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Havana)
아! 그때 그 춤을 꼭 췄어야 했는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기억을 떠올리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쇼에서 갑자기 불려나와 춤을 추는 댄서. ⓒ이승원
미국 음식은 별로 맛이 없지 않나요? 거의 모든 음식에 치즈와 버터, 설탕을 너무 많이 넣어서 원래 재료의 맛을 느끼지 못하겠어요. 저는 여기 와서 미국 음식보다는 멕시코 음식을 더 많이 먹었어요.” 얼마 전 뉴욕의 택시 운전사에게 들은 말이다.
그는 미얀마 출신인데 멕시코 음식과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태양의 후예>를 1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빠짐없이 시청했으며, <주몽>의 광팬이라고 한다. 뉴욕의 한식당에서 매콤한 제육볶음에 맥주를 곁들여 먹으며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이 그의 낙이라고 한다.
‘한국 음식은 많이 맵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태국 음식과 비슷한 미얀마 음식은 훨씬 더 맵다며 한국 음식은 ‘매운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그가 좋아하는 멕시코·한국·미얀마 음식 사이에 뭔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바로 정신 번쩍 들게 맵다는 것. 그 매콤함이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스트레스를 확 날아가게 해주며 어딘가 ‘살맛’이 날 것 같은 신명을 돋운다.
멕시코나 페루, 쿠바, 칠레 등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직항을 찾기 어려워 미국이나캐나다를 경유해 가야 한다. 그러다보니 경유지의 대기시간을 합치면 꼬박 24시간 넘게 비행기에 묶여 있어야 한다. 이 어마어마한비행시간을 견디지 않고도 라틴아메리카로 여행할 방법은 없을까
▲멕시칸 푸드의 대명사 타코. 이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쉽게 즐길 수 있는 멕시코 음식이 되었다.
/ 픽사베이 제공
생각해 보면 우리의 짐작보다 아주 가까운 곳에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일상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들이 널려 있다.
언제부턴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 멕시코 음식점에서 온갖 다양한 풍미를 살린 타코를 즐길 수도 있고, 삼바나 살사를 비롯한 신나는 라틴아메리카 댄스를 언제든 찾아볼 수도 있으며, 이제는 집에서도 IP TV를 통해 쉽게 쿠바나 아르헨티나 영화를 찾아볼 수도 있다.
게다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어쩌면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나의 동경은 파블로 네루다나 이사벨 아옌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같은 작가들의 작품들에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라틴아메리카의 매력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니, 예상보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화는 훨씬 우리와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내 동경은
그곳 작가들의 작품에서 시작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으며
칠레인들의 일상과 사랑을 체험
영화 <일 포스티노>로도 리메이크돼 한국에서도 사랑받은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다시 읽으며 나는 ‘집에서도 라틴아메리카의 모습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영화도 아름답지만 소설은 영화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칠레 민초들의 일상과 사랑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메타포가 무엇이냐’고 묻는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즉석에서 파도와 바다의 움직임을 멋진 은유를 섞어 시로 지어낸 네루다. 위대한 시인 네루다의 즉흥시를 들으며 마리오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이상하다며 이렇게 말을 한다.
“제가 마치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 시인은 마리오의 표현에 감격해 이렇게 속삭인다.“내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시인은 우편배달부가 자신도 모르게 메타포를 만들어냈음을 눈치챈다.“네가 뭘 만들었는지 아니, 마리오?” “무엇을 만들었죠?” “메타포.” 마리오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표현은 그저 우연히 튀어나온 것일 뿐이라고 한탄한다.
네루다는 이렇게 말한다. “우연이 아닌 이미지는 없어.” 마리오는 자신이 뭔가 해냈음을 알아차리며,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소리가 마치 가슴과 식도를 통과해 혀까지 치받쳐 올라오는 듯한 강렬한 흥분을 느낀다. 시인만이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아름다운 메타포는 시인들이나 만들어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시골 우편배달부인 나도 아름다운 메타포를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니.
그리고 내친김에 마리오는 하늘같이 우러러 보이는 시인 네루다에게 이렇게 질문을 한다.“선생님은 온 세상이, 즉 바람, 바다, 나무, 산, 불, 동물, 집, 사막, 비……. (……)선생님은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이 놀라운 질문을 듣자 시인은 입이 떡 벌어진다. 하나를 알려주니 열을 알아내는 총명한 제자를 만난 것이다.
▲쿠바 아바나 거리에서 만난 체 게바라의 엽서. 혁명의 아이콘, 젊음과 열정의 상징으로
여전히 체 게바라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이승원
메타포의 ‘메’자도 몰랐던 우편배달부가 시인의 가르침을 동력 삼아 멋진 시를 지어내는 기적은 마치 독재와 폭정으로 인한 울분과 분노를 삭일 수 없었던 칠레 민중들이 마침내 ‘분노를 표현할 언어’를 찾아내는 과정의 또 다른 메타포처럼 다가왔다.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했던 숙맥 마리오가 네루다의 시를 은근히 모방하여 멋진 연애시를 지어내자 네루다는 화를 버럭 내며 투덜거린다.
