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순교聖地ㅡ서소문 밖 순교성지(조선왕조 최대의 순교 형장)
▲서소문 밖 순교성지
103위 순교 성인들 중 44명의 성인 성녀와 124위 시복시성추진 대상자중 25명과 함께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가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이다.
한국 교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바로 이곳에서 "월락재천수상지진(月落在天水上池盡)", 즉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라고 하여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거한 바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숨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 성인품에 오른 이만도 44명으로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희광이의 칼 아래 스러져 갔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 형장이 기억하는 첫 인물은 만천(蔓川) 이승훈이다.
그는 한국 교회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훗날 조선 교회의 베드로로서, 본명이 의미하는 반석(盤石)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전교에 힘쓰던 그는 신유박해의 서슬로 최필공·정약종·홍교만·홍낙민·최창현 등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간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이들 여섯 명의 당당한 태도와 굳센 신념은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 정약종은 약현·약전·약용 형제와 함께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명도회의 회장을 역임한 그는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주자학과 도가 사상을 깊이 탐구했다. 그러나 그는 마침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온 한역 천주교 서적들을 손에 넣게 되고 주어사 강학회를 통해 천주교를 수용한다.
같은 때 강완숙을 비롯한 여교우들도 한꺼번에 참수된다. 최초의 여신도 회장이자 주문모 신부를 숨겨 준 죄목으로 아들 홍필주와 함께 체포된 강완숙은 몇 번이나 주리를 틀리면서도 주 신부의 거처를 함구하다가 다른 4명의 여교우와 함께 이승훈 등이 처형된 그 자리로 끌려 나간다.
▲서소문 순교성지 위치도
서소문 밖 형장은 현재 서소문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서소문 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서소문 역사 공원과 인근 부지가 조선의 공식 처형지로 등장한 것은 1416년(태종 16년)이다.
개국 초 동대문 밖에서 사형을 집행하던 조정은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서경≫ 기록을 근거로 서소문 밖을 사형장으로 삼았고, 주로 능지처사나 효수, 사사 등 중죄인들 형장으로 이용됐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서 역사에 등장했다.
▲서소문 밖 순교성지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바로 사직단(현 사직 공원에 위치) 우측이었고, 또 한양의 성문 밖이란 점도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으므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으며,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서소문 밖 형장의 순교사는 첫 단계가 신유박해(1801년) 때이다. 이때에는 그 대상이 지도층 신자들이었다
▲서소문 밖 순교성지
1801년 2월 26일에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1756~1801, 베드로)이 처형을 당하고 동시에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1760∼1801. 아우구스티노) 등 5명이 순교하였다.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1761~1801, 골룸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다.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1775~1801, 알렉시오)의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 현(1763~1801, 바오로), 황심(1757~1801, 토마스) 등 5명이 순교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1839년)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1802~1839, 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1787~1839, 아가타)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1795~1839, 바오로)과 유진길(1791~1839, 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1797~1839, 엘리사벳)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서소문 밖 순교성지
세 번째의 병인박해(1866년) 때는 남종삼1817~1866, 요한) 성인 등 3명으로 나타난다. 병인박해 당시에 많은 신자들은 심문 도중 맞은 매의 후유증이나 전염병, 옥중의 불법적 교수형으로 치명했다. 이로써 서소문 밖 성지는 103위 순교 성인들 중 44명의 성인 성녀와 124위 복자중 25명의 복자 등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가 되었다.
이들 순교자들의 피어린 순교지인 서소문밖 네거리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파악되지 않고 다만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아현 고가도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부근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을 기념하여 한국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순교자 현양탑’을 서소문 공원 내에 세웠다.
