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토르빙하ㅡ한없이 위험하고 아름다운 神의 땅을 훔쳐보다
▲발토르빙하를 걷다 보면 대자연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발토르빙하는 예측할 수 없는 모래 바람과 비바람이 번갈아 몰아치는 얼음 불모지다. 더불어 고산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다.K2(8,611m)를 비롯해 가셔브룸1봉(8,068m)과 2봉(8,035m), 브로드피크(8,047m)까지4개의 8,000m급 고산이 솟았으며, 파키스탄 북부의 무수한 카라코룸산군의 봉우리들이 끝없이 뻗었다.
발토르빙하는 8,000m 14좌 완등을 꿈꾸는 산악인들과 아무도 오른 적 없는 미등정봉에 도전하는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한국에서 온 6명의 파키스탄 트레킹 팀은 비아포-히스파빙하 트레킹을 마치고, 20일 만에 다시 아스콜리 마을을 찾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낯익은 포터들을 보니 고향에 온 듯 친근했다.
밤늦게까지 텐트 밖에서 들려오는 파키스탄 사람들의 발음과 억양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젠 익숙해졌다.첫날은 비아포빙하 트레일과 같은 길로 시작됐다. 해발 2,900m임에도 무자비하게 내리쬐는 뙤약볕에 바람 한 점이 없었다. 7월의 아스콜리는 용광로를 끼고 걷는 느낌이었다.
뙤약볕에 쫓기듯 잰 걸음으로 앞서 나가자 발토르빙하로 갈라지는 다리 앞에서 쉬고 있던 포터 월라얏이 방향을 알려주었다. 월라얏은 비아포-히스파빙하 트레킹 때 함께했던 포터 중 한 명으로 나의 개인 짐을 맡아 주었다. 첫 숙영지인 졸라Jhola(3,120m)까지는 완만했다.
졸라의 잘 정비된 넓은 사이트에는 이미 각국의 산악인들과 트레커들로 북적였다. 비아포-히스파빙하와는 달랐다.스태프들이 자리를 선점해 둔 덕분에 좋은 장소에 텐트를 칠 수 있었지만, 뒤늦게 도착한 팀들은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자리를 구걸하고 있었다. 새삼 발토르빙하의 인기를 실감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
▲무수한 첨봉들로 둘러싸인 싸늘한 콩코르디아는 고요하고 평화롭게 아침이 찾아왔다.
다음날 아침, 빗방울이 쏟아졌다. 우중 산행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가이드에게 먼저 출발해 다음 숙영지에서 기다려도 되는지 물었다. 혼자 세계 여행을 한 내 이력을 알고 있던 가이드는 쉽게 허락해 줬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을 뿐 오랜 세월 많은 트레커들이 지나온 길이었다. 눈 감고 걸을 수 있을 만큼 길이 잘 나있었다.
파유Paju(3,390m) 캠프에 도착하니, 내내 보이지 않던 포터 월라얏이 텐트촌 사이의 전망 좋은 빈 사이트를 지키고 있었다. 사이트 경쟁이 치열해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새벽에 먼저 출발했다고 했다. 월라얏은 위쪽에 하루 먼저 출발했던 한국 오지탐사대 팀이 있다며 안내해 주었다.
키친 텐트에 들어가니 팀을 이끄는 서경만 대장님과 탐사대원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차를 마시며 20대 젊은이들로 이뤄진 팀원들의 혹독한 훈련 이야기와 영상 등을 보니, 아직 천진난만 그들의 도전이 기특하기 그지없었다. 해발 4,000m대로 오르기 전 고소 적응 차원에서 파유 캠프에서 하루를 더 머문 후 본격적인 빙하 탐험이 시작되었다
▲강렬한 태양에 무너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로 인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대부분은 8,000m급 산을 오르거나 특정 산의 베이스캠프로 가기 위해 발토르빙하를 걷기 때문에 트랑고BC(4,014m)는 지나쳐갔다.트레킹 자체를 즐기고 있던 우리는 등반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화강암 첨탑인 트랑고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장엄한 그레이트 트랑고와 우뚝 솟은 트랑고 타워, 트랑고 몽크 등 거대한 봉우리들이 산악미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시간이 멈추고, 모든 사물은 정지된 듯 고요했지만, 구름만은 쉴 새 없이 트랑고 첨탑을 휘감아 돌았다. 그들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마법의 성처럼 신비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얼음 사면이 녹으면서 무너져 내리는 길을 걸어야했다.
돌무더기와 함께 추락하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해야 했다.
다음날 트랑고를 뒤로하고 다시 빙하를 건너 코부세Khobursay(3,778m)로 향했다. 가이드와 스태프를 따라 빙하 위로 올라섰다. 크레바스를 피해 쌀쌀한 아침 기온에 단단히 굳어 있는 빙퇴석(빙하에 밀려 쌓인 암석이나 자갈)들을 붙잡고 크고 작은 언덕을 오르내렸다.
