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 기행ㅡ서산 간월도 간월암(看月庵)과 간월항(看月港)

▲손바닥만 한 바위섬에 암자가 들어앉았다.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됐다가 물이 차면

둥실 떠오른다. 손에 꼽는 서해안 낙조 명소지만, 해 뜨는 풍경도 그에 못지않다.

 

물이 빠지면 간월암은 육지와 연결된다. 바다 건너는 태안 안면도다. 철새 도래지

로 알려진 천수만 북쪽 끝,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자리한 간월암이다.

 

‘달을 보다(看月)’라는 이름처럼 달빛이 내린 밤 풍경도 서정적이다. 일출과 일몰,

달맞이 여행이 모두 가능하다. 이만하면 어디와 견줘도 새해 첫 여행지로 부족

함이 없겠다.건강과 행운을 기원하고 사색하는 곳으로 제격이다.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간월도와 간월암을 둘러봅니다

간월도는 천수만 내에 있는 작은 크기의 섬이였으나 지금은 간척공사로

육지화가 되어있는 이름만 섬입니다 

▲ 이런 간월도의 끄트머리에 아주 조그만 새끼섬이하나가 딸려 있습니다

이곳에는 간월암이란 암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에는하루 2차례의 조수간만에 차이로 바닷물이 빠져 나가면

바닷길이 열려 걸어서드나들수 있는 길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만조시에는 바다위에 떠있는것 처럼보이는 특이한 간월암입니다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습니다

▲또한 이곳은 서해안의 일몰명소로 손꼽습니다 간월암의 입구쪽의 간월항은

예로부터 어족자원이 풍부한 항구로 어리굴젓이 유명합니다 

▲주위 자연경관과 옛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고찰이 어우러져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 시에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 서 있는데 이 행사는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은 청결한 아낙네들이 소복(흰옷)을 입고 마을 입구에서

춤을 추며 출발하여 굴탑 앞에 도착하면 제물을 차려 놓고 굴 풍년 기원제를

지내며 채취한 굴은 관광객에게 시식도 시켜준다.

▲조선 시대 억불 정책으로 폐사됐다가 1941년 만공선사가 다시 세운 사실이 전해온다.

지금은 수덕사의 말사로 많은 여행객이 찾는다.

 

만공선사는 일제강점기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로, 근현대 한국 불교계에 큰 발자국

을 남겼다.

 

수덕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기도 했다. 간월암을 세우고 독립을 기원하는 천일기도

를 드렸는데, 사흘 뒤 해방을 맞았다고 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유명한 성철스님도 만공선사의 권유로 이곳

에서 수행했다.

▲범종(梵鐘)

▲사신각(山神閣)

▲범종각(梵鐘閣)

▲간월암(看月庵)

▲간월암(看月庵)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가 수도 중에 ‘달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

수도를 마친 무학대사가 떠나기 전 앞마당에 떡갈나무를 꽂아 두며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라’고 말했다는데, 정작 그 자리에는 200년 된 사철나무

가 가지를 넓게 펴고 자리를 잡았다.

 

외부에서는 이마저도 보이지 않고, 앞마당과 뒤뜰에 자란 팽나무의 윤곽이 도

드라진다.

언제 보아도 편안한데, 해질 무렵 바다와 하늘이 붉게 물들면 섬 전체가 실루엣

처럼 신비에 싸인다. ​

로마 여행에서 하루 빼고 ‘나폴리’ 당일치기 다녀오기.

▲ 로마에서 고속열차로 약 1시간. 나폴리 중앙역에 도착해 피자로 배를 채운 뒤 스파카나

폴리와 비아 데이 트리부날리를 걷는다.

 

오래된 성당과 공방, 젤라토 가게를 지나 항구의 베수비오산까지 만나는 나폴리 당일

치기 코스다.

로마에서 나폴리까지 가는 길은 걱정할 게 없다. 두 철도 회사를 합쳐 50여 회가 넘게

운행하니 본인의 일정에 맞춰 여유롭게 이동하면 된다.

 

소요 시간은 빠른 건 단 56분 만에 나폴리에 도착하고, 평균적으로 1시간 10~20분 사이다.

해당 노선의 표 가격은 3개월 전 예약 기준으로 대략 편도 14.9유로(약 2만5,000원)

부터다.

▲이탈리아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이탈리아 기차는 빨리 예약할수록 티켓이 저렴하다. 사진은 이딸로(Italo) 내부

나폴리 중앙역에서 구시가지로 향하기 전, 가장 먼저 피자를 맛보고 싶다면 안티카

피제리아 다 미켈레(L’Antica Pizzeria da Michele)가 적당하다.

 

1870년 시작된 나폴리의 상징적인 피자집으로, 중앙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비아

체사레세르살레에 자리한다.

 

메뉴는 마리나라(6.5유로)와 마르게리타(6.5유로)를 중심으로 단출하다. 부드

럽고 얇은 도우에 토마토와 치즈, 바질을 올린 정직한 한 판이 오랜 역사를

설명한다.

 

대기 줄이 꽤 긴 상황이 많으므로 당일치기라면 조금 이른 시간에 방문하는 편이

좋다

▲오리지널 나폴리 피자

▲클래식한 피자와 셰프의 독창적인 메뉴를 함께 경험하고 싶다면 10 디에고 비탈리아노

피제리아 산타 루치아점(10 Diego Vitagliano Pizzeria Santa Lucia)을 선택하자.

 

마리나라와 마르게리타, 튀긴 도우를 활용한 몬타나라, 칼초네 같은 전통 메뉴를 기본으로

마르게리타와 마리나라의 특징을 조합한 ‘마르게리나라’, 라구를 활용한 피자 등 현대적인

변주도 선보인다. 산타 루치아 거리 안쪽에 있어 항구 산책과 연계하면 훌륭한 코스가 된다.

나폴리 중앙역에서 걸어 역사 지구로 들어서면 스파카나폴리(Spaccanapoli)와 비아 데이

트리부날리(Via dei Tribunali)가 도시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스파카나폴리는 하나의 정식 도로명이 아니라, 지도를 펼쳤을 때 도시를 반듯하게 쪼개는

것처럼 보이는 옛길을 부르는 이름이다.

 

산 비아조 데이 리브라이 거리 등이 이 길을 구성한다. 그 북쪽의 비아 데이 트리부날리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중심도로였던 데쿠마노 마조레(Decumano Maggiore)의

흐름을 대부분 이어간다.

▲스파카나폴리(Spaccanapoli)

두 길 사이는 프레세페 공방으로 유명한 산 그레고리오 아르메노 거리(Via S. Gregorio

Armeno)가 연결한다.

 

모든 거리는 성당과 오래된 건물, 피자집, 길거리 음식점, 공예품점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고 성인 그림과 마라도나 벽화가 한 풍경 안에 섞인다.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걷기보다 골목 사이로 방향을 바꾸며 나폴리의 생활을

구경하는편이 재미있다. 다만 보행자와 스쿠터가 좁은 길을 함께 이용하므로

사진을 찍을 때도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


*프레세페 공방 : 예수 탄생의 구유 장면인 '프레세페(Presepe)' 장식과 정교한

테라코타 인형을 손수 제작하는 나폴리의 전통 공방

▲나폴리 대성당

 

비아 데이 트리부날리를 걷다가 비아 두오모로 방향을 틀면 나폴리 대성당이 나타난다.

