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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ㅡ스트라스부르(Strasbourg)ㅡ꽃할배도 반한 알자스 스트라스부르ㅡ노트르담 대성당

by 삼수갑산 2022. 5. 1.

알자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꽃할배도 반한 알자스 스트라스부르 /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전경

 

1988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성당과 4개의 교회, 로앙 팔레 등 기념물들이 중세도시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가톨릭 신앙이 부활하면서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 귀족들이 속속 이주해 왔다.

 

특히 부르고뉴의 로앙 집안은 1704~1789년에 스트라스부르 주교를 4명이나 배출했고, 사교계를 주도했다. 심지어 대주교인 가스통 아르망 막시밀리앵 드 로앙 수비즈는 1732~1742년에 대성당 곁에 로앙 저택을 지을 정도였다. 파리의 궁정 건축가 로베르 드 코트는 태양왕의 서자라고 일컫는 아르망을 위해 전형적인 파리식 저택을 지었다.

 

이 저택에는 훌륭한 주교 도서관 외에 나폴레옹이 스트라스부르에 머물 때 쓰려고 준비한 침실도 있다. 이 밖에도 네덜란드계 옹기장이 아농의 스트라스부르 공장에서 만든 바로크 양식의 도자기가 유명하다. 오리나 거위처럼 생긴 수프 접시, 올리브와 엉겅퀴를 놀라울 만큼 사실적으로 새겨 넣은 접시 등의 견본을 저택에 전시해 놓았다.

 

지금의 스트라스부르는 희한하게도 라인란트의 전형적인 전원풍 이미지와 파리의 분위기를 합쳐 놓은 모습이다. 이것은 건축가들이 스트라스부르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모두 로앙 성을 보고 지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로앙 성의 영향은 컸고, 로앙 가문의 권력 또한 대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로앙 가문의 마지막 대주교 루이 르네 에두아르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단두대를 피해 도망해야만 했다. 그는 라인 강을 통해 안전한 바덴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에텐하임에서 죽고 말았다.

 

혁명가들은 대성당을 ‘이성의 전당’으로 바꾸어 놓았고, 많은 성인의 그림과 조각을 파괴했다. 다행히도 탑만은 화를 면했는데, 누군가가 궁리한 끝에 얇은 금속판을 모자 모양으로 만들어 씌워 탑의 모습을 숨겼기 때문이다. 혁명은 주교의 본거지를 하나의 지방 도시일 뿐이라고 얕보았는데, 나중에 행정상의 거점이 되어 중요성을 되찾았다.

 

황홀한 대성당···한많은 몽생오딜···드넓은 포도밭···꽃할배도 반하다 / 트램 천국 프랑스 알자스 스트라스부르

/ 프랑스서 만난 작은 독일···맥주·와인 공존 / 하늘로 우뚝 솟은 대성당 142m 첨탑 “와∼"

/ 대문호 위고도 극찬···밤엔 아트쇼 캔버스로 / 트램 타고 도심 쌩쌩···볼거리 ·먹거리 가득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노트르담 대성당은 스트라스부르 옛 시가지의 중심에 있다. 1771년에 독일의 대표적인 시인인 괴테가 처음으로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을 보고는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압도되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응장한 규모를 지닌 성당의 전체적인 인상이 내 혼을 진정시켰고, 조화롭게 통합된 많은 세부의 모양을 나는 차분히 음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식별해서 설명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했다.

 

예전에는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이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1176년에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남쪽 익랑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문이 두 짝 남아 있는데, 이것이 개축 전에 있던 대성당의 흔적이다.

 

이 대성당에 있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상징적으로 의인화한 여성상 2점(복제품, 원작은 노트르담 박물관 소장)은 샤르트르에서 활동하던 어떤 성당 건축가가 1220~1230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천사의 기둥’과 함께 성모 마리아의 대관과 죽음을 나타낸 팀파눔은 당시 조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남쪽 익랑 문을 통해 대성당으로 들어가면 ‘천사의 기둥’이라고 하는 ‘최후의 심판 기둥’이 있다.

