 테트버리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폿이다. 

▲여정의 마무리는 전통적인 영국 시골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스토우 온 더 월드(Stow-on-the-Wold)다.

좁은 골목을 누비며 자유롭게 여행하기 좋은 동네로, 주인장의 취향이 깃든 독립 상점과 로컬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상점들이 여행자의 안테나를 쉴 새 없이 자극한다.

▲스토우 온 더 월드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Inn), ‘더 포치 하우스(The Porch House)’가

있다. 인은 식사가 가능한 시골 여관을 뜻하는데, 허름함을 상상했다면 오산. 고풍스러운 목조

건축물 안에 코츠월드 특유의 따스한 전원 감성을 품은 클래식한 숙소다.

▲947년 문을 연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펍에서 즐기는 ‘선데이 로스트’다. 그중에서도 소와 닭,

돼지고기를 한번에 내어 주는 트리오(Trio) 메뉴를 추천한다.

 

진한 감칠맛의 그레이비소스와 달콤한 채소 구이, 고소한 요크셔푸딩을 곁들이면 영국인

들의 일요일을 제대로 경험하게 된다.

▲16세기 타운하우스를 고풍스럽게 개조한 테트버리의 호텔 ‘더 클로즈(The Close)’. 이곳 정원

에서의 점심은 테트버리 여행에서 빠트릴 수 없는 즐거움이다. 따스한 빛이 내려앉은

날이라면 더더욱 완벽하다.

▲합리적인 가격의 3코스 런치나 우아한 애프터눈 티를 즐기면 되는데, 해초 홀랜다이즈 소스를 곁들인

도미구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올린 영국 전통 디저트 스티키 토피 푸딩은 훌륭한 선택이다.

 

또 애프터눈 티에 포함된 스콘을 맛본다면 여태 먹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맛과 식감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식사 후엔 인근의 앤티크 숍 거리를 거닐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코츠월드의 풍경에 자연스레 녹아든 프로그 밀(The Frogmill)은 바쁜 여행 중 멋진

쉼표가 되어 준다. 16세기 건물의 정취를 간직한 이곳은 2022년 영국 최고의 펍

(National Pub & Bar of the Year)으로 선정된 이력을 자랑하는 공간이다.

 

다채롭게 준비된 생맥주 한 잔만 손에 쥐면 그림 같은 전원 풍경이 안주가 된다.

▲하룻밤 머물기에도 제격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28개의 부티크 객실은 영국의 고즈넉한

시골집에 놀러 온 듯한 감성을 자아낸다. 테라스가 달린 룸부터 아늑한 다락방까지,

방마다 구조와 콘셉트가 모두 달라 머무는 재미를 더한다.

▲코츠월드의 여름이 유독 아름다운 건 자연이 선사하는 눈부신 색채 덕분이다. 6월 초부터

8월 초까지 약 두 달간, 코츠월드의 부드러운 구릉지는 온통 보랏빛 라벤더로 물든다.

 

어디에 시선을 두든, 어떻게 셔터를 누르든 그 자체로 작품이 탄생하는 감미로운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인위적인 장치 대신 자연과의 온전한 교감이 기다린다. 

▲라벤더는 6월 초부터 8월 초까지 코츠월드의 여름을 특별하게 만드는 존재다

향긋한 라벤더 고랑을 따라 산책하거나, 다채로운 색감으로 수놓인 야생화 초원(Wildflower

Meadows)을 거닐 수 있다.

 

마음에 드는 그늘을 찾아 여유롭게 피크닉을 즐기거나, 매점에서 산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이라면 작은 숲속 모험을 즐길 수 있는 비치우드 트레일(Beech

wood Trail) 산책이 제격이다.

 

단 두 달만 허락되는 이 찬란한 풍경이야말로, 우리가 벌써 내년 여름 여행을 준비해야 하는

완벽한 핑계다.

신성한 땅, 시킴(Sikkim)의 발견…인도 속 티베트 문화와 역사를...

▲인도 시킴의 불교 사원 중심지인 엔치 사원 입구에 세워진 기도 깃발

 

2010년 첫 인도 여행 때만 해도 서울에 위치한 인도대사관을 직접 방문해 비자를 신청해야 했고

또 비자를 받는 데만 일주일가량 소요됐었다. 세상 참 좋아졌다.

 

인도도 어느덧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국가로 변화하고 발전해가고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데 시킴은 예외다. 이곳을 여행하려면 인도 관광비자와 별개로 출입허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킴은 외국인은 물론 인도인에게도 생소한 땅이다. 시킴에 입국하여 체류하려는 모든 외국인은

인도정부 및 관광부의 공인 사무소에서 발급하는 ‘제한구역 출입 허가증(RAP)’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이쯤에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이 다소 까다롭고 험난 할수록 숨은

보석을 발견할 가능성은 커지는 법이다.

▲인도 시킴주 위치도.

▲동부 히말라야 산맥의 심장부에 위치한 시킴

 

동쪽으로 네팔, 서쪽으로 부탄, 북쪽으로 중국 티베트 자치구와 접해 있는 시킴은 인도에서 티베트

문화권에 속한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다.

 

이곳은 티베트 불교에서 예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불렸다. 토착민은 14세기 티베트의 캄 지역에서

이주해온 부티아족과 렙차족이며, 현대에 들어 네팔에서 넘어온 인구수가 증가함에 따라 네팔계

인도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동부 히말라야 산맥의 심장부에 위치한 시킴은 험준한 지형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인도에서 가장 높고 지구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칸첸중가 산맥이 위치하며, 전체 면적의

약 35%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칸첸중가 국립공원으로 덮여 있다. 이로 인해 시킴은

천혜의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제한구역 출입 허가증(RAP)을 검사하는 시킴 출입국신고 사무소, 

▲제한구역 출입 허가증(RAP)  발급하는 인도 정부 공인 사무소 전경

 

가파르고 눈 덮인 산들은 숨이 멎을 듯한 절경을 선사한다. ‘시킴(Sikkim)’이라는 명칭은 ‘아름다운 집’을

뜻하는 토착언어 ‘수힘(Su Him)’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며, 시킴의 토착민들은 이곳을 집이란 개념을

넘어 ‘낙원’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깊은 계곡과 울창한 숲, 전통 불교 사원 등 자연의 경이로움과 활기 넘치는 문화가 어우러진 시킴은

예나 지금이나 ‘안식처’가 되어주는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다.

 

◆시킴의 주도이자 언덕의 도시, 강토크

▲소박한 시골 마을 분위기를 자아내는 강토크 도심 랄 바자 로드 전경

 

지난밤 차로 이동할 때 바퀴에 기름칠을 한 듯 매끈하게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던 언덕길이 두 발로

걸으니 도심까지 가는 길이 마치 구만 리 같다. 가파른 언덕길을 차로 달리는 것과 두 발로 걷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을 오간다.

 

지도 앱을 켜고 위치를 확인해보니 아직 갈 길이 멀다. 체감상 1킬로미터 남짓 걸어온 것 같은데

500미터도 채 걷지 않았다.

 

혹여 지름길이라도 있을까 싶어 지도를 여러 번 확대했다 축소했다 반복하며 길 찾기에 나섰는데,

결국 시간 낭비만 한 꼴이 돼 버렸다. 놀라운 사실은, 지도상에 직선으로 뻗은 도로나 길을

단 한곳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비탈길뿐인 이곳에서 언덕을 피할 방법은 날아가는 새가 아니고서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저 언덕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수밖에.