산타 마리아 아순타에게 봉헌된 성당이자, 나폴리의 수호성인 산 젠나로의 유물과

피를 보관한도시 신앙의 중심이다.

 

성당 내부뿐 아니라 산타 레스티투타 대성당과 산 조반니 인 폰테 세례당도 함께 둘러

볼 만하다.

 

기본 관람은 무료이며, 약 40m 높이에서 돔과 구시가지를 보는 ‘500 Cupole’ 옥상

체험(6유로)도 경험할 수 있다.

▲더 나폴리타너-나폴리 일루스트라타(The Napolitaner-Napoli Illustrata)는 잡지

표지를 연상시키는 감각적인 일러스트로 나폴리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프로젝트다.

 

이곳에서는 작품을 인쇄한 포스터와 엽서, 티셔츠, 가방, 퍼즐 등을 구경하고, 구매할 수 있다.

피자와 빨래, 베수비오산, 마라도나처럼 익숙한 나폴리의 이미지를 재치 있게 재해석해

전형적인 관광 기념품과는 다른 선물을 찾을 때 특히 유용하다.

▲구시가지의 소리와 인파를 구경하며 느긋하게 쉬고 싶다면 젠나리노 1963

(Gennarino1963)의 야외 좌석이 제격이다.

 

카페와 젤라테리아를 겸하는 캐주얼한 공간으로 에스프레소와 젤라토부터 맥주,

페이스트리와 간단한 먹거리까지 폭넓게 갖췄다.

 

거창하게 식사하기보다 시원한 맥주나 젤라토를 주문해 거리를 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노천 테이블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도 나폴리 도보

여행의 일부가 된다.

▲1840년부터 이어진 가족 공방 프라텔리 카푸아노 달 1840(Fratelli Capuano dal 1840)

을 찾아보자.

 

나폴리의 크리스마스 전통인 프레세페, 즉 예수 탄생 장면을 구성하는 인형과 건축물,

생활 소품을 손으로 만들고 채색한다.

 

종교적인 인물뿐 아니라 상인과 요리사, 음악가처럼 나폴리의 일상을 닮은 작은 인형도

있어 공방 자체가 하나의 미니어처 박물관처럼 느껴진다.

▲나폴리 기념품 마그네틱.

 

기념품점에서 쉽게 보이는 붉은 고추 모양은 사실 ‘코르니첼로(Cornicello)’다. 단단

하고 구부러진 붉은 뿔 모양으로 액운을 막고 행운을 부른다고 믿는 나폴리의

부적이다.

 

검은 가면을 쓰고 도둑처럼 보이는 캐릭터는 풀치넬라(Pulcinella). 흰옷과 검은 반가면

이 특징인 나폴리 전통 희극의 주인공으로, 고단한 현실을 재치와 웃음으로 헤쳐 나가는

서민을 상징한다. 자석과 가면, 작은 인형 형태라 부담 없는 기념품으로도 좋다.

 

◆나폴리 항구에서 완성하는 당일치기

 

구시가지 산책을 마쳤다면 무니치피오역(Municipio) 방향으로 이동해 나폴리항까지

여행을 이어가면 좋겠다.

 

역 주변에는 누오보성과 유서 깊은 극장이 모여 있고, 항구에서는 푸른 나폴리만 너머

로 베수비오산을 볼 수 있다.

또 푸니쿨라(또는 지하철)를 타고 보메로 언덕의 산텔모성(Castel Sant'Elmo)까지

올라가야 한다.

 

항구와 구시가지, 베수비오산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풍경은 나폴리 당일치기의 강렬

한 마지막 장면이 되니 말이다.

 

◆나폴리 필수 스폿

 

ㆍ나폴리항 : 푸른 나폴리만과 베수비오산이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바다 전망 포인트.
ㆍ무니치피오역 : 고대 항구 유적과 현대 건축이 겹쳐진 나폴리의 ‘예술 지하철역’.
ㆍ누오보성 : 다섯 개 원형 탑과 흰 대리석 개선문으로 항구를 지켜온 나폴리의 요새.
ㆍ메르카단테 극장 : 1777~1778년에 ‘테아트로 델 폰도(Teatro del Fondo)’로 태어

난 유서 깊은 국립극장.
ㆍ산텔모성 : 바다와 구시가지, 베수비오산을 360도로 굽어보는 나폴리 최고의 전망대.

이 길 소문나면 곤란한데...

신령이 노닐던 땅, 경주 낭산(狼山) ‘왕의 길’을 걷다.

​

▶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진평왕릉 7㎞

▲경주 낭산 소나무숲 너머로 선덕여왕릉이 보인다.

 

야산과 들녘, 바다와 강마다 길이 없는 곳이 없다. 바위틈에 산책로가 있고,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길도 있다. 수많은 길 가운데 걷기 좋은, 할 이야기가 많은, 그러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는 건 쉽지 않다.

​

만나는 지인마다 좋은 길을 추천받으며 후보군을 추리던 때, 경주에서 나고 자란 지인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경주에 낭산이라고 있는데.” 순간 고민했다. ‘경주 남산’을

잘못 쓴 것인가.

​

답 없는 대화창에서 마음을 읽었는지 다시 메시지가 꽂혔다. “남산 아니고 낭산.” 습관

처럼 당장 그 낯선 이름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했다. 당돌한 사이트는 제멋대로 ‘남산’

으로 고쳐 찾은 내용을 띄운다. 아직 소문이 덜 난 곳은 분명하다.

▲경주 낭산의 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진평왕릉 7㎞ 구간.

 

시작부터 갈림길이다. 입구로 되돌아가 ‘사천왕사지’를 보고 산을 오를 것이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것이냐. 큰 의미는 없다. 걷다 보면 결국 다 이어진다. 사천왕사와

선덕여왕의 관계 그대로다.

​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단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중심

인 수미산 중턱에 있는 도리천. 사천왕이 지킨다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 리 없는 신하들

의 어리둥절한 물음에 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 답했다고 한다.

​

그가 죽고 30년 뒤에 낭산의 들머리, 왕릉의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덕여왕의 세 가지 선견지명 중 하나란다. 자기실현적 예언이다.

▲경주 낭산 입구에 있는 선덕여왕릉주차장.

​

경주 낭산은 남경주 나들목(IC)에 내려, 불국사를 지나 경주 중심가에 다다르기 전에

있다. 나지막한 낭산은 그 이름보다 정상에 자리한 선덕여왕릉이 더 유명하다.

​

7번 국도에 선덕여왕릉 표지판은 있어도 낭산은 없다. 주차장 이름도 선덕여왕릉

주차장이다. 주차장 한켠에 있는 화장실은 소박하지만 소중하다. 앞으로 1시간

동안은 보기 힘들다.

