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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서울 일원****기행

땅의 역사ㅡ그러나 조선 사절 민영익은 피라미드에 오르지 않았다

by 삼수갑산 2022. 12. 1.

 조선을 스쳐간 근대화 기회ㅡ피라미드 앞 사무라이와 민영익

1864년 2월 일본 막부가 파견한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이 이집트 스핑크스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일본으로

밀려드는 세계 열강의 개항 요구에 맞서 개항 시기를 늦추려고 프랑스로 떠난 사절단이다.

 

협상은 실패했지만 사절로 파견된 이들 35명 사무라이들은 일본 근대화 일원으로 활약했다. 20년 뒤 미 해군 군함을

타고 피라미드를 찾은 조선 보빙사들은 동행했던 미 해군 소위 포크의 등반 제안을 거부했다.

 

포크는 “정사 민영익은 일정 내내 견문 넓히기를 거부하고 유교 경전을 읽으며 소일했다”고 기록했다.

/일본 요코하마미술관

 

세계로 떠난 보빙사

1883년 10월 12일 미 대통령 아서 예방과 함께 조선 최초로 서방세계를 찾았던 보빙사 공식 방미 일정이 끝났다. 이날 아서는 정사 민영익에게 세계여행을 제안했다. 모든 것이 파격이었다.

 

배는 미 해군 함정 트랜튼호였고 모든 경비는 미 해군부 예산으로 지출했다. 해군 소위 포크(Foulk)가 대통령 명으로 이들을 수행했다. 부사 홍영식이 이끄는 1진이 귀국하고, 12월 1일 민영익과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는 장장 6개월 동안 세계를 주유하고 이듬해 5월 31일 제물포로 귀국했다.

 

대서양 아조레스(Azores·포르투갈령)에서 로마와 런던, 파리, 카이로와 뭄바이, 싱가포르에 이르는 대장정. 모든 것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고 모든 경험이 처음 겪는 문물이었다. 그런데 그 여정 가운데 상당 일정이 이보다 20년 전 일본을 떠난 사무라이들 여행과 겹쳐 있었다.

 

피라미드의 사무라이들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일본은 4년 뒤인 1858년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잇달아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일본이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カ國條約)이라 부르는 불평등조약들이다.

 

1864년 이들 조약에 규정된 요코하마 개항 의무 조항을 철폐하기 위해 막부는 협상단을 프랑스에 파견했다. 이들을 ‘요코하마 쇄항 담판사절단(横浜鎖港談判使節團·이하 요코하마 사절단)’ 혹은 ‘제2회 유럽 파견 사절’이라 부른다.

 

단장인 이케다 나가오키(池田長發) 이름을 따서 ‘이케다 사절단’이라고도 한다. 이미 2년 전인 1862년 일본은 포르투갈, 러시아 등과 맺은 조약 가운데 일부 조항 이행을 연기하기 위해 1차 유럽 파견 사절단을 보낸 적이 있었다.

 

요코하마 사절단은 1864년 2월 6일 프랑스 군함 르 몬제호에 올라 청나라 상하이, 인도, 이집트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서 나폴레옹 3세를 예방하고 귀국했다.

 

그런데 이들은 수에즈 운하를 앞두고 이집트에서 11일을 체류하며 ‘관광’을 했다. 2월 28일 일행 35명 가운데 몸 상태가 나쁜 7명을 제외한 28명이 기자 피라미드에 오른 뒤 스핑크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촬영자는 근대 사진 선구자인 이탈리아계 영국인 안토니오 비아토였다. 사절단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교역항인 요코하마 폐쇄를 프랑스 정부는 결사반대했다.

 

대신 스핑크스와 프랑스 군함을 타고 온 사무라이라는 모순적인 요소가 만든 기이한 풍경이 탄생했다. 크고 작은 칼 두 자루를 찬 사무라이들이 피라미드 앞에서!

 

실패한 협상가, 근대의 아버지

 

27세였던 단장 이케다는 압도적인 서구 문명을 몸으로 목격하고 ‘해외에서 국욕(國辱)을 초래하기보다 조정에 쇄항의 잘못을 호소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뒤 교섭을 포기했다.(한철호, ‘메이지 초기 일본 외무성 관리 다나베 다이치의 울릉도·독도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19호, 동북아역사재단, 2008)

 

대신 이케다는 물리학, 생물학, 섬유, 농업, 양조 분야 서적을 구입해 귀국했다. 이후 이케다는 큰 공식 활동 없이 1879년 죽었다.

 

그런데 저 스핑크스 앞 사무라이들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 이케다와 함께 100일 가택연금 처분을 받았던 다나베는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영토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1871년 메이지정부가 미국과 유럽에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에도 1등 서기관으로 참여해 견문을 쌓았다. 1876년 조선 수신사 김기수는 이렇게 기록했다.