▲소박한 시골 마을 분위기를 자아내는 강토크 도심 랄 바자 로드 전경

 

시킴의 주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강토크(Gangtok). 이 명칭은 티베트어로 ‘언덕’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걷는 동안 그 의미를 몸소 체득했다. 언덕의 도시, 마침내 그 중심이 되는

‘랄 바자 로드’에 닿았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시골 마을 같은 강토크. 부탄의 수도 팀푸와 비슷하다고 알려진

이곳은 대형 상점이 많지 않아 전형적인 도시 생활과는 다소 거리가 먼, 오히려 한적한 분위기로

인해 휴식을 취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강토크는 인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 중 하나다.

▲산악 도시에서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일상과 같다.

 

인도의 다른 도시에 비해 대기 오염지수가 상대적으로 낮아 맑은 공기를 자랑하며, 공공장소에서

의 쓰레기 투기와 흡연을 엄격히 금지하는 규칙을 시행하기로 유명하다.

 

또한 비닐봉투를 판매하거나 사용할 수 없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자 2리터짜리 생수병만

판매한다.

 

도심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에는 보물처럼 상점들이 숨어 있어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의 왕래가 활발하다.

 

미로처럼 난 길을 정처 없이 따라 가다 보면 왁자지껄한 전통시장이 등장하기도 하고, 현대적

카페나 식당이 밀집한 거리가 나오기도 한다. 소박한 도시지만 도심의 역할에 걸맞게 나름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풍경을 자아낸다.

▲강토크 전통시장에서 청과물을 판매하는 상인들의 모습

 

그중 인상 깊은 것은 이곳의 나름 현대식 카페나 식당으로 조성된 장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가

한국의 라면이라는 점이다. 이토록 낯선 땅에도 ‘K-팝’과 ‘K-드라마’의 인기가 실로 대단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온통 K-팝이 차지하고 있고, 화려한 접시에 장식된 라면 한 그릇은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일품요리 같다.

▲강토크 도심에 자리한 현대식 카페와 식당, 상점들

▲시킴은 인도에서 티베트 문화권에 속한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로, 예로부터 북방 불교도들의

믿음에 근거하여 히말라야에서 가장 신성한 땅으로 인식되어왔다.

 

이후 왕실의 후원으로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시킴 전역에 걸쳐 많은 마을에 사원이 들어섰다.

오늘날 시킴 전역에는 200개가 넘는 불교사원이 자리하며, 불교는 이곳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시킴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불교사원은 ‘엔치 사원’이다. 1840년대 당시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강토크 주변 언덕 위 아름다운 능선에 지어진 이 사원은 오늘날 시킴 불교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좌로부터 시계방향)고전적인 티베트 스투파 형태의 불탑으로 유명한 도드룰 초르텐 사원,

초에 불을 밝히는 도드룰 초르텐 사원의 승려들, 곤장 사원 본당에서 불경을 외우며

기도하는 승려들의 모습, 곤장 사원 내부에 모셔진 다양한 불상

 

엔치 사원에서 북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곤장 사원’은 해발 1,830미터에 자리해 속세와

단절된 은신처 같은 분위기를 한껏 자아낸다.

 

1981년 팅키 곤장 림포체에 의해 건립된 이 사원은 티베트 불교 닝마파 종파의 전통을 따른다.승려

학생들에게 승려 교육과 함께 티베트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사원으로 유명하다.

 

남쪽 게이리 가언 지역에 자리한 도드룰 초르텐 사원도 시킴의 대표적인 불교사원 중 하나다. 불탑으로

유명한 이 사원은 한때 귀신이 출몰하는 곳으로 여겨져 부정적인 기운을 없애기 위한 움직임에서

시작되어 사원 건립으로 이어졌다.

▲도드룰 초르텐 사원에는 108개의 기도 바퀴가 있다.

 

이곳 불탑에는 정사각형 기단 위에 동근 돔이 있고, 그 위에 13개의 고리로 이루어진 황금 첨탑과

양산 모양의 장식이 있는 고전적인 티베트 스투파 형태의 건축적 요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탑 주의에는 108개의 기도 바퀴가 있으며, 각각의 기도 바퀴에는 양각문자로 만트라가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인도와 중국을 잇는 고대 실크로드 고갯길

 

천혜의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시킴, 이를 즐길 수 있는 명소 가운데 가장 특별한 곳은 창구 호수와

나투라 패스가 손꼽힌다.

 

특히 나투라 지역은 중국 국경과 이웃한 곳에 자리하는 작은 마을로, 거리상 걸어서 중국 국경을

넘을 수 있을 만큼 지척이다.

 

1961년 중국과 인도의 전쟁으로 이 길은 폐쇄되었다가 2006년 양국 화해 이후 다시 통행이

재개되었다.

▲고대 실크로드 고갯길이었던 나투 라 패스의 구불구불한 산길.

 

나투라로 가는 길은 인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차량 통행 가능 도로 중 하나다. 하지만 이곳은

시킴과 중국 티베트 자치구, 중화인민공화국을 연결하는 국경 검문소가 위치한 국경지대라는

이유로 외국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도인의 경우에도 국경 상황에 따라 종종 방문이 금지되기도 한다. 만약 출입이 허용되는 상황

이더라도 시킴 정부에서 승인받은 현지 여행사를 통해서만 방문이 가능하다.

 

또한 나투라 지역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날씨가 방문 여부에 영향을 미친다. 나투라 지역은 해발

4,310미터에 위치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곳의 기후조건은 한마디로 ‘눈이 가장 깊고 바람이 가장 강한 곳’이라고 일컬어진다. 때문에

나투라 지역을 방문하려면 우리나라 속담에 빗대어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우스갯

소리가 붙는다.

▲나투라 지역 입구에 세워진 표석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나투라 지역이 여행지로서 담고 있는 가치는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히말라야 동캬 산맥에 자리한 나투라 패스라 이름 붙여진 고갯길은 단순한 산길을 넘어 인도

-중국 국경 무역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장소다.시킴 여행 당시 나투라 지역에 외국인 출입이

금지된 탓에 하는 수 없이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나와 달리 함께 여행하던 인도인 친구는 운 좋게 여행사를 통해 나투라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

는데, 그의 후기를 빌려 밝히자면 “나투라 지역의 기온은 하루 아침의 여름에서 겨울로

이동한 듯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고대 실크로드 당시 티베트와 인도 상인들이 노새를 이용해 국경을 넘어 물품을 운반했던

구불구불한 산길은 상상하던 것 이상의 환경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좌)나투라 패스 입구에 모여든 관광객의 모습 (우)히말라야 주변 고원에 서식하는 야크

 

덧붙여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나투라 패스는 시킴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도 말했다.

눈 덮인 봉우리가 장관을 연출하며 고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이 고산 지대의 경이로운 풍경….

친구의 경험을 통한 상상 속 여정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만족할 만한 여행이었다.

아이슬란드의 화려한 雪景과 斷想.

▲아이슬란드공화국은 스칸디나비아반도 서쪽 북대서양에 위치는 도서국가이며,해안선의 길이는

4,970㎞이다. 면적은 10만 3000㎢, 수도는 레이캬비크(Reykjavik)이다.

