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의 고장 전남 무안, 백련지
가을이 내려앉은 호수… 부처님의 노란 미소가 번져가네.
▲전남 무안 회산백련지의 가을. 푸른하늘과 노랗게 물들어가는 연잎이 대조를 이룬다.
가을 연잎은 덖어서 연잎차를 만든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 아래 청초하게 피어나던 연꽃도 시들었다. 한여름
소나기도, 새벽이슬도 또르르 굴려 떨어뜨리던 둥근 연잎.
언제까지 초록색일 듯했던 연잎의 가장자리가 노랗게 물들었다.
그 대신 씨알이 총총히 박힌 연밥이 푸른 하늘에 흔들거린다.
▲초의선사 탄생지 비석 앞에 핀 꽃무릇
전남 무안군 일로읍 회산마을의 회산백련지는 ‘동양 최대의 백련(白蓮) 자생지’로 2001년 기네스북에 등재된 곳. 물의 요정인 백련과 가시연, 빅토리아연꽃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면적만도 무려 33만 m²(약 10만 평). 한여름 연꽃 축제의 부산함을 피해 호젓한 가을을 만끽하기에 좋은 요즘이다. 약 4km에 이르는 호수 주변 나무 덱 길에는 푸른 하늘과 노랗게 물들어가는 연잎, 붉은 꽃무릇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한 마리 새 물 속에 들어가 푸른 비단물결을 가르니
온 연못을 뒤덮은 연꽃이 살며시 움직이네.
참선하는 마음이 원래 청정함을 알려면
가을 연꽃(秋蓮)이 찬 물결에 솟는 걸 보려무나.
고려시대 시인이자 문장가 이규보(1168∼1241)는 ‘하지(荷池·연꽃이 핀 못)’라는 시에서 푸른 가을하늘에 더욱 맑고 청정해지는 ‘추련(秋蓮)’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단풍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연잎이 고개를 숙이는 풍경은 가을의 감성을 자극한다.
회산백련지 문화관광해설사 한연희 씨는 “연잎밥은 초여름에 딴 연잎으로 짓고, 연잎차는 깊어가는 가을에 더욱 향이 짙어지는 연잎을 따서 덖어 만든다”며 “백련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 찾아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했다.
회산백련지는 일제강점기 주변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땅을 파 만들었던 저수지였으나 인근 주민이 저수지 한쪽에
백련 12주를 심은 것이 번져 오늘에 이르렀다. 백련지를 가득 채웠던 연잎은 곧 겨울이 오면 사라질 터.
연잎이 다 사그라들면 호수에는 하얀 털과 긴 목이 아름다운 큰고니와 철새들이 날아온다. 미꾸라지, 다슬기, 잉어,
쏘가리 등 먹이가 풍부한 백련지에는 지난해만도 큰고니 150여 마리가 월동을 했다.
▲백련지 온실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백련카페.
백련지를 걷다 보면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이 연꽃 모양의 유리 온실이다. 온실 안에는 전망 좋은 ‘백련 카페’도 있다.2층에서 보면 유리창을 통해 360도 연꽃 조망이 가능하다.
온실 내에는 야자나무, 선인장, 하와이에서 가로수로 쓰이는부겐빌레아 등 열대 식물들이 가득하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커다란 열대식물 그늘 아래에서 10만 평 백련지 뷰를 바라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기분은 남다르다.
전남도 정원페스티벌에 출품된 ‘만월정’ 작품.무안에서 색다른 가을풍경을 맛볼 수 있는 곳은 남악신도시 전남도청 부근 광장도 있다. ‘제1회 전남도 정원페스티벌’에 출품된 총 43개의 작가와 주민, 상인들이 참여해서 만든 미니정원이 눈길을 끈다.
꽃과 나무와 함께 설치한 벤치, 돌 등 오브제에는 은은한 조명까지 어우러져 밤에 야경사진 명소로 떠올랐다. 출품작 심사위원을 맡았던 국립수목원 배준규 정원연구센터장은 “숲과 정원의 미래는 생활 속 정원”이라며“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만든 작품의 수준이 매우 높아 놀랐다”고 말했다.
▲무안전통생활문화테마파크에 재현된 각설이 품바 타령.
