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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아시아*****국가들/⊙이란*******기행

이란ㅡ하마단(Hamadan.엑바타나)ㅡ악메다 宮(Achmetha)ㅡ고래스 칙령이 발견된 곳. 다리오 1세의 묘.

by 삼수갑산 2022. 8. 12.

하마단(Hamadan)ㅡ악메다 宮(Achmetha)ㅡ고래스 칙령이 발견된 곳,

▲엑바타나(Ecbatana)고대 유적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에게 해방령을 내린 고레스 왕의 칙령이 발견된 악메다(Achmetha,에6:1∼2)는 메대제국 수도로 헬라어명칭은 ‘엑바타나’(에크바타나)이다. 후에 페르시아 제국과 파르티아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이곳은 현재 이란의 테헤란 남서쪽 약 337㎞ 지점인 하마단(hamadan)으로 알반드(Alvand) 산의 북동쪽 기슭 근처에 있는평야에 위치해 있다. 

 

테헤란에서 이곳까지는 국내선 비행기가 있으나 일정상 버스로 출발했다. 테헤란에서 337㎞나 되는 이곳을 하루에 왕복하기위해 아침 식사는 중간에 하기로 하고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했다.

 

국도를 따라 2시간여쯤 달리자 그때서야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날이 1월29일 한겨울이지만 우리나라 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2시간 이상을 달려 성경에 악메다로 나오는 하마단에 도착했다. 하마단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성경에 나오는 악메다 궁터였다.

 

궁터에 도착하자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고 궁터에 세워진 박물관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악메다(엑바타나)는 BC 678년 메대인 데이오세스(Deioces)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BC 550년 페르시아의 고레스(Cyrus)에게 점령당했으며,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BC 330년에 아케메네스 왕조의마지막 왕인 다리오(다리우스) 3세로부터 다리오가 예루살렘 재건을 허용한다는 고레스의 칙령을 빼앗았다.

 

스6:1∼2에 의하면 다리오왕 때 이 악메다에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락한다는 고레스의 칙령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이 고레스 칙령(조서)이 발견됨으로써 스룹바벨 성전으로 지칭되는 제2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수월해질 수 있었다.이후 악메다는 파르티아 왕들의 여름 휴양지가 되었으나 사산(Sassan) 왕조 하에서 쇠망하였고 이슬람에 정복된 후

하마단이란 도시가 들어섰다.

 

오늘날 이 하마단은 옛터 위에 세워져 있어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하마단(악메다)에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비문들과 1923년 다리오 1세의 이름이 새겨진 금과 은으로 된 2개의 받침쟁반과 크세르크세스(쎌써스, 아하수에로) 2세의 기둥 뿌리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 두 왕이 악메다궁을 세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악메다 궁터에서는 돌사자 또는 상 쉬르(Sang Shir)라는 사자상이 발굴되었다. 이 돌사자상은 길이 2.5m,폭 1.5m,높이 1.2m의 매우 큰 것으로, 마케도니아에서 전사한 헤파에스티온(Hephaestion) 장군을 기리리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석공들이 조각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 사자상은 이곳의 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악메다 시내에서 서쪽 5㎞ 지점의 압바스 아바드(Abbas Abad) 계곡에 있는 아하수에로왕과 다리오왕의 돌비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다. 50cm는 족히 쌓인 눈길에 빠지며 비문에 이르렀다.

 

비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위대한 하나님 아후라마즈다(Ahura Mazda), 모든 신들 중에 가장 위대하시며, 이 땅과 하늘과 사람을창조하신 분, 그분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셨고, 그분은 쎌서스(아하수에로)왕을 세우셨다.

 

많은 왕들 중에서 뛰어난 왕, 많은 통치자들 중에서 뛰어난 통치자, 나는 위대한 왕 쎌서스, 왕중의 왕이며 수많은 거민들이 있는땅의 왕, 끝이 없는 경계를 가진 거대한 왕국의 왕 아케메니안의 군주 다리오의 아들이니라”  이 비문이 바로 에스더의 남편아하수에로왕의 비문이다.