 

주민은 노르웨이 바이킹족 및 켈트족이 94%로 대부분은 차지한다.언어는 노르웨이어의 고어

할 수 있는 아이슬란드어를 사용하며, 주민 95%가 루터교를 믿고,개신교 4%,

가톨릭교 1.7% 등이다.

▲아이슬란드 바트나이와쿠틀 국립공원 위치도 

▲아이슬란드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경제는 어업과 수산물 가공업이 그 기간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수산물 수출이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5%이상으로 국제수산물 가격 및 어획량에 따라 경제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다른

북유럽여러 나라와 같은 문화권에 속하며 의료·교육·연금 등의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다.

 

이 나라의 정체는 공화제의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63석)이다. 주요 정당은

독립당,진보당, 자유당, 좌파녹색당, 좌파연합(국민연합, 사민당, 여성당) 등이다

▲오늘날 아이슬란드 지역은 8세기부터 해변가를 따라 촌락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각 촌락들은

광막한 황무지들을 사이에 두고 처음에는 서로 분리된 상태에 있었다.

 

870년~930년 바이킹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하였는데, 아이슬란드는 유럽 국가 가운데 바이킹이

제일 마지막으로 정착한 나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공격하자, 영국은 1940년 북대서양 지역

통제를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인 아이슬란드를 점령하였다.

 

1941년에는 미군이 아이슬란드와의 협정에 의거하여 아이슬란드에 상륙하였다. 아이슬란드는

그동안 덴마크와 연합국의 형태로 덴마크 왕의 지배를 받아왔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이러한

관계가 해소되었다.

 

1944년 5월 25일 덴마크로부터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를 거쳐 1944년 6월 17일 아이슬란드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옛 선비들이 인증한 단양의 절경...아찔한 수직절벽에 새긴 이름들…

▲단양팔경 중 하나인 사인암. 반듯한 선의 바위가 마치 먹줄을 튕겨서 잘라 낸 것 같다.

 

계곡물에 발 담그는 여름이 가고, 물가에 앉아서 바위를 보는 가을의 초입이다. 경관이야

늘 같은데, 달라지는 건 사람이다. 한여름에는 충북 단양엘 가도 경관이나 풍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의욕을 다 녹여 버릴 듯 뜨거웠던 폭염 아래서는 명승이니 운치니 하는 건 죄다 사치

였으니까. 인물의 자취나 이야기의 감동보다는, 그저 남조천이나 새밭계곡의 그늘과

계곡물만 반가웠을 따름이다.

▲단양 팔경 위치도.

▲이제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인파가 빠져나가자 단양에서 보이는 건 경관과 풍류다. 가까이

가 보면 명승의 바위마다 글씨가 빼곡하다. 누군가의 이름이고, 누군가의 시(詩)다.

 

옛사람들도 딱 이때쯤 단양을 많이 찾았다. 바위를 보러 온 이들이 보고 나서는 제 이름을 새기고

떠났다.

 

단양팔경에 새겨진 글이 593건. 그중 236건이 사인암 한 곳이다. 절벽 하나에 팔경 전체의 글

40%를 새겼다. 이쯤이면 사인암(舍人巖)이 아니라 ‘사인(Sign)암’이다.

 

사인암 한쪽에 이런 글귀가 있다. ‘구름꽃 같은 절벽에 삼가 이름을 새기지 마라.’ 점잖게 나무

라는글귀를 새긴 이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이인상이다.

 

‘오호~’하고 감탄했지만, 금세 감탄을 거둬들였다. 그랬던 그도 바위에다 이름을 남겼으니까.

이른바 ‘내로남불’의 배신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

 

이름을 새기고자 하는 열망을 주체할 수 없었을 정도로, 사인암 일대 경관이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도 되니까.

▲사인암 석벽에 새긴 글귀들. ‘왔다 감’ 수준으로 제 이름만 밑도 끝도 없이 새긴 낙서가 있는가

하면, 자연을 읽어 낸 인문의 문장이 있고, 시흥에 못 이겨 새긴 시(詩)도 있다.

 

명승 즐비한 단양에서 비경마다 새겨진 이름을 길잡이 삼아 여행코스를 제안한다. 거리(距離)나

동선의 효율이 아니라, 딸려 나오는 사람 이야기로 매듭을 지어 가며 하는 여행이다.

 

지역 명소 목록을 밑줄 쳐 가며 빠짐없이 섭렵하는 촘촘한 여행도 좋지만, 사람과 이름의 자취를

따라가는 이런 성근 여행도 즐겁다. 같은 목적지로 가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여행이라면

더더욱 권한다.

▲사인암을 끼고 있는 절집 청련암의 극락보전.

 

◆도끼를 지고 대궐로 들어가다

 

옛 선비들의 ‘사인’ 그득한 사인암부터 간다. 사인암은 대강면 남조천 가에 있다. 아홉 굽이를 휘돌며

‘신선의 경치’를 이룬다 해서 운선구곡(雲仙九曲)이라 불리는 물길이다. 그 물이 청록빛 소를

이룬 자리에 높이 70m 수직 절벽이 병풍처럼 섰다.

 

날 선 사각 바위 수십 개를 정교하게 짜맞춘 듯한 형상이다. 예리한 칼로 ‘밭 전(田)’ 자 무늬를 새긴

것 같기도 하다. 먹물빛 암벽에 녹색과 황토색이 군데군데 교차해 그 자체로 추상미술이다.

 

여기 와 본 추사 김정희는 ‘색색 비단으로 짠 듯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 그림 같다’고 했다. 꼭대기

바위틈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한 줌 흙 기운만으로 수백 년을 버티고 섰다. 자연이 가꾼 그윽한 분재다.

 

이름부터 짚는다. 사인암의 ‘사인(舍人)’은 고려 때 정4품 벼슬. 지금으로 치면 ‘국무조정실 국장급’

정도 된다. 이 벼슬을 지낸 이가 우탁이다.

 

단양이 본관이고 적성면이 고향인 그가, 사인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이곳을 자주 찾았다 한다. 그가 지낸

벼슬이 바위 이름이 된 건, 그가 세상을 뜨고 100년도 더 지난 뒤였다. 조선 성종 때 단양 군수가

그를 기려 사인암이라 불렀다. 남이 붙여 준 이름이었다.

 

우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면 이 대목이 예사롭지 않다. 충선왕은 즉위해 죽은 아버지(충렬왕)의 후궁

범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왕의 노여움이 두려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때, 우탁이 흰옷 차림으로

나타났다.

 

도끼를 지니고 올린 상소, 우리 역사상 최초의 ‘지부상소(持斧上疏)’였다.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이 도끼

내 목을 치라”는 뜻이다. 상소가 어찌나 격렬했던지 승지가 펴 들고도 오금이 저려 읽지 못했을 정도

였다던가.

 

벼슬을 내놓고 물러난 우탁은 왕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사양했다. 그가 남긴 지부상소의 전통은 뒷날

조헌으로, 최익현으로 이어진다.

 

사인암 뒤쪽 작은 암자 청련암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는 나중에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밝혀졌지만 오랫

동안 우탁이 쓴 것으로 알려졌던 글씨가 남아 있다

 

 ‘탁이불군(卓爾不群·뛰어나되 무리 짓지 않는다) 확호불발(確乎不拔·확고하여 뿌리 뽑히지 않는다).

