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鄭鑑錄) "으뜸 피난처"ㅡ혼돈의 시대마다 이곳은 삶을 품어 주었다.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재난이 들지 않는 땅’으로 지목된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는

솔숲 사이로 숨겨진 계곡이 있고, 그 계곡을 굽어보는 자리에 정자 금선정이 있다. 퇴계의 제자

인 금계 황준량이 소요하던 그윽한 자리에다 훗날 그를 기려 지은 정자다.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과 격암유록의 기록대로 여기가 과연 삼재(三災) 불입(不入)의 명당

이자‘사람을 살리는 땅’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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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도, 흉년도, 전염병도 들지 않는다는 땅.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이곳

은 소백산 아래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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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절망과 비탄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명당을 찾아 들어왔던 이들이 있고, 맑은

계곡을 굽어보면서 풍류를 완성한 그림 같은 정자도, 달빛의 이름을 걸어놓은 누각의 절집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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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고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비석으로 일으켜 세운 사랑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만

나면서 좋은 땅의 기운과 거기에 걸맞은 좋은 삶을 생각합니다.

 

◆정감록이 예언한 명당…금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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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의 풍기. ‘풍기’ 뒤에는 바로 ‘인삼’이란 단어가 입에 착 달라붙지만, 사실 풍기에서

인삼보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이 ‘정감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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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은 조선 시대 세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다. 이 책에는 난세와 병란을 피할 수 있는 땅

열 곳, 그러니까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순서대로 소개돼 있다.

 

정감록에 따르면 우리 땅에서 ‘능히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열 곳(十勝) 중에서 첫 번째

(一勝)가 바로이곳 풍기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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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불리는 격암 남사고는 예언서 ‘격암유록’에서 풍기가 병풍

처럼 두른 소백산을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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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가 나돌기 이전부터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으로 가득한 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위로는 소백산의 으뜸 봉우리인 비로봉과 연화봉, 도솔봉이 두르고 있는 데다,

이 세 봉우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금계천과 남원천, 두 개의 물줄기가 발을 적시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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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풍수의 창시자로 꼽히는 신라의 도선국사. 그는 7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지은 풍수책

‘도선비기’에서 최고의 명당 터로 소백산 아래 풍기 땅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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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도참 사상이 지배하던 고려에는 ‘산천비보도감’이란 독립기관이 있었다. 전국의 명산

대천을 답사해 최상의길지를 찾아내는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산천비보도감이 찾아낸 길지에 왕손의 태를 묻었다. 길지에 풍기 땅이 꼽히지 않았을 리 없다.

처음고려 충목왕의 태가, 그리고 이후에 조선 문종과 사도세자의 태가 차례로 풍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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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지의 중심은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다. 금계란 이름은 ‘금빛 찬란한 닭이 알을 품었다’

는 이른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지세에서 따온 것이다.

 

금계란 이름은 금계리 뒤편 소백산 자락에도 있다. 풍기읍에서 소백산 쪽으로 더 들어간 자리

의 산정에는금계 바위가 있다.

 

닭의 볏을 닮은 두 개의 바위인데, 닭의 눈이 있는 자리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어느 날 보석이 탐이 난 나그네가 바위에 올랐다가 천둥과 벼락을 맞아 죽고 말았고,

보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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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리가 정감록이 말하는 ‘재난이 들지 않는 땅’이란 소문이 돌면서, 난리가 있을 때마다 이

골짜기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제강점기에도, 6·25 전쟁통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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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리 주민 중 열에 여덟, 아홉은 정감록을 믿고 찾아온 이들이거나 그들의 후손이라고 했다.

특히 이북에서 온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평안도 출신이 가장 많았고 황해도, 함경도

순이 었다고 주민들은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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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의 비결을 찾아든 이들에게 십승지지는 꿈꾸던 이상향이었으되, 그 희망은 힘차거나

밝은 것이 아니라 측은하고 안쓰러운 쪽에 더 가까웠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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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에 마지막으로 붙잡은 위태로운 실낱처럼…. 얼마나 많은 실의와 도탄이 제

살던 자리를 떠나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활짝 열린 정자 위 빗자루....쉬다 단정히 가시게 말하는듯

▲ 소백산 연화봉 남동쪽 능선 중턱의 금계 바위.수탉의 벼슬을 닮은 바위는 십승지지

(十勝之地) 중에서도 가장길지로 꼽히는 금계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정자 마루에 빗자루를 놓은 까닭

 

금계리는 다른 시골 마을과 별다를 게 없다. 최고의 풍수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니 믿을

뿐이다. 풍수의 빼어남은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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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 리 마을 한복판에는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 ‘한국 천하 명당 십승지’라 새긴 비석이 있다.

지도위에 전국의 십승지를 표시한 바위도 놓여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토록 평범한 시골

마을을 누가 천하 명당이라 짐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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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보기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마을이지만, 금계리 마을 안으로 깊이 들면 ‘비경’이라

할 만한 경관이 있다. 소백산 아래로 흘러내린 물이 금선계곡을 이뤄 지나가는 자리.

그 계곡의 솔숲 사이에 정자 ‘금선정(錦仙亭)’이 있다.

 

정자는 금선계곡의 계곡미를 단번에 완성하는 화룡점정과도 같다. 계곡 옆으로는 먹을 듬뿍

찍어 붓질로 그린 것처럼 굵고 힘찬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계곡 아래로는 옥계청류(玉溪

淸流)가 흘러내린다. 금선정은 그 물을 내려다보는 바위 금선대 위에 올라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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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활짝 열어 둔 금선정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빗자루였다. 정자 누마루 한쪽에 빗자루 두

개가 놓여 있다. 하나는 마당을 쓰는 싸리비이고, 다른 하나는 마루를 쓰는 갈목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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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를 놓아둔 뜻은 짐작대로다. 내키는 만큼 앉았다 갈 때, 일어선 자리를 단정하게 정리해

달라는 의미. 다시 말하자면 빗자루는 오가는 길손들에게도 기꺼이 정자 마루를 내어주

겠다는 푸근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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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정 위쪽에는 정자가 또 하나 있다. 주차장 한쪽에 마을 주민들의 휴식을 위해 세운 듯한

계양정이다. 계양정은 정자보다 정자 앞에 몸을 한껏 기울여 자라는 굵은 소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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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둥치의 소나무 형상이 마치 붉은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날아가는 듯하다. 계곡 양쪽

으로 늘어선 소나무들도 기꺼이 명품이라 불러줄 만하지만, 정자 앞의 소나무야말로

‘명품 중의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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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는 금선정에도, 계양정 마루에도 있다. 그 빗자루 덕에 활짝 열어둔 정자의 반들반들한

마루에 누구나 편히 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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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한가운데, 금선정 정자 마루에 앉아 명품 소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비 오는 계곡을

굽어보거나, 목침을 베고 누워 책장을 넘기며 빗소리를 듣는다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다 나른해진다.

 

◆스승이 제자를 ‘선생’이라 부르다

▲ 순흥면사무소 인근의 봉도각 주변 연못에 피어난 수련과 소백산의 오지마을

달밭골의 깊은 숲에서 만난 큰까치수영.

 

정자 마루에 앉았다면 서늘한 바람 속에서 이 정자가 기리는 이의 행적을 짚어보자.

금계 황준량. 그는 마흔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뜬 조선의 문인이자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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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 전쯤 그가 이 계곡을 소요하면서 걸터앉기 좋은 바위에 ‘금선대’란 이름을

붙였고, 훗날 그 바위 위에다 그를 기리는 정자, 금선정을 지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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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량은 스물네 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른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이들을 일러 신동

(神童)이라 했는데, 황준량을 일컬어서는 ‘기동(奇童)’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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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할 정도’로 뛰어났다는 뜻이다. 호조·병조 좌랑을 거쳐 경상도 감찰어사, 단양군수,

성주목사를 지냈다. 그럼에도 그를 아는 이들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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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누구였는가는 스승인 퇴계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미뤄서 짐작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죽은 뒤 그 사람의 일대기를 적은 것을 ‘행장’이라 하는데, 퇴계가 일생 동안

지은 행장은 7편에 불과하다.

 

이러저러한 인연을 내세워 당대의 석학인 퇴계로부터 글을 받으려는 민원이 쇄도했을

것임에도 그렇다. 명종 임금과 아버지를 빼고 나면 퇴계가 행장을 지어 삶을 기록한

인물은 고작 다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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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이현보, 충재 권벌,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그리고 풍기의 금계 황준량이 있다.

​제자의 죽음에 행장을 쓰는 스승은 거의 없다. 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계는 황준량의 죽음을 슬퍼하며 손수 지방을 써 붙이고 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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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돌에 새길 글씨도, 애통함을 담은 만사(輓詞)도, 제문(祭文)도 썼다. 추모사의 문장

한 줄 한 줄에서는 비통함이 뚝뚝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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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은 퇴계가 추모사에서 열여섯 살이나 어린 황준량을 ‘선생’이라 적었다는 것

이다. 어찌 스승이 제자에게 선생이라 할 수 있었을까. 당대의 사건이었다. 이런 퇴계

의 파격적인 처신은 후일 조정에까지 알려져 실록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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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만이 아니었다. 퇴계는 황준량이 남기고 간 글을 모아서 문집을 출간했다. 이어 황

준량이 생전에 지으려 했던 서당 겸 거처인 금양정사를 짓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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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짓고는 관리를 스님에게 맡겼는데, 그 스님이 자주 부역에 불려 다녀 관리가 허술

해지자, 퇴계는 풍기군수에게 금양정사를 지키는 스님의 부역 면제를 탄원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무밭에서 무 뽑듯, 달밭에서 달을 뽑다

▲ 소백산 아래 순흥에는 ‘봉서루(鳳棲樓)’가 있다. ‘봉황이 깃든 누각’이란 뜻이다.누각

앞에다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둥근 바위를 가져다 둔 건, 알을 두고 봉황이 날아가지

않으리란 믿음 때문이다.

