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억새·초록 습지’ 유화같은 횡성호…가을의 문턱, 짙어져가는 풍경을 찾아서

▲초가을 이른 아침에 횡성호 습지에서 만난 풍경. 횡성호 습지에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아침 볕이 스며들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가을이 더 깊어지면 횡성호반에는

더 자욱한 안개가 낀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 횡성

 

오전 여섯 시. 횡성호 상류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물길을 낀 습지 위로 안개가 고이듯 내려

앉아 산자락까지 지워 버렸다. 갓 떠오른 해가 산등성이를 넘자 안개 사이로 오렌지 색깔의 빛이

비껴들었다.

 

억새가 일제히 금빛으로 일어서고, 밤새 이슬을 머금은 풀들이 저마다 반짝였다. 그래 봐야 딱 10분

쯤이었을 것이다. 안개는 이내 스러졌고, 습지는 다시 평범한 초록으로 돌아갔다.

 

이런 아침을 보겠다며 작정하고 나섰던 건 아니었다. 사실, 이즈음의 여행은 계획이란 걸 세울 것도

없다. 무얼 꼭 봐야겠다고 정하지도, 어디를 빠뜨리면 안 된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된다.

 

폭염의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 부는 ‘좋은 날’이 계속되고 있다. 이럴 때는 어디를 가도 그냥 다

좋다. 여행하기에는, 정말로 좋은 계절이다.

 

‘어디든 다 좋을 때’ 가는 곳의 목록에서는 ‘평소에도 좋은 곳’은 빼는 게 좋겠다. 평상시에는 매력이

좀 덜한, 그래서 호젓한 곳이 지금 가면 딱 좋을 곳이다.

 

그렇게 고른 곳이 강원 횡성이다. 횡성은 ‘일상의 내륙’과 ‘여행지 강원’을 가르는 경계다. 영동고속

도로원주나들목까지는 ‘일상의 도시’ 느낌이다. 경계는 횡성의 새말이다. 새말나들목을 지나야

비로소‘여행의 영역’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횡성에는 뭐가 있을까. 횡성 한우 말고는, 금방 답이 안 나온다. 20여 년 전쯤 횡성군이 ‘횡성 팔경’

정한 적이 있다.

 

그때 뽑은 팔경이 다음과 같다. 병지방계곡, 태종대, 삼형제바위, 풍수원성당, 횡성온천, 민속 장터,

안흥찐빵 마을, 횡성댐. 지금은 물론이고, 행정이 팔을 걷어붙였던 그때도 횡성 팔경을 아는

이들이 없었다. 문제는 홍보가 아니라 ‘공감’이었다.

 

횡성의 명소는 다들 고만고만하다. 첫손으로 꼽을 만한 압도적인 곳이 없다. SNS에 넘쳐나는 복제

여행정보만 봐도 사정을 알 수 있다.

 

‘횡성 팔경’이니 ‘가 볼 만한 열 곳’이니 하는 콘텐츠의 내용이 저마다 다르다. 개중에는 몇 해째

문 닫은 온천을 ‘제4경’으로 올려 둔 콘텐츠도 있다. 이맘때 횡성 여행에서 꼭 가 봐야 할 곳이란

건 없다.

 

순서를 따라 짚어 갈 일도 아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왜’냐고 묻지 않기로 한다. 제안하는 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다니는 여행’이다. 가을볕이 좋으니까.

▲가을비 촉촉하게 내리는 날의 풍수원성당. 초기 풍수원성당을 재현한 초가집 툇마루에서 비를

피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 귀퉁이에 초가지붕이 걸렸다.

 

◆촉촉하게 비에 젖은 성당

 

풍수원성당을 먼저 갔다. 서원면 유현리, 6번 국도를 따라 양평에서 강원도로 막 접어들면 나오는

자그마한 산골 마을이다. 성당 외벽은 붉은 벽돌이 비에 젖어 색이 짙어졌다.

 

마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성당 앞을 넓게 가리고 서서, 젖은 잎에서 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1910년 봉헌식 때 심었다는 나무니까 그 자리에 심긴 지 116년이 됐다.

 

성당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성당 안의 공기가 서늘했다. 종교를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오래된 성당에 들면 마음이 가지런하게 정돈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깊은

산중의 오래 묵은 절집에 들었을 때와 다르지 않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성당의 내력이 만만치 않다. 1802년 신태보 베드로를 비롯한 40여 명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양평을 떠나 여드레를 헤맨 끝이었다. 그때만 해도 풍수원은 사람 그림자 구경하기

어려운 오지였다고 했다.

 

신유박해로 쫓기던 신자들은 ‘여기라면 들킬 염려가 없다’고 생각했다. 신앙 공동체를 이룬 이들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 그리고 신부 없이 기도하며 80년을 버텼다.

 

1888년에야 작은 한옥 초가집 본당을 가졌고, 1896년에는 정규하 신부가 부임했다. 그는 47년을

여기서 주임신부로 살았다. 성당을 지으려고 신자들이 엽전 1만5000냥을 모았는데, 정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 돈을 가지고는 부족한데 교우들은 짓기를 재촉합니다.” 완공을 앞두고 보낸 편지에는 또

이렇게적었다.

 

“돈이 넉넉지 못하여 잘 짓지는 못했습니다.”

 

잘 짓지 못했다고 했으나, 성당은 근사하다. 소박하면서도 품격 있다. 박해받던 이들의 신심과

지극한 마음을 대들보로 삼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성당은 의미가 깊다.

 

이 성당은 한국인 사제가 지은 최초의 성당이자,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십자가의 길에서 만난 묘

 

성당 뒤편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열네 장면을 새긴 돌비석이 숲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비 온 뒤라 숲이 유난히 청량했다. 젖은 흙냄새가 짙었다. 걸음이 절로 느려지는 길. 비석 하나를

보고몇 걸음 걷고, 또 하나를 보고 몇 걸음 걷는다. 새소리와 나뭇잎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십자가의 길 끝에는 사제들의 묘가 있다. 풍수원성당의 주임신부로 47년을 살았던 정 신부의

있고, 그를 이어 부임했던 사제들의 묘도 있다. 그런데 사제 묘 뒤쪽의 후미진 자리에 봉분

없는 평장 묘가 하나 있다. 조이분 마리아 할머니의 묘다.

 

1891년에 태어나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아홉 살에 민며느리로 보내졌다. 시가에서는 시어

머니의 학대와 구타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고관절이 파열돼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렇게 쫓겨나

이곳저곳 전전하다 풍수원에 닿았다.

 

남의 아이를 봐 주고 살림을 거들며 지내던 그에게 정 신부가 문간채를 내주고 쌀을 조금 지원해 줬다.

그러자 그는 고아와 장애인 일곱을 데려다 함께 살기 시작했다. 산나물을 뜯고 땔감을 손수 장만해

가며 그들을 먹였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웠을 그가 쌀이 조금 생기자 일곱을 거뒀다.

 

그 뒤로도 고아 넷을 돌보고, 반신불수와 중증 치매인 두 할머니에게 밥을 떠먹이고 대소변을 받아 냈다.

6·25 때는 피란도 가지 않은 채 성당의 성물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어 지켜 냈다.

 

동네 노인이 임종할 때면 며칠씩 밤을 새워 곁을 지켰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던 할머니는 1971년에 눈을

감았다. 예수가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걸어간 길. 풍수원성당 십자가의 길 끝에는 조이분 마리아가

묻혀 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잘 알려진 순례 명소지만, 신도가 아니더라도 풍수원성당은 꼭 가 보길 권한다. 평화

로움으로 가득한 충만한 가을날이라면 더 그렇다. 비신도가 성스러운 종교 공간을 여행 목적지로 삼는

것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풍수원성당 일대는 2003년 유현문화관광지로 지정됐다. 성당 뒤쪽에 수목원을 조성하고, 유물전시관

열었으며, 옛 여관 격인 원(院)을 복원해 놓았다. 성당 말고도 천천히 돌아볼 것들이 있다는 얘기.

