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타마현(埼玉縣)

신주쿠에서 약 1시간이면 닿는 에도 시대, ‘가와고에’ 당일치기

▲구라즈쿠리 거리


도쿄와 교토, 이름은 닮았는데 거리는 '너무나 먼 그대'다. 그런데도 두 도시를 함께 떠올

리게 되는 건, 현대와 전통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매력을 각자 쥐고 있어서다. 짧은

도쿄 여행 일정에 교토를 끼워 넣는 건 무리다.

하지만 일본 고유의 정취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방법은 있다. 도쿄 세이부신주쿠역

에서 직통 열차인 특급 고에도로 최단 45분, 왕복 교통비는 1만원이 채 안 되는 도시,

사이타마현 가와고에(川越)다. 도쿄 일정에서 딱 하루만 빼면 된다.  

▲사이타마현 가와고에 위치도.

▲사이타마현 위치도.

▲구라즈쿠리 거리

▲구라즈쿠리 거리에서 할 수 있는 인력거 체험.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옆에 있다

◆왕복 1만원, 하루로 충분한 도쿄 당일치기 근교 여행법

도쿄에서 가와고에까지 이동 난이도를 한 번에 낮추는 방법은 '세이부 가와고에 패스'를

쓰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E-티켓을 예매하면 QR 코드가 발행돼 종이 티켓을 따로

발권할 필요가 없다.

▲프린트할 필요 없이 E-티켓으로 바로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다

▲세이부신주쿠역 개찰구 맨 왼편에서 QR로 통과 가능하다

클룩에서 왕복권을 1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에 살 수 있다(2026년 8월 5일 기준). 편도

티켓 2장을 따로 끊는 것보다 더 저렴하다.

 

세이부 가와고에 패스가 있으면 세이부신주쿠역·다카다노바바역·이케부쿠로역 중 한

곳에서 혼카와고에역까지 세이부선을 1회 왕복할 수 있다. 출발역과 도착역을 다르게

잡아도 되니 동선 짜기가 한결 자유롭다.

▲세이부신주쿠역 플랫폼으로 가는 길

이동 시간을 조금 더 줄이고 싶다면, 특급 열차를 고려해 보자. 세이부신주쿠역에서

혼카와고에역까지 최단 45분이면 갈 수 있는 특급 ‘고에도(小江戸)’ 열차다. 

▲인포메이션에서 종이 티켓 발권이 가능하다

 

세이부 가와고에 패스를 구매했다면, 역 창구나 온라인(Smooz)에서 특급권(편도 1회 600엔)

을추가로 구매하면 된다. 전 좌석 지정석에 시트도 푹신해서, 앉아 가는 45분이 꽤 쾌적하다.

일반 세이부선을 탈 때보다 이동 시간이 15~20분쯤 짧아진다.

▲특급 고에도 열차 내부

 

참고로 세이부신주쿠역은 JR 신주쿠역과 다른 역이다. 지하로 이어지지 않는 구간이

있어 도보로 5~10분쯤 걸리니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세이부신주쿠역 외관

 

열차를 타기 전 알아두면 좋은 점은 '출발 시각 1~5분 전에 문이 열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미리 플랫폼에 도착했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어도 당황하지 말자.

 

타고 온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나면 객실을 한 차례 깔끔하게 청소한 뒤 문을 열어 준다. 가와고에

로 향할 때는 열차 진행 방향 기준 오른편 좌석에 앉으면 탁 트인 자연 전망이 이따금 펼쳐진다.

▲특급 고에도 열차 외관

◆가와고에 여행의 시작 구라즈쿠리 거리 속으로

 

혼카와고에역에 내리면 여행은 이미 코앞이다. 시작점이나 다름없는 '구라즈쿠리 거리

(蔵造りの町並み)'가 도보 10분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혼카와고에역 입구

 

가와고에가 낯선 여행자를 위해 이곳의 별명부터 소개하자면, 이 도시는 ‘작은 에도’

즉 고에도(小江戸)라 불린다.

 

현재의 도쿄, ‘에도’로 물자를 대던 아랫마을이었던 덕에 에도의 풍경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남은 곳이 30여 채의 구라즈쿠리 건물이 늘어선

구라즈쿠리 거리다.

‘구라즈쿠리’는 나무 골조 위에 두꺼운 흙벽을 발라 올린 에도 시대의 방화(防火) 건축

양식이다. 검은 기와지붕과 육중한 여닫이문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길 위에 이어진다. 

▲구라즈쿠리 거리

▲구라즈쿠리 거리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지만 길 자체는 깨끗하고 반듯하게 닦여 있어 걷기 편하다. 무엇

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저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캐릭터 숍과 편집숍, 카페와 식당, 공방과 스튜디오까지 100개가 넘는 점포가 들어서

있어 문 여는 맛이 전부 다르다.

▲토키노카네

 

토키노카네는 ‘때를 알리는 종’이라는 뜻이다. 구라즈쿠리 양식으로 지은 3층 종루로,

높이약 16m다. 2층 규모의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혼자 우뚝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옛사람들이 약속을 잡거나 일을 시작할 때 올려다보던 것이 늘 이 종이었다. 종루와

동종은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됐지만 그때마다 다시 지어졌다.


지금 서 있는 것은 네 번째로 다시 지은 것이다. 메이지 26년(1893) 가와고에 대화재

이듬해에 재건했다. 종은 지금도 살아 있는 알람이다. 하루 네 번(오전 6시, 정오,

오후 3시, 오후 6시) 울리니, 소리를 듣고 싶다면 그 시간에 맞춰 다가가 보자.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다음은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다. 구라즈쿠리 거리 한복판에 흰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 뜬금없이 서 있다.

 

어딘가 낯익은 외관이다 싶어 찾아보니, 설계자 야스오카 가쓰야(保岡勝也)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지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의 제자다.

 

1918년 제85은행 본점 본관으로 태어나 2020년까지 은행으로 쓰였고, 2024년 5월,

코워킹 스페이스를 품은 복합 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관광객에게도 활짝 열려 있다. 1층은 사이타마현의 물건을 모은 셀렉트 숍과 카페,

2층은 레스토랑이다. 무료로 구라즈쿠리 전망을 볼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

 

2층 테라스로 나서면 낮에는 활기찬 거리 풍경이, 밤에는 건물만 빛을 발하는

풍경이 펼쳐져 진짜 에도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하다.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의 테라스에서 본 구라즈쿠리 거리

▲우나기덴베 장어 덮밥 정식, 히츠마부시

 

찌고 굽고 삶은 고구마가 평범하게 느껴진다면, 색다른 고구마를 만날 차례다. 카페

'야키이모 이모카와 미나미마치 커피(やきいも芋川 MINAMIMACHI COFFEE)'

로 향하면 된다.

 

시그니처는 고구마 구이, 그중 크렘브륄레 고구마가 특히 인기다. 달콤한 군고구마

위에 설탕이 노릇하게 코팅돼 있어 숟가락으로 깡깡 깨 먹는 맛이 쏠쏠하다.

 

고구마를 차갑게 식혀 두기 때문에 속은 시원하고, 아이스크림 같은 식감이 난다.

▲고구마 구이, 왼쪽은 소금을 올려 달콤 짭짤한 맛을 즐길 수 있고, 오른쪽은

크림브륄레처럼 굳은 설탕 코팅을 깨먹을 수 있다

▲야키이모 이모카와 미나미마치 커피 외관

 

에도 시대의 분위기만으로도 가와고에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힘을 숨긴

진짜 주인공이 아직 남았다.

 

먼저 구라즈쿠리 거리의 캐릭터 숍들이다. 토토로, 스누피, 미피 등 인기 캐릭터

들이 이 거리에 자리를 잡고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가시야 요코초 

▲30~100엔 정도의 저렴한 간식 거리가 가득하다

원래 이 길은 근처에 있는 절 ‘요주인(養寿院)’의 참배로였다. 메이지 초, 1870년 경 과자

장인 스즈키 도자에몬(鈴木藤左衛門)이 이곳에 다가시 가게를 내면서 과자

거리가 시작됐다.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도쿄 시타마치의 과자업이 무너지자 그 공백을 이 골목이 메웠고,

쇼와 초기 전성기에는 점포가 70여 곳까지 늘었다. 지금 남은 노포는 10여 곳이다.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

연애 중이거나 짝사랑 중이라면 인연을 잇고 싶을 터. 연애운과 부부운을 빌러 가와고에

사람들이 향하는 곳,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川越氷川神社)로 가 보자.

▲여름이면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에서는 풍경 소리가 울려 퍼진다

 

창건은 약 1,500년 전으로 전해진다.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다섯 명, 모두 한 가족이다.

여기에는 인연의 신으로 알려진 오오나무치노미코토(大己貴命)가 있고, 부부신 두 쌍을

모시고 있어서, 예로부터 가정의 화목과 부부의 인연에 효험을 가져다주는 신사로

알려져 있다.

 

그 덕에 입구의 오마모리(縁結び守り)를 판매하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인기가 가장 많은 오마모리 2종

▲에마 터널 (絵馬トンネル)

효험을 더 높이고 싶다면 걸어 볼 길이 둘 있다. 하나는 나무판에 소원을 적어 매다는

‘에마 터널(絵馬トンネル)’이다. 사람들이 고이 적어 둔 소원을 구경하며 걷다가,

내 소원도 하나 매달고 소원을 빌면 된다.