▲서소문 밖 순교성지
▲서소문 밖 순교성지
▲순교자 현양탑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이 때 처형된 이들 중에서 41명이 성인품에 올랐는데 그중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도 포함돼 있다. 그는 고문의 혹독함에 굴복해 한 번 배교한 후로는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과 그의 누이 정정혜 그리고 정하상과 같이 북경을 여러차례 다녀온 유진길과 불과 13세의 나이로 부친과 함께 순교한 유대철 소년 역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는 또다시 피로 물든다. 베르뇌 주교 등 외국 선교사들이 순교하던 바로 그 날 여기서는 남종삼, 홍봉주가 피를 흘린다. 그리고 이들의 머리가 네거리 말뚝에서 채 내려지기도 전에 최형·전장운의 목이 잘린다.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현양탑 뒷면
▲순교자 현양탑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부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하였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알렉산델)의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 현계흠,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소문 밖의 작은 개천가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박해는 막을 내렸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다)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제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바르바라)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세 번째의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사람은 남종삼 성인 등 3명으로 나타난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대박해 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은화(隱花, 숨은 꽃)들이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다만 그들 모두 양같이 순하게 칼을 받았고 신음도 원망도 없이 오직 천주를 행한 한마음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만 미루어 헤아릴 뿐이다. 지금은 서소문 시민 공원으로 단장돼 있는 이 순교의 현장에는 103위 성인의 탄생을 본 1984년, 한국 천주교 현양 위원회에서 세운 순교자 현양탑이 하늘로 치솟아 건립돼 있다.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상
▲순교자상
▲복된 순교자의 삶
▲복된 순교자의 삶
▲왼쪽 순교성인 44위 순교자 명단
▲왼쪽 순교성인 44위 순교자 명단
▲왼쪽 순교성인 44위 순교자 명단
■ 순교 성인
신유박해(1801년) 때 부터 이곳은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지기 시작했는데 이승훈(베드로)을 비롯하여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강완숙(골롬바), 최창현(요한)등 주로 평신도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또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는데 기해박해 순교자
41위와 병인박해 순교자 3위가 각각 1984년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 1. 성녀 고순이 바르바라(1798∼1839)
고순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고광성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교우인 박종원과 혼인하여 3남매를 두고, 모범 가정이라고 칭찬을 들으며 살았다. 또한 회장인 남편을 도와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병약자를 간호하는 등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봉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10월 26일 남편이 먼저 체포되고, 그 이튿날 고순이도 체포됨으로써 포청에서 남편과 만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형조에서도 남편과 함께 고문을 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편과 함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고순이는 12월 29일 남편 박종원보다 한 달 먼저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2. 성 권득인 베드로(1805∼1839)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권득인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여읜 뒤 혼인하였다. 얼마 동안은 약장사를 하는 형과 함께 살다가 분가하여 성패(聖牌)와 성물(聖物)을 만들어 팔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항상 새벽 닭이 울 때 일어나 촛불을 켜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권득인은 1839년 1월 16일 아내, 처남, 어린 자녀 등 4명의 가족 그리고 김 로사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그의 신앙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뒤에 가족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자 권득인은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35세였다.
◆ 3. 성녀 권희 바르바라(1794∼1839)
이광헌의 부인이며 이 아가타의 어머니인 권희는 1817년 경 남편과 함께 입교하였다. 박해 때문에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회장을 맡은 남편을 도와 주교와 신부들을 맞아들였고 또 교우들을 권면하여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4월 7일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수차의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다. 특히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이 고문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끝내 모정을 억제하고 온갖 유혹과 형벌을 견디어 냈다. 이렇게 처참한 5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4. 성녀 김 루치아(1818∼1839)
동정 순교자 김 루치아는 강원도 강촌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4세 때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고, 부모를 여윈 뒤로는 자신을 받아 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천진한 태도와 한결 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 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 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5. 성녀 김 로사(1784∼1839)
과부가 된 뒤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친정 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는 1839년 1월 16일 권득인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을 때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큰 주인이시라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1839년 7월 20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때 나이는 56세였다.
◆ 6. 성녀 김성임 마르타(1790∼1839)
인천 부평에서 태어난 김성임은 혼인에 실패한 뒤 서울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점쟁이와 재혼하였다. 이때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하던 김성임은 1839년 4월 11일 자신이 몸 붙이고 있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한 뒤 이미 체포된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7. 성녀 김아기 아가타(1787∼1839)
김아기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교리를 배웠다. 기억력이 나빠 12단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여 교리를 배우던 중 1836년 10월 김업이, 한아기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아기는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였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다음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마리아 밖에 모르는 김아기가 왔다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후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아기는 형 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53세였다.
◆ 8. 성녀 김업이 막달레나(1774∼1839)
김업이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동정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권유로 혼기에 이르러 교우 청년과 결혼하였다. 중년이 되어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와 함께 애고개(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팔며 살았다.
노모에게 순종하는 좋은 표양과 해박한 교리 지식으로 외교인들에게 전교하며, 순교할 결심으로 살아가던 김업이는 1836년 10월 김아기, 한아기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 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이 유예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66세였다.