관광지라곤 하지만 ‘이렇게 한산해도 될까’ 싶을 정도의 고즈넉함이 가장 큰 매력이다.

 

◆호수에 잠긴 다섯 마을

 

횡성호에 간 건 이른 새벽이었다. 전날 내린 비로 산허리마다 구름이 걸렸고, 젖은 숲에서는 김이 오르듯

안개가 피어올랐다. 아침 햇살이 퍼지면서 펼쳐지는 호수 주변 습지 풍경은 마치 인상파 화가가 유화

물감을 두껍게 발라 그린 그림 같았다.

 

가을 초입의 풍경이 이럴진대, 하루하루 가을 색이 더 짙어지면 얼마나 더 근사해질까.횡성호는 2000년

횡성댐 완공으로 생긴 인공호다.

 

섬강 줄기의 계곡을 막아 물을 가두면서 갑천면의 다섯 마을이 물에 잠겼다. 구방리, 중금리, 화전리,

부동리, 포동리. 253세대 938명이 고향을 떠났다. 호숫가 망향의 동산에 자료관이 있다.

 

떠난 이들이 생활 용구와 기록 사진을 모으고, 수몰 전 마을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두었다. 전시된

마을이야기를 읽다 보면 잠긴 것이 논밭과 집터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물에 잠긴 포동리에는 예순 해쯤 전까지 열 명을 태우는 나룻배가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었다. 부동리는

봉우리 정상의 큰 바위 셋이 가마솥을 닮아 가마골이라 불렸고, 1500마지기 넘는 들에는 농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중금리에는 짝바위, 숲밖에, 군량골, 아랫말, 대문안골 같은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자료관에는

1997년 48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폐교한 화성초등학교의 사연도 있다.

 

1946년 중금리 공회당에서 아흔네 명의 학생으로 개교했고 6·25 때 잠시 휴교했다가 수복 후 다시 열었

으며 그렇게 오십 년을 이어 오다 수몰로 문을 닫기까지의 학교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횡성호에는 ‘횡성호수길’이 있다. 6개 구간으로 이뤄진 전체 31.5㎞의 걷기 길이다. 처음 길을 낼 때는

지역에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데, 먼저 알아본 관광객들이 밀려들면서 일약 명소가 됐다. 개장

초기 주말마다 몰려든 관광객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주차장을 3배나 늘렸을 정도다.

 

호수를 끼고 도는 걷기 길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건 5구간이다. 전체 구간 중 유일하게 출발했던 자리

되돌아 오는 원점회귀코스다. 전체 구간이 9㎞ 정도로 세 시간쯤 걸린다.

 

5구간도 A코스와 B코스로 나뉘어 있어 각각 4.5㎞씩 걸을 수 있는데, 시간이 넉넉하지 않거나 짧게

걷고 싶다면 B코스를 추천한다.

▲안흥면사무소 앞의 찐빵 가게. 안흥찐빵의 내력은 영동고속도로가 놓이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횡성이 아닌 ‘안흥찐빵’인 이유

 

횡성에는 안흥면이 있다. ‘안흥찐빵’의 그 안흥이다. 면 소재지에 들어서면 찐빵 간판을 단 집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가게마다 김이 오른다.

 

안흥찐빵의 역사는 60여 년이다. 1960년 무렵 심순녀라는 이가 시작했는데, 다섯 남매를 굶기지

않으려고벌인 장사였다. 음식 장사를 하면 팔다 남은 것으로나마 식구들 허기를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고 한다.

 

처음의 찐빵은 팔려고 만든 게 아니라 ‘팔다 남기려고’ 만들었던 셈이다.천안 호두과자이고 경주

황남빵인데, 횡성 찐빵이 아니라 굳이 ‘안흥찐빵’이다.

 

여기에는 명확한 지리적 이유가 있다. 안흥은 조선 시대 안흥역과 실미원이 있던 길목이다. 그 길을

따라 42번 국도가 지나간다. 42번 국도는 영동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버스가 분주하게 다니던 길이었다.

 

42번 국도 안흥면 소재지 서쪽에는 새말로 넘어가는 전재라는 험준한 고개가 있고, 동쪽에는 평창

방림으로 넘어가는 문재가 있다. 전재와 문재 고개 사이에 있는 안흥면은 고개 하나를 넘어온 버스

다음 고개를 넘기 전에 쉬어 가던 곳이었다.

 

힘겹게 고개를 넘어온 차들이 다음 고개를 앞두고 안흥에서 쉬어 가는 사이에 사람들은 찐빵 몇 개로

허기를 달랬다. 지금의 안흥찐빵 명성은 그때 먹던 찐빵의 맛을 기억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고개 대신 터널이 뚫린 지 오래고, 고개를 넘은 차가 쉬어 갈 이유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찐빵집은 안흥

에만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찐빵의 독점 권리를 인정해 줘서 그런 건 물론 아니다.

 

아직도 안흥찐빵을 안흥에서만 사 가는 여행자들을 보면, 찐빵 하나에도 시장논리보다 더 끈끈한 무언

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안흥찐빵과 관련한 또 다른 얘기가 있다. 안흥면 소재지에서 상안리 쪽으로 조금 가면 길가에 벼랑이

하나있다. 삼형제바위다. 주르륵 이어진 산자락이 통째로 바위로 드러났는데, 그 위로 소나무가

얹혀 있다.세 봉우리를 각각 맏이봉, 둘째봉, 막내봉이라 부른다.

 

안내판에 적어 놓은 유래가 재미있다. 길손의 먹을 것을 빼앗던 도깨비 삼 형제가 팥 든 빵을 먹고 바위

굳었다는 것이다. 붉은 팥이 귀신에게 해롭다는 신선의 말을 듣고 현감이 꾸민 일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편안함이 절로 인다’는 안흥(安興)이 되었고, 안흥찐빵은 길손의 필수품이 되었

단다.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얘기다.

 

찐빵의 역사가 60년이고, 밀가루가 흔해진 것도 원조 밀가루가 포대째 들어온 뒤의 일이다. 찐빵이

유명해지고 난 후에 바느질하듯 기워 붙인 이야기일 게다.

▲오원저수지 부근 카페 ‘꼼방’의 내부. 벽 한쪽 전체를 채운 2만 장의 LP를 마음대로 꺼내어 보고

음악을 청해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오래된 명반들이 많다.

 

◆벽을 가득 채운 LP 2만 장

 

안흥에서 42번 국도로 횡성읍으로 가는 중간쯤에 우천면 오원리가 있다. 오원리에는 오원저수지가

있고,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하얀 집이 한 채 있다. 카페 ‘꼼방’이다. 관광지라

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시골 동네인데, 일부러 이 카페를 찾아 여기까지 오는 이들이 있다.

 

카페는 한쪽 벽 전체가 온통 LP다. LP를 꽂은 책꽂이가 천장까지 닿아 위쪽 음반을 꺼내려면 사다리를

놓아야한다. 2만 장쯤 된다고 했다. 가만 들여다보니 작곡가 이름표를 붙여 알파벳순으로 세워 두었다.

 

멘델스존, 오펜바흐, 파가니니, 푸치니,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클래식 음반만 있는 건 아니다.

다른 벽에는 가요 LP를 모아 두었고 국악 음반도 적지 않다.

 

주인은 경기 분당에 살다 퇴직한 뒤, 2018년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왔다. 한창때는 인터넷 동호회

운영하며 오디오를 직접 만들었던 열혈 오디오 마니아 출신이다.

 

그가 모아 놓은 음반은 라이선스판이 아닌 거의 전부가 직수입한 ‘원판’이다. 그걸 그는 ‘그라모폰 노란

딱지’라 불렀다. 노란 딱지 음반은 라이선스 음반 가격의 두 배가 훨씬 넘었다.

 

한창 LP를 사들였던 1990년대 초반, 원판 한 장 가격이 1만5000원쯤 했다. 자장면 한 그릇에 1200원

을 받던 시절이었다.