독립불구(獨立不懼·홀로 서도 두렵지 않다) 둔세무민(遁世無悶·세상을 등져도 근심이 없다).’ 글씨가

우탁의 것으로 여겨졌던 건, 글에 담긴 내용이 도끼를 지고 대궐로 걸어 들어간 그의 이력과

그대로 포개져서다.

▲시루섬 기적의 다리 입구에 세워진 아이 안은 어머니 조형물. 절체절명의 재난 속에서

혹시 이웃들이 동요할까 봐 자식이 질식해 숨을 거둔 걸 알리지 않은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이름을 새기지 말라고?… 나만 빼고

 

우탁의 것으로 전해졌던 글씨 곁에는 400년쯤 뒤에 새긴 글씨가 있다. 1751년 봄, 선비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새긴 시다.

 

‘먹줄로 그은 듯 저울로 단 듯, 옥빛에 경쇠 소리. 우러를수록 더욱 높고, 우뚝하여 이름 붙일 수조차

없네.’

 

시는 새로 지은 게 아니라 옛글에서 한 구절씩 빌려 이어 붙여 지은 것이다. 빌려 온 문장들의 출처가

눈길을 끈다. 앞의 두 구절은 주자(朱子)의 글에서, 뒤의 두 구절은 논어(論語)에서 가져왔다.

 

하나같이 성인(聖人)의 인격을 기리던 말이다. 그 말을 모아 바위에 바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사인

을 ‘석장(石丈)’, 곧 ‘돌 어른’이라 불렀다.

 

사람에게나 올리던 찬사를 돌에 바친 셈이다. 그러고는 끝에다 이렇게 새겼다. ‘신미춘(辛未春) 윤지

정부 원령 찬(讚).’ 신미년 봄에 윤지와 정부, 그리고 원령이 지었다는 뜻이다. 윤지는 이윤영,

정부는 김종수, 원령은 이인상의 자(字)다.

 

나란히 남긴 세 사람의 이름 중에서 이인상이 눈에 띈다. 앞에서 말했던 ‘바위에 이름을 새기지 말라’

훈계했던 그 이인상이다.

 

세 사람이 함께 골라낸 글을 직접 제 손으로 바위에다 글씨로 새겼으니 이인상은 ‘가담자’가 아닌 ‘주모자’

였다. 그 마음을 경계하라 적어 둔 사람조차 결국 같은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나무랄 것까진 없겠다. 지금이야 빼어난 경관의 감흥을 기념하려면 사진으로 찍어 가져

가면 되지만, 그때는 경관을 가져갈 도리가 없었으니 거기다 제 자취를 남겨 두고 올 수밖에….

앞다퉈 제 이름을 바위에 새기고, 시문을 지어 바위에다 남긴 까닭이다.

 

그게 그 시절의 ‘인증샷’이었던 셈이다.행적을 뒤지다 보니 이인상의 ‘내로남불’쯤은 슬쩍 눈감아 줘도

좋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서얼로 태어나 평생 하급직을 떠돈 사람이다.

 

단양이 좋아 옥순봉 아래 정자를 짓고 눌러살고 싶어 했지만, 노모와 가난에 발이 묶였다. 단양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이면 닿는 지척에 살면서 끝내 오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살러 오지 못한 자리에 이름

이라도 두고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쯤은 봐줘도 되는 게 아닐까.

 

그가 남긴 그림에 ‘설송도’가 있다.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낸 채 눈보라를 견디는 두 그루 늙은 소나무다.

서얼로 멸시를 견디며 산 자신의 초상이었을 것이다. 사인암 꼭대기에도 그런 소나무가 자란다.

바위틈에 뿌리 박고 버티고 있는 나무들이다.

 

◆핫플레이스에 새겨진 이름들

 

사인암에 새겨진 이름을 읽는 재미가 있다. 절벽 한가운데 잘 보이는 붉은색 글씨가 있다. 낭원군중유계유동

(朗原君重遊癸酉冬). 낭원군이 계유년 겨울에 ‘다시’ 유람 왔다는 뜻이다.

 

방문이 이번 한 번이 아니었다는 얘기. 낭원군으로 불렸던 이간은 선조 임금의 아들인 인흥군의 아들이다.

직계로 이어지는 당당한 왕의 종친이다.

 

그는 정서적 감수성이 풍부한 데다가 학문도 능해 시가(詩歌)를 잘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가 인증샷을

남기고 갔을 만큼 사인암은 ‘핫플레이스’였다.

 

낭원군 각자 바로 아래에 또렷한 이름이 있다. 정의동(鄭義東). 1902년 단양 군수를 지냈다.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군수인 그에게 수탈과 폭압 등 폐정을 묻고 축출하고자 관아로 쳐들어갔는데, 이미 몰래 달아

나서 화를 피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까지 보면 영락없는 ‘탐관오리’인데 이후의 행적을 보면,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뒤에

다시 얘기할 단양 수몰이주기념관 마당에, 뜻밖에 그를 기리는 선정비가 있다.

 

비석이 기리는 그의 선정은 ‘흉년을 당한 단양군의 세금을 줄여 줄 것을 상소했다’는 것이다. 상소로 진짜

세금이 깎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그는 탐관오리였을까, 아니면 선정을 베푼 청백리였을까.

 

아무튼 그는 단양 군수를 지내고 곧바로 지금의 국회의원쯤 되는 중추원 의관으로 자리를 옮겨 갔으니 승승

장구한 셈이다.

 

개중에는 남기지 않는 편이 나았겠다 싶은 이름들도 있다. 붉은 큰 글씨로 적은 찰방 벼슬의 어떤 이는 역졸들

에게 달걀과 생강을 징수하고 역마 운용비에 손을 댔다가 암행어사에게 걸려 쫓겨난 사실이 실록에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반민족행위자의 이름도 이 바위에 있다. 남긴 이름으로 두고두고 손가락질

을 받게 된 경우다.

▲단양의 장회나루 쪽에서 본 충주호. 왼쪽의 봉우리가 단양팔경인 구담봉이다. 토정 이지함의

형인 이지번이 칩거하며 신선처럼 살았다는 곳이다.

 

◆신선이 살던 구담봉, 가난뱅이가 살던 옥순봉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면 단양팔경인 구담봉과 옥순봉이 차례로 나타난다. 바위가 옥빛으로 솟은 것이

죽순 같다 해서 옥순봉이다.

 

이 물길에는 이야기가 겹겹이다. 구담봉에는 조선 명종 때의 문신 이지번이 살았다. 토정 이지함의 형이다.

윤원형의 횡포에 맞서 벼슬을 던지고 이곳에 은거했는데, 두 봉우리에 칡 밧줄을 걸고 학 모양을 매달아

타고 다니니 백성들이 그를 신선으로 여겼다.

 

그가 떠난 뒤 창고를 열어 보니 다른 건 없고 칡 밧줄만 가득했다고 야담집 ‘어우야담’은 전한다.구담봉에

신선이 있었다면 옥순봉 아래에는 ‘가난뱅이 김남포’가 살았다.

