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암(龍頭岩)
용두암이 내뿜는 물보라…해 질 녘 제주항 어부의 낭만에 대하여
#느리지만 오래 남는다. 제주 구도심을 걷다
▲바위가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용두암'이라 불리는 곳. 깎아지른 절벽과 해안이 절경을 이룬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제주도를 스코틀랜드나 하와이, 아이슬란드에 비교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전 세계를 돌아다녀 봐도 제주의 지형이 독보적이라며 말이다. 제주를 보는 관점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제주는 ‘도시’라는 것. 그냥 도시는 아니다.
장엄한 자연에 둘러싸인, ‘걷고 싶은' 도시다. 그 유명한 올레길뿐만이 아니다. 제주 시내 곳곳에 차 없이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곳, 산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의외로 많다.
잦은 이동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면 제주공항 근처에서 지내는 것을 추천한다. 도시와 뚝 떨어져 있는 인천공항이나 김포공항과 달리 제주공항은 도심에 있다.
제주에 자주 가는 지인 K는 언제부턴가 렌터카도 빌리지 않는다. 어디에 가든 콜택시를 타고 이동한다고. 애주가(愛酒家)라면 특히나 추천하는 방법이다.
버스가 다닌다고는 하지만 배차 간격이 길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김포공항에서 여행 가방을 맡기면 제주도 숙소까지 배송해주는 서비스가 7월 중으로 시작된다. 아직 콜택시를 불러 다니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는데, ‘짐 배송 서비스’가 시작되면 그렇게 해보고 싶다.
제주공항으로부터 빠른 걸음으로 35분, 차로는 10분 거리에 용두암이 있다. 용암이 굳어져서 만들어진 기암이 마치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용두암으로 불린다. 이곳에 비 오는 날 갔다가 홀리고 말았다. 거센 파도만큼이나 하얀 포말이 웅장했다. 용의 머리에서 파도와 포말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용두암은 서쪽 100m쯤에서 파도가 칠 때 보아야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드러난다.’ 안내문 문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용두암 검은 바위에는 해녀들이 물질할 때 쓰는 도구인 테왁이 걸려 있는데, 이것이 보인다는 건 해녀가 근처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운 좋게 해녀들을 만나면 갓 잡은 해산물을 그 자리에서 구해 먹을 수도 있다.
다음엔 탑동광장으로 갔다. 용두암에서는 차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탑동광장에서도 바다가 보이는데, 인근에 제주문화원이 있고 바다 쪽으로 더 가면 방파제가 보인다. 제주가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는 게 실감 난다. 서부두방파제 쪽으로 걸으면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이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연달아 제4부두, 제5부두, 제6부두가 나란히 있고 제주항 국제여객터미널도 있다. 역시 도시이자 항구인 제주답다. 마음만 먹으면 배를 타고 부산이나 인천으로 갈 수 있다. 코로나 창궐 전이었다면 일본 요코하마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꼭 이 동네를 걸으면, 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싶어진다.
▲용두암(龍頭岩)
▲식당 '산지해장국'에서는 내장탕과 해장국, 딱 두 가지 메뉴를 선보인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항구의 짠 기운을 느끼며 첫 끼를 먹었다. 수산물공판장 바로 앞에 있는 ‘물항식당'은 옆에 ‘물항수산'이라는 이름으로 수산물 판매도 하고 있어 재료가 남다르다. 마치 횟감에 가까운 갈치구이의 신선함에 놀란다.
살짝 불에 그슬린 정도로 구운 갈치는 이곳 아니면 먹을 수 없다고 장담한다. 대로 건너편 ‘산지물식당’과 ‘산지해장국’도 좋다.여름 제주는 한치가 제철이다. 산지물식당은 물회로 이름난 곳으로, 한치회나 물회를 먹기에 좋다. 여름 제주의 또 다른 제철 음식으로는 보말, 구살(성게)이 있다.
자리물회로 많이 먹는 자리도 5월에서 8월 사이에 많이 잡히는데, 7월이 넘어 알을 낳고 나면 제 맛을 잃는다고 들었다. 산지해장국에는 메뉴가 내장탕과 해장국 딱 두 가지인데, 둘 다 청량하면서 깊은 맛의 국물이 일품이다. 기름지지 않고 깨끗해서 좋다. 먹어도 먹어도 건더기가 줄지 않을 정도로 푸짐하고, 자꾸 당기는 맛이다.