◆ 9. 성녀 김 율리에타(1784∼1839)
동정 순교자인 김 율리에타는 시골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다 잘라 버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모는 냉담하여 낙향하였으나, 김 율리에타는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혀 10년 동안 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궁에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서 일을 해 주며 품삯을 모아 집을 마련하고, 혼자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또 늘 언행에 조심하였으며 그래서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 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불렸다. 기해박해가 있던 1839년 7월에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끝에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5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10. 성녀 김장금 안나(1789∼1839)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김장금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와 함께 이광렬과 친하게 지냈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장금은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마침내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11. 성 김제준 이냐시오(1796∼1839)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로 충청도 면천(沔川)땅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4년에 순교한 할아버지 김진후와 큰아버지의 권면으로 입교한 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무렵 나 베드로(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836년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순성 일당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고 한때 배교하였으나, 형조로 이송된 후 배교를 취소하고 9월 26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 12. 성녀 김효임 골룸바(1814∼1839)
동정 순교자 김효임은 서울 근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뒤 전 가족이 입교하고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김효임은 두 여동생과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39년 4월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두 자매는 포청에서 이른바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 벗긴 채 남자 죄수 방에 넣어졌으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남자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김효임은 형조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13. 성녀 김효주 아녜스(1816∼1839)
언니 김효임과 같이 동정 순교자인 김효주는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뒤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로 이사해 살았다. 아버지를 여읜 뒤 온 가족이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언니 김효임, 동생 김 글라라와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는 아름다운 덕행과 극기로써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5월 3일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잔인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형조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1839년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14. 성 남명혁 다미아노(1802∼1839)
서울에서 태어난 남명혁은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매우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 모든 세속의 나쁜 일과 손을 끊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더욱 열심히 살아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신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들을 방문하였으며 또 ‘성의회'(聖衣會)라는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신부를 도와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초 한 예비신자의 밀고로 4월 7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 때 그의 집에서 제의류(祭衣類), 경본(經本),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포청과 형조의 관원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그러나 남명혁은 모든 고통을 참아 냈고, 함께 체포된 아내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님을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뒤 5월 24일 이광헌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리기를 바랐던 남명혁은 한창 나이인 38세에 자신의 뜻대로 순교하였다.
◆ 15.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1780∼1839)
서울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남이관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와 혼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그는 경상도 단성으로 귀양 갔다가 30년 만인 1832년에 풀려 나와 이천에 있는 처가에서 살았다. 그 뒤 상경하여 처가의 인척인 정하상의 신부 영입 운동을 도와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입국시키고, 그에게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뒤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처가가 있는 이천으로 내려가 숨었으나 9월 16일에 체포되었다. 김제준과 함께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여기에서 유진길, 정하상과 함께 신문을 받고,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6일 남이관은 8명의 교우와 함께 6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 16.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1817∼1866)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등과 논의하여 영불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6차의 국문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 17. 성녀 박봉손 막달레나(1796∼1839)
서울에서 태어난 박봉손은 15세쯤에 시골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남편과 시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계모 김 체칠리아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친정에는 여러 교우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어 늘 번잡하였으나 박봉손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궂은 일과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초 외삼촌과 함께 체포되었다. 박봉손은 형관에게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침내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 18. 성녀 박아기 안나(1783∼1839)
강원도 강촌 출신의 박아기는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였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하였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아기는 남편, 큰아들 응천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남편과 큰아들은 심한 고문으로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아기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모진 고문을 이겨 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 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배교하고 가족들에게 돌아가라는 형관의 갖은 유혹과 고문에도 박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57세였다.
◆ 19.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1786∼1839)
박큰아기 마리아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궁녀인 동생 박희순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다. 1839년 4월 15일 동생과 함께, 피신해 있던 전경협의 집에서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 냈다. 동생 박희순이 순교한 지 100여 일이 지난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54세였다.
◆ 20. 성 박후재 요한(1799-1839)
‘명관’으로도 불리던 박후재는 경기도 용인 지방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여읜 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성장하면서 물장사를 하는 노모를 도와 짚신과 미투리를 팔아 생활하였고, 36세 때 교우 처녀와 결혼하였다. 1839년 5월 아내를 피신시키고 혼자 체포된 박후재는 포청에서 치도곤 40대를 맞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였다.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 피가 낭자하게 흘렀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고 또 흉악한 죄수들에게는 천주교의 바른 도리를 강론하였다. 이어 형조로 이송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박후재는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21. 성녀 박희순 루치아(1801∼1839)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박희순은 뛰어난 미모와 재주 때문에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으나, 어린 순조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다. 30세 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으나 궁녀의 신분으로는 신앙생활이 어려워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왔다. 그 뒤로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 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을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박희순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전경협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박희순은 언니, 전경협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 낸 박희순은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22. 성녀 원귀임 마리아(1818∼1839)
동정 순교자 원귀임은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아홉 살 때 서울의 친척집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때 동정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언제나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3월 29일 원귀임이 있던 친척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길거리에서 원귀임을 아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던 원귀임은 정신을 가다듬고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오직 죽을 뿐입니다." 하며 배교를 거부하니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원귀임은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7월 20일 일곱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 22세였다.