 

어느 날 방랑 시인 김삿갓이 그를 찾아왔다. 멀리서 온 나그네에게 밥 한 끼 지어 주지 못하고 멀건 죽 한 그릇

내놓았는데, 그 죽이 어찌나 묽었던지 하늘의 별과 달이 그릇에 비쳤다. 김삿갓이 수저를 들다 말고 읊었다.

 

‘천하의 명산은 옥순봉이요 / 세상의 괴한은 김남포라 / 사각 소나무 소반에 묽은 죽 한 그릇 / 그 안에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노니네.’

 

주인이 무안해 할 법한 상황을 김삿갓은 재치로 건너뛰었다. 가난한 촌로의 멀건 죽에다 하늘과 구름을 담는

운치라니…. 김남포는 없는 살림에도 나그네를 먹였고, 나그네는 밥값, 아니 죽값을 시로 갚은 셈이었다.

 

김남포는 누구일까. 그를 수소문하다가 도담삼봉까지 갔다. 본명 김종호. 무과에 급제해서 지금의 충남 보령

땅인 남포 현감을 지냈다. 김남포란 남포 현감을 지냈다고 사람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그의 무덤은 도담삼봉 뒤편 능선에 있다.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덤불에 길이 끊겨 군청과 문화원에 거듭 수소문

한 끝에야 소나무 숲 안쪽에서 겨우 찾아냈다.

 

묘비에 내력이 적혔다. 1770년에 나서 1848년에 죽었으니 일흔여덟을 살았다. 대대로 지금의 의왕 땅에

살다가 아버지 대에 용인으로 옮겼다.

 

말년에 산수 수려한 곳을 찾아 소백산 아래 금곡리로 옮겼는데, 너무 깊고 후미져 아쉬웠다고 한다. 몇 해 뒤

그는 거처를 다시 옮겼다. 옮겨 간 곳이 바로 도담삼봉 앞이었다.

 

경치 하나 보고 두 번이나 이사한 사람이다. 그것도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들 바위에 이름 석 자

새기고 돌아갔지만, 그는 명승 곁으로 남은 생애를 통째로 가져왔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도

도담삼봉 기슭에 묻혔다.

▲단양팔경의 간판 격이라 할 수 있는 도담삼봉.

 

◆수몰 지역에서 건져 올린 이름들

 

단성면 하방리에는 수몰이주기념관이 있다. 1985년 충주댐으로 물에 잠긴 구(舊) 단양 사람들의 기념관

이다. 기념관은 주민들도 잘 모른다. 수몰의 기억은 점점 멀어지고, 관광객은 관심조차 없으니….

 

기념관은 2층 규모의 조촐한 건물인데, 정작 볼 것은 건물 안이 아니라 마당에 있다. 충주댐 담수로

물에 잠길 뻔한 것들을 가져다 여기 모아 놓았다.

 

먼저 퇴계의 글씨 둘이 있다. ‘탁오대(濯吾坮)’와 ‘복도별업(復道別業)’이다. 원래 단양천변에 있던

수몰을 앞두고 옮겨 왔다.

 

탁오대는 ‘나를 씻는 곳’이라는 뜻. 퇴계가 단양군수 시절 이 자리에서 매일 손발을 씻었는데 마을까지

깨끗해졌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복도별업은 ‘도를 회복하는 별장’이라는 뜻으로, 그가 논에 물을 대려 만든 저수지 곁에 새긴 것이다.

사인암빽빽하게 새겨진 이름이 ‘내가 여기 왔다’는 표식이라면, 이 두 글씨는 ‘나를 씻겠다’는

다짐이다. 같은 돌에 새긴 글씨지만 품격이 다르다.

 

마당에는 비석이 늘어서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이 황준량 선정비다. 1557년 단양 군수로 부임한 그가

고을을 되살린 공을 기려 백성들이 세웠다. 그가 부임했을 당시, 단양은 폐허였다.

 

한때 200호가 넘는 고을이었는데 홍수와 흉년이 겹치면서 처자식을 이끌고 먹을 것을 찾아 떠나니

관내에겨우 40호만 남았을 따름이다.

 

황준량은 조정에 4800자나 되는 상소를 올렸다. 피폐한 백성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측은지심의 절절

마음을 담은 글이었다.

 

그는 상소문에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고, 흉년이면 도토리로 연명하는데 세금은 다른

고을의 몇 곱절이라, 한 집이 100호의 부역을 감당하고 장정 하나가 100사람 몫을 진다’고 호소했다.

 

그러고는 대궐로 찾아가 열흘을 엎드렸다. 감동한 명종 임금은 10년간 조세와 부역을 면제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공신도 아닌 백성이 10년 면제를 받은 건 조선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지워진 이름과 선명한 이름

 

황준량은 3년 뒤 성주 목사로 떠났고 마흔일곱에 죽었다. 얼마나 청빈했던지 수의 만들 삼베가 없어 빌려다

염을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를 기리는 비석은 한쪽 귀퉁이가 깨졌고 글씨는 마멸돼 읽을 수가 없다.

 

황준량 선정비의 두어 걸음 옆에 다른 비석이 있다. ‘군수 성진묵 애민선정비’다.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풀었다고 세운 비석인데, 성진묵은 1819년 단양 군수로 왔다가 3년 뒤 암행어사의 감찰에 걸려 파직된

인물이다.

 

충청좌도 암행어사 서좌보가 아홉 명의 수령을 ‘다스리지 못한 정상’으로 논핵한 명단에 그가 있었다. 암행

어사는 같은 보고에서 군정과 전부, 환곡의 폐단을 함께 아뢰었다. 군역과 토지세, 그리고 고리대금업이나

다름없던 환곡이다. 놀라운 건 선정비가 파직당한 바로 그해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학정과 수탈의 주역으로 지목돼 동학군에 습격당했던 단양 군수 정의동의 선정비와 경우가

비슷하다.무슨 사연인지는 알 길이 없다.

 

비위로 떠나는 수령이 아전을 시켜 세우게 한 것인지, 조정의 판단과 고을 사람들의 마음이 달랐던 것인지.

다만 눈앞의 광경은 분명하다. 고을을 되살린 사람의 비석은 글씨가 지워져 읽을 수 없고, 파직당한 사람의

비석에는 ‘애민(愛民)’ 두 글자가 또렷하다.

 

돌에 새긴 이름은 오래간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래가는 것과 오래 기억되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시루섬의 기적’ 출렁다리

 

단양역 국도변 수양개유적로 부근에 ‘시루섬의 기적’ 출렁다리 보행교가 놓였다. 1972년 8월 19일.

태풍 베티로 단양강이 범람했던 당시의 기적을 증거하는 다리다.

 

그날 시루섬에서 물에 잠기지 않은 건 물탱크밖에 없었다. 주민 198명이 20㎡(6평)의 물탱크 위에

올라가 온 힘을 다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절망의 밤을 새웠다. 이 과정에서 갓난아이가 질식해

숨을 거뒀지만, 주민들이 동요할까 봐 어머니는 피눈물을 삼키며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지금 캐나다서 난리난 ‘유령 섬’의 정체…호수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져...위성서도 확인.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북부의 윌리스턴호에 떠 있는 섬의 모습. / 캐나디안프레스 캡처

 

지도에도 없던 거대한 ‘섬’이 캐나다 한 호수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뒤 약 30㎞ 떨어진 곳에서

다시 발견돼 캐나다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1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과 캐나다 통신사인 ‘The Canadian Press’에 따르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윌리스턴호에서 최근 거대한 부유 섬(떠다니는 섬)이 발견됐다. 길이 약 150m, 폭 75m

이르는 섬에는 나무와 각종 식물이 자라고 있다.

