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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 아시아****국가들/⊙네팔*******기행

네팔ㅡ옛 무스탕왕국ㅡ금단(禁斷)의 왕국. 무스탕을 가다

by 삼수갑산 2022. 1. 25.

네팔(Nepal)***옛 무스탕왕국ㅡ금단(禁斷)의 왕국 무스탕을 가다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 온 사람치고 금단의 왕국 무스탕을 동경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곳은 ‘금단의 왕국(Forbidden Kingdom)이라는 수식어가 말해 주듯 쉽게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외국인이 아예 들어갈 수 없어 말 그대로 ‘금단의 땅’이었다. 지금은 개방되었기는 하나 제한된 인원에 한해 허가를 얻어야만 들어갈 수 있으므로 여전히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무스탕 트레킹 루트 개념도

 

▲무스탕 트레킹 루트 개념도

 

무스탕을 가고 싶은 마음이 난 것은 네팔 트레킹을 처음 해 본 2000년 가을이었다. 18일간 안나푸르나 산군(山群)을

한 바퀴 도는 안나푸르나 서키트(Annapurna Circuit)에서 5,416m 높이의 토롱라(Thorong La)를 넘으면 힌두교와

불교의 성지 묵티나트가 나온다. 무스탕과 맞닿은 곳이다.

 

당시 그곳을 지나면서 무스탕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원정등반대처럼 정부 연락관을 동반해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에다 트레킹 허가비가 비싼 특별한 지역으로, 롯지가 없어 식량과 텐트를 가지고 가야하기 때문에 개별 트레킹이 불가능한 곳이다. 정부 연락관 제도는 최근에 폐지되었지만 그 외 사정은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무스탕은 네팔 히말라야 지역에서 순수한 고대 티베트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로 네팔

영토이면서도 역사적, 문화적으로는 티베트의 일부로 간주되는 특이한 곳이다.

 

내가 무스탕을 가고 싶어 한 이유도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다.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중세 티베트 문화와 불교 전통을 보고 싶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황량한 아름다움의 극치로 칭송받고 있는 그곳의 풍광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공식적으로 본다면 무스탕 지역(Mustang District)은 네팔의 75개 행정구역 중의 하나로, 네팔의 중북부에 위치한다.

 

남북으로는 깔리 간다키 강을 따라 북쪽의 티베트 국경에서 남쪽의 가사(Ghasa)까지이며, 동쪽으로는 마낭, 서쪽으로는 고산 오지인 돌포 지역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큰 동네들은 깔리 간다키 강변을 따라 발달해 있으며, 행정 중심지는 좀솜(Jomsom)이다.

이 지역을 상(上)무스탕(Upper Mustang)과 하(下)무스탕(Lower Mustang)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상무스탕은 만당(Manthang)과 짜랑(Tsarang)을 중심으로 한 로(Lo) 왕국 지역을, 하무스탕은 툭체, 마르파, 좀솜, 까그베니 등지를

포함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상무스탕의 인구는 대략 6천 명으로 33개 불교도 정착촌이 7개의 마을발전위원회(VDC)에 속해 있다. 전통적으로 무스탕이라고 하면 깔리 간다키의 가장 북쪽에 있는 상무스탕의 로(Lo) 왕국을 말한다.

로 왕국의 수도는 만탕이며 그곳 주민들을 현지에서는 로바(Lobas)라고 부른다. 로(Lo) 왕국의 명칭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티베트어로 남쪽을 뜻하는 로(Loh)의 뜻으로 보고 있으나 근거는 없다. 만탕이란 티베트어로

‘염원의 평원(Plain of Aspiration’)이란 뜻이다.

 

무스탕이라는 이름은 이 ‘만탕’이 이곳을 소개한 서양인들에 의해 ‘마스탕(Mastang’)으로 불리다가 ‘무-스(Moostang)’으로 그리고 다시 ‘무스탕(Mustang’)으로 와전된 것이다.