◆ 23.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1791∼1839)
순교 당시 정3품 당상 역관의 높은 벼슬에 있었던 유진길은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특히 철학과 종교 문제에 관심을 갖고 10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연구하였으나 진리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던 중, 1823년 우연히 「천주실의」의 일부분을 구해 읽고는 사방에 수소문한 끝에 천주교 진리를 터득하고 곧 입교하였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 뒤 유진길은 북경 교회와 연락을 담당하며 8차례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정하상, 조신철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는 교황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였고 그 결과 유방제 신부, 나 모방 신부, 정 샤스탕 신부, 범 앵베르 주교 등이 입국하게 되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7일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9월 22일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24. 성 이광렬 요한(1795∼1839)
‘경삼’으로도 불렸던 이광렬은 명문 양반인 광주 이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22세쯤 형 이광헌과 함께 입교한 뒤 헌신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였으며, 정하상,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북경을 왕래하며 나 베드로 모방 신부,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 등을 맞아들였다. 북경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한 뒤로는 육식을 끊고, 극기와 인내로 동정을 지키며 생활하였다. 1839년 4월 7일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 내고,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25.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1787∼1839)
이광헌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경기도 광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거듭되는 박해로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하게 살면서도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며 외교인에게 전교하였다. 그리고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 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신자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이광헌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주어 이광헌은 4월 7일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형문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된 그는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냈다.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5월 24일 남명혁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26. 성녀 이매임 데레사(1788∼1839)
20세에 과부가 되어 경기도 봉천의 친정으로 돌아온 이매임은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조카 이정희와 영희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이영희가 동정 생활을 결심하여 서울로 피신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1839년 4월 초 이매임은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을 이겨 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에 감동하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마침내 4월 11일 자수하여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니, 그 때 나이 52세였다.
◆ 27. 성녀 이소사 아가타(1784∼1839)
이소사는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17세 때 결혼하였으나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살면서 어머니, 동생 이호영과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는데, 1835년 2월(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호영 베드로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참아 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 속에서도 동생과 함께 한날한시에 순교하자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동생을 먼저 순교의 영광을 입게 하고 자신은 동생이 옥사한 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5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28. 성녀 이연희 마리아(1804∼1839)
이연희는 남명혁의 부인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사리에 밝았다. 회장인 남편을 도와 공소를 세워 주교와 신부를 맞아들이고 또 교우들을 가르쳐 성사를 준비하며 언제나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 열두 살 된 어린 아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는 주님의 영광입니다." 하며 모정을 억누르고 자신도 혹형과 고문을 감수하였다.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3차의 형문을 받았으나 역시 굴하지 않았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3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29. 성녀 이영덕 막달레나(1812∼1839)
동정 순교자인 이영덕은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외할머니의 권면으로 신앙을 갖게 되었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과 혼인할 것을 강요하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는 꾀병을 앓기도 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그러나 주교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교는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으나, 조선 풍습에 가출했던 부녀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는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를 각오하고, 주교가 체포되면 자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자수할 틈도 없이 6월 어느 날 집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살이 끝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2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30.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1809∼1839)
동정 순교자 이영희는 경기도 봉천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권면으로 어머니 허계임, 언니 이정희와 함께 어린 나이에 입교하였다. 성장하면서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이매임과 함께 살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김성임, 김 루치아,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일곱 번 형문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31.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1799∼1839)
경기도 봉천에서 태어난 이정희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 동생 영희와 함께 입교하였다. 그 뒤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동정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 청년과 결혼시키려 하자 병을 핑계 삼아 3년을 버틴 뒤 교우 청년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을 잃고 잠시 친정에 있다가 신앙생활을 위하여 집을 떠나 서울에 있는 고모 이매임의 집에 와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시초에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하여 당시 이매임의 집에 머물던 김성임, 김 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동생, 고모 등과 함께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천주교인임을 밝혔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41세였다.
◆ 32. 성녀 전경협 아가타(1787∼1839)
동정 순교자인 전경협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대궐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그 뒤 평소 친교가 있던 궁녀 박희순을 따라 입교하였으며, 박희순이 신앙생활을 위하여 궁을 나오게 되자 그도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의 습격으로 숨어 있던 박희순, 박 큰아기 등과 함께 체포된 전경협은 궁녀였다는 이유로 포청과 형조에서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참아 냈다. 이 때 조그만 관직을 잃을까 두려워한 오빠는 관리를 매수하여 누이를 독살시키려 하였으나 전경협은 독이 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5개월의 옥살이를 한 뒤,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33. 성 전장운 요한(1811∼1866)
‘승연’으로도 불렸던 전장운은 서울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하여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어머니의 권면으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지만, 사제가 없어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혼인하여 3남매를 두었다. 1866년 초 장 주교의 명으로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여 최형, 임치화를 도와 판각(板刻)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으나, 얼마 뒤 병인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고 교회 서적들이 적발되는 바람에 전장운도 3월 1일에 체포되었다. 포청과 의금부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은 뒤 3월 6일에 형조로 이송되었고, 3월 9일에 사형을 선고받아 그 날로 최형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34.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1797∼1839)
동정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의 딸로, 네 살 때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전 가족이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은 순교하였으나 정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 오빠 정하상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뒤 마재의 삼촌 정약용의 집에서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7월 11일 기해박해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대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 43세였다.
