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 이겨낸 ‘기적의 섬’…물탱크 위 198명 서로 지켰다.

▲국내 최장 출렁다리인 단양 ‘시루섬 기적의 다리’가 지난 19일 개장했다. 시루섬은 1972년

태풍 피해로 고립됐던 주민 약 200명이 물탱크 위로 대피해 살아남았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1985년 충주댐 완공으로 강 수위가 높아져 무인도가 됐다.

 

지난 19일 국내 최장(617m) 출렁다리가 탄생했다. 충북 단양 ‘시루섬 기적의 다리’다. 이전

까지는 충남 논산 탑정호의 출렁다리(600m)가 국내 출렁다리 250여 개 중에서 제일 길었다.

길이가 17m 더 긴 출렁다리가 생겼다는 건 사실 의미 있는 뉴스가 아니다. 전국 자치단체가

출렁다리 건설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이 기록도 조만간 깨질 터여서다.

 

국내 최장 출렁다리보다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 건 이 다리가 놓인 시루섬의 역사다. 다리 주탑

이 서 있는 시루섬은 1972년 대홍수 때 주민이 합심해 대형 인명사고를 막았던 기적의 장소다. 

 

누에 치던 섬 덮친 홍수

 

시루섬은 단양읍 증도리 남한강에 떠 있는 하중도(河中島)다. 1970년대에는 면적이 23만㎡로

 여의도의 8배에 달했다. 수위가 높지 않을 때는 걸어서 뭍을 다닐 수 있는 모래섬이었다.

 

잠업(蠶業)이 활발했던 시절에는 약 50가구, 250명이 살았다. 섬 곳곳에 뽕나무밭이 있었고,

단양군이 세운 잠업연구소도 있었다.

▲1972년 8월 19일 태풍 베티가 단양을 강타했다. 강수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시루섬 상류의 

상진대교가 붕괴됐다. 

 

다리가 무너지면서 삽시간에 강이 범람했다. 수위가 별안간 불어나는 바람에 시루섬이 고립

됐다. 주민은 물론이고 잠업 교육생 30명도 섬에 갇혀버렸다.

섬에 고립된 사람들은 불어나는 강물을 피해 가장 높은 지점으로 올라갔다. 6m 높이의 물탱크

다. 면적 20㎡, 그러니까 6평 남짓한 물탱크 위에 199명이 올라섰다. 이른바 ‘국평(국민 평형)

’이라 불리는 84㎡(25평) 면적 아파트 거실에 200명이 들어찬 꼴이었다. 

 

199명은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팔짱을 끼고 서로를 지켰다. 강물이 발밑까지 차올라도 

팔짱을 풀지 않았다. 물탱크에 오르지 못한 34명은 소나무 위에 얼기설기 널빤지를 깔고 

구조를 기다렸다.

섬이 고립된 지 14시간이 지나서야 수위가 낮아졌고, 구조대도 도착했다.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실종됐으나 더 큰 인명 피해를 겪지 않은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물탱크 위에서 아들 잃은 여인.

 

물난리 이후에도 일부 주민은 섬을 떠나지 않았다. 수해가 빈번했고, 자연스레 인구가 감소했다.

1985년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시루섬은 무인도가 됐다. 현재 섬 면적은 약 6만㎡로, 1970년

대와 비교하면 4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물탱크 위에서 생후 6개월 아들을 잃은 최옥희씨 동상.

 

시루섬 기적의 다리는 단양읍 중심가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일본 강점기에 

만든 편도 1차선 터널 3개를 지나면 다리 주차장이 나온다. 

 

시루섬의 역사를 보여주는 탐방센터가 다리 입구 역할을 한다. 탐방센터 앞에 갓난

아기를 안은 채 슬픈 표정을 한 여성의 동상이 서 있다. 1972년 물탱크 위에서 

생후 6개월 된 아들을 압사(壓死)로 잃은 최옥희(88)씨 동상이다.

김사옥 단양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최씨는 참척의 고통을 당하고도 사람들이
동요

하지 않도록 내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루섬 탐방센터에 전시된 물탱크 모형.

 

다리는 ‘치유’를 뜻하는 보라색으로 만들었다. 전국에 출렁다리가 워낙 많다 보니 출렁다리 

걷는 재미가 대단하진 않다. 대신 300m를 걸으면 닿는 시루섬의 모습이 이채롭다.

 

 사람 살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잡목과 칡넝쿨이 섬을 집어삼켰다. 거대한 초록 생명체

가 꿈틀대는 것 같다. 

 

기억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물탱크라도 남겼으면 좋으련만 충주댐 공사 당시에 철거했단다. 

강 건너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다. 걸음을 되돌려 출발지로 돌아온다.

◆절벽길 걸으며 절경 감상 

▲절벽 중간에 설치된 이색 산책로인 단양강잔도.

 

시루섬 인근에 단양의 관광 명소가 모여 있다. 2017년 개장한 ‘만천하 스카이워크’와 ‘단양강

잔도’가 대표적이다.

 

 만학천봉(320m) 자락에 들어선 스카이워크는 단양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다. 소백산을 비롯

한 주변 산세와 남한강이 한눈에 담기는 이색 전망대다. 돌출된 유리 바닥에 서니 

잠깐 아찔했다.

주차장에서 스카이워크까지 모노레일이 다니긴 하지만, 전망대 정상까지 가려면 나선형
경사로

를 한참 걸어야 한다. 산책하듯 여유롭게 걷기에는 단양강잔도가 낫다.

 

남한강 절벽 중간에 설치한 편도 1.2㎞짜리 데크로드로, 수면 20m 높이에서 절벽을 걷는 맛이

남다르다. 데크로드를 걷다 보면 남한강 따라 펼쳐지는 단양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점기시절 일본이 만든 철로 터널을 활용한 수양개 빛터널.

 

아이와 함께라면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을 추천한다. 충주댐 건설과정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

유물이 전시돼 있다. 10월 8일까지 시루섬을 주제로 한 기획 전시도 진행한다.

 

전시관 한편에 개인이 운영하는 ‘수양개 빛터널’이 있다. 일제가 석회석 운반을 위해 지은 철로

터널에 조성한 관광지다. 조명이 화려하다. 

