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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제주 자치도**기행

제주도ㅡ관덕정(觀德亭.보물 제322호)ㅡ옛 제주 목사 관아 관덕정

by 삼수갑산 2021. 9. 19.

보물 제322호ㅡ옛 제주 목사 관아 관덕정(觀德亭)

▲제주목 관아 관덕정,

 

문화재청은 제주 관덕정(觀德亭 보물 제322호) 보수공사를 27억원의 예산을 들여 2003년 12월에 착공한지 44개월 만에 모두 마치고, 2006.8월18일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관덕정은 조선 세종 30년(1448)에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훈련청 용도로 건립되었다. 정면 5간에 측면 4간 규모로 팔작지붕을 한 단층 목조 건물로서, 비바람이 세차게 들이치는 제주도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처마 길이를 매우 길게 내밀도록 만들어졌다.

 

조선 세종 30년(1448)에 안무사 신숙청이 처음 건립한 이후, 고종 19년(1882) 방어사 박선양이 여덟 번째로 수리하기까지, 이 건물은 군사 훈련 장소로서 제주도의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1924년 일본인이 수리를 맡아 지붕 처마가 2자나 잘려나가는 비극을 맞았고,이후 1969년에 열 번째 수리를 지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크게 퇴락되어, 이번 공사에서는 지붕 처마를 복구하여 제주도의 지역적 특성에 맞게 원래 모습을 되찾도록 하였다.

 

관덕정 보수공사는 관계 전문가의 고증과 자문 아래 최고의 장인들의 성심 어린 노력으로 시행되었으며, 모든 시공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해체실측조사보고서도 ‘07년도에 발간 되었다.

 

▲찾아가는 길

 

▲제주목 관아 관덕정,

 

▲제주목 관아 관덕정, 안내판

 

▲제주목 관아 관덕정, 안내판

 

▲옛 제주 관덕정의 모습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의 하나로 옛 제주시의 중심부인 삼도2동에 있으며 보물 제322호로 등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관덕정은 조선시대 건물로서 세종 30년 안무사(按無使) 신숙청이 병사의 훈련과 무예수련장으로 사용키 위하여 창건하였다.

 

창건한 후에 이 곳의 용도를 보면 연무를 지휘하고 사열하는 곳이었을뿐만 아니라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 때로는 죄인을 다스리는 형장으로 쓰여졌다.

 

관덕이란 이름은 '사자소이 관성덕야(射者所以 觀盛德也)'라 하여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이며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탐라지>에 의하면 세종 30년인 1448년에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 되었으며 이후 여러차례 개건과 중수를 거쳤다. 현재의 건물은 그 수법으로보아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관덕정 건물이 앉아 있는 방향은 동쪽이며, 전면 5칸, 측면4칸으로 단층 8작 겹처마집이다. 또한 이익공(二翼工)의 집으로서 처마가 길었던 것이 특징이며 사방은 개방한 정자양식이다.

 

가장 지형이 빼어난 곳이라는 뜻의 탐라형승(眈羅形勝)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李瑢)의 글씨이다. 또한 관덕정의 진수는 7폭의 벽화에 있다.

 

두보의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십장생도(十長生圖), 상산사호(商山四浩) ,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진중서성탄금도(陳中西城單琴圖), 홍문연(鴻門宴)등이다. 관덕정은 보물 제32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관덕정 바로 옆에는 사적 제380호인 '제주목관아지'가 있다

 

▲1962년도 관덕정, 처마가 훼손되어 있다.

 

▲제주목 관아 관덕정비(보물 제322호)

 

▲제주목 관아 관덕정

 

1901년 신축교안 때에 이곳 광장에서 수많은 교우 및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 땅에 복음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18C이후 100여년에 걸쳐 진행된 혹독한 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들의 피와 땀은 이 땅 구석구석에 뿌려져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박해 정책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유학적 전통이나 인습에 젖어 있었던 당시 조선 땅에서는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아침에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지방에서는 소규모 사건들이 지방 관리나 유림들에 의해 빈발하였고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지방 관리와 교인들 사이의 분쟁이나, 교인들과 민간인 사이의 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충청도아산, 전라도의 지도(智島), 황해도의 장연(장연), 강원도의 이천(이천) 등지에서는 계속적인 교난 사건이 발생했다.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 혹은 무당 등의 인습에 젖은 지방민과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의 신축교난이다. 이것이 바로 '이제수의 난'이라고 불리는'신축교난'이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 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조세정책, 즉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봉세관)이 온갖 잡세를 거두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해 버리고 난민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과 결탁하여 비리를 행한 사례도 원인의 하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를 타도하려는 일본인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 세력, 그리고 생존을 위협받게 된 무당 등의 작용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리하여 제주시에 진입한 민군들은 신자를 포함한 양민 등 700여명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 유서 깊은 관덕정 정자 앞 광장이 사형장으로 변했던 것이다.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촬영한 사진에는 교우들을 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시신 옆에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관덕정 광장에 널려 있던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사시에 옮겨져 버려지듯 가매장 된 상태로 있었다.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갔고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에 있었다.1903년, 조정으로부터 이 시신들을 매장할 자리로 황사평을 이양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제주목 관아 관덕정 