 

황준량은 생전에 984수의 시를 남겼다. 그가 남긴 명문 중의 명문은 시가 아니라 그의 나이

마흔한 살에 명종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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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수로 재임 시절 적폐로 신음하는 단양 주민들의 삶을 절규하듯 토한 황준량의 상소문

이 바로 ‘단양진폐소’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고통스럽게 합니까. 이슬을 맞으며 깊은 산속에 살고, 승냥

이, 살무사에 죽더라도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미처 슬퍼하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

​

”이 글이 명문인 것은 읽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명종은 상소문을 받아들고 단양에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해주는 혜택을 내렸다.

 

과중한 공물을 바치느라 피폐할 대로 피폐했던, 그래서 산속으로 숨어갈 수밖에 없었던 백성

들은 황준량이 얼마나 고마웠을까.벼슬살이하는 동안 황준량의 마음은 늘 금선계곡으로

향했다.

​

퇴계가 쓴 황준량 행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매번 벼슬에 뜻을 빼앗기고 관청의 사무로

괴로움을 당해 병이 깊어진다고 여기고, 어느 날 바람처럼 벗어나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병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풍기로 돌아오던 중 그는 그만 예천에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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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정 뒤편의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몇 굽이 올라서면 홀로 마을 뒤로 물러선 집, 금양

정사가 있다. 금양정사는 황준량이 터를 닦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에야 세워졌다.

 

사랑채 격인 금양정사 옆으로 나란히 안채를 지었는데, 안채의 현판에 건 편액이 영월헌

(迎月軒)이다. 뜻으로 풀면 ‘달을 맞이하는 추녀’다.그러고 보니, 소백산 비로봉 아래에

붙여진 이름에 온통 달(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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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양정사가 영월헌을 걸었고, 소백산 삼가탐방지원센터에서 걸어서 30분이면 닿는 비로봉

아래 절집 비로사에는 월영루(月映樓) 현판을 달았다. ‘달이 비치는 다락’이란 뜻이다.

​

거기서 다시 산정을 향해 가파른 비탈을 더 오르면 소백산 아래 첫 동네 달밭골이 있다. ‘달밭

(月田)’이라. 마을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에서는 달을 미래의 희망으로, 또 지혜로 풀었다.

​

그리고 달밭골을 “무밭에서 무를 뽑듯, 달밭에서 달을 가꾸어 뽑는 곳”이라 적어두었다.​그러

나 실상은 다르다. 달은 산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가파른 산자락에 다닥다닥 붙은 다락 모양

의 산중의 밭이 있다고 해서 달밭골이라 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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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연원이 다르대도 어떨까. 달랑 네 가구가 사는 산중 오지마을 달밭골의 달빛은 휘영청

밝을 테니 말이다.

 

​◆시인의 집에 세운 마지막 시(詩)

▲ 소백산의 죽계구곡의 물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노거수. 상처에 돋은 덧살과

옹이가나무가 지나온 시간을 보여준다. 소백산의 깊은 골에는 이런 기운이

스며 있다.

 

연화봉과 비로봉,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소백의 능선은 금계리에서는 잘 안 보인다. 소백의

산줄기는 금계리에서 자수 고개를 살짝 넘으면 닿는 마을 백리에서 더 잘 보인다.

 

금계리에서 자수 고개로 내려서는 길. 소나무와 사과나무를 심은 진초록 정원을 가진 집

마당에 비석 두 기가 서 있다. 둘 다 시를 적은 시비(詩碑)다. 시비에 새겨진 ‘아내에게’란

제목의 시에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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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 가슴을 / 난초인 양 다스리고 / 깊이 모를 눈빛으로 / 금 간 꿈도 때우더니

/ 지금은 이 지아비를/신주처럼 지켜선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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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가난 속에서 사과농사를 지었던, 그러면서도 늘 시를 놓지 않았던 시인이 있었다.

두 해전 작고한 고 김순한 시인. 안동이 고향인 그는 1962년 결혼 직후 아내와 이곳 풍기

땅으로들어와 과수원집에서 머슴을 살았다. 꼬박 3년 머슴살이로 모은 돈으로 남의

땅을 얻어 농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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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한 해 땅을 늘려 그 흔한 경운기 한 대 없이 5000평이 넘는 사과밭을 일궜다. 평생

담배도,술도 손대지 않고 몸이 부서져라 농사를 지었지만, 정작 그는 돈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

사과를 거두고도 한 번도 사과공판장에 나가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대신 그는 책을 한시

도 놓지 않았다. 사과밭에 갈 때도 책을 챙겼다. 농사를 지으면서 그는 시인이 됐다.

​

시인의 집 마당 비석에 새긴 시 ‘아내에게’는 시인이 일흔아홉 나이로 숨지기 한 해 전쯤,

그러니까 병이 깊어져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기 직전에 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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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집을 두고 요양원으로 갔던 건, 아내도 그 무렵에 대장암 판정을 받아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양원에 가기로 정해진 날, 시인은 아내 강혜영(79)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내가 (당신에게) 잘해준 게 하나도 없네. 고생했네…수고했네….” 그리고 시인은 더 늦기

전에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비석으로 세웠다. 한 사람의 최선을 다했던 삶과 진심을 다한

사랑이 그 비석에 새겨진 것이었다.

​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찾아 소백산 아래 풍기로 찾아들었던 이들이 꿈꾸었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이곳에서 그 꿈을 이뤘을까. 십승지지에는 재난이 들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어디 진짜로 그랬을까

 

젊어서 지긋지긋했던 가난 속에서 농사와 시를 함께 지으며 살아온 생활은 얼마나 고단했을

것인가.그때를 돌아보면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시인의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돌아보면, 참 평화로웠던 시간이었다.

 

벼랑 끝에 선 암자·100년 한옥 책방…공들인만큼 마음 가는 ‘지리산 고을’

▲경남 산청 둔철산 자락의 암자 정취암. 암자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웬만한 절 못잖은 규모다.

암자가 세워진 자리는 상서로운 기운이 금강산 못잖다고 해서 한때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동쪽으로 낮게 엎드리는 자리에 산청이 있다. 남덕유

산에서 내려온 물과 지리산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 경호강이 되고, 강은 100리를 굽이돌며

고을 한가운데를 지난다. 가을이면 그 물길을 따라 들판이 누렇게 익고, 산자락마다

억새가 하얗게 일어선다.

 

산청(山淸). 이름부터 ‘산이 맑은’ 고을이다. 산청을 이야기할 땐 흔히 천왕봉과 대원사계곡,

동의보감촌 같은 이름난 명소부터 꼽는다.

 

하지만 이 가을 산청에서 오래 눈에 밟힌 건 화려하게 꾸민 것들이 아니었다. 전기 패널 대신

아궁이를 남긴 한옥이그랬고,다랑논에서 돌을 골라내 연못을 일군 절집이 그랬다.

 

하나같이 사람의 손이 오래 머문 곳들이다. 꾸미는 일과 공들이는 일은 다르다. 꾸밈은 눈길

을 끌지만, 공들임은 마음을 붙든다. 산청에서 그 차이를 새삼 알게 됐다.

 

◆뜯길 위기의 한옥을 내다

 

강인석(60) 씨가 한옥을 보러 간 날, 마당에는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진주 인사동에서 왔다는

골동품상이었다. 진주에도 인사동이 있다. 서울 인사동처럼 골동품상과 고미술상이 모여

있는 거리다.

 

골동품상이 겨누고 있던 건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마을의 한옥이었다. 한옥은 ‘투트랙’으로

나온 매물이었다. 집주인 어머니는 집을 통째로 팔려 했고, 아들은 집을 뜯어 팔 궁리를 하고

있었다.

 

기둥과 대들보, 문짝과 마루널이 골동품이 될 만큼 고풍스러웠다. 강 씨는 그날 부랴부랴 계약

서에도장을 찍었다. “계약을 안 하면 이 집이 뜯기겠구나 싶었지요.”

 

이 한옥이 뜯겨 나갈 뻔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원래 충남 부여에 있던 집

을뜯어다이곳에 다시 세웠다. 부여에서 처음 지어진 게 1890년대쯤으로 추정된다.

 

단계로 옮겨 온 집은 순천박씨 재력가 집안이 여름 별장처럼 쓰다 오래 비워 둔 터였다. 한 번

뜯겨 옮겨 온 집이, 백 년을 넘겨 또 한 번 뜯겨 나갈 뻔했던 것이다.