▲디앤디파트먼트 제주는 감각적인 생활소품을 판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휴무.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에는 인도 작가 수보드 굽타의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작품이 전시돼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걸어서 다시 탑동광장 쪽으로 온다.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가 목적지. 탑동시네마 건물의 골조를 살리면서 벽을 강렬한 빨간색으로 칠해 미술관으로 바꾼 곳이다. 시간이 흐른 구도심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이 건물의 계단을 오르며 제주항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미술관에는 인도 아티스트 수보드 굽타가 설치한 작품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가 있다. 길이 20m의 배 모형 작품이다.
‘반 고흐 로봇’ 등 백남준의 작품 7점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제주 북쪽 바다와 야자수를 보고 있자면 ‘나는 지금 일상을 떠나 다른 세계에 있다’는 생각과 흥분이 일렁인다.
옆에 있는 디앤디파트먼트에 가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숙박과 독서, 식물과 먹거리와 소품을 살 수 있다. 그냥 먹거리가 아니라 제주의 먹거리다. 제주에서 난 쌀과 과자, 그리고 술을 갖춰 놓았고, 이 먹거리가 어디서 왔는지 제주 지도 위에 세세하게 표시해두어 먹거리의 생산지에도 관심을 갖게 한다.
오라의 메밀 쌀, 서귀포의 국수, 귀덕리의 허벅술, 한라산 표고버섯, 표선의 다원에서 덖은 차 등도 만날 수 있다. 제주도 모든 곳을 다닐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각지에서 온 먹거리를 산다. 그리고 그곳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관덕정은 제주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됐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걸어서 10분 거리인 칠성로쇼핑타운으로 가면 한국식 아케이드(아치형 지붕이 덮인 거리)를 경험할 수 있다. 역사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물이 있고, 유래도 적혀 있어 이 도시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있다.
탐라문화광장과 탐라국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제주의 정치와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던 관덕정, 제주의 거상(巨商)이었던 김만덕기념관이 인근에 있어 같이 둘러보기에 좋다. 걷다 보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곳이 몇백 년 전의 제주 유배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쩌다 보니 광해군과 최익현, 이익과 송시열 같은 이들의 궤적을 걷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은 사라봉. 시내로부터 차로 10분 거리다. 사라봉도 제주 도처에 있는 400개 오름 중 하나다. 제주에서 경관이 특히 뛰어난 열 곳을 선정한 영주십경(瀛州十景) 중 제2경에 해당하는 사봉낙조(紗峯落照)는 이 사라봉의 노을을 말한다. 아쉽게도 저녁이 아닌 해가 쨍쨍할 때 사라봉에 올랐다. 바다와 접해 있는 사라봉 도처에 근린체육시설이 있다.
바다를 정면으로 보면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아저씨를 보니 내가 다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해발고도가 148m밖에 안 되지만, 이곳에 올라서면 드넓은 바다와 고기잡이 어선, 제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낮에도 이렇게 좋은데 저녁 즈음 노을에 비친 바다 물결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물이 춤춘다는 뜻의 사라(娑羅)가 이곳의 이름이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해가 질 때는 황금 그물이 춤추는 느낌일 것이다.
사라봉 동쪽의 곰솔 오솔길을 걸으면 별도봉으로 이어진다. 별도봉도 오름인데 해발고도 136m라 오르기 만만하다. 사라봉과 별도봉 사이에는 알오름이 있어서, 이 세 개를 연달아 오르면 오름 세 개를 오르게 되는 셈이다.
▲사라봉에서 보는 해 질 녘 풍경은 제주의 영주10경 중 하나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이날, 사봉낙조는 못 보았어도 영주십경 중 제7경인 산포조어(山浦釣魚)는 봤다. ‘산지포(제주항의 옛말)’의 고기잡이라는 뜻이다. 제주항 근처 식당의 이름에서 볼 수 있는 ‘산지’라는 말은 ‘산지 직송’의 줄임이 아니다. 지금의 제주항을 일컫던 말이다. 제주항에서 낚시하는 어부들의 여유와 멋을 가리켜 산포조어라 한다.
다음에 제주에 오면 일몰 때 사라봉에 올라 사봉낙조를 보고, 황금 그물에 덮여 더 장관일 산포조어도 보고, 옛 산지였던 곳으로 돌아가 한라산 소주에 산지 음식을 먹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사라봉을 내려왔다.
글.사진출처 / chosun.com / (아무튼 주말). 제주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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