◆ 35.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정하상은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하였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 주교에게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하였으나 성품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숙부인 정약용의 집에 기거하다가 1813년 홀로 상경하여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도우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여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 베드로 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 체칠리아,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이며, 그 뒤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 36. 성 조신철 가롤로(1795∼1839)
‘덕철’로도 불리던 조신철은 강원도 회양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또 아버지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탕진하자 출가하여 한때 스님이 되었으나 23세 때 동지사의 마부가 되었으며, 30세 쯤에 유진길, 정하상 등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북경에서 세례, 견진, 고해, 성체성사를 받고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 교회와 연락을 취하며 나 베드로 모방 신부,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 주교 등을 입국시키는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신철은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6월 어느 날 처가를 습격한 포졸들이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는 것을 보고, 포청까지 따라가 자수하였다. 신문 중 그는 처가에 숨긴 성물과 성서 때문에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고, 형리들은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그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9월 26일, 45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 37.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1782∼1839)
조증이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6세 때 남이관과 혼인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하고 남편도 유배를 당하게 되자 친정으로 내려가 10여 년을 살았다. 그 뒤 서른 살쯤 다시 상경하여 정하상을 도우며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공소를 세우고, 교회와 교우들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이천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체포되었다. 남이관을 잡으려는 형리들로부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며, 그 때 나이 58세였다.
◆ 38. 성 최창흡 베드로(1787∼1839)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최창흡은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형 최창현이 순교한 뒤로는 외교인과 다름없는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서른 살쯤 교우인 손소벽과 혼인한 뒤로는 다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고 이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창흡은 순교를 결심하였고,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사위 조신철이 맡겨 둔 교회 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혹형을 받았으나 잘 참아 냈다. 형조에서도 여러 차례의 고문을 이겨 내고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39. 성 최형 베드로(1814∼1866)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최형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14세 때 부모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모두 열심한 신자였다. 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던 신학생들 가운데 병사한 최방제가 그의 동생이다. 큰 누이는 평생 동정이었으며 형 최수는 병인박해 때에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렇게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자란 최형은 1836년 나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목수일과 묵주 제작,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였고, 장 주교가 입국한 뒤 교회 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교회 서적들이 적발되자 전장운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40. 성녀 한아기 바르바라(1792∼1839)
한아기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세속의 일에 마음이 빠져 어머니의 모범과 권면을 무시하고 외교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우연히 친정에서 만난 김업이에게 교리를 다시 배우게 되었고, 30세에 남편과 세 자녀를 모두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김아기, 김업이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형관에게 천주 십계를 강론하고 의연히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후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 48세였다.
◆ 41.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1784∼1839)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한영이는 혼기에 이르러 권 진사라는 양반의 후처로 들어가 딸 권진이를 두었고, 남편이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을 남기자 딸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 뒤 신앙생활을 하고자 딸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몸 붙여 살다가 1839년 7월 17일 딸과 딸의 친구인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 42. 성녀 허계임 막달레나(1773-1839)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허계임은 시누이 이매임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어 이정희와 영희 두 딸과 함께 입교하였다. 1839년 3월,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허계임은 포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여러 차례의 형문을 당하였으나 다 이겨 내고, 9월 26일 67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 43. 성녀 현경련 베네딕타(1794∼1839)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현경련은 어려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 현계흠이 황사영의 백서 사건과 관련되어 순교한 뒤 어머니를 따라 자주 이사 다니며 살았다. 17세 때 최창현의 아들과 혼인하였으나 3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살았다. 규칙적인 독서와 기도 생활을 하였고, 여회장직을 맡아 보며 교회 일에 적극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경련은 잠시 피신했었으나 6월에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의 피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로부터 동생 현석문과 함께 혹형을 당하였으나 모두 참아 냈다. 옥중에서 동생에게 신망애 삼덕에 관한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켰다. 12월 29일 현경련은 6명의 교우와 함께 4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44. 성녀 홍금주 페르페투아(1804∼1839)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홍금주는 10세 때 입교하였고, 15세 때 외교인과 혼인한 뒤 냉담하였다. 그러나 남편을 잃은 뒤 교우들의 권면으로 신앙을 다시 찾고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살면서 가장 천한 일을 맡아 하고 또 병약자들을 돌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홍금주는 최 필립보라는 교우의 집에 있다가 그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고문을 받은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옥살이 중 서너 차례 염병에 걸려 고생하였으나 조금이라도 낫기만 하면 다른 교우들의 상처를 닦아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어 갇힌 교우들은 홍금주를 친누이처럼 생각하였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던 홍금주는 옥살이 6개월 만인 9월 26일 36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오른쪽 순교자 54위 명단
▲오른쪽 순교자 54위 명단
▲오른쪽 순교자 54위 명단
■ 124위 복자중 서소문 밖 성지에서 순교한 복자
◆ 1. 복자 최창현 요한 (1759∼1801년)
최창현 요한은 1759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입정동에서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최인길 마티아는 비록 그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집안 아저씨뻘이 된다.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고 글을 잘 알았던 그는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그 후 지도층 신자들에 의해 총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동료들과 의논하여 성직자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이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처음에 그는 포도청으로 끌려갔으나,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었으므로 즉시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처음 문초 때에 일시 마음이 약해져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다시 용맹한 마음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 2.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소사(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약종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그를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으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체포된 지 15일 만에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 3.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38∼1801년)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 출신으로 훗날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해오고 있었으며, 그도 높은 벼슬을 지낸 맏형과 함께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진사가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홍인 레오는 그의 아들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철상 가롤로는 그의 사위이다.