▲점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다면 걸어두고 가면 된다

 

다른 하나는 등불이 늘어선 길이다. 결혼식과 피로연을 위해 신랑 신부가 걷는 길로,

 일본 신사 특유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등불이 늘어선 길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

▶하루면 충분한 가와고에 여행 코스


세이부신주쿠역 → (세이부선 또는 특급 고에도 열차) → 혼카와고에역-구라즈쿠리 거리

(토키노카네,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 우나기 덴베 → 야키이모 이모카와 미나미마치

커피 → 미피 쿠라노 키친 앤 베이커리 가와고에점 → 가시야 요코초 →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 


 

오스만제국의 기억 간직한 채 오래된 도시 위에 오늘을 쌓아가는 나라

▲20여 년전 발굴을 시작해 복원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라오디케이아의 템플에이 입구.

 

“이스탄불의 남산타워예요.”

처음 만난 튀르키예 가이드가 낯선 도시를 설명하는 방식이 친숙했다. 이스탄불 아시아 쪽

언덕에 삐죽 솟은 차믈르자 타워는 높이 369m의 방송 송출탑이다. 그의 구수한 설명 덕에

처음 밟은 도시가 조금 덜 낯설었다.

 

한국어를 전공하고 30년 넘게 가이드 일을 해온 규벤 듀젠리씨(이하 규벤씨)는 한국인 관광

객 에게 튀르키예를 설명하는 데 익숙했다.

 

국민의 99%가 이슬람 신도로 알려진 튀르키예 청년은 돼지고기를 못 먹는 것이 집안 내력

인 한국인여성과 결혼했다. 튀르키예 국가대표 수구 선수인 아들은 가슴에 ‘용기’라는

한글 문신을 새겼다.

 

국가 공인 1호 한국어 가이드 규벤씨는 거대한 역사와 낯선 문화를 설명하다가도 “한국

으로 치면…”이라며 익숙한 비유를 찾아냈다.

 

덕분에 이스탄불에서 에게해를 거쳐 데니즐리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단순한 유적 답사가

아니라,오래된 도시가 오늘의 삶과 어떻게 겹쳐 있는지를 밀도 있게 살펴보는 시간

이 됐다.

▲튀르키예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이스탄불 보스포로스 해협의 일몰 무렵. 건너편에 규벤씨가 “이스탄불의 남산타워”

라고 부른 차믈르자 타워가 보인다.

 

◆모스크를 지으면 시장도 함께 만들었다

 

아야 소피아로 향하기 전, 규벤씨는 아라스타 바자르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향신료와

간식,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이어졌다.

 

‘선쇼핑 후관광’인가. 오스만 제국에서는 대형 모스크를 중심으로 시장·학교·목욕탕

등 여러시설을 묶은 복합단지를 조성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역사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과거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의 역사 지구는 1985년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

 

아야 소피아와 톱카프 궁전, 술탄ㅍ아흐메트 광장, 바실리카 지하 저수조, 그랜드 바자

르와 이집션 바자르 등은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범위에 모여 있다.

 

관광객에게는 각각의 명소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종교·정치·상업과 일상이 겹쳐

있던 하나의 생활권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다.

▲아야 소피아의 내부. 오스만 시대 철거가 아닌 회칠로 가리는 방식을 택한 덕분에

훗날 복원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아야 소피아는 약 1500년 전인 532~537년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세워진 거대한 성당이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뒤 모스크로 사용됐고, 1935년

박물관으로 개관했다가 2020년 다시 모스크가 됐다.

 

지금도 보존과 복원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천장과 벽을 장식한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를 카메라에 담았다. 오스만 시대 철거가 아닌 회칠로 가리는

방식을 택한덕분에 훗날 복원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땅 아래에 또 하나의 이스탄불이 있다

 

이집트에서 옮겨온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와 뱀기둥, 벽돌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

있는 술탄아흐메트 광장(옛 히포드롬)은 고대 도시의 시민 활동이 펼쳐지던 중심지였다.

 

지금은 광장처럼 보이지만 동로마 시대에는 전차 경주와 각종 행사가 벌어졌다. 규벤씨

는 “지하에 비하면 지금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치 귀한 부동산 정보라도 말하듯, 지하에 잠들어 있는 당시의 경주장 등을 복원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귀띔했다.

▲초대형 도시 이스탄불의 물 부족 타계를 위해 6세기에 만들어진 예레바탄 지하 저수조.

 

이스탄불을 걸으며 몇 번이나 지상보다 놀라운 지하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레바탄

지하 저수조도 그랬다. 6세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지하 저수시설이다.

 

공식 인구 약 1576만 명, 흔히 2000만 명 안팎이 산다고 말하는 초대형 도시 이스탄

불은 그때나 지금이나 물 부족에 시달렸다.

 

지상의 화려한 궁전이나 모스크와 달리, 땅 아래에는 도시가 물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거대한 공간이 숨어 있었다. 역사적 반도의 지하와 지상에는 서로 다른

시대의 흔적이 포개져 있다.

 

◆4000여 개의 가게가 있는 오래된 시장

 

그랜드 바자르에 들어서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카펫, 도자기, 금속공예품, 각종

기념품 상점이 미로처럼 이어졌다. 15세기 중반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지붕 있는’ 시장 중 하나다. 60여 개의 거리와 4000여 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다.

 

특히 금 세공품 가게가 눈에 많이 띄었다. 결혼식 때 신부에게 금을 선물하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양이나 소를 잡고 며칠씩 축제처럼 결혼을 즐겼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비용

부담 때문에 가까운 친척들과 간소하게 결혼식을 치르는 예도 있다고 했다.

▲그랜드 바자르에서 이집션 바자르로 가는 길. 과거의 시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거대한 드라마 세트장을 방불케 했다.

▲이집션 바자르의 고양이. 튀르키예에서 고양이가 갈 수 없는 곳은 없는 듯했다.

 

또 다른 시장 이집션 바자르(스파이스 바자르)로 가는 길은 역사 드라마의 세트장

을 방불케 했다.‘since 1651’이라고 적힌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건축 연도가 적힌 건물 하나하나가 이 도시의 연표처럼 보였다. 예니 자미 복합단

지의 일부로 1660년대 건설된 오래된 시장은 18세기부터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상품과향신료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이집션 바자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됐다.

 

오늘날에는 향신료뿐 아니라 각종 식료품과 기념품을 파는 시장으로 관광객을 맞

는다.시식 인심이 후한 가게에서 ‘터키시 딜라이트’로 알려진 로쿰을 맛봤다.

 

“공장에서 가져오는 가게도 있는데, 물어보면 전부 직접 만들었다고 해요.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웃음).

 

” 전통적인 로쿰은 전분과 설탕 등을 넣어 굳힌 뒤 한입 크기로 잘라 만든다. 요즘

로쿰은 각종 견과류나 과일 등 속을 넣어 화려하기 그지없다.

▲갈라타다리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으로 붐빈다. 왼쪽으로 건너편

갈라타타워가 보인다.

 

시장을 빠져나오자 골든혼을 사이에 두고 이스탄불 구시가지 에미뇌뉘와 신시가지

'카라쾨이를 잇는 갈라타 다리가 나왔다.

 

다리 아래에는 생선 요리와 해산물을 파는 식당과 카페가 줄지어 있다. 다리 난간

위로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양동이를 훔쳐보며 다리를 건넜다. 멀리 갈라타

타워가 길잡이가 됐다.

 

여기까지 왔으면 튀넬을 안 탈 수 없다. 1분30초 남짓 고작 한 정거장을 오가는 노선

이지만, 1875년 운행을 시작한 튀넬은 런던 지하철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 도시철도가운데 하나다.

 

휴관일이라 톱카프 궁전은 들어가 보지 못했음에도 이미 걸음 수가 1만 보를 넘겼다.

“습습~습습~.”

규벤씨가 고양이를 발견했다는 신호다.

 

이스탄불에는 정말 고양이가 많았다. 상점 앞에도, 호텔에도, 골목에도 고양이 밥과

물이놓여 있다. 사랑을 많이 받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양이들이 태연하게

도시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호텔 앞에도, 상점 앞에도 고양이 사료와 밥을 내놓은

풍경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스탄불의 명동으로 불리는 이스티클랄 거리를 지나 규벤씨가 치즈케이크와 커피 맛집

으로 꼽는 만다바트마즈에서 숨을 돌렸다.

 

원두를 곱게 갈아 작은 주전자 체즈베에 넣어 끓여내는 튀르키예식 커피 카흐베를 맛봤다.

 

튀르키예에서는 커피를 다 마신 뒤 잔을 뒤집어 남은 원두 찌꺼기의 모양으로 점을치는

풍습이 있다. 규벤씨가 내 잔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고양이가 생길 거예요.” 거짓말처럼 잔 안에는 고양이처럼 보이는 모양이 남아 있었다.

 

이번 여행에는 열기구로 유명한 카파도키아도, 유명 휴양지 안탈리아도 없었다. 이스탄불

압축 도보여행을 마친 다음 날 이른 새벽 숙소를 나와 에게해 연안의 이즈미르로 향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앞자리 승객이 선크림부터 꺼내 발랐다. 햇살이 눈부셨다.