 

강 씨는 책방을 하려고 오래 한옥을 찾아다녔다. 전국을 돌며 숱한 집을 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은 드물었다. 그러다 만난 게 이 집이었다. 2022년 5월, 집은 카페 ‘소북(素北)’과 책방

‘밀당’이 됐다.

 

마을 사람들은 다 말렸다. 이 시골에 무슨 카페 손님이 오겠느냐고, “그냥 딸기 농사나 지으라”

고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단계는 딸기로 이름난 마을이다. 그 마을 한복판에서 딸기 대신 커피

를 내리 겠다고 했으니 걱정이 앞설 만했다.

 

소북의 ‘소(素)’는 꾸밈없음이다. 다들 바닥에 전기 패널을 깔라고 할 때 강 씨는 아궁이를 남겼

다. “한옥은 한옥답게 남아야지요.” 툇마루 밑엔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웬만한 건 제 손으로 고치려고 한옥 소목 일까지 배웠다. 한옥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라고 했다. 꾸밈은 덜어냈지만, 손은 그만큼 더 갔다.

 

대문을 들어서면 잔디 마당에 디딤돌이 두 줄로 놓였고, 빨강·노랑·초록 나무 의자가 나란히

손님을기다린다. 대청에 오르면 휘어진 통나무 대들보가 다듬지 않은 생김새 그대로 머리

위를 가로지른다.

 

서까래도 굵기가 제각각이다. 반듯하게 켠 목재로는 낼 수 없는 표정이다. 마당 한쪽엔 헌 기

와가 켜켜이 쌓였다. 본채 옆으로 돌아가면 소나무 한 그루를 끼고 앉은 하얀 별채가 나온다.

 

접이식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힌 별채 안에도 책장이 빼곡하고, 소나무 그늘엔 빨간 파라솔이

펼쳐져 있다. 한옥과 단정한 시멘트 건물이 정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는데, 둘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을 받아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수국 곁 바위 위에서 몸을 말고 조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다. 오후 한나절이 거기서 다 간다.

▲산청 단계마을의 한옥 북카페 소북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책방 ‘밀당’. 책마다 책방

주인이 정성스럽게 쓴 서평 혹은 추천사가 붙어 있다. 이 정도의 애정과 노고는

‘책을 파는 것’ 너머의 일이다.

 

◆잘 팔리는 책은 들이지 않는 책방

 

한옥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책방 ‘밀당’에선 놀랄 일이 하나 더 있다. 진열대의 책마다 노트

반 장만 한 메모지가 붙어 있다. 부인 최명옥(56) 씨가 책을 읽고 손글씨로 빼곡하게 적은

감상이다.

 

노랑, 연두, 하늘색 메모지가 책 표지마다 한 장씩 붙어 있는 진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

이다.메모는 정직하다. 한 소설집에 붙은 메모는 “무슨 얘기인가 했다”로 시작한다.

 

젊은 작가가 그려낸 낯선 세계에 몰입하기 어려워 첫 몇 페이지에서 여러 번 숨을 고르며 겨우

나아갔다는 고백이다. 그러다 끝내 그게 우리 곁에 사는 사람 이야기였다는 걸 알게 됐다고

적었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에 붙은 메모는 과거나 미래의 행복보다 지금에 집중하게 되는 책이

라고 권한다. 책 한 권 팔자는 마음으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메모만 읽다가 책을 집어 드는

손님이 적지 않다.

 

‘어른의 어휘력’에 붙은 메모가 압권이다. 들여놓기 무섭게 팔려 나가 좀 질려 버렸단다. 다른

책도팔렸으면 하는 마음에 한동안 들여놓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하도 찾아 결국 다시 들여놨

다는사연이다.

 

잘 팔리는 책을 일부러 밀어내는 책방이라니. 책과 밀고 당긴다는 ‘밀당’이란 이름이 메모 한

장으로 다 설명된다.

 

독자들이 산청 여행길에 들고 갈 만한 책을 권해 달라고 하자, 최 씨는 세 권을 꼽아줬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J D 샐린저의 ‘호밀밭

의 파수꾼’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숲속 여름 별장에서 한 계절을 나는 건축가들의 이야기다. 공교

롭게도이 집도 한때 누군가의 여름 별장이었고, 여름은 이제 막 지나갔다.

 

부부가 그리는 이곳의 내일도 최 씨가 책에 적어둔 메모와 결이 같다. “사람을 빨리 불러 모으고

싶은 생각은없어요. 지금처럼 차분하게, 붐비지 않게, 오래 가고 싶습니다.

 

” 강 씨가 꿈꾸는 건 어릴 적 살던 집 같은 곳이다. 지금은 남이 살아 들어가 볼 수 없는 옛집

대신,누구든 들어와 제 기억을 꺼내 보고 갈 수 있는 집. 실제로 오래전 이 집에 세 들어 살았

다는 이가 찾아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하고 갔다.

 

마을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손님은 하나둘 늘었다. 산청군은 마을에 한옥을 지어 부부에게

빌려줬고, 부부는 거기서 북스테이 ‘단계’를 꾸린다. 사람이 사람을 부르기도 했다.

 

종가로 돌아올지 망설이던 한 화가 종손이 소북에 들렀다가 강 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무조건 오시라, 같이 좋은 마을을 만들어 보자”고 했더니, 그가 정말 마을로 내려와

갤러리를 열었다.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 남명 조식이 학문을 닦던 곳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덕천서원.

 

◆느슨하고 심심한 골목

 

카페를 나서거든 마을 골목을 걸어 볼 일이다. 단계마을엔 한옥이 많다. 그렇다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즐비한 건 아니다. 말끔한 신식으로 손보지 않아 좀 누추해 보이기도 하는

‘진짜’ 한옥들이 양옥과 두서없이 섞여 있다.

 

강 씨는 이곳을 “요즘 보기 드문 진짜 시골”이라고 했다. 이끼 낀 돌담이 골목을 따라 이어

지고, 담벼락엔 새마을운동 시절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시골도 예전의

시골이 아닌요즘, 단계 골목에선 시간이 반 박자쯤 느리게 간다.

 

골목 안쪽엔 400년 넘은 서원도 하나 숨어 있다. 1614년 동계 권도를 모시려고 세운 완계서

원이다.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강당부터 다시 지었고, 1985년에야 지금 모습

을 되찾았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서원이 마을 집들 사이에 섞여 제 나이를 내세우지 않고 앉아 있다.

이채로운 건 단계초 교문이다. 기와를 얹은 솟을대문이 교문이다. 현판엔 ‘삭비문(數飛門)’

이라 적혔다.

 

어미 새가 새끼에게 나는 법을 거듭 가르친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날마다 그 문을 드나들며

날갯짓을 배운다.마을 들머리 논가엔 지난해 세운 ‘단계딸기 유래비’가 서 있다.

 

1985년 마을 사람 셋이 처음 딸기 농사에 뛰어들었다. 몇 해를 실패하고 전국을 돌며 배운 끝

에 재배에성공했고, 일본과 네덜란드를 찾아가 배워 온 기술로 지금의 단계딸기를 일궜다고

새겨져 있다.

 

40년 만에 젊은 세대가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다는 대목에선 마을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강 씨

에게 “딸기 농사나 지으라”던 이웃들의 말이 핀잔이 아니라 진심 어린 권유였다는 걸, 이 비석

앞에서 알게 된다.

 

단계 골목의 매력은 느슨하고 심심하다는 데 있다. 볼거리를 줄 세워 놓지도 않았고, 걷는

이를 재촉하는 것도 없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들판이 시작되고, 들판은 가을볕에 누렇게

익어 간다. 그 너머로 딸기 하우스들이 줄지어 있다. 뒷짐 지고 걷기 딱 좋은 계절이다.

▲정취암의 산신각 뒤쪽 바위벽에 걸어 놓은 산신탱화. 탱화 앞에다 호랑이를 탄 산신 석상을 놓았다.

 

◆법어 아래 놓아둔 모기약

 

단계에서 멀지 않은 같은 신등면 대성산 벼랑 위에 정취암이 있다. 암자 뒤까지 차로 오를 수

있지만, 벼랑에 제비집처럼 붙은 암자를 올려다보며 걷는 산길도 20분 남짓이면 된다. 입구는

좁고 들어갈수록 넓어진다. 풍수에서 기운이 머무는 자리로 치는 ‘전착후관(前窄後寬)’

의 지형이다.

 

암자는 소박하다. 원통보전과 삼성각, 정취전 몇 채가 벼랑에 기대 옹기종기 앉았다. 바람

소리와목탁 소리가 지나가는 원통보전 처마 아래 현수막이 걸렸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선 그 자리가

곧 진리라는 임제 선사의 말이다. 바로 아래 화이트보드엔 손글씨로 ‘모기 물린 데 바르는

약’이라고 적혀 있다.

 

아무나 가져다 쓰라고 내놓은 약이다. 절집에선 이것도 보시다. 천 년 묵은 법어 아래 모기

약이 놓인풍경이 어떤 법당 장식보다 정겹다.

 

원통보전 안엔 50㎝쯤 되는 목조 관음보살이 앉아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인데, 작고

아담한 몸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법당을 나와 고개를 들면 큰 바위 위에 거북 두 마리가

나란히 엎드린 듯한 쌍거북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에 빌면 부부 금실이 좋아지고 자손을

얻는다고 했다.

