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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국가들

키프로스 여행ㅡ동부 항구 도시 파마구스타 기행

by 삼수갑산 2022. 5. 5.

파마구스타(Famagusta)ㅡ키프로스 동부 항구 도시 파마구스타 기행

오늘의 목적지는 북 키프로스 동쪽 끝에 있는 파마구스타를 다녀오는 것이다거기에서 바나바 교회를 만나보는 것을 가장 큰 목적지로 삼았다. 그 다음은 어제 사진에서 보았던 성 니콜라스 대성당을 찾아볼 것이다. 파마구스타(Gazimağusa)는 그리스어 이름이 프랑크어로 잘못 와전되어 굳어진 지명으로, 원래는 '모래 속에 묻힌 곳'을 뜻한다.

 

이것은 도시 북쪽에 있는 페디에오스 강어귀에 침적물이 많이 쌓여 있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 도시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이집트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BC 308~246)가 아르시노이라는 이름으로 건설했다.

 

▲원본출처 / naver 지식백과

 

1291년 팔레스타인의 도시인 아크레가 몰락한 뒤 수많은 기독교인이 이 섬으로 피난해오자, 작은 마을이던 파마구스타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1372년 제노바, 1489년 베네치아, 1571년 투르크에게 점령당했다.

 

이 오래된 성벽 도시는 전쟁과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오늘날에는 일부 지역에만 주민이 살고 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중세 군사건축물 가운데 가장 훌륭한 유적들과 오늘날에는 이슬람 사원이 되어 있는 14세기 고딕 양식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 있다

 

1878~1960년 영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바로샤라고 불리는 근대적인 구역이 대부분 관광 휴양지로 개발되었다. 바로샤 지역은 1974년 터키의 침공이 있기 전까지 유명한 해안 휴양지였다. 중요한 상업, 관광 중심지였던 바로샤는 터키 침공 후 울타리가 쳐지면서 터키군 병력 이외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 후 이 지역은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한국의 비무장지대와 같이 양군이 대립되어 터키 사람은 물론 터키군 조차도 머물지 않아서 유령도시가 된 것이다. 파마구스타 주의 최고봉은 해발 740m인 올림포스 산이다.

 

이 주의 남쪽 부분은 동쪽의 파마구스타 만까지 뻗어 있는 메사오리아 평야의 동부를 이루고 있다. 파마구스타 주에는 야생화와 관목류가 풍부하게 자란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밀·보리·야채·과일을 재배한다.

 

낙농업과 어업도 이루어진다. 우리의 아침 식사는 소고기와 버터다. 어제 좁고 어두침침한 슈퍼 구석에서 구입한 소갈비 살이다. 부드럽고 맛있다. 고추장이 다 떨어져 간다. 소고기와 고추장이 아주 잘 어울리는데 아쉽다. 고추장을 구하러 저녁에는 아시아 마켓을 둘러봐야겠다

 

어제와 같이 국경을 넘어 북쪽 기르네 문(Girne Kapısı)으로 간다. 여기서 버스가 없다. 동쪽, 오른쪽으로 걸어서 약 200m 정도 가면 파마구스타로 가는 버스 회사가 있다. İtimat라는 운송회사다. 파마구스타(Famagusta)는 영어식 표기이고 터키식 표기는 가지마구사(Gazimağusa)로 표기된다.

 

그냥 부르기는 마구사(Magusa)라고 사용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왕복으로 표를 샀다.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그냥 출발하는 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는 25인승 버스다. 왕래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조용히 버스는 달린다.

 

쭉 뻗은 도로는 한가하여 잘 달려간다. 넓게 펼쳐진 평원을 달린다. 니코시아와 파마구스타 사이의 광활한 대지를 달리며 북키프로스의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을 느낀다. 초록색 벌판에 노란 유채꽃이 많이 보인다.

 

아침 845분에 출발한 버스는 거의 한 시간을 넘게 달려 마구사에 도착했다. 로터리에 세워진 기념물(Victory Monument) 바로 돌아 차는 멈췄다. 여기가 İtimat라는 운송회사 건물 주차장이다. 로터리에 세워진 기념물이 참 특이하다. 커다란 모형에 여러 사람들이 조각되어있다.

 

터키국기와 북키프로스 국기가 함께 게양되어있다. 우리의 처음 목적지는 바나바 교회다. 파마구스타 근교에 있는 살라미스 지역에 있다. 택시를 타기로 했다. 길 건너에 택시 사무실이 있다. 택시를 흥정했다.

