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사는 지리산 동남쪽 끝자락 마지막 봉우리인 웅석봉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소나무와

잣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매우 소담한 절이다.

 

주지 여경 스님이 처음 이 절터와 인연이 되어 도량 창건의 원력을 세우고 기도하던 중 상서로운

금색 기운이 도량 전체를 감싸 안았다고 한다.

 

절 앞으로는 정수산과 마주하며, 황매산이 보이고 뒷산 능선 너머에 지리산 정상 천왕봉이 자리한

도량이다.

 

큰 절도 아니고 창건이 오래되지 않아 보물과 문화재는 없지만, 매우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절이다. 108배 예불, 참선 명상 등을 경험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가 주요 체험 프로그램이다.

수선사(修禪寺) 위치도.

수선사(修禪寺)

▲경남 산청군 산청읍 지리산 웅석봉 아래에 자리 잡고있은 산청 수선사입니다 수려한 자연

환경속에 전통문화와 일본색채도 가미되어 공존하고 있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수선사는 정갈하고 단아한 풍광을 자랑하는 절집으로 특히 연못과 정원을 아름다게

조성해 놓아 불자와 이곳을 찾는 방문객의 휴식처이며 힐링할 수 있는 쉼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느 유명한 사찰들 처럼 오랜 역사도 없으며 보물과 문화재도없는 절집이지만 연꽃필때

가장 예쁘다는 풍경들이 매력적입니다 수선사는닦을 수(修)와 고요할 선(禪)자를 써서

마음을 닦는 좌선의 장소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리산 웅석봉 기슭에 위치허고 있지만 바로 아래쪽에 주차장이 있어 접근성도

좋습니다

강원 속초 청호동 부두. 아바이마을. 아바이갯배. 속초관광수산시장.

▲강원도 속초시의 청호동의 속초 아바이마을로 가기위해 청초호 부두에서 아바이마을을 오가는

갯배는 옛 교통수단으로 지금까지도 운영되며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의 아바이마을이 형성된 유래는 한국전쟁 1,4후퇴 당시 국군을 따라서 피난을 내려왔었던

함경도 사람들은 금방 돌아갈것으로 일았지만 고향으로 돌아 갈수없는 상황이 되자 고향과

가까운 북한땅에 인접하여 있는 이곳 속초해변으로 모여서 살게되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습니다 

▲속초의 현지 사람들이 이곳을 부를때 함경도 사람들이 쓰는 사투리인 아바이를 따와서

아바이마을이라고 현재까지 부릅니가 하지만 이곳의 행정구역상의 주소는 속초시

청호동입니다

 

아바이마을로 수로를 오가는 무동력 갯배가 알려진 것은 예전의 유명한 드라마인 가을

동화에서 송혜교가 갯배를 타고서 수로를 건너는 모습으이 드라마에 방영되자 많이

알려졌으며 이후에도 1박2일 같은 예능프로의 방영으로 유명세를 현재까지 누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속초관광수산시장도 함께 둘러봅니다

 

◆속초 관광수산시장▼

제주시 성산포 성산포항 종합 여객 터미널 & 우도해수욕장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에 위치한 성산포항 종합 여객 터미널에서 배를타고 우도로 들어

갑니다 성산포항에서 우도까지는 뱃길로 약 20분정도 소요되는거리에 위치합니다

 

이곳에서는 제주의 인근 도서 지역인 우도를 비롯하여 육지인장흥으로 여객 수송도 이루어지며

우도와 성산 일출봉 등 인근 수역을 찾는 관광객을수용하고 있습니다.

 

우도에 들어가는 관광객은 65세 이상의 노약자를 동행하는경우에만 차를 싣고 들어갈수는 있습니다

이는 우도내에 교통 혼잡도가 높아서취해진 조치이며 우도 내에는 순환 셔틀인 하얀버스를 운행

하고 있습니다 삼륜오토바이 대여하는 영업도 하고 있지만 좁은 도로가 혼잡하여 사고도

잦다고합니다.

▲어찌 되었든 우도 관광은 하얀 버스로합니다 가장 먼저 서는 정류장은 제주시 우도면 오봉리에

위치한 하고 해수욕장입니다 제주도 동쪽 끝인 성산포에서 북동쪽 방향의해상에 위치한 화산섬

우도에 자리한 해수욕장입니다.

