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억새가 수놓은 ‘조선의 명당’ 동구릉(東九陵), 한서린 단종 비 사릉(思陵).

▲경기 구리 동구릉의 건원릉.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봉분을 억새로 덮었다. 봉분
아래로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이 차례로 늘어섰고, 그 둘레를 가을빛 숲이 감쌌다.
해마다 억새 만개 시기에 맞춰 시행하는 능침 특별개방 때 찍은 사진이다.
건원릉(健元陵)의 봉분은 억새를 이고 있다. 조선 왕릉 가운데 잔디 대신 억새로 덮인
무덤은 이곳 하나뿐이다.
가을이 깊어 억새 이삭이 풍성해지면 봉분 전체가 은빛으로 일렁인다. 그 아래 태조
이성계가 누워 있다. 올가을 그 봉분 곁에 오를 수 있는 날은 단 엿새. 11월 3일부터
8일까지다.
국내 여행이 갈수록 짧아진다는 통계가 있다. 멀리 가지 않고, 오래 머물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고,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은 탓이리라. 떠날 형편이 넉넉지 않다지만
그래도 가을은 온다.
어디로 떠나도 좋은 계절이다. 서울 동쪽 경계를 넘자마자 600년 동안 함부로 베지
못한 숲이 있고, 그 숲 깊숙이 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다.
경기 구리의 동구릉(東九陵)과 남양주의 사릉(思陵). 이곳에는 침묵과 평온이 고여
있다. 억새가 아니어도 가을을 흠뻑 들이기에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가깝고, 가는
길도 쉽다.
반나절이면 두 곳을 다 걷는다. 왕릉을 잔디 언덕과 석상 몇 기로만 기억한다면 그건
소풍의 기억이다. 언덕 하나하나에는 곡절이 묻혀 있다.
동구릉의 두 왕은 끝내 바라던 자리에 눕지 못했고, 사릉에 누운 왕비의 남편은 멀리
영월에 묻혔다.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과 남양주시 사릉(思陵) 위치도.


▲곡장(무덤 담장) 뒤쪽에서 내려다본 건원릉 봉분. 오후에 가면 역광을 받아 빛나는
은빛 억새를 볼 수 있다.
◆억새로 뒤덮인 무덤
동구릉 매표소를 지나면 갈참나무와 소나무가 길 쪽으로 기울어 터널을 이룬다. 두꺼운
마른 잎이 발밑에서 부서진다. 가을이 바삐 오는 중이다.
동구릉은 도성 동쪽(東)의 아홉(九) 능. 1408년 태조가 처음 이 숲에 묻힌 뒤, 아홉 능이
다 차기까지는 447년이 걸렸다.
재실(齋室) 앞에서 길이 갈린다. 여러 갈래 길이 저마다 숲을 가르고 능으로 든다.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은 그 가운데 가장 깊숙이, 동구릉의 한가운데 있다.
건원릉 앞에 다가서면 봉분은 보이지 않는다. 사초지 언덕이 높아서다. 능마다 사정이
비슷해, 언덕이 낮은 곳에서도 풀밭 위로 문인석과 무인석의 어깨와 석마(石馬)의
잔등이 겨우 보일 뿐이다. 무덤은 산 사람의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놓였다.
그 높이에서 왕은 정자각과 홍살문을, 그리고 수백 년 뒤의 사람을 내려다본다.곡장
(봉분 담장) 뒤로 올라서야 건원릉은 제 얼굴을 드러낸다. 봉분은 억새 덤불에 묻혀
있다.무덤 위의 억새가 바람의 결을 따라 한쪽으로 기운다.
정면에서는 누렇게 바래 보이던 억새가 뒤편에 서서 해를 마주 보자 솜털 하나하나가
희게 빛난다. 봉분 아래로 흘러내린 억새는 병풍석을 반쯤 가렸다.
병풍석에 새겨진 구름과 문인상이 선명하다. 돌 양과 돌 호랑이가 봉분을 등지고 바깥
을지키고, 석물들은 정자각 쪽으로 줄을 섰다. 그 너머로 산줄기가 겹치고, 지평선
끝에 아파트 몇 동이 걸렸다. 600년째 왕이 내려다보는 풍경이다.