 

삼성각 뒤엔 1833년에 그렸다는 산신탱화가 있다. 호랑이를 탄 산신이 어디론가 행차하는

그림인데, 그 앞엔 호랑이 탄 산신을 돌로 깎은 석상까지 앉혀 놓았다. 불교와 토속신앙이

한 마당에서 사이좋게 지낸다.

 

삼성각 곁엔 납작한 책을 포갠 듯한 ‘책바위’가 있다. 조선 초의 도사 문가학이 젊은 시절 이 암자

에서 흰 여우에게 둔갑술 책을 얻었는데, 아홉 장 가운데 여덟 장을 익혔을 때 여우가 마지막

한 장을 이 바위에 숨기고 사라졌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다.

 

여덟 장짜리 도술은 딱 그만큼 어설펐다. 가뭄에 그가 빌어 내린 비는 겨우 먼지를 적실 정도였다

고 ‘조선왕조실록’은 적었다.

 

하늘과 귀신의 군사를 부르겠다며 역모를 꾸민 그는 1406년 저잣거리에서 수레에 매여 찢겼다.

둔갑을 하고도 상투 끝을 감추지 못해 들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꾸민 모습 끝으로 본모습이

삐져나온 것이다.

 

정취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자리는 따로 있다. 삼성각에서 5분쯤 더 오르면 암자에서 가장 높은

정자, 만월정이 나온다. 넓적한 너럭바위 곁에 선 정자다.

 

발아래로 신등의 들판과 마을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합천 삼가와 의령 한우산, 자굴산의 능선이

겹겹이 물결친다.

 

산청 아홉 경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조망이다. 해 뜨는 풍경을 보러 새벽에 오르는 이도 많다.

가을엔 누렇게 익은 들판이 산자락 사이를 가득 메운다. 방금 걸었던 단계의 골목도 그 들판

어딘가에 있다.

▲전(傳)구형왕릉.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산청의

대표적인 명소다.

 

◆공들인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

 

신등에서 산청읍 쪽으로 내려가면 지리산 동쪽 끝 봉우리 웅석봉 아래 수선사(修禪寺)가 있다.

오래된 절이 아니다. 문화재도 없다. 비구니 여경 스님이 30여 년 동안 홀로 일궜다.

 

그 30년의 손길이 절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어디 한 곳 손이 가지 않은 데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원래는 다랑논이었다. 논에서 돌을 걷어내자 웅덩이가 생겼고, 그 웅덩이가 연못이 됐다.

 

거기 연을 심을 요량이었는데, 계곡의 찬물에선 연이 잘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물이 위쪽에서

부터 천천히 데워진 뒤 연못에 들도록 물길을 냈다. 보이지 않는 데까지 손이 갔다.

 

절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돌계단을 몇 개 오르면 사립문이 나온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다. 사립

문이 곧 절의 문이다. 문을 지나면 둥근 연못이 펼쳐진다. 연못가엔 통나무를 깎아 만든 물레방아

가 천천히돌고, 그 곁엔 직선으로 반듯하게 지은 현대식 건물이 한 채 섰다. 3층이 카페다.

 

카페 테라스에 오르면 연못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연꽃은 진 지 오래. 연잎과 수련 잎이 수면을

빈틈없이 덮었고, 그 위로 나무다리가 굽이굽이 돈다.

 

난간은 휘어진 나뭇가지의 생김새를 그대로 살려 엮었고, 다리 위엔 나뭇조각을 겹겹이 얹은 너와

지붕을 얹었다. 반듯한 데가 하나도 없는데, 거슬리는 데도 하나 없다. 아무렇게나 둔 듯 자연

스러워 보이지만, 그렇게 보이게 하는 데 많은 손이 갔을 것이다.

 

찻잔을 앞에 두고 내려다보고 있으면 다리 위를 거니는 사람들이 그림 속 인물처럼 작아진다.

연꽃이 피는 한여름이면 이 연못이 훨씬 더 화사해지겠지만, 꽃이 지고 잎만 남은 가을 연못

에도 고요한 맛이 있다.

▲지리산 아래 중산리 절터에 모셔진 지리산 성모상.???

 

수선사에서는 크고 화려한 건 없다. 소박하되 단정하다. 마당 구석구석, 댓돌 옆, 툇마루

아래까지 흠잡을 데가 없다. 오래 쓸고 닦아 반질반질해진 마루 같은 절이다.

 

들어가면 누구나 감탄하고 나오는 곳이 수선사의 해우소, 곧 화장실이다.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가는데, 바닥엔 물기 한 점 없고 안은 잘 꾸민 카페 같다.

 

그래서 문득 드는 의문 하나. 절을 이렇게까지 가꿔도 되는 걸까.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게 부처의 가르침 아니었던가.

 

그 물음의 답은 절에 들어설 때 이미 지나온 문에 걸려 있었다. 수선사 입구의 사립문

이름이 여여문(如如門)이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금강경’엔 형상에 매이지 않아 있는 그대로 흔들리지 않는다(不取於相 如如不動)는

구절이 있다.

 

가장 공들여 가꾼 절이 ‘있는 그대로’를 문패로 내걸었다.공들였으되 그걸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게 이 절이 보여주는 장엄(莊嚴)이다.

◆지리산 성모상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최단거리 등반코스 출발지점이 산청의 중산리다. 이 마을 작은 절터

에 높이 74㎝의 지리산 성모상이 있다.

 

고려 명종 때 머리가 사라졌다가 찾았고, 황산대첩에서 패전한 왜구의 칼을 맞았다. 1973년

엔 아예 자취를 감췄다가 14년 뒤 진주의 한 과수원에서 머리가, 천왕봉 아래 계곡에서 몸통

이 나왔다.

 

그때마다 누군가 부쉈고, 그때마다 누군가 되찾아 왔다. 다시는 잃지 않겠다며 천왕사는

성모를 바위에 콘크리트로 붙여 버렸다. 성모는 지금도 그 바위에 붙어 있다.

필리핀 이주자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말레이시아의 수상가옥

▲배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선택한 앞에서 두번째 배를 타고 주변을 돌고,

이 아저씨의 집까지 갔었다.

▲말레이시아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 육지를 멀리하고 수상가옥을 향해 달려간다.

▲필리핀 이주자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 했나보다.이들은 이곳에서 낳고 죽겠다고한다나?

아파트를 짓고 이주하라고해도 이주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정확한 정보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는거다. 모두들 웃고,

손을흔들어주고...이곳에도 빈부의 차가 느껴졌다. 조금더 깔끔하고 분위기가 있는

집도 있고, 곧 무너질 듯~한 집도 있다.

사이타마현(埼玉縣)

신주쿠에서 약 1시간이면 닿는 에도 시대, ‘가와고에’ 당일치기

▲구라즈쿠리 거리


도쿄와 교토, 이름은 닮았는데 거리는 '너무나 먼 그대'다. 그런데도 두 도시를 함께 떠올

리게 되는 건, 현대와 전통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매력을 각자 쥐고 있어서다. 짧은

도쿄 여행 일정에 교토를 끼워 넣는 건 무리다.

하지만 일본 고유의 정취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방법은 있다. 도쿄 세이부신주쿠역

에서 직통 열차인 특급 고에도로 최단 45분, 왕복 교통비는 1만원이 채 안 되는 도시,

사이타마현 가와고에(川越)다. 도쿄 일정에서 딱 하루만 빼면 된다.  

▲사이타마현 가와고에 위치도.

▲사이타마현 위치도.

▲구라즈쿠리 거리

▲구라즈쿠리 거리에서 할 수 있는 인력거 체험.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옆에 있다

◆왕복 1만원, 하루로 충분한 도쿄 당일치기 근교 여행법

도쿄에서 가와고에까지 이동 난이도를 한 번에 낮추는 방법은 '세이부 가와고에 패스'를

쓰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E-티켓을 예매하면 QR 코드가 발행돼 종이 티켓을 따로

발권할 필요가 없다.

▲프린트할 필요 없이 E-티켓으로 바로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다

▲세이부신주쿠역 개찰구 맨 왼편에서 QR로 통과 가능하다

클룩에서 왕복권을 1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에 살 수 있다(2026년 8월 5일 기준). 편도

티켓 2장을 따로 끊는 것보다 더 저렴하다.

 

세이부 가와고에 패스가 있으면 세이부신주쿠역·다카다노바바역·이케부쿠로역 중 한

곳에서 혼카와고에역까지 세이부선을 1회 왕복할 수 있다. 출발역과 도착역을 다르게

잡아도 되니 동선 짜기가 한결 자유롭다.

▲세이부신주쿠역 플랫폼으로 가는 길

이동 시간을 조금 더 줄이고 싶다면, 특급 열차를 고려해 보자. 세이부신주쿠역에서

혼카와고에역까지 최단 45분이면 갈 수 있는 특급 ‘고에도(小江戸)’ 열차다. 

▲인포메이션에서 종이 티켓 발권이 가능하다

 

세이부 가와고에 패스를 구매했다면, 역 창구나 온라인(Smooz)에서 특급권(편도 1회 600엔)

을추가로 구매하면 된다. 전 좌석 지정석에 시트도 푹신해서, 앉아 가는 45분이 꽤 쾌적하다.

일반 세이부선을 탈 때보다 이동 시간이 15~20분쯤 짧아진다.