 

해안의 소도시 우를라는 여름이면 체류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휴양지다. 코로나19 이후

이스탄불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사면서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규벤씨는 아쉬워

했다.

 

화가와 도예가, 수공예품, 골동품 등을 만날 수 있는 거리가 조성된 조용한 마을에서 노인

들은 진하게 우린 홍차 ‘차이’를 물처럼 마시며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스를 연상시키는 풍경의 알라차티. 요즘은 국내 개별 관광객도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기 위해 종종 찾는다.

 

이즈미르에서 차로 약 한 시간 거리의 알라차티는 우를라보다는 관광지다운 모습이었다. 여기

저기 내걸린 빨간 튀르키예 국기가 아니었다면 그리스의 어느 휴양지에 와 있다고 착각할

법했다.

 

흰 벽의 건물과 오붓한 골목, 부겐빌레아 꽃그늘 아래 카페와 레스토랑이 이어졌다. 과거 이 지역

에는 그리스계 주민들이 살았고, 1923년 로잔 조약에 따른 그리스·튀르키예 간 인구교환 이후

인구 구성이 크게 바뀌었다. 당시의 건축과 생활문화 흔적이 현재의 관광지 풍경 속에 남아 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여름이면 이곳을 찾아 수다도 떨고 술도 마시며 유유자적 휴가를 즐긴다.

투명하지만 물을 타면 우윳빛으로 변하는 라키는 현지인들이 사랑하는 전통 증류주다.

 

순해 보이는 색과 달리 기본 45도 이상으로 알코올 도수가 강해서 ‘사자의 우유’라고 불린다고

한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술은 좋아하지만, 술 취해서 실수한 사람하고는 다시 앉지 않아요.”

규벤씨의 말에 튀르키예의 음주 문화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스탄불의 명동이라 불리는 이스티클랄 거리 풍경. 튀르키예에서는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나부끼는 국기와 함께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단기 여행자의 눈에 인상적으로 다가온 튀르키예 사람들의 자부심에는 튀르키예 공화국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빠지지 않았다.

 

홀에 커다란 초상화를 걸어둔 셀추크의 레스토랑 키벨레 가스트로의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그의 생년월일과 사망 연도를 조합한 숫자였다.

 

국가 대표 유적지 에페소스로 가는 길, 튀르키예 학생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가는지 물었다.

“이즈미르라면 에페소스에 가고, 이스탄불이라면 톱카프 궁전에 가거나 보스포루스 크루즈

를 타죠.” 규벤씨는 이어 “물론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초대 대통령의 무덤에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삼은 술탄

메흐메트 2세를 잇는 국민적 영웅 아타튀르크의 업적을 나열했다.

 

아랍 문자를 대신해 1928년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한 새 튀르키예어 문자를 도입하고, 여성의

교육 기회를 확대해 법적·사회적 지위를 바꾸는 개혁도 추진했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라고 그대로 부르잖아요. 튀르키예는 언어협회에서 외국 단어를

그대로 안 쓰기 위해 튀르키예어 단어를 만들어요.”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개념과 단어를

튀르키예어로 바꾸려는 언어문화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튀르키예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과 같았다. 빨간색 국기가 도처에서 만국기처럼 휘날리는

나라. 그런 강렬한 애국심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모르겠어요. 그건 우리 DNA에 있나 봐요.”

▲고개를 들어서 그 위용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에페소스의 셀수스 도서관

▲에페소스의 공중 화장실. 5~6m 아래로 물이 흘러 냄새 걱정조차 덜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 수도 중 하나로 번성했던 에페소스 입구에 들어섰다. 각종 다큐멘터리나

여행기에서 본 풍경이건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져 있는 고대 도시의 흔적이 잘 가꿔진

명승지에 익숙한 이방인을 당황케 했다.

▲에페소스 유적의 ‘신성한 길’에 남아 있는 헤르메스 부조. 이런 유적이 곳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치되어 있다.

에페소스 일대의 정착 역사는 기원전 7천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헬레니즘과 로마시대를

거치며 크게 번성했고,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도시가 됐다.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 에페소스를 ‘그리스·로마 유적’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역사가 너무 유구하다.

 

특히 아르테미스 신앙은 이 땅의 복잡한 문화적 층위를 보여준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는

단순히 그리스에서 건너온 여신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아나톨리아의 오래된 모신 신앙과

연결된 독특한 형태로 발전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였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일부

유구와 복원된 기둥 하나뿐이다.

▲에페소스 유적지에서 부자들이 살았다는 공간. 별도의 입장권을 구입해서 들어가야 한다.

 

셀수스 도서관은 규모도 놀랍지만, 벽과 벽 사이에 공간을 둬 습기를 차단한 벽 구조와 꽃잎 모양

으로 만든 수챗구멍에 이르기까지 꼼꼼한 디테일이 눈에 띄었다.

 

당시 부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테라스 하우스는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요즘 인테리어

하듯 유행에 따라 바꿨다는 벽화와 모자이크, 압도적인 크기의 전용 신전과 개인 화장실 등이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 당시 부자들의 주거공간을 보기 위해서는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한다는 점 또한 묘했다.

 

그늘 한 점 없는 유적지를 둘러본 뒤에는 에페소스 체험 박물관에서 땀을 식혔다. 몰입형 기술을

활용해 마치 고대 에페소스로 들어가는 배에 탑승한 듯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한국어 가이드 지원도 된다. 테라스 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입장권을 구입하는 프로그램이라

한국인단체 관광객들은 대부분 건너뛴다며 규벤씨는 안타까워했다.

▲로마 제국 전성기를 이끈 하두리아누스 황제를 위해 지은 신전. 도둑 등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신전 입구에는 메두사 장식을 새겨 넣는다.

 

이즈미르주 셀추크의 시린제는 동화 속 마을 같았다. 올리브나무, 포도밭이 이어지는 좁은

산비탈을 지나 놀라울 정도로 많은 카페와 와인숍, 기념품 가게가 들어차 있다.

 

2023년에는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의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전통적인 건축과 생활문화, 농촌 관광을 보존하면서 관광과 지역 발전을 연결한 점이 평가

대상이 됐다.

 

각종 과일을 넣어 만든 와인이 유명하다고 해 시음도 했다. 달짝지근했다. 한때 마야력의

종말론과 관련해 이 마을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린제

는 종말의 피난처라기보다, 예쁘게 잘 꾸며놓은 테마파크 같은 분위기였다.

▲튀르키예 여행에서 빼놓기 어려운 데니즐리의 파묵칼레.

 

튀르키예 여행에서 빼놓기 어려운 데니즐리의 파묵칼레에 닿았다. 규벤씨는 계속 ‘목화성’

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목화의 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데니즐리는 실제로 목화 재배와

섬유산업으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눈처럼 하얀 풍경은 얼어붙은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곳곳에 작은 웅덩이가 계단처럼 이어

졌다.칼슘이 풍부한 온천수가 지표로 흘러나오면서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가고 탄산칼슘이

침전돼 만들어진 석회화 지형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온천수는 계단식 웅덩이와 새하얀 석회화 단층을 만들어냈다. 흰 바

닥은보기보다 미끄럽지 않았지만 물이 고인 곳에서는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야 했다.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 있었다.

▲히에라 폴리스 유적지의 대극장. 맨 뒷자리 관객에까지 소리가 전달되도록 설계됐다.

▲지금도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고대 수영장.

 

고대부터 사람들은 이 온천을 찾아 히에라폴리스에 머물렀다.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2세기 말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에 의해 조성된 도시로 로마 시대에 더욱 번성했다.

 

대극장 앞에 서자 다시 규모에 압도됐다. 규벤씨는 이곳에서 벌어졌던 공연과 검투 경기

등을 설명했다. 맨 뒷자리 관객에까지 소리가 전달되도록 설계된 고대 극장의 구조도

눈에 들어왔다.

 

그에 따르면 원래는 관객석 1층까지 내려가 볼 수 있었으나 스마트폰을 보던 관광객이

넘어지는 사고 이후 안전상의 이유로 일부 구간의 접근이 제한돼 있다고 한다. 문명의

역습이라 해야 할까.

 

‘클레오파트라의 수영장’이라고 알려진 고대 연못도 남아 있다. 연중 수온은 약 36도.

규벤씨는 “유럽 사람들에게는 뜨겁지만, 한국인에겐 뜨겁지 않다”고 말했다.

수천 년 전 사람들이 그랬듯 현대의 사람들이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3년 전 거의 2천년만에 다시 공연이 열렸던 라오디케이아의 대극장.

▲발굴을 앞둔 라오디케이아의 또 다른 대극장.

 

마지막으로 라오디케이아를 찾았다. 기원전 3세기 중엽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가 세운 도시로, 왕비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로마시대에는 중요한 교역 도시로 번성했고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곳이었다.

성경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발굴 작업이 시작된 지 오래지 않은 유적지라 변변한 편의시설도 없고 기념품이라고는

신전 사진을넣은 손지갑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전성기에는 모 산업으로 크게 흥한

도시다.

 

외부로부터 파이프로 온천수를 끌어온 대중목욕탕, 흐르는 물로 세례식을 치르도록 설

계된 교회 등 실용과 예술을 모두 잡은 고대인들의 미감은 혀를 내두르게 했다.

 

산더미 같은 흙을 파내고서야 제모습을 되찾은 대극장에는 당시 부유층이 대리석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던 지정석의 흔적도 남아 있다.