태조가 죽어서 눕고 싶었던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간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곁을 원했다. 생전에 지금의 서울 정동, 영국대사관 근처에 있던 정릉(貞陵) 곁에 자기
자리까지 잡아 두었다. 그러나 아들 태종은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태종에게 신덕왕후는 계모였다. 자기와 왕위를 다툰 두 이복동생의 어머니. 태종은
아버지 태조를 정릉에 묻어주긴커녕, 계모가 묻힌 정릉을 파헤쳐서 도성 밖으로
쫓아 보냈다. 성북구 정릉동이 그 자리다.
계모 무덤을 둘렀던 돌은 홍수에 무너진 광통교를 다시 놓는 데 썼다. 거꾸로 박힌
그 돌을 지금도 청계천 광통교 아래에서 볼 수 있다.
태종의 친모 신의왕후는 조선을 세우기 전에 죽어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개성 땅에
누워 있다. 그 무덤의 제사를 해마다 가을, 건원릉 정자각에서 대신 지낸다.

▲동구릉 역사문화관에 전시된 건원릉의 옛 고석. 600년 넘게 혼유석을 받치다
깨진 채 2024년 새 돌에 자리를 내줬다.
◆활과 칼을 내려놓은 왕
말년의 태조는 쓸쓸했다. 아들들이 서로 칼을 겨눈 뒤 왕위를 내놓고 한동안 고향 함흥
에 머물다 돌아왔고, 궁 안에다 덕안전을 지어 불도에 마음을 붙였다.
1408년 일흔넷으로 창덕궁에서 숨졌다. 그의 자리는 죽은 뒤에야 정해졌다. 몇 곳의
후보지가 퇴짜를 맞은 끝에 검교참찬(명예고문격) 벼슬의 김인귀가 말했다.
“내가 사는 검암에 길지가 있다.” 가 보니 과연 좋았다고 실록은 적었다. 충청과 풍해,
강원에서 장정 6000명을 불러 모았고, 자리를 정한 지 석 달 만에 장례를 치렀다.
나라를 세운 왕의 영원한 거처가 그렇게 정해졌다.
건원릉의 억새에는 사연이 붙어 다닌다. 고향 함흥에 묻어 달라는 태조의 유언을
태종이 함흥의 흙과 억새로 대신했다는 이야기다.
기록은 그보다 한참 늦다. 무덤을 쓰고 221년 뒤인 1629년, 인조실록이 처음으로
태조의 유언에 따라 ‘북도(北道)의 억새’를 썼다고 적었다. 함흥이라는 지명은 없다.
억새는 해마다 한식날 단 한 번 베이고, 가을이면 다시 봉분을 뒤덮는다.
비각 안에는 신도비가 웅장하게 서 있다. 태조의 일대기를 새긴 비문은 권근이 왕명
을받아 지은 것이다. 비문은 그의 죽음을 ‘활과 칼을 내려놓은 일’로 적었다.
1398년 왕자의 난에 이르면 비문은 정도전이 ‘어린 서얼’을 끼고 일을 꾸몄다고 적는
다. 그 서얼은 태조가 세자로 점찍었던 막내 방석이다. 방석과 그 형 방번에 대해서
는 ‘먼저 죽었다’는 한마디뿐이다.
그해 가을 이방원이 군사를 일으켰고, 궁에서 쫓겨난 두 형제는 귀양길에서 죽임을
당했다. 비석을 세운 이가 바로 두 형제를 죽인 이방원, 태종이다.
비각 옆 작은 밭에서는 억새가 자란다. 봉분에서 받은 씨앗을 길러, 한식날 베어낸
빈자리를 메운다.
봉분 앞 혼유석(혼이 나와 노닌다는, 제단을 닮은 돌)을 받치던 북 모양의 고석(鼓石)
하나가깨진 채 그 무게를 견디다 2024년 새 돌에 자리를 내줬다.
600년을 버틴 그 돌은 입구의 역사문화관에 놓여 있다. 한쪽이 크게 떨어져 나갔고,
새겨두었던도깨비 얼굴은 닳아 윤곽만 남았다. 왕릉을 지키다 박물관으로 내려온
유일한 물건이다.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한 동구릉 숲길. 갈참나무와 소나무가 길 쪽으로 기울어
터널을 이룬다.
