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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경기 인천****기행

경기 수원ㅡ한국 천주교 순교 聖地ㅡ화성행궁(華城行宮) 순교성지

by 삼수갑산 2022. 7. 31.

한국 천주교 순교 성지ㅡ화성행궁(華城行宮)

수원 화성은 정조가 승하하고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피를 흘려 주님을 증거한 거룩한 순교지가 되었다. 그리고 2000년 대희년에 수원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는 북수동 성당을 중심 성지로 하는 천주교 수원 성지를 선포하였다.  

 

수원 화성은 기록에 전해지는 수원의 순교자 최대 78명 중 1817년 샘골에서 친척들에게 살해된 이용빈을 제외하고, 병인박해 당시 77명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박해를 당하고 처형된 곳이다. 

 

신앙의 증거지로는 화성 행궁, 이아(화청관), 중영(총리영), 동남각루, 남암문, 형옥, 팔달문 밖 장터, 장안문 밖 장터 등 인데 이밖에도 종로사거리,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 사형터, 동장대 등인데, 이곳들은 순교와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 유수부 내에서 이루어진 공적 박해의 현장은 현존하는 문서 기록과 구전을 종합해 볼 때 대략 6~7곳으로 압축된다. 우선 천주교 신자들이 수원 중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원성 안으로 끌려올 때 대개는 먼저 들르는 곳이 판관이 주재하는 1차 신문 장소인 이아(貳衙, 화청관)이다. 

 

1차 심문을 마친 신자들은 필요에 따라 형옥에 수감되기도 했고, 2차 심문 기관인 중영(中營, 총리영)으로 끌려가서 좀더 혹독하고 본격적인 매를 맞거나 주뢰를 틀리는 등 육체적 고통을 당하면서 신문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런 다음 중영 울타리 내에서나 또는 형옥 담장 안에서 또는 기타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자들을 처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 개방된 장소로는 대개 남문(남암문) 가까이에 위치한 남수문 옆 동남각루나, 남문 밖 장터 또는 북문 밖 거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중영 울타리 밖 종로 사거리, 화령전에서 서문 사이에 위치한 길가의 공터, 군사들이 크게 열을 지어 훈련을 할 수 있는 동장대나 동장대보다 다소 협소하기는 하지만 국왕이나 총리사인 유수가 위엄을 베풀고 군사 훈련을 사열하는 서장대 등도 순교와 일정하게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장소로 보인다.

 

▲화성행궁 위치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수원 화성은 성곽 전체가 거룩한 순교지이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신앙 증거지이다. 1997년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조선시대 실학사상이 집약된 건축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정조대왕(조선왕조 제22대)은 1794년부터 2년에 걸쳐 수원화성을 지었다. 당쟁에 휘말려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사도세자) 능을 이곳으로 옮긴 데다 수도 남쪽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화성 설계와 시공은 정약용이 맡았다. 수원화성은 이후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 처형지가 됐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당한 신자들이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순교했다.

 

둘레 5743m에 이르는 성곽 전체가 78명의 순교자와 수천 명의 무명 순교자들을 떠안은 순교지다. 현재까지 화성 내부 13곳 이상이 순교지와 증거지로 확인됐다.

 

이아(화청관)는 중인 이하 천민 신자들을 심문한 곳이며 정조대왕 처소로 쓰였던 화성행궁은 양반 신자들을 심문했던 곳이다. 지대가 높은 동북각루에는 신자들을 참수해 목은 북암문에 걸어놓고 시신은 성벽 밖으로 던졌다고 전해진다. 또한 성곽 주요 출입문마다 처형당한 신자들 목을 걸어놓았다.

 

▲화성행궁 신풍루

 

다산 정약용이 설계와 시공을 담당한 수원화성은 그 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의 처형지가 되었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당한 신자들이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순교한 곳이다. 둘레 5743m에 이르는 성곽 전체가 78명의 순교자와 수천 명의 무명 순교자들을 떠안은 순교지이다.현재까지 화성 내부 13곳 이상이 순교지와 증거지로 확인되었다.

 

▲화성행궁

 

▲화성행궁

 

▲화성행궁

 

▲화성행궁

 

▲화성행궁 내부 좌익문 

 

▲화성행궁 내부 중앙문 

 

▲화성행궁 봉수당, 1801년 신유박해 때 양반 천주교인들을 심문하던 곳이다. 

