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 소문나면 곤란한데...

신령이 노닐던 땅, 경주 낭산(狼山) ‘왕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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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진평왕릉 7㎞

▲경주 낭산 소나무숲 너머로 선덕여왕릉이 보인다.

 

야산과 들녘, 바다와 강마다 길이 없는 곳이 없다. 바위틈에 산책로가 있고,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길도 있다. 수많은 길 가운데 걷기 좋은, 할 이야기가 많은, 그러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는 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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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지인마다 좋은 길을 추천받으며 후보군을 추리던 때, 경주에서 나고 자란 지인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경주에 낭산이라고 있는데.” 순간 고민했다. ‘경주 남산’을

잘못 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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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없는 대화창에서 마음을 읽었는지 다시 메시지가 꽂혔다. “남산 아니고 낭산.” 습관

처럼 당장 그 낯선 이름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했다. 당돌한 사이트는 제멋대로 ‘남산’

으로 고쳐 찾은 내용을 띄운다. 아직 소문이 덜 난 곳은 분명하다.

▲경주 낭산의 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진평왕릉 7㎞ 구간.

 

시작부터 갈림길이다. 입구로 되돌아가 ‘사천왕사지’를 보고 산을 오를 것이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것이냐. 큰 의미는 없다. 걷다 보면 결국 다 이어진다. 사천왕사와

선덕여왕의 관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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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단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중심

인 수미산 중턱에 있는 도리천. 사천왕이 지킨다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 리 없는 신하들

의 어리둥절한 물음에 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 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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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고 30년 뒤에 낭산의 들머리, 왕릉의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덕여왕의 세 가지 선견지명 중 하나란다. 자기실현적 예언이다.

▲경주 낭산 입구에 있는 선덕여왕릉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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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은 남경주 나들목(IC)에 내려, 불국사를 지나 경주 중심가에 다다르기 전에

있다. 나지막한 낭산은 그 이름보다 정상에 자리한 선덕여왕릉이 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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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에 선덕여왕릉 표지판은 있어도 낭산은 없다. 주차장 이름도 선덕여왕릉

주차장이다. 주차장 한켠에 있는 화장실은 소박하지만 소중하다. 앞으로 1시간

동안은 보기 힘들다.

▲경주 낭산 아래 있는 사천왕사지 가운데 서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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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는 말 그대로 절터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찰이라

는데, 황량한 터를 지나면서 그 규모만 가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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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이 지키는 도리천, 그곳에 잠든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은 한겨울에도 푸르다.

앙상한 나무들이 애처롭기까지 한 주변과는 다르다. 우거진 소나무 덕이다.

▲경주 낭산 입구.

 

이곳 소나무에는 아직 재선충병이 창궐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복 받은 땅’이

다행히 지켜지나 보다.

 

실성왕 12년, 낭산에 누각처럼 생긴 구름이 일어난 것을 본 왕은 신령이 내려와 노니

는것이라 여기고, 이후로 이 산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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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여기 나무들이 좋네.” 산을 내려오다 입구에 적힌 안내문을 보던 한 중년

이 말했다. 오를 때는 보지 못했나 보다.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

 

낭산은 산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나지막한 구릉이다. 소나무 사이로 적당히

경사진 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선덕여왕릉에 이른다. 볕이 잘 드는 곳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곳만 구멍이 뻥 뚫려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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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살아서도 한 몸 편히 지낼 곳이 없는 만민이 스친다. 죽어서도 이 넓고 양지

바른땅을 차지한 왕의 핏줄이 새삼 심술스레 꽂힌다.

▲경주 낭산 정상부에 있는 선덕여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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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안쓰럽기도 하다. 최초의 여왕은 살아있는 동안 늘 그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재위

중에 백제와의 전쟁에서 낙동강 서쪽 지역을 잃으면서 그 위기는 정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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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비담이 일으킨 반란 속에 세상을 떠난 그의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비담. 익숙한 이름이다. 2009년 문화방송(MBC) 드라마 ‘선덕여왕’

에서 배우 김남길이 연기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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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선덕여왕보다 악역인 미실이 더 눈길을 끌었던 드라마다. 이 드라마가 인기몰

이를 하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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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에 대한 관심도 반짝했지만, 금새 시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분 만에 도착한

선덕여왕릉에서 한참 방황했다.‘이게 다야?’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 뒤편에 능지탑지로 가는 길 이정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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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도착한 이들이 되돌아가고, 뒤이어 온 이들도 발길을 돌리던 참이다. 왕릉 뒤쪽

으로 ‘능지탑지’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마른 솔잎과 흙으로 뒤덮인 길이

희미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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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길은 아니다. 해우소도 없고, 목을 축일만 한 곳도 없다. 짧은 숲길을 따라

걷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 길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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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오던 이에게 물어본다. “낭산은 어디까지인가요?” 동네 마실을 나온 가벼운

옷차림새의 그는 왠지 이 일대를 훤히 꿰뚫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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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전부 다 산이지.” 그가 자신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아무렇게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이다. “이쪽으로 쭉 가면 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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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길을 거듭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확신의 끄덕임을 남기고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멀어졌다.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에서 능지탑지로 가는 소나무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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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하고 걷다 보니 또 갈림길이다. 일단 ‘능지탑지’란 이름을 따라 왔으니 왼쪽으로

꺾었다. 본래 5층탑이었을 능지탑은 신라 문무왕을 화장한 곳으로 추정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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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은 왕릉을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라며 화장을 지시했다고 한다.

실용적인가 싶다가도 산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하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동해 용왕이 됐다는 전설의 주인공답다.

▲경주 낭산자락에 있는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된다.

▲바위에 새겨진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능지탑 터를 지나면 중생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사찰 안쪽 바위에서 낭산 마애

보살삼존좌상을 만날 수 있다. 가운데 지장보살이 온화하게 웃고 있고, 좌우로

무장한 수호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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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이 거칠어 삼존상을 뚜렷하게 보기는 힘들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보다 한발

떨어져 보는 게 더 낫다.

▲경주 낭산 둘레길을 따라 진평왕릉으로 가는 길.

 

걸어온 길을 되돌아간다. 갈림길에서 이번엔 오른쪽이다. 산불에 취약한 겨울, 낭산은

더이상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보도블록으로 바닥이 잘 포장된 길을 따라 걷는다. 살짝 올라가는 길인가 싶더니

내리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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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히 뚫린 시야가 시원하다. 백이들과 보문들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논이다. 곧 있으면

모내기를 할 것이다. 여름이었다면 논두렁의 찰방찰방한 물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가을이었다면 보기만 해도 풍요로운 황금들판일 터였다.

