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Susa)ㅡ이란 남서쪽의 수사(Susa)에 있는 예언자 다니엘의 묘.
▲수산궁 터
기원전 7세기에는 북부의 앗시라아가 침공하였고, 기원전 331 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Alexader) 대왕이 쳐내려 와서 파괴하였으며, 4세기 사산조 페르시아 때는 샤프르 2세가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면서(40만명 학살) 파괴하였고, 마지막으로 13세기에는 징기스칸의 손자인 훌레구칸이 쳐 들어와서 완전 폐허를 만들어 놓았다. 성경 구약의 다니엘 서와 에스더 서의 무대였던 수산궁터 자리이다.
수산(수사)은 이란 남서쪽에 있는 아와즈에서 북북서쪽으로 117㎞쯤 떨어져 있다.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의 수도였던 수산은 오늘날 수스(Shush)라고 불리운다. 수산은 선사시대에서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란 문명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이었던 도시이다.
특히 이곳은 사르디스(성경의 사데)와 엑바타나(성경의 악메다), 페르세폴리스로 가는 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 수산은 5000여년 이상이나 되는 역사적 도시임이 밝혀졌다. 이 지역에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엘람 민족이 거주하여 신석기 문화를 이룩하였고 아케메니아인들의 지배 기간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기원전 324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신하와 병사들 1만명이 이 지역의 처녀들과 집단결혼을 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이후 수산조 왕조의 사푸르 2세(309∼379년)는 기독교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수산을 파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후에 에란샤르 사푸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으며 아랍에 다시 점령된 이후부터는 점차 쇠퇴하여 오늘날에는 중소도시 규모를 갖고 있다. 수산궁터는 시내 외� 산 언덕 위에 있었고 19세기말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 수산궁터가 발굴 되었다. 한쪽으로는 수산 성터가 텔(언덕) 형태로 자리잡고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수산궁터가 있다.
수산궁터의 모습은 건축물의 기초 흔적만 남아 있고 북쪽 끝에 돌로 된 쌍사자 석상만이 홀로 궁터를 지키듯 서 있다. 성경에서 수산은 느헤미야 1장 1절과 다니엘 8장 2절에 한번씩 소개되었고 에스더서에는 여러 번 기록돼 있다(1:2,5:2,9:6). 아하수에로왕 시대에 수산궁은 화려와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다리오(다리우스) 대왕 때의 비문에서 수산궁의 건축에 언급된 부분을 보면 레바논과 간다라에서 많은 재물을 가져왔으며 사르디스와 박트리아에서는 금, 코라스미아에서 터키옥을 가져왔다.
또 은은 이집트, 벽 장식품들은 이오니아, 상아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왔고 돌기둥은 엘람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각국에서 기능공(목수 석수 벽돌공 세공인 등)이 징발되어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사치와 화려함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다.
에스더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인 이곳 수산궁에서 아하수에로는 즉위식을 갖고 3년째에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다니엘은 벨사살왕 3년에 엘람의 수도인 수산성에 있었으나 숫양과 숫염소의 이상을 본 것은 을래강변이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즉위 20년 기슬르월에 수산궁에서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며 기도한 후(느 1:1∼40) 왕의 허락를 받아 위험하지만 빠른 길을 선택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수산궁터에서 아래 마을 사우르 강둑의 동쪽에 다니엘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이 묘는 이슬람 시아파 교도들에게 중요한 참배처가 되고 있었다. 천으로 덮여 있는 다니엘의 석관은 일종의 가묘이나 다니엘의 묘는 9∼18세기까지 아랍인 작가들에 의해 자주 언급됐다.
1164∼73년 사이 이란을 여행했던 투델라의 벤야민(Benjamin)에 의하면 셀주크 왕조의 산야르(Sanjar 1117∼1157) 도시에 살던 두 지역 주민들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다니엘의 관을 유리관에 넣어 그 도시 중앙에 있는 강의 다리에 매달아두도록 했다. 수산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와 살던 곳 중의 하나로 다니엘과 느헤미야, 에스더의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다니엘...구약성서 《다니엘서》의 주인공으로, 구약시대의 4대 예언자 중 마지막 인물.
▲성채에서 바라본 수사궁터. 화려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건물의 기초석만 남아있다
수산(수사)은 이란 남서쪽에 있는 아와즈에서 북북서쪽으로 117㎞쯤 떨어져 있다. 오늘날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아와즈까지 기찻길이 있으나 실제로 기차는 이곳까지 가지 않는다. 또 도로 사정도 좋지 않고 위험할 뿐만 아니라 장거리이기 때문에 나는 비행기로 아와즈까지 가서 그곳에서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와즈에서도 수사까지 가는 동안 휴게소나 숙박시설,특별한 식당이 없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 서둘러 아와즈를 출발했다. 차는 2시간여만에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의 수도였던 수산에 도착했다.
수산에 도착한 나는 가장 먼저 수산궁터가 있는 곳을 찾았다. 수산궁터는 시내 외귱 산 언덕 위에 있었고 궁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 19세기말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 수산궁터에서 발굴된 벽돌로 세운 성 위로 올라갔다.