 

이것 또한 앞서 말한 이름 없는 성당 건축가의 작품이다. 이 예술가는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사람들을 3층으로 나누어 표현했다. 아래쪽에는 복음서 기자를 등장시켰고, 가운데에서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있다. 위쪽에서는 그리스도와 천사들이 가시관, 십자가, 창 등 고난과 구원의 상징을 몸에 달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장엄하다는 말은 이때 쓰는 단어인가 보다. 첨탑이 불에 타기 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가봤지만 이 성당보다 장엄하지는 못했다. 프랑스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노트르담 대성당. 분홍색을 띠며 신비한 색감으로 변한 대리석 외벽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이 성당 하나만으로도 스트라스부르를 찾은 이유는 충분하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알자스에 가면 거리 이름이 온통 독일어 발음이다. 독일과 스위스 국경을 마주하면서 문화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13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자유도시였지만 17세기 종교전쟁 때는 스웨덴에 점령됐었다.

 

루이 13세 때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차지했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의 지배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서야 다시 프랑스 땅이 됐다. 세계 최고 프리미엄 와인 생산국 프랑스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맥주가 명성을 떨치며 와인과 절묘하게 공존하는 배경이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인기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로 한국인에게 이름을 알린 스트라스부르는 역을 나서면 콜마르처럼 많은 호텔들이 즐비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인 시가지 안쪽에 숙소를 정했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을 걸어서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탄할 만큼 거대하고 섬세하다.” 프랑스의 대문호 위고가 극찬을 했다니 성당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설렌다. 숙소에서 10분 정도 골목길을 구경하며 걷자 레스토랑이 즐비한 샤토광장(place du Chateau)에 에 믿기 어려운 풍경이 나타난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높이에 “와∼” 하는 찬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광각렌즈가 아니면 도저히 한 컷에 담을 수 없는 높이. DSLR 카메라에 장착할 광각렌즈가 없었지만 광각렌즈가 있는 최신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과 함께해서 쉽게 거대한 대성당을 잘 담을 수 있었다. 성당 외벽에 새겨진 엄청난 조각작품들은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위고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낸 이유를 이제 알겠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옛 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대성당은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랜드마크로 이곳 사람들은 ‘그(La) 성당’이라고 부르는데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142m 높이 첨탑으로 어디서나 보인다. 첨탑은 1176년 짓기 시작해 1439년 완성됐다는데 19세기까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었다.

 

1838년 완성된 대성당의 유명한 천문시계는 매일 낮 12시 30분에 종을 울린다. 레스토랑 메종 캄머젤(Maison Kammerzell)에 앉으면 음식과 와인을 즐기며 노을에 따라 바뀌어가는 대성당을 음미할 수 있다. 어둠이 내리면 대성당의 외벽은 거대한 아트쇼의 캔버스로 바뀐다. 음악을 곁들인 레이저 쇼가 펼쳐지는데 매일 저녁 10시부터 세 차례 열리니 놓치지 말자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중세로의 시간 여행

 

스트라스부르는 콜마르에서 TER로 30분거리다. 따라서 일정이 빡빡하다면 숙소를 옮기지 말고 두 곳 중 한곳에 숙소를 정하고 TER로 오고 가도된다. 많은 관광객들이 스트라스부르를 찾은 이유는 이곳에서 알자스의 관광명소를 둘러볼수 있는 알자스 관광청의 투어 프로그램(COEUR d'ALSACE TOUR) 버스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도시라는 명성에 맞게 다섯 개 노선의 트램(A~E)이 도심과 주변 지역을 연결한다. 플라스 클레베르(Place Kleber) 북쪽의 플 라스 드 롬 드 페르(Place de l'Homme-de-Fer)가 가장 큰 허브다. 이 곳에서 트램을 타고 에뚜알 부스(Etoile Bourse) 정류장에서 내려 시외 버스정류장격인 에뚜알 공원(Parc de l'Etoile)으로 건너가면 투어 버스가 기다리다.

 

투어는 알자스 관광청 홈페이지(https://tour.alsace/boutique/our-tours/tour-coeur-dalsace/?lang=en)에서 직접 예약하면 된다. 10명 정도 탈 수 있는 작은 밴인데 지붕이 열려 차에 알자스의 맑은 공기와 바람을 맘껏 즐길수 있다. 중간중간 주요 포스트에 멈춰 서기 때문에 차에 탄 채로 사진을 촬영할 수있다.