 

현지 주민이 지난달 지인에게서 받은 섬의 영상을 공개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호수를 관리하는 국영

전력회사인 ‘BC Hydro’도 처음에는 인공지능(AI)으로 제작한 가짜 영상이나 장난일 가능성을

의심했을 정도다.

윌리스턴호 위치도.

 

이 섬의 존재는 위성사진에서 정확히 확인됐다. BC Hydro에 따르면 섬은 호수 중앙부 핀레이베이

인근에서 포착됐다가 모습을 감췄고, 지난달 31일 오스피카강이 호수로 흘러드는 지역에서 다시

발견됐다. 이전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약 30㎞ 이동한 것이다.

 

섬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BC Hydro는 오랜 기간 호숫가에 쌓인 통나무와

썩은 식물 등의 거대한 덩어리 위에 나무가 자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윌리스턴호의 수위가 올해

2012년 이후 처음으로 최대 수준까지 차오르면서 물에 잠긴 해안의 덩어리가 떨어져 나와 떠다니기

시작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캐나다 지질조사국 명예과학자

이자 사이먼프레이저대 지구과학과 명예교수인 존 클라그는 호숫가 침식으로 나무가 물에 빠지는

현상은 있지만, 이처럼 거대한 숲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본 적이 없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수십㎞를 이동하고도 섬이 해체되지 않은 이유 역시 의문으로 남아 있다.

 

BC Hydro는 섬이 현재 해안에 걸려 있지만, 강풍 등이 불면 다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나무와 부유물이 불안정하게 얽혀 있어 사람들이 섬 위에 올라가는 것은 위험하다며 접근에

주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기묘한 섬은 캐나다와 미국의 정치적 갈등과 맞물려 농담거리까지 됐다. 가디언은 온라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 섬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취지의

농담까지 나왔다고 전했다.

정선·영월·평창 기행ㅡ나리소 굽이 도는 동강,뼝대 아래에서 페달을 밟다

▲정선군 정선읍 가수리 인근서 바라본 동강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해 아침 8시56분 평창터미널을 지나는 정선행 시외버스는 제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숙소를 구하기 힘든 휴가철 금요일이라 평창군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정선까지 시외버스로 이동한 뒤

자전거로 되돌아오는 96km짜리 당일치기 여행을 택했는데, 시작부터 위기였다.

 

터미널을 지키던 어르신은 “휴가철엔 연착이 잦다”며 안심시켰지만, 기다림이 1시간을 넘기자 “오늘은

좀 심하다”고 말을 보탰다.

 

시원한 대합실을 나와 땡볕 아래 서성이자 대화면에서 왔다는 어르신이 이것저것 묻는다. 발이 묶인

서울내기의 넋두리에 “시골은 이게 불편하다”며 혀를 찼다.

 

서울 바깥 대중교통에게 정시성을 기대해선 안 된다. 툭하면 밀리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새말

나들목뒤로는 험한 고개를 연달아 넘어 평창 지나 정선 가는 완행 노선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화를 마치자 거짓말처럼 버스가 도착했다. 평창에서 내린 이는 많았으나 오른 건 뜨내기인 필자뿐,

승객도 대여섯이 전부였다. 평창과 정선만 오가는 노선이 유지될 수 없는 까닭이다. 버스는 사연 많은

고개 비행기재를 무심하게 터널로 관통해 30분 만에 정선에 닿았다.

▲정선에서 처음 만난 얼굴, 숲요정 ‘와와군’이 그려진 정선시내버스. 

 

연착이 없었다면 9시께 문을 여는 향토음식점에서 여유롭게 아침을 먹었겠지만, 계획 첫줄에 올려놓은

아리랑시장 북문 인근 식당 앞에는 11시부터 긴 줄이 섰다. 시내를 벗어나면 곧바로 무인지경이

펼쳐질테니 군말 없이 기다릴 수밖에.

 

기다리는 동안 짐을 확인하고, 편의점에서 간식과 생수, 돌얼음을 사서 하이드레이션 백(튜브가 달린

물가방)에 채웠다. 정선 시내부터 예미리까지 42㎞는 녹색 사막이나 다름없으니 단단히 준비

해야 한다.

▲정선읍은 조양강 상류 아우라지에서 벌채한 최고급 건축재 황장목을 한양으로 보내던 물류기지였다.

정선 '떼꾼'들은 황장목을 뗏목으로 엮어 마포나루까지 갔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된 일이었으나,

성공하면 벼슬아치 부럽지 않은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떼꾼들의 큰 씀씀이에 기댄 주막들도 있었다지만 내륙수운이 쇠퇴하며 옛 이야기가 됐고, 뒤이어

온 석탄산업 전성기가 화양연화처럼 지나가자 정선은 휴전선 이남 최고 오지 중 하나가 됐다.

강원랜드와 평창겨울올림픽 특수로 예전보다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멀고 외딴곳이다.

▲정선의 콧등치기국수와 메밀전병. 

 

콧등치기국수는 정선 일대 향토음식으로, 탄력 있는 면발이 콧등을 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김치말이 메밀 냉칼국수’라고 생각하면 쉽다.

 

메밀향 나는 굵은 면과 담백한 멸치 된장 육수가 여름 별미로 제격이다. 함께 주문한 메밀전병은

도톰한 메밀떡에 생김치를 말아 폭신하고 아삭했다.얇은 떡에 볶음김치를 넣는 다른 지역과는

사뭇 다른 맛이다.

 

정선의 문명과 자연 사이에는 바림이 없다. 시내를 벗어나면 초록 물감을 여러 겹 덧입힌 듯한

풍경이 곧바로 이어진다.

 

인기척 없는 강변에 어른 키 두 배만 한 옥수수가 숲을 이루고 있으니, 온통 녹색인 땅에 개입한

인간의 한 줌 손길을 어림짐작할 뿐이다.

 

정선 시내부터 용탄대교를 잇는 조양강 북단 도로는 예고 없이 좁아져 중앙선이 사라지거나

포장이 거칠어지기를 반복한다.

 

강 건너편에는 솔치재를 터널로 가로지르는 아스팔트 비단길이 있으니, 네 바퀴는 굳이 이 길을

지날 필요가 없다. 조양강과 주변 산세를 벗 삼아 자전거로 산책하기 좋다는 뜻이다.

▲솔치재 자락에서 광하탐방안내소 가는 길목에 세워진 정선 떼꾼 조형물

 

길은 용탄대교를 건넌 뒤 솔치재 자락을 살짝 스치며 야트막한 오르막을 만든다. 본격적인 동강

코스는 내리막 뒤 광하탐방안내소부터다.

 

어깨에 강을 맞대고 달리는 동안 노란 바탕의 표지판들이 시선을 끈다. B급 정서 가득한 문구와

그림에 피식 웃음이 난다.

 

하지만 실제 돌 크기 조형을 붙여놓은 낙석 경고만큼은 마냥 웃어넘길 수 없다. 까마득한 ‘뼝대

(고생대 지층 절벽을 뜻하는 정선 사투리)’에서 방금 막 떨어진 듯 날카로운 돌덩이가 널려

있으니 강변 쪽으로 달리는 편이 안전하다.