 

7유로(10,000)에 바나바 교회까지만 데려다 주기로 했다. 걷기에는 좀 멀고 버스가 없었다. 대충 거리가 15km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도로는 잘 만들어져 있다. 금방 도착했다. 초록색 벌판 한 가운데 있었다. Saint Barnabas Monastery(그리스 정교회)Salamis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박물관 겸 교회, 수도원이다.

 

성 바나바 교회는 성 바나바가 순교한 후 432년 만에 그의 유해가 발견되어 그 위에 AD 477년 수도원이 건설되었고 오늘날과 같은 모습은 오토만 통치 시기인 1756년에 완성되었다. 교회 본당은 아이콘 박물관이며 교회 앞 4각형 정원 주위로 자 형태로 배치된 수도원 건물은 고고학 박물관이다. 교회 내부를 장식했던 아이콘(Icon)은 악()으로 상징되는 용을 조지 성인(St. George)이 창으로 찔러 죽이는 내용의 그림이다. 왼편으로 부터 1962, 1959, 1905년에 그린 동일한 테마의 그림이다

 

그림 상단에 그리스 어로 AGIOS GEORGIOS(Saint George)라는 글자가 보인다.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바나바(Barnaba)는 키프로스의 수호자이며, 유대의 레위 인 가족으로 살라미에서 태어났다. 33 년에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믿음을 받아들이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45 년에 고향 땅 키프로스로 돌아온 그는 사도 바울과 함께 선교를 했다. 그 후 살라미스 대주교가 되었다. 키프로스를 지배하던 당시 로마 총독 세르지오 바울이 개종하여 세계 최초의 기독교 통치자가 되었다.

 

75 년에 그는 살라미스 유대인들에 의해 투옥되어 돌로 맞아 죽었다고 한다. 5 세기에 제논 황제는 키프로스 교회에 독립을 부여하고 바나바의 무덤에 교회를 세웠다. 바나바 교회는 7세기에 아랍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 건물은 1750 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1976 년에, 아이콘(icon)을 그리는 마지막 세 명의 그리스 사제가 수도원을 떠났다고 한다. 교회에는 당시에 그려진 아이콘이 전시되어 있다. 수도원 맞은편에 바나바의 무덤이 있다. 요새 같은 웅장한 수도원과 무덤위에 세워진 작은 교회를 둘러본다.

 

그의 매장지는 432년 후 주교 안테미오스(Anthemios)의 꿈에 현몽하여 발굴되었다. 들어가 보니 예수님과 바나바의 아이콘이 보인다. 글씨가 있는 석조 보면대 위에 동전이 하나있다. 손에 들었다. 지하로 내려가면 성인의 무덤이 있다.

 

주홍빛 비단 천으로 덮여있다. 비잔틴 양식의 조그마한 교회 1 층은 기도실이고 지하에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서양 사람들의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대형 버스 2대가 주차해 있다. 고목 밑에는 물건을 파는 가판대가 길게 늘어서 있다.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도로를 아내와 둘이 걸어간다. Royal Tombs라는 간판이 보이면서 초록 벌판에 오래된 유적이 눈에 들어온다. 번호가 붙어있는 돌로 만들어진 무덤들의 숫자가 제법 많다. 이 벌판이 무덤 터 인가보다. 거의 80번까지 있다.

 

역사가 오래 된 무덤들인 것 같다. 무덤을 둘러보는 길도 있다. 입구에는 티켓 사무실도 있다. 걸어가며 그냥 보이는 대로 구경만 했다. 돌로 이루어진 무덤보다. 싱싱하게 자라는 들풀들과 들꽃이 더 눈에 들어온다. 큰 길로 나온다. 길 건너편 일대가 Salamis Ancient City지역이다.

 

입구까지는 북쪽으로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길 건너편에 있는 초소 담을 넘어가기로 했다. 울타리에 넘어갈 수 있도록 사다리로 만들어져 있다. 도둑 같이 조심스럽게 넘어갔다. 걸리면 입장료를 내면 될 것 같았다.

 

구경을 하면서 입구를 출구로 삼기로 했다. 관리하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하나도 없다. 그저 오솔길만 있고 초원사이에 유적들이 나타나곤 한다. 여유를 갖고 둘러본다. 살라미스 고대도시(Ancient Salamis)는 지도에서 살펴보면 가오리 모양에서 꼬리 부분이다.