▲특급 고에도 열차 내부

 

참고로 세이부신주쿠역은 JR 신주쿠역과 다른 역이다. 지하로 이어지지 않는 구간이

있어 도보로 5~10분쯤 걸리니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세이부신주쿠역 외관

 

열차를 타기 전 알아두면 좋은 점은 '출발 시각 1~5분 전에 문이 열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미리 플랫폼에 도착했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어도 당황하지 말자.

 

타고 온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나면 객실을 한 차례 깔끔하게 청소한 뒤 문을 열어 준다.

가와고에로 향할 때는 열차 진행 방향 기준 오른편 좌석에 앉으면 탁 트인 자연 전망이

이따금 펼쳐진다.

▲특급 고에도 열차 외관

◆가와고에 여행의 시작 구라즈쿠리 거리 속으로

 

혼카와고에역에 내리면 여행은 이미 코앞이다. 시작점이나 다름없는 '구라즈쿠리 거리

(蔵造りの町並み)'가 도보 10분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혼카와고에역 입구

 

가와고에가 낯선 여행자를 위해 이곳의 별명부터 소개하자면, 이 도시는 ‘작은 에도’

즉 고에도(小江戸)라 불린다.

 

현재의 도쿄, ‘에도’로 물자를 대던 아랫마을이었던 덕에 에도의 풍경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남은 곳이 30여 채의 구라즈쿠리 건물이 늘어선

구라즈쿠리 거리다.

‘구라즈쿠리’는 나무 골조 위에 두꺼운 흙벽을 발라 올린 에도 시대의 방화(防火) 건축

양식이다. 검은 기와지붕과 육중한 여닫이문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길 위에 이어진다. 

▲구라즈쿠리 거리

▲구라즈쿠리 거리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지만 길 자체는 깨끗하고 반듯하게 닦여 있어 걷기 편하다. 무엇

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저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캐릭터 숍과 편집숍, 카페와 식당, 공방과 스튜디오까지 100개가 넘는 점포가 들어서

있어 문 여는 맛이 전부 다르다.

▲토키노카네

 

토키노카네는 ‘때를 알리는 종’이라는 뜻이다. 구라즈쿠리 양식으로 지은 3층 종루로,

높이약 16m다. 2층 규모의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혼자 우뚝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옛사람들이 약속을 잡거나 일을 시작할 때 올려다보던 것이 늘 이 종이었다. 종루와

동종은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됐지만 그때마다 다시 지어졌다.


지금 서 있는 것은 네 번째로 다시 지은 것이다. 메이지 26년(1893) 가와고에 대화재

이듬해에 재건했다. 종은 지금도 살아 있는 알람이다. 하루 네 번(오전 6시, 정오,

오후 3시, 오후 6시) 울리니, 소리를 듣고 싶다면 그 시간에 맞춰 다가가 보자.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다음은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다. 구라즈쿠리 거리 한복판에 흰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 뜬금없이 서 있다.

 

어딘가 낯익은 외관이다 싶어 찾아보니, 설계자 야스오카 가쓰야(保岡勝也)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지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의 제자다.

 

1918년 제85은행 본점 본관으로 태어나 2020년까지 은행으로 쓰였고, 2024년 5월,

코워킹 스페이스를 품은 복합 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관광객에게도 활짝 열려 있다. 1층은 사이타마현의 물건을 모은 셀렉트 숍과 카페,

2층은 레스토랑이다. 무료로 구라즈쿠리 전망을 볼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

 

2층 테라스로 나서면 낮에는 활기찬 거리 풍경이, 밤에는 건물만 빛을 발하는

풍경이 펼쳐져 진짜 에도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하다.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의 테라스에서 본 구라즈쿠리 거리

▲우나기덴베 장어 덮밥 정식, 히츠마부시

 

찌고 굽고 삶은 고구마가 평범하게 느껴진다면, 색다른 고구마를 만날 차례다. 카페

'야키이모 이모카와 미나미마치 커피(やきいも芋川 MINAMIMACHI COFFEE)'

로 향하면 된다.

 

시그니처는 고구마 구이, 그중 크렘브륄레 고구마가 특히 인기다. 달콤한 군고구마

위에 설탕이 노릇하게 코팅돼 있어 숟가락으로 깡깡 깨 먹는 맛이 쏠쏠하다.

 

고구마를 차갑게 식혀 두기 때문에 속은 시원하고, 아이스크림 같은 식감이 난다.

▲고구마 구이, 왼쪽은 소금을 올려 달콤 짭짤한 맛을 즐길 수 있고, 오른쪽은

크림브륄레처럼 굳은 설탕 코팅을 깨먹을 수 있다

▲야키이모 이모카와 미나미마치 커피 외관

 

에도 시대의 분위기만으로도 가와고에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힘을 숨긴

진짜 주인공이 아직 남았다.

 

먼저 구라즈쿠리 거리의 캐릭터 숍들이다. 토토로, 스누피, 미피 등 인기 캐릭터

들이 이 거리에 자리를 잡고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가시야 요코초 

▲30~100엔 정도의 저렴한 간식 거리가 가득하다

원래 이 길은 근처에 있는 절 ‘요주인(養寿院)’의 참배로였다. 메이지 초, 1870년 경 과자

장인 스즈키 도자에몬(鈴木藤左衛門)이 이곳에 다가시 가게를 내면서 과자

거리가 시작됐다.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도쿄 시타마치의 과자업이 무너지자 그 공백을 이 골목이 메웠고,

쇼와 초기 전성기에는 점포가 70여 곳까지 늘었다. 지금 남은 노포는 10여 곳이다.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

연애 중이거나 짝사랑 중이라면 인연을 잇고 싶을 터. 연애운과 부부운을 빌러 가와고에

사람들이 향하는 곳,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川越氷川神社)로 가 보자.

▲여름이면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에서는 풍경 소리가 울려 퍼진다

 

창건은 약 1,500년 전으로 전해진다.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다섯 명, 모두 한 가족이다.

여기에는 인연의 신으로 알려진 오오나무치노미코토(大己貴命)가 있고, 부부신 두 쌍을

모시고 있어서, 예로부터 가정의 화목과 부부의 인연에 효험을 가져다주는 신사로

알려져 있다.

 

그 덕에 입구의 오마모리(縁結び守り)를 판매하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인기가 가장 많은 오마모리 2종

▲에마 터널 (絵馬トンネル)

효험을 더 높이고 싶다면 걸어 볼 길이 둘 있다. 하나는 나무판에 소원을 적어 매다는

‘에마 터널(絵馬トンネル)’이다. 사람들이 고이 적어 둔 소원을 구경하며 걷다가,

내 소원도 하나 매달고 소원을 빌면 된다.

▲점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다면 걸어두고 가면 된다

 

다른 하나는 등불이 늘어선 길이다. 결혼식과 피로연을 위해 신랑 신부가 걷는 길로,

 일본 신사 특유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등불이 늘어선 길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

▶하루면 충분한 가와고에 여행 코스


세이부신주쿠역 → (세이부선 또는 특급 고에도 열차) → 혼카와고에역-구라즈쿠리 거리

(토키노카네,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 우나기 덴베 → 야키이모 이모카와 미나미마치

커피 → 미피 쿠라노 키친 앤 베이커리 가와고에점 → 가시야 요코초 →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 


 

오스만제국의 기억 간직한 채 오래된 도시 위에 오늘을 쌓아가는 나라

▲20여 년전 발굴을 시작해 복원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라오디케이아의 템플에이 입구.

 

“이스탄불의 남산타워예요.”

처음 만난 튀르키예 가이드가 낯선 도시를 설명하는 방식이 친숙했다. 이스탄불 아시아 쪽

언덕에 삐죽 솟은 차믈르자 타워는 높이 369m의 방송 송출탑이다. 그의 구수한 설명 덕에

처음 밟은 도시가 조금 덜 낯설었다.

 

한국어를 전공하고 30년 넘게 가이드 일을 해온 규벤 듀젠리씨(이하 규벤씨)는 한국인 관광

객 에게 튀르키예를 설명하는 데 익숙했다.

 

국민의 99%가 이슬람 신도로 알려진 튀르키예 청년은 돼지고기를 못 먹는 것이 집안 내력

인 한국인여성과 결혼했다. 튀르키예 국가대표 수구 선수인 아들은 가슴에 ‘용기’라는

한글 문신을 새겼다.

 

국가 공인 1호 한국어 가이드 규벤씨는 거대한 역사와 낯선 문화를 설명하다가도 “한국

으로 치면…”이라며 익숙한 비유를 찾아냈다.

 

덕분에 이스탄불에서 에게해를 거쳐 데니즐리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단순한 유적 답사가

아니라,오래된 도시가 오늘의 삶과 어떻게 겹쳐 있는지를 밀도 있게 살펴보는 시간

이 됐다.

▲튀르키예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이스탄불 보스포로스 해협의 일몰 무렵. 건너편에 규벤씨가 “이스탄불의 남산타워”

라고 부른 차믈르자 타워가 보인다.

 

◆모스크를 지으면 시장도 함께 만들었다

 

아야 소피아로 향하기 전, 규벤씨는 아라스타 바자르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향신료와

간식,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이어졌다.