▲경주 낭산 아래 있는 사천왕사지 가운데 서탑지.

​

사천왕사지는 말 그대로 절터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찰이라

는데, 황량한 터를 지나면서 그 규모만 가늠할 뿐이다.

​

사천왕이 지키는 도리천, 그곳에 잠든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은 한겨울에도 푸르다.

앙상한 나무들이 애처롭기까지 한 주변과는 다르다. 우거진 소나무 덕이다.

▲경주 낭산 입구.

 

이곳 소나무에는 아직 재선충병이 창궐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복 받은 땅’이

다행히 지켜지나 보다.

 

실성왕 12년, 낭산에 누각처럼 생긴 구름이 일어난 것을 본 왕은 신령이 내려와 노니

는것이라 여기고, 이후로 이 산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

“아, 그래서 여기 나무들이 좋네.” 산을 내려오다 입구에 적힌 안내문을 보던 한 중년

이 말했다. 오를 때는 보지 못했나 보다.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

 

낭산은 산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나지막한 구릉이다. 소나무 사이로 적당히

경사진 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선덕여왕릉에 이른다. 볕이 잘 드는 곳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곳만 구멍이 뻥 뚫려 있을 것 같다.

​

문득 살아서도 한 몸 편히 지낼 곳이 없는 만민이 스친다. 죽어서도 이 넓고 양지

바른땅을 차지한 왕의 핏줄이 새삼 심술스레 꽂힌다.

▲경주 낭산 정상부에 있는 선덕여왕릉.

​

문득 안쓰럽기도 하다. 최초의 여왕은 살아있는 동안 늘 그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재위

중에 백제와의 전쟁에서 낙동강 서쪽 지역을 잃으면서 그 위기는 정점을 찍었다.

​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비담이 일으킨 반란 속에 세상을 떠난 그의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비담. 익숙한 이름이다. 2009년 문화방송(MBC) 드라마 ‘선덕여왕’

에서 배우 김남길이 연기했던 인물이다.

​

주인공인 선덕여왕보다 악역인 미실이 더 눈길을 끌었던 드라마다. 이 드라마가 인기몰

이를 하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

낭산에 대한 관심도 반짝했지만, 금새 시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분 만에 도착한

선덕여왕릉에서 한참 방황했다.‘이게 다야?’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 뒤편에 능지탑지로 가는 길 이정표가 있다.

​

앞서 도착한 이들이 되돌아가고, 뒤이어 온 이들도 발길을 돌리던 참이다. 왕릉 뒤쪽

으로 ‘능지탑지’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마른 솔잎과 흙으로 뒤덮인 길이

희미하게 보인다.

​

친절한 길은 아니다. 해우소도 없고, 목을 축일만 한 곳도 없다. 짧은 숲길을 따라

걷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 길이 맞나?’

​

마주 오던 이에게 물어본다. “낭산은 어디까지인가요?” 동네 마실을 나온 가벼운

옷차림새의 그는 왠지 이 일대를 훤히 꿰뚫고 있을 것 같다.

​

“여, 전부 다 산이지.” 그가 자신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아무렇게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이다. “이쪽으로 쭉 가면 된다는 거죠?”

​

초행길을 거듭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확신의 끄덕임을 남기고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멀어졌다.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에서 능지탑지로 가는 소나무숲길.

​

안심하고 걷다 보니 또 갈림길이다. 일단 ‘능지탑지’란 이름을 따라 왔으니 왼쪽으로

꺾었다. 본래 5층탑이었을 능지탑은 신라 문무왕을 화장한 곳으로 추정된단다.

​

문무왕은 왕릉을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라며 화장을 지시했다고 한다.

실용적인가 싶다가도 산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하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동해 용왕이 됐다는 전설의 주인공답다.

▲경주 낭산자락에 있는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된다.

▲바위에 새겨진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능지탑 터를 지나면 중생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사찰 안쪽 바위에서 낭산 마애

보살삼존좌상을 만날 수 있다. 가운데 지장보살이 온화하게 웃고 있고, 좌우로

무장한 수호신이 있다.

​

표면이 거칠어 삼존상을 뚜렷하게 보기는 힘들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보다 한발

떨어져 보는 게 더 낫다.

▲경주 낭산 둘레길을 따라 진평왕릉으로 가는 길.

 

걸어온 길을 되돌아간다. 갈림길에서 이번엔 오른쪽이다. 산불에 취약한 겨울, 낭산은

더이상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보도블록으로 바닥이 잘 포장된 길을 따라 걷는다. 살짝 올라가는 길인가 싶더니

내리막이다.

​

훤히 뚫린 시야가 시원하다. 백이들과 보문들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논이다. 곧 있으면

모내기를 할 것이다. 여름이었다면 논두렁의 찰방찰방한 물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가을이었다면 보기만 해도 풍요로운 황금들판일 터였다.

▲경주 낭산 들머리를 빠져나오면 백이들과 보문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들녘이

끝나는 곳에 진평왕릉이 있다.

​

저 멀리 진평왕릉이 보인다. 들녘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 시간은 평온하다. 오르락

내리락도 없다. 완만하게 굽이진 길은 기울어짐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가올 수확을

위해 쉼의 시간을 보내는 땅은 고요하다.

​

농기계 바퀴자국이 선명한 길을 따라 걸으며 옆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나무에나란히 걸터앉은 까치와 까마귀가 추임새를 넣는다. 텅 빈 논을 보며 배가

고프다고 투정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주 진평왕릉과 주차장을 잇는 작은 나무다리.

 

선덕여왕릉이 낭산 정상에 홀로 외로이 있다면, 그의 아버지 진평왕의 능은 좀 더 따뜻한

분위기다. 다른 왕릉처럼 모여있지도 않은데, 사람들과 함께하는 느낌이다.

​

길 건너 마을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카페도

있다. 죽은 이의 무덤이 산 사람의 공간과 어우러져 있다.

▲아름드리 나무들로 둘러싸인 경주 진평왕릉 주변으로는 산책로가 아기

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다.

▲경주 진평왕릉.

​

진평왕릉은 나들이하기 좋은 곳으로 이미 유명하다. 아름드리 고목이 작은 숲을

이루는 왕릉 주변에는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다.

​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도 있다. 봄이면 벚꽃이 예쁜 곳이다. 숨겨진 벚꽃 명소

를 소문내는 마음이 괜히 미안해진다.

​

논길을 돌아 다시 선덕여왕릉으로 간다. 오던 길과 다른 길을 걸으려니 꺾이는

길이꽤 거칠다. 왕이 될 운명인 딸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이리도 어지러

웠을까.

​

죽어서도 아버지의 곁에 머물고 싶어 낭산을 택한 딸의 마음이 교차한다. 올 때

마음이 갈 때의 그것과 다르다.

▲진평왕릉에서 선덕여왕릉으로 돌아가는 길에 낭산과 그 아래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보인다.

​

낭산이 다시 가까워졌다.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경주시가 사들여 더는 경작하지

않는 땅 너머로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보인다. 신라 효소왕이 아버지인 신문왕

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란다.