 

이곳을 나와 다시 악메다 시내의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을 방문했다. 이 무덤이 사산 왕조의 애즈데기르드(Yazdegird,399∼420년)왕의 부인의 묘로 주장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국민일보 2005.5.31 미션)

 

▲ 하마단 (Hamadan ) 

 

악메다(Achmetha)는 잘 알려지지 않은 궁터이다. 성경에도  악메다궁은 단 한 번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스 6:2). 이 궁터는 지금의 하마단(Hamadan) 주 하마단 시 알반드 산(Alvand Mountain)의 동북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악메다는 BC 700년경 창설된 메대(Mede)제국의 수도이었으나 BC 549년 고레스가 점령한 뒤에 페르시아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헬라의 알렉산더대왕은  B.C 330년에 아케메니스왕조의 마지막 왕인 다리오 3세로부터 다리오가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허용한다는 고레스의 조서를 빼앗았다.이곳에서의 악메다를 헬라어로 엑바타나(Ecbatana)라고 한다. 페르시아제국의 수도는 네 곳에 있다. 현재 이란에 소재한 것으로는수사(Susa), 페리스폴리스(Persepolis), 악메다(Achmetha) 그리고 이라크에 소재하고 있는 바벨론(Babylon)이다.

 

페르세폴리스 안내 책자에는 페르세폴리스와 같은 양식의 궁이 악메다와 수사에도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페르시아의 건축이라는 책자에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악메다가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수도 중의 하나라고 명기되어 있다. 악메다는겨울에 춥기 때문에 페르시아 왕들의 여름 궁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사산왕조(Sassanian Dynasty)가 쇠망하고 이슬람교도들이 악메다를 정복한 뒤에 하마단(Hamadan) 으로 도시 이름을 바뀌었다.이 도시는 테헤란 서남쪽 약 336㎞ 떨어져 있어  테헤란에서 승용차 편으로 4시간 반 정도, 항공기편으로는 40분 정도 소요된다.악메다궁은 성경 역사상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고레스 왕이 포고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대한 조서가 이악메다궁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에스라서 6장 1절에서 3절까지에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서적 곳간 곧 바벨론에서 보물을 쌓아 둔 곳에서 조사하게 하였더니 메대도 악메다궁에서 한 두루마리를 얻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와 같이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였으나 그 성전 건축이 순조롭지 않았다. 사마리아 공동체(팔레스타인에 거주했던 이민족)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이에 관여하려는 것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사 왕 고레스가 명하신 대로 홀로 건축하리라했다(스 4:1-3). 이에 사마리아 공동체는 상소 등의 방법으로 여호와의 전 건축을 반대했다(스 4:4-24 참조)

 

그렇게 하여 B.C 534년부터 B.C 520년까지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 그 뒤에 성전 건축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백성들을 권면하여 다시 성전 건축에 임하게 했으며 그 일이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의 지도 아래에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바사 총독 닷드내가 성전 건축 문제에 대하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전을 예루살렘에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이라”고 항의하여 다리오 왕은 악메다 궁에서 발견된 고레스의 조서를 확증하여 닷드내로 하여금 성전 건축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도록 명한다.이렇게 하여 그 당시의 총독의 이름 딴 스룹바벨 성전 건축은 B.C 515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엑바타나 고대 유적지(악메다 궁)

 

악메다궁은 메대의 도성인데, BC 700년 경 창설되었다. BC 549년고레스가 점령한 이래 바사 역대왕의 이궁(離宮)으로

되었다. 고레스가 포고한 예루살렘 성전 재건 허가에 대한 조서 기록이 이 도성의 서고에서 발견되었다

 

현재의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서남쪽 직선거리로 200km 지점의 하마단(H˙amada n) 부근의 고지(古址)와 동일시된다.  

