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음도(乶音島)ㅡ800년 이별 견딘 老木...실향민의 섬 위로하다
▲강화도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한다
서해 북단 북한과의 접경지역에 근접한 오지의 섬 강화 볼음도와 주문도 섬 트래킹에 나선다
▲외포리-볼음도까지 탑승권(요금 7,200원/1인)을 구입한다
▲외포리항에서 건너편으로 작은 섬 대섬 뒤로 석모도 섬이 조망된다
▲인천항 주변 도서지역 운항 여객선 항로도
▲삼보해운 여객선에 오른다
▲이제볼음도 선착장이 보인다
▲배가 볼음도 선착장으로 접안하러 진입한다
▲볼음도 선착장에서 내리자 내리쬐는 햇살은 뜨겁다
▲이제 볼음도 트래킹을 시작한다
▲서해 바닷물이 빠져 나가자 갯벌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방파림이 조성되어 있는 바닷가를 따라 간다
▲조개골해수욕장으로 들어간다
▲해수욕장 기암
▲조개잡이 경운기들은 물빠진 바다 멀리 들어간다
▲볼음도 트래킹 개념도
▲강화도에 딸린 작은 섬인 볼음도의 북쪽 해안가에서 자라는 수령 800년이 넘는 은행나무 노거수. 수많은 가지를 꽃다발처럼 펼친 채 당당하게 서 있다. 이 나무는 북한의 황해남도 연안군 호남리에서 동갑내기 은행나무와 나란히 자라다가 고려 중엽에 홍수로 바다로 떠내려온 것을 볼음도 주민이 건져내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남아있는 은행나무가 암나무고, 여기 볼음도의 은행나무는 수나무다. 은행나무 부부가 800여 년 전에 남과 북으로 헤어져 자라고 있는 셈이다.
강화도 이곳저곳에 새겨져 있는 건 파란만장한 역사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은 단군 시대부터 한강 패권 장악의 교두보가 됐던 삼국시대, 수도를 옮겨와 항몽투쟁을 벌였던 고려, 그리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친 조선에 이르기까지 강화도는 줄곧 굵직한 사건의 무대였다.
지금도 북한과 접경을 이룬 군사 요충지다. 이러니 강화도에는 역사 유적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늘 오래된 역사 이야기만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 이번에는 강화에서 비교적 가까운 근대의 공간을 찾아가 봤다. 강화의 방직공장과 강화 평화전망대를 들러서 볼음도와 교동도에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분단과 평화. 그리고 추억이다.
# 볼음도 은행나무 800년 이별의 내력
강화도 본섬에 앞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부속 섬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강화군에 ‘볼음도’란 섬이 있다. 강화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로 1시간 30분 남짓. 강화도의 부속 섬인 볼음도는 강화도는 물론이고 석모도보다도 작지만, 그래도 여의도 면적의 두 배쯤은 되는 섬이다.
‘볼음’이란 섬 이름을 연음하면 ‘보름’이 된다. 조선 인조 때 임경업 장군이 사신의 소임을 맡아 명나라로 출국하던 중에 풍랑을 만나 이 섬에서 ‘보름 동안 머물다가 보름달을 보았다’는 데서 섬 이름이 유래한단다. 보름도는 저어새가 번식하고 도요새, 노랑지빠귀, 노랑부리백로 등이 서식한다는 영뜰 해변의 낙조도 이름났지만, 굳이 외포리에서 하루 두 번 뜨는 배를 타고 여기까지 가보길 권하는 건 오로지 볼음도 해안가에서 자라는 한 그루 은행나무 때문이다.
볼음도 북단 끝의 안머리골에 은행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800살의 노거수다. 키는 24.5m에 달하고 몸 둘레도 9.8m나 되는 거목이다. 나무는 당당하다. 나무를 다치게 하거나 부러진 가지를 태우기라도 하면 목신(木神)이 진노해 재앙을 입는다는 전설이 전해질 만큼 나무에서는 신령한 기운이 느껴진다.
사실 이 정도 수령에 이만한 크기의 은행나무가 꼭 볼음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 크고 더 오래된 은행나무도 전국 곳곳에 있다. 그럼에도 볼음도 은행나무가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전해오는 특별한 이야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구분되는데, 수나무인 볼음도 은행나무는 고려 중엽쯤 북한 황해남도 연안군 호남리에서 동갑내기 암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연안평야를 휩쓴 홍수에 수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로 떠내려갔고, 볼음도의 어부가 이 나무를 건져다 심은 것이 지금의 볼음도 은행나무란다.