​

길을 돌아 석탑을 가까이 보려다가 멈춘다. ‘아서라, 때론 멀리서 보는 게 좋을

때도 있다.

 

숨이 찰 리 없는 속도로 천천히, 넉넉하게 왕복 2시간 정도 걸린다. 선덕여왕릉

과 진평왕릉 인근에 모두 주차장이 있다. 어느 쪽부터 걸어도 괜찮다.

▲경주 낭산의 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진평왕릉 7㎞ 구간

영국 국교 성공회 소속이 아닌 로마 가톨릭 소속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카톨릭 대성당( 파사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은(Westminster Cathedral)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교좌 성당이다. 1895년에 착공되어 1903년에 완공이 된 성당이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가톨릭 교회이다.

​

인근의 영국 국교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과(Westminster Abbey)는 구분

된다.

​

근처에는 빅벤과 국회의사당 그리고 영국 왕실의 결혼식 장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

과는 다른 성당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은 빅토리아 스트릿 근처에 있다. 런던

에서 유일하게 주황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성당 위치도

▲잉글랜드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웨스트민스터 카톨릭 대성당(Westminster Cathedral)▼

정감록(鄭鑑錄) "으뜸 피난처"ㅡ혼돈의 시대마다 이곳은 삶을 품어 주었다.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재난이 들지 않는 땅’으로 지목된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는

솔숲 사이로 숨겨진 계곡이 있고, 그 계곡을 굽어보는 자리에 정자 금선정이 있다. 퇴계의 제자

인 금계 황준량이 소요하던 그윽한 자리에다 훗날 그를 기려 지은 정자다.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과 격암유록의 기록대로 여기가 과연 삼재(三災) 불입(不入)의 명당

이자‘사람을 살리는 땅’이었을까요.

​

전란도, 흉년도, 전염병도 들지 않는다는 땅.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이곳

은 소백산 아래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입니다.

​

이곳에는 절망과 비탄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명당을 찾아 들어왔던 이들이 있고, 맑은

계곡을 굽어보면서 풍류를 완성한 그림 같은 정자도, 달빛의 이름을 걸어놓은 누각의 절집도

있습니다.

​

죽음을 앞두고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비석으로 일으켜 세운 사랑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만

나면서 좋은 땅의 기운과 거기에 걸맞은 좋은 삶을 생각합니다.

 

◆정감록이 예언한 명당…금계리

​

경북 영주의 풍기. ‘풍기’ 뒤에는 바로 ‘인삼’이란 단어가 입에 착 달라붙지만, 사실 풍기에서

인삼보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이 ‘정감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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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은 조선 시대 세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다. 이 책에는 난세와 병란을 피할 수 있는 땅

열 곳, 그러니까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순서대로 소개돼 있다.

 

정감록에 따르면 우리 땅에서 ‘능히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열 곳(十勝) 중에서 첫 번째

(一勝)가 바로이곳 풍기 땅이다.

​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불리는 격암 남사고는 예언서 ‘격암유록’에서 풍기가 병풍

처럼 두른 소백산을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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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가 나돌기 이전부터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으로 가득한 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위로는 소백산의 으뜸 봉우리인 비로봉과 연화봉, 도솔봉이 두르고 있는 데다,

이 세 봉우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금계천과 남원천, 두 개의 물줄기가 발을 적시고

있으니 말이다.

​

한국 풍수의 창시자로 꼽히는 신라의 도선국사. 그는 7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지은 풍수책

‘도선비기’에서 최고의 명당 터로 소백산 아래 풍기 땅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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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도참 사상이 지배하던 고려에는 ‘산천비보도감’이란 독립기관이 있었다. 전국의 명산

대천을 답사해 최상의길지를 찾아내는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산천비보도감이 찾아낸 길지에 왕손의 태를 묻었다. 길지에 풍기 땅이 꼽히지 않았을 리 없다.

처음고려 충목왕의 태가, 그리고 이후에 조선 문종과 사도세자의 태가 차례로 풍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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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지의 중심은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다. 금계란 이름은 ‘금빛 찬란한 닭이 알을 품었다’

는 이른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지세에서 따온 것이다.

 

금계란 이름은 금계리 뒤편 소백산 자락에도 있다. 풍기읍에서 소백산 쪽으로 더 들어간 자리

의 산정에는금계 바위가 있다.

 

닭의 볏을 닮은 두 개의 바위인데, 닭의 눈이 있는 자리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어느 날 보석이 탐이 난 나그네가 바위에 올랐다가 천둥과 벼락을 맞아 죽고 말았고,

보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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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리가 정감록이 말하는 ‘재난이 들지 않는 땅’이란 소문이 돌면서, 난리가 있을 때마다 이

골짜기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제강점기에도, 6·25 전쟁통에도 그랬다.

​

금계리 주민 중 열에 여덟, 아홉은 정감록을 믿고 찾아온 이들이거나 그들의 후손이라고 했다.

특히 이북에서 온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평안도 출신이 가장 많았고 황해도, 함경도

순이 었다고 주민들은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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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의 비결을 찾아든 이들에게 십승지지는 꿈꾸던 이상향이었으되, 그 희망은 힘차거나

밝은 것이 아니라 측은하고 안쓰러운 쪽에 더 가까웠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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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에 마지막으로 붙잡은 위태로운 실낱처럼…. 얼마나 많은 실의와 도탄이 제

살던 자리를 떠나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활짝 열린 정자 위 빗자루....쉬다 단정히 가시게 말하는듯

▲ 소백산 연화봉 남동쪽 능선 중턱의 금계 바위.수탉의 벼슬을 닮은 바위는 십승지지

(十勝之地) 중에서도 가장길지로 꼽히는 금계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정자 마루에 빗자루를 놓은 까닭

 

금계리는 다른 시골 마을과 별다를 게 없다. 최고의 풍수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니 믿을

뿐이다. 풍수의 빼어남은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

금계 리 마을 한복판에는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 ‘한국 천하 명당 십승지’라 새긴 비석이 있다.

지도위에 전국의 십승지를 표시한 바위도 놓여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토록 평범한 시골

마을을 누가 천하 명당이라 짐작할 수 있을까.

​

밖에서 보기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마을이지만, 금계리 마을 안으로 깊이 들면 ‘비경’이라

할 만한 경관이 있다. 소백산 아래로 흘러내린 물이 금선계곡을 이뤄 지나가는 자리.

그 계곡의 솔숲 사이에 정자 ‘금선정(錦仙亭)’이 있다.

 

정자는 금선계곡의 계곡미를 단번에 완성하는 화룡점정과도 같다. 계곡 옆으로는 먹을 듬뿍

찍어 붓질로 그린 것처럼 굵고 힘찬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계곡 아래로는 옥계청류(玉溪

淸流)가 흘러내린다. 금선정은 그 물을 내려다보는 바위 금선대 위에 올라앉아 있다.