 

평생을 바쳐 손수 사 모은 2만 장의 LP는 귀한 수집품이다. 모을 때의 수고로 봐도 그렇고, 들인 비용

으로 봐도 그렇다. 유리 진열장 안에 넣어 두고 손도 못 대게 할 법한데, 여기서는 누구나 마음껏

꺼내 보고 원하는 곡을 찾아서 ‘틀어 달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아무렇게나 관리해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 그 얘길 했더니 카페 주인은 “모셔 두기

위해 모은 게 아니라 들으려고 모은 것”이라며 웃었다.

 

이곳에서는 매장에서 직접 볶은 원두로 내리는 진한 향의 핸드드립 커피가 잘 어울린다.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주인이 골라 주는 음악을 들어도 좋고, 추억을 되새길 법한 음반을 직접 찾아 틀어

주길 청해도 좋다.

 

횡성에서 좋았던 건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오래된 성당 마루에 앉아 듣던 빗소리, 물방울 떨어지

숲길을 천천히 걸었던 한 시간, 안개가 걷히며 억새가 반짝이던 10분, 그리고 창가에서 음악을

듣던 오후….

 

애초에 꼭 봐야 할 것도, 빠뜨리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완연한 가을이다. 이런 여행을 하기에 딱 좋은,

축복 같은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카페 ‘노랑공장’

 

횡성읍 옥동리에는 옛 물류창고를 개조해 만든 카페 ‘노랑공장’이 있다. 마당부터 요란하다. 런던

이층버스가 서 있고, 그 옆에 샌프란시스코 올드타운 트롤리가 놓였다. 건물에는 노랑과 검정과

빨강 줄무늬를 칠하고 지붕에는 노란 굴뚝 장식을 올렸다.

 

창고 벽면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액자와 포스터, LP 재킷, 커피 마대자루로 빼곡하다. 앤티크 가구

와 타자기, 다이얼 전화기, 백과사전 전질, 금빛 조각상…. 물건에는 가격표가 붙었다.

카페이자 앤티크 상점인 셈이다.

'메밀꽃 필 무렵' 봉평에 가면…하늘엔 솜사탕, 들엔 소금꽃…

▲초가을은 강원도 평창 봉평면에 메밀꽃이 만발하는 시기다. 올여름 집중호우 탓에 메밀 작황이

부진하지만 사진 같은 풍광을 볼 수 있는 메밀밭도 곳곳에 있다. 달 밝은 밤에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묘사된 것처럼 숨 막히는 절경이 펼쳐진다.

 

'여름장이란 애시당초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칩칩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찮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이 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1930년대 강원도 봉평 일대를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던 장돌뱅이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묘사된 봉평장터 풍경이다.

 

메밀꽃 필 무렵》은 허 생원이라는장돌뱅이 영감과 서로 입장이 비슷한 장돌뱅이 조 선달, 동이

세 사람이 봉평장에서 대화장까지 달밤의 길을 같이 걸어가면서 전개되는 하룻밤 이야기다.

 

늙고 초라한 장돌뱅이 허 생원이 20여 년 전에 정을 통한 처녀의 아들 동이를 친자로 확인하는 과정

푸른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밤길 묘사와 더불어 시적인 정취가 짙게 풍겨

나온다.

 

매월 끝자리 수 2일과 7일에 장이 서는 봉평은 예전만은 못하지만 요즘도 시끌벅적한 시골 장터 분위

맛보기에 충분하다. 장이 서는 날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여기에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닭, 오리, 꿩, 기러기, 거위, 토끼, 칠면조 등도 장터에 나와 한몫 거든다.

삐약거리는 병아리들 사이로 '꼬끼오'를 연발하는 닭, 그 옆에서 꽥꽥거리는 오리들의 합창소리가

장터를 가득 메운다.

 

다른 한쪽에서는 '뻥이요~' 소리와 함께 뻥튀기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구수한 강냉이 냄새가 퍼지

한두 줌씩 거저 얻어먹는 재미도 있다.

 

골동품 전시장 같은 노점 잡화들도 흥미롭다. 호롱불, 숯다리미, 풍경, 절구공이, 화로, 검정고무신,

반질반질 윤이 나는 무쇠솥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들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누가 뭐래도 장날의 백미는 먹을거리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먹을거리는 올챙이국수다. 장터

바닥쪼그리고 앉아 옥수숫가루로 만든 국수에 양념간장을 넣어 먹는 올챙이국수는 그야

말로 별미다.

 

장터의 분위기가 마무리될 즈음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를 걸어보자. 1990년 이효석문화마을

지정봉평면 창동리 마을은 매년 가을이면 수만 평에 이르는 들판에 어김없이 하얀 메밀꽃이

피어나 장관을이룬다.

 

메밀꽃이 산허리를 휘감으며 마을 전체에 소금을 뿌린 듯 하얗게 피어난 모습은 어디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메밀꽃을 배경으로 지금도 작품 속 무대가 고스란히

살아 있어 가산 문학의 향수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봉평장터를 벗어나 이효석문학관 방향으로 5분쯤 걸어가면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가산공원이 있다.

 

그 옆으로는 흥정천이 흐르는데 소설 속에서 물에 빠진 허 생원을 동이가 업고 건너며 혈육의 정을

느끼던그 장면의 개울이다. 개울 건너편에는 성 서방네 처녀와 허 생원이 사랑을 나누던 물레

방앗간도 있다.

 

또한 동이와 허 생원이 다투던 충주집, 허 생원이 숨을 헐떡거리며 넘던 노루목 고개도 그대로

남아 있다.

▲지난 4일 오후 9시쯤 촬영한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메밀밭. 밤하늘엔 별이 반짝이고 

별 아래로 솜이불 같은 구름이 드리우고 들녘에는 소금꽃 같은 메밀꽃이 흐드러진다. 

 

인공 조명 하나 없는 산골의 밤인데 이토록 환하다. 허생원도 밤이 너무 환해 물레

방앗간에 들어갔다.

 

문학은 축제다. 이 문장은 비유가 아니다. 참 명제다. 문학 작품이 실제 축제가 되어 지역을 먹여 

살린다. 그 모범 사례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열리는 ‘효석문화제’다. 

 

올해 27회를 맞은 효석문화제는 문학에 가장 충실한 문학 축제다. 관광객 끌어모으는 행사보다 

문학을 직접 경험하는 백일장이 훨씬 오래됐다. 축제는 1999년 시작했지만, 백일장은 1972년

 처음 열렸다.

메밀꽃 필 무렵이 돌아오자 한갓진 산촌이 다시 북적북적해졌다. 효석문화제를 주최·주관하는

이효석문학선양회의 곽달규 이사장은 올 축제도 20만명쯤 모일 것으로 바라봤다. 

 

◆“꼭 이런 날 밤이었다”

봉평 무이예술관 앞 메밀꽃밭. 봉평에는 축제 행사장 근처 말고도 곳곳에 메밀꽃밭이 펼쳐져 있다.

바람이 오시길 기다려 셔터를 누르니 메밀꽃밭이 수묵화처럼 번졌다. 

 

이효석(1907~42)이 1936년 발표한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이효석의 고향인 봉평이 배경이다.

‘메밀꽃 필 무렵’은 작가가 상상으로 그려낸 허구가 아니다. 마을에서 떠돌던 소문에 작가의 어릴 적

기억을 얹어 이야기를 지었다. 이효석은 1920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약 12년을 봉평에서 살았다.

 

어린 이효석은 집에서 39㎞ 떨어진 평창 읍내 초등학교를 통학했다. 봉평면에서 평창 읍내로 가는

길에 대화면을 지난다. 이 등굣길이 중요하다.

 

‘메밀꽃 필 무렵’이 봉평장에서 대화장까지 밤길을 걷는 허생원과 조선달 두 장돌뱅이의 이야기여서다.

이효석은 어렸을 적 학교를 오갈 때 봤던 장면, 그러니까 메밀밭 지나고 개울 건너며 구경했던 고향

풍경을 소설에 담았다. 봉평장은 2·7장이고 대화장은 3·8장이다.