“일자 한자나 들고나 보∼니, 일월이 송송 하 송송∼ 밤중 샛별이 완연하다.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어허 품바가 들어간다!”
무안군 일로읍에 있는 천사마을은 ‘품바’의 고향이다. 품바타령은 일제강점기부터 자유당 말기까지 전국을 떠돌며 살아간 각설이패 대장 천장근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각설이들의 품바 타령은 부패한 권력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풍자와 해학의 한마당이었지만,
1980년대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도 어쩌지 못했던 인기극이었다. ‘품바’를 1인극으로 각색 연출한 사람은 무안 일로읍 출신의 김시라(1945∼2001). 그가 1976년 창단한 인의예술회 소속의 정규수(1대 품바)를 앞세워 1981년 일로읍 공회당에서 첫 공연을 가진 것이 시초다.
이후 서울 대학로 소극장에서 매진 행렬이 이어지는 등 전국에서 5000회 이상 공연되며 한국 연극사에 획을 그었다. 지금도 일로읍 전통시장 장날에서는 가끔 품바 공연이 펼쳐진다.무안읍의 폐교에 만든 ‘무안전통생활문화테마파크’에 가면 옛 무안 일로읍 장터의 모습이 복원돼 있다. 여기저기 기워진 옷을 입고 벙거지 모자를 쓴 채 품바타령을 하는 각설이들의 어깨춤이 흥겹다.
골목길에서는 ‘달고나’ 뽑기를 하고, 구슬치기를 하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재현돼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목숨을 걸고 하던 아이들 놀이의 원형을 볼 수 있는 추억의 장소다.일로읍을 거쳐 백련지로 가다 보면 길가에 김시라의 생가가 있다. 그는 2001년 ‘품바’ 2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다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생가 입구에는 그의 시 제목인 ‘오! 자네 왔능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가 1966년에 쓴 이 시를 읽어보면 넉넉하고 구수한 목소리로 사람을 반기던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오∼! 자네왔능가?/이 무정(無情)한 사람아./그래/청풍(淸風)에 날려 왔나/현학(玄鶴)을 타고 왔나
/자넨 묵(墨)이나 갈게/난 자우차(滋雨茶)나 끓임세.”
무안은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알려진 초의(艸衣)선사(1786∼1866)의 고향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선승인 초의선사는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 당대의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한국의 다도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무안군 삼향읍의 초의선사 탄생지에는 차 문화관, 차 역사관, 다정(茶亭) 등이 있어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지순례하듯 이곳을 찾는다.
무안의 도로를 달리다 보니 차창 밖으로 붉은빛을 띤 누르스름한 황톳길이 이어진다. 무안군은 해안선을 중심으로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황토로 이뤄져 있다. 황토는 칼륨, 철, 마그네슘, 게르마늄 등이 풍부한 비옥한 흙. 무안 황토 양파는 전국 양파 생산량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 대한민국 1위의 명성을 지키고 있다. 황토밭에서 자란 고구마, 무안의 황토 갯벌에서 자란 뻘낙지도 유명하다.
▲무안황토갯벌랜드 갯벌생태공원
무안황토갯벌랜드에는 무안의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갯벌전문과학관과 갯벌생태체험공원원, 황토찜질방이 있다.
전국 캠핑족들에게 인기 최고의 숙소이기도 하다. 야영장과 카라반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탁 트인 드넓은
갯벌 풍광 위로 해가 떠오른다.
인근의 도리포는 충남 서천의 마량포구와 마찬가지로 일출과 일몰을 같은 장소에서 즐길 수 있는 항구다.
칠산 앞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해가 뜨고 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무안 낙지골목의 ‘낙지탕탕이’.
무안읍 무안군청 인근의 ‘낙지골목’에서는 낙지탕탕이, 낙지호롱, 기절낙지, 연포탕과 같은 다양한 낙지요리가
입맛을 사로잡는다.
요즘엔 가을 전어도 빼놓을 수 없는 메뉴. 낙지와 전어도 맛있지만 곁들여 나오는 무안 양파의 살살 녹는 향긋한
맛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장터털보식당
일로읍 전통장터에 있는 ‘장터털보식당’은 백반 맛집이다.
1인분(8000원)에 각종 나물과 젓갈, 고등어조림, 매운탕까지 20개의 반찬이 나온다.
출처 / 동아일보 / 전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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