​

문을 활짝 열어 둔 금선정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빗자루였다. 정자 누마루 한쪽에 빗자루 두

개가 놓여 있다. 하나는 마당을 쓰는 싸리비이고, 다른 하나는 마루를 쓰는 갈목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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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를 놓아둔 뜻은 짐작대로다. 내키는 만큼 앉았다 갈 때, 일어선 자리를 단정하게 정리해

달라는 의미. 다시 말하자면 빗자루는 오가는 길손들에게도 기꺼이 정자 마루를 내어주

겠다는 푸근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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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정 위쪽에는 정자가 또 하나 있다. 주차장 한쪽에 마을 주민들의 휴식을 위해 세운 듯한

계양정이다. 계양정은 정자보다 정자 앞에 몸을 한껏 기울여 자라는 굵은 소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잡아끈다.

​

붉은 둥치의 소나무 형상이 마치 붉은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날아가는 듯하다. 계곡 양쪽

으로 늘어선 소나무들도 기꺼이 명품이라 불러줄 만하지만, 정자 앞의 소나무야말로

‘명품 중의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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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는 금선정에도, 계양정 마루에도 있다. 그 빗자루 덕에 활짝 열어둔 정자의 반들반들한

마루에 누구나 편히 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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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한가운데, 금선정 정자 마루에 앉아 명품 소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비 오는 계곡을

굽어보거나, 목침을 베고 누워 책장을 넘기며 빗소리를 듣는다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다 나른해진다.

 

◆스승이 제자를 ‘선생’이라 부르다

▲ 순흥면사무소 인근의 봉도각 주변 연못에 피어난 수련과 소백산의 오지마을

달밭골의 깊은 숲에서 만난 큰까치수영.

 

정자 마루에 앉았다면 서늘한 바람 속에서 이 정자가 기리는 이의 행적을 짚어보자.

금계 황준량. 그는 마흔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뜬 조선의 문인이자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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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 전쯤 그가 이 계곡을 소요하면서 걸터앉기 좋은 바위에 ‘금선대’란 이름을

붙였고, 훗날 그 바위 위에다 그를 기리는 정자, 금선정을 지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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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량은 스물네 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른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이들을 일러 신동

(神童)이라 했는데, 황준량을 일컬어서는 ‘기동(奇童)’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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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할 정도’로 뛰어났다는 뜻이다. 호조·병조 좌랑을 거쳐 경상도 감찰어사, 단양군수,

성주목사를 지냈다. 그럼에도 그를 아는 이들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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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누구였는가는 스승인 퇴계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미뤄서 짐작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죽은 뒤 그 사람의 일대기를 적은 것을 ‘행장’이라 하는데, 퇴계가 일생 동안

지은 행장은 7편에 불과하다.

 

이러저러한 인연을 내세워 당대의 석학인 퇴계로부터 글을 받으려는 민원이 쇄도했을

것임에도 그렇다. 명종 임금과 아버지를 빼고 나면 퇴계가 행장을 지어 삶을 기록한

인물은 고작 다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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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이현보, 충재 권벌,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그리고 풍기의 금계 황준량이 있다.

​제자의 죽음에 행장을 쓰는 스승은 거의 없다. 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계는 황준량의 죽음을 슬퍼하며 손수 지방을 써 붙이고 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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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돌에 새길 글씨도, 애통함을 담은 만사(輓詞)도, 제문(祭文)도 썼다. 추모사의 문장

한 줄 한 줄에서는 비통함이 뚝뚝 묻어났다.

​

놀라운 것은 퇴계가 추모사에서 열여섯 살이나 어린 황준량을 ‘선생’이라 적었다는 것

이다. 어찌 스승이 제자에게 선생이라 할 수 있었을까. 당대의 사건이었다. 이런 퇴계

의 파격적인 처신은 후일 조정에까지 알려져 실록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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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만이 아니었다. 퇴계는 황준량이 남기고 간 글을 모아서 문집을 출간했다. 이어 황

준량이 생전에 지으려 했던 서당 겸 거처인 금양정사를 짓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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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짓고는 관리를 스님에게 맡겼는데, 그 스님이 자주 부역에 불려 다녀 관리가 허술

해지자, 퇴계는 풍기군수에게 금양정사를 지키는 스님의 부역 면제를 탄원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무밭에서 무 뽑듯, 달밭에서 달을 뽑다

▲ 소백산 아래 순흥에는 ‘봉서루(鳳棲樓)’가 있다. ‘봉황이 깃든 누각’이란 뜻이다.누각

앞에다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둥근 바위를 가져다 둔 건, 알을 두고 봉황이 날아가지

않으리란 믿음 때문이다.

 

황준량은 생전에 984수의 시를 남겼다. 그가 남긴 명문 중의 명문은 시가 아니라 그의 나이

마흔한 살에 명종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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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수로 재임 시절 적폐로 신음하는 단양 주민들의 삶을 절규하듯 토한 황준량의 상소문

이 바로 ‘단양진폐소’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고통스럽게 합니까. 이슬을 맞으며 깊은 산속에 살고, 승냥

이, 살무사에 죽더라도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미처 슬퍼하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

​

”이 글이 명문인 것은 읽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명종은 상소문을 받아들고 단양에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해주는 혜택을 내렸다.

 

과중한 공물을 바치느라 피폐할 대로 피폐했던, 그래서 산속으로 숨어갈 수밖에 없었던 백성

들은 황준량이 얼마나 고마웠을까.벼슬살이하는 동안 황준량의 마음은 늘 금선계곡으로

향했다.

​

퇴계가 쓴 황준량 행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매번 벼슬에 뜻을 빼앗기고 관청의 사무로

괴로움을 당해 병이 깊어진다고 여기고, 어느 날 바람처럼 벗어나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병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풍기로 돌아오던 중 그는 그만 예천에서 세상을 떴다.

​

금선정 뒤편의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몇 굽이 올라서면 홀로 마을 뒤로 물러선 집, 금양

정사가 있다. 금양정사는 황준량이 터를 닦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에야 세워졌다.

 

사랑채 격인 금양정사 옆으로 나란히 안채를 지었는데, 안채의 현판에 건 편액이 영월헌

(迎月軒)이다. 뜻으로 풀면 ‘달을 맞이하는 추녀’다.그러고 보니, 소백산 비로봉 아래에

붙여진 이름에 온통 달(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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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양정사가 영월헌을 걸었고, 소백산 삼가탐방지원센터에서 걸어서 30분이면 닿는 비로봉

아래 절집 비로사에는 월영루(月映樓) 현판을 달았다. ‘달이 비치는 다락’이란 뜻이다.

​

거기서 다시 산정을 향해 가파른 비탈을 더 오르면 소백산 아래 첫 동네 달밭골이 있다. ‘달밭

(月田)’이라. 마을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에서는 달을 미래의 희망으로, 또 지혜로 풀었다.

​

그리고 달밭골을 “무밭에서 무를 뽑듯, 달밭에서 달을 가꾸어 뽑는 곳”이라 적어두었다.​그러

나 실상은 다르다. 달은 산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가파른 산자락에 다닥다닥 붙은 다락 모양

의 산중의 밭이 있다고 해서 달밭골이라 했을 것이었다.

​

이름의 연원이 다르대도 어떨까. 달랑 네 가구가 사는 산중 오지마을 달밭골의 달빛은 휘영청

밝을 테니 말이다.