▲단양구경시장의 명물 마늘 아이스크림. 

 

단양구경시장에서 온갖 마늘 음식을 맛보는 것도 단양 여행의 색다른 재미다. 단양 마늘은 국내 

최고 품질로 인정받는다. 

 

큰 일교차과 석회 함량이 높은 황토 덕분이란다. 통마늘을 넣은 만두·닭강정·순대뿐 아니라 

마늘 아이스크림도 판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흑마늘의 궁합이 의외로 좋아 놀랐다.

▲시루섬 기적의 다리는 8월 말 현재 입장료가 없다. 10월께 유료화할 예정이다.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하고, 화요일은 쉰다.

 

만천하 스카이워크 입장료 어른 4000원, 단양강잔도 무료.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 어른2000원,

수양개 빛터널 어른 9000원. 전시관은 월요일, 빛터널은 화요일에 쉰다.

 

개휴시 몐산진(介休市 綿山鎭)

중국 황하문명(黃河文明)의 발상지.면산(綿山)의 풍경.

▲중국 산시성[山西省] 제슈시[介休市] 몐산진[绵山镇]에 있는 산(山)이다. 중국 진(晉)나라의

충신 개자추(介子推)의 일화가 있는 곳으로, 2013년 국가 5A급 관광지로 선정되었다.

 

타이웨산맥[太岳山脉]에 속하며, 제슈[介休]·링스[灵石]·친위안[沁源]의 3개 지역에 걸쳐 있는

산이다. 최고 높이는해발 2,567m이며, 기암절벽과 독특한 산세를 자랑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의 충신 개자추(介子推)가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가 살았던 곳

으로, 개자추가 있던 산이라 하여 제산[介山]이라고도 불린다.

 

개자추의 사당인 개공사당과 무덤 등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개자추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불을 피우지 않고 차가운 음식을 먹었던 한식(寒食)이 유래한 곳이기도 하다.


운봉사(雲峰寺), 정과사(正果寺), 대라궁(大羅宮) 등의 불교와 도교 사찰 및 정자들이 곳곳에

있으며, 좁은 잔도로 연결된다.

 

운봉사는 깎아지른 절벽에 형성된 높이 60m, 폭 180m, 깊이 50m의 동굴 포복암(泡腹岩)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공왕(空王)으로 알려진 고승 지초스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정과사는 12기의 등신불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몐산은 산시성 중점풍경명소이며, 2013년에 몐산 일대 40㎢를 몐산풍경명성구라는 명칭으로

국가 5A급 관광지로 지정하였다.

▲산시성(山西省) 전도 

▲중국 山西省 위치도

▲면산(綿山)은 면상(綿上)이라고도 하는데 산서성(山西省) 개휴시(介休市)에서 동남쪽으로

20km 떨어져 있으며, 개휴 , 영석, 심원의 3개 시, 현에 걸쳐 있다.50여 리가 길게 이어져

있으며, 태악산맥에 속하는 해발 2,072m의 산이다.

 

산시 성은 황하문명의 발상지요 중국에서도 가장 중국다운 면모를 간직한 곳이다 중국의 현대를

보려면 상해를 중국의 근대  오백 년 역사를 보려면 북경을 오천년 중국 역사를 보려면 산시로

가라 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면산은 중국의 그랜드캐년 이라 불리며 산동 山東 과 산시 山西 성으로 나뉘는 경계가 되는 태항

산의 한 갈래로 해발 2500m 위에 길이 25km 에 달하는 기막힌 협곡이 나온다

 

한국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 년에 130만명의 중국인이 다녀가는 관광지로 가장 중국다운

면모를 간직한 비밀 스러운 곳이다

 

비단이장사 왕서방으로 우리에게 잘알려진 왕서방의 고향이며 중국에서 유일하게 개인이 투자

해서 개발한 관광지이다.

 

면산은 천지 삼라만물의 대기가 불교, 도교, 유교의 3가지 종교가 공존하게 공간을 포옹하고 있다.

 

건축 면적 3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천하제일도관의 대라궁(大羅宮)은 파란 벽과 금색기와가 어우러

져 있다.


삼청전, 혼원전, 강경대 등 15곳의 전이 있으니 도교의 집합지라 하겠다.면산에는 당태종이 지은

운봉사와 중국 최대 도교사원인 대라궁은 건축 면적 3만 평방미터에 달하고 삼청전, 혼원전,

강경대 등 15곳의 전이 있으니 도교의 집합지 천하 제일 도관이다.

 

천지 삼라만물의 대기가 불교, 도교, 유교의 3가지 종교가 있으며 민간 신앙과 관련된 수많은 절과

사당도 즐비하다

 

중국 춘추시기 진나라의 군자이고 최고의 충신인 개차주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개공사당 우리나라

한식,청명의 유래가있는 곳이다.

▲적취정

▲대라궁(大羅宮)

 

금빛 찬란한 누각이 첩첩하며, 면적이 만 평방미터나 된다.현존하는 도교사원중 '천하제일관'으로 불린다.

개자추가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에 온 후, 이곳에 도교의 최고 경지인 '대라선경(大羅仙境)'을

보았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곳에 대라궁(大羅宮)을 지었다고 한다.

▲수직 절벽 잔도(道)

▲운봉사

 

당태종이 건설한 불교사원이다.운봉사는 수많은 관광객이 드나들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소원을 빌고 있다.

돈이 많은 이는 사람을 사서 절벽에 종과 붉은 소원지를 매달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쑤시개를

바위사이에세워놓고 허리가 꼿꼿하기를 빌기도한답니다.

▲운봉서원(云峰墅苑) 호텔

 

해발 2,000m가 넘는 높이에 있는 호텔이다.이호텔은 1층부터 10층까지 있고, 그위에 5층이 더 있다.

15층을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한번 갈아타야하는데,10층부터는 다시 1층이라고 표시되어있다.

