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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경기 인천****기행

경기 남양주ㅡ한국 천주교 聖地ㅡ마재성지(순교자 정약종과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의 생가터)

by 삼수갑산 2022. 9. 30.

마재성지(순교자 정약종과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의 생가터)

▲마재성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의 생가 터로 이름난 마재성지는 양수리에서 팔당댐 방향으로 3km가다 왼쪽으로 그 입구가 나타난다. 마재의 정다산 성지에는 사당과 기념관, 생가 터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지고 그 오른쪽은 약종이 살았으며 묘소가 있던 배알미리(拜謁尾里)가 된다.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여기서 태어난 4형제 중 셋째인 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이다. 그러나 정약현의 부인이 이벽 성조의 누이,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중 정다산은 그의 형 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목민 심서", "경세 유표", "흠흠 신서"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그는 본래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로 번진 신해박해 때(1791년)만 해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을묘년(1795년) 포도청 장살 사건이 당쟁으로 발전,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 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쓰여진 것이다.

 

이 때 그는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불러 초대 교회 창립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 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그는 당시의 참담한 심정과 외로움을 "만천 유고(蔓川遺稿)"에서"한평생을 살다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하고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20여 년간의 기나긴 유배 생활 중에 잃었던 신심을 되찾는다. 1811년에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교회 재건 운동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정도였다. 그가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 난 지 2-3년 뒤로 볼 수 있다.

 

그의 생활은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회갑을 맞으면서 미리 작성해 둔 자신의 묘비명 가운데는 참회와 성찰의 문구가 역력히 들어 있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재로 돌아온 그는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찾아가는 길

 

▲마재성지

 

▲마재성지

 

▲마재성지

 

▲마재성지 내부

 

▲마재성지 내부

 

▲마재성지 내부

 

▲마재성지 내부

 

▲명례방

 

▲명례방 내부 전시물

 

▲명례방 내부 전시물

 

▲야외 제대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소사(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아우구스티노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으로부터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받고 교리 연구나 가족들을 가르치는 데 전심하였다.

 

그러다가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우구스티노의 열심은 더욱 빛을 발하였다. 인근 지역의 신자들과 자주 교류하였으며, 몇몇 교우들을 자신의 집에 받아들여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고, 직접 교회 일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의 교리 지식은 교우들 가운데서 아주 뛰어나게 되었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아우구스티노는 자주 한양으로 올라가 성사를 받았고,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또 오랫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주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아우구스티노를 그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0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고향 인근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발생하면서 교회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체포자의 명단에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특히 박해 초기에 그의 책 상자가 관청에 압수되자, 조정에서는 즉시 그를 체포해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그는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체포 이튿 날부터 아우구스티노는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으며, 오로지 천주교 교리가 올바르다는 것만을 설명하는 데 노력하였다.

 

“천주를 높이 받들고 섬기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입니다.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박해자들은 아우구스티노를 굴복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교리는 오히려 박해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의금부의 사형 선고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지 15일 만에 형장으로 정해진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사형수가 타는 수레에 올라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오.” 형장에 이르자 곧 참수형이 시작되었다.

 

이때 아우구스티노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천진암 정약종 묘

 

▲정약종 묘 이장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초대 회장인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서대문에서 참수 당한후 그의 고향인 마재 가까운 웃배알미 검단산 기슭에 묻혔다가, 나중에 후손들에 의해 선산인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사사리 앞산으로 이장한 뒤, 이 산이 팔리자 다시 그 주변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가 천진암 성역화에 따라 1981년 11월 1일 천진암 한국천주교회 창립성현 제위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사사리는 정약종의 시신이 이장되었던 곳이다. 조선 왕조에서는 "사학(邪擧)의 3대 괴수"라고 지칭했을 정도로 이들의 활동이 뛰어났던 것인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정약종(아오스딩)을 들 수 있다.

 

정약종은 실학자 정약용의 형으로 그의 가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문모 신부가 세운 명도회(明道會)의 초대회장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또한 그의 아내, 아들 정하상, 동정녀인 딸 등도 모두 순교하여 시성의 영예를 함께 누리고 있다. 정약종은 1801년 당시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겨레를 위하여 열렬하게 신앙을 증거한 초기 교회의 표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801년 2월 26일(양력 4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을 당하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그의 향리인 경기도 광주땅 배알미리에 매장되었다 한다.

 

그리고 정약종이 죽은 후 그의 동생이던 정약용이 사망하게 되자 정약용도 정약종의 묘소 부근에 매장되었다. 두 형제의 무덤과 관련하여서 특이한 구전이 그 마을에 전래되어 내려오고 있다. 즉 언젠가 구름다리형의 무지개가 두개의 묘 사이를 이어 훤한 광채를 오랫동안 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동리 인들은 대대로 이를 영광스러운 사실로 구전을 통하여 보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래 배알미리에 있던 정약종의 산소는 그 후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사사리 내곡(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3동 안골)으로 이장되었다.