 

우도 북동부에 있는 하고수동자연 마을로 앞바다의 수심이 얕아서 가족 단위 피서객애게 인기가

높으며 모래사장도곱고 부드럽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위치한 달콤아재의 아이스크림이 유명

합니다.

광주지역의 대표적인 불교도량 무등산 증심사(證心寺)

▲ 증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증심사는 광주지역의 

대표적인 불교도량으로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통일신라 때 고승 철감선사 도윤이 9세기 중엽에 세운 절로 고려 선종 때(1094년) 혜소국사가 

고쳐 짓고 조선 세종 때 김방이 삼창하였는데 이때 오백나한의 불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석경·수장·도광의 3대 선사가

 4창했다고 한다. 그 후 신도들의 정성으로 몇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6 ·25 전쟁

 때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가 1970년에야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복구되었다.

 

증심사의 유물로는 오백전과 비로전(사성전)에 봉안된 철조비로자나불 좌상(보물), 신라

말기의 석탑인 증심사 삼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범종각,각 층의 4면에 범자가 새겨진

범자칠층석탑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특히 오백전은무등산에 남아 있는 사찰 건물들 중 현재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세종 25년)의

건물로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과 계통을 같이 하는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단층 맞배지붕의

다심포 양식으로 그 희귀성이 돋보인다. 

 ▲1986년 11월 1일 광주문화재자료로지정되어 있는 사찰이다. 다양한 템플스테이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체험프로그램이 있다. 

▲승탑군(浮屠)

현존하는 당우로는 1989년 광주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오백전(五百殿)과 대웅전 · 지장전

(地藏殿) · 비로전(毘盧殿) · 적묵당(寂默堂) · 종각 · 일주문 ·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오백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천왕상(四天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증심사 전각 배치도.

▲대웅전(大雄殿)

▲대웅전(大雄殿) 법당 내부

▲1933년의 보수 때 탑내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 입상 등이 나왔던 오층석탑(좌),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칠층석탑(우) 등이 있다.

 

특히,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1972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삼층석탑, 

▲비로전(毘盧殿)

▲비로전 안에 안치된 높이 90㎝ 정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철불은 본래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에 옮겨온 것이다.

▲철조비로자나불 좌상

▲삼신각

▲오백전은무등산에 남아 있는 사찰 건물들 중 현재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세종 25년)의 건물로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과 계통을 같이 하는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단층 맞배지붕의 다심포

양식으로 그 희귀성이 돋보인다. 

▲비로전 내부 오백나한상

▲원통전(圓通殿)▼

▲대웅전(大雄殿)

▲대웅전(大雄殿)

▲대웅전(大雄殿) 내부

▲대웅전(大雄殿) 내부

▲범종각(梵鐘閣)

전북 전주 사적 288호 전동 성당 & 사적 제379호 전주 향교

▲전주 한옥 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제288호인 전주 전동 성당

 

전동 성당은 건축 면적이 약 624 m2 규모를 지닌 성당으로 이곳은천주교 신자의 첫 순교지로

현재의 전동 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풍남문 밖에 있었던 사형장이였습니다

 

천주교인 순교터를 1889년에 한국으로 선교를 위해 들어온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소속인

보드네(한자명 尹沙物) 신부가 이곳 사형장 터를 성당을 지을  부지로 매입을하여 1908년에

V.L.프와넬(한자명 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전동성당이 지어졌습니다

 

이곳전동 성당은 호남 지방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 가운데에 가장 큰 규모이며 제일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전주 전동 성당 위치도.

1891년(고종 28) 보두네(Francis Baudounet) 신부가 전주 남문 밖에 집을 매입하고 정착하였다.

그 뒤 1908년 프와넬(Poisnel) 신부의 설계로 성당 건축에 착수하여 1914년에 준공을 보았다.

 

벽돌로 된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 건물은 서울의 명동성당과 외양상 유사한

점이 많으나 건축양식상으로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회색과 적색의 이형(異形) 벽돌을 사용하여 섬세한 모양을 꾸며낸 점은 같으나 반면에 아치의

모양이나 종탑의 양식은 전혀 다르다.

▲내부 열주(列柱)는 8각의 석주(石柱)로 되어 있으며, 정면 중앙의 종탑부는 12개의 채광창을

돌린 12각형 고상부(鼓狀部) 위에 12각의 총화형(葱花形)으로 된 둥근 지붕을 얹었고,

좌우에는 그보다 약간 작은 8각형의 고상부 위에 8각의 지붕을 얹었다.