▲고대인들의 미감을 엿볼 수 있는 교회의 바닥 모자이크.

▲웨딩촬영 중인 신부는 이방인을 환한 미소로 반겼다.

폴란드 여행ㅡ비극과 절망이 할퀴고 간 땅…그럼에도, 끝내 희망은 이긴다

▲그단스크가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구도심의 90%가 파괴됐던 그단스크는

철저한 복원을 거쳐 ‘유럽의 자랑’이자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는 도시로 거듭났다.

 

“온 유럽의 자랑인 여러분의 도시가 옛 모습을 되찾은 것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냅니다.”(샤를 드골)

발트해의 잔잔한 물결과 맞닿은 도시, 그단스크. 낯설고도 아름다운 이곳은 한때 건물도, 사람들의

마음도 온통 허물어져 내린 폐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포성이 울려 퍼진 뒤 전쟁이 끝나기까지 6년. 그사이 도시는 잿더

미가 됐고 사람들의 일상 역시 잿빛 절망에 갇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곳의 시간은 멈춰 버리지 않았다. ‘단치히’라는 독일 이름 대신 ‘그단스크’라는

폴란드이름을 되찾았고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사라진 거리의 모습을 되짚었다.

피폐해진 일상에 다시 차곡차곡 삶을 채워 넣자 사라졌던 도시의 온기도 조금씩 되돌아왔다.

 

1967년 9월 그단스크를 찾은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이곳에 깃든 시간을 다시 불러낸 사람

들의 헌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폐허와 절망 위에 세운 희망의 도시

 

2차 대전은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함이 그단스크의 베스테르플라테

에 있던 폴란드군 보급기지를 포격하면서 시작됐다.

 

폴란드군이 일주일간 결사항전을 펼친 이 작은 전투는 유럽 전체를 집어삼킨 참화의 서막이 됐다.

비극의 불길은 곧 유럽 전체로 번졌고 총성이 멈출 무렵 그단스크는 옛 도심의 90%가 파괴됐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상상으로 과거를 덧칠하지 않기 위해 예전

모습이 담긴 사진과 그림, 도면 같은 자료를 꼼꼼히 대조하며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도시를 일으

켜 세웠다.

 

다만 내부 공간은 현대적으로 설계해 과거의 도시가 오늘을 사는 이들의 삶으로 유연하게 이어

지게했다. 드골 대통령은 “여러분들은 전통과 미래를 결합하기 위해 필요했던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이뤄냈다”고 칭찬했다.

▲폴란드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동유럽 폴란드 위치도.

▲그단스크의 상징과도 같은 주라프문을 중심으로 모트와바강을 따라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지금의 그단스크는 전쟁이 관통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반짝인다. 해가 기울면 붉은 지붕

들은노을빛을 머금은 채 그윽한 자태를 뽐내고 모트와바강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에 하나둘

조명이 켜지며 물드는 저녁은 평범하게 저무는 하루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드우가 거리를 중심으로 뻗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폐허 위에 삶을 일으켜 세운 이들

의 다정한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곤 한다.

2차 대전의 흔적은 그단스크에서 배나 버스를 타고 베스테르플라테에 도착하면 보다 생생

하게 느낄 수 있다.무너진 병영의 잔해, 군인들이 목숨 걸고 저항하던 참호, 전사자들의

무덤을 지나 해안수비대 기념비까지 이어지는 길은 시간을 1939년에 묶어둔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그단스크 시내에 있는 2차 세계대전 박물관, 우체국 직원들이 독일군과 친나치 세력과 맞

서 싸운일을 기념한 우체국 박물관 역시 과거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공간이다.

 

◆죽음의 수용소, 인간의 존엄을 묻다

▲폴란드 남부 도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2차 세계대전 당시 끌려왔던 희생자들의

신발이 전시돼 있다.

 

전쟁의 상흔을 희망으로 채색한 그단스크의 반대편에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가 있다. 폴란드

남부 소도시 오시비엥침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는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등을

겨냥했던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뼈아프게 직시하게 만드는 장소다.

아우슈비츠를 찾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엄을 어디까지 짓밟을 수 있는

지를 가감 없이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죄 없이 끌려온 여자들의 잘린 머리카락, 때 묻고 구겨진 채 주인을 잃은 작은 신발, 마지막 사진을

남긴채 사라진 사람들의 얼굴 등 건물 내부 전시물들은 가볍게 지나쳐도 오래 남는 비참함을

느끼게 한다.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의 철로 위에 추모하는 꽃이 놓여져 있다. 당시 많은 이가 열차에 실려

비르케나우로 실려와 가스실로 끌려갔다.

 

특히 대규모 집단 학살이 이뤄진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에 들어서면 쉬이 떨쳐내기 힘든 참담함이

엄습한다.

 

어떤 운명이 닥칠지도 모른 채 열차에 내린 사람들은 죽는 일만 남은 수용소에 왔다는 것을 알고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닭장처럼 좁고 열악한 막사에 모여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지냈을 이들의

하루를 상상하노라면 먹먹해지는 여운에 당시의 고통이 더 또렷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신체적 고통도 만만치 않았던 터라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성인 여성의 몸무게는 23~27㎏ 정도

였다고 한다.

▲영화 ‘쉰들러리스트’로 잘 알려진 오스카 쉰들러가 운영했던 공장에 전시된 생존자들의 사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봤다면 함께 둘러봐야 하는 장소가 바로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에

위치한 쉰들러 팩토리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곳이자 오스카 쉰들러가 당시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운영했던 공장이다.


쉰들러 팩토리 역시 2차 대전 당시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있지만 아우슈비츠

보다는 희망적이다. 그곳에 전시된 사람들의 사진이 죽음과 연결된 것과 달리 쉰들러 팩토

리에 놓인 사람들의 사진은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부를 다 둘러보고 난 뒤 마주하는 “사람을 구하는 한 삶은 의미가 있다”는 쉰들러의 말은

인간이 인간을 파괴했던 시대에도 끝내 타인을 살리고자 했던 이의 숭고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쇼팽의 영혼을 따라가는 음악 여행

▲폴란드는 또한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 성십자가 성당 기둥.

 

폴란드 여행의 또 다른 축은 바로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을 따라가는 음악

여행이다. 그 중심에는 그의 심장이 안치된 도시이자 생전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도시

바르샤바가 있다.

1810년 바르샤바 인근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난 쇼팽은 생후 몇 달 만에 가족과 함께 바르샤바

로 옮겨와 성장했다. 세계적인 음악가의 감수성이 이 도시에서 여문 셈이다.

바르샤바를 걷다 보면 쇼팽은 오래전 떠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어딘가에 머무는 사람처럼

느껴진다.항상 어딘가에서 쇼팽 콘서트가 열리고 곳곳에 배치된 음악 벤치의 버튼을 누르면

그의 음악을 감상 할 수 있다.

 

낯선 도시를 걷다 문득 익숙한 선율이 들려오는 순간 쇼팽의 시간이 현재의 바르샤바와 포개

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쇼팽이 사랑한 도시 바르샤바의 구시가지가 시작되는 잠코비 광장.

 

특히 와지엔키 공원의 쇼팽 동상 근처에서 열리는 노천 음악회는 쇼팽의 영혼을 가장 선명하게

만날수 있는장소다. 이곳에서는 매년 5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일요일마다 세계적인 피아니

스트들이 쇼팽의 곡을 연주한다.

 

쇼팽 동상 역시 전쟁으로 파괴됐다가 1958년 복원됐고 이듬해부터 연주회가 시작된 것이 지금

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국을 떠나 활동하면서도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던 쇼팽은 자신의 심장만큼은 고국으로 보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그의 소원대로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 성십자가 교회 기둥에 영원히 안치돼 이 도시를 지금도

뛰게 하고 있다. 많은 이가 쇼팽의 혼을 기리기 위해 순례자처럼 기둥 앞에 서서 묵념의 시간

을 갖는다.

근처 쇼팽 박물관에는 쇼팽의 친필 악보, 마지막 피아노, 데스마스크 등이 전시돼 있어 전 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다만 2026년은 내부 수리 및 전시물 재단장을 위해 휴관 중이다. 박물관에 들어가지 못하더라

도 바로옆에 프레데리크 쇼팽 음악 대학교(구 바르샤바 음악원)가 있고, 그곳에서 미래의

쇼팽을 꿈꾸는청년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으니 잠시 멈춰 귀를 기울일 만하다.

 

▲동화적 상상력을 품은 브로츠와프

▲폴란드 제3의 도시인 브로츠와프에서는 도심 곳곳에서 난쟁이 동상들을 만날 수 있다.

 

오드라강이 도시를 감싼 브로츠와프는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동화적 상상력이 숨 쉬는 도시다.

동시에 한국인 여행자에게는 낯선 타국 땅에서 뜻밖의 반가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LG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어 한국인도 많고 한식당도 여럿 있기 때문이다.

브로츠와프의 진짜 매력은 발밑에 있다. 브로츠와프에는 구석구석에 우체부, 음악가, 농부,

시각장애인 등 각양각색의 난쟁이 동상 수백개가 숨겨져 있다.

 

무심코 발길을 옮기다 저마다의 일상을 변함없이 살아가는 귀여운 난쟁이들과 눈이 맞닿으

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행복에 젖게 된다.