▲경주 낭산 들머리를 빠져나오면 백이들과 보문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들녘이

끝나는 곳에 진평왕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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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진평왕릉이 보인다. 들녘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 시간은 평온하다. 오르락

내리락도 없다. 완만하게 굽이진 길은 기울어짐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가올 수확을

위해 쉼의 시간을 보내는 땅은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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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기계 바퀴자국이 선명한 길을 따라 걸으며 옆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나무에나란히 걸터앉은 까치와 까마귀가 추임새를 넣는다. 텅 빈 논을 보며 배가

고프다고 투정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주 진평왕릉과 주차장을 잇는 작은 나무다리.

 

선덕여왕릉이 낭산 정상에 홀로 외로이 있다면, 그의 아버지 진평왕의 능은 좀 더 따뜻한

분위기다. 다른 왕릉처럼 모여있지도 않은데, 사람들과 함께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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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 마을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카페도

있다. 죽은 이의 무덤이 산 사람의 공간과 어우러져 있다.

▲아름드리 나무들로 둘러싸인 경주 진평왕릉 주변으로는 산책로가 아기

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다.

▲경주 진평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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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릉은 나들이하기 좋은 곳으로 이미 유명하다. 아름드리 고목이 작은 숲을

이루는 왕릉 주변에는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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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도 있다. 봄이면 벚꽃이 예쁜 곳이다. 숨겨진 벚꽃 명소

를 소문내는 마음이 괜히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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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길을 돌아 다시 선덕여왕릉으로 간다. 오던 길과 다른 길을 걸으려니 꺾이는

길이꽤 거칠다. 왕이 될 운명인 딸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이리도 어지러

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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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아버지의 곁에 머물고 싶어 낭산을 택한 딸의 마음이 교차한다. 올 때

마음이 갈 때의 그것과 다르다.

▲진평왕릉에서 선덕여왕릉으로 돌아가는 길에 낭산과 그 아래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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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이 다시 가까워졌다.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경주시가 사들여 더는 경작하지

않는 땅 너머로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보인다. 신라 효소왕이 아버지인 신문왕

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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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돌아 석탑을 가까이 보려다가 멈춘다. ‘아서라, 때론 멀리서 보는 게 좋을

때도 있다.

 

숨이 찰 리 없는 속도로 천천히, 넉넉하게 왕복 2시간 정도 걸린다. 선덕여왕릉

과 진평왕릉 인근에 모두 주차장이 있다. 어느 쪽부터 걸어도 괜찮다.

▲경주 낭산의 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진평왕릉 7㎞ 구간

영국 국교 성공회 소속이 아닌 로마 가톨릭 소속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카톨릭 대성당( 파사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은(Westminster Cathedral)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교좌 성당이다. 1895년에 착공되어 1903년에 완공이 된 성당이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가톨릭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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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의 영국 국교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과(Westminster Abbey)는 구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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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는 빅벤과 국회의사당 그리고 영국 왕실의 결혼식 장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

과는 다른 성당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은 빅토리아 스트릿 근처에 있다. 런던

에서 유일하게 주황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성당 위치도

▲잉글랜드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웨스트민스터 카톨릭 대성당(Westminster Cathedral)▼

정감록(鄭鑑錄) "으뜸 피난처"ㅡ혼돈의 시대마다 이곳은 삶을 품어 주었다.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재난이 들지 않는 땅’으로 지목된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는

솔숲 사이로 숨겨진 계곡이 있고, 그 계곡을 굽어보는 자리에 정자 금선정이 있다. 퇴계의 제자

인 금계 황준량이 소요하던 그윽한 자리에다 훗날 그를 기려 지은 정자다.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과 격암유록의 기록대로 여기가 과연 삼재(三災) 불입(不入)의 명당

이자‘사람을 살리는 땅’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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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도, 흉년도, 전염병도 들지 않는다는 땅.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이곳

은 소백산 아래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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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절망과 비탄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명당을 찾아 들어왔던 이들이 있고, 맑은

계곡을 굽어보면서 풍류를 완성한 그림 같은 정자도, 달빛의 이름을 걸어놓은 누각의 절집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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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고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비석으로 일으켜 세운 사랑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만

나면서 좋은 땅의 기운과 거기에 걸맞은 좋은 삶을 생각합니다.

 

◆정감록이 예언한 명당…금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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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의 풍기. ‘풍기’ 뒤에는 바로 ‘인삼’이란 단어가 입에 착 달라붙지만, 사실 풍기에서

인삼보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이 ‘정감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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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은 조선 시대 세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다. 이 책에는 난세와 병란을 피할 수 있는 땅

열 곳, 그러니까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순서대로 소개돼 있다.

 

정감록에 따르면 우리 땅에서 ‘능히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열 곳(十勝) 중에서 첫 번째

(一勝)가 바로이곳 풍기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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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불리는 격암 남사고는 예언서 ‘격암유록’에서 풍기가 병풍

처럼 두른 소백산을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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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가 나돌기 이전부터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으로 가득한 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위로는 소백산의 으뜸 봉우리인 비로봉과 연화봉, 도솔봉이 두르고 있는 데다,

이 세 봉우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금계천과 남원천, 두 개의 물줄기가 발을 적시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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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풍수의 창시자로 꼽히는 신라의 도선국사. 그는 7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지은 풍수책

‘도선비기’에서 최고의 명당 터로 소백산 아래 풍기 땅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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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도참 사상이 지배하던 고려에는 ‘산천비보도감’이란 독립기관이 있었다. 전국의 명산

대천을 답사해 최상의길지를 찾아내는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산천비보도감이 찾아낸 길지에 왕손의 태를 묻었다. 길지에 풍기 땅이 꼽히지 않았을 리 없다.

처음고려 충목왕의 태가, 그리고 이후에 조선 문종과 사도세자의 태가 차례로 풍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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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지의 중심은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다. 금계란 이름은 ‘금빛 찬란한 닭이 알을 품었다’

는 이른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지세에서 따온 것이다.

 

금계란 이름은 금계리 뒤편 소백산 자락에도 있다. 풍기읍에서 소백산 쪽으로 더 들어간 자리

의 산정에는금계 바위가 있다.

 

닭의 볏을 닮은 두 개의 바위인데, 닭의 눈이 있는 자리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어느 날 보석이 탐이 난 나그네가 바위에 올랐다가 천둥과 벼락을 맞아 죽고 말았고,

보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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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리가 정감록이 말하는 ‘재난이 들지 않는 땅’이란 소문이 돌면서, 난리가 있을 때마다 이

골짜기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제강점기에도, 6·25 전쟁통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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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리 주민 중 열에 여덟, 아홉은 정감록을 믿고 찾아온 이들이거나 그들의 후손이라고 했다.

