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國土 기행ㅡ백제의 미소속에 비친 고즈넉한 佛法의 흔적 되집다
▲충남 서산 인지면의 작은 절집 죽사(竹寺). 비룡산 산정의 바위 아래 절묘한 자리에 위태롭게 들어서 있다.
절집 마당에 서면 서산 시내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죽사는 알려지지 않은 절집이라, 인적이 뜸해 적막할 정도다.
경남 합천의 가야산이 더 이름나긴 했지만, 충남 서산에도 가야산(伽倻山)이 있습니다. 가야란 이름에서 고대국가 가야를 떠올리기 쉬운데 ‘가야’란 지명은, 실은 인도 동부 지방의 불교 최대 성지로 꼽히는 붓다 가야에서 왔답니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서 성불했다고 전해지는 곳, 거기가 바로 붓다 가야라는군요.
지명 유래로 짐작할 수 있듯이 가야산 일대에는 불교의 굵은 자취가 선명합니다. 가야봉을 비롯해 원효봉과 석문봉, 옥양봉, 수정봉 등 다섯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 가야산에는 백제 시대에 자그마치 100개가 넘는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백제와 당나라가 교류하는 길목이었던 가야산이, 절집과 암자에서 피워올린 향불의 연기로 가득한 불국토였다는 얘기지요. 봄날, 꽃구경의 소란을 피해 가야산에서 불법(佛法)의 흔적을 따라 고즈넉한 오솔길을 걸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 길 위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입니다.
# 불국토의 자취를 따라 걷다
초록의 봄날, 가야산으로 가서 백제의 불국토 자취를 따라 걷기로 한다. 지금은 스러지고 만 가야사와 보원사의 옛 절집 터를 지나고, ‘백제의 미소’로 이름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과 왕벚꽃이 아직 피지 않은 개심사를 찾아간다. 비룡산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죽사에도 들르고, 육지가 돼 버린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부석사에도 간다.
꽃피어 화려한 때를 벗어나, 행락객의 소란을 피해 봄볕 아래 고요하게 걷는 길이다. 봄꽃 피어 북적이는 곳을 찾지 않는다 해도 봄의 한복판으로 들어서는 지금 계절에는, 어딜 가든 모자람이 있을까.
‘백제의 미소길’. 가야산을 끼고 이어지는 매력적인 걷기 길이다. 길은 예산 상가리에서 서산 용현리로 이어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야산 석문봉 아래 옛 가야사 터에서 출발해 서산 마애여래삼존상까지다.
‘백제의 미소’란 이름은, 길의 종점에 있는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의 꾸밈없는 미소에서 따왔음은 물론이다. 전체 거리는 9㎞ 남짓. 너무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다. 걷는 시간은 서너 시간 정도면 넉넉하다.
본래 이 길은 왕복 2차로에, 폭 10여m의 차도인 ‘가야산 순환도로’로 개설될 예정이었다. 지금처럼 타박타박 두 발로 걷는 길이 아니라 수덕사와 덕산온천에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을 잇는, 관광도로가 될 뻔했다는 얘기다.
지역주민과 불교계, 환경단체가 문화유산과 생태환경 훼손 등을 우려, 도로개설에 반대하며 맞선 게 자그마치 3년. 현장조사와 워크숍, 주민설명회가 줄을 이었고, 긴 협의 끝에 결국 아스팔트 도로 대신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생태 탐방로를 놓자는 데 합의했다. 이런 진통 끝에 놓인 길이 바로 ‘백제의 미소길’이다.
이쯤에서 쓴소리 한 마디. 서산에는 여러 이름을 가진 걷기 길이 이리저리 교차한다. 충남 서북부 지역에 조성한 ‘내포문화숲길’이 있고 서산에서 놓은 ‘아라메길’이 있으며, 코리아 둘레길 구간인 ‘서해랑길’이 있다. 내포문화숲길의 하위구간에는 테마에 따라서 백제부흥군길, 원효깨달음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등의 이름이 또 붙어 있다.
길의 이름이 난무하다 보니, 걸으면서도 내가 내포문화숲길 위에 있는 건지, 아라메길을 걷는 건지, 서해랑길을 따라가는 건지 도통 알기 쉽지 않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으나 알아두기는 하자. 백제의 미소길은 내포문화숲길 가운데 ‘원효깨달음길’의 4코스다.
▲사진 왼쪽이 남연군 묘. 대원군은 가야산 아래 명당자리에 있던 절집을 불태우고 탑 자리에다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썼다. 사진 오른쪽은 남연군 묘 인근에 있는 풍수가(지관) 육관도사 손석우의 묘. 손석우는 생전에 가야산에 남연군 묘보다 더 좋은 천하명당이 있다고 말해왔는데, 그가 묻힌 자리가 바로 그곳이라고 전해진다.
# 명당 중의 명당, 남연군 묘
길의 시작인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터에서 신발 끈을 묶는다. 수덕사보다 더 큰 절이었다는 가야사는 지금 온데 간데 없고, 그 자리에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있다. 남연군 묘는 산자락이 밀려 내려와 봉긋하게 솟은 언덕 위에 있다. ‘천하명당’으로 일컬어지는 자리다.
