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텐의 알리에노르(Aliénor d’Aquitaine‧1122~1204)
英·佛 넘나들며 왕들을 뒤흔든 정열의 여인, 백년전쟁을 잉태하다
아키텐의 알리에노르(Aliénor d’Aquitaine‧1122~1204)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 또 있을까. 그녀는 두 국왕과 결혼하고 두 국왕을 낳았으며, 십자군에 직접 참전했고, 궁정 암투에 깊이 간여하고,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한편 새로운 궁정 문화와 새로운 사랑의 문학을 발전시켰다. 역사의 변전을 온몸으로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국왕과 결혼하고 두 국왕을 낳았으며, 십자군에 직접 참전했고 궁정 암투에 깊이 간여했던 아키텐의 알리에노르(Aliénor d’Aquitaine‧1122~1204) 초상화. 영국 화가 프레더릭 샌디스 作(1858), 카디프 국립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두 국왕과 결혼하고 두 국왕을 낳은 여인
1137년,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가 산티아고 순례 중 사망하자 두 딸 중 맏이인 15세의 알리에노르가 계승자가 되었다. 당시 아키텐 지방은 오늘날의 가스코뉴, 푸아투, 리무쟁 지역들을 포괄하는 프랑스 남서부의 광대한 영토다.
알리에노르와 결혼하는 사람에게 프랑스의 4분의 1이나 되는 땅이 귀속되니, 그녀의 결혼은 당대 뜨거운 관심사였다. 임종이 가깝던 프랑스 국왕 루이 6세가 선수를 쳐서 알리에노르를 아들과 결혼시키고 자신은 며칠 뒤 사망했다. 새신랑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되었고 알리에노르는 왕비가 되었다.
1147년 국왕이 제2차 십자군에 참여했을 때 놀랍게도 왕비가 동행했다. 다마스쿠스 함락을 목표로 했던 이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는데, 사람들은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알리에노르를 거론했다.
국왕이 왕비를 데리고 오자 다른 귀족들도 아내를 동반했고, 많은 시녀가 따라 가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때문에 순결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십자군 전사들의 정신 자세가 흔들렸고 결국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알리에노르는 숙부인 레몽(Raimond)과 염문을 퍼뜨렸다고도 전한다. 귀국하면서 루이 7세는 알리에노르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부부 사이에 딸 둘만 있고 왕위 계승자인 아들이 없는 것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속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왕과 결혼한 게 아니라 수도사와 결혼한 것 같다’는 알리에노르의 푸념을 보면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중세 가톨릭 세계에서 이혼은 불가능하므로 국왕이나 귀족 부부가 갈라서고자 할 때에는 교회 당국에서 ‘결혼 무효’ 승인을 받아내야 한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이 친척 관계여서 원래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이였다는 주장인데, 말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정책적으로 승인을 받곤 했다.
▲프랑스 베즐레이에서 1146년에 성 버나드가 루이 7세와 알리에노르 앞에서 제2차 십자군 행진을 설교하는 장면.
프랑스 화가 에밀 시뇰 작품(1840). /위키피디아
프랑스 왕비에 이어 잉글랜드 왕비가 되다
1152년 두 사람은 갈라섰고, 30세의 알리에노르는 또다시 뭇 왕족과 귀족이 선망하는 ‘돌싱’이 되었다. 그녀를 문자 그대로 납치해서 강제 결혼을 하려는 시도도 벌어졌다. 푸아티에에 있는 자신의 성으로 여행하는 도중 두 차례나 대귀족들의 공격을 당한 것이다.
당시 시대상이 그렇게 험했다. 알리에노르는 차라리 자신이 배우자를 직접 고르기로 했다. 노르망디 공작이며 잉글랜드 왕위 계승 후보자인 헨리에게 자신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는 처지라는 의미심장한 편지를 썼다. 헨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곧 결혼식을 치렀다.
2년 후인 1154년 두 번째 남편이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가 되었다. 알리에노르는 프랑스 왕비에 이어 이번에는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다. 두 사람의 결합으로 잉글랜드는 섬나라가 아니라 대륙 내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대국으로 커졌다.
오베르뉴에서 동부 아일랜드까지, 피레네 산맥에서 스코틀랜드 변방까지 포괄한 당시 잉글랜드를 두고 역사가들은 ‘플랜태저넷 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후일 프랑스 왕위와 영토를 두고 양국이 다투게 될 백년전쟁의 먼 기원이 여기에 있다.
신혼 초기에 두 사람은 아주 잘 지냈고, 왕비는 국왕을 완벽하게 보조했다. 연대기 작가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의 기록에 따르면 왕과 왕비는 완전히 ‘호환 가능(interchangeable)’한 정도였다.
국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전투에 임했을 때 알리에노르는 국왕의 재가 없이 왕령을 발했고, 재정 지출을 명했으며, 국민의 탄원을 수리하여 결정했다. 동시에 화려한 의상을 자랑하는 파티를 개최하고 예술 활동을 후원하여 궁정 문화를 발전시켰다.