특히 이북에서 온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평안도 출신이 가장 많았고 황해도, 함경도

순이 었다고 주민들은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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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의 비결을 찾아든 이들에게 십승지지는 꿈꾸던 이상향이었으되, 그 희망은 힘차거나

밝은 것이 아니라 측은하고 안쓰러운 쪽에 더 가까웠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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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에 마지막으로 붙잡은 위태로운 실낱처럼…. 얼마나 많은 실의와 도탄이 제

살던 자리를 떠나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활짝 열린 정자 위 빗자루....쉬다 단정히 가시게 말하는듯

▲ 소백산 연화봉 남동쪽 능선 중턱의 금계 바위.수탉의 벼슬을 닮은 바위는 십승지지

(十勝之地) 중에서도 가장길지로 꼽히는 금계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정자 마루에 빗자루를 놓은 까닭

 

금계리는 다른 시골 마을과 별다를 게 없다. 최고의 풍수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니 믿을

뿐이다. 풍수의 빼어남은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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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 리 마을 한복판에는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 ‘한국 천하 명당 십승지’라 새긴 비석이 있다.

지도위에 전국의 십승지를 표시한 바위도 놓여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토록 평범한 시골

마을을 누가 천하 명당이라 짐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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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보기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마을이지만, 금계리 마을 안으로 깊이 들면 ‘비경’이라

할 만한 경관이 있다. 소백산 아래로 흘러내린 물이 금선계곡을 이뤄 지나가는 자리.

그 계곡의 솔숲 사이에 정자 ‘금선정(錦仙亭)’이 있다.

 

정자는 금선계곡의 계곡미를 단번에 완성하는 화룡점정과도 같다. 계곡 옆으로는 먹을 듬뿍

찍어 붓질로 그린 것처럼 굵고 힘찬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계곡 아래로는 옥계청류(玉溪

淸流)가 흘러내린다. 금선정은 그 물을 내려다보는 바위 금선대 위에 올라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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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활짝 열어 둔 금선정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빗자루였다. 정자 누마루 한쪽에 빗자루 두

개가 놓여 있다. 하나는 마당을 쓰는 싸리비이고, 다른 하나는 마루를 쓰는 갈목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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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를 놓아둔 뜻은 짐작대로다. 내키는 만큼 앉았다 갈 때, 일어선 자리를 단정하게 정리해

달라는 의미. 다시 말하자면 빗자루는 오가는 길손들에게도 기꺼이 정자 마루를 내어주

겠다는 푸근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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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정 위쪽에는 정자가 또 하나 있다. 주차장 한쪽에 마을 주민들의 휴식을 위해 세운 듯한

계양정이다. 계양정은 정자보다 정자 앞에 몸을 한껏 기울여 자라는 굵은 소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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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둥치의 소나무 형상이 마치 붉은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날아가는 듯하다. 계곡 양쪽

으로 늘어선 소나무들도 기꺼이 명품이라 불러줄 만하지만, 정자 앞의 소나무야말로

‘명품 중의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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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는 금선정에도, 계양정 마루에도 있다. 그 빗자루 덕에 활짝 열어둔 정자의 반들반들한

마루에 누구나 편히 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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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한가운데, 금선정 정자 마루에 앉아 명품 소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비 오는 계곡을

굽어보거나, 목침을 베고 누워 책장을 넘기며 빗소리를 듣는다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다 나른해진다.

 

◆스승이 제자를 ‘선생’이라 부르다

▲ 순흥면사무소 인근의 봉도각 주변 연못에 피어난 수련과 소백산의 오지마을

달밭골의 깊은 숲에서 만난 큰까치수영.

 

정자 마루에 앉았다면 서늘한 바람 속에서 이 정자가 기리는 이의 행적을 짚어보자.

금계 황준량. 그는 마흔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뜬 조선의 문인이자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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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 전쯤 그가 이 계곡을 소요하면서 걸터앉기 좋은 바위에 ‘금선대’란 이름을

붙였고, 훗날 그 바위 위에다 그를 기리는 정자, 금선정을 지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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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량은 스물네 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른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이들을 일러 신동

(神童)이라 했는데, 황준량을 일컬어서는 ‘기동(奇童)’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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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할 정도’로 뛰어났다는 뜻이다. 호조·병조 좌랑을 거쳐 경상도 감찰어사, 단양군수,

성주목사를 지냈다. 그럼에도 그를 아는 이들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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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누구였는가는 스승인 퇴계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미뤄서 짐작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죽은 뒤 그 사람의 일대기를 적은 것을 ‘행장’이라 하는데, 퇴계가 일생 동안

지은 행장은 7편에 불과하다.

 

이러저러한 인연을 내세워 당대의 석학인 퇴계로부터 글을 받으려는 민원이 쇄도했을

것임에도 그렇다. 명종 임금과 아버지를 빼고 나면 퇴계가 행장을 지어 삶을 기록한

인물은 고작 다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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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이현보, 충재 권벌,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그리고 풍기의 금계 황준량이 있다.

​제자의 죽음에 행장을 쓰는 스승은 거의 없다. 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계는 황준량의 죽음을 슬퍼하며 손수 지방을 써 붙이고 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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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돌에 새길 글씨도, 애통함을 담은 만사(輓詞)도, 제문(祭文)도 썼다. 추모사의 문장

한 줄 한 줄에서는 비통함이 뚝뚝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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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은 퇴계가 추모사에서 열여섯 살이나 어린 황준량을 ‘선생’이라 적었다는 것

이다. 어찌 스승이 제자에게 선생이라 할 수 있었을까. 당대의 사건이었다. 이런 퇴계

의 파격적인 처신은 후일 조정에까지 알려져 실록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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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만이 아니었다. 퇴계는 황준량이 남기고 간 글을 모아서 문집을 출간했다. 이어 황

준량이 생전에 지으려 했던 서당 겸 거처인 금양정사를 짓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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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짓고는 관리를 스님에게 맡겼는데, 그 스님이 자주 부역에 불려 다녀 관리가 허술

해지자, 퇴계는 풍기군수에게 금양정사를 지키는 스님의 부역 면제를 탄원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무밭에서 무 뽑듯, 달밭에서 달을 뽑다

▲ 소백산 아래 순흥에는 ‘봉서루(鳳棲樓)’가 있다. ‘봉황이 깃든 누각’이란 뜻이다.누각

앞에다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둥근 바위를 가져다 둔 건, 알을 두고 봉황이 날아가지

않으리란 믿음 때문이다.

 

황준량은 생전에 984수의 시를 남겼다. 그가 남긴 명문 중의 명문은 시가 아니라 그의 나이

마흔한 살에 명종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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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수로 재임 시절 적폐로 신음하는 단양 주민들의 삶을 절규하듯 토한 황준량의 상소문

이 바로 ‘단양진폐소’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고통스럽게 합니까. 이슬을 맞으며 깊은 산속에 살고, 승냥

이, 살무사에 죽더라도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미처 슬퍼하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

​

”이 글이 명문인 것은 읽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명종은 상소문을 받아들고 단양에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해주는 혜택을 내렸다.