이 사랑스럽고 익살스러운 난쟁이들에게는 묵직한 역사의 숨결이 서려 있다. 1980년대 공산

주의정권의 억압에 맞서고자 한 청년들이 공권력의 감시를 피하고자 귀여운 난쟁이 그림을

벽에그리며 비폭력 저항(오렌지 대안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 그 시초다.

 

유쾌함과 해학으로 희망을 그려낸 이들의 유산이 오늘날 도시를 대표하는 동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브로츠와프는 12개의 섬이 100여개의 다리로 연결돼 있어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낭만을 선사한다.

 

브로츠와프는 백개가 넘는 다리로 연결된 12개의 섬을 이리저리 오가는 재미가 있다. 특히

해가 저물 무렵 램프라이터가 직접 긴 장대를 들고 오래된 램프에 불을 밝히는 툼스키 섬에

가면 시간여행의 낭만을 제대로 선물 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폴란드는 잔혹한 전쟁의 상흔도, 차가운 억압의 시절도 결국 인간이 지닌 유쾌함과 삶을 향한

의지를 꺾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라다.

 

비극을 기적으로 바꾼 그단스크와 인간의 존엄성을 되새기게 하는 아우슈비츠, 쇼팽의 심장

이 뛰는 바르샤바, 난쟁이가 미소 짓는 브로츠와프까지. 폴란드가 건네는 감동은 바로

끝끝내 꺾이지 않았던 인간의 희망이 이토록 찬란하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데 있다.

▲해질녘 유람선 관광을 즐기는 브로츠와프 관광객들.

 

◆여행 수첩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올해부터 전면 온라인 예약제로 바뀌어 현장에서 대기표 구매가 불가능하다.

폴란드어, 영어 가이드투어와 가이드 없는 투어가 있는데 충분한 설명이 당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니 가격이 있더라도 웬만하면 가이드와 함께하기를 권한다.

 폴란드는 핵심 여행지를 정해두고 일정에 맞게 중간 경유지를 잘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고향이자 튜튼 기사단이 세운 도시 토룬, 두 마리의 염소 동상

이 지키는 도시 포즈난, 폴란드의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자코파네 등도 둘러볼 만하다.

 폴란드의 교통은 야크도야데(Jakdojade) 앱을 이용하면 편하게 시간표를 확인하고 예매할 수

있다. 다만 첫 충전만 무료이고 유럽경제지역(EEA) 이외에서 발급된 카드로 재충전할 경우

수수료가 3%씩 붙기 때문에 처음에 많이 충전하거나 아예 현장 구매만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베트남의 숨겨진 산수화...소도시 ‘닌빈’에서 그림 같은 풍경

▲베트남 ‘닌빈의 지붕’으로 불리는 항무아산 전망대. 바위에 새겨진 약 500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전망대에 닿는다.

 

번잡한 대도시를 벗어나 소도시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곳, 자연의 아름다움과 농촌마을

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는 곳, 바로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소도시‘닌빈’이다. 수도 하노이에서 차로 2시간이면 도착한다.

 

대다수의 베트남 사람들은 이 거리를 오토바이로 오간다. 자동차 외에 두 도시를 잇는 기차나

시외버스, 셰어택시 등의 다양한 이동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토바이의 편리성을 뛰어

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닌빈 여행을 계획한 날이 베트남의 법정공휴일과 맞물렸는데, 휴가 인파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기차 내부 좌석은 반쯤 비어 있었다. “미리 기차표를 예매하지 않아도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던 호텔 직원의 말이 과연 옳았다. 

▲베트남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무궁화호를 떠올리게 하는 베트남 기차

 

무궁화호를 떠올리게 하는 예스러운 베트남의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듯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번잡한 대도시를 벗어나 소도시에 도착한 기쁨도 잠시, 소박한 닌빈역을 지나 도심에 가까워

지자 시끌벅적한 소음과 환경이 귓가를 때렸다. 이틀간의 법정공휴일을 맞아 나들이 온

현지인들의 수만큼이나 길가에 주차된 오토바이가 많다.

 

닌빈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닌빈 중심부 끼란 호수에 숨겨진 보석이라 일컬어지는 ‘호아루

옛 시가지’다.

 

베트남 북부의 가장 영적인 지역 중 하나에 자리잡은 이곳은 호아루 고대 도시 경계 내에 위치

한다. ‘호아루(Hoa Lu)’는 968년부터 1010년까지 베트남의 수도였던 곳이다.

▲닌빈 중심부 끼란 호수에 숨겨진 보석이라 일컬어지는 ‘호아루 옛 시가지’

 

닌빈은 수년간의 내전과 격렬한 분리주의 운동 끝에 건립한 베트남 독립 국가의 수도이자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지다. 토성과 궁궐, 사원 등이 석회암 산으로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형국

인데, 오늘날 고대 성채는 파괴되어 10세기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나무로 된 건물 외관, 붉은 등불, 기와지붕으로 딘 왕조와 레 왕조 시대의 무역 거리를 고스란

히 복원해 당시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새해나 국경절 등의 주요 명절 기간에는 전통

공연과 왕실 의상 체험 등의 행사가 열리는 주무대이기도 하다.

▲호아루 옛 시가지에서 눈에 띄는 건축물인 탑뚜안은 부모, 스승, 국가, 인류에 대한 감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석탑이다.

 

호아루 옛 시가지에서 눈에 띄는 건축물 중 하나는 탑뚜안이다. 반얀트리와 이끼 덮인 오솔길

사이 한적한 장소에 자리잡은 이 탑은 베트남의 기본 도덕적 관념인 네 가지 핵심 요소 ‘부모,

스승, 국가 그리고 인류’에 대한 감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석탑이다. 마음의 평화를

찾거나 얻기 위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탑투안 석탑 내부 전경

 

또한 보름달이 뜨는 날이나 전통 의식이 있을 때면 지역 승려들과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신앙

심을 기리고 나누는 행사가 진행되기도 한다.

 

호아루 옛 시가지 일대는 등불이 켜진 산책로를 거닐고, 호숫가를 배경으로 인생 사진을 찍기도

하며, 노천식당을 즐기는 등 해가 진 후 한층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장소다.

▲호아루 옛 시가지에 자리한 아름다운 건축물과 호아루 고대 시대 마을을 복원한 무역 거리 전경

▲끼란 호수 일대는 해가 진 후 한층 화려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장 오래된 동굴 마을, 탐콕

 

사실 닌빈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탐콕’이라는 명칭으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그만큼 탐콕은 닌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전거는 탐콕 마을을 둘러보는 최고의 교통수단이다(좌측 위). 강 주변을 따라 호텔과 카페,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는 탐콕 마을 중심부 전경과 소박한 농촌마을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탐콕 풍경들.

 

닌빈 중심부인 호아루에서 동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탐콕은 동굴 복합체

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정확한 명칭은 탐콕-비크동(Tam Coc-Bich Dong), ‘세 개의 동굴’이라는 뜻을 가진다.말 그대

로탐콕은 세 개의 동굴로 이루어진, 닌빈에서 가장 오래된 동굴 마을로, 보트 관광 코스가

최초로 개발된 지역이기도 하다.

 

보트 관광은 구불구불한 응오동 강을 따라 절벽과 물이 가득 찬 동굴, 논밭 사이를 지나는 코스로

유유히 이어진다.

 

여기에 노 젓는 소리,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등 자연의 아름다운

선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영화 ‘인도차이나’의 배경지인 탐콕 비크동 사원 입구 전경

 

시원하고 어둑한 동굴을 지나는 동안 만나는 활기 넘치는 논밭과 잔잔한 수로, 웅장한 석회암

카르스트지형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고요하며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절로

느끼게 한다.

 

탐콕에서 빠질 수 없는 명소 중 하나는 바로 비크동 사원이다. 이곳은 영적인 의미와 건축미,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1428년 응우낙 산의 석회암 절벽에 지어진

이 고대 사원은 베트남불교 건축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비크동 사원은 15세기 응우낙 산의 석회암 절벽에 지어진 고대 사원이다.

 

이후 1705년 불교 승려가 이 탑을 재발견하기 전까지 전쟁으로 인해 정글로 뒤덮여 거의

잊혀지고 버려진채로 남았던 비크동 사원은 베트남은 물론 주변국가에서 당시 많은

불교 승려들이 줄지어 방문하며 하탑과 중탑, 상탑의 세 층으로 재건됐다.

 

여러 세대에 걸친 관리인들은 수 세기 동안 이곳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왔다.산기슭에

자리한 하탑은 각기 불상이 모셔진 여러 개의 방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약 120개의 계단을 오르면 응우낙산 중턱에 위치한 중탑이 그 모습을 드러

낸다.전통적인 기와지붕과 중국 한자로 장식된 벽이 특징이다.

▲(좌로부터 시계방향)비크동 사원 중탑 일부는 동굴과 이어져 있다. 동굴 내부에 서식하는

박쥐들, 독특한 종유석과 석순 등이 빼곡한 석회암 동굴 내부.

 

다시 중탑에서 가파른 돌계단 50여 개를 오르면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탑에 닿는다.

‘트엉탑’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깥쪽 방에는 앞뜰과 돌

제단이 있고, 안쪽 방에는 보살 사당이 있다.