 

▲제주목 관아 관덕정

 

▲제주목 관아 관덕정

 

▲제주목 관아 관덕정

 

탐라형승(眈羅形勝) 현판 글씨는 세종의 세째아들 안평대군 이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목 관아의 기간지주

 

▲제주목 관아의 정문인 외대문

 

▲제주목 관아의 정문인 외대문

 

▲제주목 관아의 정문인 외대문

 

▲제주목 관아의 정문인 외대문

 

▲제주목 관아 우련당(友蓮堂)과 연못  

 

▲제주목 관아 우련당(友蓮堂)과 연못

 

▲제주목 관아 우련당(友蓮堂)과 연못

 

▲제주목 관아 우련당  

 

▲제주목 관아 우련당

 

▲제주목 관아의 중대문(中大門) 

 

▲제주목 관아의 중대문(中大門)  

 

▲제주목 관아의 중대문(中大門)  

 

▲제주목 관아의 중대문(中大門)  

 

▲제주목 관아의 홍화각(弘化閣)

 

▲제주목 관아의 홍화각(弘化閣)

 

▲제주목 관아 영주협당(瀛洲協堂)

 

▲제주목 관아 영주협당(瀛洲協堂)

 

▲제주목 관아 영주협당(瀛洲協堂)

 

▲제주목 관아 영주협당(瀛洲協堂)

 

▲제주목 관아 영주협당(瀛洲協堂)

 

▲제주목 관아의 연희각(延曦閣)

 

▲제주목 관아의 연희각(延曦閣)

 

▲제주목 관아의 연희각(延曦閣)

 

▲제주목 관아의 연희각(延曦閣)

 

▲제주목 관아 귤림당(橘林堂) 

 

▲제주목 관아 귤림당(橘林堂)

 

▲제주목 관아 귤림당(橘林堂)

 

▲제주목 관아의 여러 비석, 관리들의 업적을 기리는 불망비

 

▲제주목 관아의 여러 비석, 관리들의 업적을 기리는 불망비

 

▲제주목 관아의 형틀

 

▲제주목 관아의 형틀

 

▲제주목 관아의 망경루(望京樓)

 

▲제주목 관아의 망경루(望京樓)

 

▲제주목 관아의 망경루(望京樓)

 

▲제주목 관아의 망경루(望京樓)

 

▲제주목 관아의 망경루(望京樓)

 

▲제주목 관아의 망경루(望京樓)

 

▲제주목 관아의 망경루(望京樓)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천주교도의 행패에 맞서 이재수와 오대현이 이끈 민란으로 300여 명이 숨진 사건이다.

 

1858년 제주도에 가톨릭이 전래되기 시작하였고, 99년 프랑스의 페이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파견되면서 본격적인 전교가 이루어졌다. 그 뒤 1900년 라쿨, 무세 신부가 들어오면서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때 강봉헌이 제주도 봉세관으로 부임하면서 온갖 잡세를 부당하게 징수하였고, 이러한 일에 가톨릭교도들을 채용하였다. 또한 교회가 부지를 매입하면서 신목(神木), 신당(神堂)을 없애는 등 제주도민의 문화를 무시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도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다.

이에 대정군수(大靜郡守) 채구석과 유림(儒林) 오대현은 '상무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봉세관과 교회에 대항하였다. 관노 이재수 등과 도민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입수한 무기로 무장하여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라쿨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함대에 도움을 청하여 6월 1일 제주에 도착했으나 이미 제주성은 함락되었고 가톨릭교도 300여 명이 처형당한 뒤였다.

 

그 후 정부에서 파견한 강화진위대에 의해 진압, 채구석을 제외한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 등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나머지 주동자들은 징역에 처해졌다.이 민란은 피살된 교인들의 매장지 문제, 프랑스인 재산의 손해 배상 문제 등으로 3년 뒤에야 수습되었다.

이재수는 관노(官奴) 또는 마부였다고 한다. 1901년 대정군 (남제주군 대정읍) 인성리에서 주민과 천주교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주민 대표로 자진 참가하여 봉세관의 토색(討索)과 천주교도의 행패를 성토하고 고발하였다.

 

같은 해 5월 주민과 천주교도의 충돌로 민란이 일어나자 민군(民軍)의 주장(主將)이 되어 민란을 지휘하였다. 이재수는 정부군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교수형이 확정되어 처형당했다.'이재수의 난'은 1999년 박광수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펌.naver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