 

과중한 공물을 바치느라 피폐할 대로 피폐했던, 그래서 산속으로 숨어갈 수밖에 없었던 백성

들은 황준량이 얼마나 고마웠을까.벼슬살이하는 동안 황준량의 마음은 늘 금선계곡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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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쓴 황준량 행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매번 벼슬에 뜻을 빼앗기고 관청의 사무로

괴로움을 당해 병이 깊어진다고 여기고, 어느 날 바람처럼 벗어나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병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풍기로 돌아오던 중 그는 그만 예천에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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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정 뒤편의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몇 굽이 올라서면 홀로 마을 뒤로 물러선 집, 금양

정사가 있다. 금양정사는 황준량이 터를 닦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에야 세워졌다.

 

사랑채 격인 금양정사 옆으로 나란히 안채를 지었는데, 안채의 현판에 건 편액이 영월헌

(迎月軒)이다. 뜻으로 풀면 ‘달을 맞이하는 추녀’다.그러고 보니, 소백산 비로봉 아래에

붙여진 이름에 온통 달(月)이다.

​

금양정사가 영월헌을 걸었고, 소백산 삼가탐방지원센터에서 걸어서 30분이면 닿는 비로봉

아래 절집 비로사에는 월영루(月映樓) 현판을 달았다. ‘달이 비치는 다락’이란 뜻이다.

​

거기서 다시 산정을 향해 가파른 비탈을 더 오르면 소백산 아래 첫 동네 달밭골이 있다. ‘달밭

(月田)’이라. 마을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에서는 달을 미래의 희망으로, 또 지혜로 풀었다.

​

그리고 달밭골을 “무밭에서 무를 뽑듯, 달밭에서 달을 가꾸어 뽑는 곳”이라 적어두었다.​그러

나 실상은 다르다. 달은 산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가파른 산자락에 다닥다닥 붙은 다락 모양

의 산중의 밭이 있다고 해서 달밭골이라 했을 것이었다.

​

이름의 연원이 다르대도 어떨까. 달랑 네 가구가 사는 산중 오지마을 달밭골의 달빛은 휘영청

밝을 테니 말이다.

 

​◆시인의 집에 세운 마지막 시(詩)

▲ 소백산의 죽계구곡의 물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노거수. 상처에 돋은 덧살과

옹이가나무가 지나온 시간을 보여준다. 소백산의 깊은 골에는 이런 기운이

스며 있다.

 

연화봉과 비로봉,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소백의 능선은 금계리에서는 잘 안 보인다. 소백의

산줄기는 금계리에서 자수 고개를 살짝 넘으면 닿는 마을 백리에서 더 잘 보인다.

 

금계리에서 자수 고개로 내려서는 길. 소나무와 사과나무를 심은 진초록 정원을 가진 집

마당에 비석 두 기가 서 있다. 둘 다 시를 적은 시비(詩碑)다. 시비에 새겨진 ‘아내에게’란

제목의 시에 눈길이 갔다.

​

“…가난한 내 가슴을 / 난초인 양 다스리고 / 깊이 모를 눈빛으로 / 금 간 꿈도 때우더니

/ 지금은 이 지아비를/신주처럼 지켜선 당신.”

​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사과농사를 지었던, 그러면서도 늘 시를 놓지 않았던 시인이 있었다.

두 해전 작고한 고 김순한 시인. 안동이 고향인 그는 1962년 결혼 직후 아내와 이곳 풍기

땅으로들어와 과수원집에서 머슴을 살았다. 꼬박 3년 머슴살이로 모은 돈으로 남의

땅을 얻어 농사를 시작했다.

​

한 해 한 해 땅을 늘려 그 흔한 경운기 한 대 없이 5000평이 넘는 사과밭을 일궜다. 평생

담배도,술도 손대지 않고 몸이 부서져라 농사를 지었지만, 정작 그는 돈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

사과를 거두고도 한 번도 사과공판장에 나가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대신 그는 책을 한시

도 놓지 않았다. 사과밭에 갈 때도 책을 챙겼다. 농사를 지으면서 그는 시인이 됐다.

​

시인의 집 마당 비석에 새긴 시 ‘아내에게’는 시인이 일흔아홉 나이로 숨지기 한 해 전쯤,

그러니까 병이 깊어져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기 직전에 쓴 시다.

​

그가 집을 두고 요양원으로 갔던 건, 아내도 그 무렵에 대장암 판정을 받아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양원에 가기로 정해진 날, 시인은 아내 강혜영(79)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내가 (당신에게) 잘해준 게 하나도 없네. 고생했네…수고했네….” 그리고 시인은 더 늦기

전에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비석으로 세웠다. 한 사람의 최선을 다했던 삶과 진심을 다한

사랑이 그 비석에 새겨진 것이었다.

​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찾아 소백산 아래 풍기로 찾아들었던 이들이 꿈꾸었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이곳에서 그 꿈을 이뤘을까. 십승지지에는 재난이 들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어디 진짜로 그랬을까

 

젊어서 지긋지긋했던 가난 속에서 농사와 시를 함께 지으며 살아온 생활은 얼마나 고단했을

것인가.그때를 돌아보면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시인의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돌아보면, 참 평화로웠던 시간이었다.

 

벼랑 끝에 선 암자·100년 한옥 책방…공들인만큼 마음 가는 ‘지리산 고을’

▲경남 산청 둔철산 자락의 암자 정취암. 암자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웬만한 절 못잖은 규모다.

암자가 세워진 자리는 상서로운 기운이 금강산 못잖다고 해서 한때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동쪽으로 낮게 엎드리는 자리에 산청이 있다. 남덕유

산에서 내려온 물과 지리산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 경호강이 되고, 강은 100리를 굽이돌며

고을 한가운데를 지난다. 가을이면 그 물길을 따라 들판이 누렇게 익고, 산자락마다

억새가 하얗게 일어선다.

 

산청(山淸). 이름부터 ‘산이 맑은’ 고을이다. 산청을 이야기할 땐 흔히 천왕봉과 대원사계곡,

동의보감촌 같은 이름난 명소부터 꼽는다.

 

하지만 이 가을 산청에서 오래 눈에 밟힌 건 화려하게 꾸민 것들이 아니었다. 전기 패널 대신

아궁이를 남긴 한옥이그랬고,다랑논에서 돌을 골라내 연못을 일군 절집이 그랬다.

 

하나같이 사람의 손이 오래 머문 곳들이다. 꾸미는 일과 공들이는 일은 다르다. 꾸밈은 눈길

을 끌지만, 공들임은 마음을 붙든다. 산청에서 그 차이를 새삼 알게 됐다.

 

◆뜯길 위기의 한옥을 내다

 

강인석(60) 씨가 한옥을 보러 간 날, 마당에는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진주 인사동에서 왔다는

골동품상이었다. 진주에도 인사동이 있다. 서울 인사동처럼 골동품상과 고미술상이 모여

있는 거리다.