 

봉평장을 파한 장돌뱅이들이 밤새 걸어 대화장으로 가는 소설 속 설정이 지금도 맞아떨어진다. 

▲봉평 효석문화제 행사장을 누비는 '메밀꽃열차' 메밀꽃밭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여행자가 꼭 알아야 할 소설 속 설정은 이효석이 그려낸 봉평의 9월이다.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

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인 봉평의 가을 풍경은 9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다. 

 

평창관광문화재단에 따르면, 봉평에만 60만㎡가량(약 18만 평)의 메밀밭이 있다. 축구장 84개 

면적이다.

 

 축제를 위해 조성한 꽃밭도 있고, 농민이 경작하는 메밀밭도 있다. 하여 요즘도 맑은 밤이면 

소금을 뿌린 듯이 하얀 들판이 연출된다. 지난 4일 효석문화제가 개막한 밤도 꼭 이런 날 

밤이었다.

◆한 달 내내 피는 메밀꽃 

효석문화제는 메밀꽃밭을 무료 개방한다. 아무나 언제든지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그렇지 않은 꽃 축제도 많다. 

 

올해 효석문화제는 오는 13일 폐막한다. 축제의 주인공은 물론 메밀꽃밭이다. 흥정천 주변 곳곳에

메밀꽃밭을 조성했는데, 꽃밭 입장료 따로 받는 여느 꽃 축제와 달리 효석문화제는 모든 꽃밭을

무료 개방한다.

 

평창군에서 사용한 5000원짜리 영수증만 보여주면 메밀밭에 설치한 즉석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찍어 가져갈 수도 있다. 이효석문학관도 축제 기간에 무료 개방된다. 

 

메밀꽃은 보통 열흘이면 진다. 축제도 열흘 만에 끝난다. 하지만 봉평에선 한 달 내내 메밀꽃을 

감상할 수 있다.

 

 메밀 파종 시기를 달리해 꽃 피는 시기를 조절했다. 축제장이 너무 붐비면 농민이 경작하는 

메밀밭으로 발길을 돌려도 좋다. 9월 초순 무이예술관 앞의 메밀밭이 가장 하얬다.

▲봉평 효석문화제 행사장. 흥정천에 징검다리를 놓았더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굳이

이 징검다리를 건넌다. 소설에서 허생원이 이 개천에 빠진다.

 

흥정천변 축제장에 조성된 먹거리 장터는 지역 식당이 나와서 차렸다. 축제 주제가 메밀꽃이니, 당연히 

메밀 음식을 먹어야 한다. 

 

봉평의 대표 막국숫집 ‘진미식당’이 메밀 음식을 내는데, 메밀막국수(9000원)와 메밀묵무침(2만원)은 

순도 100%의 메밀만 쓴다.

행사장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휘닉스파크 평창’이 있다. 축제 기간에 투숙객을 대상으로 리조트와

행사장을 왕복하는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행사장 곳곳을 누비는 ‘메밀꽃열차(5000원)’ 무료

이용권을 준다. 

▲효석문화제 먹거리 장터에서 맛본 메밀막국수. 먹거리 장터는 지역 식당이 나와 음식을 차린다.

100% 순메밀로 만들어 국수가 뚝뚝 끊긴다. 콩나물처럼 보이는 건 메밀 싹이다. 

한국에 이런 섬마을은 없었다…20초 만에 완판된 ‘바다 놀이터’ 

▲거제 칠천도 옥계마을. 고성만 안쪽 깊숙이 자리해 있어 호수처럼 물살이 잔잔하다.

마을 언덕에 칠천량해전공원과 기념관이 있다.  

 

바다를 마주한 방갈로 5동의 30일치 예약이 단 20초 만에 끝났다. 한나절만 빌리는 해변

쉼터인데도 이 난리가 났다. 이름난 휴양지 이야기도 아니다.

 

주민이라야 100여 명, 경남 거제 칠천도 옥계마을에서 지난여름 벌어진 일이다. 주민

평균 나이 80세인 고요한 어촌에 요즘 젊은 여행객이 부쩍 늘었다.

 

어촌의 평범한 일상을 여행상품으로 팔기 시작하면서다.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고, 카약을

타고 통발을 건지고, 요트 위에서 노을을 본다. 물고기를 팔던 마을이 이제는 ‘바다에서

노는 법’을 판다.

◆파도 없는 ‘섬 속의 섬’ 

▲고성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옥계마을. 주변 섬과 육지가 방파제 역할을 해 앞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다. 사진 하단의 길쭉한 섬이 씨릉섬이다. 2024년 옥계마을과 섬을 잇는

출렁다리가 놓였다. 

 

옥계마을은 거제도 북서쪽 칠천도에서도 외진 ‘섬 속의 섬마을’이다. 거가대교를 지나 칠천도 

안쪽으로 20분 넘게 들어가야 나온다.

 

 고성만 안쪽에 들어앉은 마을이어서 앞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다. 주변 섬과 육지가 방파제 

역할을 해 최근 거제 폭우에도 별다른 피해가 없었단다.

▲옥계항 부두에 있는 ‘선진호’. 국방과학연구소의 퇴역 해상시험선인데, 옥계마을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옥계마을은 거제도 북서쪽 칠천도에서도 외진 ‘섬 속의 섬마을’이다. 거가대교를 지나

 칠천도 안쪽으로 20분 넘게 들어가야 나온다. 

 

고성만 안쪽에 들어앉은 마을이어서 앞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다. 주변 섬과 육지가 

방파제 역할을 해 최근 거제 폭우에도 별다른 피해가 없었단다.

400여 년 전 이 바다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정유재란 때 원균이 이끈 조선군이 일본군

에 참패한 칠천량해전(1597)의 무대가 바로 이 앞바다다. 마을 언덕에 당시 역사를

전하는 칠천량해전공원과 기념관이 있다

 

옥계해변은 여름 한철 경남권 피서객만 알음알음 찾는 곳이었다.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전란의 상처를 품은 바다에 카약과 요트가 오가고, 젊은 여행객의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2023년 마을 전체를 이른바 ‘어촌 리조트 어기야디어차’로 꾸린 뒤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어촌 리조트라고 해서 호텔이나 리조트가 들어선 건 아니다.

 

마을 협동조합을 세우고 통발낚시·요트·카약 같은 놀거리를 들여놓자 파리 날리던 마을

민박과 식당에 손님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물고기만 잡아선 못 산다”

거제 칠천도 옥계 해수욕장 방갈로. 봄가을에는 주말에만 운영한다. 

 

지난해 갯바위에 설치한 방갈로 5개가 마을의 명물이다. 그때만 해도 “8만원(여름 성수기 기준)

씩 내고 누가 해변 오두막을 빌리겠냐”고 못마땅해 하는 주민이 있었지만, 지금은 

예약을 못해 아우성이다.

변화는 마을 방문객 수에서도 드러난다. 3년 전과 비교해 해변 방문객이 3배가량 늘어 연 3만명에 

이른다. 주민 시선도 달라졌다. 요즘은 어르신들이 주차장 관리부터 해수욕장과 마을식당 

운영까지 역할을 나눠 손님을 맞는다.

옥계해변은 사계절 놀이터로 변신 중이다. 가을(9~10월)과 봄(3~6월)에는 갯벌 체험과 통발
낚시

를 즐긴다. 갯벌 품은 어촌이야 전국에 널렸지만, 옥계마을의 노는 법은 좀 다르다.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며 놀다가 요트 위에서 일몰을 보고, 카약을 저어 바다로 나가 통발을 건진다.

▲거제 옥계해변에서 카약과 통발낚시를 즐기는 모습. 주변의 섬과 육지가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해 물살이 잔잔하다. 마을에서 카약과 요트 투어 등을 운영한다.

 

여름(7~8월)에는 해상 워터파크와 수상 레저를 운영하고, 겨울(11~12월)에는 해녀가 갓 잡은

전복·굴 같은 해산물을 방갈로에서 맛보는 ‘해녀 다이닝’을 연다. 이렇게 엮은 체험 상품이

올해 해양수산부 우수 해양관광상품에 선정됐다. 