 

또 많은 문헌에서는 로 왕국의 수도를 만탕이라 하지 않고 ‘로만탕’으로 표기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올바른 표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을 따라 까그베니 위쪽 지역 전체를 ‘무스탕’으로, 그 수도를 ‘로만탕’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까그베니 이북 지역은 들어가는 데 특별허가를 요하고, 따라서 까그베니가 무스탕의 관문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상무스탕과 하무스탕은 같은 티베트 문화권이면서도 언어와 생활방식, 종교 등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하무스탕 지역의 타칼리족(Thakalis)은 상무스탕의 로바(Lobas)들과는 다른 티베트어의 방언을 쓰며, 과거에 툭체와 마르파를 중심으로 깔리 간다키 강을 통한 남북 교역을 장악했던 상업부족이다.

 

나중에 무스탕 교역로가 쇠퇴하자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더 남쪽으로 이주했고 남은 사람들은 숙박업 등으로 직업을 전환했다. 그들은 네팔의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이름을 네팔식으로 바꾸기도 했고 불교를 버리고 힌두교를 신봉하는 경향도 보여주고 있어 위쪽의 로(Lo) 왕국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점이 많다.

 

네팔의 다른 지역은 힌두교가 우세한 반면 무스탕 지역은 티베트 문화권이므로 종교는 100% 불교이다. 티베트의 4대

종파 중에서는 사꺄파가 가장 지배적이고, 까규파와 닝마파도 얼마간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달라이 라마로 대표되는 티베트의 주류 종파인 겔룩파는 히말라야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무스탕 지역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외에도 묵티나트 근처의 루브라에는 뵌교 사원도 있고, 민간에서는 정령신앙도 널리 신봉된다. ​지리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무스탕은 안나푸르나(8,091m)와 다울라기리(8,167m) 사이를 흐르는 깔리 간다키(Kali Gandaki) 강 최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깔리 간다키는 로만탕 북쪽, 티베트와 국경지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데,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들을 갖기도 한다.

 

상무스탕 지역에서는 무스탕 체(Che) 또는 무스탕 콜라(Khola)라고 불리고, 그 아래에서는 깔리 간다키로 불리며, 하무스탕의 마르파, 툭체, 가사 일대에서는 탁 콜라(Thak Khola)라고도 한다. 이 깔리 간다키 계곡은 탁 콜라에서 가장 깊으며, 가사 아래쪽의 다나(Dana)에서 그 깊이는 무려 6,967m에 이르고 있다.

 

무스탕을 지도에서 보면 지형이 티베트 쪽으로 쑥 들어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로 왕국 뒤쪽의 산맥이 그런 형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 에베레스트 산의 소유권을 놓고 네팔과 중국 간에 외교적 분쟁이 있었고, 그 결과  1963년 두 나라 사이에 국경협정이 맺어져 무스탕을 포함한 네팔의 북쪽 국경이 이때 완전하게 결정되었다.

 

무스탕은 히말라야 고산준령이 자세를 낮추어 티베트 고원으로 변해 가는 중간 지대이다. 무스탕의 독특한 풍광과 생태도 여기에 기인한다. 고도가 높고 여름철 몬순 구름도 무스탕 남쪽에 늘어서 있는 히말라야의 높은 산들에 가로막혀 비가 적게 내리므로 연중 무척 건조하여 식물들이 자라기 어렵다.

 

그래서 하무스탕 산자락에서는 무성한 산림을 볼 수 있으나 상무스탕으로 오를수록 식물상(flora)이 엷어진다. 상무스탕 지역에서는 마을 주변에 있는 나무들 외에는 산에 나무를 찾아보기 힘들고, 있다면 가축들이 먹을 수 있는 짧은 풀들과 사막지대에서 볼 수 있는 야생화들뿐이다.

 

무스탕은 고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흥미로운 지역 중의 하나이다. 깔리 간다키 강은 암모나이트 화석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곳인데, 바다 밑에 있던 지층이 급속히 융기하여 형성된 히말라야의 지질학적 특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이다.

 

깔리 간다키와 그 지류의 강변 절벽에는 수천 년 전에 사람이 살았던 혈거 동굴들이 많아 이 기이한 골짜기의 첫 주민들은 혈거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부 학술적으로 조사된 동굴에서 토기 등 약간의 유물이 발견된 것을 제외하면 그들의 자취가 없어 거의 완전한 신비로 남아 있다. 이 혈거인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들이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밀려났는지 아니면 그 훨씬 전에 사라졌는지 알 도리가 없다.