▲정과사 가는 잔도(棧道)

▲정과사

면산 봉우리 높은곳에 위치하며 포골진신상을 모신곳12존 등불이 안치되어있는 사찰이다

▲오루사 감실

당나라(833년)때 건축, 공왕불을 공양하고 양쪽에 마사, 은공 및두 천왕이 있고 아래는 오용이

구름을 타고 올라 가는 형상이다.

▲영험탑

 

당나라 당태종의 명으로 641년 건축공왕불, 전지초를 공양. 높이가 69m로 고산 사원 중

으뜸이고 면산을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도교 정과전과 불교 정과전 사이에 있는 부처상이다

▲수직 절벽 잔도(道)

▲서현곡입구

▲서현협곡(개자추 사당으로 가는길)

▲개자추 사당[介子推 祠堂)

 

춘추시기의 진나라 군자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면산에서 자연과 어우러진 가장

멋진 건축물이다.

 

춘추 시대 진(晋)나라의 개자추가 어머니를 모시고 은거했다가 불타 죽었던곳이 바로 이 면산이다.

2600년 전 개자추는 진나라 공자 중이(重耳)를 따라 19년을 유랑하였는데 나중에는 생활이

궁핍해져, 그의 다리살을 잘라 중이를 먹게 했다.

 

중이가 진나라로 돌아왔으나 제신들은 서로 공을 가로채려고 다투었다.개자추는 이에 환멸을 느껴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진문공은 면산으로 그를 찾아갔으나 찾지 못했다. 그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와 함께 나무에 매달린 채로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개자추의 절개를 추앙하여 매년 개자추가 죽은 날이 되면 3일간불의 사용을 금지하고,

차가운 음식을 보내 애도를 표하였다.그래서 청명 전 3일간을 "한식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몽산대불

 

자연석을 깎아서 만든불상으로 가슴과 목 부분의 높이가 17.5M, 넓이는 25M, 목둘레는 5M, 높이가

63M 나 되는 대형 석조물 현재 서양에서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불리우는 아프가니스탄의 대볼보다는

약 10M 정도 높다고 한다

 

서기 551 년경에 만들어 졌으며 세계 최초의 대불이라 할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는 위대한 건축물중의

하나이다. 태원 동남쪽 서산에 위치하여 서산대불이라고도 한다. 맨 아래쪽에서 보면 상단부분만

보인다.

▲몽산대불

漢나라 당시 고대 도시.평요고성 (平遥古城)

▲중국산서성(山西城)에 2,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중국의 옛 정취가 잘 보존된 고성이 있다

서울 여의도 2.9평방메다 보다조금 작은 2.25평방메다 면적에 성벽 둘레6.4km 성벽 높이12m

로 하나의도시를 이루고 있는 평요고성이다

 

그 안에서 모든것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 평요고성은 산서성 중부의 태원(太原) 분지 남쪽

에 위치한다 기원전 8세기 서주(西周)시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남아있는 주요 성벽과

건축물은 대부분 명. 청 시대에 지어젔다

 

명.청 시대부터 현재까지 500여년동안의 건축문화 도시계획의 변화 문화 경제 사회모습이 완벽

에 가까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있는 곳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풍요고성을 중원문화의 보물창고라 칭하며 중국의 4대 고성 중 하나로 뿝고

있다. 평요고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평요고성 (平遙古城)

 

중국 산시성(山西省)중부에 있다. 14세기에 세워진 고대 도시로, 한나라의 전통 양식을 보존하고

있다.고성(古城)을 중심으로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성벽은 높이 12m, 길이 약 6,000m

이다. 탑 4개와 망루 72개가 있다.

 

도시 주변에 300군데 이상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명(明)·청(淸) 시대의 주거지가 4,000채 이상

보존 되어 있다.또한 성벽, 상점, 시가지, 사원 등 문화적 가치가 있는 목조 건물들과 각 시대별로

귀중한 유물들도 많이 남아있다. 


중국 명·청 시대의 문화·사회·경제·종교 발전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약 5세기 동안의 중국 왕조

의 건축 양식과 도시 계획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1986년 국무원에서 국가역사문화문물로 지정하였다. 1997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핑야오 고성내 상점 거리▼

1967년 문연 극장, 흑백TV 늘어섰던 소리사…여기가 찐 ‘레트로 마을’

 

◆지도에 없는 지명… 느릅내

 

경북 청도의 남쪽에 ‘유천(楡川)’이 있다. 유천은 지명(地名)이지만, 지도에는 안 나온다. 공식 행정

지명은 청도읍 ‘내호리’와 ‘유호리’다. 그런데도 일대의 가게들은 죄다 ‘유천’이란 상호를 이마에

달고 있다.

 

유천극장, 유천주막, 유천우체국, 유천정미소, 유천농업사, 유천식육식당, 유천국수집…. 지도에는

없는 지명이, 어찌 된 일인지 가게 간판과 입말로 성하게 살아남아 있다.

 

유천은 조선 시대 동창천과 청도천이 T자로 만나는 곳에 있었다는 ‘유천역(楡川驛)’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유천역은 1905년 놓인 경부선 철도의 기차역이자 근대 영남대로의 길목이기도 하지만, 열차가

놓이기 전에도 여기는 유천역이었다.

 

조선 시대 숙박과 공문전달 등을 담당하던 교통 통신기관인 역원(驛院)의 그 ‘역’ 말이다. 느릅

나무가 우거진 천변에 있다고 해서 ‘느릅나무 유(楡)’ 자에 ‘내 천(川)’ 자를 써서 역 이름을

지었다. 유천. 우리 말로 하면 ‘느릅내’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죽바위. 윗부분이 운동장처럼 평평하다. 기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지형이 독특하다.

 

조선 시대 유천역이 사라지고 없는 거야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일. 기차역 유천역도 2000년

경부선 철로 이설로 2.5㎞ 떨어진 밀양 쪽으로 옮겨져 ‘상동역’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유천은 ‘아무 데도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지명은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유천에 가서 보면 대번에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변하지 않아서’다.

 

‘유천’이란 예전 지명의 상호를 걸고 있는 가게들이 늘어선 내호리와 유호리 골목에는 ‘세상의

속도에 따라붙으려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낡은 간판만 남기고 문 닫은 유천의 가게들은

‘어느 날, 산소호흡기를 떼고 고요하게 맞이한 죽음’ 같은 모습이었다.

