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성지(성 김대건 신부가 세례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성소의 요람지)
▲은이 성지 표지석
은이 공소는 모방 나 신부로부터 김대건 신부가 세례성사와 첫영성체를 받은 장소이며, 15세 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이다. 또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시기에 김대건 신부는 서울과 경기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에 행하신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 모습이 1866년(병인박해)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 가문 정 레오 신부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김 신부님과 복사가 깊은 밤중에 대문 밖에 오시어 '정생원! 정생원!'하며 증조부 바오로를 찾으시는소리에 식구들은 모두 잠을 깨었으나 누가 무슨 일로 찾는지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복사가 작은 목소리로 '김 신부님께서 성사 주러 오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하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 증조부 바오로께서는 이웃이 알까 쉬쉬하며 반가이 신부님을 방으로 뫼시고 곧 성사 받을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는 간단하였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십자가상을 정성되이 뫼셔건다. 김 신부님께서는 10여명의 고해자들에게 성사를 주시고 다시 배마실(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성당 소재지)로 가시어 거기서 성사를 주시고 '은이'로 가시면 날이 샌다고 하신다."
이 증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험한 산길을 밤으로만 다니면서 사목활동을 하셨다. 이렇게 6개월간의 사목활동을 하시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곧이어 조선에 입국하게 될매스뜨르 신부와 최양업 도마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가 맡겨진다.
1846년 4월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말씀을 남기셨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있게 된다면 또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찾아가는 길
▲은이성지 입구
▲김대건 신부 상과 야외제대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활동은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은이는 박해시대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이룩된 교우촌이고, 은이(隱里)라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서울, 경기(용인)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이 은이 공소는 이미 유학길에 오르기 전, 1836년 나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 그리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 교회 사상 처음 발굴된 성소가 비로소 결실을 맺은 곳이 '은이성지'이다. 이렇게 은이 공소는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 첫 사목 지역이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상 본방인 사제가 사목한 최초의 본당이었다.
▲성김대건 상
김대건 신부의 본관은 김해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1796~1839) 성인과 모친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충청도 솔뫼에서 출생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조부 김택현과 가족들은 1827년경 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용인으로 피신하여 골배마실에 정착하였다. 이때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7세로 그의 나이 15세 때 신학생 후보를 찾던 모방 신부에 의해 장래 조선 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으로 선택된다.
이 곳에서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 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 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 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마카오로 유학을 간 신학생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된 다.
그해 10월 해로를 택해 국내에 잠입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어려서 자라던 골배마실 을 찾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의 재회를 한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마을로 정한 김 신부는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한다. 이렇게 6개월간의 사목활동을 하시던 중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의 입국로를 준비 하던 김대건 신부와 일행은 순위도에서
포졸에게 1846년 6월 5일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당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조선의 조정 대신들에게 서양 학문을 일깨워 주는 활동을 하며 처형 되기 한 달 전에는 마지막으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회유문’을 작성하였다. 그해 9월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군문효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된다.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은 먹뱅이(묵리)에 살던 이민식 빈첸시오와 몇몇 교우들이 몰래 빼내어 10 월 26일에 미리내에 안장하게 된다.
▲은이교
▲성 김대건 신부 기념 유물 전시관
▲성 김대건 신부 기념 유물 전시관
▲성모 상
▲성 김대건 신부 기념 유물 전시관
전시관에는 용인(특히 양지) 지역 교우들이 대대로 보관해 온 각종 고 문서들이 전시되어있다. 전시물은 교리 관련 서적(약 40여점), 신심 관련 서적(약 60여점), 성서 관련 서적(약 80여점), 미사 관련서적(약 40여점), 기타 서적(약 10여점), 제의(약 50여점), 제구 및 성물(약 50여점), 기타 제구(약 20여점) 등이 전시되고 있다.
▲김대건 신부 유해
▲전시관 전시물
▲전시관 전시물
▲전시관 전시물
▲전시관 전시물
▲은이성지 건너편 산 언덕에 조성되어있는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정원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정원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정원 기도실
▲십자가의 길 십자가 고상
▲십자가의 길 정원 마리아 상
▲십자가의 길
◆올레길 신앙길- 수원교구 은이성지서 미리내성지까지 ‘삼덕’의 길
▲신덕 · 망덕 · 애덕 고개 넘으며 성 김대건 목숨 건 여정 묵상
은이성지 - 신덕고개 - 와우정사 - 망덕고개 - 한덕골 - 애덕고개 - 미리내성지(약 4시간 소요)
▲은이성지에서 신덕고개로
▲삼덕의 길 시작
1846년 포졸들에게 체포돼 모진 고초를 당하고, 반역죄로 사형선고 받아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쓴 성 김대건 신부. 그의 삶은 ‘반역’과 ‘신성모독’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고난의 삶을 그대로 닮아있다. 이번 주에는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자, 순교 후 유체 이장 경로 중 일부인 은이성지에서 미리내성지에 이르는 삼덕의 길을 걸어봤다. 2011년 사순의 시작,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의 가파른 세 고개를 넘으며 주님 수난의 길을 따라가 보자.