 

‘선쇼핑 후관광’인가. 오스만 제국에서는 대형 모스크를 중심으로 시장·학교·목욕탕

등 여러시설을 묶은 복합단지를 조성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역사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과거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의 역사 지구는 1985년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

 

아야 소피아와 톱카프 궁전, 술탄ㅍ아흐메트 광장, 바실리카 지하 저수조, 그랜드 바자

르와 이집션 바자르 등은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범위에 모여 있다.

 

관광객에게는 각각의 명소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종교·정치·상업과 일상이 겹쳐

있던 하나의 생활권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다.

▲아야 소피아의 내부. 오스만 시대 철거가 아닌 회칠로 가리는 방식을 택한 덕분에

훗날 복원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아야 소피아는 약 1500년 전인 532~537년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세워진 거대한 성당이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뒤 모스크로 사용됐고, 1935년

박물관으로 개관했다가 2020년 다시 모스크가 됐다.

 

지금도 보존과 복원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천장과 벽을 장식한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를 카메라에 담았다. 오스만 시대 철거가 아닌 회칠로 가리는

방식을 택한덕분에 훗날 복원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땅 아래에 또 하나의 이스탄불이 있다

 

이집트에서 옮겨온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와 뱀기둥, 벽돌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

있는 술탄아흐메트 광장(옛 히포드롬)은 고대 도시의 시민 활동이 펼쳐지던 중심지였다.

 

지금은 광장처럼 보이지만 동로마 시대에는 전차 경주와 각종 행사가 벌어졌다. 규벤씨

는 “지하에 비하면 지금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치 귀한 부동산 정보라도 말하듯, 지하에 잠들어 있는 당시의 경주장 등을 복원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귀띔했다.

▲초대형 도시 이스탄불의 물 부족 타계를 위해 6세기에 만들어진 예레바탄 지하 저수조.

 

이스탄불을 걸으며 몇 번이나 지상보다 놀라운 지하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레바탄

지하 저수조도 그랬다. 6세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지하 저수시설이다.

 

공식 인구 약 1576만 명, 흔히 2000만 명 안팎이 산다고 말하는 초대형 도시 이스탄

불은 그때나 지금이나 물 부족에 시달렸다.

 

지상의 화려한 궁전이나 모스크와 달리, 땅 아래에는 도시가 물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거대한 공간이 숨어 있었다. 역사적 반도의 지하와 지상에는 서로 다른

시대의 흔적이 포개져 있다.

 

◆4000여 개의 가게가 있는 오래된 시장

 

그랜드 바자르에 들어서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카펫, 도자기, 금속공예품, 각종

기념품 상점이 미로처럼 이어졌다. 15세기 중반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지붕 있는’ 시장 중 하나다. 60여 개의 거리와 4000여 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다.

 

특히 금 세공품 가게가 눈에 많이 띄었다. 결혼식 때 신부에게 금을 선물하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양이나 소를 잡고 며칠씩 축제처럼 결혼을 즐겼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비용

부담 때문에 가까운 친척들과 간소하게 결혼식을 치르는 예도 있다고 했다.

▲그랜드 바자르에서 이집션 바자르로 가는 길. 과거의 시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거대한 드라마 세트장을 방불케 했다.

▲이집션 바자르의 고양이. 튀르키예에서 고양이가 갈 수 없는 곳은 없는 듯했다.

 

또 다른 시장 이집션 바자르(스파이스 바자르)로 가는 길은 역사 드라마의 세트장

을 방불케 했다.‘since 1651’이라고 적힌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건축 연도가 적힌 건물 하나하나가 이 도시의 연표처럼 보였다. 예니 자미 복합단

지의 일부로 1660년대 건설된 오래된 시장은 18세기부터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상품과향신료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이집션 바자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됐다.

 

오늘날에는 향신료뿐 아니라 각종 식료품과 기념품을 파는 시장으로 관광객을 맞

는다.시식 인심이 후한 가게에서 ‘터키시 딜라이트’로 알려진 로쿰을 맛봤다.

 

“공장에서 가져오는 가게도 있는데, 물어보면 전부 직접 만들었다고 해요.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웃음).

 

” 전통적인 로쿰은 전분과 설탕 등을 넣어 굳힌 뒤 한입 크기로 잘라 만든다. 요즘

로쿰은 각종 견과류나 과일 등 속을 넣어 화려하기 그지없다.

▲갈라타다리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으로 붐빈다. 왼쪽으로 건너편

갈라타타워가 보인다.

 

시장을 빠져나오자 골든혼을 사이에 두고 이스탄불 구시가지 에미뇌뉘와 신시가지

'카라쾨이를 잇는 갈라타 다리가 나왔다.

 

다리 아래에는 생선 요리와 해산물을 파는 식당과 카페가 줄지어 있다. 다리 난간

위로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양동이를 훔쳐보며 다리를 건넜다. 멀리 갈라타

타워가 길잡이가 됐다.

 

여기까지 왔으면 튀넬을 안 탈 수 없다. 1분30초 남짓 고작 한 정거장을 오가는 노선

이지만, 1875년 운행을 시작한 튀넬은 런던 지하철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 도시철도가운데 하나다.

 

휴관일이라 톱카프 궁전은 들어가 보지 못했음에도 이미 걸음 수가 1만 보를 넘겼다.

“습습~습습~.”

규벤씨가 고양이를 발견했다는 신호다.

 

이스탄불에는 정말 고양이가 많았다. 상점 앞에도, 호텔에도, 골목에도 고양이 밥과

물이놓여 있다. 사랑을 많이 받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양이들이 태연하게

도시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호텔 앞에도, 상점 앞에도 고양이 사료와 밥을 내놓은

풍경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스탄불의 명동으로 불리는 이스티클랄 거리를 지나 규벤씨가 치즈케이크와 커피 맛집

으로 꼽는 만다바트마즈에서 숨을 돌렸다.

 

원두를 곱게 갈아 작은 주전자 체즈베에 넣어 끓여내는 튀르키예식 커피 카흐베를 맛봤다.

 

튀르키예에서는 커피를 다 마신 뒤 잔을 뒤집어 남은 원두 찌꺼기의 모양으로 점을치는

풍습이 있다. 규벤씨가 내 잔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고양이가 생길 거예요.” 거짓말처럼 잔 안에는 고양이처럼 보이는 모양이 남아 있었다.

 

이번 여행에는 열기구로 유명한 카파도키아도, 유명 휴양지 안탈리아도 없었다. 이스탄불

압축 도보여행을 마친 다음 날 이른 새벽 숙소를 나와 에게해 연안의 이즈미르로 향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앞자리 승객이 선크림부터 꺼내 발랐다. 햇살이 눈부셨다.

 

해안의 소도시 우를라는 여름이면 체류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휴양지다. 코로나19 이후

이스탄불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사면서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규벤씨는 아쉬워

했다.

 

화가와 도예가, 수공예품, 골동품 등을 만날 수 있는 거리가 조성된 조용한 마을에서 노인

들은 진하게 우린 홍차 ‘차이’를 물처럼 마시며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스를 연상시키는 풍경의 알라차티. 요즘은 국내 개별 관광객도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기 위해 종종 찾는다.

 

이즈미르에서 차로 약 한 시간 거리의 알라차티는 우를라보다는 관광지다운 모습이었다. 여기

저기 내걸린 빨간 튀르키예 국기가 아니었다면 그리스의 어느 휴양지에 와 있다고 착각할

법했다.

 

흰 벽의 건물과 오붓한 골목, 부겐빌레아 꽃그늘 아래 카페와 레스토랑이 이어졌다. 과거 이 지역

에는 그리스계 주민들이 살았고, 1923년 로잔 조약에 따른 그리스·튀르키예 간 인구교환 이후

인구 구성이 크게 바뀌었다. 당시의 건축과 생활문화 흔적이 현재의 관광지 풍경 속에 남아 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여름이면 이곳을 찾아 수다도 떨고 술도 마시며 유유자적 휴가를 즐긴다.

투명하지만 물을 타면 우윳빛으로 변하는 라키는 현지인들이 사랑하는 전통 증류주다.

 

순해 보이는 색과 달리 기본 45도 이상으로 알코올 도수가 강해서 ‘사자의 우유’라고 불린다고

한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술은 좋아하지만, 술 취해서 실수한 사람하고는 다시 앉지 않아요.”

규벤씨의 말에 튀르키예의 음주 문화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스탄불의 명동이라 불리는 이스티클랄 거리 풍경. 튀르키예에서는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나부끼는 국기와 함께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단기 여행자의 눈에 인상적으로 다가온 튀르키예 사람들의 자부심에는 튀르키예 공화국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빠지지 않았다.

 

홀에 커다란 초상화를 걸어둔 셀추크의 레스토랑 키벨레 가스트로의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그의 생년월일과 사망 연도를 조합한 숫자였다.

 

국가 대표 유적지 에페소스로 가는 길, 튀르키예 학생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가는지 물었다.

“이즈미르라면 에페소스에 가고, 이스탄불이라면 톱카프 궁전에 가거나 보스포루스 크루즈

를 타죠.” 규벤씨는 이어 “물론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초대 대통령의 무덤에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삼은 술탄

메흐메트 2세를 잇는 국민적 영웅 아타튀르크의 업적을 나열했다.