◆지금 열려 있는 숲길
건원릉 곁 휘릉에서 원릉까지 숲길이 이어진다. 봄이면 종 모양의 흰 꽃을 다는 때죽
나무가 많아 ‘때죽나무 숲길’로 불리는 1.4㎞다. 좁은 흙길이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가는 줄기의 나무들이 제법 빽빽하다. 갈참나무와 쪽동백나무 사이에서 복자기나무
가 붉어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단풍 드는 나무 가운데 가장 붉다는 나무다.
태조를 묻은 이듬해 처음 소나무를 심은 뒤로, 이 숲은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벨 수
없던 땅이다.숲길은 봄과 가을, 정해진 시기에만 열린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 원릉(元陵)이 있다. 영조가 두 번째 왕비와 나란히 누운 무덤이다.
영조 역시 바라던 자리에 눕지 못했다. 쉰 해 넘게 함께 산 첫 왕비 정성왕후가 먼저
세상을 뜨자, 영조는 고양 서오릉에 아내의 무덤 홍릉(弘陵)을 짓고 그 오른쪽을
비워 두었다.
훗날 자신이 누울 자리였다. 하지만 손자 정조가 할아버지를 모신 곳은 효종이 묻혔다
떠난바로 이 빈터였다. 영조가 죽어서 가려 했던 홍릉의 오른쪽은 지금도 비어 있다.
원릉 곁 경릉에서는 숲길이 한 갈래 더 갈라진다. 경릉에서 시작해 ‘나무 키우는 곳’까지
오르는 길이다. 궁과 능에 심을 나무를 기르는 묘포로, 길 끝에 너른 터가 열린다.
비닐을 덮은 이랑마다 어린 나무가 줄지어 섰고, 그 뒤로 억새밭이 펼쳐진다. 오후 햇살
을 등지고 선 억새 이삭이 분홍빛을 머금은 채 희게 빛났다. 한시적으로 열리는 두 숲길
을 합치면 2.7㎞,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원릉에서 서쪽으로 더 들면 동구릉에서 가장 외진 숭릉이다. 숭릉으로 드는 길은 자로
잰 듯 곧다. 굵은 나무들이 양옆에서 그늘을 드리워 숲은 어둑한데, 길 끝만 햇빛 속에
환하다.
거기 붉은 홍살문이 서 있고, 그 너머로 정자각과 봉분이 차례로 겹친다. 휠체어를 탄
여성과 휠체어를 미는 남성이 그 빛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입구 쪽으로 돌아 나오면 현릉이다. 문종과 현덕왕후가 한 정자각을 두고 두 언덕에 따로
누웠다. 단종의 부모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며칠 만에 숨졌는데, 아들이 왕위에서
쫓겨난 뒤에 이미 죽은 몸인데도 왕후 자리를 빼앗겼다. 72년이 지나서야 복위돼 남편
곁으로 왔다.
그때 두 무덤 사이의 소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어 베어내니, 두 무덤이 서로 마주 보게
됐다고 중종실록은 적었다.
그 아들 단종은 서울에서 가장 먼 왕릉인 영월 장릉에, 며느리는 남양주 사릉에 따로
묻혔다. 사릉은 동구릉에서 차로 20분 남짓이다.
동구릉을 반나절 걷고 나면 해가 기울 무렵이 되는데, 그 시간에 닿기 좋은 곳이다. 찾는
이가 드문 작고 한적한 그 능에 평생 단종을 그리워한 한 사람이 누워 있다.

▲동구릉 입구의 세게문화유산 기념비.

▲각 능을 연결하는 길은 울창한 숲길이다.