지난달 24일 옥계마을을 찾았다. 옥계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젊은 분위기를 실감했다. 

한국관광공사 부산울산경남 지사가 초청한 20∼30대 여행 인플루언서 16명도 

마을을 찾았다. 

 

부산에서 온 20대 참가자는 “광안리·해운대와 다르게 한적해서 좋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출신 하스민은 “한국에 이만큼 안전하고 예쁜 해변이 없다”며 “벌써 네 번째 방문”

이라고 말했다.

◆갯벌에서 일하고, 요트에서 쉰다

▲카약과 통발 낚시 체험 후 건져낸 해산물을 즉석에서 구워 먹었다. 이날은 도다리·문어·

뿔소라 등이 딸려 올라왔다. 

카약을 물에 띄웠다. 원래 잔잔했던 바다가 해수욕철이 끝나 더 얌전했다. 한쪽에서는

부표를 반환점 삼아 속도전을 벌였고, 다른 쪽에서는 주민이 미리 내려둔 통발을 끌어

올리며 손맛을 즐겼다.

 

통발에 걸린 문어·도다리·장어가 그대로 점심 메뉴가 됐다. 모닥불에 생선을 굽고

라면에 문어를 넣고 끓였다. 

옥계마을과 씨릉섬을 연결하는 씨릉섬 출렁다리가 2024년 개통했다. 

▲씨릉섬 안쪽으로 1.5㎞의 산책로와 전망대, 미니 짚라인 등이 조성돼 있다. 

 

해변 맞은편에 독특한 이름의 ‘씨릉섬’이 있다. 옥황상제의 딸 옥녀가 ‘씨릉씨릉’ 거문고를 

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무인도다. 거문고 뜯는 소리가 이름이 된 섬이라니. 처음 봤다. 

수십 년간 무인도로 남아 있다가 이태 전 출렁다리와 1.5㎞ 산책로를 조성하며 

옥계마을의 신흥 명소로 거듭났다.

200m 되는 짧은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해변과는 분위기가 또 달랐다. 맨발로 황톳길을 

걷는 사람, 미니 짚라인을 타며 환호성을 지르는 어린이도 있었다. 섬 끝 전망대에 오르니 

칠천도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옥계마을은 원래 당일치기 여행지였다. 놀거리가 늘면서 체류형 여행자가 많아졌고, 마을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펜션도 덩달아 손님이 늘었다. 언덕 위 펜션, 출렁다리 조망이 

좋은 펜션, 잔디밭과 수영장을 갖춘 펜션 등 숙소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카약과 통발 체험으로 시작한 일정이 저녁 바비큐 파티를 거쳐 이튿날 아침 해변 요가까지

이어졌다. 주민 이선희(73)씨는 “평생 여기서 산 나도 어촌에 이렇게 놀거리가 많은

줄 몰랐다”며 “젊은 손님이 사계절 찾아오니 동네에 다시 활기가 돈다”고 말했다.

▲젊은 여행자들이 옥계항 ‘큐브스테이’ 잔디밭에서 모닝 요가를 즐기고 있다.  

 

사유지 출입금지'가 금지된 이 나라…자연향유권을 헌법에 보장한 나라 스웨덴

▲스웨덴 스톡홀름 군도 스모달라뢰 인근 섬의 울창한 숲 속에 작은 목조 건물이 보인다.

 

'사유지 출입금지'.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행을 하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팻말이다. 울창한 임야든

푸른 바다 위 무인도든, 땅 주인이 출입을 허가하지 않으면 발길을 돌리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노를 저어 누군가의 개인 섬에 입도해도, 그곳에서 하루이틀 야영을 해도 처벌은 커녕 법의

보호를 받는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서는 주거지로부터 반경 70m 안이거나 농작물 경작지가 아니라면 섬과 숲의 주인이

누구든 해수욕과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만인에게 자연향유권, 현지어로 알레만스레텐

(Allemansrätten) 보장되는 북유럽의 스웨덴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26만7,570개 섬을 보유한 나라인 만큼 섬을 오가며 여가와 휴양을 즐기는

문화가 일찍이 발달했다.

 

날이 좋으면 배를 타고 나가 '오늘은 여기가 좋겠군' 하고 마음에 드는 섬에 내려 일광욕을 즐기는

낭만가능한 곳이다.

 

수도 스톡홀름부터가 섬으로 구성돼 있고 스톡홀름 주위 군도 지역에 3만4,316개 섬이 분포해

있어, 자연을 향유하기 위해 수도에서 멀리 떠날 필요도 없다.

▲스웨덴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스칸디나비아 반도 3국 위치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 카약을 타고 섬 수도 스톡홀름을 누비다

▲모터보트 한 대가 스톡홀름 군도의 섬과 섬 사이 물길을 지나고 있다.

▲현지인들이 스톡홀름 군도 일대 해역에 요트를 멈춰 세우고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자연향유권은 북유럽 국가의 핵심 정신이다. 부동산을 소유하는 경제적 권리보다 땅을 걸을

수 있는 태초의 자유가 우선한다는 원칙에 기반한다.

 

자연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는 원칙에 기반한 이 권리는 다른 유럽 지역에서도 일부 보장

되고 있지만 북유럽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적극적으로 보장된다.

 

특히 스웨덴에서는 자연향유권을 헌법으로 보장한다. 국민뿐 아니라 만인에게 보장된 태초

권리로 보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도 같은 혜택을 누린다.

 

일부 보호종을 제외한 꽃, 버섯, 베리는 누구나 자유롭게 채집할 수 있다. 2박까지는 텐트를

치고 야영할 권리가 보장되며 모닥불도 피울 수 있다.

 

감시·처벌 없이도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와 신뢰에 기반한 원칙이다.

▲스모달라뢰 인근 바다에서 여성 둘이 카야킹을 즐기고 있다.

▲스웨덴 스모달라뢰 앞바다는 카야킹을 즐기기에 적합한 잔잔한 바다다.

 

자연향유권에 기반한 스웨덴의 휴양 문화를 가장 잘 체감할 수 있는 방법은 카야킹이다. 스톡홀름

군도는 외해의 거친 파도를 막는 천연 방파제로 기능해 섬과 섬 사이 바다는 잔잔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카약을 타본 경험이 없는 사람도 무리 없이 카야킹을 즐길 수 있다.

 

스톡홀름 시내에서 차량·배편으로 1시간가량 거리의 스모달라뢰(Smådalarö)에서 생애 처음 카약

에 올랐다. 2인승 카누는 한 번 타본 적이 있지만 1인승 카약은 처음이었다.

 

작은 미동에도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통에 '지금이라도 내려야 하나' 걱정이 들긴 했지만 그도 잠시뿐,

어느새 바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좌우로 노를 저을 때마다 수변에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말소리도 잦아든다. 들리는

소리는 어디 앉았는지 모를 새의 지저귐과 이따금 수면을 가르는 자기 자신의 노 소리뿐. 계곡이나

하천처럼 흐르는 물에서 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다. 신경 쓸 급류도, 갑자기 낮아지는

수위에 드러날 암초도 없다.

▲스모달라뢰 고르 수변 사우나에서 달궈진 몸을 바다수영으로 식히고 있는 투숙객들

▲스모달라뢰 고르의 수변 사우나. 스웨덴 수변 사우나는 붉은 목재로 짓는 것이 정석이다.

 

현지인들은 군도 지역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 거점 삼아 카약으로 주위 섬과 바다

를 탐방한다.

 

젊은 세대는 아무래도 섬집을 소유하지 못한 경우가 많지만, 별장을 사용하지 않을 때 서로 대여해

주는 문화가 활발하다고. 현지 거처가 없는 외국인 관광객은 숙박시설을 이용하면 된다.