 

골동품상이 겨누고 있던 건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마을의 한옥이었다. 한옥은 ‘투트랙’으로

나온 매물이었다. 집주인 어머니는 집을 통째로 팔려 했고, 아들은 집을 뜯어 팔 궁리를 하고

있었다.

 

기둥과 대들보, 문짝과 마루널이 골동품이 될 만큼 고풍스러웠다. 강 씨는 그날 부랴부랴 계약

서에도장을 찍었다. “계약을 안 하면 이 집이 뜯기겠구나 싶었지요.”

 

이 한옥이 뜯겨 나갈 뻔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원래 충남 부여에 있던 집

을뜯어다이곳에 다시 세웠다. 부여에서 처음 지어진 게 1890년대쯤으로 추정된다.

 

단계로 옮겨 온 집은 순천박씨 재력가 집안이 여름 별장처럼 쓰다 오래 비워 둔 터였다. 한 번

뜯겨 옮겨 온 집이, 백 년을 넘겨 또 한 번 뜯겨 나갈 뻔했던 것이다.

 

강 씨는 책방을 하려고 오래 한옥을 찾아다녔다. 전국을 돌며 숱한 집을 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은 드물었다. 그러다 만난 게 이 집이었다. 2022년 5월, 집은 카페 ‘소북(素北)’과 책방

‘밀당’이 됐다.

 

마을 사람들은 다 말렸다. 이 시골에 무슨 카페 손님이 오겠느냐고, “그냥 딸기 농사나 지으라”

고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단계는 딸기로 이름난 마을이다. 그 마을 한복판에서 딸기 대신 커피

를 내리 겠다고 했으니 걱정이 앞설 만했다.

 

소북의 ‘소(素)’는 꾸밈없음이다. 다들 바닥에 전기 패널을 깔라고 할 때 강 씨는 아궁이를 남겼

다. “한옥은 한옥답게 남아야지요.” 툇마루 밑엔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웬만한 건 제 손으로 고치려고 한옥 소목 일까지 배웠다. 한옥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라고 했다. 꾸밈은 덜어냈지만, 손은 그만큼 더 갔다.

 

대문을 들어서면 잔디 마당에 디딤돌이 두 줄로 놓였고, 빨강·노랑·초록 나무 의자가 나란히

손님을기다린다. 대청에 오르면 휘어진 통나무 대들보가 다듬지 않은 생김새 그대로 머리

위를 가로지른다.

 

서까래도 굵기가 제각각이다. 반듯하게 켠 목재로는 낼 수 없는 표정이다. 마당 한쪽엔 헌 기

와가 켜켜이 쌓였다. 본채 옆으로 돌아가면 소나무 한 그루를 끼고 앉은 하얀 별채가 나온다.

 

접이식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힌 별채 안에도 책장이 빼곡하고, 소나무 그늘엔 빨간 파라솔이

펼쳐져 있다. 한옥과 단정한 시멘트 건물이 정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는데, 둘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을 받아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수국 곁 바위 위에서 몸을 말고 조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다. 오후 한나절이 거기서 다 간다.

▲산청 단계마을의 한옥 북카페 소북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책방 ‘밀당’. 책마다 책방

주인이 정성스럽게 쓴 서평 혹은 추천사가 붙어 있다. 이 정도의 애정과 노고는

‘책을 파는 것’ 너머의 일이다.

 

◆잘 팔리는 책은 들이지 않는 책방

 

한옥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책방 ‘밀당’에선 놀랄 일이 하나 더 있다. 진열대의 책마다 노트

반 장만 한 메모지가 붙어 있다. 부인 최명옥(56) 씨가 책을 읽고 손글씨로 빼곡하게 적은

감상이다.

 

노랑, 연두, 하늘색 메모지가 책 표지마다 한 장씩 붙어 있는 진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

이다.메모는 정직하다. 한 소설집에 붙은 메모는 “무슨 얘기인가 했다”로 시작한다.

 

젊은 작가가 그려낸 낯선 세계에 몰입하기 어려워 첫 몇 페이지에서 여러 번 숨을 고르며 겨우

나아갔다는 고백이다. 그러다 끝내 그게 우리 곁에 사는 사람 이야기였다는 걸 알게 됐다고

적었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에 붙은 메모는 과거나 미래의 행복보다 지금에 집중하게 되는 책이

라고 권한다. 책 한 권 팔자는 마음으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메모만 읽다가 책을 집어 드는

손님이 적지 않다.

 

‘어른의 어휘력’에 붙은 메모가 압권이다. 들여놓기 무섭게 팔려 나가 좀 질려 버렸단다. 다른

책도팔렸으면 하는 마음에 한동안 들여놓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하도 찾아 결국 다시 들여놨

다는사연이다.

 

잘 팔리는 책을 일부러 밀어내는 책방이라니. 책과 밀고 당긴다는 ‘밀당’이란 이름이 메모 한

장으로 다 설명된다.

 

독자들이 산청 여행길에 들고 갈 만한 책을 권해 달라고 하자, 최 씨는 세 권을 꼽아줬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J D 샐린저의 ‘호밀밭

의 파수꾼’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숲속 여름 별장에서 한 계절을 나는 건축가들의 이야기다. 공교

롭게도이 집도 한때 누군가의 여름 별장이었고, 여름은 이제 막 지나갔다.

 

부부가 그리는 이곳의 내일도 최 씨가 책에 적어둔 메모와 결이 같다. “사람을 빨리 불러 모으고

싶은 생각은없어요. 지금처럼 차분하게, 붐비지 않게, 오래 가고 싶습니다.

 

” 강 씨가 꿈꾸는 건 어릴 적 살던 집 같은 곳이다. 지금은 남이 살아 들어가 볼 수 없는 옛집

대신,누구든 들어와 제 기억을 꺼내 보고 갈 수 있는 집. 실제로 오래전 이 집에 세 들어 살았

다는 이가 찾아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하고 갔다.

 

마을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손님은 하나둘 늘었다. 산청군은 마을에 한옥을 지어 부부에게

빌려줬고, 부부는 거기서 북스테이 ‘단계’를 꾸린다. 사람이 사람을 부르기도 했다.

 

종가로 돌아올지 망설이던 한 화가 종손이 소북에 들렀다가 강 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무조건 오시라, 같이 좋은 마을을 만들어 보자”고 했더니, 그가 정말 마을로 내려와

갤러리를 열었다.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 남명 조식이 학문을 닦던 곳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덕천서원.

 

◆느슨하고 심심한 골목

 

카페를 나서거든 마을 골목을 걸어 볼 일이다. 단계마을엔 한옥이 많다. 그렇다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즐비한 건 아니다. 말끔한 신식으로 손보지 않아 좀 누추해 보이기도 하는

‘진짜’ 한옥들이 양옥과 두서없이 섞여 있다.