 

무스탕은 역사적으로 티베트의 일부나 마찬가지였지만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티베트보다 훨씬 적은 변화를 겪었다.

티베트가 몽골, 중국, 네팔, 영국 등과의 국제 관계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고 불교 역시 많은 굴곡과 변화를보여주는

반면, 무스탕은 600년 전 로Lo 왕국 건국 당시 티베트 문화를 수용하던 시기의 모습을 거의 원형에 가깝게 간직하고

있다.

 

무스탕의 도처에 산재한 곰빠들이 그 대표적인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된

요새들의 유적도 많이 있다. 로 왕국은 티베트 출신의 이주자 후손인 아메 팔(Ame Pal )왕이 그의 세 아들과 함께 깔리 간다키의 위쪽 지역을 평정한 14세기 후반(1380)에 세웠다.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 무스탕은 티베트와 인도 간의 무역로에 위치한 덕분에 번영했는데, 티베트에서 내려오는

소금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곡물이 주요 교역 품목이었다. 로 왕국은 더러 네팔 중부의 강국이던 줌라(Zumla) 왕국의 침입을 받기는 했으나 특수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항상 독립왕국을 유지했다.

 

18세기 후반 네팔에 구르카 왕국이 나타나 주변의 작은 왕국을 모두 복속시켰을 때 로(Lo) 왕국도 네팔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다른 왕국과는 달리 로(Lo) 왕국은 자치 왕국 체재를 보장받았다.

 

19세기 후반 이후 티베트 정부가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네팔과의 국경을 통제함에 따라 티베트와의 교역 통로로서의 로 왕국의 지위가 상실되고 왕국의 경제력도 크게 저하되었다. 그 결과 무스탕 왕국은 네팔 왕국 내에서도 발전이 극히 정체된 특수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외국인의 출입은 19세기 말 이후로 전면 통제되었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 9년간은 외국인의 입국이 허용되기도 했는데, 토니 하겐, 지우제페 투치, 스넬그로브 등의 연구자들이 이 시기에 무스탕에 들어갔다. 그러나 1960년 이후부터는 무스탕은 다시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이 금지령은 1991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나중의 출입금지는 티베트를 합병한 중국과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오랜 금지 조치로 인해 무스탕은 금단의 왕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1961년부터 무스탕 지역은 중국에 대항하는 티베트 게릴라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1959년 티베트의 승왕 14대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침공을 피해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하고 중국 군대가 티베트 전역에 통치권을 확립하자, 티베트 캄 지방 출신의 전사들인 캄파 게릴라들이 무스탕을 근거지로 하여 티베트의 중국군을 공격하곤 했다.

 

이 게릴라들은 미 CIA의 지원을 받아 전투를 수행했고, 그들 중 일부는 미국에서 비밀리에 훈련까지 받았다. 게릴라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무스탕과 인근 국경지대에 적어도 6,000명의 캄파들이 있었다고 한다.1970년대 초 닉슨 대통령 때 미국이 중국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캄파 게릴라들에 대한 CIA의 원조는 중단되었다.

 

네팔 정부는 게릴라들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하고 내부 분열을 꾀해 캄파의 지도력을 무력화시키라는 압력을 받았다.

게릴라들의 희생이 계속되자 달라이 라마는 캄파들에게 저항을 중지하라는 호소를 녹음테이프에 실어 보냈다. 캄파들의 일부는 투쟁을 중지했지만 일부는 저항 활동을 계속했다. 결국 네팔 군대가 무스탕 지역으로 들어가 남은 캄파들은 해산시켰고, 이후 무스탕은 평화로운 지역이 되었다.

 

무스탕에 대한 외국인 여행자들의 기록은 1759년에 이탈리아의 다 가르냐고 지우제페 마리아(Da Gargnago Giuseppe Maria) 신부가 어느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언급한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산을 넘어 걸어가면 위대한 티베트 왕국 무스탄(Mustan)에 이릅니다. 이 왕국은 라사(Lasa)로부터 독립해 있으며 중국에 복속되어 있고, 라사 역시 중국에 복속되어 있습니다.”라고 했다.