 

스모달라뢰라면 유명 휴양 호텔 스모달라뢰 고르가 대표적. 실내외 온수풀, 사우나 시설 등을 갖추고

있어 레저 활동 후 심신을 쉬기에 딱이다. 수변 사우나에서 한껏 열기를 머금고 바로 앞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스웨덴식 정통 사우나다.

 

◆바닷길로 방문할 수 있는 미술관

▲아티펠라그는 전시관 외부 공간 곳곳에도 작품(나무 뒤 사람 형상)이 숨어 있다.

▲아티펠라그 산책길 울타리에 숲으로 향하는 통로가 뚫려 있다.

 

카약과 사우나가 스웨덴의 섬을 즐기는 고전적인 방법이라면, 오늘날은 자연과 문화를 함께

즐기는 방식이 각광받고 있다. '섬 미술관' 아티펠라그(Artipelag)가 대표적이다.

 

스톡홀름 동쪽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시내에서 차로 30분이면 닿는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아기띠 브랜드 베이비뵨의 창업자 비요른 야콥손이 사재를 투자해 2012년 개관했다.

미술관 명칭은 아트(Art)와 아키펠라그(Arkipelag·군도)를 합친 조어다.

 

내부 전시는 유료지만 숲과 해변에 설치된 외부 조각 작품은 누구나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중간중간 울타리가 뚫려 있는 지점이 있다.

 

이것도 자연향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설계다. 누구든 미술관 부지의 숲에서 산책하고 야영할

수 있도록진입로를 만들어 둔 것.

 

미술관 관계자에 따르면 "정문은 육로를 향해 나 있지만 모터보트나 카약을 타고 해변으로

입도해 미술관을 방문할 수도 있다"고 한다. 시내와 바로 연결되는 육로 접근성이 좋아

방문객 대다수는 차로 오지만 바닷길을 이용하는 방문객도 꾸준하다고.

▲아티펠라그는 전시관 내부에 암석 지형이 튀어나와 있다. 마치 미술품처럼 안내봉이 설치돼 있다.

▲아티펠라그는 전시관 외벽은 검은 타르가 칠해진 나무로 마감돼 있다

해로로 방문하면 바다에서는 미술관 건물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 인근 숲에 완전히 가려져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도록 한 건축가의 의도라고. 건물 외벽은 검게 칠해져 있다.

 

전통적으로 목선에 방수용 타르를 먹이던 공법을 건축에 적용한 것이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바닥을 뚫고 올라온 거대한 암석이 눈에 들어온다. 부지에 원래 박혀 있던 편마암 바위를 뽑아

내는대신 그대로 남긴 것이다.

 

미술관은 이 바위를 '관람객이 보게 되는 첫 예술 작품'이라 소개한다. 지하 화장실에 가면

이 바위의 하단부를 볼 수 있다. 화장실 안쪽 벽으로 활용되고 있고, 반대편은 소규모

전시관의 벽면이다.

 

◆박물관·공원 밀집한 문화의 섬 유르고르덴

▲스톡홀름 유르고르덴 스칸센 직원이 전통 방식으로 모직물을 짜고 있다.

▲스톡홀름 유르고르덴은 스칸센 직원이 전통 복장을 한 채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스톡홀름을 구성하는 14개 섬 가운데 유르고르덴(Djurgården)은 본래 왕실 사냥터로 쓰이던 섬이다.

현재는 박물관과 공원이 밀집한 문화 관광의 섬이다.

 

대표적인 문화시설은 세계 최초의 야외 박물관 스칸센이다. 교사 출신 민속학자 아르투르 하셀리우스

1891년 설립했다. 북유럽 전통 건축과 삶의 방식을 재현한 민속촌이라고 볼 수 있다.

 

외형만 재현한 것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옛 건물 150여 채를 매입해 이곳으로 통째로 옮겼

다고.한국의 민속촌처럼 옛 복장을 한 직원들이 당시의 모직물 짜기, 유리공예 등을 시연하며

질문도 받아준다.

▲스톡홀름 유르고르덴 노르디스카 박물관은 독특한 외형으로 눈길을 끈다.

▲스톡홀름 유르고르덴은 노르디스카 박물관은 당시의 분위기와 공간감 구현을 중시한다.

 

하셀리우스는 스칸센 설립에 앞서 노르디스카 박물관도 설립했다. 스칸센이 삶의 방식을 체험하는

곳이라면 노르디스카는 유물 전시에 집중하는 박물관이다.

 

유물 하나하나를 따로 진열하는 대신에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 쓰인 물건을 한데 모아 당시 분위기

재현한다. 가령 근대 공공주택을 재현한 전시실에서는 직접 '집'에 들어가 거실 의자에 앉아볼

수 있다. 네덜란드풍 르네상스 양식의 외관도 눈길을 끈다.

▲스톡홀름 유르고르덴은 바사 박물관에 전시된 바사호.

 

같은 섬에 바사 박물관도 있다. 1628년 건조 후 첫 항해에 나서자마자 침몰한 17세기 군함 바사호를

통째로 인양해 전시한 박물관이다.

 

건조 당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특별히 크고 호화롭게 건조됐는데, 이 점이 화근이 돼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다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침몰 후 333년 만인 1961년 스톡홀름 항에서 건져 올렸는데 선체의 98% 이상이 보존돼 있었다.

현대식으로 계산하면 1,210톤급 전함으로, 원형이 보존된 대형 목선 중 수령이 가장 오래됐다.

세계에는 바사호보다 오래된 목선이 다수 존재하지만 대부분 형체가 심하게 훼손돼 골격만

남았다.

▲스톡홀름 유르고르덴 아바 박물관 방문객이 전시관에 입장하고 있다.

 

스웨덴 하면 세계적 그룹 아바(ABBA)도 빼놓을 수 없다. 유르고르덴에는 아바 뮤지엄이 있다.

의상, 악기, 녹음실을 재현한 체험형 전시관이다.

 

같은 섬에 위치한 놀이공원 그뢰나룬드에서는 맘마미아 더 파티가 열린다. 뮤지컬 '맘마미아'

이후 시간대를 다루는 뮤지컬 공연으로 지중해식 식사를 곁들이는 디너쇼 형식으로 진행된다.

2016년 첫선을 보인 이래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곡 간 대사는 스웨덴어로 진행되나

아바의 노래는 전부 영어로 부른다.

 

부르주 생테티엔 대성당 (Saint-Étienne de Bourges)

부르주는 파리 남쪽 220km, 셰르주에 위치해 오론·예브르강 합류점의 내륙 수운 요지이다.

12세기 중반부터, 유럽은 교회당 건축이라는 불타는 열정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경향은 새로이 창조된 건축 양식의 힘을 받은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높고 더 우아한 고딕 양식은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육중한 견고함보다 더 선호되었다.

 

부르주에 있는 생 테티엔 대성당은 고딕 양식이 그 완숙함에 이르렀을 때 건설되었으며, 널리

고딕 양식의 가장 뛰어난 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992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1195년 건립을 시작하여 1324년 5월 13일에 완공되었

으며최초의 그리스도교 순교자인 성 스데반(Saint Stephen, ? ~ 35년)에게 헌정되었다

15m, 길이118m의 본당 회중석을 갖춘 오랑식(五廊式성당으로 독특한 고딕양식

건물이다.

▲프랑스 전도. 부르주위치도 / 원본 출처 / graphicmaps.com

부르주는 갈리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신도단이 생긴 곳이다이 곳의 대성당은 고대

로마의 도시 아바리쿰의 성벽 위에 세워졌다

 

비슷한 시기에 지은 샤르트르 대성당이 사람들한테 인기가 높은 것과는 달리부르주의 생테

티엔 대성당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불운이 이어졌다.

 

 어딘가가 끊임없이 파손되어 보수와 재건을 거듭했던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부르주의

대성당은 여러 가지 양식의 박람회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이 거대한 대성당 안을 둘러보면 마음 속에 깊은 경외감이 들며신성한 것을 앞에 두고 인간

존재의 허무함이 실감난다.” 부르주의 생테티엔 대성당을 본 스탕달은 이런 느낌을 받았

다고 한다

그는 잠시 이 곳에서 그리스도가 된 기분이었으며불가사의한 체험을 했다고 말했다

동시대 작가인 발자크도 부르주의 대성당이 파리 전체보다도 더욱 값어치가 있다며

더욱 극단적인 찬사를 늘어놓았다.