 

비크동 사원이 전 세계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기 시작한 건 1993년 미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인도차이나’의 배경지라는 점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인기 관광명소로 인식되어 ‘승려들의 산속 은둔처’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주름진 감나무 아래 털썩 주저 앉아 사색에 잠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임에 분명하다.

▲짱안 일대 동굴과 수생 생태계를 둘러보는 보트 관광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짱안’ 혹은 ‘트랑안(Trang An)’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동굴 마을은 탐콕과 더불어 닌빈의 인기

관광지로 꼽힌다.

 

이곳 또한 한때 영화 배경지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차츰 관광명소로 발전했는데, 영화

‘블러드레터’‘땀깜: 언톨드 스토리’, ‘콩: 스컬 아일랜드’ 등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에 촬영장소

로 쓰였다.

 

짱안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지정한 ‘베트남 최초의 복합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타이

틀을 가진다. 짱안의 생태 경관 단지는 2,000헥타르가 넘는 면적에 걸쳐 수로와 석회암 카르

스트 지형,많은 수의 동굴 등이 어우러져 있다.

 

탐콕과 마찬가지로 짱안 일대 동굴과 수생 생태계를 둘러보는 보트 관광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석회암 절벽과 한적한 산책로, 탁 트인 전망대가 어우러진 짱안 생태 경관 단지

 

3만 년이 넘는 석회암 산맥으로 이루어진 짱안 생태 경관 단지의 지질학적 지형은 침수림과

석회암 산, 고고학적 문화 유적지 등 다양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또한 수십 개의 건식 및 수중 동굴로 이루어진 데다 동굴의 모습 또한 관통형부터 지하 통로,

연결된 방의 형태 등 다양성이 두드러진다.

 

탐콕이 낡고 오래된 작은 농촌마을의 모습을 띠고 있다면, 짱안은 현대적인 테마파크 시설

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곳 생태 경관 단지 입구에 닿으면 현대적으로 단장된 여러 건물이 자리하고, 그곳 내부

에는 인포메이션센터와 박물관, 카페, 레스토랑 등이 들어서 있다.

▲현대적으로 단장된 짱안 생태 경관 단지 내부.

 

여건상 3시간 이상 소요되는 보트 투어에 참여하기 어렵다면 강으로 둘러싸인 노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잠시나마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보자.

 

에메랄드 빛 강을 바라보며 고풍스러운 돌길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다. 산속에서 울려 퍼지

는 사찰 종소리를 들으며 잠시 멈춰 서서 자연과 교감하는 강한 울림이 심신을 포근히

감싸 안는다.

▲고대 시대 풍습과 전통을 재현한 마을 테마파크(좌), 자갈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우)

 

‘진정한 휴식’이란 욕망을 덜어내는 행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어느 순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의 상태로 나아가는

자신을 마주하며 자연의 소중함을, 휴식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긴다. 짱안에서 덜어내고

비우는 여행을 경험해 보기를 추천한다.

 

닌빈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 최고의 전망을 자랑한다고 알려진 항무아산으로 향했다. ‘닌빈의

지붕’이라 불리는 항무아산은 전망대에서 닌빈 지역의 거대 논밭 풍경과 석회암 봉우리가

어우러진 절경을 파노라마 형태로 감상할 수 있다.

▲바위에 새겨진 약 500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항무아산 전망대에 닿는다.

 

특히 해질 무렵 석회암 산맥 너머로 지는 석양이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항무아산 전망대

는 높이 142미터, 폭 800미터로 2000년 보수공사를 마치고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현재에

이른다.

 

전망대의 역할은 122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원나라가 몽골 침략군을 추적하고

격퇴 하는데 있어서 이곳 전망대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수 세기 동안에는 왕조들이 국정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이곳은 베트남 불교 승려들의 명상 수행의 장소로도 인식되었으며, 산 정상과 주변 동굴 등지

에서 불교 축제나 잔치가 열리기도 했다.

▲항무아산 초입에 조성된 드넓은 연꽃 연못 전경

 

항무아산 입구에 들어서면 드넓은 연꽃 연못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반긴다. 연꽃이 무성하게

핀 연못 위를 가로지르는 대나무 산책로는 산책과 동시에 포토존을 위한 곳이다.

 

초록빛 연꽃 세상을 지나쳐 몇 미터 걷다 보면 정상으로 향하는 돌계단이 용 조각상과 함께

시야에 담긴다.

 

이곳에서 정상까지 약 500개의 돌계단이 이어져 있다. 그중 약 3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면 산

중턱에 다다르고 길이 양쪽 두 개로 갈라진다. 두 길 모두 전망대로 이어지는데, 둘 중 더 높은

봉우리는 왼쪽에 위치한다.

▲전망대 인근 바위 틈에 우뚝 솟은 불교 탑

 

나머지 돌계단을 하나도 빠짐없이 올라간 뒤 바위 틈에 우뚝 솟은 불교 탑을 마주 바라봤다. 마을

전역을굽이 내려다보고 있는 듯 자리한 작은 불교 탑은 예로부터 마을과 마을사람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물이었다.

 

불교 탑의 시선대로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절경은 마치 붓으로 그린 ‘산수화’의 한 작품

같았다.

 

탐콕과 짱안에서 보았던 울창한 논과 밭, 구불구불 흐르는 강과 석회암 산맥의 경치와는 또다른

거대한 풍경이 닌빈 여행의 마지막 코스를 완벽하게 장식했다.

▲항무아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

 

전망대를 가득 메운 인파를 피해 구석진 한편에서 일몰을 간절히 기다렸다. 허나 맑았던 하늘이

일순간 구름으로 뒤덮여 결과적으로 기대했던 일몰을 두 눈에 담지 못했지만 실망으로 다가

오진 않았다.

 

오히려 구름이 잔잔한 바람을 일으켜 피부에 닿는 기압의 변화와 공기의 움직임을 체감하는

순간이 호사로 느껴졌다.

 

그 순간 절로 ‘행복하다’는 말을 읊조리며, 자연의 위대함에 다시금 머리를 숙이게 됐다.

대구 관광 명소. 대구 벚꽃 명소. 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동화사 일주문(一柱門)

▲동화사는 유서 깊은 신라 고찰로 팔공산 폭포골, 빈대골, 수숫골이 좌우로 몰려든 동학동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신라 493년(소지왕 15)

극단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하였다.

 

신라 832년(흥덕왕 7) 왕사 심지가 중창하였는데, 그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 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영조 때 중창 시에 세워진 건물로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연경전, 천태각,

영산전, 봉서루, 심검당, 칠성각, 산신각, 응향각, 원음각, 천안문 등이 있다. 또한 동화사는 팔공산

국립공원의 다양한 탐방로가 시작되는 관문이다.

 

염불암을 지나 염불봉이나 동봉으로 향하는 코스, 빈대골 계곡을 따라 능선을 오르는 코스, 템플

스테이 입구에서 폭포골을 따라 도마재(신령재)나 바른재로 향하는 코스까지, 사찰 곳곳에서

자연으로 향하는 탐방로가 열려 있다. 사계절 내내 산과 계꼭의 풍경을 따라걷기 좋아 많은

이들이 찾는다.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인 극달이 창건하여 유가사라고이름붙힌 사찰로 흥덕왕 7년에 심지왕사가

중건할 당시 사찰 주변으로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여 있어서 동화사라 개칭을 하였다고 전합니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중창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찰경내에는 1732년에 8번째로 중건

한대웅전과 극락전 연경전과 천태각 등 20여 채의 건물들이 대부분 조선조 영조때에 중창되어

지어져 있습니다

 

전해오는 문화재는 보물 6점이 있습니다 1992년에낙성된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과 함께 새로운

당우들도 많이 지어졌습니다 또한이곳은 산사체험 템플스테이가 인기가 높습니다 봄이면 상춘객

과 출사객의 발길도 끊이지 않습니다.

▲사천왕상(四天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봉서루(鳳棲樓)

▲대웅전(大雄殿)

▲대웅전 삼존불(三尊佛)

▲산신각(山神閣)

▲산신각 내부

▲조사전(祖師殿)

▲조사전 내부

▲칠성각(七聖閣)

▲칠성각 내부

▲영산전(靈山殿)

▲영산전 내부

▲동화사 삼층석탑

▲범종루(梵鐘樓)

▲금강계단(金剛戒檀)

▲근자에 조성된것으로 보인다

▲동화사 봉황문(鳳凰門)

▲마애석가여래 좌상 

 

공무원 도시 세종시 여행ㅡ밤이 되면 별자리처럼 반짝인다…

▲독창적인 디자인의 금강보행교. 세종시의 이른바 ‘랜드마크’다. 둥근 고리형 도시구조를 형상화한

ㅇ자 모양이라 ‘이응다리’로 더 많이 불린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1446년을 기념해 다리

둘레를 1446m로 정했다. 다리는 복층으로 상부층은 보행전용, 하부층은 자전거 전용이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따져보자. 풍경도 음식도 쇼핑도 이유가 되겠지만, 결국은 ‘다른 도시’

를 보고 싶어서다.

 

날마다 오가는 지루하고 익숙한 도시를 벗어나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 어떤 나라에서는 우리

가 이미 지나온 어제를 보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본다. 여행의 흥분은 대개

그 시간의 낙차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비행기를 타지 않고 ‘내일’을 보러 가는 여행은 어떨까. 세종으로 간다. 정부청사와 아파트

뿐인 공무원의 도시쯤으로 여겼다면, 한번 가보시라. 생각이 달라진다.