 

두툼한 외부 벽체와 반원아치의 깊숙한 창이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고딕

양식의 명동성당이 내부 열주 사이를 뾰족한 아치로 연결한 아케이드인 데 반하여, 이 성당은 8각

석주 사이가 반원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이 성당은 건평 189평에

대지 4,000평이며, 전주 중앙본당이 1956년에 준공되기 전까지는 전주교구 주교좌성당이었다.

1981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동성당 경내 피에타 상

사적 제379호 전주향교

▲전주 한옥 마을내에 자리한 사적 제379호인 문화재 전주 향교로 이곳은 조선시대 태종10년에

현재의 경기전의 근방에 처음으로 전주 향교가  지어졌으나 선조36년에 관찰사였던 장만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을 시킵니다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한 16동의 건물축들이 배치가 되어있습니다 여느 향교에 비하여 전주

향교의 특이점은 전국의 향교중 유일하게 종자와 맹자와 증자와 안자 아버지에 위패를 봉안해

놓은 계성사가 있습니다  

 

또한 대성전과 동무와 서무에도공자를 주벽으로 해서 50현의 위패가 봉안 되어 있습니다

또한 장판각에는 주요 서적과 함께 ​9천6백여점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곳 전주 향교

의 백미로는 향교 마당 380여년 수령의보호수인 은행 나무가 그 멋진 위용을 자랑합니다

또한 이곳 전주 형교는 드라마와 영화촬영에단골 명소입니다. 

▲만화루(萬化樓)

 

고려 말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

되었다.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慶基殿) 근처였으나 태조(太祖) 이성계의 수용

(晬容)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준공되자 1410년(태종 10)전주성의 서쪽

황화대(黃華臺) 아래로 이전하였다.

▲일월문(日月門)

 

그 뒤 1603년(선조 36) 순찰사 장만(張晩)이 좌사우묘지제(左社右廟之制)에 어긋난다 하여

조정에 보고, 왕의 재가를 받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654년(효종 5) · 1832년(순조 32) ·

1879년(고종 16) · 1904년에 중수하였고, 1922년에 명륜당을 보수하였다.

 

그 뒤 만화루는 1886년(고종 23)에 홍수로 수몰되었고, 책판고는 관찰사 조한국(趙翰國)이 관고

(官庫) 소유 책판을 전주향교로 이장하여 책판고 내에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1920년의

홍수와 1950년 6 · 25전쟁으로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9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봄 · 가을에 석전(釋奠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대성전(大成殿)

◆​전주 남부 시장

전주는 예부터 물산이 풍부해서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땅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전국에 장이

개설되는 초창기부터 많은 시장이 문을 열었다. 당시 전주성 4개의 성문마다 장이 개설되었는데,

그중 남문장과 서문장이 큰 시장이었다.

▲1907년에는 서문이 헐리고 일본인들이 그 일대를 장악해 공설시장을 세웠다. 이후 1923년

서문장이 남문장과 통합되었고, 1928년에는 공설시장이 남문장과 통합되면서 전주를

대표하는 남부시장이 탄생했다.

 

한편 전주에는 지리산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팔기 위해 형성된 약령시가 유명했는데, 일제 때

폐지되고 말았다.

▲한동안 침체기를 겪던 남부시장은 2000년대 들어서 변화를 도모하며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시장 2층에 청년몰을 만들어 젊은이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전주의 대표 관광지인 한옥

마을과 연계해 야시장을 열며 관광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과거 남부시장 인근에 섰던 노점들을 새마을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정비해 시장 특유의

활력을 찾고 있다.

▲전주 남부 시장 위치도.

 

금빛 억새·초록 습지’ 유화같은 횡성호…가을의 문턱, 짙어져가는 풍경을 찾아서

▲초가을 이른 아침에 횡성호 습지에서 만난 풍경. 횡성호 습지에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아침 볕이 스며들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가을이 더 깊어지면 횡성호반에는

더 자욱한 안개가 낀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 횡성

 

오전 여섯 시. 횡성호 상류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물길을 낀 습지 위로 안개가 고이듯 내려

앉아 산자락까지 지워 버렸다. 갓 떠오른 해가 산등성이를 넘자 안개 사이로 오렌지 색깔의 빛이

비껴들었다.

