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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ㅡ쿠트나호라(Kutna hora)ㅡ성 바르바라 대성당(St Barbory)

by 삼수갑산 2021. 12. 2.

체코 쿠트나호라(Kutna hora)ㅡ성 바르바라 대성당(St.Barbory)

▲성 바르바라대성당

 

쿠트나 호라는 프라하에서 동남쪽으로 약 65km 떨어진 이 도시로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전성기에는 보헤미아에서 프라하 다음 가는 도시였다. 당시 이곳에는 풍부한 은광맥이 있었다.

 

이곳에서 주조된 은화는 그 당시 중부유럽의 주요 통화였으며 이러한 은의 부가 성당 건축과 연결되어 오늘날 14세기말의 후기 고딕 양식의 보배라 할만한 "바르바라 대성당"이 건축 되었다.

 

이 성당의 건축은 프라하 비타성당을 설계한 페트르 팔레슈의 아들, 얀 팔레슈(Jan Parléř)에 의해 1388년 시작됐으나 1420년 후스전쟁이 일어나면서 첫 번째로 중단되었다.

 

60년이 지난 1482년, 프라하 화약탑의 건축가인 마테이 레이세크(Matěj Rejsek) 책임 하에 공사가 재개되어 1499년, 둥근 천장으로 형태가 갖춰졌고 이어 프라하성 건축에 간여했던 베네딕트 레이트(Benedikt Rejt)에 의해 1521년부터 1532년까지 교회 측면 회랑에 독립된 3개의 소 채플이 건설됐다.

 

당초 계획은 현존 건물보다 2배는 더 컸던 모양이나 은광의 경기가 시들면서 길이 70m, 폭 40m, 높이 30m의 본당이 일단 마련된 후 미완인 채로 1558년 다시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후 300여년 정체의 기간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의 건물 정면은 1884년 속개된 재건축 기간에 마무리된 것이며 1905년에 이르러 비로서 현재 모습의 성당이 최종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한 사람 30코루나의 입장료를 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체코를 대표하는 후기 고딕 건물인 성 바르바라 성당은 하나의 중랑과 네 개 측랑으로 이뤄졌으며 교차된 리브 궁륭(Cross-rib Vault)으로 형성된 높은 공간을 갖고 있다.

 

500년이라는 오랜 건설기간을 거친 탓에 그 안쪽에는 보헤미안 고딕이라는 독특한 양식에서 부터 17세기 예수회 시절에 가미된 바로크 양식까지 여러 형식의 장식이 혼합돼있다.

 

성당의 내부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높은 천정에 장엄하게 뼈대를 이룬 리브 궁륭으로 특히 서쪽 오르간 위에 베네딕트 레이트가 즐겨 사용했다는 꽃잎 무늬가 화려하게 드러나 있다.

 

리브 사이에는 보헤미아 왕가, 귀족, 장인 길드 등 수십 개의 문장이 장식돼 있는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의 문장도 섞여 있다고 한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보헤미아와 같은 국왕에 의해 통치됐던 시대의 흔적이다.

 

쿠트나 호라는 프라하에서 직선으로 동쪽 63km, 보헤미아 한 복판에 있는 은 광맥으로 발달한 인구 2만1000명 정도의 고도시다. 당시 광산 노동자는 모자가 달린 흰옷을 덧입었는데 그 모습이 수도사와 비슷했기 때문에 Kutná Hora(수도복의 산)라는 지명이 생겼으며 도시 북단에 같은 이름의 작은 산이 있다고 한다.

 

13세기 후반에 유럽 은의 3분의 1을 공급하는 최대 생산지가 됐으며 이곳에서 주조된 3.7그램의 은화인 프라하 그로슈(Pražský groš)는 높은 순도를 유지하여 어디서나 통용이 가능한 중앙 유럽의 국제통화로 인정을 받았다.

 

14∼15세기의 번영기에는 은으로 축적한 부로 도시 곳곳에 화려한 궁전과 성당이 건설돼 프라하와 맞먹는 대도시로 발돋움했으나 16세기 들면서 은광이 고갈되기 시작하더니 30년 전쟁을 겪은 후 차차 발전이 멈춰 서게 된다.

 

1726년, 광산의 마지막 갱도가 폐쇄된 다음에는 그대로 정체의 역사가 계속됐는데 역설적으로 이 도시의 중세 모습을 곱게 지켜준 것이 그 세월이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유네스코는 성 바르바라 성당(Chrám svaté Barbory)과 세들레츠(Sedlec) 지구에 있는 성 마리아 성당(Katedrála Panny Marie)을 포함하여 쿠트나 호라의 역사적 시가 중심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별로 크지 않은 규모의 도시, 서쪽에 구시가가 있으며 그 남서 끝에 체코를 대표하는 후기 고딕양식의 성 바르바라 성당이 터를 잡고 서있다.

