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순교성지(교황청이 승인한 '국제 성지)
▲해미순교성지 성당 입구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창설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 성지를 약 7천 평 확보하였고, 그리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하였고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찾아가는 길
▲해미순교성지 성당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지속적인 박해 동안에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 읍성)의 두 채의 큰 감옥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1866년 병인년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수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으로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든 후, 한 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 넣고 흙과 자갈을 덮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소위 생매장지라고 전해지는 조산리는 해미읍에서 좀 떨어진 내 건너편 벌판에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있는 곳이었다. 바로 현재 해미 성지로 조성된 곳이다. 해미 지역에 사는 외인들은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고해서 죄인 둠벙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생매장에 관한 일은 유해를 찾을 당시 70년이나 되는 옛날 일이었으므로 확인이 어려웠으나 다행히 노인들 중에 목격자나 전해들은 증언자들을 통해서 생매장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 증언에 따라 1935년에 조산리에서 순교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에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 없이 수십 명으로 짐작되었으나 수습된 유해는 10명가량 밖에 되지 않았다.
1906년 병오년에 일어난 큰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이 보이지 않았으나 증인의 말을 확인한 후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승낙을 얻어 발굴하였다.그 결과 유해를 많이 얻었을 뿐 아니라 십자고상이 썩은 형적까지 발견되었다. 발굴된 유해들은 성대한 예식을 갖추어 당시 서산 본당인 상홍리(일명 가재) 공소로 이장하였다
.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때 캐어 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다.
생매장 순교 벌판에서는 1935년 서산 본당의 바로(Barraux,) 신부 지도하에 발굴된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은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유해 발굴 터인 원 위치로 다시 안장되었고, 순교자의 유해는 별도로 보존 처리되어 유해 참배실에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유해 발굴지 인근 하천 위에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탑이 세워져 있다.
▲해미순교성지 성당
▲해미순교성지 성당 내부
▲해미순교성지 성당 내부
▲십자고상
▲형장터 그림
▲형장터 그림
▲형장터 그림
▲형장터 그림
▲103인 성인화
▲103인 성인 명단
▲기도하는 성모 상
▲유해함
▲해미 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야외제대
▲해미순교성지
▲해미순교성지 조형물
▲해미순교성지 조형물
▲해미 순교자 탑
▲무명 순교자 묘
▲무명순교자 탑문
▲해미순교성지에는 당시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진둠벙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 혈하를 이루던 서문밖 사형 터는 병인 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 수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 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죄인들을 외나무 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쳐 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 둠벙’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 이라 불리어진다.
▲순교 자리개 돌판
▲순교 자리개 돌판
▲형구 돌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은 1790년대로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조선왕조의 군사적 요충지 진영에는 중앙에서 3품의 진영장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해미의 영장은 조선 중기 이후, 3품 벼슬의 무관(영장)이 별도로 파견되어 담당한 것이 아니라, 종6품의 해미 현감이 겸임을 한 것으로, 해미 진영은 홍주 진관에 속하며 홍주 영장(종3품)의 지휘를 받아, 서해안 일대의 고을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신자들 중의 지체가 높은 사대부 출신들은 모두 상급 기관인 홍주 영장 및 충청 감사가 있는 공주로 이송하고, 신분이 낮은 서민들만 자의적으로 대량 처단한 것 같다.
이런 지속적인 박해 동안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 읍성)에 있던 두 채의 큰 옥사에는 한티 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미의 첫 순교자는1797년의 정사박해로 체포되어 1800년에 순교한 인언민(마르티노)과 이보현(프란치스코)이다.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비오)가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했으며, 1811년∼1839년의 중기 박해 기간 동안 민 베드로 첨지 등 9명이 해미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66년 이후로 진행된 병인박해 때에는 모두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하였다. 이는 순교록에 나오는 57명, 관변 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나오는 70명 중에서 중복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 5명을 제외한 숫자이다.
이처럼 모든 기록을 통해 성명이나 세례명 중 적어도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해미의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의 수를 더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총수는 179명 이상이 된다.
교회의 순교자 증언록만을 통해 볼 때,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67명 중에는 교수형이 33명, 참수와 옥사가 각각 5명, 병사가 4명, 생매장이 3명, 장사가 3명, 미상이 14명으로 나타난다.또한 옥사 앞에는 당시 순교자들의 손발을 묶고 나뭇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던 호야나무(회화나무가 철사 줄이 박혀있던 흔적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 지금도 우뚝 서 있다.
높이 5m 길이 1,800m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은 울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졌으나 최근 다시 복원하였다. 그 감옥 터 옆에 있는 호야나무는 지금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이도록 옛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병인박해 때 이 감옥 사정을 목격한 이주필(李周弼)씨는 이렇게 증언했다고 한다. "성 중앙에 담을 길반이나 넘도록 쌓아올린 3간 와가가 있으니 그것이 옥이다. 그 속에 30-40명 가량이 갇혀 있었다. 그 담 밖에 큰 고목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 나무에 교우들의 목을 옭아매여 죽였다.
그 옆에 또 바깥옥이 있는데 역시 3간 와가이다. 그 안에는 십자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문을 열어 놓아도 도망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천주학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북쪽 산 밑에 10여간 되는 와가가 관아이고 여기서 영장이 정사를 다스렸고, 그 우편 아래로 또 큰 와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객사였다.
특히 당시 토포병방(討捕兵房)이던 박영완이란 자는 살기가 등등하여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박영완은 심지에 불을 붙여갖고 죽은 사람마다 눈에다 대어보고 아직 덜 죽은 사람을 발견하면 막 때려 죽여 버렸다.박영완은 얼마 후에 홍주로 잡혀가서 맞아죽고 자손없이 절손으로 끝을 맺었다. 외교인들까지 모두 천벌이라고 말했다."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과 그 옆자리에 아문과 호서좌영의 옛 모습이 복원되어 있고 뜨락에 있었을 법한 노송 여섯 그루가 당시 호령소리, 곤장 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터에 서 있다.
관아 터로 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다. 옛 저자길이다. 옛 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다.
해미 읍내에는 순교터가 여러 곳에 있다. 그러나 공식 형장은 서문 밖이었던 것 같다. 박해 기간 동안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을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 수비를 명목으로 현감 겸 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을 기록한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4대 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가혹하게 죽였다.
병인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해미읍성 안에서 저잣거리를 따라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재앙을 떨쳐내는 문’ 서문이 비껴 있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枳城樓)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치명자들이 가시밭과 같은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그들을 밀어 넣고 돌로 찧던 하구수가 입을 벌리고 있다.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도 하였다. 또는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
특히 잔인하게는 돌다리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 올려 자리개질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지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병인박해 때 양촌 사람 방영창(안토니오) 등 수많은 분들이 순교하였다. 꿈틀거리는 몸둥이가 있으면 횃볼로 지져 숨을 끊어 버렸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 처
▲십자가의 길 2 처
▲십자가의 길 3 처
▲십자가의 길 4 처
▲십자가의 길 5 처
▲십자가의 길 6 처
▲십자가의 길 7 처
▲십자가의 길 8 처
▲십자가의 길 9 처
▲십자가의 길 10 처
▲십자가의 길 11 처
▲십자가의 길 12 처
▲십자가의 길 13 처
▲십자가의 길 14 처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 혈하를 이루던 서문밖 사형 터는 병인 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 수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 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죄인들을 외나무 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쳐 박혀 죽었다.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 둠벙’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 이라 불리어진다.
출처 / blog.daum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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