 

억새가 일제히 금빛으로 일어서고, 밤새 이슬을 머금은 풀들이 저마다 반짝였다. 그래 봐야 딱 10분

쯤이었을 것이다. 안개는 이내 스러졌고, 습지는 다시 평범한 초록으로 돌아갔다.

 

이런 아침을 보겠다며 작정하고 나섰던 건 아니었다. 사실, 이즈음의 여행은 계획이란 걸 세울 것도

없다. 무얼 꼭 봐야겠다고 정하지도, 어디를 빠뜨리면 안 된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된다.

 

폭염의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 부는 ‘좋은 날’이 계속되고 있다. 이럴 때는 어디를 가도 그냥 다

좋다. 여행하기에는, 정말로 좋은 계절이다.

 

‘어디든 다 좋을 때’ 가는 곳의 목록에서는 ‘평소에도 좋은 곳’은 빼는 게 좋겠다. 평상시에는 매력이

좀 덜한, 그래서 호젓한 곳이 지금 가면 딱 좋을 곳이다.

 

그렇게 고른 곳이 강원 횡성이다. 횡성은 ‘일상의 내륙’과 ‘여행지 강원’을 가르는 경계다. 영동고속

도로원주나들목까지는 ‘일상의 도시’ 느낌이다. 경계는 횡성의 새말이다. 새말나들목을 지나야

비로소‘여행의 영역’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횡성에는 뭐가 있을까. 횡성 한우 말고는, 금방 답이 안 나온다. 20여 년 전쯤 횡성군이 ‘횡성 팔경’

정한 적이 있다.

 

그때 뽑은 팔경이 다음과 같다. 병지방계곡, 태종대, 삼형제바위, 풍수원성당, 횡성온천, 민속 장터,

안흥찐빵 마을, 횡성댐. 지금은 물론이고, 행정이 팔을 걷어붙였던 그때도 횡성 팔경을 아는

이들이 없었다. 문제는 홍보가 아니라 ‘공감’이었다.

 

횡성의 명소는 다들 고만고만하다. 첫손으로 꼽을 만한 압도적인 곳이 없다. SNS에 넘쳐나는 복제

여행정보만 봐도 사정을 알 수 있다.

 

‘횡성 팔경’이니 ‘가 볼 만한 열 곳’이니 하는 콘텐츠의 내용이 저마다 다르다. 개중에는 몇 해째

문 닫은 온천을 ‘제4경’으로 올려 둔 콘텐츠도 있다. 이맘때 횡성 여행에서 꼭 가 봐야 할 곳이란

건 없다.

 

순서를 따라 짚어 갈 일도 아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왜’냐고 묻지 않기로 한다. 제안하는 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다니는 여행’이다. 가을볕이 좋으니까.

▲가을비 촉촉하게 내리는 날의 풍수원성당. 초기 풍수원성당을 재현한 초가집 툇마루에서 비를

피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 귀퉁이에 초가지붕이 걸렸다.

 

◆촉촉하게 비에 젖은 성당

 

풍수원성당을 먼저 갔다. 서원면 유현리, 6번 국도를 따라 양평에서 강원도로 막 접어들면 나오는

자그마한 산골 마을이다. 성당 외벽은 붉은 벽돌이 비에 젖어 색이 짙어졌다.

 

마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성당 앞을 넓게 가리고 서서, 젖은 잎에서 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1910년 봉헌식 때 심었다는 나무니까 그 자리에 심긴 지 116년이 됐다.

 

성당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성당 안의 공기가 서늘했다. 종교를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오래된 성당에 들면 마음이 가지런하게 정돈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깊은

산중의 오래 묵은 절집에 들었을 때와 다르지 않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성당의 내력이 만만치 않다. 1802년 신태보 베드로를 비롯한 40여 명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양평을 떠나 여드레를 헤맨 끝이었다. 그때만 해도 풍수원은 사람 그림자 구경하기

어려운 오지였다고 했다.

 

신유박해로 쫓기던 신자들은 ‘여기라면 들킬 염려가 없다’고 생각했다. 신앙 공동체를 이룬 이들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 그리고 신부 없이 기도하며 80년을 버텼다.

 

1888년에야 작은 한옥 초가집 본당을 가졌고, 1896년에는 정규하 신부가 부임했다. 그는 47년을

여기서 주임신부로 살았다. 성당을 지으려고 신자들이 엽전 1만5000냥을 모았는데, 정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 돈을 가지고는 부족한데 교우들은 짓기를 재촉합니다.” 완공을 앞두고 보낸 편지에는 또

이렇게적었다.