자네는 내 시를 도용한 것이라고. 그랬더니 이제는 용감하다 못해 당당하고 뻔뻔해진 마리오가 천연덕스럽게 응수한다.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너무도 총명한 마리오의 지적은 ‘누구나 시를 지을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낭송하여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용감한 선언문처럼 다가온다. 네루다의 시는 물론 시인이 혼자 썼지만 그것은 결국 시와 혁명과 낭만을 사랑하는 칠레 민중 모두의 것이 되었다.
아바나의 ‘소셜 클럽’ 공연 도중
최고의 디바에게 춤 신청 받고도
제대로 춤추지 못해 후회막급
내 안의 소심증 극복하는 계기로
아바나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나는 ‘사람이 이렇게 춤을 아름답게 출 수 있구나’라고 감탄하게 만든 뛰어난 댄서를 만났다. 그녀는 막 댄서로 뽑힌 상태였고, 아직 정식으로 무대에 데뷔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정식 공연
프로그램이 끝나고 피날레 무대에서 모두가 어우러져 흥겹게 춤을 출 때, 그녀는 무대 위로 갑자기 불려나왔다.
그녀는 무대 의상이 아니라 평소에 입던 옷차림으로 갑자기 즉흥적으로 불려나와 춤을 추었지만, 관객을압도하는 신명과 열정으로 모두의 열광적인 환호를 이끌어 내었다. 그녀로 인해 막판에 더욱 후끈 달아오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공연이 끝나자, 그녀는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환하게 웃었다.
온몸에서 멜로디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듯한 그녀의 열정적인 춤에 감명받은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당신의 춤은 놀라웠다. 동작 하나하나가 정말 아름답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스페인어를 알았더라면 더 멋진 칭찬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어설픈 영어로 칭찬의 말을 하려니 부끄러웠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나도 아까 무대에 불려나온 너의 춤을 봤다, 귀여웠다”며 빙그레 웃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 씩 웃고 나오며 내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후회했다. ‘아휴, 이 바보. 막춤이라도 췄어야 하는데. 잘 추지는 못해도 최선을 다했어야 하는데.’
▲나에게 춤을 청했던 멋진 여인. 뛰어난 가창력으로 노래를 부르면서도
동시에 격렬하게 춤을 출 수 있는 엄청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그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춤을 신청받았다. 맨 앞자리에서 워낙몰입하여 공연을 보고 있으니 내가 눈에 띄었나 보다. 나에게 춤을 신청한 그녀는 폭발적인 가창력을 지닌 가수였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무대에 나가긴 했는데, 정말 부끄러워서 춤을 제대로 추지도 못했다.
이런 아름다운 무대에서 나 같은 몸치가 춤을 추는 것은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그러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정신은 그런 것이 아닌데. 누구나 흥겹게, 막춤이든 개다리춤이든 신나게 춤추면 되는 것인데.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후회의 문장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아, 그때 춤을 췄어야 했는데.’ ‘막춤이라도 췄어야 했는데.’ ‘평소의 나를 잊으러 떠난 여행에서 웬 자의식 과잉이람, 에휴.’ 살면서 쿠바의 가수에게, 그것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최고의 디바에게 춤 신청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는가. 후회막급이었다.
그때의 그 후회가 내 안의 어딘가를 건드렸나보다. 얼마 전 미국에서 귀국하는 길, 공항에서 세계 당구계의 사대천왕 중 한 명인 다니엘 산체스를 만났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튀어나왔을까. 나는 종이와 연필을 갑자기 찾을 수가 없어 휴대폰 메모기능을 켜서산체스에게 보무도 당당하게 아주 씩씩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다니엘 산체스 선수 맞으시죠? 저는 한국의 팬이에요. 여기에 사인을 해주실 수 있나요?” 산체스 선수는 전혀 몸을 사리지 않고 흔쾌히 웃으며 사인을 해주었다.‘그때 춤을 추지 못했던 나’가 이제야 용기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혼자 여행 다닐 때는 하루 종일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그 상황을 즐겼다. 뭔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억지로 해야 하는 평소의 내가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멋진 쿠바 여성과 신명나는 춤을 추지 못한 회한’이 내 깊은 무의식의 어느 부분을건드렸는지, 나도 모르게 가끔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모를 신기한 용기가 튀어나온다.
세계 당구계의 제왕 다니엘 산체스를 만난 날, 나는 조금씩 소심증을 극복하고 있는 내 모습에 깜짝 놀라내 자신에게 물어보았다.아, 내가 이렇게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신하다니. 나 자신에게 깜짝 놀라 ‘이 사람이 과연 내가 맞나,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싶어 거울을 한 번 더 보게 되었다.얼굴은 그대로였지만 표정에서 뭔가 전에 없던 명랑함과 활기가 느껴졌다
진정한 여행은 여행이 끝난 뒤에 그 여행을 추억해보며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또 한 번 마음속에서 다시 시작되곤 한다. 나에게 여행이 완성되는 순간은 여행을 단지 ‘기억’하는 것을 넘어 그 여행에 대해 ‘글’을 쓰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아바나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공연을 보면서 만난 그 눈부신 댄서, 그리고 온몸으로 노래하던 그 가수도 바로 그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마음의 여행을 가능하게 해준 뮤즈다. 어떤 여행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마음속에서 계속 상영되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아름다운 영화처럼 느껴진다.
출처 / kyunghyang.com / 정여울.작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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