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기점소악도ㅡ열두집 선, 순례자 섬… 예술과 ‘썸’
▲기점소악도의 ‘순례자의 길’에서 만난 ‘기쁨의 집’.
이곳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신안 갯벌의 참모습을 즐길 수 있다.
‘천사(1004)의 섬’이라 불리는 신안군 별명과 썩 어울리는 섬이 있다. 최근 ‘순례자의 길’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전남 신안군 증도면 기점소악도다. 이름도 낯선 5개 작은 섬(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딴섬 병풍도)이 썰물 때만 노둣길로 이어져 한 몸처럼 변신하는 곳이기도 하다.
노둣길은 서해 갯벌 지대에서 나타나는 ‘모세의 기적’ 체험 현장이다. 이곳 섬 사람들은 썰물 때 이 섬 저 섬으로 건너다니기 위해 갯벌에다 징검다리를 놓듯 바윗돌로 노둣길을 만들어 놓았다.
하루 두 차례 서너 시간 노둣길로 이어졌던 섬들은 밀물 때가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서로 갈라선다.이 노둣길을 따라 순례자의 길이 설치돼 있다. 한겨울에 걸어도 춥지 않은 데다 대부분 평지여서 걷기 좋은 순례길이다.
2021년 행정안전부가 선정한 ‘국내 찾아가고 싶은 33섬’ 중 ‘걷기 좋은 섬’으로도 뽑히기도 했다. 전국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힘들어하는데도 이 섬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게 권성옥 전남문화관광해설사의 말이다.
순례길은 신안군 압해도 송공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을 타고 대기점도 선착장에서 내리면서부터 시작된다. 선착장에는 그리스 산토리니풍의 둥글고 푸른 지붕에 흰 회벽이 인상적인 ‘건강의 집’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밤에는 등대 역할을 하고, 대합실이 없는 대기점도의 휴게소 역할도 하는 이 집에는 순례길의 출발을 알리는 작은 종이 설치돼 있다. 순례자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몸을 낮춰 이 종을 치면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순례하기를 빈다.
여기서부터 총 12km 거리의 순례길 곳곳마다 12개의 작은 집이 설치돼 있다. 1km 안팎으로 떨어진 집들은 우리나라와 프랑스, 스페인의 건축·미술가 10여 명이 그리스도 12제자를 모티브로 삼아 건축한 작품들이다. 그래서 이 순례길은 ‘12사도 순례길’ 혹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섬티아고 순례길’ 등의 별칭도 갖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예배당이 되고, 불자에게는 조그만 암자가, 가톨릭교인들에게는 자신만의 작은 공소가 된다. 종교가 없는 이들에겐 잠시 쉬면서 명상과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작은 성소(聖所)인 것이다. 각 성소는 저마다 자연 환경에 맞는 독특한 건축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 성소’를 찾아다니는 재미도 있다.
▲기점소악도 ‘순례자의 길’을 시작하는 장소인 ‘건강의 집’.
대기점도에는 모두 5개의 성소가 있다. 선착장의 제1성소(건강의 집)에서 대기점도 해안 길을 따라가면 병풍도로 이어지는 노둣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초입에 제2성소(생각하는 집)가 자리 잡고 있다.
해(밀물 상징), 달(썰물 상징) 등 별을 의미하는 구조물이 인상적인 이 성소는 특히 푸른 눈의 고양이 석상(石像)이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지붕 첨탑 위의 두 마리 고양이 조형물도 저 멀리 해변을 감시하고 있는 듯하다. 오래전 대기점도 사람들의 쉼터였던 이곳 성소가 고양이를 상징물로 채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대기점도에는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많이 살고 있다고 할 정도로 고양이 천국이다. 30여 년 전 마을이 들쥐로 인해 막대한 농사 피해를 입게 되자 쥐를 퇴치하기 위해 고양이를 섬으로 들여와 키우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됐다고 한다.이곳에서는 고양이를 해치는 개들은 퇴출시킨다는 내부 규칙도 있다고 한다. 밤에 이동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나는 길고양이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숲속 오두막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의 집’.
붉은 기와에 통나무 처마로 한국의 전통미를 부각시킨 작품이다.
숲속 작은 오두막집을 연상시키는 제3성소(그리움의 집)는 우리나라 전통미를 강하게 풍긴다.붉은 기와와 통나무로 된 처마에다 실내는 신라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에서 영감을 얻은 부조가 설치돼 있다
.
제4성소(생명평화의 집)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원통형의 구조물이 인상적이고 제5성소(행복의 집)는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물고기 비늘 문양으로 잘라 겹겹이 얹은 첨탑형 지붕이 독특하다.