2시간쯤 지나 햇볕이 내리쬐자 발밑이 질척거리기 시작했고, 크레바스 부근의 빙하는 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무너져 내렸다. 얼핏 봐도 위험한 상황이었다.가이드는 우리를 넓은 빙하 위에 대기시키고, 스태프들과 팀을 나눠 안전한 길을 찾기 시작했다. 포터들은 동요했다.
기다리라는 가이드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몇몇 노장 포터들이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다른 길을 찾아 나섰고, 젊은 포터들도 새로운 길을 찾아 출발했다. 한국인 트레커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각자의 생각대로 포터들을 따라 나섰다. 나는 스태프의 신호가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잠시 후, 건너오라는 스태프들의 손짓에 그들을 따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다들 흩어져 걷게 되었다. 선두에서 길을 이끄는 가이드는 어이없어 했고, 우리를 스태프들에게 맡긴 채 나눠진 팀을 찾아 나섰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려 몇 번의 고성이 오고 간 후에야 무사히 코부세캠핑장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경험한 짜릿한 모험에 오후의 휴식 시간은 수다로 채워졌다.
▲신비로운 빛의 조명으로 모습을 드러낸 가셔브룸 4봉.
발토르빙하에서 단연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우르두카스캠핑장까지 가는 길은 오랜만에 빙하를 벗어나 산사면의 초지를 가로질렀다. 수월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산사태로 깎여 내려간 급경사를 맞닥뜨려 위로 올라가야 할지 아래로 내려가야 할지 갈피조차 못 잡는 상황이 자주 생겼다.
무거운 짐을 지고 단화를 신은 채 가뿐하게 내려가는 포터들을 조심스레 따라가지만, 자칫 방심하면 박혀 있는 돌멩이들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미터 아래로데려다 줄 것이 분명했다.
쫄깃해진 심장을 부여잡고 겨우 안전한 길 위에 올라서자, 빙퇴석 사이로 푸르게 빛나는 크레바스 구덩이와 그 너머로 만년설을 뒤집어 쓴 채 하늘로 치솟아 오른 용맹한 첨봉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지탐험가만이 누릴 수 있는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우르두카스Urdukas(4,041m)에 텐트를 쳤다. 서쪽으로해가 질 때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낭만적이었으며, 줄어드는 하루가 아쉬웠다
풀이 있는 마지막 야영지인 우르두카스에서 8,000m급 등정을 위한 거점이 되는 콩코르디아Concordia(4,565m)까지는 이틀이 더 걸렸다. 사막 못지않게 삭막한 콩코르디아의 빙퇴석 평원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원정팀들의 형형색색 텐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K2, 브로드피크, 가셔브룸을 비롯한 수많은 첨봉들이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콩코르디아에서 곤도고로 라를 향해 가는 길. 발토르빙하의 광활한 속살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 펼쳐져, 감히 신의 영역을 침범한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텐트를 준비하던 월라얏이 K2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구름에 가려 형상조차 보이지 않았으나,아쉬움에 한참을 보았다. K2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맑기를 바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텐트를 열어보니 위풍당당한 K2가 들어왔다. 세계 2위봉인 K2는 발티어로 ‘초고리Chogori’이다. ‘크고 높은 산’이란 뜻인데, 측량국이 카라코룸Karakorum을 측량하면서 카라코룸의 K자를 따서 순서대로 K1, K2… 식의 번호를 붙였다고 한다.
K2가 세계 2위 고봉이라는 의미와도 부합되어 오늘날까지 그 이름 그대로 쓰인다고 하는데, 단순한 의미 부여지만 오르기 힘든 K2라서 그마저도 멋있어 보였다. 자리를 맡아 둘 일부 스태프들은남겨둔 채 K2로 향했다.
부채꼴 모양의 거대한 크레바스 언덕을 벗어나자 푸른 빙하와 잿빛 빙퇴석이 극명하게 나눠진 길이 고속도로처럼 곧게 뻗어 있었다. 한때 K3로 불리던 브로드 피크와 첨봉들이 K2의 근위병처럼 늘어서 있었다.
K2 BC 근처에 메모리얼 파크가 있다고 해서 올라가보기로 했다. 가파른 절벽 끝에 K2에서 명을 달리한 용감한 산악인들의 위패가 붙어 있었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듯 스산한 바람이 휘감고 들어와 잠시 머물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우르두카스의 이른 아침, 텐트 문을 열자 트랑고 연봉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멋진 아침 풍경을 선사해주었다.
▲카라코룸의 제왕 K2를 만나다!
K2 BC 주위로 톱니처럼 첨예한 빙탑인 세락이 즐비했다. 호기심에 세락 속으로 들어갔지만 미로처럼 얽혀 있는 빙탑의 위엄에 압도되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우 길을 찾아 나올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풍경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K2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며 환영해 주었다. 첨봉에 쌓인 눈은 바람에 날려 멋이라도 부리듯 설연을 뿜어냈다. 등반가라면 당연히 탐낼 만한 자태가 아닐 수 없다.
