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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서울 일원****기행

서울 중구ㅡ한국 천주교 聖地ㅡ서울 광희문(光熙門) 성지 (시구문.屍口門)

by 삼수갑산 2021. 8. 23.

한국 천주교 聖地ㅡ서울 광희문 성지 

▲서울 광희문 성지

 

조선의 사소문(四小門)중의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박해당시 치명한 순교자들은 모두 광희문 밖으로 내던져 졌는데, 그때마다 문 밖은 굴러 떨어진 시신이 너무 많아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의 가족이나 친지에 의해 남녀 구별에 따라 옷을 달리 입히고, 동여매서 거적으로 싸는 정도로 겨우 매장되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 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현재는 퇴계로와 을지로 길이 만나 왕십리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온갖 사연을 간직하고서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서있는 광희문은 돌 하나하나마다, 풀섶의 풀 한 포기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 꼽히는 곳을 바로 남한산성의 수구문이다. 남한산성 동문 한켠 산비탈 아래에는 사람 두어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살아서 들어간 동문'은 곧 '죽어서 나온 시구문'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광주뿐만 아니라 인근 지방인 양주, 이천 등지의 교인들은 체포되자마자 오랏줄로 꽁꽁 묶여 바로 이 동문으로 들어갔다

죽어서는 수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

 

▲광희문 성지 위치도

 

서울 성곽은 조선 시대 축성 기술의 변천 과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상들의 호국 정신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과 함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궁궐과 종묘를 지은 뒤 재위 4년만인

1395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도성 둘레에 성곽을 쌓아 이듬해 서울 성곽의 원형을 완성했다.


서울 성곽은 총연장 18㎞에 이르는 대형급 성곽으로 동서남북에 4대문을 두고, 그 사이에

4개의 소문을 두었다. 광희문은 서울 중구 광희동에 있는 조선의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다.

 

광희문은 시구문(屍軀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 때

묘소 관리 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사람이 죽으면 서울 성곽 안에는 묘를 쓸 수 없도록 하는 제도가 있어서, 일단 그 시신을 서울 성곽

밖으로 이전시켜 묘를 장만하여야 했다. 그리고 시신을 내보낼 때는 서소문과 광희문을 통해 밖으로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광희문을 시구문, 즉 시신을 내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불렀다.


광희문은 1396년(태조 5년)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몇 차례 개축을 거쳐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1915년경에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만 남아 있었는데 1966년에는 문 북쪽의 성곽 일부를

철거하고 도로를 확장하였다.

 

그후 1975년 서울 성곽을 다시 옛 모습대로 수축할 때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여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당시 퇴계로 확장 공사로 원래 위치보다 15m 남측으로 밀렸다.

◆ 사소문(四小門)


조선시대 서울 도성에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사소문을 배치하였다.

사대문은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그리고 북쪽에 숙정문이다.

사소문은 사대문 사이에 나 있던 소문(小門)을 말한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동북쪽에 홍화문(弘化門 : 東小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 : 水口門),

서남쪽에 소덕문(昭德門 : 西小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을 세웠다.


그중 동소문은 1484년(성종 15)에 창경궁을 건축하고 그 동문을 홍화문이라 하였으며

1511년(중종 6)에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그 뒤 1816년(순조 16)에 중수하고 1869년(고종 6)에 보수하였으며, 1928년에는 문루를 헐고

석문만 남겨 두었는데 그 후 전차를 부설하면서 석문마저 철거하여 지금은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수구문은 1711년(숙종 37) 새로이 석문만 건축하고 9년 후인 1720년에는 문루를 지어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1975년 도성 복원 공사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광희문 이외에 1457년(세조 3) 지금의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따로

남소문을 축조하였으나 1469년(예종 1)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폐쇄되었다.


서소문은 1738년(영조 14)에 석문을 개축하고 1744년 문루를 건축한 뒤 소의문으로 개칭하였으나 1914년

도시 계획 때 철거되었다. 창의문은 1413년(태종 13)에 폐쇄되었으나, 1741년(영조 17) 성문을 다시

고쳐 짓고 인조반정 공신의 명단을 걸게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으며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광희문 안내판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광희문 성지

 

출처 / blog.daum / sung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