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를 달리는 특급 호텔…‘오리엔트-익스프레스’ 열차가 돌아왔다
파리서 베네치아 1박2일 / 돌아온 ‘궁극의 열차 여행’
▲베니스 심플론 오리엔트-익스프레스(VSOE) 열차가 오스트리아 티롤 지역을 통과하고 있다./벨몬드
“레이디스 앤드 젠틀맨, 마담 에 무슈! 전설적인 열차 ‘베니스 심플론 오리엔트-익스프레스(Venice Simplon Orient-Express·VSOE)’ 탑승을 환영합니다. 열차가 곧 파리 동역(東驛·Gard de l’Est)을 출발합니다. 흔들릴 수 있으니 열차 내에서 이동하실 때 항상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오후 3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열차가 미끄러지듯 기차역을 빠져 나왔다. 그늘에서 벗어난 열차의 금빛 창틀과 문 손잡이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짙은 푸른색 몸체에 흰 지붕을 이고 있는 열차는 잘 차려 입고 페도라까지 쓴 세련된 신사 같았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여행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무대이기도 했던 오리엔트-익스프레스 열차가 화려하게 귀환했다.
◇호화 여행의 대명사
몰도바 출신 여성 승무원 안토니나가 ‘이스탄불 그랜드 스위트’ 객실로 안내했다. 내부는 여러 색과 재질의 목재를 상감 기법으로 끼워 맞춰 고급스럽게 꾸몄고, 바닥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화장실은 온통 대리석으로 발랐고, 샤워 부스도 있었다.
응접실에는 소파와 대리석 테이블이 창문 아래 고정돼 있었고, 그 위에 고급 샴페인 ‘뵈브 클리코’와 크리스털 잔이 놓여 있었다. 안토니나가 서양 3대 진미로 꼽히는 캐비아를 샴페인 옆에 놓으며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주저 말고 호출 버튼을 눌러 달라”고 했다.
오리엔트-익스프레스 열차는 벨기에 CIWL(Compagnie Internationale des Wagons-Lits)사가 1883년 운행을 시작했다. 벨기에 사업가 조르주 나겔마케르가 8개 철도회사를 연합해 유럽을 가로질러 터키 이스탄불까지 달리는 세계 최초 대륙 횡단 열차였다.
런던과 파리를 출발해 스위스에서 알프스산맥을 관통하는 심플론 터널을 지나 이탈리아 밀라노·트리에스테,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불가리아 소피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등을 거쳐 이스탄불을 오가는 노선이었다.
▲'베니스 심플론 오리엔트-익스프레스' 승무원들이 손객들의 열차 탑승을 돕고 있다./벨몬드
▲'베니스 심플론 오리엔트-익스프레스' 열차는 런던·파리-베네치아 노선을 기본으로 오스트리아 빈, 헝가리 부다페스트, 터키 이스탄불 등 다양한 도시를 운행한다./벨몬드
19세기 중반까지도 여행은 길고 불편하고 종종 위험했다. 오리엔트-익스프레스는 당시로서는 가장 빠르고 호화로운 열차였다. 값비싼 목재와 대리석 등으로 꾸민 침대차와 식당차를 갖춘 오리엔트-익스프레스는 호화 여행의 대명사가 됐다.
왕족, 귀족, 외교관, 사업가 등 유럽 상류층이 즐겨 타고 고풍스러운 도시와 알프스 풍광, 이스탄불의 신비로움을 즐겼다. 열차는 고급 사교장으로 활용됐고,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소설과 영화의 배경이 됐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1934년 발표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등장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열차는 비행기에 밀리기 시작했다. 오리엔트-익스프레스로 2박 3일(60시간) 걸리던 파리-이스탄불을 비행기는 4시간 만에 주파했다. 오리엔트-익스프레스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점차 노선을 줄여나가다 1977년 운행을 중단했다.
미국 억만장자이자 열차 애호가 제임스 셔우드는 오리엔트-익스프레스의 종말이 안타까웠다. 1977년 소더비 경매에서 1920년대 생산된 오리엔트-익스프레스 침대 차량 2대를 사들였다. 그는 열차를 추가로 구매해 원래 모습대로 복원했다.
셔우드의 열정 덕에 오리엔트-익스프레스는 1982년 런던에서 밀라노를 거쳐 베네치아까지 운행되며 되살아났다. 1998년부터는 이스탄불까지 노선을 연장하며 전성기를 되찾는 듯했다. 하지만 초고속 열차와 저가 항공이 등장하면서 2009년 유럽 열차 시간표에서 사라졌다.
◇철로 달리는 5성급 호텔
오리엔트-익스프레스가 정규 열차로서는 운행을 중단했지만, 고급 열차 여행으로는 살아남았다. 셔우드가 1982년 설립한 VSOE이다. 여행의 수단에서 여행의 목적이 된 것이다.