 

도시를 짓는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진화해왔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가 끝도 없이 늘어섰던 노원·

상계, 그 뒤에 들어선 일산·분당의 표정이 다르다.

 

그리고 세종에 이르러서는 경이로울 지경이다. 녹지는 넉넉하고, 공연장과 도서관, 미술관이 동네

마다 들어섰다. 동선은 매끄럽고 건축은 저마다 미감을 뽐낸다.

 

행복도시 건설에 2030년까지 들어가는 돈이 22조5000억 원. 목표 인구 50만 명으로 나누면 한

사람 앞에 4500만 원꼴이다. 민간투자 빼고 공적 투자금액만 그렇다. 공원만 270곳을 계획했고,

벌써 204곳을 지었다.

 

한 도시에다 돈을 이렇게 써도 되나 걱정될 만큼 도시 생활의 여가를 위한 인프라를 촘촘하게

깔았다.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지는 도시다.

 

 ◆49층에서 내려다본 미래

 

근사한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소가 어디일까. 답은 싱겁다. 그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세종 나성동에 그런 자리가 셋이나 있다. 49층의 카페 ‘플레져’, 45층의 ‘카페45’,

그리고 해가 지면 문을 여는 라운지 바 ‘라운지46’이다.

 

플레져의 창가에 서면 세종이 통째로 들어온다. 호수공원의 물빛과 중앙공원의 너른 초지가 펼쳐

지고, 그 둘레로 아파트 단지들이 둥글게 도시를 감싼다. 도시가 설계도처럼 선명하다. 자로

잰 듯 반듯한 데도딱딱하지 않다. 초록이 넉넉해서다.

 

압권은 밤이다. 라운지46에서 본 야경은 태국 방콕의 이름난 루프톱 바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

불 켜진 아파트 창들이 별자리처럼 흩어지고, 금강 위 둥근 다리에 빛이 돈다.

 

칵테일 한 잔을 앞에 두고 있으면 여기가 충청의 신도시라는 사실을 잠깐 잊게 된다. 그러니까

세종은, 미래 도시로 떠나는 ‘유사 해외여행’의 목적지로 손색이 없다.

 

아, 그런데 이 얘기는 해야겠다. 사람들로 붐비는 49층 카페가 입주한 주상복합 건물의 저층

상가는 처참할 정도로 비어 있었다.

 

불 꺼진 유리창마다 ‘임대’ 안내문이 붙었고, 텅 빈 복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꼭대기 층은

줄을 서는데 1층은 불이 꺼진 건물. 그 풍경이 어쩐지 기괴해 보였다. 미래 도시에도

그늘은 있다.

▲전의면의 시멘트 장승. 여러 번 색이 칠해지는 동안 여장승의 뜬 눈이 감겼고 족두리가 없어졌다.

 

◆도시락 한 개가 남긴 기록

 

미래는 넘치는데, 이 도시에 모자란 게 있다. 없는 건 ‘어제’다. 2012년 출범했으니 올해 겨우

열네 살. 오래된 골목도, 수백 년 묵은 명승도 없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역사가 모자라니 오히려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손톱만 한 사연에도 의미를 부여

하는데, 그게 뜻밖에 재미있다. 결핍이 오히려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이런 재미를 보여주는 곳이 연동면의 ‘연동문화발전소’다. 1984년 지어져 35년 동안 면사무소로

쓰이다 2019년에 면사무소가 새 청사로 옮겨가면서 빈 건물이다.

 

지금은 한쪽은 젊은 화가들이 머무는 레지던시 겸 미술관이고, 다른 한쪽에는 마을기록문화관

‘다담(多談)’이 있다. 호적과 토지대장을 떼어주던 면사무소에, 이제는 주민들이 기억을 적은

기록이 모인다.

 

여기서 마을기록가가 찾아낸 흥미진진한 사건 하나를 만났다. 1970년 10월, 연기군 남면의 두

국민학교 6학년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

 

여관 근처 식당에서 산 도시락을 창경원에서 점심으로 먹었는데, 오후 용산역에서 열차를 기다

리던 아이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집단 식중독이었다. 아이들을 보살핀 건 경찰이었다.

용산경찰서장이 직접 호송차를 지휘해 아이들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고향에서는 난리가 났다. 치료를 받은 아이들은 다행히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교장은 용산경찰서

에 전보를 쳤다. “넘치는 친절과 호의로 전원 무사 도착.” 학교는 용산경찰서와 자매결연을 맺고,

용산서는 앞으로 이 학교 아이들의 서울 수학여행을 안내하기로 했다.

 

마을기록관에 전시된 흑백사진이 걸작이다. 사건 뒤 학교를 찾은 서장의 목에 꽃목걸이가 겹겹이

걸렸다. 서장은 쑥스러운 듯 모자챙을 매만지며 웃고, 한복 차림의 할머니들이 허리를 굽혀 반기고

있다. 길가에 줄지어 선 아이들은 손뼉을 친다.

 

◆왕처럼 다섯 끼를 먹자고?

 

도시락 얘기가 나온 김에 먹는 얘기를 좀 해보자. 요즘 세종이 앞세우는 여행 테마가 ‘미식’이다.

세종시문화관광재단은 ‘세종을 찾은 외지인이 내비게이션에 찍은 목적지의 60%가 음식점이었다’

는 자료를 근거로 든다.

 

‘세종사랑맛집’을 100곳까지 늘리고 있고, 조선 왕실이 하루 다섯 번 상을 올렸다는 데서 이름을

딴 1박2일짜리 여행상품 ‘세종오식(五食)’도 내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세종의 음식은 그저 그랬다. ‘밥 먹으러 세종에 가자’고 권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내비게이션얘기도 곱씹어 볼 만하다. 식당은 누구나 주소를 찍고 가는 곳이다. 출장 온 공무원도

하루 세끼는 먹는다. 사람들은 밥 먹으러 세종에 가는 게 아니라, 세종에 간 김에 밥을 먹는다.

 

그래도 재미있는 한 끼가 있긴 했다. 세종오식의 마지막 프로그램. 조치원 시장에서 참가자들이

제각각 장을 봐 와서 한 상에 모아놓고 나눠 먹었다. 음식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흥정하고 덤을 얻고, 서로 사 온 걸 나눠 먹는 그 방식이 즐거웠다.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을 먹었느냐’

보다 ‘어떻게 먹었느냐’였다.

 

왕의 밥상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정작 세종은 유난한 고기 마니아였다. 아버지 태종이

“주상은 어려서부터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걱정했을 정도다. 몸 쓰는 걸 즐기지

않았고, 밤늦도록 책을 붙들었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세종은 오늘날 당뇨로 짐작되는 소갈증에 시달렸고, 눈병도 심했다.

“안질을 얻은 지 10년”이 됐고,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 없이 걷기 어렵다고 스스로 털어

놓기도 했다. 고기를 너무 좋아했던 임금이 결국 찾은 건 ‘물’이었다.

▲국립세종도서관. 경쾌한 곡선의 미감이 인상적이다. 유럽기반의 디자인 웹진 ‘디자인 붐’이 세계

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톱10에 선정하기도 했다.

 

◆임금은 오지 않았다

 

세종시의 북쪽 끝, 천안과 맞닿은 전의면 관정리. 공장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느닷없이

잘 깎인잔디밭이 나온다. 한가운데 둥근 초록 펜스가 섰고, 그 안에 몇 그루 나무가 섬처럼 작은

숲을 이뤘다.

 

파란 조끼를 입은 마을 노인들이 펜스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층층이 쌓은 돌담 아래 깊숙한 곳에서

물이 솟는다. 노인들은 ‘이 물은 못 먹는다’고 했지만, 돌 위에는 분홍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물이 ‘왕의 물’, 전의초수(椒水)다. 전의면에서 나는 초수란 뜻인데, 초수는 톡 쏘는 맛이 후추(椒)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세종 26년, 그러니까 1444년 정월에 청주와 목천, 전의에 후추 맛 나는 물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세종은 반색했다. 그런데 무턱대고 매달리진 않았다.

 

초수로 효험을 봤다는 사람도 있고 한 달을 마셔도소용없었다는 사람도 있으니, 누가 낫고 누가 안

나았는지 자세히 조사하라고 명했다. 병든 몸으로도 ‘치유 사례’부터 모으는 임금. 과연 세종이다.

 

그해 7월, 조정은 이 물을 서울로 나르는 규칙을 만들었다. 날마다 해 질 녘 옹기에 물을 담아 ‘무령설기

(毋令泄氣)’, 기운이 새지 않게 단단히 봉하고 뜬 시각을 적어 역마(驛馬)에 실었다.

 

물은 하룻밤 사이에 서울에 닿아야 했다. 늦으면 역을 맡은 관리가 벌을 받았다. 해 질 녘에 뜬 물 한 동이

가 밤새 역참을 갈아타며 북으로 달리는 모습을 떠올려 보시라. 조선판 ‘새벽 배송’이다.

 

이듬해 충청감사 김조가 ‘차라리 직접 오시라’고 세종에 청했다. 이유가 그럴듯하다. ‘물은 근원을 떠나면

본성을 잃는다(水離源則失性)’는 것. 밤새 달려온 물은 이미 그 물이 아니라는 얘기. 세종의 답은 짧았다.

