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앙ㅡ잔다르크가 화형으로 처형당했던 장소에 세워진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동상
▲프랑스 파리. 생토귀스탱교회 앞에는 폴 뒤부아(Paul Dubois)가 만든 잔다르크 동상이 서 있다
▲잔다르크 교회가 있다. 잔다르크 교회는 프랑스 북부 루앙 구시가 광장 근처에 있다.
이곳은 잔다르크가 1431년 5월30일 19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던 장소인데 현재 이곳에 현대적인 건물로 교회를 세웠다.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교회
▲잔다르크 교회 내부
▲잔다르크 교회 내부
▲잔다르크 교회 내부
▲잔다르크 교회 내부
▲잔다르크 교회 내부
▲Médaille de Jeanne d’Arc,« la bonne Lorraine
▲Statue de Jeanne d'Arc, Cathédrale de Reims, Prosper d'Épinay (1836-1914)
▲화형 으로 처형 당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가톨릭의 성녀(聖女). 로렌과 샹파뉴 사이에 있는 동레미라퓌셀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1429년의 어느 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서 루아르 강변의 시농성(城)에 있는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7세)를 방문하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북반부를 영국군 및 영국에 협력하는 부르고뉴파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왕위도1420년의 트루아의 조약에 따라 샤를6세 사후에는 영국왕 헨리5세가, 또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헨리6세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어, 황태자 샤를은 제외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잔 다르크는 샤를을 격려하고 그에게서 받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영국군의 포위 속에서 저항하고 있던 오를레앙 구원에 앞장서서 싸웠다.영국군을 격파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흰 갑주에 흰 옷을 입고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그 해 5월 상순,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완전히 패퇴하였다. 랭스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토록 하였다. 이에 샤를 7세는 영국의 헨리 6세에 앞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잔 다르크에 대한 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잔 다르크는 더욱 충성을 하였다.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에서 승리를 갈구했던 영국군과 그녀를 이단으로 간주했던 교회에 의해 화형당했다.당시에는 명색 뿐이지만 재판도 이루어졌는데,이 모든 것은 피에르 코숑 주교가 영국의 앞잡이로 주관했다. 당시 프랑스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서 영국-브르고뉴(옛 프랑스 땅에서 프랑스 왕실과 대립하던 왕국) 동맹군과 대립하고 있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에 화려한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잘난 사람 주변에는 시기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당시의 실세였던 왕세자(후의 샤를 7세)의 측근인 총리대신 트레무유는 잔다르크와 전략 면에서 대립하고 있었고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치적 암투를 하기에는 너무 어린 소녀였다. 샤를 7세가 즉위한 뒤 그녀는 왕실 고문관들과 대립을 시작했고,트레무유의 농간에 따라 성을 포위하고도 물자 부족으로 철수하는 등 고전했다.
잔다르크는 브르고뉴가 다시 국왕의 편인 도시(콩피에뉴)를 공격하자 이를 원조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매우 소수만이 그녀를 따랐기 때문에 그곳에서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녀를 체포한 사람은 장 드 뤽상부르라는 사람이었는데, 일단은 그녀를 자신의 성에 가두었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 왕실은 잔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고, 교회와 영국은 서로 그녀의 이단행위(그들의 주장으로는)를 벌하려 하였다.
영국과 교회가 서로 잔을 자신들의 포로로 만들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피에르 코숑이라는 주교가 잔느를교회재판에 넘겨 마녀임을 입증하도록 영국을 설득했다. 이리하여 잔 다르크에 대한 교회재판이 노르망디의 루앙 성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녀는 성에 수감되었는데, 벽 두께가 12 피트였고 쇠구슬이 달린 사슬로 손발이 묶였다. 다섯 명의 경비병이 함께 기거하며 밤낮으로 감시하였고, 그녀를 희롱하거나 심지어 강간하려고 까지 하였다. 그녀의 재판은 이름만 종교재판이지 종교적 재판이어서 피에르 코숑 주교가 재판을 주도하였다. 코숑 주교는 교회지도자들의 그룹을 조직하였고, 60여 명이 자문관으로 임명되었다.
코숑과 르메르트(이단심문소 특별재판부 부심문관)이 재판관, 코숑의 친구인 장 데스티베가 검찰관이 되었다. 검찰관은 그녀를 매춘부, 신성모독자라고 모욕하며 고문, 스파이, 속임수 등을 사용했고 온갖 간사한 방법을 동원해(이름뿐이지만) 증거및자백을 수집했다.
그러나 잔다르크는 변호사도, 자문가도 없었고 읽을줄도, 쓸 줄도 몰랐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당당하고 논리에 맞는 말로 맞처 오히려 코숑 등을 당황하게 했다. 이 재판은 당시의 기준으로도 1. 비공개로 열려 발언권 및 행동권이 보장되지 못했고 2. 프랑스 왕의 명예와 직결됨에도 변호의 기회가 없고 3. 혐의사실들이 피고인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4. 변호인이 없다 는 문제점이 있었다.
1431년 5월 24일, 잔은 생투앙 교회묘지로 호송되었고그곳에서 종교재판의 판결문이 낭독되었다.군중들이빨리 화형시키라며 소리지르는 집단적 광기의험악한 분위기 가운데 통제력을 잃은 잔은 교회와 재판관의 처분에 따르겠다는 서류에서명하고 말았고, 이에 코숑은 그녀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5월 29일, 잔느는 다시 세속법정에 회부되어 화형이 결정되었다. 62명의 재판관 가운데 20명은 참석하지 않았다. 5월 30일, 그녀는 긴 검정옷을 입고이단, 타락자, 배교자, 우상숭배자라고 쓰여진 모자가 그녀의 빡빡 깍인 머리에 씌워졌다.
잔 다르크의 화형은 올드마켓에서 진행되어 그 재는 세느강에 뿌려졌다. 뒤에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판결을 파기(1456), 명예를 회복시켰고 카톨릭교회에서는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잔다르크 황금 동상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과 튈르리정원 사이에 있는 피라미드광장에는
잔다르크의 황금동상이 있다
▲프랑스 파리. 생토귀스탱교회 앞에는 폴 뒤부아(Paul Dubois)가 만든 잔다르크 동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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