 

​◆시인의 집에 세운 마지막 시(詩)

▲ 소백산의 죽계구곡의 물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노거수. 상처에 돋은 덧살과

옹이가나무가 지나온 시간을 보여준다. 소백산의 깊은 골에는 이런 기운이

스며 있다.

 

연화봉과 비로봉,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소백의 능선은 금계리에서는 잘 안 보인다. 소백의

산줄기는 금계리에서 자수 고개를 살짝 넘으면 닿는 마을 백리에서 더 잘 보인다.

 

금계리에서 자수 고개로 내려서는 길. 소나무와 사과나무를 심은 진초록 정원을 가진 집

마당에 비석 두 기가 서 있다. 둘 다 시를 적은 시비(詩碑)다. 시비에 새겨진 ‘아내에게’란

제목의 시에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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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 가슴을 / 난초인 양 다스리고 / 깊이 모를 눈빛으로 / 금 간 꿈도 때우더니

/ 지금은 이 지아비를/신주처럼 지켜선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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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가난 속에서 사과농사를 지었던, 그러면서도 늘 시를 놓지 않았던 시인이 있었다.

두 해전 작고한 고 김순한 시인. 안동이 고향인 그는 1962년 결혼 직후 아내와 이곳 풍기

땅으로들어와 과수원집에서 머슴을 살았다. 꼬박 3년 머슴살이로 모은 돈으로 남의

땅을 얻어 농사를 시작했다.

​

한 해 한 해 땅을 늘려 그 흔한 경운기 한 대 없이 5000평이 넘는 사과밭을 일궜다. 평생

담배도,술도 손대지 않고 몸이 부서져라 농사를 지었지만, 정작 그는 돈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

사과를 거두고도 한 번도 사과공판장에 나가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대신 그는 책을 한시

도 놓지 않았다. 사과밭에 갈 때도 책을 챙겼다. 농사를 지으면서 그는 시인이 됐다.

​

시인의 집 마당 비석에 새긴 시 ‘아내에게’는 시인이 일흔아홉 나이로 숨지기 한 해 전쯤,

그러니까 병이 깊어져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기 직전에 쓴 시다.

​

그가 집을 두고 요양원으로 갔던 건, 아내도 그 무렵에 대장암 판정을 받아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양원에 가기로 정해진 날, 시인은 아내 강혜영(79)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내가 (당신에게) 잘해준 게 하나도 없네. 고생했네…수고했네….” 그리고 시인은 더 늦기

전에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비석으로 세웠다. 한 사람의 최선을 다했던 삶과 진심을 다한

사랑이 그 비석에 새겨진 것이었다.

​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찾아 소백산 아래 풍기로 찾아들었던 이들이 꿈꾸었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이곳에서 그 꿈을 이뤘을까. 십승지지에는 재난이 들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어디 진짜로 그랬을까

 

젊어서 지긋지긋했던 가난 속에서 농사와 시를 함께 지으며 살아온 생활은 얼마나 고단했을

것인가.그때를 돌아보면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시인의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돌아보면, 참 평화로웠던 시간이었다.

 

벼랑 끝에 선 암자·100년 한옥 책방…공들인만큼 마음 가는 ‘지리산 고을’

▲경남 산청 둔철산 자락의 암자 정취암. 암자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웬만한 절 못잖은 규모다.

암자가 세워진 자리는 상서로운 기운이 금강산 못잖다고 해서 한때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동쪽으로 낮게 엎드리는 자리에 산청이 있다. 남덕유

산에서 내려온 물과 지리산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 경호강이 되고, 강은 100리를 굽이돌며

고을 한가운데를 지난다. 가을이면 그 물길을 따라 들판이 누렇게 익고, 산자락마다

억새가 하얗게 일어선다.

 

산청(山淸). 이름부터 ‘산이 맑은’ 고을이다. 산청을 이야기할 땐 흔히 천왕봉과 대원사계곡,

동의보감촌 같은 이름난 명소부터 꼽는다.

 

하지만 이 가을 산청에서 오래 눈에 밟힌 건 화려하게 꾸민 것들이 아니었다. 전기 패널 대신

아궁이를 남긴 한옥이그랬고,다랑논에서 돌을 골라내 연못을 일군 절집이 그랬다.

 

하나같이 사람의 손이 오래 머문 곳들이다. 꾸미는 일과 공들이는 일은 다르다. 꾸밈은 눈길

을 끌지만, 공들임은 마음을 붙든다. 산청에서 그 차이를 새삼 알게 됐다.

 

◆뜯길 위기의 한옥을 내다

 

강인석(60) 씨가 한옥을 보러 간 날, 마당에는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진주 인사동에서 왔다는

골동품상이었다. 진주에도 인사동이 있다. 서울 인사동처럼 골동품상과 고미술상이 모여

있는 거리다.

 

골동품상이 겨누고 있던 건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마을의 한옥이었다. 한옥은 ‘투트랙’으로

나온 매물이었다. 집주인 어머니는 집을 통째로 팔려 했고, 아들은 집을 뜯어 팔 궁리를 하고

있었다.

 

기둥과 대들보, 문짝과 마루널이 골동품이 될 만큼 고풍스러웠다. 강 씨는 그날 부랴부랴 계약

서에도장을 찍었다. “계약을 안 하면 이 집이 뜯기겠구나 싶었지요.”

 

이 한옥이 뜯겨 나갈 뻔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원래 충남 부여에 있던 집

을뜯어다이곳에 다시 세웠다. 부여에서 처음 지어진 게 1890년대쯤으로 추정된다.

 

단계로 옮겨 온 집은 순천박씨 재력가 집안이 여름 별장처럼 쓰다 오래 비워 둔 터였다. 한 번

뜯겨 옮겨 온 집이, 백 년을 넘겨 또 한 번 뜯겨 나갈 뻔했던 것이다.

 

강 씨는 책방을 하려고 오래 한옥을 찾아다녔다. 전국을 돌며 숱한 집을 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은 드물었다. 그러다 만난 게 이 집이었다. 2022년 5월, 집은 카페 ‘소북(素北)’과 책방

‘밀당’이 됐다.

 

마을 사람들은 다 말렸다. 이 시골에 무슨 카페 손님이 오겠느냐고, “그냥 딸기 농사나 지으라”

고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단계는 딸기로 이름난 마을이다. 그 마을 한복판에서 딸기 대신 커피

를 내리 겠다고 했으니 걱정이 앞설 만했다.

 

소북의 ‘소(素)’는 꾸밈없음이다. 다들 바닥에 전기 패널을 깔라고 할 때 강 씨는 아궁이를 남겼

다. “한옥은 한옥답게 남아야지요.” 툇마루 밑엔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웬만한 건 제 손으로 고치려고 한옥 소목 일까지 배웠다. 한옥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라고 했다. 꾸밈은 덜어냈지만, 손은 그만큼 더 갔다.