“다시 말하지 말라.” 그 뒤로 실록에 전의초수는 나오지 않는다. 임금은 끝내 전의에 오지 않았다.

 

펜스 앞 안내판은 1년 넘게 이 물을 받은 임금의 “병이 다 나았다고 한다”고 적었다. 실록은 끝내 나았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효험을 줄줄이 적은 안내판 뒤에는 아무도 마실 수 없는 물이 있다.

 

마시지 말라는 물을 순전히 궁금해서 맛을 봤다. 톡 쏘는 맛은 거의 없었다. 580여 년 전에는 기운이 샐까

봉해서 달렸던 물이, 근원을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지금 오히려 기운이 빠져 있었다.

▲수학여행 중 집단 식중독에 걸린 학생들을 보살핀 보답으로 초청받아 학교를 방문한

서울 용산경찰서장.

 

◆에비앙을 꿈꾼 100m 관정

 

약수터에서 몇 걸음 떨어진 뒤쪽에 초록 천막을 두른 가건물이 있다. 간판에는 ‘전의 탄산수’라 적었다.

약수를 파는 곳이다. 요즘 세상에 약수를 돈 주고 사 먹는 손님이 있을 턱이 있나. 가게 안에 김주원(84)

·김점임(73) 부부가 무료하게 앉아 있다.

 

40여 년 전 얘기부터 해야겠다. 서울에서 건설업으로 제법 돈을 번 김 씨는 누군가에게 빌려준 돈을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빚진 이는 돈 대신 이 땅을 내놓으며 말했단다. “머잖아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시대가 온다.

 

여기서 물만 나오면 떼부자가 된다.” 프랑스 에비앙 얘기까지 꺼냈다. 그때만 해도 생수를 국내에서

마음대로 팔 수 없던 시절. 생수 판매가 합법이 된 건 1990년대 중반이었으니 빚진 이는 아직 열리

지도 않은 시장에 베팅했던 셈이다.

 

김 씨는 그 말을 믿고 땅을 팠다. 100m 깊이까지 땅을 파서 세 번 만에 물을 얻었다고 했다. 예언은

반만 맞았다. 물을 사 먹는 시대는 정말 왔다. 다만 떼부자는 되지 못했다.

 

약수는 누구나 떠 가게 두고 ‘관정약수식당’을 차려 칼국수와 닭백숙을 팔았다. 서울의 손꼽히는 냉면

집이 ‘육수용 물을 대 달라’고 찾아온 적도 있었지만, 허가 절차가 까다로워 포기했다. 누구나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냉면집 상호를 김 씨가 말했지만, 무산된 일이니 그건 쓰지 않기로 한다.

 

손님이 줄어 식당은 문을 닫았다. 지금은 물만 판다. 큰 말통이 3000원, 중간 것은 2000원, 작은

생수병은 300원이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탄산은 거의 없고 철분의 쇠 맛도

없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혀끝에 단맛이 느껴진다. 물이 좋으면 ‘물맛이 달다’고 하지만, 그게 ‘진짜로

달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물은 달았다.

▲폐쇄된 왕의 물 ‘전의초수’. 물은 이제 먹을 수 없다지만,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고 바가지도 놓여 있다.

 

◆다실에서 우동을 파는 이유

 

세종의 동쪽 끝, 청주와 맞닿은 부강면으로 간다. 부강면 소재지 주택가에 ‘가네코후미코 다실’이 있다.

다실(茶室)이라지만 우동을 판다. 찾아간 날, 가게에는 일본에서 온 여행자들이 앉아 있었다.

 

중년 여성도 있었고, 머리를 물들이고 팔에 문신을 새긴 젊은 여성도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자취를

찾아 부강까지 오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고 했다. 나이도 차림새도 제각각인 이들을 이 작은 면 소재지

까지 불러들이는, 가네코 후미코는 누구일까.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호적없는‘무적자(無籍者)’였다. 학교에 다녀도 학력을 인정받지 못했고, 국가도 가족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1912년, 아홉 살 후미코는 조선에 사는 고모 집에 양녀로 왔다. 고모 집이 여기 부강에 있었다. 당시

부강은 금강 뱃길이 열차와 이어져 하루 수천 명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철길 위쪽 고지대에는 일본인 부자들이, 아래쪽에는 조선인들이 살았다. 고모 집은 윗마을에 있었다.

그 집에서 후미코는 하녀나 다름없었다. 할머니의 폭언과 매질을 견디며 집안일을 떠맡았다.

 

헌병 파견소 마당에서는 옷이 벗겨진 조선인이 채찍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서 쫓겨나면 아이

는 아랫마을 조선인들의 공동 우물가로 내려갔다.

 

거기서 한 조선인 아낙이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일본인 눈에 조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

지만, 윗마을에서 쫓겨난 이 아이에게는 아랫마을이 보였다.

 

1919년 봄, 열여섯 살 후미코는 부강에서 만세 소리를 들었다. 훗날 법정에서 그는 그때 “남의 일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솟았다고 했다.

 

그해 일본으로 돌아간 후미코는 도쿄에서 신문팔이와 식모살이로 고학하다가, 조선 청년 박열의

시를 읽고 단숨에 매료됐다.

 

둘은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를 꾸렸고,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일왕 암살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사형을선고받았다. 그리고 1926년 7월, 스물셋의 나이로 옥중에서 숨졌다.

 

2018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다. 일본에도

조선에도 속하지 못했고, 국가라는 틀 자체를 거부했던 사람. 올해가 후미코가 세상을 뜬 지

꼭 100년 되는 해다.

▲가네코후미코 다실’ 벽에 걸어놓은 후미코의 생전 사진. 우동을 먹으러 온 젊은이들이 여기서

후미코를 알고 간다.

 

◆닷새 동안 넘긴 토지대장

 

우동집에서 이규상(68) 가네코후미코 선양사업회장을 만났다. 그가 후미코를 알게 된 건 40대 초반

공무시절, 우연히 손에 든 책 한 권 때문이었다. “내 고향 얘기가 나오니까 관심이 갔는데, 보면 볼수

록 매력적인 인물이었어요.” 불쌍해서가 아니라 매력적이어서…. 그 말이 오래 귀에 남았다.

 

2008년 부강면장(당시 청원군 부용면장)으로 부임한 그는 곧바로 후미코 학술대회를 열었다. “우리

에게 이런 공간이 있고,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그는 후미코의 자취를 찾았다. 군청 지적과에서 1920년대 토지대장을 뒤진 지 닷새 만에 후미코가

얹혀살던 고모부 집 주소를 찾아냈다.

 

그걸 지금의 지도와 대조해 집터를 알 수 있었다. 부강역 뒤쪽 150m쯤.정원 딸린 집의 대문과 언저

리가 후미코가 살던 자리다. 팻말 하나 없다.

 

이 회장은 기념관을 짓고 싶었다고 했다. “기념관이나 뭐 그런 걸 만들고 싶었는데, 결국 아들이 만든

공간에 자리를 잡았어요

 

 아들 형제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에 5층짜리 연립주택을 올렸고, 1층에다 협동조합 이름으로

가게를 내고 아버지가 20년 넘게 붙들고 있는 후미코를 기억하는 다실을 만든 것이다.

 

다실에서는 일본에서 6개월 동안 우동을 배워 온 작은아들 혁진(34) 씨가 우동을 팔고 있다.아들의

우동은 서울까지 소문이 났다.

 

젊은이들은 우동을 먹으러 왔다가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후미코라는 이름을 처음 알고 간다. 후미코

를 아는 이들은, 부강에 이런 곳이라도 있어 고맙다며 일부러 찾아온다.

 

의무감이 앞선 기념관은 관심이 식으면 잊히고, 여행상품은 지원금이 끊기면 없어진다. 이 우동집

은 제힘으로 너끈히 굴러가며 한 사람의 기억을 떠받친다. 한 사람의 삶을 기념하는 이른바 ‘지속

가능한 방식’이다.

 

세종에서 만난 건 이런 것들이었다. 창경원에서 먹은 수학여행 도시락, 펜스 안 돌 위에 놓인 분홍

바가지, 팻말 하나 없는 대문. 누가 붙들지 않았다면 진작 흩어졌을 것들이다.

 

그걸 붙든 건 옛 신문을 뒤져 수학여행 사연을 찾아낸 마을기록가, 왕의 물 곁에서 늙어가는 노부부,

닷새 동안 토지대장을 넘긴 면장, 그리고 아버지가 20년 넘게 붙든 이름을 간판에 내건 아들이다.

 

미래는 넘치는데 어제가 모자란 도시. 도시의 내일을 보러 간 세종에서 정작 오래 발길을 붙든 건

어제였다.

 ◆신식 장승’의 정체

 

세종 전의면 읍내리 북암천 변의 전의성당 옆에는 시멘트로 만든 ‘신식’ 장승이 있다. 알록달록

색까지 칠해 무속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1970년 무렵 아들 낳기를 원하던 부부가 시멘트 10포대를 사서 기술자에게 부탁해 만들어 본디

목장승이 있던 자리에 세웠다.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방치된 장승을, 이번에는 부동산업을 하던 이가 큰돈을 들여 채색

했단다. 그것도 색이 다 바랜 뒤에 서울 대학생의 마을 담벼락 그리기 자원봉사 과정에서

새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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