오늘날에는 별로 남은게 없다. 박물관의 유적들이 그 존재를 말해줄 뿐이다.악메다는 파르티아 왕들의 여름 휴양지가 되었으나 사산(Sassan) 왕조 하에서 쇠망하였고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된 후하마단이란 도시가 들어섰다.

 

오늘날 이곳 하마단은 옛터 위에 세워져 있어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하마단(악메다)에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비문들과 1923년 다리오 1세의 이름이 새겨진 금과 은으로 된 2개의 받침쟁반과 크세르크세스(쎌써스,아하수에로) 2세의 기둥 뿌리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 두 왕이 악메다궁을 세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레스의 조서와 다리오왕의 명령

 

1 이에 다리오왕이 조서를 내려 서적 곳간 곧 바벨론에서 보물을 쌓아둔 곳에서 조사하게 하였더니

 

2 메대도 악메다 궁에서 한 두루마리를 얻으니 거기 기록하였으되

 

3 고레스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전의 고는 육십 규빗으로, 광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4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5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전 금, 은 기명을 돌려 보내어 예루살렘 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 안 각기 본처에 둘찌니라 하였더라

 

▲엑바타나 고대 유적지 

 

▲엑바타나 고대 유적지 

 

▲엑바타나 고대 유적지 

 

▲엑바타나 고대 유적지(악메다 궁) 

 

이란의 악메다 궁은 여름철 왕궁이며, 정치상 거점인 동시에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다. 알렉산더가 악메다로 진격하였을 때 다리우스3세는 동쪽으로 도망하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악메다를 점령하고 수사와 페스세폴리스의 금은 보화를 가져다가 경제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곳이다.

 

▲엑바타나 고대 유적지 발굴중...

 

▲엑바타나 고대 유적지 발굴중...

 

▲엑바타나 고대 유적지 아르메니아 교회 

 

▲엑바타나 고대 유적지 아르메니아 교회 

 

▲엑바타나 고대 유적지 박물관 

 

악메다 궁터 안에 건립된 엑바타나 박물관에는 고대 바사제국 당시부터 B.C 300년 전까지 시대별로 유물이 전시되어있다. 특히 악메다 궁터에서 발굴된 궁궐의 주춧돌, 토기 등 많은 유물, 3개 국어(엘람어, 페르시아어, 바벨로니아어)로 쓰여 있는 다리오 왕의 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서 발굴된 사자상은 시내 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발굴 유품들

 

▲전시된 발굴 유품들

 

▲전시된 발굴 유품들

 

▲전시된 발굴 유품들

 

▲전시된 발굴 유품들

 

▲전시된 발굴 유품들

 

▲악메다 궁

 

▲간지나메 다리우스왕(우) 크세르세스왕(좌) 석비(石碑)

 

하마단 서쪽 5㎞ 지점의 압바스 아바드(Abbas Abad) 계곡의 석벽에 아케메니스왕조(Achaemenian Dynasty)때에 사용했던설형문자(楔形文字)로 쓰여 있는 다리오 왕과 아하수에로 왕의 비문이 있다.

 

그 비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왕권의 위해함과 그 왕권은 아후라 마즈다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기록이다. 오른쪽의 것은 다리오왕의 것이며 왼쪽의 것은 아하수에로 왕의 것이다. 이러한 유물은 성경상의 인물을 실증해 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간지나메(보물책)의 쐐기문자 

 

크세르세스 왕이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조로아스타의 신 마스다에게 감사하는 내용이다.

 

▲쐐기문자

 

페르시아 왕들의 무덤

 

페르세폴리스에서 약6km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좌측으로부터 아닥사스다, 아하수에로, 다리오1세, 다리오2세의 무덤이다.

 

페르시아의 왕들의 계보는 고레스ㅡ캄비세스ㅡ스멜디스ㅡ다리오1세ㅡ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ㅡ아닥사스다1세

ㅡ다리오2세ㅡ악사스다2세ㅡ다리오3세이다.