 

영어로 된 문헌 중에서는 1793년에 영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네팔 왕국을 방문한 커크패트릭(Kirkpatric)쓴 다음의 글이 최초이다. "비니(Beeni)에서 곧장 북쪽으로 가면 히말레(Him-a-leh) 의 한 부분인 묵티나트(또는 스리 묵티나트)가 나온다. 그곳은 건덕(Gunduck) 강에는 반마일 정도 떨어져 있으며 신성시여기는 돌 살레그라미(Salegrami)에서 나온 이름이다.

 

살레그라미는 특별히 그 지역 강바닥에서 많이 나온다. 강의 발원지는 묵티의 북쪽에 있는 무스탕(Moostang)이며 까그베니에서 멀지 않다." 19세기 후반 이후 무스탕에 들어간 외국인으로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1879년 무스탕을 거쳐 티베트로들어간 인도인 학자 사라트(혹은 수라트) 찬드라 다스(Sarat(Surat) Chandra Das(1849-1917)이다. 그는 인도의 영국 식민지 당국이 1860년대부터 티베트에 파견하기 시작한 첩자들인 이른바 빤디뜨(’Pundits) 중의 10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티베트 현지인들의 협력을 얻어 티베트를 널리 둘러본 뒤 1891년에 인도로 돌아갔다. 그는 다르질링의 고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티베트에 관한 네 권의 책과 티베트어-영어 사전, 티베트어 문법책을 지었다.

 

그가 인도로 돌아온 직후에 그가 스파이였음이 티베트에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입국 경로였던 무스탕과 티베트 간의 국경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찬드라 다스 다음으로 무스탕에 들어간 외국인은 일본의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1866-1945) 스님이다. 일본의 승려 사회에 염증을 느낀 그는 티베트에 들어가서 참된 불법을 구하고 불경을 구해 오겠다고결심하고 18976월 하순 일본 고베 항을 떠나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르질링에서 그곳에 거주하던 찬드라 다스나 티베트인들로부터 15개월간 티베트어를 배운 뒤 18991월 중국 승려로 칭하고 네팔에 잠입, 카트만두에 머무르면서 무스탕을 경유해 티베트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당시 티베트와 중국은 모든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라사 여행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스탕을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북쪽의 오지를 통해 카일라스 쪽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그 해 3월 초순 카트만두를 떠나 포카라를 거쳐 툭체에서 한 동안 머무르면서 잡입할 경로를 모색했다.

 

툭체에서 짜랑의 한 승려와 교분을 맺은 그는 그 인연으로 묵티나트를 거쳐 무스탕 계곡을 따라 올라가 짜랑의 곰빠에서 거의 1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서북의 오지 돌포로 우회하여 티베트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카일라스를 순례하고 라사까지 여행한 뒤 라사의 세라 사원에서 1년 넘게 머무르면서 공부하다가, 시킴 쪽의 국경을 넘어 다르질링으로 내려와 캘커타로 갔다.

 

그는 네팔과 티베트에 들어간 최초의 일본인으로 이후 일본 티베트학의 시조가 되었으며, <티베트에서의 3>이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이 여행 과정을 소상히 기술했다. 좀솜의 무스탕 박물관에는 가와구치 스님의 사진과 무스탕 여정이 전시되어 있고 마르파에는 기념관이 있다.

 

사라트 찬드라 다스와 에카이 스님에게는 무스탕이 티베트로 들어가는 중간 경유지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에카이 스님은 짜랑에 오래 머물렀지만 로만탕을 비롯한 무스탕의 다른 마을들을 다니며 탐사하지는 않았다.따라서 무스탕 자체에는 그들이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25-6년에는 인도측량국의 기사 두 명이 무스탕을 포함한 네팔 북부 지역을 다니며 조사를 했다고 하며, 그 이후에는 무스탕에 외국인의 발길이 끊어졌다. 왜냐하면 네팔 정부가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무스탕 지역은 물론이고 네팔에 외국인이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951년에 무스탕 지역에 대한 출입금지가 풀리면서 비로소 일부 외국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은 학술적 연구를 위해 네팔 정부의 허가를 얻어 들어간 사람들이다.