 

상권이 무너지고, 시장이 빠져나가고, 기차역이 떠나면서 이미 승부는 갈린 셈. 허물고 다시

지을 엄두도, 살아남으려는 의지도, 문 닫고 업종을 전환할 마음도 내지 못했던 가게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작동이 중단된 기계처럼 어쩌지 못하고 그저 형태로만 남겨진 것이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다. 예전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과 가게를 둘러보다 떠올린

건 ‘포르말린을 넣어 보존처리한 곤충채집 표본’이었다.

 

‘진공의 공간 속에서 정물처럼 멈춰버린 벽걸이 시계’를 생각하기도 했다. 하찮다거나 초라한

신세라는 뜻이 아니다.

 

곤충표본이 ‘진짜 곤충’으로 만든 것이듯, 이곳의 오래전 풍경도 ‘진짜’를 방부 처리해 보존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천이 보여주는 ‘레트로’가 살아있거나 작동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본 뼈대와 틀만큼은 진짜라는 얘기다.

▲풍각장날 옷가게에 걸어놓은 옷.

 

◆정미소와 양조장, 그리고 한약방

 

유천은 40∼50년 전쯤에서 시간이 멈춰 선 것 같은 곳이다. 한때 장터였던 반듯한 마을 중심 골목

양쪽으로 줄 맞춰 늘어선 가게에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함석지붕에 흙벽을 두른 영신정미소, 돌로 지은 독특한 건물에 들어선 구생당한약방, 사료판매소

간판을 걸고 있는 박공지붕의 옛 양조장, 독학으로 공부해 익힌 기술로 흑백TV를 고쳐줬다는

중앙소리사. 단조·밀링·판금·베어링 등을 진열장에 적어놓은 자그마한 철공소….

 

놀랐던 건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었다는 영신정미소가 아직 나락과 등겨 먼지를 날리며 도정기계를

돌리고 있는 현역이라는 사실이었다.

 

유천의 오래된 가게는 ‘그냥 구경거리’가 아니다. 어디를 열고 들어가든지 누군가가 일생을 바친

노고가 느껴지는 듯해서 때로 뭉클한 감동이 느껴진다.

 

가게마다 잠겨있는 시간의 지층이 다 다르다. 영신정미소에는 90년 시간이 깃들어 있고, 옛 유천

소주 양조장은 70년쯤, 중앙소리사는 50년쯤의 시간이 있다.

 

2000년에 대구서 이곳으로 옮겨와 개업했다는 ‘새천년이용소’가 유천에서는 가장 젊은 막내뻘인데,

그래도 자리를 지켜온 세월이 사반세기가 넘었다. 이발사 최흥식(71)이 이용소를 내면서 함께

샀다는 ‘100년은 족히 됐을 것’이라던 살림집 안방을 보여줬다. 벽지 대신 신문지로 도배한 방이다.

 

세월을 훈장처럼, 혹은 흉터처럼 달고 있는 가게들 사이에는 지금은 없어진 것들과 그 시절 삶의

풍경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이불을 나눠 덮고서 군고구마를 먹으며 브라운관TV를 보는 대가족의 모습도 있고, 장날 뻥튀기

장수의 ‘뻥이요’ 하는 순간도 그려져 있다.

 

소달구지를 타고 가며 활짝 웃는 아이들과 쌀가마니를 머리에 이고 나르는 아주머니의 노동을

그린 그림도 담벼락에 생생하다.

 

오일장이 섰던 골목을 따라서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양과점, 양장점,

정육점, 대폿집, 사진관 그림도 그려졌다. 유천에 남아있는 ‘진짜 레트로’를 문화공간으로

다듬은 ‘유천문화마을’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새마을테마파크에 재현해놓은 1970년대 대폿집 모습.

 

늙은 극장이 옛 모습 그대로 남은 이유

 

유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유천극장이다. 1967년 문을 연 극장은 청도읍의 청도극장이나

중앙극장과 경쟁했을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

 

한창때는 멀리 청도 매전면 동곡에서도, 밀양에서도 ‘극장구경’을 하러 밀려들었다. 극장 위치

가 장터 한쪽 끝이어서 장날이면 관객들로 극장이 터져나갈 정도였단다.

 

극장에서는 영화를 주로 상영했지만 유랑극단 쇼도 보여줬고, 간혹 약장수가 극장을 빌려 공연

을 하며 약을 파는 일도 있었다.

 

유천극장은 TV 보급으로 관객이 서서히 줄면서 1990년대에 문을 닫았다. 문 닫은 극장은 방치

되다가 화재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8년 극장 안에서 놀던 아이들이 불을 내는 바람에 지붕과 내부 일부가 타버렸던 것. 오래전에

문을 닫은 데다 불까지 났지만 유천극장은 반세기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남아 있다.

 

극장이 원형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문 닫은 극장 건물이나 부지의 ‘쓸모’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오래된 극장은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안쓰러웠다. 문 닫은 극장이 온전하다는 건 그만큼 쇠퇴한 곳이라는 걸 말해주는 징표이기

때문이었다.

 

근대건축물과 오래된 골목 풍경을 보여주는 유천문화마을의 중심은 단연 극장이다. 문화마을을

조성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영화관 간판을 거는 것이었다니까. 간판에는 김지미, 남진 주연의

1968년영화 ‘별아 내 가슴에’의 장면과 신성일, 박노식 주연의 1969년 영화 ‘상해 임시정부’

장면을 그렸다.

 

간판을 걸어놓은 옛 극장 모습을 어찌나 감쪽같이 재현해 놓았던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사기

로 상영하는, 자주 필름이 끊기는 오래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유천문화마을의 벽화. 주택가 담에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영도 시인의 얼굴을 그렸다.

 

◆시인의 사랑과 레트로 정서

 

유천에는 또 오누이 시인 이호우·이영도 시인이 태어나 자란 생가가 있다. 시인은 모른다 해도 중년

이상의 나이라면 교과서에 실렸던 이호우 시인의 시조 ‘살구꽃 핀 마을’을 모를 수는 없겠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여동생 이영도는 작품보다는 청마 유치환이 짝사랑해 수천 통의 편지를 보냈던 마음속의 연인으로

유명하다. 유부남이었던 유치환과, 남편과 사별한 이영도와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었다.