 

지형 상으로 언덕이 많은 거리는 동쪽으로 길게 뻗어 동북부에 세들레츠라는 작은 구시가가 하나 더 형성돼 있으며 동서 양 지구는 마사리코바(Masarykova)라는 번화가를 가운데 두고 연결된다.

 

쿠트나 호라의 명소는 구시가 중심에 있는 팔라츠키 광장(Palackého nám)에서 바르바라 성당 사이에 대부분 위치하고 있으며 자료를 참작하여 대략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광장의 100m 남쪽에 14세기의 성 야콥 성당(Kostel sv. Jakuba)이 있으며 높이 82m의 탑이 구시가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솟아있다. 그 옆에 이태리 피렌체에서 주조전문가를 초청하여 13-14세기에 유통하던 은화인 프라하 그로슈를 만들었다는 이태리언 코트(Vlašský Dvůr)가 있는데 한때 보헤미아 왕이 거주했다고 해서 궁전으로 불린다.

 

팔라츠키 광장의 서쪽 끝에서 후소바(Husova) 거리로 나서면 오른 편에 별을 머리에 두른 성모 마리아의 페스트기념탑(Morový sloup)이 서있고 다시 서쪽으로 200m를 더 가면 분홍과 백색으로 치장한 성 네포묵 성당(Kostel Sv. Jana Nepomuckého)이 나타난다.

 

1752년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건물인데 현재는 교회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그 서쪽 레이스코보(Rejskovo) 광장에 물탱크로 쓰였던 고딕 장식의 15세기 ‘돌 우물’ 유적(Kamenná kašna)이 있으며 바르바라 성당과 비슷한 모양의 부조로 장식돼 있다.

 

네포묵 성당 북쪽에는 ‘돌의 집’(Kamenný dům)이라는 15세기의 석조건물이 서있다. 박공부분에 정교한 장식이 있는 후기 고딕의 주택으로 현재는 시립 미술관으로 이용된다.

 

바르보르스카(Barborská)거리를 따라 시가의 남서쪽 끝인 바르바라 성당으로 가는 길에는 광산박물관으로 사용되는 1420년에 건설된 흐라데크(Hrádek)라는 작은 성이 있으며 지하 200m에 이르는 갱도를 투어로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구시가에서 2Km 동북에 있는 세들레츠 지구에도 두 개의 명소가 있다.

 

그 하나는 1330년 시토회 수도원으로 세워진 후 18세기에 네오 바로크양식으로 개축된 성모 마리아 승천성당(Katedrála Nanebevzetí Panny Marie)이고 또 하나는 그 북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납골당 달린 여러 성인의 묘지 성당’(Hřbitovní kostel všech Svatých s kostnicí)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유명한 해골성당이다.

 

오늘 하루를 이곳에서 묵으면 위의 모든 곳을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텔치까지 가기로 계획을 바꾼 터라 섭섭한 마음으로 한번 나열해 본 것 뿐, 그 중에서 대표적인 성 바르바라 성당과 납골성당 두 곳만을 이제부터 찾아볼 생각이다.

 

▲성 바르바라대성당

 

▲성 바르바라대성당

 

▲성 바르바라대성당(좌)

 

구시가로 연결되는 바르보르스카 거리가 앞으로 뻗어있는데 좌측에 17세기에 설립된 예수회대학(Jezuitská kolej)의 긴 건물이 보이고 오른쪽 돌난간에는 바로크양식 조각이 나란히 서있다. 난간 우측은 브르흘리체(Vrchlice) 개울로 떨어지는 작은 골짜기다.

 

▲외부 성인 조각물

 

13좌의 석상은 예수회 조각가 프란티셰크 바우구트(František Baugut)가 프라하의 카를다리를 본떠 제작한 것이다.

 

▲성 바르바라대성당

 

은광이 융성하던 시절 프라하와 대등한 세력을 염원했던 쿠트나 호라는 당시 주교좌가 없던 교권을 위해서도 장엄한 성당 건축이 필요했다고 한다.

 

바르바라 성당의 실체가 프라하 비타 성당에 응모했다 낙선된 계획안이라는 설이 있는가하면 장려함에 있어 오히려 비타를 능가한다는 주장이 있는 등 쌍방에 경쟁의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성당을 광산의 수호성녀인 성 바르바라에 봉헌한 것이나 건축자금을 광부들 스스로 조달하여 충당한 것이 전부 뻗어나던 당시의 영화를 엿보게 하는 흔적이다.

 

성 바르바라는 번개에서 지켜주고 광부, 건축가, 소방관, 포수를 보호해주는 그리스도교 14수호성인 중의 한 사람이며 그림에서는 통상 세 개의 창이 달린 탑 안에서 순교자의 왕관을 쓰고 공작새 깃털을 들고 있는 초상으로, 번개와 함께 묘사된다.