 

무엇보다 이 투어의 매력은 헤드폰을 쓰면 다양한 외국어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데 한국어도 지원된다는 점이다. 오전 9시에 출발해 오후 7시30분에 다시 버스를 탄 곳으로 돌아온다.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고 명소에 한두 시간씩 머무르며 느긋하게 둘러보면서 식사도 즐길 수 있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南門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南門 위 시계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은 안길이가 103m, 너비가 41m, 신랑의 높이가 32m이며, 가는 기둥들이 닫집을 받쳐 준다. 12~14세기에 만든 훌륭한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로 빛이 들어와 삼랑식 신랑을 가득 채운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스테인드 글라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성인상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천문 시계

 

높이가 3m나 되는 커다란 천문 시계이다. 기계 장치는 1838~1842년에 수리했지만, 장치가 들어 있는 상자는 16세기에 만든 것이다. 정오가 되면 12명의 사도가 1줄로 늘어서서 그리스도를 향해 절을 하고, 그리스도는 손을 들어 축복을 내린다.

 

그 뒤 금속 수탉이 날개를 퍼덕이며 3번 시각을 알린다. 매시 정각에는 낫을 든 죽음의 신이 나타나며, 인간의 일생을 나타내는 아이, 소년, 어른, 노인 넷이 15분마다 시각을 알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천문 시계와 천사의 기둥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천사의 기둥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천문시계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地球儀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벽면 장식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장미창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장미창

 

트레이서리도 아름답지만, ‘클레메르가세(상인의 거리)’를 마주보고 있는 파사드의 원형 장미창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 색채의 묘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섬세한 세공을 새긴 이 예술 작품은 지름이 13m나 된다. 이것은 슈타인바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스테인드 글라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유리畵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유리畵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유리畵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유리畵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벽면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벽면

 

▲생토마 성당

 

13세기에 지은 생토마 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부르주아지 거주지에 둘러싸여 있지만 단연 돋보인다

 

◈프티프랑스와 생토마 성당

 

관광 명소인 나무 골조 가옥 사이를 일 강이 흐르고 있고, 그 수로를 따라 관광용 잔교가 늘어서 있다. 프티프랑스라 일컫는 이 구역은 한때 풍기문란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최고의 매력 포인트이다. 피혁 공장의 심한 악취와 거리의 매춘부도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에는 매독을 치료하는 전문 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질병을 들여온 사람은 프랑스인이라고 한다. 이 지역을 프티프랑스라 일컫는 것도 이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당시 이 성병을 치료할려면 많은 수은이 필요했는데, 수은은 피혁업자가 업무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이런 병원이 들어섰을 것이다.

 

피혁 직공들이 사는 구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노트르담 대성당만큼이나 중요한 고딕 양식의 생토마 성당이 있다. 스트라스부르의 개혁과 더불어 이 도시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 성당이다. 지금도 프로테스탄트를 신봉하는 이 성당에서 1521년부터 설교를 한 알자스의 마르탱 뷔세로는 그보다 3년 전인 1518년부터 마르틴 루터를 열렬히 옹호했다.

 

대성당에서 가톨릭식 미사를 올린 것은 1559년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태양왕 루이 14세가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한 1681년 이후 이 도시에 가톨릭이 부활했다. 태양왕은 생토마 성당의 전통을 인정해 시의 모든 기관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한테 번갈아 맡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가톨릭을 믿는 사람은 겨우 2가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연주한 오르간

 

생토마 성당의 오르간은 1740년에 요한 안드레아스 질버만이 만든 것이다. 질버만은 스트라스부르 출신으로서, 악기 제작으로 유명한 작센 왕가의 사람이었다. 모차르트는 1778년에 이 오르간을 사용해 콘서트를 열었는데, 관객이 그다지 모이지 않은 것은 불만이었지만, 이 오르간에 대해서는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1906년에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이 악기로 바흐의 푸가를 연주하는 것은 정말 한없는 기쁨’이라고 말했다. 유명한 의사이자 신학자인 슈바이처는 생토마 성당의 보조 신부와 교육 간부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이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다. 루이 15세 시대에는 생토마 성당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일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이었다.

