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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제주 자치도**기행

제주도ㅡ추자도ㅡ백서사건의 주역. 황사영과 정난주(丁若鉉 의 딸)부부의 아들 황경한(黃景漢) 묘소.

by 삼수갑산 2021. 10. 2.

추자도(島)

백서사건의 주역 황사영과 정난주 의 아들 황경한 묘소.

▲상추자도 대서리 전경. 하추자도 예초리 갯바위(화살표)와 우측아래 추자공소가 보인다

 

▲등대산에서 바라본 아침햇살을 받은 아름다운 추자공소.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하추자도에는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소가 있다.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1790년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인 정난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이 체포되어 순교한 후 부인은 제주도에 관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젖먹이 아들마저 평생을 죄인의 자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어머니 정난주는 유배 길에 호송선의 뱃사공과 나졸을 매수하여 경한을 하추자도 예초리의 갯바위에 내려놓았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져 그의 아들로 키워졌다.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이 지금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예초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때 그 집안에서 간직해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모두 소실되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를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고,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 공소 신자들이 묘소를 돌보고 있다.

 

▲찾아가는 길

 

▲상추자도 추자공소

 

▲상추자도 추자공소

 

▲상추자도 추자공소

 

▲상추자도 추자공소 내부

 

▲상추자도 추자공소 내부

 

▲상추자도 추자공소 내부

 

▲상추자도 지도

 

▲하추자도 지도

 

추자도는 제주시 북부 해상에 산재한 군도로 이루어진 섬이다. 이 섬은 이웃한 제주도, 보길도와 함께 유배지로 이용되어 왔다. 지금은 2,800여 주민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이곳 하추자도 예초리 산중턱에 누워 있는 묘 하나가 바로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의 묘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은 1775년 유명한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16세 때 진사시에 합격할 만큼 영특하였다. 그러나 1790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후 세속적 명리를 버리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충북 배론에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써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1751~1808, 알렉산델)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체포되고,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처형되었으며,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丁蘭珠, 命連, 1773~1838, 마리아)는 제주 관비로, 그리고 두살 된 아들은 이곳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정난주는 1773년 유명한 남인이요 신자 가문인 나주 정씨 정약현(丁若鉉, 1758~1816)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세 때인 1790년 16세인 황사영과 혼인하고 1800년 아들 경한을 나았다.

 

1801년 두 살의 아들을 가슴에 안고 귀양길에 오른 정난주는 추자도에 이르러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아가야 함을걱정하여 젖내 나는 어린 것을 예초리 바닷가 갯바위에 내려놓고, 사공들에게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말한다.


갯바위에 놓여진 황경한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온 어부 오씨에 의해 키워졌으며, 성장한 뒤에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현재 예초리에는 황경한의 6대 손부와 7대손 황인수씨 내외가 살고 있다. 그리고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결혼하지 아니하는 풍습도 생겨났다.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는 이곳에 묻혀 있다.

 

황경한의 묘소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바다로 돌출한 바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바로 이 갯바위가 두 살 된 황경한이 놓여져 울고 있던 바위다.


또한 《일성록》과 《사학징의》에는 경한이 추자도에 오게 된 것은 ‘나이가 2세 이하로 어려 법에 따라 교수시키지 않고 영광군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시킨다.’는 판결문에 따른 것임을 말한다.


이곳 내려오는 이야기로 황경한이 살던 집은 불타 없어졌고 그 집안에서 간직해 온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이 그때 소실돼 안타깝다고 전해진다. 집터 자리는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찾아가는 길

 

▲모정의 쉼터

 

▲모정의 쉼터

 

▲모정의 쉼터

 

▲모정의 쉼터

 

▲황경한의 눈물

 

▲황경한의 눈물

 

▲황경한의 눈물

 

▲황경한 묘 안내비

 

▲황경한 묘 안내비

 

▲황경한 묘 안내비

 

▲황경한 묘 안내비

 

▲찾아가는 길

 

▲황경한 묘

 

▲황경한 묘

 

▲황경한 묘

 

▲황경한 묘

 

▲황경한 묘

 

▲황경한 묘 안내판

 

▲황경한 묘

 

▲황경한 묘

 

▲황경한 묘

 

▲황경한 묘

 

◆바다로 돌출한 바위


황경한의 묘소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바다로 돌출한 바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바로 이 갯바위가 두 살 된

황경한이 놓여져 울고 있던 바위이다.

 

▲황경한 묘소에서 내려다 본 어린 황경한을 내려 놓았다는 예초리 갯바위(화살표 부분)

 

▲가까이 가서 본 예초리 갯바위

 

제주도로 귀양 가는 정난주 마리아는 이 바위에 젖비린내 나는 어린 것을 내려놓고 쓰라린 가슴을 움켜안은

채로 떠나가야 했던 것이다.

 

정난주 마리아는 1801년 11월 21일(음) 두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물생이 끝> 갯바위에 황경헌을 내려 놓았다.


추자도에 내려오는 전승을 보면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뜯기던 부인이 가 보니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와 저고리 동정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펼쳐 보니, 여기에는 부모 이름과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아기를 그 집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동복(同福) 오씨 입도 3世(동복 오씨 재신공파 13世)인 오상선 이다. 박해가 끝난 뒤 정난주와 아들 경한은 오랫동안 잊혀지게 되었다.그러다가 1909년 제주 본당의 2대 주임 라크루(Lacrouts, 具) 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곧 파리의 샤르즈뵈프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전교 잡지에 소개하였다.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황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줄 수 있었다.

 

추자도의옛 집에는 7대손 황인수(黃寅壽) 씨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황경한이 성장한 오씨네 집은 1965년 가을,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는데이때 황경한의 출생 연도와 이름 등이 적혀 있던 배냇 저고리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황경한의 무덤은 예초리 산 13번지 속칭 ‘술박낭끝’에 있는데, 제주교구에서는 1999년 3월 9일 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무덤 주변의 임야 600여 평을 매입하여 공원 묘역 조성 사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