K2에서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온 콩코르디아의 날씨는 절망적이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가셔브룸 BC(5,020m)로 향했다. 구름에 가려 아스라이 보이는 가셔브룸 형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아야 했다. 하지만 BC로 이어진 길은 이제까지 보아왔던 길과는 다른 매력의 풍경들이 펼쳐져 있어, 아쉽지 않았다.
다시 콩코르디아로 돌아왔지만, 발토르빙하 트레킹의 최종 목적지인 곤도고로 라Gondogoro La(5,650m)를 무사히 넘는 숙제가 남아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비가 그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콩코르디아에 비가 내리면 곤도고로 라(고개)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기에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틀의 예비 일을 두었지만 초조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곤도고로 라를 목전에 두고 알리 캠프에서 포터들과 마지막 만찬을 즐기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냈다.
마지막 날,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궂은 날씨였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루를 더 기다리자는 의견이 나왔다.고개를 꼭 넘고 싶었던 나는 당연히 더 기다리고 싶었지만, 추운 빙하 위에서 비닐 한 장에 겨우 비를 피하며 야영하는 포터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포터 대장 샤필Shabirr의 말에 이기적인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문화를 배우며 친해지려 했던 게 순전히 허영심에 불과했다는 걸 증명하는 순간 가슴이 아팠다. 일단 다음날 곤도고로 라의 BC인 알리캠프Ali Camp(4,959m)로 가서 결정하기로 했다. 회의가 끝나고 친구라고 여겼던 샤필에게 사과했다. 그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하고는 괜찮다고 말했다.
알리캠프는 경사진 곳의 암벽 자락이었다. 이른 새벽 출발을 위해 멤버들은 하나에 쉘터에서 지냈고, 모든 일정은 어두워질 무렵 끝났다.새벽녘, 가이드의 기상 소리에 잠에서 깼다. 추위는 속살을 파고들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다들 평소보다 옷을 더 껴입었다.
하네스와 아이젠을 차고 가파른 빙하 위에 올라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랜턴 빛을 따라 걷자니, 아직 꿈속인 듯했다. 아이젠이 박히지 않아 미끄러질 만큼 딱딱했던 바닥은 폭신한 눈으로 바뀌었고, 고꾸라질 만큼 심해지는 경사와 눈 깊이 빠져드는 발걸음에 속도가 느려졌다.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눈에 박힌 다리를 꺼내는 게 시급했다.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채 고도를 높이고 있어 현기증이 날 무렵, 거친 숨을 고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랜턴 빛에 별을 볼 수 없었다. 안자일렌 로프가 당겨지고, 다시 무거운 발을 눈 속에서간신히 건져 올려 이동했다. 무아지경 속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앞선 이들이 정상에 다다랐다는 소리였다. 완만하고 넓은 정상에 올라섰을 땐, 이미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너무 추워 짧은 휴식만 취한 채, 다시 하산 준비를 했다. 몇 번의 추락사고가 있었기에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포터들이 앞서 내려가고, 곤도고로 라를 넘을 수 있게 도와주는 전문 가이드가 3~4명에 한 명씩 함께 움직였다. 바위틈마다 로프로 연결되어 있어, 하네스에 확보 줄을 걸고, 조심스레 이동했다.
▲K2에서 죽은 산악인들을 위한 추모 공간. K2를 동경하고 사랑했을 멋진 도전가들의 영혼이 깃든 곳이다.
가이드가 걸음이 빠른 나를 앞으로 보내준 덕분에 재빠르게 하산하던 중 나이가 가장 많은 후미의 포터를 만났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그는 신발 바깥에 양말을 신고 있었다. 순간 놀라움과 안타까움에 걸음을 멈췄다.
얼어붙어 미끄러운 길을 양말에 의존한 채, 줄을 잡아가며 하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전하게 디딜 곳을 찾다 보니 로프를 잊은 채 엉뚱한 바위로 들어서는 그를 지나칠 수 없어, 앞서서 그에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겨우 안전한 위치에 닿자, 그는 감사 인사를 하며 짐을 내려놓았다. 양말을 벗자 흰색 단화가 드러났다. 아이젠이 없어 미끄러운 단화 위에 양말을 덧신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구멍 난 양말이 많이 쌓여 있었다.
생계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어진 최선의 방법이 고작 양말이라니. 갑자기 최소한이라고 생각했던 내 몸에 걸친 장비들이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 따뜻한 차를 준비해 뒀을 스태프들이 있는 캠핑장으로 달려 내려갔다.
야생화가 만발한 야영지에 도착하자 무사히 내려온 스태프들이 따뜻한 차와 함께 멋진 풍경이 보이는 곳에 아늑한 텐트를 준비해 주었다. 생사를 넘나들며 왔을 그들이지만, 곤도고로 라를 넘어 발토르빙하 트레킹에 성공한 필자를 축하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그들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세계 여행을 하면서 가장 뿌듯하고 감동적인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K2의 압도적인 위용. 콩코르디아에서 본 K2.
출처 / chosun.com / 글 사진 민미정 백패킹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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