 

그래서 국왕은 가장 유능한 장군 모리스 드 삭스의 유해를 1777년에 이 교회로 옮겼다. ‘삭스 원수’는 비록 1750년에 샹보르 성에서 죽었지만,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기 때문이다. 교구 사제와 지역 주민들의 뜻과는 반대로 교회의 내진에는 장 바티스트 피갈이 만든 웅장한 영묘가 있다.

 

이 곳에는 여성이 곡을 하면서 원수를 만류하고, 원수는 막무가내로 죽음을 상징하는 열린 관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원수의 뒤쪽에는 프랑스 국기가 펄럭이고 있고, 바닥에는 오스트리아의 독수리, 영국의 표범, 프랑스의 사자가 재기불능 상태로 축 늘어져 있다.

 

▲스트라스부르와 콜마르를 오가는 TER

 

▲자건거 천국으로 불리는 친환경 도시 스트라부르의 트램

 

▲알자스 관광청 투어 버스 출발장소

 

▲알자스 관광 투어 버스

 

▲절벽에 서있는 몽 생 오딜 (Mont Sainte Odile)

 

▲몽 생 오딜 (Mont Sainte Odile)

 

 

▲몽 생 오딜 Mont Sainte Odile

 

버스는 보쥬산맥을 한참 오르는데 무려 높이 764m 산 꼭대기에 수도원 몽생오딜(Mont Sainte Odile)이 아찔하게 서 있다. 이곳에 오르면 알자스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 알자스 공작은 첫 아이로 건강한 아들을 원했지만 왜소한데다 눈까지 먼 딸이 태어나자 죽이라고 명한다.

 

아내의 끈질긴 설득으로 딸은 부르고뉴의 수녀원으로 옮겨져 겨우 목숨을 구하고 12살때 ‘빛의 딸’이라는 뜻의 ‘오딜’을 세례명으로 받는다. 남동생이 그를 찾아내 오딜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이번에는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를 피해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숲으로 피난한다.

 

그제서야 공작은 오딜의 운명을 받아들여 호넨부르 성(Honenbourg)을 딸에게 기부해 수도원을 열었고 많은 소녀들이 찾아와 오딜과 함께 자선을 베풀었단다.

 

▲오베르네(Obernai) 거리

 

▲1619년에 세워진 호텔 겸 레스토랑 줌 쉬노갈로쉬(Zum Schnogaloh)

 

▲오 쾨니스부르(Haut-Koenigsbourg)

 

12세기 지어진 오-쾨니스부르(Haut-Koenigsbourg)는 중세건축 양식이 잘 보전된 성으로 와인, 밀, 소금, 은을 운반하는 길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중세시대의 무기와 벽화, 르네상스 양식의 가구들을 만날 수 있다.

 

▲오 쾨니스부르(Haut-Koenigsbourg)

▲알자스 와인로드에 있는 포도밭을 소개하는 와이너리 구스타브 로렌츠의 오너 조지 로렌츠(오른쪽)

 

알자스는 유명한 와인산지 답게 보쥬 산맥의 오른쪽 기슭을 따라 스트라스부르에서 콜마르까지 170km에 달하는 포도밭들이 펼쳐져 있는데 이를 알자스 와인 루트(La Route des Vins d'Alsace)로 부른다.

 

이 길에 아름다운 마을들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는 그중 한곳이 중세마을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오베르네(Obernai)다. 쁘띠 베니스의 확장판이라고 보면 될정도 마을 어디를 촬영해도 모두 그림엽서다.

 

버스는 이곳에서 두시간을 머무니 화보같은 인생샷을 건지고 싶다면 여벌의 옷을 준비하자. 특히 곳곳에 맛집들이 널려 있는데 1619년에 세워진 호텔 겸 레스토랑 줌 쉬노갈로쉬(Zum Schnogaloh)의 테이블에 앉으며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

 

출처 / segye.com / 스트라스부르=글·사진 최현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