 

대문을 들어서면 잔디 마당에 디딤돌이 두 줄로 놓였고, 빨강·노랑·초록 나무 의자가 나란히

손님을기다린다. 대청에 오르면 휘어진 통나무 대들보가 다듬지 않은 생김새 그대로 머리

위를 가로지른다.

 

서까래도 굵기가 제각각이다. 반듯하게 켠 목재로는 낼 수 없는 표정이다. 마당 한쪽엔 헌 기

와가 켜켜이 쌓였다. 본채 옆으로 돌아가면 소나무 한 그루를 끼고 앉은 하얀 별채가 나온다.

 

접이식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힌 별채 안에도 책장이 빼곡하고, 소나무 그늘엔 빨간 파라솔이

펼쳐져 있다. 한옥과 단정한 시멘트 건물이 정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는데, 둘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을 받아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수국 곁 바위 위에서 몸을 말고 조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다. 오후 한나절이 거기서 다 간다.

▲산청 단계마을의 한옥 북카페 소북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책방 ‘밀당’. 책마다 책방

주인이 정성스럽게 쓴 서평 혹은 추천사가 붙어 있다. 이 정도의 애정과 노고는

‘책을 파는 것’ 너머의 일이다.

 

◆잘 팔리는 책은 들이지 않는 책방

 

한옥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책방 ‘밀당’에선 놀랄 일이 하나 더 있다. 진열대의 책마다 노트

반 장만 한 메모지가 붙어 있다. 부인 최명옥(56) 씨가 책을 읽고 손글씨로 빼곡하게 적은

감상이다.

 

노랑, 연두, 하늘색 메모지가 책 표지마다 한 장씩 붙어 있는 진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

이다.메모는 정직하다. 한 소설집에 붙은 메모는 “무슨 얘기인가 했다”로 시작한다.

 

젊은 작가가 그려낸 낯선 세계에 몰입하기 어려워 첫 몇 페이지에서 여러 번 숨을 고르며 겨우

나아갔다는 고백이다. 그러다 끝내 그게 우리 곁에 사는 사람 이야기였다는 걸 알게 됐다고

적었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에 붙은 메모는 과거나 미래의 행복보다 지금에 집중하게 되는 책이

라고 권한다. 책 한 권 팔자는 마음으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메모만 읽다가 책을 집어 드는

손님이 적지 않다.

 

‘어른의 어휘력’에 붙은 메모가 압권이다. 들여놓기 무섭게 팔려 나가 좀 질려 버렸단다. 다른

책도팔렸으면 하는 마음에 한동안 들여놓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하도 찾아 결국 다시 들여놨

다는사연이다.

 

잘 팔리는 책을 일부러 밀어내는 책방이라니. 책과 밀고 당긴다는 ‘밀당’이란 이름이 메모 한

장으로 다 설명된다.

 

독자들이 산청 여행길에 들고 갈 만한 책을 권해 달라고 하자, 최 씨는 세 권을 꼽아줬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J D 샐린저의 ‘호밀밭

의 파수꾼’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숲속 여름 별장에서 한 계절을 나는 건축가들의 이야기다. 공교

롭게도이 집도 한때 누군가의 여름 별장이었고, 여름은 이제 막 지나갔다.

 

부부가 그리는 이곳의 내일도 최 씨가 책에 적어둔 메모와 결이 같다. “사람을 빨리 불러 모으고

싶은 생각은없어요. 지금처럼 차분하게, 붐비지 않게, 오래 가고 싶습니다.

 

” 강 씨가 꿈꾸는 건 어릴 적 살던 집 같은 곳이다. 지금은 남이 살아 들어가 볼 수 없는 옛집

대신,누구든 들어와 제 기억을 꺼내 보고 갈 수 있는 집. 실제로 오래전 이 집에 세 들어 살았

다는 이가 찾아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하고 갔다.

 

마을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손님은 하나둘 늘었다. 산청군은 마을에 한옥을 지어 부부에게

빌려줬고, 부부는 거기서 북스테이 ‘단계’를 꾸린다. 사람이 사람을 부르기도 했다.

 

종가로 돌아올지 망설이던 한 화가 종손이 소북에 들렀다가 강 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무조건 오시라, 같이 좋은 마을을 만들어 보자”고 했더니, 그가 정말 마을로 내려와

갤러리를 열었다.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 남명 조식이 학문을 닦던 곳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덕천서원.

 

◆느슨하고 심심한 골목

 

카페를 나서거든 마을 골목을 걸어 볼 일이다. 단계마을엔 한옥이 많다. 그렇다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즐비한 건 아니다. 말끔한 신식으로 손보지 않아 좀 누추해 보이기도 하는

‘진짜’ 한옥들이 양옥과 두서없이 섞여 있다.

 

강 씨는 이곳을 “요즘 보기 드문 진짜 시골”이라고 했다. 이끼 낀 돌담이 골목을 따라 이어

지고, 담벼락엔 새마을운동 시절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시골도 예전의

시골이 아닌요즘, 단계 골목에선 시간이 반 박자쯤 느리게 간다.

 

골목 안쪽엔 400년 넘은 서원도 하나 숨어 있다. 1614년 동계 권도를 모시려고 세운 완계서

원이다.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강당부터 다시 지었고, 1985년에야 지금 모습

을 되찾았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서원이 마을 집들 사이에 섞여 제 나이를 내세우지 않고 앉아 있다.

이채로운 건 단계초 교문이다. 기와를 얹은 솟을대문이 교문이다. 현판엔 ‘삭비문(數飛門)’

이라 적혔다.

 

어미 새가 새끼에게 나는 법을 거듭 가르친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날마다 그 문을 드나들며

날갯짓을 배운다.마을 들머리 논가엔 지난해 세운 ‘단계딸기 유래비’가 서 있다.

 

1985년 마을 사람 셋이 처음 딸기 농사에 뛰어들었다. 몇 해를 실패하고 전국을 돌며 배운 끝

에 재배에성공했고, 일본과 네덜란드를 찾아가 배워 온 기술로 지금의 단계딸기를 일궜다고

새겨져 있다.

 

40년 만에 젊은 세대가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다는 대목에선 마을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강 씨

에게 “딸기 농사나 지으라”던 이웃들의 말이 핀잔이 아니라 진심 어린 권유였다는 걸, 이 비석

앞에서 알게 된다.

 

단계 골목의 매력은 느슨하고 심심하다는 데 있다. 볼거리를 줄 세워 놓지도 않았고, 걷는

이를 재촉하는 것도 없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들판이 시작되고, 들판은 가을볕에 누렇게

익어 간다. 그 너머로 딸기 하우스들이 줄지어 있다. 뒷짐 지고 걷기 딱 좋은 계절이다.

▲정취암의 산신각 뒤쪽 바위벽에 걸어 놓은 산신탱화. 탱화 앞에다 호랑이를 탄 산신 석상을 놓았다.

 

◆법어 아래 놓아둔 모기약

 

단계에서 멀지 않은 같은 신등면 대성산 벼랑 위에 정취암이 있다. 암자 뒤까지 차로 오를 수

있지만, 벼랑에 제비집처럼 붙은 암자를 올려다보며 걷는 산길도 20분 남짓이면 된다. 입구는

좁고 들어갈수록 넓어진다. 풍수에서 기운이 머무는 자리로 치는 ‘전착후관(前窄後寬)’

의 지형이다.