 

강 씨는 이곳을 “요즘 보기 드문 진짜 시골”이라고 했다. 이끼 낀 돌담이 골목을 따라 이어

지고, 담벼락엔 새마을운동 시절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시골도 예전의

시골이 아닌요즘, 단계 골목에선 시간이 반 박자쯤 느리게 간다.

 

골목 안쪽엔 400년 넘은 서원도 하나 숨어 있다. 1614년 동계 권도를 모시려고 세운 완계서

원이다.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강당부터 다시 지었고, 1985년에야 지금 모습

을 되찾았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서원이 마을 집들 사이에 섞여 제 나이를 내세우지 않고 앉아 있다.

이채로운 건 단계초 교문이다. 기와를 얹은 솟을대문이 교문이다. 현판엔 ‘삭비문(數飛門)’

이라 적혔다.

 

어미 새가 새끼에게 나는 법을 거듭 가르친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날마다 그 문을 드나들며

날갯짓을 배운다.마을 들머리 논가엔 지난해 세운 ‘단계딸기 유래비’가 서 있다.

 

1985년 마을 사람 셋이 처음 딸기 농사에 뛰어들었다. 몇 해를 실패하고 전국을 돌며 배운 끝

에 재배에성공했고, 일본과 네덜란드를 찾아가 배워 온 기술로 지금의 단계딸기를 일궜다고

새겨져 있다.

 

40년 만에 젊은 세대가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다는 대목에선 마을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강 씨

에게 “딸기 농사나 지으라”던 이웃들의 말이 핀잔이 아니라 진심 어린 권유였다는 걸, 이 비석

앞에서 알게 된다.

 

단계 골목의 매력은 느슨하고 심심하다는 데 있다. 볼거리를 줄 세워 놓지도 않았고, 걷는

이를 재촉하는 것도 없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들판이 시작되고, 들판은 가을볕에 누렇게

익어 간다. 그 너머로 딸기 하우스들이 줄지어 있다. 뒷짐 지고 걷기 딱 좋은 계절이다.

▲정취암의 산신각 뒤쪽 바위벽에 걸어 놓은 산신탱화. 탱화 앞에다 호랑이를 탄 산신 석상을 놓았다.

 

◆법어 아래 놓아둔 모기약

 

단계에서 멀지 않은 같은 신등면 대성산 벼랑 위에 정취암이 있다. 암자 뒤까지 차로 오를 수

있지만, 벼랑에 제비집처럼 붙은 암자를 올려다보며 걷는 산길도 20분 남짓이면 된다. 입구는

좁고 들어갈수록 넓어진다. 풍수에서 기운이 머무는 자리로 치는 ‘전착후관(前窄後寬)’

의 지형이다.

 

암자는 소박하다. 원통보전과 삼성각, 정취전 몇 채가 벼랑에 기대 옹기종기 앉았다. 바람

소리와목탁 소리가 지나가는 원통보전 처마 아래 현수막이 걸렸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선 그 자리가

곧 진리라는 임제 선사의 말이다. 바로 아래 화이트보드엔 손글씨로 ‘모기 물린 데 바르는

약’이라고 적혀 있다.

 

아무나 가져다 쓰라고 내놓은 약이다. 절집에선 이것도 보시다. 천 년 묵은 법어 아래 모기

약이 놓인풍경이 어떤 법당 장식보다 정겹다.

 

원통보전 안엔 50㎝쯤 되는 목조 관음보살이 앉아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인데, 작고

아담한 몸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법당을 나와 고개를 들면 큰 바위 위에 거북 두 마리가

나란히 엎드린 듯한 쌍거북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에 빌면 부부 금실이 좋아지고 자손을

얻는다고 했다.

 

삼성각 뒤엔 1833년에 그렸다는 산신탱화가 있다. 호랑이를 탄 산신이 어디론가 행차하는

그림인데, 그 앞엔 호랑이 탄 산신을 돌로 깎은 석상까지 앉혀 놓았다. 불교와 토속신앙이

한 마당에서 사이좋게 지낸다.

 

삼성각 곁엔 납작한 책을 포갠 듯한 ‘책바위’가 있다. 조선 초의 도사 문가학이 젊은 시절 이 암자

에서 흰 여우에게 둔갑술 책을 얻었는데, 아홉 장 가운데 여덟 장을 익혔을 때 여우가 마지막

한 장을 이 바위에 숨기고 사라졌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다.

 

여덟 장짜리 도술은 딱 그만큼 어설펐다. 가뭄에 그가 빌어 내린 비는 겨우 먼지를 적실 정도였다

고 ‘조선왕조실록’은 적었다.

 

하늘과 귀신의 군사를 부르겠다며 역모를 꾸민 그는 1406년 저잣거리에서 수레에 매여 찢겼다.

둔갑을 하고도 상투 끝을 감추지 못해 들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꾸민 모습 끝으로 본모습이

삐져나온 것이다.

 

정취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자리는 따로 있다. 삼성각에서 5분쯤 더 오르면 암자에서 가장 높은

정자, 만월정이 나온다. 넓적한 너럭바위 곁에 선 정자다.

 

발아래로 신등의 들판과 마을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합천 삼가와 의령 한우산, 자굴산의 능선이

겹겹이 물결친다.

 

산청 아홉 경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조망이다. 해 뜨는 풍경을 보러 새벽에 오르는 이도 많다.

가을엔 누렇게 익은 들판이 산자락 사이를 가득 메운다. 방금 걸었던 단계의 골목도 그 들판

어딘가에 있다.

▲전(傳)구형왕릉.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산청의

대표적인 명소다.

 

◆공들인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

 

신등에서 산청읍 쪽으로 내려가면 지리산 동쪽 끝 봉우리 웅석봉 아래 수선사(修禪寺)가 있다.

오래된 절이 아니다. 문화재도 없다. 비구니 여경 스님이 30여 년 동안 홀로 일궜다.

 

그 30년의 손길이 절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어디 한 곳 손이 가지 않은 데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원래는 다랑논이었다. 논에서 돌을 걷어내자 웅덩이가 생겼고, 그 웅덩이가 연못이 됐다.

 

거기 연을 심을 요량이었는데, 계곡의 찬물에선 연이 잘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물이 위쪽에서

부터 천천히 데워진 뒤 연못에 들도록 물길을 냈다. 보이지 않는 데까지 손이 갔다.

 

절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돌계단을 몇 개 오르면 사립문이 나온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다. 사립

문이 곧 절의 문이다. 문을 지나면 둥근 연못이 펼쳐진다. 연못가엔 통나무를 깎아 만든 물레방아

가 천천히돌고, 그 곁엔 직선으로 반듯하게 지은 현대식 건물이 한 채 섰다. 3층이 카페다.