장미셀, 파코 슈발 등 프랑스 출신 작가들이 툴루즈 지방의 건축 전통을 따라 지은 성소라고 한다. 특히 제5성소에서는 계절과 시간, 물때에 따라 변화하는 바다와 노둣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 지역의 전통 건축을 따라 지은 ‘행복의 집’.
대기점도의 제5성소에서 노둣길을 건너면 바로 소기점도로 이어진다. 그런데 섬과 섬을 연결하는 노둣길이 밀물이면 잠기기 때문에 미리 국립해양조사원의 조석 예보를 확인해 시간을 잘 맞춰야 건너갈 수 있다.
소기점도엔 제6성소(감사의 집)와 제7성소(인연의 집)가 있다. 집 전체가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된 제7성소는 유일하게 접근이 불가능하다. 호수 중앙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호수 각 위치와 햇빛에 따라 작품의 색이 달라 보여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소기점도를 지나 소악도로 넘어가는 노둣길 중간에는 제8성소(기쁨의 집)가 설치돼 있다. 밀물 때는 당연히 바다 위에 떠 있는 집이 된다.이슬람 사원을 연상시키는 금빛 돔 지붕이 인상적인 이곳은 놀랍게도 지기(地氣) 또한 배어 있다.
▲썰물 때 모습을 드러낸 기점소악도의 갯벌.
예전에는 이 갯벌에 바윗돌을 놓아 만든 노둣길로 섬과 섬 사이를 건너다녔다.
이곳에서는 신안 갯벌의 생생한 모습도 감상할 수 있다. 올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신안갯벌은 면적이 약 1100km²에 달해 국내 최대를 자랑한다. 신안갯벌은 육지의 강에서 모인 퇴적물이 조류에 밀려 1004개 섬 주변에서 형성됐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형성되고 있는 ‘살아 있는’ 갯벌이다. 반면 다른 나라의 갯벌들은 대개 바다에 쌓여 있던 퇴적물이 조류에 의해 육지로 밀리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갯벌에서는 굴, 조개, 망둑어, 칠게, 농게, 짱뚱어, 갯고둥, 낙지 등이 잡히고 있다. 간석지엔 대나무나 참나무 가지가 우뚝우뚝 서 있다. 이 가지에 김이 달라붙어 자라게 하는 양식이다.
이 방법은 김을 날마다 일정 기간 동안만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조절하기 때문에 다른 양식으로 기른 김보다 비타민A, B, B2가 많이 함유돼 있고 단백질, 식이섬유, 무기질 등 영양소가 풍부하다고 한다.
▲파리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사랑의 집’.
아무튼 노둣길의 제8성소를 지나 소악도(연륙화한 진섬 포함)로 진입하면 제9성소(소원의 집), 제10성소(칭찬의 집), 제11성소(사랑의 집)가 기다리고 있다.
‘어부의 기도소’로 고안된 제9성소에는 안방처럼 편히 누울 수 있는 나무 마루가 깔려 있어 한잠 늘어지게 자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삼각형의 뾰족지붕이 돋보이는 제10성소, 파리 개선문을 빼닮은 제11성소를 참배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은 제12성소(지혜의 집)가 노둣길 건너 딴섬에서 기다리고 있다.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를 상징하는 이 집은 꼭 유배의 섬 같은 분위기가 난다.
▲퍼플섬 병풍도를 상징하는 맨드라미 꽃동산.
성소 순례를 마치면 기운을 북돋워주는 병풍도로 가볼 일이다.‘불타는 사랑’ ‘시들지 않는 열정’이라는 꽃말을 가진 맨드라미꽃으로 유명한 섬이다.기점소악도에서 가장 긴 노둣길을 따라 병풍도로 들어서면 마을 첫 관문인 보기 선착장에서 맨드라미 꽃동산까지 4km 구간에 맨드라미꽃 정원이 조성돼 있다.
이 섬의 상징색 또한 핑크빛이다. 그래서 마을 지붕도 모두 빨간색을 하고 있다. 가을 절정기를 맞아 12만 m²에 40여 품종 200만 송이의 맨드라미가 화려하게 피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닭 볏 모양부터 촛불 모양, 여우 꼬리 모양 등 다양한 형태와 여러 색깔의 맨드라미를 볼 수 있다. 아담한 섬마을 가옥의 붉은 지붕들과 바다 위에 핀 맨드라미 꽃동산을 감상하면서 꽃말처럼 우리 모두의 사랑과 평화를 기원해본다.
출처 / 동아일보 / 글·사진 신안=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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