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도시 세종시 여행ㅡ밤이 되면 별자리처럼 반짝인다…

▲독창적인 디자인의 금강보행교. 세종시의 이른바 ‘랜드마크’다. 둥근 고리형 도시구조를 형상화한
ㅇ자 모양이라 ‘이응다리’로 더 많이 불린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1446년을 기념해 다리
둘레를 1446m로 정했다. 다리는 복층으로 상부층은 보행전용, 하부층은 자전거 전용이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따져보자. 풍경도 음식도 쇼핑도 이유가 되겠지만, 결국은 ‘다른 도시’
를 보고 싶어서다.
날마다 오가는 지루하고 익숙한 도시를 벗어나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 어떤 나라에서는 우리
가 이미 지나온 어제를 보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본다. 여행의 흥분은 대개
그 시간의 낙차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비행기를 타지 않고 ‘내일’을 보러 가는 여행은 어떨까. 세종으로 간다. 정부청사와 아파트
뿐인 공무원의 도시쯤으로 여겼다면, 한번 가보시라. 생각이 달라진다.
도시를 짓는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진화해왔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가 끝도 없이 늘어섰던 노원·
상계, 그 뒤에 들어선 일산·분당의 표정이 다르다.
그리고 세종에 이르러서는 경이로울 지경이다. 녹지는 넉넉하고, 공연장과 도서관, 미술관이 동네
마다 들어섰다. 동선은 매끄럽고 건축은 저마다 미감을 뽐낸다.
행복도시 건설에 2030년까지 들어가는 돈이 22조5000억 원. 목표 인구 50만 명으로 나누면 한 사람
앞에 4500만 원꼴이다. 민간투자 빼고 공적 투자금액만 그렇다. 공원만 270곳을 계획했고, 벌써
204곳을 지었다.
한 도시에다 돈을 이렇게 써도 되나 걱정될 만큼 도시 생활의 여가를 위한 인프라를 촘촘하게 깔았다.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지는 도시다.
◆49층에서 내려다본 미래
근사한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소가 어디일까. 답은 싱겁다. 그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
이다. 세종 나성동에 그런 자리가 셋이나 있다. 49층의 카페 ‘플레져’, 45층의 ‘카페45’, 그리고 해가
지면 문을 여는 라운지 바 ‘라운지46’이다.
플레져의 창가에 서면 세종이 통째로 들어온다. 호수공원의 물빛과 중앙공원의 너른 초지가 펼쳐지고,
그 둘레로 아파트 단지들이 둥글게 도시를 감싼다. 도시가 설계도처럼 선명하다. 자로 잰 듯 반듯
한데도딱딱하지 않다. 초록이 넉넉해서다.
압권은 밤이다. 라운지46에서 본 야경은 태국 방콕의 이름난 루프톱 바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 불 켜진
아파트 창들이 별자리처럼 흩어지고, 금강 위 둥근 다리에 빛이 돈다.
칵테일 한 잔을 앞에 두고 있으면 여기가 충청의 신도시라는 사실을 잠깐 잊게 된다. 그러니까 세종은,
미래 도시로 떠나는 ‘유사 해외여행’의 목적지로 손색이 없다.
아, 그런데 이 얘기는 해야겠다. 사람들로 붐비는 49층 카페가 입주한 주상복합 건물의 저층 상가는
처참할 정도로 비어 있었다.
불 꺼진 유리창마다 ‘임대’ 안내문이 붙었고, 텅 빈 복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꼭대기 층은 줄을
서는데 1층은 불이 꺼진 건물. 그 풍경이 어쩐지 기괴해 보였다. 미래 도시에도 그늘은 있다.


▲전의면의 시멘트 장승. 여러 번 색이 칠해지는 동안 여장승의 뜬 눈이 감겼고 족두리가 없어졌다.
◆도시락 한 개가 남긴 기록
미래는 넘치는데, 이 도시에 모자란 게 있다. 없는 건 ‘어제’다. 2012년 출범했으니 올해 겨우 열네 살.