 

사회 분위기도 그랬고, 하물며 둘은 교사였다. 유치환이 마음속의 연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편지

밖에 없었다. 편지를 부치는 장면이 등장하는 유치환의 시가 있다.

시에 등장하는 편지의 수신인은 당연히 이영도였을 터.

 

“…/ 사랑하는 것은 / 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

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유치환 시 ‘행복’ 부분)

 

오누이 시인의 생가 근처 기와집 벽에 이 시와 함께 두 사람의 얼굴과 우체통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유천에서 경험하는 이른바 ‘레트로 감성’은 문 닫은 극장이나 누추한 골목, 문 닫은 가게에서만

있는 건 아니다.

 

우체국에서 부친 연애편지, 마음속에 꾹꾹 담아야 했던 연정이야말로 디지털 세상에서 레트로 감성

일깨우는 정서적 풍경이다. 안타깝고 절절한 사랑의 서사는, 이제는 절대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

사랑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추억하게 한다.

 

유천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주민의 진심 어린 선의(善意)와 호의적인 태도다. 카메라를 들고 골목을

찍고 있는데, 주민 네댓 명이 다가와 안내를 자청하더니 앞장서서 ‘이곳도 찍으라, 저곳도 찍으라’며

훈수를 뒀다.

 

텅 비다시피 했던 마을에 관광객이 찾아오는 게 반갑고 한편으론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가게의 내력

거기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던 주민들이 자신들의 추억이 묻은 오래된 가게며 공간을 짐짓

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청도읍 신도리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공원의 새마을테마파크 전시관.

 

 ◆새마을운동 시절의 유물

 

유천에서 5㎞쯤 떨어진 청도읍 신도리에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이 있다. 새마을운동을

대하는 태도나 평가는 정권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칭송하는 쪽이든, 비판하는 쪽이든 새마을운동 자체가 아니라 통치자 쪽에게 조명을 맞추고 있어

서다.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던 가난을 극복하고자 협동과 울력으로 펼쳤던 잘살기 운동의 노력

성취를 그것 그대로 평가하기보다는, ‘통치자의 결단’을 앞세워 칭송하거나 반대로 ‘정치적

동원수단’이었다며 폄훼한다는 얘기다.

 

청도가 신도리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자처하는 건 1969년 8월 경남지역 수해복구 현장시찰

때 벌어진 작은 사건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 전용열차 편으로 경남을 향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신도1리 앞을 지나다가 주민들이 제방복구와 지붕과 담장을 개량하는 모습을 목격하곤 기차를

세웠다.

 

주민들로부터 ‘자발적으로 협동해 좋은 마을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대통령은, 이듬

해인 1970년 4월 열린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신도 1리를 예로 들어 “농촌 자조 노력의 진작 방안을

연구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게 바로 새마을운동의 태동이었다.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공원에는 두 가지 시설이 있다. 하나는 새마을운동의 변천을 기록과 사진

이용해 전시한 기념관이고, 다른 하나는 새마을운동 당시 농촌 모습을 세트장과 소품 등으로

재현해 놓은 ‘새마을테마파크’다.

 

유천마을의 레트로 공간과 짝을 이루는 곳은 마을 뒤 언덕을 끼고 초가집, 슬레이트집, 기와집, 구판장,

왕대폿집, 식당 등을 촬영세트장처럼 지어놓은 새마을테마파크다.

 

세트장은 허름하고 띄엄띄엄 들어선 관람공간이 비탈에 있어 불편한 데다 동선도 제대로 정돈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쯤을 세트장처럼 재현해놓은 학교 교실이며 그 시절의 대폿집·구판장 등을

둘러보는재미가 제법이다. 특히 성냥통과 책가방, 소주병, 영화포스터 등 오래된 소품들이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청도 풍각장 노점에서 풀빵을 굽는 모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너 곳이 있었다는데 풍각장의

풀빵집은 딱 한 곳만 남았다.

 

◆추억으로 멈춰 서다… 풍각장 국밥집

 

청도에는 과거의 경관이 남아있거나 어제의 이야기가 스며있는 곳들이 참 많다. 애써 찾아가야

할 만큼 이름난 명소는 아니지만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멈춰 서게 하는 장소가 많다는 얘기다.

 

청도에는 풍각면이 있다. 청도 서부지역의 교통과 물산이 모이던 곳이다. 이웃한 각북면은

‘풍각의 북쪽’이라 붙여진 지명. 각남면은 ‘풍각의 남쪽’이란 뜻의 지명이다. 인접한 면 단위

지명의 방위를 정하는 ‘기준점’이 됐을 정도니까, 풍각면의 과거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풍각의 중심은 5일마다 서는 풍각장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위세가 눈에 띄게 줄어

데다, 오전에만 반짝 붐비다 손님이 빠져나가 금세 헐거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2·7일 장날이면

군것질거리를 사 먹으며 장 구경을 할 만큼은 된다.

▲풍각장 부근의 소머리국밥집에서 국밥을 토렴하는 모습.

 

풍각장의 명물은 소머리국밥을 푸짐하게 내는 노포(老鋪)다. ‘어디’라고 딱 짚기 어려운

상호가 불확실해서다.

 

가게 현수막과 유리창에는 ‘맛있는 소머리국밥’이라고 붙였는데, 가게 이름인지 아니면 그냥

‘소머리국밥이 맛있다’는 진술인지가 불분명하다.

 

네이버 지도에 나오는 식당 상호는 ‘풍각소머리국밥’. “이게 가게 이름이냐”고 물었더니, 대답

‘그렇다’도 아니고 ‘아니다’도 아니다. ‘그냥 풍각장의 소머리국밥집’이란다.

 

이 식당에서 국밥을 말아내기 시작한 지는 70년이 넘는다. 이 정도 내력이면 자랑도 할법한데

도무지 그런 게 없다. 특별한 고집이나 전통 같은 것도 없다.