그는 양근에 사는 고종 사촌 권일신의 집을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런 다음 비신자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고,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더 깊이 교리를 연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치기도 하였다. 포천 지역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열성 때문이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사돈 정약종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해자들에게 발각되어 피신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2월 14일 즉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사형을 선고를 받고 정약종, 홍낙민(루가) 등과 함께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 4. 복자 최필공 토마스(1744∼1801년)
1744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난 최필공 토마스는 1790년에 사촌 동생인 최필제 베드로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토마스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큰 열성을 보였다. 그는 공공연하게 교리를 전파하고 다녔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토마스는 몇몇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유혹에 굴복하여 석방된 후 토마스는 평안도 지방의 심약(조정에 올리는 약재를 검사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또 임금의 도움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3년 뒤, 그는 심약 자리를 사임하고는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 8월에 다시 체포되어 문초를 받을 때에는 그는 용감하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이 토마스를 참수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임금은 이를 거부하고 그를 석방해 주도록 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인 12월 17일(음력), 형조에서는 그를 다시 체포하였다. 이틀 후에는 동생 최필제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최필공 토마스는 이후 이전의 행실 때문에 누구보다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사형장에서 첫 번째 칼날이 그의 목을 비켜가면서 피가 손으로 흐르자 토마스는 이것을 보면서 “보배로운 피”라고 외쳤다. 이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 5. 복자 홍낙민 루가(1751∼1801년)
홍낙민 루가는 1751년 충청도 예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와 한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1776년에는 양근의 유명한 학자 권철신의 제자가 되었으며,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1839년의 순교자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의 아들이다. 그에 앞서 그는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또 한때는 지도층 신자의 일원으로서 다른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적도 있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난 뒤, 그는 임금의 명에 따라 천주교 신앙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다. 을묘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자 두려운 나머지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도 모시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멀리한 것처럼 보였다. 2년 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루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후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두려운 나머지 처음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 루가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여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이전에 보이지 않던 용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굳게 신앙을 증거한 후 동료들과 함께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 6. 복자 최필제 베드로(1770∼1801년)
최필제 베드로는 1770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는 1801년에 순교한 최필공 토마스의 사촌 아우로, 1790년에 그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사촌인 최필공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박해자들에게 굴복하고 석방되었다. 또 석방된 후에는 거짓으로 최필공의 자백서를 써서 관청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0년 12월 19일(음력) 자신의 집에서 신입 교우들과 모임을 갖던 중에 체포되어 형조의 옥에 갇혔다. 그의 늙은 부친은 놀란 나머지 병이 나서 죽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의 부친은 비신자였는데, 죽을 때는 영세를 받았다고 한다.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허가받고 옥에서 나오게 된 그는 장례를 치른 뒤 곧바로 형조로 가서 다시 옥에 갇혔다. 그때 형조의 관리들은 그에게 넌지시 도망할 것을 귀띔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옥으로 돌아오기에 앞서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순교의 원의를 나타냈다.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 7. 복자 윤운혜 루치아( ? ∼1801년)
윤운혜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아가타)는 그의 언니가 된다. 그는 여주에 사는 정광수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결국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자기 집 마당 한편에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필립보),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니오), 강완숙(골롬바), 정복혜(칸디다) 등이었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가 체포되자, 그녀는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킨 다음,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운혜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루치아는 형장으로 끌려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8. 복자 정복혜 칸디다( ? ∼1801년)
신자들 사이에서는 ‘정 과부’라고 알려진 정복혜 칸디다는 한양 근처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혼인한 뒤 한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무렵 이합규를 만나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과부가 된 후에는 한신애 아가타, 윤운혜 루치아 등과 함께 신자들 사이의 연락과 복음 전파에 노력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성물과 서적들을 한신애 집에 숨겨두고, 교우들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2월 체포되어 그 동안의 행적을 추궁하였다. 이때 그녀는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곧 이를 뉘우치고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9. 복자 정인혁 타대오( ? ∼1801년)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던 정인혁 타대오는 1790년 무렵 최필제 베드로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형제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제사도 폐지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어 그의 형제들은 엄한 형벌에 굴복하였으나, 그는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의 가족들이 그를 회유할 수 있도록 3일 동안의 기한을 두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의 맏형은 형조로 들어가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으므로 다시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성사도 받았다. 또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회원이 되어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각각 문초와 형벌을 받고 최필제 등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10. 복자 정철상 가롤로( ? ∼1801년)
정철상 가롤로는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소사(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과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동생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가 20세가량 되었을 무렵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그들을 따라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4월 8일 부친이 순교하던 날, 그는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대면서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관리들은 문초로 그의 생각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한 달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가 최필제(베드로), 윤운혜(루치아)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이었다.