오래된 골목도, 수백 년 묵은 명승도 없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역사가 모자라니 오히려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손톱만 한 사연에도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게 뜻밖에 재미있다. 결핍이 오히려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이런 재미를 보여주는 곳이 연동면의 ‘연동문화발전소’다. 1984년 지어져 35년 동안 면사무소로 쓰이다
2019년에 면사무소가 새 청사로 옮겨가면서 빈 건물이다.
지금은 한쪽은 젊은 화가들이 머무는 레지던시 겸 미술관이고, 다른 한쪽에는 마을기록문화관 ‘다담
(多談)’이 있다. 호적과 토지대장을 떼어주던 면사무소에, 이제는 주민들이 기억을 적은 기록이 모인다.
여기서 마을기록가가 찾아낸 흥미진진한 사건 하나를 만났다. 1970년 10월, 연기군 남면의 두 국민학교
6학년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
여관 근처 식당에서 산 도시락을 창경원에서 점심으로 먹었는데, 오후 용산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아이
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집단 식중독이었다. 아이들을 보살핀 건 경찰이었다. 용산경찰서장이
직접 호송차를 지휘해 아이들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고향에서는 난리가 났다. 치료를 받은 아이들은 다행히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교장은 용산경찰서에 전보
를 쳤다. “넘치는 친절과 호의로 전원 무사 도착.” 학교는 용산경찰서와 자매결연을 맺고, 용산서는 앞으로
이 학교 아이들의 서울 수학여행을 안내하기로 했다.
마을기록관에 전시된 흑백사진이 걸작이다. 사건 뒤 학교를 찾은 서장의 목에 꽃목걸이가 겹겹이 걸렸다.
서장은 쑥스러운 듯 모자챙을 매만지며 웃고, 한복 차림의 할머니들이 허리를 굽혀 반기고 있다. 길가에
줄지어 선 아이들은 손뼉을 친다.
◆왕처럼 다섯 끼를 먹자고?
도시락 얘기가 나온 김에 먹는 얘기를 좀 해보자. 요즘 세종이 앞세우는 여행 테마가 ‘미식’이다. 세종시
문화관광재단은 ‘세종을 찾은 외지인이 내비게이션에 찍은 목적지의 60%가 음식점이었다’는 자료를
근거로 든다.
‘세종사랑맛집’을 100곳까지 늘리고 있고, 조선 왕실이 하루 다섯 번 상을 올렸다는 데서 이름을 딴 1박
2일짜리 여행상품 ‘세종오식(五食)’도 내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세종의 음식은 그저 그랬다. ‘밥 먹으러 세종에 가자’고 권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내비
게이션얘기도 곱씹어볼 만하다. 식당은 누구나 주소를 찍고 가는 곳이다. 출장 온 공무원도 하루 세끼
는 먹는다. 사람들은 밥 먹으러 세종에 가는 게 아니라, 세종에 간 김에 밥을 먹는다.
그래도 재미있는 한 끼가 있긴 했다. 세종오식의 마지막 프로그램. 조치원 시장에서 참가자들이 제각
각 장을 봐 와서 한 상에 모아놓고 나눠 먹었다. 음식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흥정하고 덤을 얻고, 서로 사 온 걸 나눠 먹는 그 방식이 즐거웠다.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을 먹었느냐’
보다 ‘어떻게 먹었느냐’였다.
왕의 밥상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정작 세종은 유난한 고기 마니아였다. 아버지 태종이 “주상은
어려서부터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걱정했을 정도다. 몸 쓰는 걸 즐기지 않았고, 밤늦
도록 책을 붙들었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세종은 오늘날 당뇨로 짐작되는 소갈증에 시달렸고, 눈병도 심했다. “안질을
얻은 지 10년”이 됐고,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 없이 걷기 어렵다고 스스로 털어놓기도 했다. 고기를
너무 좋아했던 임금이 결국 찾은 건 ‘물’이었다.

