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ㅡ섶섬이 마음속으로 파고든다…이중섭의 그리움처럼
그리움을 그린 이중섭의 섶섬. 풍경바닷속엔 아열대 어종의 원색 향연건축-미술작품에 경치까지 더해
제주 서귀포 앞바다에는 무인도 삼형제가 있다. 섶섬 문섬 범섬. 제주도를 만든 신이 아름다운 제주를 돌아보려 내려왔다가 사냥꾼이 잘못 쏜 화살을 맞고 화가 나서 한라산 봉우리를 움켜쥐고 던져 섶섬과 문섬, 범섬이 됐다고 한다.
한라산 꼭대기가 뽑힌 자리는 움푹 파여 백록담이 됐다. 서귀포 세 섬은 유네스코 등록유산이자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천혜의 비경이다. 바닷속은 ‘산호정원’ ‘물속의 곶자왈’로 불릴 만큼 세계적인 연산호 군락으로 우거진 스킨스쿠버 성지이기도 하다. 화가 이중섭(1916∼1956)은 섶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가족들과 살았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중섭이 그린 ‘섶섬이 보이는 풍경’
제주 서귀포에 있는 이중섭미술관 옥상에 올라가면 서귀포 앞바다가 보인다. 화가 이중섭은 집 뒤의 언덕이었던 이곳에서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그림 속에 있는 황토빛 길과 나목, 초가지붕 풍경은 콘크리트 빌딩과 도로로 바뀌었지만, 왼쪽에 섶섬, 오른쪽에 문섬이 바라다보이는 앞바다의 풍경은 그대로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현재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인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서 볼 수 있다. 황토빛 초가지붕 너머 햇빛에 반짝이는 푸른색 제주 바다가 섶섬을 둘러싸고 있다. 거친 붓질로 휙휙 그린 황소 그림과 달리 색채와 붓 터치 하나하나에서 따뜻하고 정겨움이 느껴진다.
아마도 서귀포 생활은 중섭에게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1951년 1·4후퇴 당시 원산에 살던 이중섭은 가족을 이끌고 피란해 제주 서귀포까지 내려온다. 이중섭과 마사코, 겨우 다섯 살, 세 살밖에 되지 못한 어린 아들 둘은 섶섬이 보이는 마을에서 1.5평짜리 단칸방을 얻어 산다.
실제로 이중섭 미술관 아래 초가집에는 이중섭 가족이 머물던 방이 남아 있는데, 그야말로 누우면 발이 넘어올 것 같다. 아마도 몸을 구부리고 잤을 것이다. 배급받은 쌀로 끼니를 때우던 이중섭은 서귀포 해변으로 내려가 해초를 뜯어 죽을 쑤고, 작은 게를 잡아 반찬을 해 먹었다고 한다.
서귀포 칠십리로 자구리해변에 가면 전망 좋은 카페와 식당이 있는 거리가 나온다. 이 카페의 루프톱에서 바라보면 섶섬이 눈에 잡힐 듯 다가온다. 이곳은 이중섭이 아이들과 게가 함께 노는 모습이 담긴 ‘그리운 제주도 풍경’ ‘바닷가와 아이들’을 그린 곳이다.
자구리문화예술공원에는 담뱃갑 속 포장지인 은지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커다란 손이 형상화된 조각품이 있다. 이중섭의 손을 모티브로 만든 정미진 작가의 ‘게와 아이들―그리다’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중섭은 제주도에 도착한 그해 12월 가난을 해결하지 못해 1년도 채 안 돼 부산으로 다시 떠나야 했다. 이후 아내와 아이들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어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그리움으로 흘리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서귀포시 칠십리로 자구리문화예술공원에 있는 정미진 작가의 조각품 ‘게와 아이들―그리다’. 담뱃갑 속 포장지에 연필로 그림을 그린 이중섭의 손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섶섬이 보이는 이 해변에서 이중섭은 아이들과 함께 게를 잡으며 놀곤 했다.
이중섭미술관에서 서귀포 올레시장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는 수많은 아트숍과 화가들의 작업실이 있다. 천천히 걸으며 상주 예술가들이 그린 벽화를 감상한다. 섶섬과 문섬의 풍경을 보기엔 서귀포 정방폭포 옆에 있는 왈종미술관도 좋은 포인트다.