 

아랍 문자를 대신해 1928년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한 새 튀르키예어 문자를 도입하고, 여성의

교육 기회를 확대해 법적·사회적 지위를 바꾸는 개혁도 추진했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라고 그대로 부르잖아요. 튀르키예는 언어협회에서 외국 단어를

그대로 안 쓰기 위해 튀르키예어 단어를 만들어요.”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개념과 단어를

튀르키예어로 바꾸려는 언어문화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튀르키예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과 같았다. 빨간색 국기가 도처에서 만국기처럼 휘날리는

나라. 그런 강렬한 애국심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모르겠어요. 그건 우리 DNA에 있나 봐요.”

▲고개를 들어서 그 위용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에페소스의 셀수스 도서관

▲에페소스의 공중 화장실. 5~6m 아래로 물이 흘러 냄새 걱정조차 덜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 수도 중 하나로 번성했던 에페소스 입구에 들어섰다. 각종 다큐멘터리나

여행기에서 본 풍경이건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져 있는 고대 도시의 흔적이 잘 가꿔진

명승지에 익숙한 이방인을 당황케 했다.

▲에페소스 유적의 ‘신성한 길’에 남아 있는 헤르메스 부조. 이런 유적이 곳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치되어 있다.

에페소스 일대의 정착 역사는 기원전 7천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헬레니즘과 로마시대를

거치며 크게 번성했고,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도시가 됐다.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 에페소스를 ‘그리스·로마 유적’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역사가 너무 유구하다.

 

특히 아르테미스 신앙은 이 땅의 복잡한 문화적 층위를 보여준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는

단순히 그리스에서 건너온 여신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아나톨리아의 오래된 모신 신앙과

연결된 독특한 형태로 발전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였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일부

유구와 복원된 기둥 하나뿐이다.

▲에페소스 유적지에서 부자들이 살았다는 공간. 별도의 입장권을 구입해서 들어가야 한다.

 

셀수스 도서관은 규모도 놀랍지만, 벽과 벽 사이에 공간을 둬 습기를 차단한 벽 구조와 꽃잎 모양

으로 만든 수챗구멍에 이르기까지 꼼꼼한 디테일이 눈에 띄었다.

 

당시 부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테라스 하우스는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요즘 인테리어

하듯 유행에 따라 바꿨다는 벽화와 모자이크, 압도적인 크기의 전용 신전과 개인 화장실 등이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 당시 부자들의 주거공간을 보기 위해서는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한다는 점 또한 묘했다.

 

그늘 한 점 없는 유적지를 둘러본 뒤에는 에페소스 체험 박물관에서 땀을 식혔다. 몰입형 기술을

활용해 마치 고대 에페소스로 들어가는 배에 탑승한 듯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한국어 가이드 지원도 된다. 테라스 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입장권을 구입하는 프로그램이라

한국인단체 관광객들은 대부분 건너뛴다며 규벤씨는 안타까워했다.

▲로마 제국 전성기를 이끈 하두리아누스 황제를 위해 지은 신전. 도둑 등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신전 입구에는 메두사 장식을 새겨 넣는다.

 

이즈미르주 셀추크의 시린제는 동화 속 마을 같았다. 올리브나무, 포도밭이 이어지는 좁은

산비탈을 지나 놀라울 정도로 많은 카페와 와인숍, 기념품 가게가 들어차 있다.

 

2023년에는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의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전통적인 건축과 생활문화, 농촌 관광을 보존하면서 관광과 지역 발전을 연결한 점이 평가

대상이 됐다.

 

각종 과일을 넣어 만든 와인이 유명하다고 해 시음도 했다. 달짝지근했다. 한때 마야력의

종말론과 관련해 이 마을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린제

는 종말의 피난처라기보다, 예쁘게 잘 꾸며놓은 테마파크 같은 분위기였다.

▲튀르키예 여행에서 빼놓기 어려운 데니즐리의 파묵칼레.

 

튀르키예 여행에서 빼놓기 어려운 데니즐리의 파묵칼레에 닿았다. 규벤씨는 계속 ‘목화성’

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목화의 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데니즐리는 실제로 목화 재배와

섬유산업으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눈처럼 하얀 풍경은 얼어붙은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곳곳에 작은 웅덩이가 계단처럼 이어

졌다.칼슘이 풍부한 온천수가 지표로 흘러나오면서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가고 탄산칼슘이

침전돼 만들어진 석회화 지형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온천수는 계단식 웅덩이와 새하얀 석회화 단층을 만들어냈다. 흰 바

닥은보기보다 미끄럽지 않았지만 물이 고인 곳에서는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야 했다.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 있었다.

▲히에라 폴리스 유적지의 대극장. 맨 뒷자리 관객에까지 소리가 전달되도록 설계됐다.

▲지금도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고대 수영장.

 

고대부터 사람들은 이 온천을 찾아 히에라폴리스에 머물렀다.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2세기 말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에 의해 조성된 도시로 로마 시대에 더욱 번성했다.

 

대극장 앞에 서자 다시 규모에 압도됐다. 규벤씨는 이곳에서 벌어졌던 공연과 검투 경기

등을 설명했다. 맨 뒷자리 관객에까지 소리가 전달되도록 설계된 고대 극장의 구조도

눈에 들어왔다.

 

그에 따르면 원래는 관객석 1층까지 내려가 볼 수 있었으나 스마트폰을 보던 관광객이

넘어지는 사고 이후 안전상의 이유로 일부 구간의 접근이 제한돼 있다고 한다. 문명의

역습이라 해야 할까.

 

‘클레오파트라의 수영장’이라고 알려진 고대 연못도 남아 있다. 연중 수온은 약 36도.

규벤씨는 “유럽 사람들에게는 뜨겁지만, 한국인에겐 뜨겁지 않다”고 말했다.

수천 년 전 사람들이 그랬듯 현대의 사람들이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3년 전 거의 2천년만에 다시 공연이 열렸던 라오디케이아의 대극장.

▲발굴을 앞둔 라오디케이아의 또 다른 대극장.

 

마지막으로 라오디케이아를 찾았다. 기원전 3세기 중엽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가 세운 도시로, 왕비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로마시대에는 중요한 교역 도시로 번성했고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곳이었다.

성경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발굴 작업이 시작된 지 오래지 않은 유적지라 변변한 편의시설도 없고 기념품이라고는

신전 사진을넣은 손지갑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전성기에는 모 산업으로 크게 흥한

도시다.

 

외부로부터 파이프로 온천수를 끌어온 대중목욕탕, 흐르는 물로 세례식을 치르도록 설

계된 교회 등 실용과 예술을 모두 잡은 고대인들의 미감은 혀를 내두르게 했다.

 

산더미 같은 흙을 파내고서야 제모습을 되찾은 대극장에는 당시 부유층이 대리석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던 지정석의 흔적도 남아 있다.

▲고대인들의 미감을 엿볼 수 있는 교회의 바닥 모자이크.

▲웨딩촬영 중인 신부는 이방인을 환한 미소로 반겼다.

폴란드 여행ㅡ비극과 절망이 할퀴고 간 땅…그럼에도, 끝내 희망은 이긴다

▲그단스크가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구도심의 90%가 파괴됐던 그단스크는

철저한 복원을 거쳐 ‘유럽의 자랑’이자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는 도시로 거듭났다.

 

“온 유럽의 자랑인 여러분의 도시가 옛 모습을 되찾은 것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냅니다.”(샤를 드골)

발트해의 잔잔한 물결과 맞닿은 도시, 그단스크. 낯설고도 아름다운 이곳은 한때 건물도, 사람들의

마음도 온통 허물어져 내린 폐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포성이 울려 퍼진 뒤 전쟁이 끝나기까지 6년. 그사이 도시는 잿더

미가 됐고 사람들의 일상 역시 잿빛 절망에 갇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곳의 시간은 멈춰 버리지 않았다. ‘단치히’라는 독일 이름 대신 ‘그단스크’라는

폴란드이름을 되찾았고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사라진 거리의 모습을 되짚었다.

피폐해진 일상에 다시 차곡차곡 삶을 채워 넣자 사라졌던 도시의 온기도 조금씩 되돌아왔다.

 

1967년 9월 그단스크를 찾은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이곳에 깃든 시간을 다시 불러낸 사람

들의 헌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폐허와 절망 위에 세운 희망의 도시

 

2차 대전은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함이 그단스크의 베스테르플라테

에 있던 폴란드군 보급기지를 포격하면서 시작됐다.

 

폴란드군이 일주일간 결사항전을 펼친 이 작은 전투는 유럽 전체를 집어삼킨 참화의 서막이 됐다.

비극의 불길은 곧 유럽 전체로 번졌고 총성이 멈출 무렵 그단스크는 옛 도심의 90%가 파괴됐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상상으로 과거를 덧칠하지 않기 위해 예전

모습이 담긴 사진과 그림, 도면 같은 자료를 꼼꼼히 대조하며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도시를 일으

켜 세웠다.

 

다만 내부 공간은 현대적으로 설계해 과거의 도시가 오늘을 사는 이들의 삶으로 유연하게 이어

지게했다. 드골 대통령은 “여러분들은 전통과 미래를 결합하기 위해 필요했던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이뤄냈다”고 칭찬했다.

▲폴란드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동유럽 폴란드 위치도.