 

“돈이 넉넉지 못하여 잘 짓지는 못했습니다.”

 

잘 짓지 못했다고 했으나, 성당은 근사하다. 소박하면서도 품격 있다. 박해받던 이들의 신심과

지극한 마음을 대들보로 삼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성당은 의미가 깊다.

 

이 성당은 한국인 사제가 지은 최초의 성당이자,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십자가의 길에서 만난 묘

 

성당 뒤편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열네 장면을 새긴 돌비석이 숲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비 온 뒤라 숲이 유난히 청량했다. 젖은 흙냄새가 짙었다. 걸음이 절로 느려지는 길. 비석 하나를

보고몇 걸음 걷고, 또 하나를 보고 몇 걸음 걷는다. 새소리와 나뭇잎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십자가의 길 끝에는 사제들의 묘가 있다. 풍수원성당의 주임신부로 47년을 살았던 정 신부의

있고, 그를 이어 부임했던 사제들의 묘도 있다. 그런데 사제 묘 뒤쪽의 후미진 자리에 봉분

없는 평장 묘가 하나 있다. 조이분 마리아 할머니의 묘다.

 

1891년에 태어나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아홉 살에 민며느리로 보내졌다. 시가에서는 시어

머니의 학대와 구타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고관절이 파열돼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렇게 쫓겨나

이곳저곳 전전하다 풍수원에 닿았다.

 

남의 아이를 봐 주고 살림을 거들며 지내던 그에게 정 신부가 문간채를 내주고 쌀을 조금 지원해 줬다.

그러자 그는 고아와 장애인 일곱을 데려다 함께 살기 시작했다. 산나물을 뜯고 땔감을 손수 장만해

가며 그들을 먹였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웠을 그가 쌀이 조금 생기자 일곱을 거뒀다.

 

그 뒤로도 고아 넷을 돌보고, 반신불수와 중증 치매인 두 할머니에게 밥을 떠먹이고 대소변을 받아 냈다.

6·25 때는 피란도 가지 않은 채 성당의 성물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어 지켜 냈다.

 

동네 노인이 임종할 때면 며칠씩 밤을 새워 곁을 지켰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던 할머니는 1971년에 눈을

감았다. 예수가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걸어간 길. 풍수원성당 십자가의 길 끝에는 조이분 마리아가

묻혀 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잘 알려진 순례 명소지만, 신도가 아니더라도 풍수원성당은 꼭 가 보길 권한다. 평화

로움으로 가득한 충만한 가을날이라면 더 그렇다. 비신도가 성스러운 종교 공간을 여행 목적지로 삼는

것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풍수원성당 일대는 2003년 유현문화관광지로 지정됐다. 성당 뒤쪽에 수목원을 조성하고, 유물전시관

열었으며, 옛 여관 격인 원(院)을 복원해 놓았다. 성당 말고도 천천히 돌아볼 것들이 있다는 얘기.

관광지라곤 하지만 ‘이렇게 한산해도 될까’ 싶을 정도의 고즈넉함이 가장 큰 매력이다.

 

◆호수에 잠긴 다섯 마을

 

횡성호에 간 건 이른 새벽이었다. 전날 내린 비로 산허리마다 구름이 걸렸고, 젖은 숲에서는 김이 오르듯

안개가 피어올랐다. 아침 햇살이 퍼지면서 펼쳐지는 호수 주변 습지 풍경은 마치 인상파 화가가 유화

물감을 두껍게 발라 그린 그림 같았다.

 

가을 초입의 풍경이 이럴진대, 하루하루 가을 색이 더 짙어지면 얼마나 더 근사해질까.횡성호는 2000년

횡성댐 완공으로 생긴 인공호다.

 

섬강 줄기의 계곡을 막아 물을 가두면서 갑천면의 다섯 마을이 물에 잠겼다. 구방리, 중금리, 화전리,

부동리, 포동리. 253세대 938명이 고향을 떠났다. 호숫가 망향의 동산에 자료관이 있다.