◆ 11. 복자 강완숙 골롬바(1760∼1801년)
강완숙 골롬바는 1760년 충청도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필립보)는 그녀의 아들이다. 덕산 지방의 홍지영 후처로 들어간 그녀는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고 이 후 열정과 극기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그녀의 인품을 알아차리고 여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4월 6일(음력 2월 24일) 체포되어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 12. 복자 강경복 수산나(1762∼1801년)
강경복 수산나는 1762년 양민 집안에서 태어나 궁녀가 되었으며, 그녀가 살던 집은 ‘양제궁’이었는데, 1798년 무렵 집주인 송 마리아는 수산나에게 천주교를 믿도록 권유하고 수산나는 다른 궁녀들과 함께 교리를 배우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주 신부로부터 영세를 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01년 2월 신유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킨 후 자기도 피신하였지만 얼마 안 되어 뒤따라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수산나는 즉시 문초와 형벌을 받아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것을 크게 뉘우치면서 다시 신앙을 굳게 증거 하였다. 수산나는 마침내 강완숙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 13. 복자 김현우 마태오(1775∼1801년)
김현우 마태오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 김이우 바르나바는 그의 친형이다. 김범우로부터 교리를 배워 형제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형과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형 바르나바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특히 그가 체포될 때는 찬란하고 커다란 십자가가 나타나 그의 앞에서 옥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고 전한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8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 14. 복자 문영인 비비안나(1776∼1801년)
문영인 비비안나는 한양에 거주하던 중인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여덟 살이 되던 1783년에 궁녀로 뽑혀 궁궐에서 문서 쓰는 일을 맡았다. 22살 때 병에 걸려 잠시 궁궐에서 나왔을 때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병이 완쾌되어 다시 궁궐로 들어갔으나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어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녀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모범을 본받으려고 하였으며, 자주 순교의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그러다가 집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8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는 26세의 동정녀였다.
◆ 15. 복자 김연이 율리안나( ? ∼1801년)
김연이 율리안나는 양민 출신의 부인으로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천주교의 매파(媒婆 : 중매인 노파)라고 불릴 정도로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녀는 ‘폐궁’(궁궐에서 쫓겨난 왕실의 친족이 거처하던 집이라는 뜻)인 양제궁을 자주 드나들며 왕실의 친족인 송 마리아와 그녀의 며느리 신 마리아, 궁녀 강경복 수산나 등을 안내하여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시켰다.
1800년 12월 박해가 시작되자 김계완 시몬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고, 다음해 박해령이 내려진 뒤에는 황사영 알렉시오가 그녀의 집으로 피신해 왔다.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된 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고 강완숙, 강경복, 한신애 등 동료 8명과 함께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16. 복자 이현 안토니오( ? ∼1801년)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현 안토니오는 삼촌 이희영 루가가 김건순 요사팟의 집에서 살게 되자 자주 그곳을 왕래하였으며, 1797년 가을부터 김건순에게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한양으로 올라가 홍필주 필립보의 집을 찾아가 교리를 더 공부한 뒤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정광수 바르나바, 최필제 베드로, 김종교 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 후 그는 홍익만 안토니오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이로써 홍필주와는 동서 사이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계속된 형벌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고 마음을 고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후 형조로 이송된 안토니오는 포도청에서의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동료들과 함께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17. 복자 최인철 이냐시오( ? ∼1801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철 이냐시오는 교회 창설 초기에 형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1795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인길 마티아가 그의 형이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형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다. 최인길과 몇몇 신자들은 이에 굴복하였지만, 그만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늙은 어머니와 형제들은 호소에도 신앙을 증거하였으나 임금의 회유를 받아들여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석방되었다.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깊게 뉘우쳤다.