 

3세기경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니코메디아(Nicomedia) 왕 디오스쿠루스(Dioscurus)의 딸로 태어난 바르바라는 불결한 남자의 접근을 꺼린 아버지에 의해 격리된 탑 속에서 세월을 보냈는데 기독교에 접하면서 신앙에 눈을 뜬다.

 

바르바라는 아버지가 없는 사이 세례를 받아 개종하였고 건축가를 설득하여 두 개의 창만 있던 탑에 삼위일체를 표상하는 창문, 세 개를 만들게 하였다.

 

딸의 개종 소식을 듣고 격노한 아버지가 딸을 로마 총독에게 넘겨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지만 바르바라는 신심을 굽히지 않았고 끝내 아버지에 의해 목이 잘려 순교한다.

 

그 순간 떨어진 벼락에 맞아 아버지도 재가 되어 죽었다고 한다. 성당 옥상에 보이는 세 개의 삼각 지붕은 바르바라와 연관된 3이라는 숫자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천장

 

성당의 천정은 섬세한 아치형태로 되어 있는데, 보헤미아 왕가의 문장, 길드 문장,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왕국의 문장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중앙제대

 

전면 중앙의 ‘최후의 만찬’이 부조된 네 폭짜리 주 제단은 재건축 기간인 1905년 신 고딕 양식으로 제작된 것이며 반짝이는 금박이 무척 화려하다. 오른쪽 날개 속에서 책 들고 탑 앞에 서있는 수호성녀 바르바라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소 제대

 

이어지는 채플에서는 1380년에 제작됐다는 마리아 상이나 15세기 후기고딕의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으며 그중 뛰어난 작품이 1490년경 제작된 스미쉑(Smíšek) 채플의 그림들이다. 스미쉑은 쿠트나 호라의 귀족으로 건축비용을 기부하여 자신과 가족을 위한 채플을 꾸몄는데 ‘솔로몬을 만나는 시바의 여왕’과 스미쉑 가족을 묘사한 벽화 등이 볼만하다. 1511년 사망한 스미쉑은 현재 그 밑에 묻혀있다고 한다.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파이프오르간

 

서쪽 2층에는 700개의 파이프, 세 개의 건반과 52개의 조절기가 달려있는 찬란한 오르간이 있으며 주위는 금빛 반짝이는 천사들의 조각으로 장식돼있다.

 

그 밑에 흰색 작업복 입고 연장 든 광부의 조각이 외롭게 서있어 색다른 대조를 보인다. 1700년경 제작됐다는 이 광부상은 한 손에 저울, 다른 손에 연장을 들고 있으며 하얀 광부 복 허리 뒤로 가죽 덧치마를 두르고 있다.

 

16세기 쿠트나 호라의 은광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깊은 500m 지하에 있었고 광부들은 하루 10~14시간씩 일주일에 6일을 일했다고 한다.

 

가죽 에이프런은 광산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갈 때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일하는 동안은 보호대로 사용됐다고 한다. 할슈타트 소금광산에서 덧바지입고 미끄럼 타던 생각이 난다. 오래된 옛일 같은데 따져보니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았다.

 

▲성 크리스토퍼 (Christopher)의 거대한 프레스코 화

 

채플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어린 예수를 어깨에 얹고 물을 건너는 성 크리스토퍼 (Christopher)의 거대한 프레스코 화다. 크리스토포로스(Christophoros)란 원래 “그리스도를 어께에 메고 간다”는 뜻의 희랍어라고 한다.

 

사람들을 업고 강을 건네주는 일로 살아가는 크리스토포는 자기보다 힘 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생각을 항상 품고 있던 거인이다. 어느 날 조그만 어린애를 메고 강을 건너는데 물속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무거워져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인데.” 중얼거리니 어린아이가 말했다고 한다.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찾던 왕, 예수 그리스도다.” 소아시아에서 순교했다는 크리스토포는 여행자와 운전자의 구호성인 이라고 하니 말하자면 지금 우리를 보살펴주는 임자를 만난 것이다.

 

그림 속, 믿음직한 크리스토포와 큼직한 발 사이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면서 어느새 든든해지는 마음을 느끼게 된다.

 

▲성당 뒤쪽 벽에는 중세 쿠트나호라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프레스코화

 

‘윈치작업’(Hašplířska)이라는 이름의 채플에는 윈치를 이용하여 광석을 채굴하거나 매매하는 장면을 그린 벽화가 있고 남쪽 ‘주화 제조자’(Mincirska)들의 채플에는 광부와 은화주조자들이 작업대에서 일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이들 작품은 1463년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종교와는 관계없는 광부들의 작업이나 생활 장면이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성당은 매우 드문 일로 은광과 바르바라 성당의 밀접한 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쿠트나호라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