명당 묫자리를 찾았던 대원군은 홍성의 지관 정만인에게서 “가야산 아래 절집 가야사 자리가 두 명의 왕이 나올 자리”란 얘기를 듣고 절집에 불을 지른 뒤 석탑이 서 있던 자리에다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썼다. 남연군 묘는 지금까지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불리면서 풍수가들을 불러 모은다.
남연군 묘는 등 뒤로 병풍처럼 펼쳐지는 가야산의 주능선을 두고 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이거나 아예 풍수지리를 믿지 않는다 해도 묫자리 앞에 딱 서 보면 그 자리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뒤쪽의 가야산 기운이 모이는 자리이면서 앞으로는 열려있으되 헐겁지 않은, 참으로 절묘한 자리다. 자연스럽게 ‘아, 명당이란 바로 이런 자리를 말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남연군 묘 앞에서 떠올리게 되는 건 ‘오페르트 도굴사건’이다. 서구열강의 조선에 대한 통상 요구가 실권자 흥선대원군에 의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자 급기야 독일인 오페르트는 1868년 4월 21일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했다.
‘대원군이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 건 아버지가 명당에 묻혔기 때문’이라는 조선 천주교인의 말을 오페르트는 믿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일단 묘를 파헤쳐 유골을 확보하면 대원군과의 협상에서 효과적인 카드로 이용할 수 있었다.
오페르트는 그러나 무덤 도굴에 실패했다. 러시아 병사로 위장한 100여 명의 중국 청년으로 도굴단을 구성해 갔는데도 석회석으로 단단하게 다진 무덤을 파헤치지 못했다. 묫자리를 봐준 지관이 신묘한 예지력을 가졌던 것일까. 남연군 묘를 쓸 때 정만인의 조언으로 백회 200포를 개어 무덤 아래를 마감했으니 삽날이 들어가지 않는 건 당연했다.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 지 7년 만에 대원군은 차남 명복을 얻었다. 그가 곧 조선의 제26대 고종으로 대한제국의 첫 황제가 됐다. 지관의 말대로 대를 이어 순종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 지관 말대로 가야사 자리에 묘를 써 두 명의 왕이 나긴 했지만, 순종 대에 이르러 조선은 망하고 말았으니 거기를 진짜 명당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천하명당이 따로 있다고?
▲ 가야산을 끼고 넘어가는, 걷는 길인 ‘백제의 미소길’
들머리 옛 가야사 터 부근에 세워진 이정표. 일대에 이렇듯 관광지와 유적이 많다.
백제의 미소길에 들어서자마자 길옆에 상가리 미륵불이 있다. 아버지 묫자리를 위해 가야사를 불태운 대원군이 보기 싫어 돌아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미륵불이다. 몸을 슬쩍 돌려 남연군 묘 쪽을 외면하는 듯 서 있는 자세가 그런 이야기를 만들었으리라. 백제의 미소길은 줄곧 오솔길을 따라간다. 본래 도보 코스로 다듬어지기 전에 차가 다니던 길의 형태가 희미하게 남은 길이다.
이 길의 매력은 단연 ‘개방감’이다. 길은 계곡이 아니라 산허리를 끼고 이어진다. 숲 속의 그늘이 아니라 온몸을 봄볕에 드러내놓고 걷는 길이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야트막한 고갯길을 넘어가는 길 위에 서면 시야가 탁 트인다.
주변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개방된 공간을 걸으면서 얻게 되는 건 ‘존재감’이다. 사방이 탁 트인, 혼자 걷는 길 위에 있으니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하다. 인적이 없는 조용한 길이어서 더 그렇다.
고갯길 정상의 둔덕이 예산과 서산의 경계지역인데, 여기에 장승과 솟대를 세워두었다. 퉁퉁 고개를 넘고 소나무 쉼터를 지나 길은 용현자연휴양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휴양림을 지나면 보원사지다. 거대했던 절집 보원사가 있던 터다.
드넓은 벌판의 옛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유물만 다섯 개다. 단아하게 서 있는 오층석탑을 비롯해 고려 광종의 스승 역할(왕사·王師)을 했던 고승 법인국사의 탑과 탑비, 당간지주와 석조 등이 모두 보물이다. 1000년의 시간이 지나간 절집 터는, 텅 비어있음에도 아름답다. 진공 같은 적막 속에서 빈 절터에 들어서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보원사지를 지나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이내 길의 종착 지점인 용현리다. 용현리에는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바위에 새긴 불상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
마애여래삼존상과 마주 섰을 때를 기준으로, 가운데는 현세불을 의미하는 여래입상이 있고, 왼쪽에는 과거불을 의미하는 제화갈라보살입상이, 오른쪽에는 미래불을 의미하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돼 있다.