▲국립세종도서관. 경쾌한 곡선의 미감이 인상적이다. 유럽기반의 디자인 웹진 ‘디자인 붐’이 세계
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톱10에 선정하기도 했다.
◆임금은 오지 않았다
세종시의 북쪽 끝, 천안과 맞닿은 전의면 관정리. 공장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느닷없이 잘 깎인
잔디밭이 나온다. 한가운데 둥근 초록 펜스가 섰고, 그 안에 몇 그루 나무가 섬처럼 작은 숲을 이뤘다.
파란 조끼를 입은 마을 노인들이 펜스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층층이 쌓은 돌담 아래 깊숙한 곳에서 물이
솟는다. 노인들은 ‘이 물은 못 먹는다’고 했지만, 돌 위에는 분홍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물이 ‘왕의 물’, 전의초수(椒水)다. 전의면에서 나는 초수란 뜻인데, 초수는 톡 쏘는 맛이 후추(椒)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세종 26년, 그러니까 1444년 정월에 청주와 목천, 전의에 후추 맛 나는 물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세종
은반색했다. 그런데 무턱대고 매달리진 않았다.
초수로 효험을 봤다는 사람도 있고 한 달을 마셔도소용없었다는 사람도 있으니, 누가 낫고 누가 안 나았는
지 자세히 조사하라고 명했다. 병든 몸으로도 ‘치유 사례’부터 모으는 임금. 과연 세종이다.
그해 7월, 조정은 이 물을 서울로 나르는 규칙을 만들었다. 날마다 해 질 녘 옹기에 물을 담아 ‘무령설기(毋令
泄氣)’, 기운이 새지 않게 단단히 봉하고 뜬 시각을 적어 역마(驛馬)에 실었다.
물은 하룻밤 사이에 서울에 닿아야 했다. 늦으면 역을 맡은 관리가 벌을 받았다. 해 질 녘에 뜬 물 한 동이가 밤
새 역참을 갈아타며 북으로 달리는 모습을 떠올려 보시라. 조선판 ‘새벽 배송’이다.
이듬해 충청감사 김조가 ‘차라리 직접 오시라’고 세종에 청했다. 이유가 그럴듯하다. ‘물은 근원을 떠나면 본성
을 잃는다(水離源則失性)’는 것. 밤새 달려온 물은 이미 그 물이 아니라는 얘기. 세종의 답은 짧았다.
“다시 말하지 말라.” 그 뒤로 실록에 전의초수는 나오지 않는다. 임금은 끝내 전의에 오지 않았다.
펜스 앞 안내판은 1년 넘게 이 물을 받은 임금의 “병이 다 나았다고 한다”고 적었다. 실록은 끝내 나았다는 말
을 남기지 않았다. 효험을 줄줄이 적은 안내판 뒤에는 아무도 마실 수 없는 물이 있다.
마시지 말라는 물을 순전히 궁금해서 맛을 봤다. 톡 쏘는 맛은 거의 없었다. 580여 년 전에는 기운이 샐까 봉해
서 달렸던 물이, 근원을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지금 오히려 기운이 빠져 있었다.

▲수학여행 중 집단 식중독에 걸린 학생들을 보살핀 보답으로 초청받아 학교를 방문한 서울 용산경찰서장.
◆에비앙을 꿈꾼 100m 관정
약수터에서 몇 걸음 떨어진 뒤쪽에 초록 천막을 두른 가건물이 있다. 간판에는 ‘전의 탄산수’라 적었다.
약수를 파는 곳이다. 요즘 세상에 약수를 돈 주고 사 먹는 손님이 있을 턱이 있나. 가게 안에 김주원(84)
·김점임(73) 부부가 무료하게 앉아 있다.
40여 년 전 얘기부터 해야겠다. 서울에서 건설업으로 제법 돈을 번 김 씨는 누군가에게 빌려준 돈을 끝
내 돌려받지 못했다. 빚진 이는 돈 대신 이 땅을 내놓으며 말했단다. “머잖아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시대가 온다.