▲동구릉(東九陵) 각릉 위치도
◆9개의 능과 그 주인들
|
능 이름
|
능의 주인
|
생애와 업적
|
|
건원릉
|
태조
|
조선을 세운 제1대 임금이다.
|
|
현릉
|
문종과 현덕 왕후
|
문종은 세종 대왕의 맏아들이자 조선의 제5대 임금이다. 학문이 깊고 어진 임금이
었으나몸이 약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2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
목릉
|
선조와 의인 왕후, 인목 왕후
|
선조는 제14대 임금이다. 인재를 등용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지만, 붕당이
생겨나 갈등이일어나고 일본의 침공으로 임진왜란을 겪었다. |
|
휘릉
|
장렬 왕후
|
제16대 임금인 인조의 두 번째 왕비이다.
|
|
숭릉
|
현종과 명성 왕후
|
현종은 제18대 임금이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활자를 만드는 등 좋은 정치를
펼쳤지만,당쟁이 더욱 심해졌다. |
|
혜릉
|
단의 왕후
|
제20대 임금인 경종의 왕비이다.
|
|
원릉
|
영조와 정순 왕후
|
영조는 제21대 임금이다. 당쟁을 막는 탕평책,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여
주는 균역법,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듣는 신문고의 부활 등 좋은 정치를 펼쳤다. |
|
수릉
|
문조와 신정 왕후
|
문조는 제23대 임금인 순조의 아들이다. 세자의 자리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나
나중에추존된 임금이다. 익종으로도 부른다. |
|
경릉
|
헌종과 효현 왕후, 효정 왕후
|
헌종은 제24대 임금이다. 8세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순원 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천주교 박해와 삼정의 문란 등 정치가 어지러웠다. |

▲남양주 사릉 능역 안 진산군 부인 묘터에 홀로 남은 문인석. 묘는 1983년 옮겨 가고
석물만 남았다.
◆사릉(思陵)의 여윈 소나무
해 질 무렵 사릉에 닿았다. 낮게 기운 해가 사초지에 소나무 그림자를 줄무늬로 깔았다.
정자각 앞을 노부부 한 쌍이 천천히 지났다. 맞배지붕을 얹은 정자각은 ‘丁’ 자라기보다
네모에 가까울 만큼 아담하다. 언덕 위 봉분은 작다.
곡장은 낮고, 석물은 봉분 앞에 오종종하게 모였다. 무석인이 없고, 병풍석도 난간석도
없다. 억새를 이고 병풍석을 두른 건원릉을 보고 온 눈에 사릉은 유난히 단출하다.
정순(定順)왕후는 열다섯에 왕비가 됐다. 남편 단종은 한 살 아래였다. 혼례를 서두른
이는 숙부 수양대군이었다. 이듬해 단종은 그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겼고, 2년 뒤
영월에서 죽었다.
왕비는 열여덟이었다. 군부인으로 낮춰져 궁을 나와, 왕실 여인들이 출가해 머물던 동대
문밖 정업원에 몸을 붙였다.
거처와 양식을 주겠다는 세조의 뜻을 물리치고, 왕비는 옷감에 자줏물을 들여 댕기와
저고리 깃,고름과 끝동을 지어 팔며 살았다고 전한다.
물을 들였다는 샘은 서울 창신동에 ‘자주동샘’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바위 아래 돌을
둘러 샘 자리를 표시해 두었다.
끼니를 대 주던 이웃 여인들을 조정이 막아서자, 여인들이 남자는 드나들 수 없는 채소
시장을 열어 몰래 먹을거리를 건넸다는 이야기가 19세기 서울지리지 ‘한경지략’에 실려
있다.정순왕후가 날마다 동쪽 봉우리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 봉우리가 지금의 종로구 동망봉이다. 두 세기 반이 지난 1771년, 일흔여덟의 영조가
정업원 옛터를 찾아 손수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비를 세웠다.
동망봉바위에도‘동망봉’ 세 글자를 새겼지만, 일제강점기 그 자리에 채석장이 들어서며
바위째깨져 나갔다. 영조는 같은 해 사릉 앞에도 표석을 세웠다. 아내 곁에 빈자리를
남겨 둔 채 늙어 가던 왕은 왜 이렇게 마음을 썼을까.
정순왕후는 남편 단종을 잃고 64년을 더 살았다. 세조와 예종, 성종, 연산군을 지나 중종
때인1521년 여든둘로 눈을 감았다. 임금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이었다. 말년은 남편의
조카 정미수의 집에서 보냈다.
왕비가 아니었으므로 장례는 대군 부인의 예를 따랐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시집간
해주 정씨 집안이 제 선산에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냈다.
◆생각할 사(思)
1698년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그도 왕비의 자리를 되찾았다. 숨진 지 177년 만이다.