 

떠난 이들이 생활 용구와 기록 사진을 모으고, 수몰 전 마을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두었다. 전시된

마을이야기를 읽다 보면 잠긴 것이 논밭과 집터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물에 잠긴 포동리에는 예순 해쯤 전까지 열 명을 태우는 나룻배가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었다. 부동리는

봉우리 정상의 큰 바위 셋이 가마솥을 닮아 가마골이라 불렸고, 1500마지기 넘는 들에는 농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중금리에는 짝바위, 숲밖에, 군량골, 아랫말, 대문안골 같은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자료관에는

1997년 48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폐교한 화성초등학교의 사연도 있다.

 

1946년 중금리 공회당에서 아흔네 명의 학생으로 개교했고 6·25 때 잠시 휴교했다가 수복 후 다시 열었

으며 그렇게 오십 년을 이어 오다 수몰로 문을 닫기까지의 학교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횡성호에는 ‘횡성호수길’이 있다. 6개 구간으로 이뤄진 전체 31.5㎞의 걷기 길이다. 처음 길을 낼 때는

지역에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데, 먼저 알아본 관광객들이 밀려들면서 일약 명소가 됐다. 개장

초기 주말마다 몰려든 관광객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주차장을 3배나 늘렸을 정도다.

 

호수를 끼고 도는 걷기 길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건 5구간이다. 전체 구간 중 유일하게 출발했던 자리

되돌아 오는 원점회귀코스다. 전체 구간이 9㎞ 정도로 세 시간쯤 걸린다.

 

5구간도 A코스와 B코스로 나뉘어 있어 각각 4.5㎞씩 걸을 수 있는데, 시간이 넉넉하지 않거나 짧게

걷고 싶다면 B코스를 추천한다.

▲안흥면사무소 앞의 찐빵 가게. 안흥찐빵의 내력은 영동고속도로가 놓이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횡성이 아닌 ‘안흥찐빵’인 이유

 

횡성에는 안흥면이 있다. ‘안흥찐빵’의 그 안흥이다. 면 소재지에 들어서면 찐빵 간판을 단 집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가게마다 김이 오른다.

 

안흥찐빵의 역사는 60여 년이다. 1960년 무렵 심순녀라는 이가 시작했는데, 다섯 남매를 굶기지

않으려고벌인 장사였다. 음식 장사를 하면 팔다 남은 것으로나마 식구들 허기를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고 한다.

 

처음의 찐빵은 팔려고 만든 게 아니라 ‘팔다 남기려고’ 만들었던 셈이다.천안 호두과자이고 경주

황남빵인데, 횡성 찐빵이 아니라 굳이 ‘안흥찐빵’이다.

 

여기에는 명확한 지리적 이유가 있다. 안흥은 조선 시대 안흥역과 실미원이 있던 길목이다. 그 길을

따라 42번 국도가 지나간다. 42번 국도는 영동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버스가 분주하게 다니던 길이었다.

 

42번 국도 안흥면 소재지 서쪽에는 새말로 넘어가는 전재라는 험준한 고개가 있고, 동쪽에는 평창

방림으로 넘어가는 문재가 있다. 전재와 문재 고개 사이에 있는 안흥면은 고개 하나를 넘어온 버스

다음 고개를 넘기 전에 쉬어 가던 곳이었다.

 

힘겹게 고개를 넘어온 차들이 다음 고개를 앞두고 안흥에서 쉬어 가는 사이에 사람들은 찐빵 몇 개로

허기를 달랬다. 지금의 안흥찐빵 명성은 그때 먹던 찐빵의 맛을 기억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고개 대신 터널이 뚫린 지 오래고, 고개를 넘은 차가 쉬어 갈 이유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찐빵집은 안흥

에만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찐빵의 독점 권리를 인정해 줘서 그런 건 물론 아니다.

 

아직도 안흥찐빵을 안흥에서만 사 가는 여행자들을 보면, 찐빵 하나에도 시장논리보다 더 끈끈한 무언

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안흥찐빵과 관련한 또 다른 얘기가 있다. 안흥면 소재지에서 상안리 쪽으로 조금 가면 길가에 벼랑이

하나있다. 삼형제바위다. 주르륵 이어진 산자락이 통째로 바위로 드러났는데, 그 위로 소나무가

얹혀 있다.세 봉우리를 각각 맏이봉, 둘째봉, 막내봉이라 부른다.