 

파마구스타의 위치는 가오리 몸통부분으로 꼬리 부분인 고대도시는 원형극장, 열주 광장, 목욕탕 등, 중요 유적은 아래 부분(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살라미스의 역사는 BC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주거인들은 BC 1075, 지진 발생 후에 이곳에 들어왔다. 살라미스는 지중해의 암흑기가 끝난 BC 8세기 후 지중해의 중요한 무역항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지진과 아랍 해적들의 습격으로 주민들은 떠나고 도시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후에 현재의 도시 파마구스타(Famagusta)라는 이름으로 재건된다. 오솔길 주변에는 달팽이들이 많다. 기름을 생산했던 터전을 지난다. AD 6세기경의 주거 터도 나온다. 기둥과 돌담, 아치형 건축물도 보인다. 옛 로마 바실리카 예배당 흔적이 있는 유적 터가 있다. 아무도 없으니 우리만의 방식대로 즐긴다.

 

정문 쪽으로 걷는다. 볼만한 유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사모양을 한 기둥과 대리석 하얀 기둥들이 있다. 체육관이었다는 짐나지움(Gymnasium)을 만났다. 코린트식 대리석 열주가 4각형의 광장 주변에 늘어서 있다.

 

광장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BC 31~AD 14)의 대리석 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하트 모양의 기둥 바침도 보인다. 이 광장은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하에 있던 이곳은 대왕의 급서 이후 헬레니즘 세계는 분열되고 키프로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미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헬레니즘 과 로마제국 시대에 살라미스는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에페수스, 페르가몬, 아테네와 함께 무역항으로 다시금 부를 누리게 된다. 대리석 바닥에는 글씨도 있다. 목이 날아간 커다란 석상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원형극장 (Theatre)에 들어섰다. BC 1세기 말 ~ AD 4 세기에 지어진 것이란다. 살라미스는 잦은 지진, 특히 AD 1세기와 4세기의 지진으로 발전의 중단을 맞게 되지만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2(AD 337~361)는 도시를 재건하고 콘스탄티아(Constatia)로 명명하지만 곧 항구는 부서지고 도시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 극장의 역사는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50열에 수용인원 15,000, 무대 뒤로는 대리석 석상들로 장식되었었으나 4세기의 지진으로 파괴된 후 재건되지 않았다.

 

지진으로 파괴된 극장 무대 뒤를 장식했던 석상들이 보인다. 젊은이들이 보인다. 그리스 아테네의 경기장이 생각난다. 무대를 바라보며 중간에 앉아서 당시를 떠올려본다. 다시 나와 성채 터를 간다.

 

아치형 통로도 만나고 반 아치형 지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지지대 건축 방식은 지진에 취약하거나 고층 건물의 벽을 보강하기 위해 적용되었다. 벽체의 석재는 다른 건물에서 헐어 오거나 폐자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도 폐 돌기둥들이 보인다. 궁형 천정의 벽화와 모자이크도 있다

 

석벽에 사용된 흰색의 몰탈(접착제)가 보인다. 석재 보다 더 단단한 몰탈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로마 시대의 운동장과 극장, 목욕탕 등 사교 공간을 둘러보며 해상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을 이곳을 상상했다.

 

구경하다보니 바다가 보인다. 울타리도 없이 우리는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해변은 아름답고 조용하다. 고운 모래와 맑은 물은 정답다. 해변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저 멀리서 이리로 산책해 오는 사람들이다. 바다로 향한 구조물 위에 두 여자가 사진을 찍는다고 정신이 없다.

 

뚱뚱한 여자는 카메라를 들었고 날씬한 여자는 모델이 되어 다양한 폼으로 사진을 찍는다. 멀리 해안을 따라 고층 건물도 보인다. 현대식 건물인데 아마도 호텔 인 것 같다. 고대 도시 유적을 들어가는 입구 매표소가 등 뒤로 있다. 입구를 통해 나오지 않아서 입장료가 얼마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다시 마구사로 가기로 했다. 주차장도 있고 도로도 있는데 너무 조용해 움직이는 교통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걸어서 큰 길로 일단 나가기로 했다. 고대 도시 유적을 구분하는 울타리를 따라 걸어간다. 조용해서 걷기는 좋다.

 

일단 큰 길로 나왔다. 차들이 너무 빨리 달려간다. 택시도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차를 잡아타려고 북쪽으로 걸어가다가 Oscar Park Hotel까지 걸었다. 호텔에 들어가서 교통편을 알아보니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가는 수밖에 없단다. 아내와 상의해서 우리는 히치하이크를 했다.