한쪽으로는 수산 성터가 텔(언덕)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수산궁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건물 위에서 내려와 궁터에 가보니 화려했던 수산궁터의 모습은 건축물의 기초 흔적만 남아 있었고 북쪽 끝에 돌로 된 쌍사자 석상만이 홀로 궁터를 지키듯 서 있었다.
수산궁터에서 아래 마을로 내려가면 사우르 강둑의 동쪽 다니엘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이 묘는 이슬람 시아파 교도들에게 중요한 참배처가 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도 많은 사람이 다니엘의 묘가 있는 곳을 참배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관리인은 멀리 한국에서 온 우리를 특별 대우해 다니엘의 묘가 있는 곳으로 곧바로 안내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지 않고 천으로 덮여 있는 다니엘의 석관 바로 앞에까지 갈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다니엘의 묘는 일종의 가묘이나 다니엘의 묘는 9∼18세기까지 아랍인 작가들에 의해 자주 언급됐다.
1164∼73년 사이 이란을 여행했던 투델라의 벤야민(Benjamin)에 의하면 셀주크 왕조의 산야르(Sanjar 1117∼1157) 도시에 살던 두 지역 주민들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다니엘의 관을 유리관에 넣어 그 도시 중앙에 있는 강의 다리에 매달아두도록 했다고 전한다.
수산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와 살던 곳 중의 하나로 다니엘과 느헤미야,에스더의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수산에서 우리는 다니엘의 절개 있는 신앙과 느헤미야의 예루살렘성에 대한 간절함,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민족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글 작성자 Scc 반딧불)
▲수산궁 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슈쉬(Sush), 다니엘(Daniel)묘가 아주 잘 보인다.
수사의 사우르 강둑 동쪽에 있다. 이슬람교는 물론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지로 여겨지며 이곳 이외에도 몇 개 더 있다. 그러나 수사에 있는 묘지는 이슬람교적인 해석으로 인해 이슬람 시아파 교도들에게 중요한 성지순례지로 여겨지며 항상 수많은 참배객들로 붐빈다. 이유는 묘지에 '무함마드가 올 것을 예언한 구약의 선지자'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으로 덮여 있는 다니엘의 석관은 일종의 가묘이지만 이슬람교에서는 가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 사후르강옆에 있는 다니엘의 묘
▲다니엘의 묘, 뽀족 탑
▲다니엘의 묘가 보이는 수산의 오늘날의 모습
▲다니엘의 묘, 뽀족 탑
▲다니엘의 묘, 뽀족 탑
▲다니엘의 묘, 뽀족 탑
▲다니엘 묘 입구
▲다니엘의 묘, 뽀족 탑
▲다니엘의 묘, 뽀족 탑
▲다니엘 묘 입구 전정
▲다니엘의 묘
▲다니엘의 묘, 뽀족 탑
▲다니엘의 무덤 문 모자이크 사자굴
▲Daniel's Answer to the King by Briton Rivière
▲Daniel refusing to eat at the King's table, early 1900s Bible illustration
▲Daniel in the Lion's den protected by an angel by François Verdier
▲다니엘의 무덤
다니엘의 무덤이라는 것은 사실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이란에만 해도 말라 아미르(Mala Amir)라는 곳에 하나 더 있고, 이라크에는 바빌론, 키르쿠크, 모술, 묵다디야에 있고, 터키 남부 타르수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도 있다 한다.
그가 죽은 곳은 특정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 전승되는 얘기는 그가 수사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이란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공통으로 참배하러 오는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아랍인들이 수사를 점령하였던 640년 경에 이곳에 다니엘의 유해가 든 관이 있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의 동네 사람들 끼리 그 유해를 가지고 다투는 통에(영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한다) 당시 지배자에 의해 강물에 수장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70년에 개보수 된 상태인데, 아래쪽으로 물이 흐른다고 하는데, 봐서는 잘 모르겠다.
여기는 다른 묘들과 마찬가지로 입장료가 없었다. 입구를 들어가면 안마당이 있고, 마당 안에 몸을 씻는 작은 연못이 있고, 앞에 아이스크림 콘을 세워 둔 듯한 건물이 있는데, 거기가 묘가 있는 곳이다. 입구부터 화려하게 거울조각으로 장식이 되어 있고,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매우 많다.
입구는 여자들의 입구와 남자들의 입구가 분리되어 있다. 다니엘의 묘로 보이는 하려하게 치장된 금속제 상자에 사람들이 몰려 들어 손을 짚고 기도를 하거나, 입을 맞추거나 하였다.
원래 묘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는 표지가 있었지만, 현지인들이 아랑곳 하지 않기에 나도 그들 처럼 사진을 찍었다. 관이 있는 내부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돈이 수북하였다.
▲다니엘의 무덤
▲다니엘의 무덤
▲다니엘의 무덤
▲다니엘의 무덤 천장
▲다니엘의 무덤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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