여기서 물만 나오면 떼부자가 된다.” 프랑스 에비앙 얘기까지 꺼냈다. 그때만 해도 생수를 국내에서 마음
대로 팔 수 없던 시절. 생수 판매가 합법이 된 건 1990년대 중반이었으니 빚진 이는 아직 열리지도 않은
시장에 베팅했던 셈이다.
김 씨는 그 말을 믿고 땅을 팠다. 100m 깊이까지 땅을 파서 세 번 만에 물을 얻었다고 했다. 예언은 반만
맞았다. 물을 사 먹는 시대는 정말 왔다. 다만 떼부자는 되지 못했다.
약수는 누구나 떠 가게 두고 ‘관정약수식당’을 차려 칼국수와 닭백숙을 팔았다. 서울의 손꼽히는 냉면집이
‘육수용 물을 대 달라’고 찾아온 적도 있었지만, 허가 절차가 까다로워 포기했다. 누구나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냉면집 상호를 김 씨가 말했지만, 무산된 일이니 그건 쓰지 않기로 한다.
손님이 줄어 식당은 문을 닫았다. 지금은 물만 판다. 큰 말통이 3000원, 중간 것은 2000원, 작은 생수병은
300원이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탄산은 거의 없고 철분의 쇠 맛도 없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혀끝에 단맛이 느껴진다. 물이 좋으면 ‘물맛이 달다’고 하지만, 그게 ‘진짜로 달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물은 달았다.

▲폐쇄된 왕의 물 ‘전의초수’. 물은 이제 먹을 수 없다지만,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고 바가지도 놓여 있다.
다실에서 우동을 파는 이유
세종의 동쪽 끝, 청주와 맞닿은 부강면으로 간다. 부강면 소재지 주택가에 ‘가네코후미코 다실’이 있다.
다실(茶室)이라지만 우동을 판다. 찾아간 날, 가게에는 일본에서 온 여행자들이 앉아 있었다.
중년 여성도 있었고, 머리를 물들이고 팔에 문신을 새긴 젊은 여성도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자취를
찾아 부강까지 오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고 했다. 나이도 차림새도 제각각인 이들을 이 작은 면 소재지
까지 불러들이는, 가네코 후미코는 누구일까.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호적
없는‘무적자(無籍者)’였다. 학교에 다녀도 학력을 인정받지 못했고, 국가도 가족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1912년, 아홉 살 후미코는 조선에 사는 고모 집에 양녀로 왔다. 고모 집이 여기 부강에 있었다. 당시 부강은
금강 뱃길이 열차와 이어져 하루 수천 명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철길 위쪽 고지대에는 일본인 부자들이,
아래쪽에는 조선인들이 살았다. 고모 집은 윗마을에 있었다.
그 집에서 후미코는 하녀나 다름없었다. 할머니의 폭언과 매질을 견디며 집안일을 떠맡았다. 헌병 파견소
마당에서는 옷이 벗겨진 조선인이 채찍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서 쫓겨나면 아이는 아랫마을 조선인
들의공동 우물가로 내려갔다.
거기서 한 조선인 아낙이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일본인 눈에 조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지만,
윗마을에서 쫓겨난 이 아이에게는 아랫마을이 보였다.
1919년 봄, 열여섯 살 후미코는 부강에서 만세 소리를 들었다. 훗날 법정에서 그는 그때 “남의 일이라
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솟았다고 했다. 그해 일본으로 돌아간 후미코는 도쿄에서
신문팔이와 식모살이로 고학하다가, 조선 청년 박열의 시를 읽고 단숨에 매료됐다.
둘은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를 꾸렸고,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일왕 암살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사형을선고받았다. 그리고 1926년 7월, 스물셋의 나이로 옥중에서 숨졌다.
2018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다. 일본에도 조선에도
속하지 못했고, 국가라는 틀 자체를 거부했던 사람. 올해가 후미코가 세상을 뜬 지 꼭 100년 되는 해다.