 

스위스의 지질학자 토니 하겐은 1952년 네팔 왕국 전체의 지질을 조사하면서 무스탕 지역도 조사했다. 그는 6년 간 히말라야의 알려지지 않은 코스 28,800km를 걸어서 답사한 경이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로만탕에 들어간 사람이다.

 

이어서 오스트리아 등산가 허버트 티치와 이탈리아의 유명한 티베트학자 지우제페 투치(Giuseppe Tucci)차례로 무스탕을 방문했다. 투치 일행은 1952년 가을에 무스탕을 6일간 여행했고 로만탕에서 이틀간 머물렀다. 나중에 그는 <1952년의 무스탕 여행이라는 책을 냈다.

 

런던대학교 동양학부의 데이비드 스넬그로브(David Snellgrove) 교수는 1956년에 돌포에서 카트만두까지 네팔 북부를 횡단했다. 그는 돌포에서 까그베니로 내려와 깔리 간다키 강을 따라 축상에서 툭체 근처까지 오르내린 다음 다시 올라가 로게까르와 짜랑을 돌아보았으나 로만탕은 직접 방문하지 않은 채 묵티나트로 갔다. 그는 이 여행에 대해 히말라야 순례(Himalaya Pilgrimage)라는 책을 썼다.

 

무스탕 출입이 다시 금지된 1961년 이후에도 들어간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1964년 봄 프랑스의 인류학자 미셸 페이셀(Michel Peissel)이 무스탕에 들어가 몇 달 간 머무르면서 무스탕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무스탕, 잃어버린 티베트 왕국)을 썼는데, 지금까지 나온 무스탕에 관련 문헌 중 가장 탁월한 책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일련의 원정대들이 로만탕의 남동쪽에 있는 브리쿠티봉(6,364m)을 오르기 위해 허가를 받아 무스탕을 여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110월 특별허가를 조건으로 무스탕 지역에 대한 출입금지가 풀렸고, 19923처음으로 일부 특별한 손님들이 고액의 허가비를 내고 무스탕을 방문했다. 무스탕 왕국은 현재 1년에 1,000명으로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고 있다.

 

무스탕 여행을 준비하면서 두 달 동안 열심히 인터넷을 뒤졌지만 생각보다 정보의 양이 적었다. 가장 도움이 되었던 자료는, 미국 브라운 대학 시각미술과 교수 마르샤 R. 리버먼(Marcia R. Lieberman) 박사와 그녀의 남편 필립 리버먼(Philip Lieberman) 박사가 1996년에 발표한 사진조사보고서 (네팔 무스탕의 티베트 불교벽화)스위스인 칼스텐 네벨(Carsten Nebel)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1998년 무스탕 트레킹 기록이다.

 

무스탕 트레킹에서 대부분의 과정은 나무가 거의 없는 불모의 땅을 걷게 된다. 특히 로 지역은 황갈색 언덕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티베트 고원과 비슷하다. 무스탕은 히말라야에서도 강수량이 적은 지역으로 네팔에서는 가장 비가 적게 내리는 곳이다. 몬순 기간에도 비는 많이 내리지 않는다. 다만 겨울에는 자주 눈이 내리며 어떤 때는 30~40cm씩 쌓이기도 한다.

 

여름철에 농작물이 자라면 사막 같은 마을들도 오아시스로 변한다. 추위와 눈 때문에 로에 사는 대부분의주민들은 겨울에는 이곳을 떠나 무역 활동에 나선다. 따라서 트레킹은 3월 하순부터 11월 초까지만 가능하다. 무스탕은 아주 고지대는 아니지만 춥고 먼지가 많으며, 오후에는 거센 바람이 불기 때문에 네팔의 다른 지역에 비해 트레킹이 힘들다.

 

롯지가 있는 트레킹 코스는 힘들 때마다 차를 마시며 쉬어 갈 수 있다. 여차하면 운행을 중지하고 하루 푹 쉴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스탕처럼 롯지가 없어 캠핑 장비를 챙겨 가야 하는 코스는 물이 있는 곳이라야 야영이 가능하므로 아무 곳에서나 운행을 중지할 수 없다.