무덤은 능이 됐고, 남편을 평생 그리워했다 하여 ‘생각할 사(思)’ 자를 받았다.
능역 안의 남의 무덤은 옮기는 것이 법도였지만, 숙종은 해주 정씨의 묘들을 그대로 두게
했다. 그 무덤들은 지금도 사릉 능역 안에 있다. 왕비의 마지막을 지킨 정미수의 무덤도
능침 아래 있다.
정씨 집안은 그 뒤로 조상 무덤가의 나무 한 그루를 베려 해도 나라에 허락을 구해야 했다.
조선 왕릉 가운데 능역에 사가(私家)의 무덤이 남은 곳은 여기뿐이라고 한다.
능역 깊숙한 풀숲에 문인석 한 쌍이 서 있다. 중종의 아들 해안군의 첫 부인 진산군 부인의
묘가있던 자리다. 1983년 묘는 고양으로 옮겨 가고 돌만 남았다. 관모와 어깨를 검은 이끼
가 덮었고,발치에는 쓰러진 돌 하나가 누워 있다.
올봄 사릉의 들꽃이 영월로 갔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한 뒤 두 사람을 한데 묻어
달라는 청원이 잇따랐지만, 세계유산인 왕릉을 옮길 수는 없는 노릇. 대신 국가유산청은
사릉 양묘장에서 기른 쑥부쟁이와 벌개미취, 맥문동 같은 들꽃 800여 본을 영월
장릉에 옮겨 심었다.
보랏빛 꽃만 골랐다. 자줏물을 들이며 살았다는 왕비를 위해서다. 꽃이 심긴 자리 옆에는
1999년 사릉에서 기른 묘목을 옮겨 심은 소나무, 정령송이 먼저 자라고 있었다. 앞으로
는 해마다 가을이면 두 능에서 씨앗을 받아 이듬해 한식날 서로 바꿔 심는다고 했다.
사릉의 능침 뒤로 775m의 소나무길이 돈다. 봄과 가을에 개방하는 이 길은 지금 열려 있다.
키 크고 여윈 소나무들이 붉은 줄기를 엇갈려 세웠고, 그 발치를 활엽 관목이 초록으로
덮었다.해가 더 기울자 그림자가 사초지를 건너 동쪽으로 길게 누웠다. 왕비가 날마다
바라봤다는 쪽이다.
◆두 명의 정순왕후
동구릉의 원릉에서 영조 곁에 누운 왕비와 사릉의 주인은 둘 다 ‘정순왕후’다. 영조의 계비
는貞純, 단종의 왕비는 定順이다. 둘 다 열다섯에 왕비가 됐다는 것까지 닮았다.
그 뒤의 삶은 딴판이었다. 영조의 계비는 훗날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스스로
를 ‘여주(女主)’라 칭했다. 조정을 쥐고 흔든 왕실의 어른이었다. 단종의 왕비는 열여덟에
남편을 잃고 궁 밖으로 쫓겨나 64년을 살았다. 305년 차이로 ‘두 명의 정순왕후’가차로
20분 떨어진 두 능에 누워 있다.

◆ 여행 정보
◇동구릉=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지하철 8호선 동구릉역에서 가깝다. 11월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1000원인데,
10월 29일부터 11월 15일까지는 무료다.
주차는 승용차 기본 30분 500원, 이후 10분마다 200원으로 출차 때 신용카드로 낸다.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은 하루 네 번. 오전 10시, 10시 30분, 오후 1시와 3시에
있다. 031-579-4900
◇건원릉 능침 특별개방= 11월 3∼8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각 1시간. 사전 예약은 마감
됐고 회차마다 현장에서 10명을 선착순으로 받는다. 억새는 해를 마주 보는 오후
회차에 더 희게 빛난다.
◇숲길 개방= 동구릉의 휘릉∼원릉, 경릉∼나무 키우는 곳(육묘장) 구간(2.7㎞)과 사릉의
능침 뒤 소나무길(775m)이 11월 29일까지 열린다.
◇사릉=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동구릉에서 차로 20분 남짓. 대중교통으로는
경춘선 금곡역이나 사릉역에서 버스로 갈아탄다. 월요일 휴관. 031-573-8124
'▣新八道(신팔도)***紀行錄 > ⊙경기 인천****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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