▲가네코후미코 다실’ 벽에 걸어놓은 후미코의 생전 사진. 우동을 먹으러 온 젊은이들이 여기서 후미코를
알고 간다.
닷새 동안 넘긴 토지대장
우동집에서 이규상(68) 가네코후미코 선양사업회장을 만났다. 그가 후미코를 알게 된 건 40대 초반 공무원
시절, 우연히 손에 든 책 한 권 때문이었다. “내 고향 얘기가 나오니까 관심이 갔는데,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인물이었어요.” 불쌍해서가 아니라 매력적이어서…. 그 말이 오래 귀에 남았다.
2008년 부강면장(당시 청원군 부용면장)으로 부임한 그는 곧바로 후미코 학술대회를 열었다. “우리에게
이런 공간이 있고,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그는 후미코의 자취를 찾았다. 군청 지적과에서 1920년대 토지대장을 뒤진 지 닷새 만에 후미코가 얹혀
살던 고모부 집 주소를 찾아냈다. 그걸 지금의 지도와 대조해 집터를 알 수 있었다. 부강역 뒤쪽 150m쯤.
정원 딸린 집의 대문과 언저리가 후미코가 살던 자리다. 팻말 하나 없다.
이 회장은 기념관을 짓고 싶었다고 했다. “기념관이나 뭐 그런 걸 만들고 싶었는데, 결국 아들이 만든 공간
에 자리를 잡았어요
아들 형제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에 5층짜리 연립주택을 올렸고, 1층에다 협동조합 이름으로가게
를 내고 아버지가 20년 넘게 붙들고 있는 후미코를 기억하는 다실을 만든 것이다. 다실에서는 일본에서
6개월 동안 우동을 배워 온 작은아들 혁진(34) 씨가 우동을 팔고 있다.
아들의 우동은 서울까지 소문이 났다. 젊은이들은 우동을 먹으러 왔다가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후미코라
는 이름을 처음 알고 간다. 후미코를 아는 이들은, 부강에 이런 곳이라도 있어 고맙다며 일부러 찾아온다.
의무감이 앞선 기념관은 관심이 식으면 잊히고, 여행상품은 지원금이 끊기면 없어진다. 이 우동집은 제힘
으로 너끈히 굴러가며 한 사람의 기억을 떠받친다. 한 사람의 삶을 기념하는 이른바 ‘지속 가능한
방식’이다.
세종에서 만난 건 이런 것들이었다. 창경원에서 먹은 수학여행 도시락, 펜스 안 돌 위에 놓인 분홍 바가지,
팻말 하나 없는 대문. 누가 붙들지 않았다면 진작 흩어졌을 것들이다.
그걸 붙든 건 옛 신문을 뒤져 수학여행 사연을 찾아낸 마을기록가, 왕의 물 곁에서 늙어가는 노부부, 닷새
동안 토지대장을 넘긴 면장, 그리고 아버지가 20년 넘게 붙든 이름을 간판에 내건 아들이다.
미래는 넘치는데 어제가 모자란 도시. 도시의 내일을 보러 간 세종에서 정작 오래 발길을 붙든 건 어제였다.

◆신식 장승’의 정체
세종 전의면 읍내리 북암천 변의 전의성당 옆에는 시멘트로 만든 ‘신식’ 장승이 있다. 알록달록 색까지
칠해 무속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1970년 무렵 아들 낳기를 원하던 부부가 시멘트 10포대를 사서 기술자에게 부탁해 만들어 본디 목장승
이 있던 자리에 세웠다.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방치된 장승을, 이번에는 부동산업을 하던 이가 큰돈을 들여 채색했단다.
그것도 색이 다 바랜 뒤에 서울 대학생의 마을 담벼락 그리기 자원봉사 과정에서 새로 그렸다.
'▣新八道(신팔도)***紀行錄 > ⊙충남 대전****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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