 

암자는 소박하다. 원통보전과 삼성각, 정취전 몇 채가 벼랑에 기대 옹기종기 앉았다. 바람

소리와목탁 소리가 지나가는 원통보전 처마 아래 현수막이 걸렸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선 그 자리가

곧 진리라는 임제 선사의 말이다. 바로 아래 화이트보드엔 손글씨로 ‘모기 물린 데 바르는

약’이라고 적혀 있다.

 

아무나 가져다 쓰라고 내놓은 약이다. 절집에선 이것도 보시다. 천 년 묵은 법어 아래 모기

약이 놓인풍경이 어떤 법당 장식보다 정겹다.

 

원통보전 안엔 50㎝쯤 되는 목조 관음보살이 앉아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인데, 작고

아담한 몸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법당을 나와 고개를 들면 큰 바위 위에 거북 두 마리가

나란히 엎드린 듯한 쌍거북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에 빌면 부부 금실이 좋아지고 자손을

얻는다고 했다.

 

삼성각 뒤엔 1833년에 그렸다는 산신탱화가 있다. 호랑이를 탄 산신이 어디론가 행차하는

그림인데, 그 앞엔 호랑이 탄 산신을 돌로 깎은 석상까지 앉혀 놓았다. 불교와 토속신앙이

한 마당에서 사이좋게 지낸다.

 

삼성각 곁엔 납작한 책을 포갠 듯한 ‘책바위’가 있다. 조선 초의 도사 문가학이 젊은 시절 이 암자

에서 흰 여우에게 둔갑술 책을 얻었는데, 아홉 장 가운데 여덟 장을 익혔을 때 여우가 마지막

한 장을 이 바위에 숨기고 사라졌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다.

 

여덟 장짜리 도술은 딱 그만큼 어설펐다. 가뭄에 그가 빌어 내린 비는 겨우 먼지를 적실 정도였다

고 ‘조선왕조실록’은 적었다.

 

하늘과 귀신의 군사를 부르겠다며 역모를 꾸민 그는 1406년 저잣거리에서 수레에 매여 찢겼다.

둔갑을 하고도 상투 끝을 감추지 못해 들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꾸민 모습 끝으로 본모습이

삐져나온 것이다.

 

정취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자리는 따로 있다. 삼성각에서 5분쯤 더 오르면 암자에서 가장 높은

정자, 만월정이 나온다. 넓적한 너럭바위 곁에 선 정자다.

 

발아래로 신등의 들판과 마을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합천 삼가와 의령 한우산, 자굴산의 능선이

겹겹이 물결친다.

 

산청 아홉 경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조망이다. 해 뜨는 풍경을 보러 새벽에 오르는 이도 많다.

가을엔 누렇게 익은 들판이 산자락 사이를 가득 메운다. 방금 걸었던 단계의 골목도 그 들판

어딘가에 있다.

▲전(傳)구형왕릉.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산청의

대표적인 명소다.

 

◆공들인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

 

신등에서 산청읍 쪽으로 내려가면 지리산 동쪽 끝 봉우리 웅석봉 아래 수선사(修禪寺)가 있다.

오래된 절이 아니다. 문화재도 없다. 비구니 여경 스님이 30여 년 동안 홀로 일궜다.

 

그 30년의 손길이 절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어디 한 곳 손이 가지 않은 데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원래는 다랑논이었다. 논에서 돌을 걷어내자 웅덩이가 생겼고, 그 웅덩이가 연못이 됐다.

 

거기 연을 심을 요량이었는데, 계곡의 찬물에선 연이 잘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물이 위쪽에서

부터 천천히 데워진 뒤 연못에 들도록 물길을 냈다. 보이지 않는 데까지 손이 갔다.

 

절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돌계단을 몇 개 오르면 사립문이 나온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다. 사립

문이 곧 절의 문이다. 문을 지나면 둥근 연못이 펼쳐진다. 연못가엔 통나무를 깎아 만든 물레방아

가 천천히돌고, 그 곁엔 직선으로 반듯하게 지은 현대식 건물이 한 채 섰다. 3층이 카페다.

 

카페 테라스에 오르면 연못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연꽃은 진 지 오래. 연잎과 수련 잎이 수면을

빈틈없이 덮었고, 그 위로 나무다리가 굽이굽이 돈다.

 

난간은 휘어진 나뭇가지의 생김새를 그대로 살려 엮었고, 다리 위엔 나뭇조각을 겹겹이 얹은 너와

지붕을 얹었다. 반듯한 데가 하나도 없는데, 거슬리는 데도 하나 없다. 아무렇게나 둔 듯 자연

스러워 보이지만, 그렇게 보이게 하는 데 많은 손이 갔을 것이다.

 

찻잔을 앞에 두고 내려다보고 있으면 다리 위를 거니는 사람들이 그림 속 인물처럼 작아진다.

연꽃이 피는 한여름이면 이 연못이 훨씬 더 화사해지겠지만, 꽃이 지고 잎만 남은 가을 연못

에도 고요한 맛이 있다.

▲지리산 아래 중산리 절터에 모셔진 지리산 성모상.???

 

수선사에서는 크고 화려한 건 없다. 소박하되 단정하다. 마당 구석구석, 댓돌 옆, 툇마루

아래까지 흠잡을 데가 없다. 오래 쓸고 닦아 반질반질해진 마루 같은 절이다.

 

들어가면 누구나 감탄하고 나오는 곳이 수선사의 해우소, 곧 화장실이다.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가는데, 바닥엔 물기 한 점 없고 안은 잘 꾸민 카페 같다.

 

그래서 문득 드는 의문 하나. 절을 이렇게까지 가꿔도 되는 걸까.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게 부처의 가르침 아니었던가.

 

그 물음의 답은 절에 들어설 때 이미 지나온 문에 걸려 있었다. 수선사 입구의 사립문

이름이 여여문(如如門)이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금강경’엔 형상에 매이지 않아 있는 그대로 흔들리지 않는다(不取於相 如如不動)는

구절이 있다.

 

가장 공들여 가꾼 절이 ‘있는 그대로’를 문패로 내걸었다.공들였으되 그걸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게 이 절이 보여주는 장엄(莊嚴)이다.

◆지리산 성모상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최단거리 등반코스 출발지점이 산청의 중산리다. 이 마을 작은 절터

에 높이 74㎝의 지리산 성모상이 있다.

 

고려 명종 때 머리가 사라졌다가 찾았고, 황산대첩에서 패전한 왜구의 칼을 맞았다. 1973년

엔 아예 자취를 감췄다가 14년 뒤 진주의 한 과수원에서 머리가, 천왕봉 아래 계곡에서 몸통

이 나왔다.

 

그때마다 누군가 부쉈고, 그때마다 누군가 되찾아 왔다. 다시는 잃지 않겠다며 천왕사는

성모를 바위에 콘크리트로 붙여 버렸다. 성모는 지금도 그 바위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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