외진 섬 볼음도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자라는 수 은행나무 한 그루가, 직선거리로 8㎞쯤 떨어진 북한 황해도 연안 땅에서 자라는 암 은행나무와 나란히 자라던 부부 사이라는 얘기다. 자그마치 은행나무의 전 생애에 가까운 ‘800년의 이별’이야기다.
볼음도의 은행나무는 우리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됐고, 북한의 연안군 은행나무도 북한의 천연기념물 목록에 올라있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정월이면 남과 북의 암수 은행나무 앞에서 남과 북의 마을 주민들은 풍어제를 지내면서 서로 날짜를 맞춰 나무의 생일을 지내줬다.
그렇게라도 헤어진 은행나무 부부를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생일 행사는 중단됐다. 주민들은 볼음도의 수나무가 한때 가지가 말라붙었던 것도, 연안의 암나무가 합동 풍어제 중단 후 시름시름 앓았던 것도 ‘서로의 안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볼음도의 수나무는 근처에 저수지를 지어 해수유입을 차단하면서 다행히 생기를 되찾았지만, 연안의 암나무는 아직도 수세가 약하고 열매도 많이 달리지 않는단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 강화군, 섬연구소의 주최로 지난해 칠석날인 8월 17일 볼음도에서 은행나무제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은행나무 부부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제례의 복원행사였다. 문화재청은 북한땅의 은행나무 앞에서도 같은 날 제를 지내서 부부 나무의 이산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강화에서 요즘 가장 ‘뜨는’ 명소인 조양방직공장. 옛 방직공장을 카페로 개조한 곳인데 웬만한 운동장만큼 넓은 공장 내부에다 낡은 경운기며 옛 영사기, 트랙터 등을 두서없이 진열해 놓았다. 주말이면 이 넓은 카페가 손님들로 가득 차 대기 줄까지 늘어선다. 커피 한 잔에 7000원을 받는 데도 말이다.
# 실향의 추억으로 가득하다…교동도
두 번째로 얘기할 강화도의 부속 섬은 교동도다. 강화만에 떠 있는 섬 교동도는 2014년 연륙교인 교동대교 개통으로 ‘섬 아닌 섬’이 됐다. 낙가산과 보문사 등의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석모도에 석모대교가 놓인 것이 작년의 일. 그러니 교동도는 이웃한 석모도보다 3년이나 앞서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셈이다.
‘석모도보다 교동도에 먼저 연륙교가 놓인 게 뜻밖이다’라고 했더니 교동도 주민이 펄쩍 뛴다. 고려와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간척이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면서 교동도는 웬만한 육지의 평야보다 더 넓은 전답이 있다고 했다. 그만큼 위세가 당당했던 섬이었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교동도의 논 면적만 여의도의 열 배에 육박한다. 지금 교동도 주민의 수는 3000명을 겨우 채우는 정도지만, 해방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1965년에는 1만2000여 명까지 인구가 늘었다.
교동도에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몰려든 건, 교동도가 해방 이전에 남쪽의 인천과 북녘땅인 해주 사이를 4개의 정기 연락선이 왕래하던 자유지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내륙의 도로가 발달하지 못해 연락선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편한 교통수단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북한 실향민들은 북으로 가는 해상 교통의 요지인 이곳 교동도에 뿌리를 내렸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얼른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섬에 정착한 실향민들이 물건을 사고팔면서 교동도에는 고향의 연백시장을 본뜬 대룡시장이 형성됐다. 500m가 채 안 되는 시장골목 양쪽으로는 슬레이트 건물이 늘어서 있다. 시장은 1960~1970년대의 시장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낡은 이발소가 있고, 달걀을 띄운 쌍화차를 내는 찻집도 있으며, 오래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약방도 있다. 대룡시장이 이른바 ‘빈티지 여행지’로 이름이 나면서 관광객들을 겨냥한 달고나 가게나 꽈배기 가게도 생겨났다.
대룡시장은 마치 세트장처럼 보이지만, 흉내나 모사로 만든 공간이 아니라 실제 주민들이 생활하고 물건을 거래하는 시장이어서 더 정감이 넘친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상점도 있긴 하지만, 주민들만 보고 장사하는 가겟집이 아직 더 많다. 교동도를 찾은 관광객들은 대룡시장만 보고 서둘러 돌아가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시장 말고도 교동도에는 제법 볼 것이 많다.