▲동강의 낙석주의 표지판. 

▲동강의 사진명당 표지판.

▲동강의 표지판들. 

 

이 일대는 강원고생대국가지질공원이다. 수억 년 세월은 지층 사이에 석회암과 석탄 같은

자원을남겼을 뿐 아니라 바위에 무늬를 새기고 동굴을 팠다. 지층을 따라 한 줄로 뚫린

동굴은 약 5억년 전 캄브리아기에 생성된 것이다.

▲강원고생대국가지질공원의 고생대 지층 석회동굴.

 

타지인들은 정선·영월·평창 일대 한강 상류를 ‘동강’이라 통칭하고 정부 표지판에는 ‘한강’으로

적혀있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가수리 지장천 합수부를 기준으로 정선 방향 상류는 조양강,

영월 방향 하류는 동강으로 구분한다. 정선에 '조양'을 내세운 가게 이름이 유독 많다.

▲가수리 마을 어귀 도로 복판에 솟은 나무. 

▲뼝대 위에서 동강을 굽이보는 가수리 소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나무가 선 곳까지는 접근할 수 없다. 

▲가수리 소나무가 선 뼝대에서 내려다 본 동강. 

 

조양강이 동강으로 바뀔 즈음, 외길 위로 큰 나무가 장판파의 장비처럼 나타나 가수리 도착을 알린다.

정선초등학교 가수분교에는 '동강 1경'으로 꼽히는 수령 560년 추정 느티나무가 있고, 뼝대 위에는

소나무가 버티고 있다. 세 나무 모두 독특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니 찬찬히 둘러보자.

▲‘동강 1경’ 정선 가수리 느티나무.

▲가수리 남쪽에서 바라본 동강-지장천 합수부. 

 

시간이 넉넉하다면 지장천을 거슬러 올라가 미리내폭포를 찾는 것도 좋겠다. 흔히 떠올리는 낙차와

물보라 대신, 굽이치는 물줄기에 두 동강 난 암벽이 감탄을 자아낸다. 긴 세월 뒤 청령포나

한반도지형도 이런 식으로 분리되어 섬이 될 수도 있겠다.

▲암반을 토막낸 것 같은 기이한 모습의 미리내폭포.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아도 볼 수 있다.

 

가수리에서 지장천을 건너면 여행의 결이 조금 바뀐다. 숙박시설과 과수 농가가 늘고,

작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며 길과 강이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되풀이한다.

달리는 즐거움에 약간의 인내가 덧붙는다.  

▲얼음골: 운치삼거리에서 입구까지 자전거 약 1.7km-도보 150m 이동 ◎나리소탐방로

내 전망대: 나리소전망대에서 입구까지 자전거 약 300m-도보 250m 이동. 

 

신동면 운치삼거리에서 예미초등학교 운치분교 방향으로 향하면 한여름에도 찬 바람이 솟는 풍혈,

정선 얼음골이 나온다. 뽀얀 김을 뿜는 바위 틈 찬 바람은 특수효과처럼 신기하다.

 

주변보다 습도가 높고 서늘한 숲은 온통 이끼로 포장됐고, 풀과 나무도 흔한 여름 풍경과 다른 모양

으로 자라니 ‘신비의 숲’ 같은 느낌이다. 5분 남짓 숲길을 오르며 흘린 땀은 가장 큰 풍혈이 뿜는

찬 바람에 금세 식었다.

▲얼음골의 가장 큰 풍혈과 습기를 잔뜩 머금은 노란 기린초. 몇몇 풍혈에는 온도계가 설치되어 있다.

▲얼음골의 찬바람을 따라 흐르는 안개. 

 

얼음골은 진귀한 곳이지만 경로에서 꽤 벗어난 데다, 길을 찾기 어려운 곳이다. 이끼 낀 바위를 딛고

표지 없는 산길을 왕복 300m가량 ‘등반’해야 하니, 시간이 촉박하거나 자전거용 클립리스

(클리트) 신발 차림이라면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편이 낫다.

 

운치삼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엔 동강 3경 나리소를 조망하는 전망대가 있다. 나리소는 동강 일대

감입곡류 중 가장 극적인 형태로, 180도로 휘돌아나가는 강물이 육지를 거의 섬처럼 깎아놓았다.

 

길가 전망대에서 보는 옆모습도 장관이지만, 앞모습까지 온전히 즐기려면 15분가량 탐방로를 걸어

뼝대 위 전망대를 찾아야 한다.

 

얼음골에 비해 길찾기는 쉽지만 왕복 500m 숲길이 매우 험하니 클립리스 신발 차림이라면 도로변

전망대에서 바라보 풍경으로 만족하는 것이 안전하다.

▲도로변 전망대에서 바라본 나리소

▲탐방로 내 전망대에서 바라본 나리소 일대. 

 

길은 고성탐방안내소 부근부터 강과 멀어지더니 이내 사나운 고개 고성리재를 만난다. 동강을

따라 정선에서 영월까지 가는 육로는 없다. 화장실과 정수기를 이용하러 들른 안내소에서

혹시나쉬운 샛길이 있는지 물었지만 그런 건 없단다.

 

해발 621미터 고성리재 정상보다 낮은 지점에 터널이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다. 물론 터널

입구까지도 가파른 구절양장 비탈길이니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이번 여행 최대의 고비다.

 

신동읍 고성리재 해발 520미터 지점에는 폭 3.5미터, 길이 596미터의 터널이 있다. 1985년

상수도관 설치를 위해 만든 관리시설이라 별다른 이름 없이 '도수터널'로 불린다.

 

애초 차량 통행 목적이 아니었기에 터널 내 교행은 불가능하다. 먼 불빛을 확인하고 재빨리

지나는 것이 최선이다.

 

반대편 차량을 마주치거나 뒤차를 먼저 보내야 한다면 군데군데 회피 공간을 이용하면 된다.

좁고 긴 암흑은 미지의 우주 공간 같으니, 다른 운전자에게 존재를 알리려면 전조등과

후미등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정선군 신동읍 도수터널 입구. 

 

터널 출구부터 태백선 예미역이 있는 신동면 소재지까지는 급경사가 이어진다. 통행량 많은 강원남로와

합류하니 마을이 보이면 미리 속도를 줄여야 한다. 강원남로를 건너면 신동읍의 중심지 예미리다.

 

예미리는 석탄산업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1960년대의 ‘미니 신도시’였다. 운탄고도 비포장길을 위태

롭게 내려온 제무시 트럭들이 석탄을 쏟아내면 검은 태백선 기차가 온 나라로 실어날랐다.

 

역 주변으로 주택가와관공서, 학교, 병원이 들어서며 번듯한 읍내를 이뤘던 호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산골 마을들의 거점역할을 할 따름이다. 그래도 운탄고도 트레일의 종점이자 아무것도 없다시피

동강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번듯한 마을이니 식사나 숙박을 해결하기엔 충분하다.