 

안내판에 적어 놓은 유래가 재미있다. 길손의 먹을 것을 빼앗던 도깨비 삼 형제가 팥 든 빵을 먹고 바위

굳었다는 것이다. 붉은 팥이 귀신에게 해롭다는 신선의 말을 듣고 현감이 꾸민 일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편안함이 절로 인다’는 안흥(安興)이 되었고, 안흥찐빵은 길손의 필수품이 되었

단다.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얘기다.

 

찐빵의 역사가 60년이고, 밀가루가 흔해진 것도 원조 밀가루가 포대째 들어온 뒤의 일이다. 찐빵이

유명해지고 난 후에 바느질하듯 기워 붙인 이야기일 게다.

▲오원저수지 부근 카페 ‘꼼방’의 내부. 벽 한쪽 전체를 채운 2만 장의 LP를 마음대로 꺼내어 보고

음악을 청해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오래된 명반들이 많다.

 

◆벽을 가득 채운 LP 2만 장

 

안흥에서 42번 국도로 횡성읍으로 가는 중간쯤에 우천면 오원리가 있다. 오원리에는 오원저수지가

있고,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하얀 집이 한 채 있다. 카페 ‘꼼방’이다. 관광지라

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시골 동네인데, 일부러 이 카페를 찾아 여기까지 오는 이들이 있다.

 

카페는 한쪽 벽 전체가 온통 LP다. LP를 꽂은 책꽂이가 천장까지 닿아 위쪽 음반을 꺼내려면 사다리를

놓아야한다. 2만 장쯤 된다고 했다. 가만 들여다보니 작곡가 이름표를 붙여 알파벳순으로 세워 두었다.

 

멘델스존, 오펜바흐, 파가니니, 푸치니,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클래식 음반만 있는 건 아니다.

다른 벽에는 가요 LP를 모아 두었고 국악 음반도 적지 않다.

 

주인은 경기 분당에 살다 퇴직한 뒤, 2018년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왔다. 한창때는 인터넷 동호회

운영하며 오디오를 직접 만들었던 열혈 오디오 마니아 출신이다.

 

그가 모아 놓은 음반은 라이선스판이 아닌 거의 전부가 직수입한 ‘원판’이다. 그걸 그는 ‘그라모폰 노란

딱지’라 불렀다. 노란 딱지 음반은 라이선스 음반 가격의 두 배가 훨씬 넘었다.

 

한창 LP를 사들였던 1990년대 초반, 원판 한 장 가격이 1만5000원쯤 했다. 자장면 한 그릇에 1200원

을 받던 시절이었다.

 

평생을 바쳐 손수 사 모은 2만 장의 LP는 귀한 수집품이다. 모을 때의 수고로 봐도 그렇고, 들인 비용

으로 봐도 그렇다. 유리 진열장 안에 넣어 두고 손도 못 대게 할 법한데, 여기서는 누구나 마음껏

꺼내 보고 원하는 곡을 찾아서 ‘틀어 달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아무렇게나 관리해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 그 얘길 했더니 카페 주인은 “모셔 두기

위해 모은 게 아니라 들으려고 모은 것”이라며 웃었다.

 

이곳에서는 매장에서 직접 볶은 원두로 내리는 진한 향의 핸드드립 커피가 잘 어울린다.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주인이 골라 주는 음악을 들어도 좋고, 추억을 되새길 법한 음반을 직접 찾아 틀어

주길 청해도 좋다.

 

횡성에서 좋았던 건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오래된 성당 마루에 앉아 듣던 빗소리, 물방울 떨어지

숲길을 천천히 걸었던 한 시간, 안개가 걷히며 억새가 반짝이던 10분, 그리고 창가에서 음악을

듣던 오후….

 

애초에 꼭 봐야 할 것도, 빠뜨리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완연한 가을이다. 이런 여행을 하기에 딱 좋은,

축복 같은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카페 ‘노랑공장’

 

횡성읍 옥동리에는 옛 물류창고를 개조해 만든 카페 ‘노랑공장’이 있다. 마당부터 요란하다. 런던

이층버스가 서 있고, 그 옆에 샌프란시스코 올드타운 트롤리가 놓였다. 건물에는 노랑과 검정과

빨강 줄무늬를 칠하고 지붕에는 노란 굴뚝 장식을 올렸다.

 

창고 벽면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액자와 포스터, LP 재킷, 커피 마대자루로 빼곡하다. 앤티크 가구

와 타자기, 다이얼 전화기, 백과사전 전질, 금빛 조각상…. 물건에는 가격표가 붙었다.

카페이자 앤티크 상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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