 

우선 식당부터가 샌드위치 패널의 간이건물이다. 국밥을 담아내는 뚝배기도 묵직한 오지그릇이

아니라 싸구려 멜라민 재질이다.

 

메뉴는 딱 두 개. 국밥 아니면 수육. 주문도 받기 전에 뚝배기 아래 밥을 깔고 그 위에 고기를 가득

담아 열 번 가까이 토렴해서 국밥을 낸다.

 

국밥집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간이건물의 허름한 분위기도, 인심 좋게 넣어주는

고기도, 여러 번 토렴해 밥알에 스민 국밥 맛도 여전하다.

 

국밥 가격은 7000원. 가격은 올랐지만 고깃국치고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국밥집뿐 아니라 풍각면에 이제 세 곳만 남았다는 중국집도, 칼칼한 맛의 추어탕 집도 시간의

깊이만 조금 다를 뿐,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매전면 덕산리의 폐업한 방직공장 자리에 문을 연 빈티지 카페 ‘덕산방직’에 전시한 포니 자동차.

 

◆포니승용차와 고향에 심은 벚나무

 

매전면 덕산리에는 1990년대 방직공장을 개조해 만든 빈티지 카페 ‘덕산방직’이 있다. 향토역사

문화 단체인 대구경북근현대사연구소 강철민 소장이 문 닫은 방직공장을 인수해 그동안 수집한

근현대의 다양한 물품을 전시하는 ‘기억의 공간’ 프로젝트로 시작한 카페 겸복합문화공간이다.

 

공장은 리모델링을 거쳐 절반은 카페 공간으로, 나머지 절반은 레트로 오락실, 만화방, 문방구,

비디오가게 등을 재현한 체험공간으로 나눠 조성했다.

 

체험공간에는 카세트테이프와 통성냥, 분유통, 공중전화기 등 소품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

하고 많다. 브라운관TV와 짐자전거, 포니 승용차, 포니 픽업트럭 등도 체험공간에 들여놓았다.

오래전의 추억에 젖어 과거를 되새김할 수 있는 곳이라 레트로 테마의 청도 여행 코스에

이어붙이기 딱 좋은 곳이다.

 

마침 벚꽃이 한창이라서 청도의 꽃구경 얘기를 덧붙인다. 풍각장에서 멀지 않은 각북면에 터널을

이룬 벚꽃길이 있다.

 

각북면 우회도로(각북면 우산∼이서면 가금) 2.4㎞ 구간이 ‘각북벚꽃길’이다. 지난주에는 벚꽃

길에 꽃이 없었는데 며칠 만에 연분홍 벚꽃이 활짝 피어 만개했다.

 

각북벚꽃길에는 사연이 있다. 그 얘기가 각북면에서 벚꽃길 입구에 세운 ‘각북벚꽃길 유래비’

에 새겨져 있다.

 

사연의 주인공은 각북면 명대리 출신의 이창상(73) 유신산업 창업주. 그는 열일곱 나이에

어머니가 쥐여준 삶은 달걀 5개를 들고 상경해 공장 일을 하면서 모진 고생 끝에 가구

회사를 창업해 지금의 규모로 키웠다.

 

사업이 안정궤도에 오른 1999년 이 씨는 ‘성공해 돌아와서 고향을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했다.

 

어머니의 유훈을 지키고자 그는 명대리 마을 앞 청도천 둑에 3년생 벚나무 묘목 630그루를

사비로 사서 심기 시작했다. 이 씨가 벚나무를 심자 자연스럽게 마을 주민들도 합세하면서

지금처럼 울창한 벚나무 터널이 만들어졌다.

 

청도에는 이른바 ‘무작정 상경’ 시대에 타지에서 성공한 이들의 고향 사랑 흔적이 유난히 많다.

마을회관마다 지역 출신 출향 인사의 경제적 지원을 기리는 송덕비 하나쯤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은 고된 노동을, 고향을 지켜온 이들은 지독한 가난을 견뎌야 했던

시절 얘기다. 너나없이 모두 다 어려웠던 시절을 위로하듯 각북벚꽃길의 벚꽃은 올해도

화사하게 피어났다.

 

◆죽바위▼

▲청도에 있지만 청도 사람도 잘 모르는 곳이 있다. 각남면 녹명리 구만마을의 ‘죽바위’다. 테이블

형상의 거대한 바위는 평평하지만, 바위 끝은 수직 직벽의 벼랑이라 오금이 저린다.

 

이곳을 왜 ‘죽바위’라 불렀을까. 첫 번째 전설은 이곳에 있었던 고대국가가 신라로부터 침공을

당하자 바위에 숨어 죽(粥)을 먹으며 견뎠다는 이야기.

 

두 번째는 바위 형상이 죽그릇을 빼닮아 불렀다는 설. 세 번째는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 바위에

기운이 스민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며 ‘죽(粥)바위’란 지명 대신 ‘죽(竹)바위’로 개명했다는 얘기다.

데살로니가 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Thessaloniki)

▲하기아 소피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를 기반으로 서기 8세기에

세워졌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는 도시 내 15개의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성스러운 지혜)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그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입니다.

 

이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테살로니키의 여러 기념물 중 하나입니다. 3세기

부터 현재의 하기아 소피아 위치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8세기에 현재의 건물이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를 기반으로 세워졌

습니다.

 

1205년 제4차 십자군 원정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하기아 소피아는 테살로니키 대성당으로 개조

었으며, 1246년 도시가 비잔틴 제국에 반환된 후에도 그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1430년 3월 29일 오스만 술탄 무라드 2세가 테살로니키를 점령한 후, 이 교회는 모스크로 개조

었습니다.1912년 테살로니키 해방 후 교회로 재개조되었습니다.

 

평면은 돔형 그리스 십자가 바실리카 형태입니다. 이스탄불의 굴(Gül)과 칼렌데르하네 모스크,

니케아의 파괴된 승천 교회(Church of the Dormition)와 함께 비잔틴 중기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 예시 중 하나이다.