 

특히 동쪽 사면은 마을이 드물기 때문에 어떤 날은 짧고 어떤 날은 긴 여정이 된다. 일반적인 트레킹에서처럼 일정을 쉽게 바꿀 수 없다. 무스탕은 한두 번의 히말라야 트레킹 경험으로는 엄두를 내기 힘든 곳이다. 네팔의 주요 트레킹 코스를

섭렵한 후에야 비로소 이곳으로 마음이 쏠리게 된다. 히말라야의 다른 트레킹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무스탕의 역사와 문화, 티베트 불교에 관한 공부를 어느 정도 하고 가야 주요 포인트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 준비가 없으면 그저 광대하고 장엄한 자연을 감상하고 오는 수준에 머물 것이다. 그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경비가 일반 트레킹의 두 배가 드는 여행이니만큼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도 히말라야 트레킹 경험이 중요하다. 경험이 있어야 필요한 장비를 챙길 수 있고 체력 단련에도 신경을 쓴다. 따라서 트레킹 초보자라라면, 일단 네팔의 3대 트레킹 지역(안나푸르나·랑탕·쿰부)을 다닌 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로만탕으로 가는 주 루트가 있는 서쪽 사면은 물론 계곡 동쪽 사면까지 모두 둘러보는 13일짜리 라운딩 코스를 택했다. 보통은 10일짜리 허가로 무스탕 서쪽 사면만 돌아보는 여행을 많이 하지만 빠드마삼바바와 아티샤 존자 두 성인의 체온이 남아 있는 랑충 곰빠, 빠드마삼바바가 라사에 삼예 사원을 짓기 전에 악마를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는 로게까르의 가르 곰빠, 티베트 접경지역인 로만탕 북쪽 계곡, 남걀 마을과 남걀 곰빠, 티베트불교미술 전문가 마르샤 교수가 무스탕의 작은 보물로 칭송한 루리 곰빠 등을 다 들르려면 최소한 13일이 필요했다.

 

무스탕 지역에서 나올 때는 안나푸르나 산군 파노라마로 유명한 4,000미터 급 고개인 규 라를 넘어 묵티나트로 가기로 했다. 묵티나트 사원도 순례지로 유명한 곳이어서 방문할 가치가 있기도 하거니와 근처에 있는 히말라야에서 몇 안 남은

뵌교 사원을 방문하기 위해서이다.

 

이번 무스탕 순례여행에는 나와 백산 스님, 그리고 보명화 보살이 동참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나를 포함하여 세 사람 평균 나이는 50세이다. 백산 스님은 법랍(法臘)이 30년 넘는 구참(久參)으로 나의 토굴살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보명화 보살은 15년 전 송광사에서 원주(院主) 소임을 볼 때 알게 된 분이며, 역시 꾸준히 후원해 주고 있다.

 

마침 두 분 모두 히말라야 트레킹과 무스탕 여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2005년 가을 ABC 트레킹을 함께 했고 다시 이무스탕 순례여행에 동행하게 되었다. 히말라야 트레킹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그 동안 진 신세에 보답하는 의미도 있어 더욱 좋은 일이었다.

 

우리 팀의 가이드로는 내가 히말라야 트레킹 때마다 동행하는 무스탕 출신의 삼툭 라마(Samthuk Lama)이다. 과묵하면서도 추진력이 있는 사람으로 무리 없이 자신의 역할을 잘 소화해 낸다. 무스탕 남걀 출신인 그는 1992년 한국에 와서 3년간 일하고 돌아가 지금은 카트만두에 살고 있다.

 

한국에 살았던 인연으로 몇 년 전부터 한국인 트레커들을 위한 가이드 일을 해왔으며 지금은 작은 트레킹 여행사도 하나 차렸다.우리의 무스탕 순례여행에 대해서 출발 석 달 전부터 서로 연락하며 협의했다. 그는 캠핑에 필요한 셰르파와 주방팀 등을 조직하고 식량과 텐트 등 물자를 준비하는 작업을 모두 마친 후 우리 팀을 기다렸다.

 

◆네팔 히말라야 무스탕에 관련 책자들

 

출처 / blog.naver..com / 산중하소유(山中何所有) / 월인천강(buddhae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