최고로 꼽히는 건 여래의 ‘미소’와 제화갈라보살이 보여주는 만면의 웃음이다. 여래입상은 올라간 입꼬리로 환하게 웃는데, 미소에서는 위엄보다는 천진함이 묻어난다. 제화갈라보살은 터지는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하다.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햇빛은 불상의 얼굴에 마술처럼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 벚꽃 피기 전에 개심사에 간다
▲ ‘백제의 미소길’ 끝에 있는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돌로 깎아서 빚어낸 여래상의 미소가 천진하고 해맑다
가야산 자락에서 이름난 절집 중 하나가 개심사다.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삼은 범종각과 심검당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인상적인 절집이지만, 개심사를 대표하는 건 뭐니뭐니해도 벚꽃이다. 개심사 경내에 피는 왕벚꽃과 청벚꽃은 탐스럽기로 이름났다.
개심사의 왕벚꽃은 꽃잎이 겹으로 돼 있어 일반 벚꽃을 여러 송이 묶은 것처럼 탐스럽다. 꽃이 백색과 연분홍, 진분홍, 옥색, 적색 등 다섯 가지 색을 띤다. 개심사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연한 연둣빛의 청벚꽃도 있다.
경내 스무 그루 남짓의 벚나무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면 개심사는 탐스러운 꽃 구름 속에 잠겨있는 듯하다. 벚꽃이 필 때면 절집이 온통 행락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이유다.
개심사는 벚꽃의 개화가 늦다. 왕벚꽃이 본래 벚꽃이 지고 보름쯤 지나서 개화가 시작되는데, 개심사 왕벚꽃의 개화는 그것보다도 열흘 정도 더 늦다. 개심사 왕벚꽃 개화 시기는 대략 4월 말쯤. 꽃이 늦는 해에는 5월까지 넘어가기도 한다. 자고로 ‘늦게 피는 봄꽃’은 눈길을 덜 받는 법인데, 이 왕벚꽃이 필 때면 개심사는 온통 북새통을 이룬다. 개심사 왕벚꽃이 워낙 화려해서다.
지금 가면 개심사에는 벚꽃이 없다. 개심사 명부전 지붕 보수공사까지 이뤄지고 있어 흐트러진 절집은 한적하다. 그래서 지금 개심사로 간다. 개심사는 ‘걸어서’ 갈 수 있다.
백제의 미소길 구간에 있는 보원사지에서 산속 오솔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보원사지에서 개심사까지 가는 길은, ‘아라메길’ 코스이기도 하고 ‘내포문화숲길’ 코스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표지판은 여지없이 걷는 이를 헷갈리게 한다. 이 구간은 등산을 방불케 할 정도의 가파른 경사길이라 숨이 차다. 그래서 속도를 늦추고 자주 다리쉼을 하게 된다. 시간이 허물어버린 텅 빈 절집 터에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절집으로 건너가는 이 길 위에는 빼어난 경관은 없지만, 천천히 걷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 기막힌 자리의 절집 두 곳
가야산 자락에 있는 건 아니지만, 서산에는 기막힌 자리에 앉아있는 절집이 두 곳 있다. 그중 한 곳이 인지면에 있는 죽사다. 절집이 ‘대나무 죽(竹)’ 자를 이름으로 얻은 건 전설 때문이다. 대나무와 바위가 산에 먼저 오르기 내기를 했는데, 산에 깃든 용이 진노해 바위에 벼락을 때려 대나무가 이겼다는 밑도 끝도 없는 전설이다.
본래 금강산이었던 산 이름이 이때 용이 나타났다고 해서 비룡산이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본래 이름이 금강산이었다는 이야기에서 짐작되듯 비룡산은 산정의 우람한 바위가 기이한 경관을 이룬다.
죽사는 그 바위 바로 아래 기막힌 자리에 제비집처럼 매달렸다. 절집을 홀로 지키고 있는 스님을 빼면 오가는 이가 거의 없는 길. 절집으로 올라가는 적요한 길가에는 수선화가 하나둘 피었다가 지고 있다.
또 서산에서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내력 있는 절집, 부석사도 빼놓을 수 없다. 부석사는 천수만의 도비산 자락 아래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부석사의 특급 전망대는 단연 안양루 옆의 절집 마당. 이곳에서는 너른 들녘과 부남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부남호 너머의 안면도, 그리고 또 그 너머의 서해바다까지 거침이 없다. 봄볕 좋은 날 오후에 바다와 갯벌 위로 붉게 물드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부석사의 누각이다. 서산으로 떠난 절집 여행의 마무리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또 있을까.
■ 태봉산에도 ‘왕의 명당’
명당이라면 운산면 태봉리에 있는 조선의 13대 임금 명종의 태실 자리도 빠지지 않는다. 명종 태실은 가야산과 이어진 상왕산 아래 저 홀로 불쑥 솟은 봉우리 태봉산에 있다. 비석 앞에 서면 축협 서산목장의 초지가 360도로 펼쳐지는데, 초지로 뒤덮인 주변의 수많은 구릉이 마치 제주의 오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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