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ㅡ포르투칼 알코바샤 수도원 / 성당
▲알코바샤 수도원 ( Monastery of Alcobaca)
1989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알코바샤 산타마리아 수도원에 있는 성당은 초기 고딕 양식 가운데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포르투칼 리스본 북쪽에 있는 알코바샤 수도원은 12세기에 알폰스 1세에 의해 건립되었다.
1139년에 포르투갈을 건국한 알폰스 엔리케시에서 시작된 부르고뉴 왕조 시기에, 시토회 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시 최대 규모의 수도원이 건립되었다.수수한 가운데 엄숙한 기운이 감도는 이 수도원은 나중에 덧붙인 마누엘 양식의 장식 부분과 함께, 금욕주의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구체화해 정신적인 깊이를 보여 준다.
▲알코바샤 수도원
▲알코바샤 수도원
▲성당내부, 길이가 약 100m 정도가 된다.
시토회 규약에는 “성당에는 조각이나 그림 장식을 덧붙이지 말며, 단지 나무 십자가만으로 수수하게 지어야 한다.
또한 스테인드 글라스나 지나치게 높은 종루도 필요없으며,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건립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완성된 수도원은 가장 순수한 시토회 건축물로서 성당, 회랑 5개, 기숙사 7개, 외부 손님용 숙소,
부엌, 식당으로 이루어졌다. 성당 내부는 특히 뚜렷한 선, 장엄함, 수수함이 특징적이다.
바로크 양식인 파사드는 18세기에 만들었지만, 문은 고딕 양식 그대로 남겨 두었다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페드루왕의 왕후 이네스 석관
1360년에 완성된 이네스의 널 밑에는 몸은 맹수이고 얼굴은 암사자와 비슷하게 생긴 추악한 동물 6마리가 깔려 있다.
14세기 중반 무렵에 포르투갈 국왕 알폰스 4세는 아들 페드루가 카스티야 왕국의 콘스탄사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페드루는 부친의 뜻에 따라 콘스탄사와 결혼했지만, 콘스탄사의 시녀 이네스를 사랑했다. 이 사실을 안 국왕은 이네스를 쿠임브라에 있는 산타클라라 수도원에 유폐시켰다.
이윽고 콘스탄사가 젊은 나이에 죽자, 페드루는 이네스와 결혼해 아이까지 얻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 여러 나라의 역사를 돌아보면 서출 왕자가 정치에 개입해 국가가 위기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국왕은 장차 카스티야 왕국이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것을 염려해 부하를 시켜 이네스와 그 자식들을 모두 죽였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건물이 ‘눈물의 관’이다. 부친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페드루 1세는 암살자들을 체포해 쳐형하는 한편,불행하게 살다 간 이네스의 유해를 발굴해 쿠임브라 대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왕비로 승인하는 대관식을 치르고 유해를 알코바샤 수도원에 다시 매장했다.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루이스 데 카몽스는 서사시 [오스 루시아다스]의 세 번째 노래에서 “사랑은 그리도 컸건만 목숨은 덧없네.”라고 이들을 칭송했다.
▲페드루왕의 왕후 이네스 석관
돌에 조각을 새겨 넣은 이네스의 돌널은 페드루 1세의 돌널과 더불어 포르투갈 고딕 예술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다. 가로 놓인 이네스의 조각상을 6명의 천사가 에워싸고 있고, 널에는 예수의 생애, 성모, 최후의 심판이 새겨져 있다.
작가는 알 수 없지만, 이탈리아 고딕 양식의 영향이 엿보인다.
▲성당내부
▲고대 수도원 회랑
시토회 건축물로서 성당, 회랑 5개, 기숙사 7개, 외부 손님용 숙소, 부엌, 식당으로 이루어졌다.
▲고대 수도원 회랑
▲고대 수도원 숙소
포르투갈 왕국은 12세기 말에 이슬람 왕 알 만수르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계속 번영했다. 산수 1세와 아폰수 2세는 성당과 기숙사를 지었고, 디니스 왕은 부왕 아폰수 3세가 유언과 함께 남긴 3000리브라(1리브라는 1.59kg)로 회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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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도원은 바로크 양식의 흰 대리석 성모상을 모셔 ‘알쿠바사의 우리 성모’라고 부를 정도로 사람들과 친숙하며, 전성기에는 999명의 수사가 있었다고 한다. 즉, 시토회 규약대로 “1000명에서 1명 모자라는” 인원이었던 것이다.
수도원장은 국왕을 보좌하는 평의회 회원이며, 한때는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을 13개와 항구 4개, 대저택 2개의 관리를 위임받았다. 당시 포르투갈 국왕은 대대로 몸을 숨기는 장소이자 묘지로 알쿠바사를 택했으며, 기부금을 내고 특전을 받았다. 한편, 알쿠바사 수도원은 학문, 교육 분야와 신학, 논리학, 문법 등에서 평판이 자자했다.
▲식당
식당을 비롯한 수도원 부속 시설은 넓이와 조화 면에서 고딕 양식 시기에 만든 시토회 건물 가운데 걸작이다. 식당 안쪽에서 설교단으로 통하는 계단은 우아한 기둥으로 받친 아치로 꾸몄다. 식당으로 통하는 좁은 문은 수사들의 체중을 제한하는 구실을 했다.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수사들은 다이어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이 만든 12-18세기까지의 왕, 성자, 박사 등
산타마리아 데 알코바샤 수도원의 설립은 포르투갈 왕실의 탄생과 연관이 깊다. 1139년 알폰소 엔리케시(알폰소 1세)는 즉위하자마자 십자군과 수도회를 통해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 정책을 폈다. ‘왕의 방’ 타일에 새겨진 전설에 따르면, 알폰소 1세는 산타렘 승리에 보답하려고 1152년에 산타마리아 데 알쿠바사 수도원의 토지를 시토회에 양도했다고 한다.
아폰수 1세는 자기가 정복한 것을 로마 교황과 시토회의 창립자인 성베르나르두스에게 인정 받을 필요성을 느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수도회가 시토회였던 것이다.
1119년에 성베르나르두스가 수도원장 10명과 기안한 시토회 규약에는 “수사들이 밖으로 나돌아 다니지 않도록 하며, 수도원은 될 수 있는 대로 물레방아를 이용해 밭에 물을 댈 수 있는 곳에 둘 것”을 권했다. 수사들은 메마른 땅을 일구었으며, 오래지 않아 비옥한 땅으로 바꿔 놓았다.
흰 수도복 때문에 ‘하얀 수사’라고 부른 시토회는 성베르나르두스가 죽은 1153년에는 이미 포르투갈에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이런 의미에서 알쿠바사 수도원은 성베르나르두스의 마지막 정신적 정복지라고 할 수 있다.
▲수도사들이 만든 12-18세기까지의 왕, 성자, 박사 등
나중에 덧붙인 수도원 장식 부분은 당시 가장 이름난 예술가와 기술자들이 맡았다. 리스본에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건축한 주앙 데 카스티요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성구실과 예배당 앞쪽의 주랑, ‘침묵의 회랑’으로 알려진 회랑 2층에는 그가 만든 마누엘 양식의 화려한 장식이 보인다.
성수 쟁반은 르네상스 양식이며, ‘왕의 방’은 수도원의 역사를 그린 타일로 장식했다. 수도원은 1755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손상되었으며, 그 뒤 포르투갈에 침입해 온 프랑스군의 숙소로 사용되고 약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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