 

성상파괴 시대에는 교회의 후진이 평범한 금색 모자이크와 단 하나의 큰 십자가만 장식되었는데,

이는 콘스탄티노플의 아이레네 성당과 니케아의 성모승천 교회와 유사합니다.

 

십자가는 787-797년 성모 마리아(신을 전하는 자, 마리아)의 이미지로 대체되었으며, 이는 성모

기사단의 승리 이후였습니다.

 

돔 안의 모자이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나타내며, 사도행전 1장 11절의 "갈릴리 사람

들이여, 왜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는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돔은 열두 사도, 성모 마리아, 그리고 두 천사의 형상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1917년 테살로니키

대화재 이후 내부 장식의 대부분이 회반죽으로 덮였습니다. 돔은 1980년에야 복원되었습니다.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 있는 비잔틴 성당으로 ‘성스러운 지혜’의 뜻이다건축은 8세기

초의 것으로 봄원개십자형식(⇒그리스 십자식 성당)의 초기작의 하나로서 원상을 잘 보존

하고 있다

 

아프시스의 천정은 최초로 인상 표현을 꺼린 성상논쟁(이코노클래즘시기에 대십자가 만을

나타냈으나 논쟁종료 후에는 오늘날에 보이는 성모자상으로 대치되었다

 

또한 돔도 같이 9세기의 『성천』도로 장식되고 있다그 양식은 레온 6세(Leon VI, Philosophos, 

재위 886~912) 때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나르텍스 장식에

가까우며 마케도니아 조 초기회화를 아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아기아스 소피아스 광장 에서 본 전망 

▲아기아스 소피아스 광장 에서 본 뒤쪽 전망 

▲성당 입구.

▲하기아 소피아 내부 전경

▲인상적인 모자이크가 있는 돔 (9세기)

▲지성소 내부.

▲아치의 모자이크 성 모자(11세기)

▲교회 내부 모자이크 화.

데살로니가 성 디미트리우스 성당(Church of Hagios Demetrios)

▲하기오스 데메트리오스 교회는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로, 4세기에 지어졌으며,

그리스에서 가장 큰 대성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고기독교 유적 중 하나입니다.

 

데살로니카와 베레아에서 바울과 관련되는 동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그러나 데살로니카에서

찾아볼 만한 곳 중에 하나가 이 지역 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디미트리우스 교회일 것이다

 

성 디미트리우스는 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 치세 때 아니면 306년 막시미아누스 치세 때 헝가리

시르미움에서 순교한 분인데어쩌다 데살로니카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5세기에 지은 성당은 7세기에 재건되었으나 이것도 1917년 화재로 타버리고 1948년 지금의 성당

이 재건되었다

 

이 바실리카풍의 교회는 크게 로마식 집회장소용 홀과 세례 욕조가 있는 유적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특히 세례터는 성 디미트리우스가 갇혀 있다가 순교했던 장소 위에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그의 제자 네스토가 이교도 리아에우스와 싸웠다가 패전했던 AD 303년에 이 곳에 묻혔

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성전은 밀란의 종교적 관용에 관한 포고가 있었던 313년후에 작은 기도처소로 처음에는 설립

되었었다

 

백년이 지난후에 레온티우스일라리쿰의 주교 때에 큰 세 개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성전으로 같은

장소에 더 크게 지어지게 된다이 당시 성전 제단 밑으로 성 디미트리우스가 순교했던 장소와

동일한 세례욕조가 있었다.

▲키예프 황금지붕 수도원에서 제작된 12세기 성 데메트리오스 모자이크

▲성 데메트리오스 ▼

▲데메트리오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

▲살로니카의 성 데메트리우스(18세기). 월터스 미술관 소장품.

▲하기오스 데메트리오스 교회

 

교회는 나르텍스와 십자형교회의 뒷자석이 높은 바실리카풍으로 다섯 개의 측랑이 있다우리는

교회가 한 개의 안뜰만 갖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르텍스가는 입구는 안마당 안있는 두 개의 문으로 통과하게 되어있다두 개문을 통과하여

나르텍스로 들어가면 교회의 서쪽벽을 따라 북과 남으로 가는 통로가 나온다

 

나르텍스는 교회보다 좁고 짧은 폭으로 되어있다왜냐하면 북쪽구역이 계단으로 할애되었기

때문이다

 

네줄로 된 열주들은 하나의 중심을 두고 회중석사이로 양쪽에 두 개씩 나있는 다섯 개의 통로를

나누어주고 있다그 원주기둥들은 바실리카고유양식을 기초하여 다양한 변화를 주어 장식

되었다

 

교회측면 넘어의 교차랑 설계는 두 개의 날개처럼 되어있는 모양이다중앙의 지성소로 측면은

날개로 구성되어 있다지성소는 크고 밝은 다섯 개 창문을 통해 밝게 비추어주고묘지와는 높은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다

 

이것의 중앙에는 성찬대가 있고 십자가 모양으로 움푹팬 바로 아래엔카니온석관 형태의

대리석 궤로 이루어진다건조된 혈액의 작은 유리병이 이 대리석 궤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교회는 독창적으로 지붕을 가로질러 교차하는 빔이 대들보로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회중석

위를 덮고 있는 지붕은 다른 지붕보다 더 높으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그 중심부 구역 또한 십자형의 날개로 일정한 간격을 지붕과 유지하고 있다대리석 장식이

디미트리우스교회 전체를 형성하며 방사형창이 있다

 

그리고 원주들과 제단감실등의 사이를 석판들과 대리석판으로 덮어놓았다독특한 점은

회중석과 나르텍스부분에 대리석장식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5세기의 바실리카 성전의 형태에 속하는 모습으로 동쪽 벽에는 스카이로스 석판

장식이 북쪽에는 트라이빌론 장식이 되어있으며 각각 그들의 틈에 한 줄로 기도손모양

장식이되어있다.

 

 이 교회의 주요한 특징은 초기로마건축양식과 5세기 바실리카풍 양식을 한쌍으로 잘 어울

도록 배열하였다는 것이다.

▲교회 밖 세례대.

▲아치의 어두운 배경이 붙은 본당 내부.