 

순교자현양회에서는 1959년 4월 15일과 16일 이틀간에 걸쳐서 정약종의 묘소를 사사리로 이장하였다. 마재에서 거주하던 정약종의 후손들은 대개 박해를 피해 강원도로 피신해 있다가 100여년 전에 다시 조상의 고향 인근인 사사리로 이전하계 되었다(정덕진 신부 증언). 따라서 사사리에는 정약종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으므로. 그의 묘소를 좀더 정성을 들여 돌보기 위해 이곳에 새로운 안주지를 마련해 드리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의 묘소를 이장할 때 약간의 문제점이 있었다. 즉 문중에서 정약종외 묘소라고 하던 묘는 묘 형상을 완전히 갖추어 있기는 하였으나. 이장하기위해 묘를 파헤쳐 보니 그의 유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이와같이 명확한 유해는 나오지 않았으나 정씨 문중인들은 모두 그 묘가 정약종의 산소임을 거듭 말하였었고 또 약간의 흔적도 있었으므로 이를 정약종의 무덤으로 순교자현양회 전문위원들은 확증을 하고 이장하였던 것이다.

 

정약종의 묘소를 이장할 당시에도 특기할 만한 기상변화가 일어났다 한다. 즉 몇 십년을 두고 보지 못하던 비바람이온 동리를 휘몰아쳐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만 사실을 본 정씨 문중인들은 정약종이 특별한 인물임을 하느님이 기상변화를 통하여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한다. (金有喆 채집)

 

그러나 정약종의 묘소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몇가지 문제점이 미해결 상태에 놓여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여러 문제점을 풀기 위하여 좀더 많은 검토 연구가 있어야 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확고한 과학적인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정씨 문중의 증언을 존중하여 사사리에 이장되어 있는 묘소가 정약종의 요소임을 일단은 수긍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장된 정약종의 묘소는 그 산(마을 사람들은 ‘앞산’이라 부름)이 다른 사람에게 팔리게 되자 1973년 5 월10일 다시 그 부근에 있는 정씨의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참고 : '교회와 역사', 15호, 한국교회사연구소,1977)

 

마흔 둘 나이로 순교한 정약종의 시신은 마재 가까운 웃배알미 검단산 기슭에 묻혔다가, 나중에 후손들에 의해 선산인 경도 화성군 반월면 사사리 앞산으로 이장한 뒤, 이 산이 팔리자 다시 그 주변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가 천진암 성역화에 따라 1981년 11월 1일 천진암 한국천주교회 창립성현 제위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천진암으로 이장 되기전 사사리 정약종의 묘

 

▲천진암으로 이장 되기전 정약종의 묘 (안산시 상록구 사사3동 안골, 사사리)

 

■ 순교자

◆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정하상은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하였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에게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하였으나 성품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숙부인 정약용의 집에 기거하다가 1813년 홀로 상경하여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도우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여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 베드로(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조이 체칠리아,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이며, 그 뒤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 성녀 유선임 체칠리아(1761∼1839)


유 체칠리아는 명도회장 정약종의 부인이며 성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이다. 상처한 정약종과 20세에 혼인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혼인 3년 만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이 순교한 뒤 재산을 몰수당하고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의 집에서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조카의 피신 권유를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와 함께 체포되었다. 유 체칠리아는 72세의 고령임에도 포청에서 곤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하였다. 103위 성인 가운데 최고령 순교자이다.

◆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1797∼1839)


동정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의 딸로, 네 살 때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전 가족이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은 순교하였으나 정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 오빠 정하상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뒤 마재의 삼촌 정약용의 집에서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7월 11일 기해박해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대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 43세였다.

◆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약종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가 성립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그를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으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체포된 지 15일 만에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 복자 정철상 가롤로 ( ? ∼1801년)


정철상 가롤로는 경기도 광주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과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이복 동생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가 20세가량 되었을 무렵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그들을 따라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4월 8일 부친이 순교하던 날, 그는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대면서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관리들은 문초로 그의 생각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한 달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가 최필제(베드로), 윤운혜(루치아)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이었다.

 

▲십자가의 길 동산

 

▲야외제대 동산

 

▲칼 십자가와 성모상

 

▲칼 십자가

 

▲성 모자 상

 

▲순교현양, 십자고상

 

▲예수성심상

 

▲십자가의 길 1 처

 

▲십자가의 길 2 처

 

▲십자가의 길 3 처

 

▲십자가의 길 4 처

 

▲십자가의 길 5 처

 

▲십자가의 길 6 처

 

▲십자가의 길 7 처

 

▲십자가의 길 8 처

 

▲십자가의 길 9 처

 

▲십자가의 길 10 처

 

▲십자가의 길 11 처

 

▲십자가의 길 12 처

 

▲십자가의 길 13 처

 

▲십자가의 길 14 처

 

출처 / blog.daum / sung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