화가 이왈종은 1990년 대학교수직을 박차고 제주로 내려왔다. 민화적인 색채와 도상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 세계는 단란하다. ‘제주 생활의 중도’ 연작에는 동백과 엉겅퀴가 피고, 골프와 낚시를 즐기는 제주의 유유자적한 풍경이 살아 숨쉰다.
▲바닷속 곶자왈, 산호정원
섶섬은 스킨스쿠버 명소다. ‘소천지’와 ‘작은 한개창’, ‘큰 한개창’(제주 방언으로 ‘코지’는 밖으로 튀어나온 지형을, ‘개창’은 안으로 움푹 들어간 지형이라고 한다) 등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가 즐비하다.
섬이나 바닷가 여행을 할 때 다이빙을 하게 되면 그 지역을 입체적으로 감상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서귀포항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5분쯤 가니 섶섬에 도착했다. 스쿠버다이빙 장비를 착용하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부력조절장치(BCD)의 공기를 배출시키며 서서히 하강했다.
▲서귀포 섶섬 앞바다 속에서 만난 쏠배감펭(일명 라이언 피시).
섶섬 앞바다는 ‘물속의 곶자왈’이다. 육상의 곶자왈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한 제주의 숲을 말한다. 섶섬 앞바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연산호류(soft coral)인 분홍색의 수지맨드라미와 가시산호, 하얀색 해송까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산호를 모아놓은 듯하다.
분홍색, 노란색, 초록색, 흰색 등 총천연색 ‘산호정원’이다. 알록달록 화려하고 긴 지느러미를 자랑하는 쏠배감펭(일명 라이언피시)이 도망가지 않고 눈앞에서 여유 있게 헤엄치고 있다.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동안 강렬한 원색의 아열대 어종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범돔, 세동가리돔, 청줄돔, 파랑돔, 호박돔, 아홉동가리, 황붉돔…. 바닥으로 내려가자 말미잘 군락이 펼쳐졌고, 말미잘과 공생하는 흰동가리, 샛별돔 등이 보였다. 흰동가리는 애니메이션 ‘니모’의 주인공인 바로 그 물고기인데, 말미잘 밖에 나와서도 도망가지 않고 다이버를 향해 뭐라고 말을 하는 듯하다.
운이 좋으면 용왕의 사신인 바다거북, 대형 가오리도 만날 수 있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안 띄어 아쉬웠다. 다이브투게더 김응곤 대표(다이빙 강사)는 “섶섬 앞바다에는 해송이 많고, 문섬 새끼섬 직벽에는 노란색 연산호가 많다”며 “서귀포 앞바다는 세계적인 천혜의 산호정원”이라고 말했다.
▲방주교회 & 본태박물관
서귀포항에서 승용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서귀포시 안덕면으로 가서 미술과 건축 여행을 이어간다. 한라산 중턱에 자리 잡은 안도 다다오가 건축한 ‘본태박물관’과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이 설계한 ‘방주교회’가 물과 바람, 돌과 잘 어우러져 있는 공간이다.
방주교회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모양으로 세워진 교회다. 아라라트산에 걸쳐져 있던 방주처럼 한라산 중턱에 자리 잡은 방주교회는 지붕의 삼각형 금속조각이 반사하며 빛의 홍수를 만들어낸다. 교회 주변은 야트막한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야말로 물 위에 뜨는 방주의 형상이다.
내부로 들어가면 배의 골격을 본떠 기둥 없는 오각형 돔 구조로 간결하다. 벽면 아래쪽에 있는 유리창 밖으로 찰랑대는 물이 보인다. 조타실에 해당하는 정면에 십자가가 서 있고, 유리창에서는 강렬한 빛이 쏟아진다.
노아가 날려 보낸 비둘기가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온 ‘희망의 창문’이다. 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작은 교회지만 누구라도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는 종교적 분위기가 가득한 공간이다.
▲서귀포 본태박물관에 있는 구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
안도 다다오가 지은 본태박물관은 노출 콘크리트 건물로, 한국의 전통 흙담 및 정원과 잘 어우러진다. 특히 비 오는 날 물이 흐르는 경치가 아름답다. 투명한 거울 같은 물에 비친 건물의 그림자가 마음을 고요하게 만든다. 내부에 들어가면 백남준, 구사마 야요이, 제임스 터렐부터 고려청자와 백자, 소반, 조각보 등 동서양 미술의 다양한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다.
출처 / 글·사진 서귀포=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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