 

교회 본당 회중석의 북서쪽 모퉁이문설주와 열주의 첫 번째 기둥사이이탈리아에서

고안 되어진 듯한 기념묘가 존재한다

 

이것은 1481년 교회에 사적으로 안치하도록 허가를 받은 부요한 데살로니가 귀족 누가

스판티누스의 것이다이 교회에 유명한것은 모자이크이다

 

그러나 작은 북쪽 열주에 서쪽면을 장식했던 모든 모자이크들이 1917년 화재로 소실

되었다

 

교회에 남아 있는 무덤에서는 단지11개의 모자이크가 나왔고 5세기-9세기의 연대에 속한다

그들은 노아와 두 개의 지성소 문설주홀과 나뉜 동쪽 파샤드의 벽에서 붙여진 것이다

 

남쪽 통로 내부의 서쪽 벽의 상단에 성 데메트리우스가 기도하는 형태를 낮은 받침대 위에

초상화를 새겨져 있다그의 손바닥은 금 모자이크 세공으로 덮여있고 화가가 오래된

독실한성인의 아이콘을 모방하는 것임을 표시하고 있다

 

오른쪽 여자는 아이를 그에게 건네고 있으며 두 번째 아이의 발이 왼쪽에 보이는 동안무대

문 한쌍과 성 데메트리우스에게 아이들의 헌신을 표현한다이것은 5세기의 것이다.

 

 북쪽 통로에 유사하게 위치해 있는 다른 모자이크는 성 데메트리우스를 향하여 트럼펫을 구부

리고 있는 천사의 초상화로 이 초상화는 원래대로 남아 있지 않다.

 

 누가 스파누트스의 무덤 곁에 본당 회중석의 서쪽 벽의 다른 모자이크는 7세기의 것으로 도시

벽 흉벽 앞 두 목사 사이에 서있는 성 데메트리우스를 보여준다

 

북면 문설주의 성 데메트리우스는 도시 벽의 정면인 감독과 주교 사이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

되어지고 있다그림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여기 당신은 미래한 사람들의 흐름과 남겨진 도시의 난잡한 섞임을 막은 그 유명한 집의 창시자

데메트리우스를 보고 있다

 

이것은 7세기 초반에 노예의 입장이던 데살로니가의 세 번째 포위기간을 언급한 것이다동쪽

면 문지방의 모자이크 성 테메트리우스와 성인이 그의 오른팔로 끌어안은 두드러진 얼굴의

특징을 지닌 데메트리우스를 보여준다.

 

 그 그림 밑에 한 구절이 쓰여 있다. (그리스도의 순교자도시의 친구시민과 객을 돌보는 자는

복이 있다.) 이 모자이크에서 초상화를 그렸던 성직자는 629-34년에 붕괴된 이후 교회의

재건축의 의무를 맡은 집사이다

 

서편 문설주의 성 세르기우스는 담 정면에 기도하는 형상으로 표현되어진다이 문설주의 서면

두 명의 아이와 함께 있는 성인의 모자이크로 그들의 손은 헌금하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남면에는 소원을 담은 모자이크를 동정녀 마리아가 전사성인과 함께 있다이 모자이크 아래에

이런 글이 있다.

 

<인간으로써 나는 실망했다그러나 당신은 내 삶에 가장 큰 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감사함

으로 이것을 드립니다.> 

 

이 그림의 상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흉상으로 축복하시는 그림이다이 모자이크는

 9세기에 속한다.

▲드미트리우스 교회안의 성화

 

성 데메트리우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벽화는 교회의 남쪽 벽에 있다이것의

대부분은 현재 큰 아치형의 개막으로 인해 파괴되어져 있다

 

초상의 왼손부분에서 한 임금이 그의 군대의 호위아래 말 등에서 따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뒷 배경으로 서 있는 큰 건물은 도시 경기장 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왼손부분은 크게 손상되어 있다이것은 교회의 실내현관 부분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불꽃과 연기가 보이는 지붕위이다

 

땅에서 창을 가진 형상이 홀로 걷는다반대로 외부로 퍼져 나가는 날개를 가진 천사가 내려

와 복종하고 있다현관 위에서 두려워하는 여성은 그들뒤에 군인과 함께 묘사되어 진다.

 

 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진다. (경기장에 의한 거룩한 교회도시 경기장 가운데 서 있어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를 표시하고 있다

 

이 벽화는 8세기 초반에 속한다본당 회중석의 남쪽 통로에 있는 서면의 최서단 문설주는

성 요셉의 벽화이다

 

그는 짧은 머리에 수염이 없는 젊은 남자로 묘사되어져 있고 그의 오른 손에는 더블 십자가

를 잡고 그의 왼손은 미세화에서 한 조상을 보호하고 있다

 

미세화에서 성경과 향로를 들고 있는 이 벽화는 수도사가 되어 요셉의 이름을 가졌던 황제

존 4세 칸타쿠네를 다룬 것이다

 

같은 열주에서 남면의 두 번째 최서단 문설주에는 수도사 복장과 모가달린 옷의 성 누가

스테리어트스의 초상이 있다

 

이것은 11세기에 속한다트빌로의 남쪽 붙임기둥은 알레고리컬한 장면으로 한 남자가

유니콘에게 쫓기고 북쪽 기둥은 유월절로 1474-93년의 것이다.

▲테살로니키의 성 데메트리우스의 유해,

▲성 데메트리우스의 유해가 보관된 교회 내부의 작은 성소

▲지하 성전

 

이 지하성전은 교차랑 아래 지하동굴이며 남향날개쪽으로 들어간다. 계단의 왼쪽

에서 아래로 작은 예배실로 가게되는데 두방 은 순교자의 몸을 즉시

넣어두었던 칸막이로 된 성도의 전형적인 납골당이다.

 

 아칸서스와 월계수 나뭇잎과 야자나무무늬의 대리석으로 아치를 장식했다. 성합의

기본 앞면에는 대리석으로 된 원형 세면대가 있었다. 지하실의 중앙은 나무로

둘러싸여있다

▲원래 5세기 교회의 조각상과 부조 장식이 있는 기둥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 지하 납골당

▲원래 성묘의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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