교동도는 예로부터 왕족의 유배지였다. 고려 희종을 비롯해 조선의 안평대군과 임해군, 능창대군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도 이곳으로 유배 와서 생을 마감했다. 교동도에 남아있는 연산군 유배지에는 압송 수레를 탄 연산군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1933년에 지어졌다는 옛 도동교회는 한옥 형태의 건물이 단아하다.
섬의 남쪽 끝의 남산 포는 고려 때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드나들던 곳인데, 교동도에서는 철책이 없는 서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교동도에는 조선 시대 한증막의 자취도 남아있다. 돌을 원형의 돔 형태로 쌓아 만든 한증 굴과 박석을 쌓아 만든 기단, 물을 받아두던 곳으로 보이는 석물 등이 남아있는 곳이다. 장작불을 지펴 한증 굴의 돌집을 덥힌 다음 적당히 식었을 때, 솔가지에 물을 뿌려서 그 수증기로 한증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강화도에서 요즘 뜨는 ‘핫’한 명소…조양방직공장
▲ 사진 위부터 1970년대쯤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 교동도의 대룡 시장골목에 세워진 조형물, 올해로 개교 113년 된 교동도의 교동초등학교 교문 옆에 그려진 1회 졸업생 그림. 인천관광공사가 강화읍 평화직물 공장 자리에다 세운 ‘소창체험관’에 들여놓은 기계식 직조기. ‘소창’이란 주로 기저귀로 쓰이던 천인데 강화의 직물공장에서 주로 생산했다.
강화도에서 최근까지 ‘거의 완벽하게’ 잊어진 것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1970년대까지 강화 섬 전체를 먹여 살렸던 ‘직물산업’ 얘기다. 다리를 건너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강화도의 인구는 지금 6만2000명 안팎. 뜻밖에도 연륙교가 놓이기 전이던 일제강점기에 강화도의 인구는 더 많았다. 1934년에 강화도의 인구는 지금보다 1만3000여 명이 많은 7만5000명이었다.
배편이 아니면 드나들 수 없었던 섬에 왜 이리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던 것일까. 1934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있다. “이곳(강화도)에는 걸식군(乞食群)이 없고 각기 다 의식주에 그리 군색함 없이 살아가는 조선에서는 듣기 어려운 딴 세상이다.”
그 이유로 기자는 ‘직물산업의 번성’을 들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강화도에 기계 직조기가 도입되면서 섬유산업이 붐을 이뤘다. 당시 강화도 가구 수의 4분의 1이 직물을 생산했다. 섬 전체가 직조로 벌어들인 수입이 해산물 수확으로 벌어들인 돈의 3배가 훨씬 넘었다. 직물산업의 주도권이 대구로 넘어가기 전인 1970년대 중반까지 강화도에는 자그마치 60여 개의 크고 작은 직물공장이 있었다.
강화의 아낙네들은 직물을 짜는 것뿐만 아니라 파는 일도 했다. 강화의 아낙네들은 여름과 겨울이면 손수 짠 직물을 들고 섬을 나가 전국으로 행상을 다녔다. 이렇게 행상을 나가는 강화 여성의 수가 자그마치 3000명이 넘었다. 이들에게 ‘조선의 신판 카라반’이란 별명이 붙여졌을 정도였다.
여름에는 외상으로 물건을 팔고 추수가 끝난 겨울에 미수금을 받아왔는데, 그 무렵이면 강화도는 이들이 들고 들어온 돈으로 흥청거렸다. 탄광촌에서 나돌았던 ‘개도 지폐를 물고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여기 강화도에도 있었다.
까맣게 잊힌 채 먼지 속에 묻혀 있었던 강화도의 직물산업 얘기가 다시 알려진 건 옛 방직공장을 업사이클링해 카페로 개조한 ‘조양방직’ 덕분이다. 30년 넘게 비워져 폐허가 됐던 공장은 지난해 7월 카페로 변신해 문을 열었다.