 

1195년에 짓기 시작한 부르주의 대성당은 언제나 샤르트르 대성당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스탕달이나 발자크처럼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또한 이 건축물은 르망 대성당과 쿠탕스 대성당에 영향을 주었다.

▲건물을 밖에서 바라본다면 후대에 추가한 여러 가지 수식을 없앤 모습을 상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원래 중세의 건물은 딱딱한 선의 버팀벽과 플라잉 버트레스가 익랑 돌출부에서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모양이 인상적이었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지하 예배실파사드의 조각상은 오늘날 부르주 대성당의

귀중한 재산이다.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쌍안경을 휴대하는 것이 좋다그래야 치밀하게 만든 13세기 스테인드

글라스를 구석구석 감상할 수 있다.

 

 지하 예배실로 내려가는 입구는 북쪽 문 곁에 있다이 지하 예배실은 지면이 움푹 꺼진 곳에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대성당과는 달리 12개의 창에서 빛이 충분히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 천장은 대성당이 서 있는 지면의 높낮이 차이를 메우는 역할을 한다.

▲ 지하 예배실에는 몇 기의 묘가 있는데특히 두드러진 것은 장 드 베리 공작의 묘이다그는

프랑스에서 학문과 예술의 보호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파사드에는 5개의 문이 있다북쪽 끝 문의 아치 밑에는 성(聖)기욤의 조각상이 있다

그 오른쪽 문의 주인공은 성모 마리아이다

▲가운데 문의 팀파눔에는 ‘최후의 심판’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놓았다가운데 문 오른쪽은

성스테파누스(생테티엔)의 문으로그의 생애를 나타내는 돌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부르주의 대성당은 성스테파누스를 모신 성당이라 해서 생테티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가장 오른쪽은 부르주의 주교였던 성위르생의 문이다문과 문을 구분짓는 기둥의 장식

조각 가운데에는 19세기에 보수할 때 제작된 것도 있는데대부분은 19세기 양식으로

 

이 성당에 어울리는 작품은 아니다이것만 보더라도 부르주의 대성당이 특정한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부르주 생테티엔 대성당▼

▲팀타눔

▲팀타눔

▲팀타눔

▲외벽 조각품

▲생테티엔 대성당

 

신랑은 양쪽으로 측랑을 각각 2개씩 거느리고 있고, 그 길이는 118m에 이른다. 벽은 고딕 특유의

구성으로서 여러 겹의 원주, 커다란 아케이드, 트리포리움, 높은 창 등으로 이루어졌다

▲생테티엔 대성당

 

앰뷸러토리에 있는 13세기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다. 구원받은 자는 천사에

이끌려 천국으로 들어가고 벌을 받은 자는 악마에 의해 지옥으로 쫓겨 간다는 것을 가르친다

▲성자들의 묘가 안치되어있는 지하예배실.

 

지하실은 11세기 초에 지어졌으며옛 로마네스크 교회에 속합니다이 교회는 남북 방향의

직사각형 평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장소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는데, 18세기 중반 합창단 재개발 중에 옛 계단과 복도가

재발견되었습니다갤러리 중앙 베이의 볼트 중앙에는 오큘러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물 숭배 집단에 잘 어울릴 것이다이 오큘러스는 현재 고딕 합창단 포장 아래 제방

에 의해 가려져 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부르주의 초대 주교인 성 우르생이 가져온 성유물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안에는 대성당의 첫 순교 부제이자 수호성인인 성 스테판의 피 몇 방울이 들어 있었다.

▲성자들의 묘가 안치되어있는 지하예배실.

▲지하 예배실도 빛이 잘들어오는 구조로 특이하게 지어졌다그곳에는 현재 14세기

프랑스의 문화 예술 후원자였던 ‘장 드 베리 공작(Jean de Berry, 1340-1416)의 묘’

를 비롯한 몇 기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지하실의 보물(그리스도의 수난)

 

1562년종교 전쟁 한창 중에 부르주는 개신교도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그들은 대성당과

성 윌리엄의 무덤을 훼손했습니다

 

또한 성당 스크린본당과 합창단 사이에 세워진 횡단그리고 로툰다에 위치한 매장 구역도

훼손되었습니다이 조각상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한 장면을 나타냅니다

 

이 성당은 1520년대에 성직자 자크 뒤브뢰유(Jacques Dubreuil)가 기증한 것이었다

높이 1.85미터에 달하는 이 작품은 풍부한 디테일로 인상적입니다매우 손상

되었으나 장부의 명령으로 복원되었다

▲지하 장 드 베리 공작의 묘

 

1757년부터 지하실에는 또 다른 주요 기념물이 있습니다장 드 베리 공작의 누운 동상입니다

이 성은 부르주 공작궁의 생트 예배당에서 가져왔으며추기경 드 라 로슈푸코의 요청으로

지하실로 옮겨졌습니다.

 

15세기에 플랑드르 출신 화가 장 드 캉브레(Jean de Cambrai)가 제작했으며백년전쟁의

중심 인물이자 존 2세의 아들이자 샤를 5세 현명왕의 형제인 장 드 베리(Jean de Berry)를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예술의 큰 후원자였으며유명한 『베리 공작의 부유함』을 포함한 귀중한 서적

의 수집가이기도 했다.

지하 장 드 베리 공작의 묘

 

프랑스의 존(1340–1416)은 룩셈부르크의 존 2세 선한 왕과 본의 셋째 아들이었다. 1356년에

푸아티에 백작이 되었고, 1360년에 베리 공작이 되었다

 

푸아티에 전투 이후 아버지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영국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던 그는 종종 신분

없는 정치가이자 평범한 행정가로 묘사되며매우 인기가 없었다

 

다행히도 후원자는 후세의 눈에 정치인을 구원한다예술을 사랑했던 장 드 베리는 아주 일찍부터

아름답고 희귀한 작품을 좋아했고왕국과 유럽 최고의 예술가들과 작업했다

 

그는 샹티이의 콩데 박물관에 보관된 『베리 공작의 매우 부유한 시간』을 포함해 여러 기도서(또는

시간서)를 의뢰했다그의 성들(리옹두르당에탐프뤼시냥메훈쉬르예브르)의 아름다움은

그가 제작한 필사본의 채색화 덕분에 전해졌다.

▲지하 장 드 베리 공작의 묘

▲하부 교회에는 이 성스러운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도 설치되어 있습니다웅장하며,

 대부분 사도와 예언자들을 상징합니다.

 

20개의 대형 인물들이 다마스크 무늬 배경의 건축 벽감에 표현되어 있습니다그 결과는 정말

화려합니다이 작품들은 외부를 직접 내려다보는 12개의 큰 창문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부르주 대성당의 하부 교회는 매우 화려하게 조명되어 있다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예방 차원에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해체되었습니다

그 후 상자에 넣어 1980년대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1994년지하실에는 마지막 보물이 발견되었습니다대성당의 십자가 스크린의 잔해입니다!

13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이 스크린은 1758년 합창단 재개발 과정에서 파괴되었습니다

 

일부 요소는 대성당 내 작업에 재사용되었습니다이들은 발견되어 현재 하부 교회에 전시되어

있습니다석공들의 작업장으로 사용된 저 교회는 바닥에 스케치가 남아 있습니다. 대성당

서쪽 정면을 장식하는 장미의 실물 크기 디자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가와현(香川縣)ㅡ요즘 가장 주목받는 일본 소도시 다카마쓰(高松) 

예술의 섬세함과 쫄깃한 우동의 온기를 품은 다카마쓰. 
낭만적인 예술의 섬에서 영감을 얻고, 혀끝에 맴도는 맛으로 여행을

▲'우동 왕국’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다카마쓰는 쫄깃한 사누키 우동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배를 든든히 채운 다음에는 항구를 마주한 성터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고,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고 정원을 거닐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낸다.