 

카페 테라스에 오르면 연못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연꽃은 진 지 오래. 연잎과 수련 잎이 수면을

빈틈없이 덮었고, 그 위로 나무다리가 굽이굽이 돈다.

 

난간은 휘어진 나뭇가지의 생김새를 그대로 살려 엮었고, 다리 위엔 나뭇조각을 겹겹이 얹은 너와

지붕을 얹었다. 반듯한 데가 하나도 없는데, 거슬리는 데도 하나 없다. 아무렇게나 둔 듯 자연

스러워 보이지만, 그렇게 보이게 하는 데 많은 손이 갔을 것이다.

 

찻잔을 앞에 두고 내려다보고 있으면 다리 위를 거니는 사람들이 그림 속 인물처럼 작아진다.

연꽃이 피는 한여름이면 이 연못이 훨씬 더 화사해지겠지만, 꽃이 지고 잎만 남은 가을 연못

에도 고요한 맛이 있다.

▲지리산 아래 중산리 절터에 모셔진 지리산 성모상.???

 

수선사에서는 크고 화려한 건 없다. 소박하되 단정하다. 마당 구석구석, 댓돌 옆, 툇마루

아래까지 흠잡을 데가 없다. 오래 쓸고 닦아 반질반질해진 마루 같은 절이다.

 

들어가면 누구나 감탄하고 나오는 곳이 수선사의 해우소, 곧 화장실이다.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가는데, 바닥엔 물기 한 점 없고 안은 잘 꾸민 카페 같다.

 

그래서 문득 드는 의문 하나. 절을 이렇게까지 가꿔도 되는 걸까.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게 부처의 가르침 아니었던가.

 

그 물음의 답은 절에 들어설 때 이미 지나온 문에 걸려 있었다. 수선사 입구의 사립문

이름이 여여문(如如門)이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금강경’엔 형상에 매이지 않아 있는 그대로 흔들리지 않는다(不取於相 如如不動)는

구절이 있다.

 

가장 공들여 가꾼 절이 ‘있는 그대로’를 문패로 내걸었다.공들였으되 그걸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게 이 절이 보여주는 장엄(莊嚴)이다.

◆지리산 성모상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최단거리 등반코스 출발지점이 산청의 중산리다. 이 마을 작은 절터

에 높이 74㎝의 지리산 성모상이 있다.

 

고려 명종 때 머리가 사라졌다가 찾았고, 황산대첩에서 패전한 왜구의 칼을 맞았다. 1973년

엔 아예 자취를 감췄다가 14년 뒤 진주의 한 과수원에서 머리가, 천왕봉 아래 계곡에서 몸통

이 나왔다.

 

그때마다 누군가 부쉈고, 그때마다 누군가 되찾아 왔다. 다시는 잃지 않겠다며 천왕사는

성모를 바위에 콘크리트로 붙여 버렸다. 성모는 지금도 그 바위에 붙어 있다.

필리핀 이주자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말레이시아의 수상가옥

▲배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선택한 앞에서 두번째 배를 타고 주변을 돌고,

이 아저씨의 집까지 갔었다.

▲말레이시아 전도 /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 육지를 멀리하고 수상가옥을 향해 달려간다.

▲필리핀 이주자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 했나보다.이들은 이곳에서 낳고 죽겠다고한다나?

아파트를 짓고 이주하라고해도 이주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정확한 정보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는거다. 모두들 웃고,

손을흔들어주고...이곳에도 빈부의 차가 느껴졌다. 조금더 깔끔하고 분위기가 있는

집도 있고, 곧 무너질 듯~한 집도 있다.

사이타마현(埼玉縣)

신주쿠에서 약 1시간이면 닿는 에도 시대, ‘가와고에’ 당일치기

▲구라즈쿠리 거리


도쿄와 교토, 이름은 닮았는데 거리는 '너무나 먼 그대'다. 그런데도 두 도시를 함께 떠올

리게 되는 건, 현대와 전통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매력을 각자 쥐고 있어서다. 짧은

도쿄 여행 일정에 교토를 끼워 넣는 건 무리다.

하지만 일본 고유의 정취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방법은 있다. 도쿄 세이부신주쿠역

에서 직통 열차인 특급 고에도로 최단 45분, 왕복 교통비는 1만원이 채 안 되는 도시,

사이타마현 가와고에(川越)다. 도쿄 일정에서 딱 하루만 빼면 된다.  

▲사이타마현 가와고에 위치도.

▲사이타마현 위치도.

▲구라즈쿠리 거리

▲구라즈쿠리 거리에서 할 수 있는 인력거 체험.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옆에 있다

◆왕복 1만원, 하루로 충분한 도쿄 당일치기 근교 여행법

도쿄에서 가와고에까지 이동 난이도를 한 번에 낮추는 방법은 '세이부 가와고에 패스'를

쓰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E-티켓을 예매하면 QR 코드가 발행돼 종이 티켓을 따로

발권할 필요가 없다.

▲프린트할 필요 없이 E-티켓으로 바로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다

▲세이부신주쿠역 개찰구 맨 왼편에서 QR로 통과 가능하다

클룩에서 왕복권을 1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에 살 수 있다(2026년 8월 5일 기준). 편도

티켓 2장을 따로 끊는 것보다 더 저렴하다.

 

세이부 가와고에 패스가 있으면 세이부신주쿠역·다카다노바바역·이케부쿠로역 중 한

곳에서 혼카와고에역까지 세이부선을 1회 왕복할 수 있다. 출발역과 도착역을 다르게

잡아도 되니 동선 짜기가 한결 자유롭다.

▲세이부신주쿠역 플랫폼으로 가는 길

이동 시간을 조금 더 줄이고 싶다면, 특급 열차를 고려해 보자. 세이부신주쿠역에서

혼카와고에역까지 최단 45분이면 갈 수 있는 특급 ‘고에도(小江戸)’ 열차다. 

▲인포메이션에서 종이 티켓 발권이 가능하다

 

세이부 가와고에 패스를 구매했다면, 역 창구나 온라인(Smooz)에서 특급권(편도 1회 600엔)

을추가로 구매하면 된다. 전 좌석 지정석에 시트도 푹신해서, 앉아 가는 45분이 꽤 쾌적하다.

일반 세이부선을 탈 때보다 이동 시간이 15~20분쯤 짧아진다.

▲특급 고에도 열차 내부

 

참고로 세이부신주쿠역은 JR 신주쿠역과 다른 역이다. 지하로 이어지지 않는 구간이

있어 도보로 5~10분쯤 걸리니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세이부신주쿠역 외관

 

열차를 타기 전 알아두면 좋은 점은 '출발 시각 1~5분 전에 문이 열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미리 플랫폼에 도착했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어도 당황하지 말자.

 

타고 온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나면 객실을 한 차례 깔끔하게 청소한 뒤 문을 열어 준다.