 

hitchhike, 지나가는 자동차에 무료로 편승하면서 여행하는 것이다. 대로변에 서서 차가 지나갈 때 마다 손을 들었다. 거리에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고 고속도로같이 차들은 그냥 달려간다. 즐거운 마음으로 여유를 갖고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20여대를 그냥 보낸 후에야 붉은색 트럭이 스쳐가다가 멈춘다. 우리는 재빨리 뛰어갔다. 젊은 운전자는 우리가 탈 수 있도록 옆 좌석을 치우고 있었다. 젊은이는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고맙게도 우리를 시내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고 사라진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사라지는 붉은 트럭을 한참 바라보았다. 마구사를 상징하는 동물, 커다란 까치 조형물이 길가에 만들어져 있다. 파마구스타 성벽이 보인다. 성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들어간다. 안내판이 보인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펼쳐진다

 

성문과 이어진 성벽으로 오르는 계단을 먼저 올라간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견고해 보인다. 둘러보니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성문 밖 동쪽은 지중해다. 성벽에 오르니 구시가지에 펼쳐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파마구스타 성은 왕과 귀족의 권력이나 힘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이 아닌 주요 항구를 보호하기 위한 성으로 실제적으로 외세의 침략이나 전쟁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파마구스타는 기원전 274년 무렵에 설립되어 유럽과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주요항구로 오래전 아주 유명했단다.

 

곳곳에 오래된 유적 건물들이 도시 주택들 사이에 튀어 올라와 있다. 우리가 찾아보려던 교회 건물도 보여 반가웠다. 대충 위치를 파악하고 내려왔다. 골목길을 걸어서 유적지를 찾아간다. 먼저 찾은 것이 Peter & Paul Church. 규모도 크다.

 

내부는 고딕식 형태로 견고해 보인다. 그 다음 연결된 곳이 Namik Kemal Dungeon(지하 감옥)이 있는 광장이다. 그의 흉상이 조각되었다. Namik Kemal(1840~1888)은 터키의 유명한 시인이자 작가이다. 터키 우표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태키르다그에서 출생했다

 

터키 근대 산문체 문장 표현의 창시자로서 근대화운동의 지도자였다. 이스탄불로 나와서 정치평론 활동도 했다. 당시 지배자인 술탄 압둘 아지즈를 비판하였기에 탄압을 받아 파리로 망명하였다. 후에 사면을 받아 귀국하여 신문을 발간하여 정부를 비판했다.

 

당국의 노여움을 사 키프로스 섬, 파마구스타의 요새에 감금되어 3년여 세월을 보낸다. 무라트 4세의 즉위로 사면을 받고 미트하트 파샤와 더불어 터키의 헌법을 기초하였다. 그러나 술탄에 의한 입헌정치의 정지로 인해 다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온 후 병사하였다고 한다.

 

이 광장에는 가장 중요한 건물, 라라 무스타파 파사 모스크(Lala Mustafa Pasa Mosque)가 있다. 1298~1312 년에 건설된 이 모스크의 원래 이름은 성 니콜라스 대성당(St. Nicholas Cathedral)이다. 과거 성당에서 현재 모스크로 쓰이고 있다.

 

랄라 무스타파 파샤 모스크에서 십자군 왕국과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지는 키프로스 역사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니 규모가 크고 높았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화려했을 성당이 비어있는 모스크가 된 공간은 정말이지 어디에도 볼 수 없는 볼거리였다.

 

사람들이 제법 보여 생기가 있다. 광장 주변에 있는 커다란 식당 앞에서는 손님을 부르는 직원이 보인다. 베네티안 궁전의 유적(Venitian Royal Palace)도 둘러보았다. 초라해 보이지만 커다란 벽화 그레피티가 보인다.

 

제목이 ‘The Great Escape’로 파란 하늘에 풍선을 타고 가는 형상이다. 등대와 밤 하늘, 그리고 닻이 걸린 줄이 보인다. 골목길을 벗어나 또 교회 유적을 만났다. Nicolaos 교회란다. 14세기에 지어진 교회인데 벽과 제단 부분에 둥근 돔이 버티고 있다. 초록색 풀밭이 이어져 아름답다.

 

그 옆에는 휴업중인 영화관 Canbulat Sineması가 있다. 굳게 닫힌 매표 창구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걸어가니 전망 좋은 2층 레스토랑 Petek 이 보인다. 1층은 패이스트리 판매점이란다. 페이스트리(pastry)는 밀가루에 유지, 물을 섞어 반죽하여 바삭하게 구운 과자 혹은 빵이다.

 

맛과 모양이 다양하며, 특히 유럽은 나라마다 독특한 페이스트리가 있는데, 프랑스와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덴마크의 것이 유명하단다. 성벽 밑에서 커다란 돌 사자상을 만났다. 귓속말로 사자 귀에 속삭이는 사람형태가 그려져 있다.