형이 순교한 뒤 더욱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또 주문모 신부가 위험할 때마다 그 피신을 돕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언하였다. 이에 따라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 18. 복자 한신애 아가타( ? ∼1801년)
한신애 아가타는 충청도 보령에서 양반의 서녀 출신으로, 장성한 뒤 한양에 살던 조례산의 후처로 들어가 살았다. 그러다가 1795∼1796년경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전교 덕택으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강완숙의 집을 왕래하면서 정복혜 칸디다 등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고, 1800년 여름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아가타는 그 동안 다른 가족과 종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에 입교시키지는 못 하엿다. 김연이 율리안나를 비롯하여 많은 여성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강완숙과 함께 여성 공동체를 이끌어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형조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다. 그런 다음 강완숙, 김연이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19. 복자 김종교 프란치스코(1754∼1801년)
김종교 프란치스코는 1754년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의원이 되었다. 그는 가난한데다가 호감이 가지 않는 외양을 하고는 있었지만, 학문에 대한 취미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인 이벽 요한은 이러한 그를 매우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놀라운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곤 하였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김범우 토마스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처음부터 드러나게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다음해 초 세례를 받았다. 체포된 후 두 번이나 신앙을 버리겠다고 했으나 형조로 이송된 후에는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 하였다. 그는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 홍필주 필립보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 20. 복자 홍필주 필립보(1774∼1801년)
홍필주 필립보는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790년경 이존창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나 계모 강완숙 골롬바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들 필립보가 입교한 뒤로는 자신이 이해한 교리를 아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필립보 또한 어머니의 열심한 덕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부친 때문에 고향집에서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워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1795년 5월에 어머니 골롬바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자, 이때부터 신부의 복사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또 홍익만 안토니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이후 그는 자신의 집이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자, 주 신부와 신자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이곳저곳으로 집을 옮겨 다녔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와 그를 비롯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형벌이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차츰 약해졌을 때 어머니 골롬바의 권면으로 즉시 마음을 돌이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후 어머니는 먼저 순교하였지만,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고통을 받다가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 21. 복자 현계흠 바오로(1763∼1801년)
현계흠 바오로는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많은 역관을 배출했으나, 그는 역관의 길을 택하지 않고 약국을 운영하며 살았다. 1846년의 순교자 성 현석문 가롤로는 그의 아들이며, 1839년의 순교자 성 현경련 베네딕타는 그의 딸이다.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된 후 석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고,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그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또 손경윤 제르바시오, 김이우 바르나바, 정인혁 타대오 등과 함께 자주 신앙 집회를 가졌고, 신입 교우들을 인도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주문모 신부가 박해로 피신을 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집은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6회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이요 비밀 집회소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온 일가친척들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황사영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게 되자, 의금부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 22. 복자 손경윤 제르바시오(1760∼1802년)
손경윤 제르바시오는 1760년 한양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나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였다. 1790년 최필공 토마스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한 그는 두 번이나 체포되어 형조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여전히 석방되자마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 신부로부터 회장에 임명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밀고 되어 그는 아우와 함께 피신해 다니다 자기 대신 처자가 포도청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수하였다.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음이 약해졌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굳은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였다.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 23. 복자 이경도 가롤로(1780-1802년)
이경도 가롤로는 1780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의 누이였다.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누갈다)와 1827년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의 동생들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이경도 가롤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 24. 복자 김계완 시몬( ? ∼1802년)
김계완 시몬은 한양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였다. 1791년 최필공 토마스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본 뒤 얼마 후 최창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해에 일어난 신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었다. 곧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회복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 힘썼고, 동료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12월경 토마스가 체포되자, 시몬은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는 동안 시몬의 늙은 아버지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또 시몬도 가족들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로 다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문초가 계속될수록 시몬의 신심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이후 그는 형조로 압송되었고,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 25.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 ? ∼1802년)
홍익만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庶) 동생이요, 홍필주 필립보와 이현 안토니오의 장인이다. 그는 1785년 김범우 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6년 그는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자 현양탑 뒷면
▲순교자 현양탑 뒷면
▲순교자 현양탑 뒷면
▲순교자 현양탑 뒷면
▲순교자 현양탑 뒷면
▲중림동 약현성당
중림동 성당은 1886년의 한불 조약으로 박해의 시기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직후인 1891년 11월 9일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 온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고, 103위 성인 중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비롯하여 44위의 순교자가 성인품에 오른 신앙의 못자리인 서소문의 순교 성지에 서울에서 두 번째, 전국에서 아홉 번째 본당으로 설정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 온 선열들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소서문 밖 순교 성지 순교자 기념관 표지석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서소문 순교자 기념성당 내부
▲서소문 순교자 기념성당 내부
▲서소문 순교자 기념성당 내부
▲서소문 순교자 기념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출처 / blog.daum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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