카페 이곳저곳에는 농기계부터 이발소 의자까지 수집한 오래된 물건을 체계도, 맥락도 없이 쌓아두어 빈티지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런 독특한 카페의 분위기가 SNS를 타고 알려지면서 최근 손님들이 폭발적으로 몰려들고 있다. 커피 한 잔에 7000원을 받고 있지만, 공장 한 동 전체를 개조해 웬만한 운동장보다 넓어 보이는 카페가 주말이면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로 넘쳐나서 대기시간만 1시간이 넘을 정도다.
카페가 된 조양방직은 1935년 당시 자본금 50만 원으로 조선인의 손에 의해 처음 설립된 방직공장이었다. 카페로 개조된 조양방직 공장은 1937년에 낙성식을 가졌다. 2000여 평이 넘는 부지에 세워진 공장에서는 1500명이 넘는 직공이 기저귀 등으로 쓰인 면직물인 ‘소창’ 등을 생산했다.
조양방직 카페를 찾았다면 공간의 느낌만을 소비할 게 아니라, 가볍게라도 강화의 직물역사를 둘러보자. 조양방직 인근에는 인천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소창체험관이 있다. 1956년 창업해 직조기 30대, 종업원 60여 명을 두었던 ‘평화직물’ 자리에 한옥으로 세운 체험관에서는 직물공장의 역사와 당시 생산 직물 등을 관람할 수 있고, 직물 짜기 등 다양한 체험도 해볼 수 있다. 최근에는 체험관 옆의 작은 건물에다 오래된 기계식 직조기 두 대를 들여놓고 가동해 직물을 어떻게 짜는지를 볼 수 있다.
# 망원경으로 북녘땅의 ‘사람’을 찾는 이유
강화도는 북한과 접경을 이루는, 이른바 접적 지역이다. 한강하구와 강화만이 만나는 물길이 가로막고 있지만, 강화도 북쪽 끝에서 황해북도 개풍군의 해창포까지 거리는 불과 2.3㎞ 남짓이다. 자전거를 타고 건너간다면 7분 남짓의 거리. 지도를 꺼내 보면 놀랍도록 가깝다.
그럼에도 강화도에는 내륙의 경계지역에서 느껴지는 긴장의 분위기는 없다. 한강하구는 군사분계선이 없지만 물길이 남과 북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 북쪽 제적봉 아래 북한 땅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는 강화 평화전망대가 있다. 이곳 전망대는 다른 내륙 접경지역의 전망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내륙의 전망대가 전쟁의 비극이나 분단과 대립을 보여준다면, 이곳 강화 평화전망대는 북한 땅이 이리도 가깝다는 새삼스러움과 함께 누추하지만 북한 땅에서도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북한 쪽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인지, 저쪽의 북한 주민들의 행동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쪽도, 저쪽도 경계선은 물론이고 군인들이나 초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내륙의 접적 지역의 다른 전망대에서는 북녘땅의 사진촬영은 물론이고 지형설명을 메모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지만, 여기 강화 평화전망대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스럽다. 이쪽의 우리 초소만 찍지 않는다면 카메라 고배율 렌즈로 북한 땅을 찍을 수도 있다.
전망대 2층과 3층에는 고성능 망원경이 설치돼 있는데,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면 개풍군 일대의 논과 밭이며 집단주택 등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더러 자전거를 타고 논둑을 달려가거나 밭 가운데서 모닥불을 때는 북한 주민들도 눈에 띈다.
강화 평화전망대를 찾은 관광객들은 십중팔구 유료 망원경부터 잡고 북한 땅을 훑는다. 쉴새 없이 동전을 먹어대는 망원경을 야속해 하면서도 너나없이 망원경에 붙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딱 하나. ‘북한 사람’이다. 일행 중 한 명이 북한 주민 몇이 들판에 나와 있는 모습을 찾기라도 하면 환호성과 함께 아주 야단이 난다.
저쪽의 북한 땅에도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면 왜 안 그럴까. 이쪽이나 저쪽이나 신기한 건 ‘맞은편의 사람’이다. 분단의 긴 세월은, 진즉 서로에게 서로의 존재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데까지 왔다.
강화 평화전망대 앞바다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의 남북선언에 포함된 서해 평화수역이기도 하다. 지난해 말 이곳에서 남북 공동 수로 조사가 이뤄져 한강하구 남북 공동이용 수역에 대한 해도가 완성됐다. 정전협정 이후 65년간 선박의 운항이 철저히 통제됐던 곳. 지도가 그려졌는데, 이곳을 과연 민간선박들이 자유롭게 다닐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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