 

똑같은 폼으로 자세를 잡았다. 이 사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랜 세월을 견뎌온 사자의 숨은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옆에 성벽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경사가 제법 급하다. 올라갈수 있을 때 올라가야지. 힘들지만 올라서니 전망이 좋다.

 

둘러 본 교회와 유적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뒤로는 지중해 바다가 조용히 펼쳐져 있다. 등대도 보이고 항구도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오셀로 성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와 오셀로 성으로 향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 성이 이곳이라니 반가웠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에 끝까지 저항한 곳이 파마구스타 성이라니 왜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의 주인공 이름을 딴 오셀로 성이 이곳에 있는지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햄릿, 리어왕, 맥베스 그리고 오셀로다.

 

원작명은 베니스 무어인 오셀로의 비극으로 흑인장군 오셀로가 그의 부관 이아고의 농간에 의해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오해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에 진실을 알고 자신도 자살하고 이를 꾸민 이아고도 처형당하는 가정의 비극사다.

 

사랑과 질투라는 인간적인 애틋함과 함께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인간내면의 섬뜩한 악마성을 묘사한 작품이다. 입장료가 2.5유로(15리라). 별로 찾는이가 없다. 정면에는 베네치아 왕국의 마크 날개 달린 사자 모양이 보인다.

 

들어서면 입구에 세익스피어 흉상도 볼 수 있다. 생각보다 단순한 성이다. 오셀로 성을 오른쪽에 끼고 걸어가니 길 건너편에 폐허로 남아있는 교회 유적(Latinlerin St. George Kilisesi)이 보인다. 비록 윤곽선만 남아있지만 당당함이 느껴진다. 성 안을 대충 다 둘러본 것 같다

 

이제 처음 들어왔던 입구를 찾아간다. 100% 순수한 자연 바이오 비누라고 선전하는 가게도 보인다. 골목길에서 특이한 모습을 발견했다. 잘생긴 남자가 차(tea) 배달을 하고 있다. 오픈된 쟁반위에 차를 얹어서 배달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가씨가 차를 배달하던 옛 모습과 아주 대조적이다.

 

너무 재미있어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상가가 이어지는 골목은 아주 재미있다. 옷가게와 카페, 레스토랑, 귀금속 가게, 기념품 가게 등 다채롭다. 특히 염감님들이 많이 보여 구시가지를 더 오래된 시가지로 생각나게 한다.

 

트럭에 가득 실고 온 견과류가 인상적이다. 입구로 해서 다시 나왔다. 뒤돌아보니 정말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벽이다. 다시 버스 타는 곳에 왔다. 오전에 보았던 승리의 기념비(Victory Monument)가 지는 해로 인해 색상이 달라보인다. 이 기념비는 아타튀르크와 관련이 있다.

 

터키의 국부, 가지무스타파케말아타투르크(Gazi Mustafa Kemal Atatürk), 터키의 독립전쟁시의 장군이며 지도자였고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다. 키프로스 무자히딘(성스러운 전사)을 대표하는 기념비란다. İtimat 버스 회사 사무실로 갔다.

 

다시 니코시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후 3시에 탑승했다. 니코시아에 도착해서 어제 들렀던 식당에 들어갔다. 점심을 견과류 몇 개로 떼웠더니 배가 고프다. 식당 천장에 그려진 음식 사진을 보고 주문했더니 그것은 여러명이 먹을 수 있는 큰 요리란다.

 

우리는 둘이 먹을 수 있는 요리로 축소해서 주문했다. 소고기 양고기 닭고기 등 고기 종류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요리 되어 야채와 양파가 곁들여 커다란 접시에 나온다. 잠시 후에 또 하나의 커다란 접시가 나온다. 밥과 유제품, 양념, 그리고 감자,토마토, 야채가 또 등장하고 이어서 고추 절임이 나온다.

 

거기에 아이란이 올려져 가득하다. 향이 좀 강했지만 아주 잘 먹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터키 리라를 가지고 아이란 3개를 사가지고 국경을 넘었다. 남 니코시아의 번화가 거리인 레드라 거리(Ledras)는 불빛만 가득하고 사람들이 적었다.

 

어제는 인도와 동남아 사람들로 가득해서 북적거렸는데, 모두 일터로 들어갔나보다. 거리를 그냥 걷다가 우리도 숙소로 돌아왔다. 아시아 마켓에 들러 고추장이 있는지 알아보려했는데 몸이 무거워 만사가 귀찮다. 먼길을 다녀왔더니 좀 피곤하다. 대충 씻고서 정리를 한 후 바로 잠이들었다.

 

글.사진출처 / blog. 서울 관당 이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