 

‘전변태일(田邊太一)도 전에 외무대승으로 있었는데, 외국 학문을 잘 알고 세계에 가보지 않은 데가 거의 없다고 하였다.’(김기수, ‘일동기유’ 2권, 결식 34칙)

 

다나베는 훗날 한·일 독도 분쟁에 일본 측 논리 메이커가 됐다. 그리고 마스다 다카시(益田孝). 미쓰이물산(三井物産)을 실질적으로 창업하고 ‘일본경제신문’ 전신인 ‘중외상업신보’를 창간했다. 근대 세계와 마주친 충격이 실패한 협상가들을 근대적 프로페셔널로 변신시킨 것이다.

 

▲1864년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 단장 이케다 나가오키(池田長發·파리에서 촬영).

파리에서 근대문명을 목격한 뒤 쇄국 담판을 포기하고 근대화를 택했다. 27세였다. /위키피디아

 

조선 사절단, 피라미드에 가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한 지 만 8년 만인 1884년, 그 조선 사절단이 이집트로 갔다. 일본 요코하마 사절단 또한 1854년 개항 후 10년 만에 피라미드를 봤다. 개항에서 목격까지 불과 2년 차이지만 충격은 조선보다 덜했다.

 

 이미 임진왜란(1592년) 전 일본은 포르투갈 신부를 통해 유럽과 교류를 시작했다. 1582년에는 신부들을 따라 10대 청소년 4명이 왕복 8년 동안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그렇기에 제국주의가 발호하던 19세기 일본이 서구문명을 대하는 자세에는 여유가 있었다.

 

미국 정부 호의로 세계를 여행한 최초의 조선인, 민영익과 서광범, 변수는 어땠을까. 12월 1일 뉴욕을 떠난 트랜든호는 대서양에서 풍랑을 만났다. 이들을 수행했던 해군 소위 포크에 따르면 ‘민영익은 극도로 공포에 질려 자거나 먹거나 누우려 하지 않았다.’

 

민영익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하면 배를 갈아타고 속히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손정숙, ‘한국 최초 미국외교사절 보빙사의 견문과 그 영향’, 한국사상사학 29권, 한국사상사학회, 2007) 이에 대해 포크는 “친구에게서 받았던 담배를 던져버리는 행위”라며 대통령 호의를 저버리려 한다고 비난했다.

 

유럽 대륙에 상륙한 일행은 파리와 런던, 로마를 둘러보고 2월 29일 이집트 수에즈에 도착했다. 이때 이들이 카이로에서 피라미드를 보았다. 이집트 고대 문명을 처음으로 목격한 조선인 3명이다.

 

이들은 세계여행에 대해 단 한 글자도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하지만 동행한 미국인 포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들은 고대인이 그런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직접 올라가거나 들어가 구경하는 것은 거부하는 소심함을 보였다.’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거대 구조물을 대면하고도 너무나도 성리학적인 예법으로 호기심을 누르고 애써 외면한 것이다.

이런 태도를 ‘뉴욕타임스’는 “마치 놀라운 일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무엇을 보든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고 보도했다.(1883년 11월 8일 ‘뉴욕타임스’. 홍사중, ‘상투 틀고 미국에 가다’, 홍익사, 1983, p169)

 

1897년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인은 놀라움과 함께 실행해 보겠다는 야심을 억누르지 못한다”고 글을 쓰기도 했다.(홍사중, 앞 책, p169)

 

대신 민영익은 인도 뭄바이를 거쳐 스리랑카 콜롬보에 도착했을 때 현지 소승불교와 조선 대승불교를 두고 승려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고 포크는 기록했다.

 

83년 조선 보빙사 정사 민영익. 미국 상업사진관에서 서양식으로 팔짱을 끼고 포즈를 취한 민영익은

귀국 후 수구파로 변신했다. 23세였다.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서광범의 예언 “그는 돌아서리라”

미국에 상륙해서 세계를 주유하고 조선으로 복귀할 때까지 8개월 동안 이들을 밀착해서 관찰한 포크는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 8개월 동안 나는 이 세 사람과 절친하게 지냈다. 민영익은 자기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오래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는 소심하고 변덕이 심하다. 슬프게도 그는 견문과 각성이라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기회를 외면하고서 여행 내내 조선에서 가져온 유교 책들을 붙잡고 읽고 있었다.

 

반면 서광범과 변수는 세계 주요 국가의 정치사와 진보에 대해 어마어마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노트하는 데 지칠 줄 모르도록 열심이었다.’(1884년 12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포크 소위의 편지’, 미 국무부 Office of The Historian 자료)

 

1884년 5월 마침내 민영익과 서광범, 변수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때 한성으로 올라가면서 서광범이 포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민영익이 무엇을 했고 무슨 대접을 받았든 정확하게 그 반대로 행동하리라고 본다. 유교적 교육과 가문의 신분적 본능(hereditary instinct)이 가르쳐준 바대로, 그는 틀림없이 중국 방식을 좇아 반(反)서구 근대화로 나아가리라.”(포크, 앞 편지)

 

포크의 관찰과 서광범의 예언이 맞았다. 귀국 반년 만에 보빙사 부사 홍영식이 주최한 우정국 개국 잔치에서 정사 민영익이 개혁의 적으로 난자당한 것이다. 왜?

 

글.사진 출처 / chosun.com / 땅의 역사 / 박종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