1982년 런던·파리를 출발해 밀라노를 거쳐 베네치아까지 운행하는 기본 노선 운행을 시작했고, 이후 오스트리아 빈·인스브루크, 헝가리 부다페스트, 부쿠레슈티, 이스탄불 등으로 비정규 열차를 운행한다.
2019년 프랑스 명품 그룹 LVMH는 오리엔트-익스프레스 열차와 상표권, 45개 고급 호텔을 셔우드로부터 사들여 벨몬드(Belmond)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양측이 액수를 밝히지 않았지만, 여행업계에서는 LVMH가 셔우드에게 26억달러(약 3조3000억원) 이상 지불했다고 추산한다.
LVMH가 오리엔트-익스프레스를 사들인 건 어쩌면 당연하달 수 있다. 그룹의 모태인 ‘루이비통’이 1854년 여행 가방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창업자 루이비통은 뚜껑이 둥그런 기존 여행 가방과 달리 평평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여러 가방을 포개 쌓기 편리한 루이비통의 가방은 막 유행하기 시작한 열차와 유람선 여행객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이를 발판으로 루이비통은 최고 명품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베니스 심플론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그랜드 스위트. 침실과 응접실, 샤워부스가 딸린 화장실로 구성됐다./벨몬드
▲대리석으로 마감한 그랜드 스위트 내 화장실./벨몬드
VSOE를 사들인 건 사업적 득실도 물론 고려한 결과다. 코로나 직전까지 럭셔리(명품)는 ‘소유’에서 ‘체험’으로 움직이는 추세였다. 계속해서 번영하려면 명품을 팔기만 해서는 어렵고, 호텔·여행 등 체험의 영역으로 나가야 하는 LVMH 입장에서 ‘오리엔트-익스프레스’는 큰돈을 들여 확보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브랜드였다.
LVMH는 1920~1930년대 생산된 열차 수리 및 복원을 위해 VSOE 운행을 잠시 중단했다가 최근 재개했다. 여행객 반응은 폭발적이다. 열차 지배인 미켈레 로카(Rocca)는 “거의 모든 객실 예약이 완료된 상황”이라고 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열차 여행 인기가 되살아나고 있어요. 노스탤지어 때문이기도 하고, 시설이 좋아진 점도 있지요. 탄소
배출 규제에 따라 유럽 각국에서 단거리 비행 노선을 줄여나가기로 한 정책과도 맞물렸고요.”
◇3스타 레스토랑 뺨치는 식당차
저녁 식사는 오후 7시 30분 시작됐다. 바닷가재·아보카도·부라타 치즈로 구성된 전채에 이어 메인, 모둠 치즈, 티라미수 수플레 디저트 4코스로 이어졌다. 메인은 비프 웰링턴과 올랑데즈 소스·감자를 곁들인 넙치 오븐구이 중 선택 가능했다.
파리 최고급 호텔 플라자아테네 레스토랑을 맡았으며 TV에도 자주 출연하는 스타 셰프 장 앵베르(Imbert)의 지휘로 준비된 요리들은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과 다름 없었다.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바(bar)에서 칵테일까지 한 잔 마신 뒤 객실로 돌아오니, 안락한 침대가 준비돼 있었다. 일반 객실의 경우 승객이 저녁을 먹는 동안 승무원이 좌석을 침대로 변신시켜 놓는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크루아상과 과일, 요거트 등으로 구성된 ‘컨티넨털(유럽식) 브렉퍼스트’를 안토니나가 객실에 차려줬다. 저녁 식사 때는 프랑스 남동부가 창밖에 펼쳐지더니, 아침에는 이탈리아 북부, 점심에는 중부 토스카나 풍광이 흐르는 ‘뷰(view) 맛집’이었다.
▲최고급 크리스털 잔과 은제 식기, 도자기 접시로 차려진 '베니스 심플론 오리엔트-익스프레스' 식당차 테이블.
이 곳에서 내는 음식은 프랑스 스타 셰프 장 앵베르가 진두지휘한다./벨몬드
열차는 밤새 스위스 로잔을 지나 심플론 터널을 통과해 이탈리아로 넘어와 달리고 있었다. VSOE는 밀라노를 거쳐 베네치아로 가는 짧은 루트와, 피렌체를 거쳐 로마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피렌체로 올라가 베네치아로 가는 긴 루트가 있다. 둘 다 1박 2일이지만 짧은 루트는 대략 24시간, 긴 루트는 30시간가량 소요된다.
기자가 탑승한 VSOE는 피렌체와 로마를 거치는 긴 노선을 달렸다. 밀라노를 지나니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는 포(Po)강 양옆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졌고,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피렌체로 갈 때는 야트막한 언덕과 바늘처럼 뾰족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후 4시, 애프터눈티를 즐기고 얼마나 지났을까, 뉘엿뉘엿 지는 해에 붉게 물든 베네치아 석호(潟湖)가 보이기 시작했다. VSOE가 산타루치아역(驛)에 천천히 멈춰 섰다. 꿈 같던 여행이 종착역에 도착했다.
출처 / chosun./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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