가와고에로 향할 때는 열차 진행 방향 기준 오른편 좌석에 앉으면 탁 트인 자연 전망이

이따금 펼쳐진다.

▲특급 고에도 열차 외관

◆가와고에 여행의 시작 구라즈쿠리 거리 속으로

 

혼카와고에역에 내리면 여행은 이미 코앞이다. 시작점이나 다름없는 '구라즈쿠리 거리

(蔵造りの町並み)'가 도보 10분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혼카와고에역 입구

 

가와고에가 낯선 여행자를 위해 이곳의 별명부터 소개하자면, 이 도시는 ‘작은 에도’

즉 고에도(小江戸)라 불린다.

 

현재의 도쿄, ‘에도’로 물자를 대던 아랫마을이었던 덕에 에도의 풍경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남은 곳이 30여 채의 구라즈쿠리 건물이 늘어선

구라즈쿠리 거리다.

‘구라즈쿠리’는 나무 골조 위에 두꺼운 흙벽을 발라 올린 에도 시대의 방화(防火) 건축

양식이다. 검은 기와지붕과 육중한 여닫이문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길 위에 이어진다. 

▲구라즈쿠리 거리

▲구라즈쿠리 거리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지만 길 자체는 깨끗하고 반듯하게 닦여 있어 걷기 편하다. 무엇

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저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캐릭터 숍과 편집숍, 카페와 식당, 공방과 스튜디오까지 100개가 넘는 점포가 들어서

있어 문 여는 맛이 전부 다르다.

▲토키노카네

 

토키노카네는 ‘때를 알리는 종’이라는 뜻이다. 구라즈쿠리 양식으로 지은 3층 종루로,

높이약 16m다. 2층 규모의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혼자 우뚝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옛사람들이 약속을 잡거나 일을 시작할 때 올려다보던 것이 늘 이 종이었다. 종루와

동종은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됐지만 그때마다 다시 지어졌다.


지금 서 있는 것은 네 번째로 다시 지은 것이다. 메이지 26년(1893) 가와고에 대화재

이듬해에 재건했다. 종은 지금도 살아 있는 알람이다. 하루 네 번(오전 6시, 정오,

오후 3시, 오후 6시) 울리니, 소리를 듣고 싶다면 그 시간에 맞춰 다가가 보자.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다음은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다. 구라즈쿠리 거리 한복판에 흰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 뜬금없이 서 있다.

 

어딘가 낯익은 외관이다 싶어 찾아보니, 설계자 야스오카 가쓰야(保岡勝也)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지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의 제자다.

 

1918년 제85은행 본점 본관으로 태어나 2020년까지 은행으로 쓰였고, 2024년 5월,

코워킹 스페이스를 품은 복합 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관광객에게도 활짝 열려 있다. 1층은 사이타마현의 물건을 모은 셀렉트 숍과 카페,

2층은 레스토랑이다. 무료로 구라즈쿠리 전망을 볼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

 

2층 테라스로 나서면 낮에는 활기찬 거리 풍경이, 밤에는 건물만 빛을 발하는

풍경이 펼쳐져 진짜 에도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하다.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의 테라스에서 본 구라즈쿠리 거리

▲우나기덴베 장어 덮밥 정식, 히츠마부시

 

찌고 굽고 삶은 고구마가 평범하게 느껴진다면, 색다른 고구마를 만날 차례다. 카페

'야키이모 이모카와 미나미마치 커피(やきいも芋川 MINAMIMACHI COFFEE)'

로 향하면 된다.

 

시그니처는 고구마 구이, 그중 크렘브륄레 고구마가 특히 인기다. 달콤한 군고구마

위에 설탕이 노릇하게 코팅돼 있어 숟가락으로 깡깡 깨 먹는 맛이 쏠쏠하다.

 

고구마를 차갑게 식혀 두기 때문에 속은 시원하고, 아이스크림 같은 식감이 난다.

▲고구마 구이, 왼쪽은 소금을 올려 달콤 짭짤한 맛을 즐길 수 있고, 오른쪽은

크림브륄레처럼 굳은 설탕 코팅을 깨먹을 수 있다

▲야키이모 이모카와 미나미마치 커피 외관

 

에도 시대의 분위기만으로도 가와고에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힘을 숨긴

진짜 주인공이 아직 남았다.

 

먼저 구라즈쿠리 거리의 캐릭터 숍들이다. 토토로, 스누피, 미피 등 인기 캐릭터

들이 이 거리에 자리를 잡고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가시야 요코초 

▲30~100엔 정도의 저렴한 간식 거리가 가득하다

원래 이 길은 근처에 있는 절 ‘요주인(養寿院)’의 참배로였다. 메이지 초, 1870년 경 과자

장인 스즈키 도자에몬(鈴木藤左衛門)이 이곳에 다가시 가게를 내면서 과자

거리가 시작됐다.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도쿄 시타마치의 과자업이 무너지자 그 공백을 이 골목이 메웠고,

쇼와 초기 전성기에는 점포가 70여 곳까지 늘었다. 지금 남은 노포는 10여 곳이다.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

연애 중이거나 짝사랑 중이라면 인연을 잇고 싶을 터. 연애운과 부부운을 빌러 가와고에

사람들이 향하는 곳,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川越氷川神社)로 가 보자.

▲여름이면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에서는 풍경 소리가 울려 퍼진다

 

창건은 약 1,500년 전으로 전해진다.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다섯 명, 모두 한 가족이다.

여기에는 인연의 신으로 알려진 오오나무치노미코토(大己貴命)가 있고, 부부신 두 쌍을

모시고 있어서, 예로부터 가정의 화목과 부부의 인연에 효험을 가져다주는 신사로

알려져 있다.

 

그 덕에 입구의 오마모리(縁結び守り)를 판매하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인기가 가장 많은 오마모리 2종

▲에마 터널 (絵馬トンネル)

효험을 더 높이고 싶다면 걸어 볼 길이 둘 있다. 하나는 나무판에 소원을 적어 매다는

‘에마 터널(絵馬トンネル)’이다. 사람들이 고이 적어 둔 소원을 구경하며 걷다가,

내 소원도 하나 매달고 소원을 빌면 된다.

▲점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다면 걸어두고 가면 된다

 

다른 하나는 등불이 늘어선 길이다. 결혼식과 피로연을 위해 신랑 신부가 걷는 길로,

 일본 신사 특유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등불이 늘어선 길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

▶하루면 충분한 가와고에 여행 코스


세이부신주쿠역 → (세이부선 또는 특급 고에도 열차) → 혼카와고에역-구라즈쿠리 거리

(토키노카네, 리소나 코에도 테라스) → 우나기 덴베 → 야키이모 이모카와 미나미마치

커피 → 미피 쿠라노 키친 앤 베이커리 가와고에점 → 가시야 요코초 → 가와고에

히카와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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