 

화성 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유수(留守, 정2품, 摠理使를 겸함)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이곳은 수원에서 무수한 순교자가 처형된 병인박해 때 이곳으로 끌려온 지체 높은 양반 천주교인을 심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 내 유수의 집무실인 봉수당(奉壽堂)은 드물기는 했을 것이나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 유수가 직접 신문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장소이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奉壽堂)

 

▲봉수당(奉壽堂)

 

▲봉수당(奉壽堂)

 

▲봉수당(奉壽堂)

 

◆ 이아(貳衙)(화청관)


‘이아’는 행궁의 북쪽에서 동편으로 가까이 있으며,1793년(정조 17년) 12월 수원이 도호부(都護府, 종3품 관아)로부터 유수부(留守府, 정2품 관아로 유수는 外官이 아닌 京官에 속함)로 승격하던 해에 설립되었는데,

 

유수의 행정사무 대리자였던 종5품 판관(判官)의 관아이다. 대체로 향반(鄕班)이나 중인 이하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서 판관 앞에서 1차 심문을 받던 곳은 ‘이아’에서도 그 동헌에 해당되는 ‘화청관’이었을 것이다. 이아 일대는 현재 말일성도 그리스도교회가 들어서 있다.

 

◆ 중영(中營, 摠理營, 토포청)


수원 지역은 특히 서해안 일대에 침입하는 왜구를 방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다른 지역 군사들보다 역량이 뛰어난 군사들을 배치하였다. 따라서 수원 지역은 중앙 오군영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 : 좌영, 우영, 중영의 3영 체제)의 중영이 설치돼 그 관장인 수원 도호부사(종3품)가 이 지역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 중영은 유수부의 토포청을 겸하던 곳이므로 박해 시기 천주교인들에 대한 공개적, 비공개적 사형을 집행하던 곳이었다. 중영은 성안 종로 네거리에 접한 동북쪽에 위치하며, 그 한 모퉁이가 현재의 북수동 성당터에 겹쳐진다.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 있는 신풍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 있는 신풍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 있는 신풍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 있는 신풍교

 

▲성곽 내 '종로 사거리'는 공개 처형지였다.

 

◆ 종로 사거리


행궁 앞(300미터 전방) 광장 사거리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으로 중영의 군사들에 의해서 천주교인들이공개적으로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종로 사거리 동북쪽에 중영 자리와 북수동 성당이 있다.

 

▲수원 종로 사거리

 

▲수원 종로사거리 부근

 

▲동장대(연무대)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를 말하며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는 무예를 수련하였기에 연무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곳은 지형이 높지는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살펴보기에 좋은 군사 요충지다. 군사 제식 훈련 중에 천주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은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진 곳으로 전체 시설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다. 뛰어난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용연, 화홍문과 더불어 화성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 4개 누각중 하나인 방화수류정의 서쪽벽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방화수류정 자체도 8각 지붕을 기본으로 남북에 합각을 하나 더 세워 십자(十)형으로 되어 있다.


팔각정의 기본틀을 변형시켜 서쪽에 벽을 만들어서 서벽 안에 86개의 십자가 문양을 새겨 넣은 정자인데 이는 당시 천주학이 서양의 학문인 서학이라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서녘 석양이 질 무렵에는 세상 어둠을 쫓는 광명의 상징으로 서벽에 새겨진 십자가들이 빛이 나도록 설계되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화성 축조에 큰 영향을 준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십자가 문양을 넣은 것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높은 지형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주교인들을 참수한 곳으로 추정된다. 시신은 성벽밖으로 던졌고 목은 북암문에 걸어 놓았을 것이다.

 

창룡문(蒼龍門, 수원성의 동문)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는 동쪽 대문이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은 다른 죄수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궁성의 대문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소문이나 암문 등지로 내보냈던 당시의 관례로 보아 이곳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장안문(북문) 밖 장터


하나의 홍예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으로 원형 옹성을 갖추었다.홍예 위에는 오성지(五星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5개의 구멍을 갖춘 큰 물통으로,적이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규모나 구조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서울 남대문과 매우 비슷한, 당당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남대문에 비해 좀 더 새로운 것은 옹성, 적대와 같은 방어 시설을 갖춘 것이 특색이다.장안문 밖 장터는 팔달문 밖 장터와 마찬가지로 천주교인의 공개적인 장살형 집행 장소였다.

 

사형터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의 사형터이다.
구전에 의하면 천주교 신자들도 일반 죄수들과 함께 처형된 곳으로 추정된다.

 

출처 / blog.daum / sung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