▲그단스크의 상징과도 같은 주라프문을 중심으로 모트와바강을 따라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지금의 그단스크는 전쟁이 관통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반짝인다. 해가 기울면 붉은 지붕

들은노을빛을 머금은 채 그윽한 자태를 뽐내고 모트와바강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에 하나둘

조명이 켜지며 물드는 저녁은 평범하게 저무는 하루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드우가 거리를 중심으로 뻗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폐허 위에 삶을 일으켜 세운 이들

의 다정한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곤 한다.

2차 대전의 흔적은 그단스크에서 배나 버스를 타고 베스테르플라테에 도착하면 보다 생생

하게 느낄 수 있다.무너진 병영의 잔해, 군인들이 목숨 걸고 저항하던 참호, 전사자들의

무덤을 지나 해안수비대 기념비까지 이어지는 길은 시간을 1939년에 묶어둔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그단스크 시내에 있는 2차 세계대전 박물관, 우체국 직원들이 독일군과 친나치 세력과 맞

서 싸운일을 기념한 우체국 박물관 역시 과거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공간이다.

 

◆죽음의 수용소, 인간의 존엄을 묻다

▲폴란드 남부 도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2차 세계대전 당시 끌려왔던 희생자들의

신발이 전시돼 있다.

 

전쟁의 상흔을 희망으로 채색한 그단스크의 반대편에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가 있다. 폴란드

남부 소도시 오시비엥침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는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등을

겨냥했던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뼈아프게 직시하게 만드는 장소다.

아우슈비츠를 찾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엄을 어디까지 짓밟을 수 있는

지를 가감 없이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죄 없이 끌려온 여자들의 잘린 머리카락, 때 묻고 구겨진 채 주인을 잃은 작은 신발, 마지막 사진을

남긴채 사라진 사람들의 얼굴 등 건물 내부 전시물들은 가볍게 지나쳐도 오래 남는 비참함을

느끼게 한다.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의 철로 위에 추모하는 꽃이 놓여져 있다. 당시 많은 이가 열차에 실려

비르케나우로 실려와 가스실로 끌려갔다.

 

특히 대규모 집단 학살이 이뤄진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에 들어서면 쉬이 떨쳐내기 힘든 참담함이

엄습한다.

 

어떤 운명이 닥칠지도 모른 채 열차에 내린 사람들은 죽는 일만 남은 수용소에 왔다는 것을 알고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닭장처럼 좁고 열악한 막사에 모여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지냈을 이들의

하루를 상상하노라면 먹먹해지는 여운에 당시의 고통이 더 또렷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신체적 고통도 만만치 않았던 터라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성인 여성의 몸무게는 23~27㎏ 정도

였다고 한다.

▲영화 ‘쉰들러리스트’로 잘 알려진 오스카 쉰들러가 운영했던 공장에 전시된 생존자들의 사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봤다면 함께 둘러봐야 하는 장소가 바로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에

위치한 쉰들러 팩토리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곳이자 오스카 쉰들러가 당시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운영했던 공장이다.


쉰들러 팩토리 역시 2차 대전 당시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있지만 아우슈비츠

보다는 희망적이다. 그곳에 전시된 사람들의 사진이 죽음과 연결된 것과 달리 쉰들러 팩토

리에 놓인 사람들의 사진은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부를 다 둘러보고 난 뒤 마주하는 “사람을 구하는 한 삶은 의미가 있다”는 쉰들러의 말은

인간이 인간을 파괴했던 시대에도 끝내 타인을 살리고자 했던 이의 숭고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쇼팽의 영혼을 따라가는 음악 여행

▲폴란드는 또한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 성십자가 성당 기둥.

 

폴란드 여행의 또 다른 축은 바로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을 따라가는 음악

여행이다. 그 중심에는 그의 심장이 안치된 도시이자 생전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도시

바르샤바가 있다.

1810년 바르샤바 인근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난 쇼팽은 생후 몇 달 만에 가족과 함께 바르샤바

로 옮겨와 성장했다. 세계적인 음악가의 감수성이 이 도시에서 여문 셈이다.

바르샤바를 걷다 보면 쇼팽은 오래전 떠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어딘가에 머무는 사람처럼

느껴진다.항상 어딘가에서 쇼팽 콘서트가 열리고 곳곳에 배치된 음악 벤치의 버튼을 누르면

그의 음악을 감상 할 수 있다.

 

낯선 도시를 걷다 문득 익숙한 선율이 들려오는 순간 쇼팽의 시간이 현재의 바르샤바와 포개

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쇼팽이 사랑한 도시 바르샤바의 구시가지가 시작되는 잠코비 광장.

 

특히 와지엔키 공원의 쇼팽 동상 근처에서 열리는 노천 음악회는 쇼팽의 영혼을 가장 선명하게

만날수 있는장소다. 이곳에서는 매년 5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일요일마다 세계적인 피아니

스트들이 쇼팽의 곡을 연주한다.

 

쇼팽 동상 역시 전쟁으로 파괴됐다가 1958년 복원됐고 이듬해부터 연주회가 시작된 것이 지금

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국을 떠나 활동하면서도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던 쇼팽은 자신의 심장만큼은 고국으로 보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그의 소원대로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 성십자가 교회 기둥에 영원히 안치돼 이 도시를 지금도

뛰게 하고 있다. 많은 이가 쇼팽의 혼을 기리기 위해 순례자처럼 기둥 앞에 서서 묵념의 시간

을 갖는다.

근처 쇼팽 박물관에는 쇼팽의 친필 악보, 마지막 피아노, 데스마스크 등이 전시돼 있어 전 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다만 2026년은 내부 수리 및 전시물 재단장을 위해 휴관 중이다. 박물관에 들어가지 못하더라

도 바로옆에 프레데리크 쇼팽 음악 대학교(구 바르샤바 음악원)가 있고, 그곳에서 미래의

쇼팽을 꿈꾸는청년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으니 잠시 멈춰 귀를 기울일 만하다.

 

▲동화적 상상력을 품은 브로츠와프

▲폴란드 제3의 도시인 브로츠와프에서는 도심 곳곳에서 난쟁이 동상들을 만날 수 있다.

 

오드라강이 도시를 감싼 브로츠와프는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동화적 상상력이 숨 쉬는 도시다.

동시에 한국인 여행자에게는 낯선 타국 땅에서 뜻밖의 반가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LG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어 한국인도 많고 한식당도 여럿 있기 때문이다.

브로츠와프의 진짜 매력은 발밑에 있다. 브로츠와프에는 구석구석에 우체부, 음악가, 농부,

시각장애인 등 각양각색의 난쟁이 동상 수백개가 숨겨져 있다.

 

무심코 발길을 옮기다 저마다의 일상을 변함없이 살아가는 귀여운 난쟁이들과 눈이 맞닿으

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행복에 젖게 된다.


이 사랑스럽고 익살스러운 난쟁이들에게는 묵직한 역사의 숨결이 서려 있다. 1980년대 공산

주의정권의 억압에 맞서고자 한 청년들이 공권력의 감시를 피하고자 귀여운 난쟁이 그림을

벽에그리며 비폭력 저항(오렌지 대안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 그 시초다.

 

유쾌함과 해학으로 희망을 그려낸 이들의 유산이 오늘날 도시를 대표하는 동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브로츠와프는 12개의 섬이 100여개의 다리로 연결돼 있어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낭만을 선사한다.

 

브로츠와프는 백개가 넘는 다리로 연결된 12개의 섬을 이리저리 오가는 재미가 있다. 특히

해가 저물 무렵 램프라이터가 직접 긴 장대를 들고 오래된 램프에 불을 밝히는 툼스키 섬에

가면 시간여행의 낭만을 제대로 선물 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폴란드는 잔혹한 전쟁의 상흔도, 차가운 억압의 시절도 결국 인간이 지닌 유쾌함과 삶을 향한

의지를 꺾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라다.

 

비극을 기적으로 바꾼 그단스크와 인간의 존엄성을 되새기게 하는 아우슈비츠, 쇼팽의 심장

이 뛰는 바르샤바, 난쟁이가 미소 짓는 브로츠와프까지. 폴란드가 건네는 감동은 바로

끝끝내 꺾이지 않았던 인간의 희망이 이토록 찬란하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데 있다.

▲해질녘 유람선 관광을 즐기는 브로츠와프 관광객들.

 

◆여행 수첩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올해부터 전면 온라인 예약제로 바뀌어 현장에서 대기표 구매가 불가능하다.

폴란드어, 영어 가이드투어와 가이드 없는 투어가 있는데 충분한 설명이 당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니 가격이 있더라도 웬만하면 가이드와 함께하기를 권한다.

 폴란드는 핵심 여행지를 정해두고 일정에 맞게 중간 경유지를 잘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고향이자 튜튼 기사단이 세운 도시 토룬, 두 마리의 염소 동상

이 지키는 도시 포즈난, 폴란드의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자코파네 등도 둘러볼 만하다.

 폴란드의 교통은 야크도야데(Jakdojade) 앱을 이용하면 편하게 시간표를 확인하고 예매할 수

있다. 다만 첫 충전만 무료이고 유럽경제지역(EEA) 이외에서 발급된 카드로 재충전할 경우

수수료가 3%씩 붙기 때문에 처음에 많이 충전하거나 아예 현장 구매만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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