 

예미리부터 영월역 부근까지 의림로 20km 구간은 나란히 달리는 강원남로가 통행량 대부분을 가져간

덕에 여유롭게 달릴 수 있는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이 곳은 생활용 자전거나 접이식 자전거로도 시속 30킬로미터 이상을 어렵잖게 유지할 수 있는데다

적당한 굴곡까지 있어 달리는 맛이 각별하다. 운이 좋다면 태백선 기차가 발에 닿을 듯 협곡을 가르며

달리는 장관을 담을 수 있고,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연하계곡 같은 명소를 만날 수 있다.

▲석항역 인근의 태백선-의림로 교차점. 운이 좋으면 지붕이 발에 닿을 듯 가깝게 이 곳을 지나

협곡을 향해 달리는 기차를 만날 수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인적을 지운 연하계곡.

 

무엇보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갯길 아닌 평지의 옛길 가운데 이만큼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곳은

드물다.

 

석탄은 기차를 타고 사람은 버스를 타던 시절, 산골의 유일한 포장도로 위엔 얼마나 많은 사연이

새겨져 있을까. 쇠락한 마을을 하나둘 스쳐 지날 때마다 마음 속 시계는 1980년대로 거꾸로 돈다.

이 아련한 풍경이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영월 시내로 길을 재촉한다.

▲영월 시내 근처 강원남로-의림로 근접 지점. 간선도로의 번잡함과 옛길의 스산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영월역 한옥 역사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건만 영월 시내 노포 막국수집은 재료 소진으로 문을 닫았다. 배가 고픈 것도,

달리 먹고 싶은 것도 아니어서 단종의 마지막 거처 관풍헌과 옛 빨래터만 잠시 둘러본 뒤 북면

마차리로 이어지는 분덕재를 향했다.

▲영월 시내의 백월빨래터. 최근까지 방망이질을 한 흔적이 있다. 

 

영월 시내는 이 지역 최대 번화가지만, 역설적으로 정선에서도 평창에서도 접근하기 무척 어렵다.

영월에서 평창 가는 길목 분덕재에 터널을 뚫으려던 계획이 있었으나, 2020년 천연기념물급

석회암 동굴이 현장에서 발견되어 멈췄다.

 

그런 까닭에 영월 시내와 등을 맞댄 험준한 분덕재는 지금도 현역이다. 앞서 넘은 고성리재보다

낮고 완만하지만 차량 통행이 제법 번번하니 주의해야 한다.

 

분덕재를 넘으면 마차리로 더 잘 알려진 영월군 북면을 만난다. 마차리는 1935년부터 채굴을

시작한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식 탄광인 영월탄광으로 번성한 마을이다.

 

군민의 절반이 모여 살았다는 전성기의 위세는 대도시 학교를 통째 옮겨놓은 듯한 규모의 마차

중.고등학교의 여섯 학년 전교생이 40여 명뿐이라는 사실로 어림짐작할 수 있다.

 

옛 영월탄광 자리는 강원특별자치도탄광문화촌으로 탈바꿈했으나 2026년 연말까지 내부

정비로 닫혀 있었다.

▲영월군 북면과 평창군 평창읍의 경계 원동재 정상. 평창 방향 노면에 자전거 우선도로 표지가 그려져 있다. 

 

마차리에서 원동재 입구 연덕교차로까지 약 4km구간은 이 여행에서 가장 번잡한 곳으로, 평창

가는 차들과 함께 달려야 한다.

 

평창과 영월을 직결하는 유일한 길목 원동재는 예로부터 통행이 많아 길을 넓혔고, 나중에 원동

터널까지 뚫은 덕분에 ‘통행량 적고 넓은 옛 고갯길’로 남았다.

 

원동삼거리부터 평창 시내까지 차량 스트레스는 거의 없다. 평창 시내와 매우 가까운데도 외딴

고성리재보다 오히려 한산해서 운동삼아 걷거나 자전거로 오르기 좋은 고갯길이다. 동재

정상부터 평창 시내 인근까지 노면에는 ‘자전거 우선도로’ 표지가 새겨져 있다.

▲원동재 평창 방향 내리막. 도로 포장을 덧붙인 턱을 지날 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원동재는 과거 석탄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넘던 고갯길이라 높지도 급하지도 않지만 굴곡이

심하며 옛 도로를 뜯어내는 대신 옆에 아스팔트를 덧대 폭을 넓힌 탓에 급커브에 턱이

도사린다.

 

정상에서 평창으로 향하는 내리막에서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 미리 속도를 줄이고

최대한 직각으로 통과해야 한다.

▲평창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종부리 일대. 

 

원동재를 지나자 평창강 일대의 평화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변의 한적한 마을들, 높은

산맥을 배경으로 독보적인 풍경을 뽐내는 종부리 곡저평야는 자연과 인문이 함께 빚어낸

조화로운 장관이다.

 

나지막이 내려앉은 저녁 햇살을 받으며 근심 없이 페달을 밟다 보니 어느새 평창 시내로 되돌아와

있었다.

 

*중요: 여행 초반 정선 시내부터 예미리에 이르는 42㎞ 구간은 오지다. 도중에 만나는 광하탐방

안내소와 고성탐방안내소에서 정수기와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으니 참고하자. 두 안내소

모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며, 매주 수·목은 휴무다.

▲동강의 야생동물 출몰지역 표지판. 

 

◆여행 정보 수첩

 

이번에는 출퇴근용으로 자주 쓰는 페달 보조 방식(PAS) 전기자전거로 96km를 달렸다. 전기자전거는

체력 소모를 줄여주지만, 전기가 없으면 일반 자전거보다 모든 면에서 불리하다.

 

20kg이 넘는 무게에 더해 모터의 저항이 상당하다.전기자전거 장거리 여행은 전원 관리가 관건이다.

1박 이상 여행은 숙소에서 충전하면 되지만, 당일치기 여행은 배터리가 바닥나면 곧바로 중단해야

하는 수준이다.

 

필자가 타는 전기자전거는 완충 시 평지 기준 약 100km를 주행할 수 있다. 오르막을 만나면 전비가

급격히 떨어지므로, 출발 전 지도를 확인해 전기를 아끼는 계획을 짰다.

 

동강 광하탐방안내소부터 나리소전망대 인근까지 24km, 고성리재 정상부터 영월역까지 25km는

다리 힘으로만 주행했고 고성리재·분덕재·원동재는 최저 단계의 동력 보조로 넘었다.

 

평지에서는 체력 소모가 컸지만 오르막에서는 어렵잖게 시속 15km 안팎을 유지했다. 덕분에 폭염

노출 시간이 줄었고 방충 장비 없이도 벌레를 피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친 뒤 확인한 배터리 잔량은 33%였다. 오르막 외 구간은 모두 페달로 주행하고, 오르막

서도 동력 보조를 최소화해 전비를 극한까지 ‘쥐어짠’ 결과다. 정선부터 평창까지 전기의 도움을

받으며 근심 없이 달리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종합하면 체력 소모는 일반 자전거 여행보다 근소하게 낮은 수준이었으나, 배터리 잔량에 대한 부담

때문에 속 편하게 여기저기 둘러볼 마음의 여유는 생기지 않았으니 전기자전거는 출퇴근이나 단거리

이동에 적합하다는 게 결론이다.

 

필자는 배터리를 아끼느라 건너뛴 지점을 살펴보기 위해 정선을 다시 찾아야 했다. 첫 방문은 폭염,

재방문은 폭우와 무더위가 겹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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