 

도심을 벗어나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페리를 타고 떠나는 세토내해 섬 여행은 일상을

잊게 하는 특별함을 선사한다. 

▲시코쿠(四國)ㅡ가가와현(香川縣) 현청 소재지 다카마스 위치도. & 부속 섬들

일본 시코쿠 가가와현 위치도.

▲다카마쓰 여정의 출발점은 특별명승지 리쓰린 공원(Ritsurin Garden)이다. 400년 전에

처음 조성된 정원은 웅장한 시운산을 병풍 삼아 6개의 연못과 13개의 언덕이 조화를

이루는 회유식 정원이다.

 

연못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매번 새로운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일보일경(一步一景)’

이라 불리기도 한다.

리쓰린 공원에서는 절기마다 피어나는 꽃으로 색다른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75만㎡(약 23만 평)에 달하는 이곳은 밤숲(리쓰린)이라는 이름과 달리 약 1,400그루의 소나무가

주인공이다. 그중 약 1,000그루는 장인의 손길을 탔는데, 분재를 확대한 듯 단아하면서도 우아하다.

 

절기마다 피어나는 꽃으로 색다른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것도 장점. 봄에는 벚꽃, 여름에는 연꽃,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동백이 정원에 색을 더한다. 

역대 영주들이 애용했던 다실 기쿠게쓰테이(Kikugetsutei)

 

공원의 매력 포인트는 더 남아 있다. 역대 영주들이 애용했던 다실 기쿠게쓰테이(Kikugetsutei)에서

연못과 정원의 정취를 즐기면서 차를 마실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깊은 맛의 차가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 준다. 또한, 호수에서 즐기는 뱃놀이는

신선놀음하는 듯한 기분으로 정원을 돌아볼 수 있게 하고, 후지산 모습을 본떠 만든 인공산

히라이호 봉우리에서 보는 모습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나오시마의 붉은 호박

 

거대한 미술관이 된 섬, 나오시마


다카마쓰 여행 지도는 근처 섬까지 확장된다. 첫 번째 테마는 예술이다. 특히 세토내해의 작은 섬

나오시마(Naoshima)는 그 자체로 거대한 미술관이다.

 

항구에 내리는 순간 쿠사마 야요이의 붉은 호박(Red Pumpkin)이 강렬한 인상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발길 닿는 곳마다 예술이 숨 쉬고 있어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다. 그렇지만 우선순위로 둬야

할 3곳의 명소가 있다.

 

첫 번째는 2025년 봄, 새롭게 문을 연 나오시마 신미술관(Naoshima New Museum of Art)

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섬에 설계한 10번째 건축물로,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상설 전시뿐 아니라 방문마다 새로운 예술적 자극을 주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으며,

섬의 이름을 딴 최초의 미술관으로서 지역 사회와 더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카마쓰항에서 쇼도시마까지 일반 페리는 약 60분, 고속선은 약 25 ~ 30분으로 소개됩니다.

도쿠시마현은 넓고 대중교통만으로 이동하기 까다롭다는 여행 경험담이 있어, 특정

구간에서는 차량 이용이나 지역별 숙박을 고려하는 편이 좋습니다.

▲나오시마 지중미술관

 

두 번째 목적지는 섬의 상징과도 같은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Benesse House Museum)이다. 자연,

건축, 예술의 공존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미술관과 호텔이 결합해 있다.

 

이곳에서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미학을 배경으로 브루스 나우만의 네온 작품 <100개의 삶과 죽음>,

히로시 스기모토의 등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야외 해안가에 놓인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과 니키 드 생팔의 조각들은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잊지못할 풍경을 선물한다. 또 빛과 바람 등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밸리 갤러리는 건축물

자체로 예술 작품이 된다.


마지막은 결이 다른 곳이다.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가득한 나오시마 목욕탕 “I♥湯”다. 아티스트

오타케 신로가 목욕탕 전체를 예술 작품으로 개조했다. 외관부터 화려한 모자이크 타일과 콜라주로

뒤덮여 있으며, 탕 안에는 거대한 코끼리 오브제가 자리해 시선을 압도한다.

 

따뜻한 탕에 몸을 담그고 예술을 온몸으로 느끼는 경험은 나오시마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휴식이 된다. 

▲쇼도시마 올리브 공원 키키 집

 

올리브로 물든 쇼도시마


또 다른 섬에는 올리브의 색감이 깃들었다. 다카마쓰항에서 배를 타고 1시간이면 닿는 쇼도시마

이야기다.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 나무 끝에 새하얀 풍차가 그림처럼 서 있는 올리브 공원이 대표적인

여행지다. 세토우치의 푸른 바다가 더해져 완벽하게 이국적인 풍광을 만든다.

▲쇼도시마 올리브 공원

 

올리브 공원은 영화 <마녀배달부 키키>의 촬영지로도 유명해 많은 여행자가 풍차 앞에서 빗자루를

타고 점프 사진을 남긴다.

 

빗자루는 올리브 기념관에서 무료로 대여해 주고, 공원 주변에서 각종 기념품과 올리브유, 올리브

소다 등을 구매할 수 있다. 

현의 중심인 다카마쓰에는 편의점보다 우동집이 더 많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고,

메뉴도 다양하다

 

본고장에서 즐기는 우동 순례


다카마쓰가 속한 카가와현은 우동의 본고장으로 유명하다. 밀과 소금이 풍부하고 물이 좋아 사누키

우동이 유명한데, ‘사누키’라는 말도 카가와의 옛 지명이다.

 

현의 중심인 다카마쓰에는 편의점보다 우동집이 더 많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고, 메뉴도다양하다.

 

가장 기본인 따뜻한 국물의 가케 우동부터 진한 쯔유를 자작하게 부어 먹는 붓카케 우동, 뜨거운 면에

날달걀을 섞어 부드럽게 즐기는 가마타마 우동, 삶은 면을 숭늉처럼 따뜻한 물에 담가 소스에

찍어 먹는 가마아게 우동까지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여름에는 차가운 자루 우동이 별미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좋아하는 곳으로는 우동 세토바레

(Udon Setobare), 후루사토 우동(Furusato Udon), 테우치우동 마스야(Teuchi Udon Masuya),

우동 사카에다(Udon Sakaeda) 등이 있다.

 

로컬 체험을 원한다면 셀프 우동 방식에 도전해 보자. 우동을 주문한 뒤 튀김이나 오뎅을 올리고,

직접 면을 데우고 육수를 붓는다. 마지막으로 파, 생강, 튀김 부스러기 등 토핑을 자유롭게

올리면 나만의 한 그릇이 완성된다. 한 그릇에 3,000원 안팎으로 즐기는 소소한 행복이다. 

다카마쓰공항이나 JR 다카마쓰역 관광안내소에서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우동패스도 놓치면 아쉽다.

패스는 식당과 기념품 상점, 관광지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다카마쓰에서 약 50분~1시간 떨어진 고토히라 지역에서는 우동 가게 2~3곳을 방문하는

우동 택시, 사누키 우동을 직접 만들고 맛볼 수 있는 나카노 우동 학교를 체험할 수 있다. 

▲치치부가하마 해변(Chichibugahama Beach)의 일몰

 

◆카가와현+인생 사진 건지는 히든 스폿

 

일본에도 우유니사막이 있다. 그런데 다카마쓰에서 아주 조금 멀다. 대중교통으로 약 1시간 10~30분 정도

서쪽으로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치치부가하마 해변(Chichibugahama Beach)이다.

 

굳이 지구 반 바퀴를 돌지 않아도 우유니사막과 흡사한 광경을 보고, 사진을 남길 수 있으니 오히려

경제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약 1km의 긴 해변은 원래 석양이 아름다운 해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바람이 잦아들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썰물 시간이 오면 갯벌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겨난다.

 

이 웅덩이가 반사판이 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듯한 광경을 빚어낸다. 일단 찍으면 인생 사진이

되는 마법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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