 

▲아닥사스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왕의 묘

 

아하수에로의 아들이며 사마리아 사람들의 잘못된 정보에 의하여 성전건축을 하지 못하도록 조서를 내린 사람이다.

후에 악메다 궁에서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고 다리오2세왕이 조서를 내려서 다시 성을 건축하라고 할 때 아닥사스다도

귀환을 명령하고 에스라를 통하여 성전의 귀한 물건들을 돌려보낸다. 또한 느헤미야가 술관원으로 섬겼던 왕이다.

느헤미야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해주었다.

 

▲다리오 1세의 묘

 

캄비세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며, 가우마타의 반란을 제압하여  왕이 되었다.(비스툰비문에 기록) 다리오는 인도, 소아시아를정복하였고 그리스를 점령하기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마라톤전투에서 패하게 된다. 페르세폴리스와 수산성을 세웠다.

▲비스툰 비문(碑文)

 

헨리 로린슨은 영국의 오리엔트학자(1810~1895)로 비스툰에 있는 다리우스 일세의 비문에 쓰인 설형 문자를 해독하여

아시리아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저서에 《비스툰의 페르시아 설형 문자 비문》 따위가 있다.

 

비스툰비문은 지상으로부터 약70m 높이에 위치해 있어 사람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로린슨은 산정상(500m)에서

자일을 타고 내려와 최초의 사본을 만들었다. 비스툰이란 말은 "신의 장소"라는 뜻이다.

 

▲비스툰 비문(碑文)

  

고대근동의 문자를 해결하는 열쇠의 역활을 했던 비문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비문들은 대개 3가지 쐐기문자들로 쓰여졌다. 즉, 당시의 패르시아인들이 고안한 인도-유럽어의 하나인 고대페르시사어, 수사를 중심으로 주전 3100년경부터 쓰여져 오던 엘람어, 그리고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빌론 제국과 앗시리아 제국의 언어였으며 셈어의 아주 오래된 형태였던 아카드어로 쓰여졌다.

 

이 비문은 바빌론, 하마단, 수사를 이으면서, 동으로는 중앙 아시아와 인도와 통하고 서쪽으로는 터키와 그리스를 잇는

‘왕의 대로(Royal Road)’ 였던 길위에 위치해 있다.이란의 북서부 케르만샤(Kermanshah) 동쪽에 있다. 다리오 왕은 자기가 어떻게 왕좌에 오르게 되었는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521년 지상으로부터 깍은 듯한 절벽인 곳에 지상 69m위로, 가로 7m 와 세로 18m 의 비문과 가로 3m 와 세로 55m 의부조석상과 비문을 새겨 놓았다.

 

▲비스툰 비문(碑文)

 

약 2500년 전에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이 해외 원정 중 전사하자 우후죽순처럼 권력을 잡겠다고 일어나는 지방 제후들을다리오 왕이 평정하고 왕이 된 과정을 적고 있다고 한다. 

 

캄비시스는 이집트 정벌 중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오는 자기가 페르시아 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다리오 왕이 주변의 반란군들을 다 점령하고 가장 악질적으로 반항하며 자신을 고레스 대왕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던 제사장 가우마타를  발로 밟고 나머지를 한 줄로 묶어 끌고 오는 장면을 석산 중턱에 부조로 새기고 페르샤 고대문자, 일람문자, 바벨론 문자등 3개 국어로 자신의 승전 기사를 벽에 새겨 놓은 것이다.

 

▲비스툰 비문(碑文)

 

▲다리오2세의 무덤

 

아닥사스다 1세의 아들이다. 왕위 후계자 아하수에로 2세를 살해한 이복형인 소그디아누스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이복누이인파리사티스와 결혼하였으나 그녀의 강한 성격 탓으로 시리아 ·리디아 ·메디아에 내란이 잇달아서 이집트를 잃었다(BC 410).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때문에 그래도 나라는 유지했다. 이후 다리오 2세 때에 알렉산더에 의해 결국

페르시아는 패망하게 되고, 헬라시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