▲은이성지에서 신덕고개 가는 길
은이(隱里).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있는 동네’란 뜻이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첫 사목활동을 펼친 지역. 기록에 의하면 김대건 신부는 밤마다 이 길을 다니며 경기 용인, 이천, 안성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했다.
포졸들의 눈을 피해 사목활동을 다니던 길이었던 만큼, 은이성지에서 미리내성지까지 이어지는 길은 산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에 위치한 은이성지에서 신덕고개로 올라가는 산길 입구까지는 평탄한 마을길이 이어진다.
산길 입구에 자리한 식당 앞 바위를 끼고 걸어가면 ‘삼덕의 길’ 표지판이 보인다. 파란 바탕에 흰색으로 쓰인 이 글씨가 도보순례 내내 따라가야 할 표지다. 외진 산길엔 인적이 드물다. 낙엽 소시락거리는 소리와 새소리만이 가득한 고요 속에 저절로 묵상에 잠기게 된다.
산길 입구에서 10분 쯤 걸었을까. 눈앞에 가파른 언덕이 나타난다. 신덕고개라 이름 붙여진 은이고개다. 눈 덮인 고개
위로 낙엽이 수북이 쌓인 조그만 길이 나있다. 몇 걸음 채 걷지 않았는데도 숨이 찰 정도로 가파른 언덕을 넘으니 탁 트인 시야와 함께 신덕고개비가 나온다. ‘하느님은 진리의 근원이며, 그르침이 없음’을 굳게 믿는 신덕송이 고어로 새겨져 있는 신덕고개비에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신덕고개에서 어두니 고개로, 망덕고개 이정표
▲신덕고개에서 어두니 고개로
▲어두니고개에서 골배마실로
▲어두니고개에서 골배마실로
▲어두니고개에서 골배마실로
▲어두니고개에서 골배마실로
▲골배마실 성지
▲골배마실 성지
▲골배마실 성지
▲골배마실에서 망덕고개로
▲골배마실에서 망덕고개로
▲망덕고개에서 애덕고개로
▲망덕고개 쉼터
▲망덕고개 쉼터
▲망덕고개 쉼터
▲망덕고개에서 애덕고개
망덕고개에서 애덕고개까지는 또다시 1시간 30분여의 긴 여정을 가야 한다. 망덕고개비에서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길이 이어지는데, 이곳에서 다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장촌마을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평화로운 쉼터’를 지나 큰 느티나무를 왼편으로 끼고 직진하면 아스팔트 길 위로 다리가 놓여있다. 이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꺾어 도로를 따라 걸으면 전방에 문수산 터널 입구가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 500m 정도 걸어들어간 후 소하천을 건너면 다시 등산로 입구다. 애덕고개로 향하는 길이다. 오두재고개라고도 불리는 애덕고개에도 김대건 신부 유체 이장과 관련한 일화가 담겨 있다.
유체를 숨겨둔 콩밭의 주인에 의해 유체가 발각되기 직전,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내려 콩밭의 주인이 일손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가 유체를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새남터에서 미리내까지 갖은 고비를 넘기며 김대건 신부의 유체를 이장했을 옛 신앙 선조들의 목숨 건 여정 또한 주님 수난의 길을 닮아 있었다. 삼덕고개 중 마지막 고개인 애덕고개비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애덕고개에서 미리내성지
애덕고개에서 미리내성지까지는 내리막길이다. 느린 걸음으로 약 20분가량 내려가면 길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미리내성지 ‘순교자의 모후께 봉헌된 경당’이 나온다.
1928년 건립된 이 작은 경당 앞마당에 김대건 신부가 잠들어 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당한지 약 40여일 후 당신의 첫 사목지였던 미리내로 돌아온 김대건 신부와 목숨 걸고 그의 유체를 이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 등 몇몇 교우들을 기억했다.
두 마을을 지나고 세 고개를 넘어 온 순례 여정을 떠올리며 고개 숙여 묵상했다. 긴 사순시기가 지나고 올 부활을 약속하듯, 고즈넉한 경당 지붕과 김대건 신부 묘지 위로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미리내성지
▲미리내성지
▲미리내성지
▲미리내성지
▲고 울술나 지묘(김대건 신부 모친)
▲이민식 지묘
출처 / blog.daum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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