헨리 2세는 알리에노르에게서 5남 3녀를 보았을 뿐 아니라, 여러 연인과 숱한 사생아를 낳았다. 중세 국왕에게는 흔한 일이지만, 하여튼 이 일로 부부 사이에 틈이 생겼다. 국왕이 병들어 곧 아들 중 한 명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처럼 유서를 썼다가 무효화하고 다시 권력을 틀어쥐자 실망한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녀 역시 아들 편에 섰다.
더 안 좋은 일은 전 남편인 프랑스 국왕과 결탁했다는 점이다.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알리에노르는 남장을 하고 전 남편 있는 곳으로 도주하려다가 잡혀서 솔즈베리성에 감금당했다. 그녀는 헨리 2세가 죽은 1189년까지 15년이나 갇혀 있다가 겨우 자유를 되찾았다.
▲프랑스 서부 앙주지역 퐁트브로 수도원의 알리에노르(왼쪽)와 영국의 왕 헨리 2세 무덤 /게티이미지코리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사자심왕 리처드
왕위는 아들 리처드(일명 사자심왕·Richard the Lionheart)가 물려받았다. 이번 국왕도 십자군 열기에 싸여 1190년 성지로 떠났고, 알리에노르는 다시 정치에 간여했다. 리처드는 동성애자여서 나이 서른이 넘었을 때까지도 결혼을 거부하여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왕의 동생 존은 형이 없는 틈을 타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오귀스트(Philippe Auguste)와 내통하여 왕권을 노렸고, 알리에노르는 이에 맞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리처드를 끝까지 지키려 했다. 그런데 리처드가 십자군에서 돌아오는 도중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알리에노르는 아들을 구하는 데 필요한 신속금(身贖金) 10만 마르크를 국민들에게서 쥐어짜 냈다. 은 20톤에 해당하는 이 금액은 잉글랜드의 2년치 재정 액수였다. 교황에게는 이 사태를 해결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내며 대담하게도 ‘하느님의 분노를 담아 영국 왕비 알리에노르’라고 서명했다.
1194년 리처드가 포로 상태에서 풀려나 귀국하자 알리에노르는 리처드와 존 두 형제를 화해시킨 다음 퐁트브(Fontevraud) 수도원에 물러나 경건한 노후를 보내고자 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1199년 이번에는 리처드가 프랑스 중부의 샬뤼(Châlus)성을 포위하다가 화살을 맞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국왕은 병상에서 어머니를 찾았고, 알리에노르는 곧 현장으로 달려갔다.
결국 리처드는 어머니 품에서 죽었다. 77세 나이에 알리에노르는 다시 왕위 계승 문제에 간여했다. 이번에는 아들 존과 손자 브르타뉴의 아서(Arthur de Bretagne) 사이 다툼에 끼어 아들 존이 왕위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노년의 모후는 군을 진두지휘하여 아서 측 군대의 공격에 맞서 싸웠고, 끝내 존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패배한 아서는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다.
1204년, 알리에노르는 82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시신은 남편 헨리 2세와 아들 리처드 사자심왕이 이미 묻혀 있는 퐁트브로 수도원에 안장했다. 이해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역사에서 결정적 분수령이 되는 해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오귀스트가 잉글랜드에서 노르망디와 앙주를 빼앗아 ‘플랜태저넷 제국’은 사실상 무너졌다. 그 소식을 듣기 전에 사망한 것이 알리에노르에게는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아키텐의 알리에노르(캐서린 헵번·왼쪽)와 헨리 2세(피터 오툴) 등의 영국 왕실 내부 권력 다툼을 다룬
영화 'The Lion in Winter'(1968) 포스터.
◈사랑의 궁정
시인들과 귀부인들이 모여 사랑의 법칙과 사랑의 행위 등을 논했다는 ‘사랑의 궁정’이 알리에노르의 궁정에서 실제 개최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이 시대에 새로운 문학과 새로운 문화, 무엇보다 새로운 유형의 사랑이 태동 중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내 마음에 끌리는 상대를 내가 고르는 “사랑은 언제나 존재했던 게 아니라 12세기에 발명된 것”이라고 한 역사가는 말한다. 배우자에 대한 의무, 가족 간 결합과는 달리 그 자체로서 소중한 내밀한 사랑이 피어나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상류층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런 사랑은 개인의 가치가 인정되는 사회적 변화를 전제로 한다. 여성이 억압적인 착취 대상, 아이 낳는 육체 이상의 의미를 띠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가 알리에노르라는 한 개인의 이름을 차용하여 중세 유럽의 한편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제국과 전쟁 같은 거대 역사와 내밀한 사랑의 문제 같은 미시(微視)역사는 따로 노는 게 아니라 함께 진행한다. 알리에노르의 내면에 ‘권력에 취한 암늑대’와 ‘명랑하고 육감적인 남유럽 여인’이 함께 존재하듯이 말이다.
글.사진출처 / chosun.com / 주경철의 히스토리 노바 /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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