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성지ㅡ갑곶 순교성지(강화 갑곳돈대)
▲강화 순교 성지 표지판
▲찾아가는 길
3개 동으로 건립된 인천교구 50주년 기념 영성센터로 2012년 11월 준공된 건물이다. 갑곶 순교자의 이름을 따 박상손관, 우윤집관, 최순복관 등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지 성당과 부대시설을 포함해 한 번에 100명의 단체 숙박피정이 가능한 규모이다. 성당 외관은 갑곶돈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인천교구 갑곶 순교성지
▲갑곶 순교성지성당 내부
▲갑곶 순교성지성당 내부
▲갑곶 순교성지성당 내부
▲갑곶 순교성지성당 내부
▲감실
▲성모 상
▲성수대
▲갑곶 순교성지
갑곶나루터에서의 순교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병인양요 이후인 1871(辛未)년 4월에 강화도 해역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평양에서 조선인에 의해 방화된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이를 거절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이때에 이승훈의 증손인
이연구(李蓮龜)와 균규(筠龜)가 제물포에서 잡혀 군문효수되고,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겸(李在謙)의 처 정(鄭)씨와
그의 손 이명현(李明玄)과 백용석(白用石) 등도 이와 관련하여 순교하였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5월 25일 고종(高宗)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좌우포도대장에게 교서를
내리게 되고, 이 때에 미국 함대에 왕래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첫 번째로 잡혀가
갑곶진두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게 된 것이다.
▲갑곶 순교성지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돈대 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이후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집중적인 개발을 진행하였으며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이며
인천교구 역사의 증인인 박순집(베드로) 증거자의 유해를 성지내에 안장하였다.
▲입구 성모 상
▲성지 성당
▲성지 성당
▲성지 성당
▲성지 성당
▲경당 내부
▲김대건 신부 유해
1845년 5월 14일 김대건신부는 페레올 고(高)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로 입국시키는 해로(海路)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甲串) 앞바다를 지나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가다 순위도에서 관원에 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갑곶 해안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해로 여행지가 되었고, 1856년 베르뇌 장(長)주교와 쁘띠니꼴라 신부,
쁘르띠에 신부, 1857년 페롱 권(權)신부가 비밀리에 입국한 요로이기도 하다.
▲남종삼 성인 유해
남상교는 남종삼 성인의 부친으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진사에 급제하여, 현풍현감, 충청 목사를 역임하고 퇴관 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남종삼은 남상교의 아들로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영향아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지속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프랑스인 성직자를 통해 막아보려 하였으나 대원군이 급선회함에 따라 병인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기념비
▲순교자 기념비
▲순교자 기념비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구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丙寅)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회장과 천주교인으로 최인서와 함께 있다가 잡혀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영(鎭撫營)으로 호송되어 효수(梟首)당한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죄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이곳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야외 제대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 - 1911)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듣고, 목격한 것을 증언하고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朴順集)베드로는1890년에 인천 제물포로 이주(移住), 1911년에 숙골(현 도화동)에서 82세의 나이로 선종, 인천 교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박순집 베드로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朴)바오로와 김(金)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 바오로 나이 21세에 맏아들 요왕을 낳고, 24세 둘째 아들 베드로를 낳았다.
두 아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으나 베드로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한 베드로는 신체 발육이 남달라 성장하며 힘이 장사로 마을 대항 씨름 대회에 나가 소년 장사가 되어 황소를 타 마을로 개선하기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소년 박 베드로는 이조모(姨組母)댁이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범(范))주교가 입국하여 은신하며 머물고 있는 북촌 마을 근처에 있어 이모의 도움으로 주교님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하며 주교님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교의 사랑을 받은 지 1년 남짓한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 많은 교우들과 앵베르 주교, 모방(Maubant 羅) 신부, 샤스탕(Chastant) 신부가 잡혀 주교와 신부들은 새남터에서, 교우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당고개에서, 옥에서 치명 순교하였다.
이러한 기해(己亥)박해 때 그의 부친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 포수(訓練都監 砲手)로 봉직하고 있었기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교, 신부들의 순교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에 박 바오로는 몇몇 교우들의 도움으로 새남터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을 지키던 군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모래로 대강 덮은 무덤 가까이 가서 손으로 모래를 파헤치고,
잘라진 목과 시체를 전부 찾아내어 머리 셋은 다 수염이 길어 입에 물고, 시체 삼구는 등에 업고 양팔에 끼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교우들이 준비한 관에 대강 수습하여 그 밤으로 노고산(老古山. 현 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하였는데 이는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고귀한 희생이었다.
그 후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근교에 안장한 성직자의 묘가 안심이 안되어 1843년, 박씨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장하며 사기 그릇에 순교 연월일과 이름을 먹으로 써서 묘에 함께 묻고, 후일 찾기 쉽게 표적을 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삼성산에 모셔진 묘로 그의 아들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후일 성교회에서 성직자 무덤을 찾을 터이니 네가 잘 보아 두었다가 가르쳐 드려야 한다.”고 전하였다. 그리고 박 바오로는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安城) 미리내로 이장되기 전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새남터에서 김신부의 시신을 찾아내서 와서(瓦署. 현 용산구 한강로3가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당시 17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가는 김대건 신부를 목격하였다. 박순집은 25세에 그의 부친과 같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되었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브르뜨니에르(白) 신부, 보리외(徐) 신부, 도리(金) 신부, 프티니콜라(朴) 신부, 푸르티에(申)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이 3월 7일과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박순집은 군인으로 참여되어 이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박순집은 아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朴順之,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음) 시신을 찾아 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최형(崔炯, 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병인년 박해가 날이 갈수록 혹독해져 갈 즈음, 불란서 함대가 서양 선교사의 처형에 대한 항의로 강화도를 통해 한강
양화진까지 침입,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강화도에 상륙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관아와 민가에 방화한 후 많은
문화재를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대동강을 통해 평양까지 들어온 미국 상선이 통상을 요구하다 아군에 의해 배가 전소된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인천 제물포까지 올라와 항의를 하는 등의 사건이 발행하여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실권자 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이 서양 오랑캐를 불러 들였다는 빌미로 더욱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박순집의 가족도 결국 검거망에 걸리게 되어 양화진(현 절두산)에서 1866년 10월 17일 형 요왕의 아들 박 바오로(20세), 고모 박 막달레나, 1868년 3월 29일 부친 박 바오로(63세)가 잡혀 순교하였고, 포청 옥에서 1868년 3월 26일 큰삼촌 박 바오로(70세), 큰삼촌 아들과 그의 부인, 작은삼촌과 그의 부인, 3월 29일 형 박 요왕(46세), 형수 손 발파라(39세), 12월 21일 장모 홍 유시디아(58세), 1870년 2월 21일 팔촌 형 박 바오로와 함께 옥사하였고,
인천 제물포에서 이모부 손 베드로 넓적이(68세)와 이모. 이모부의 사위 박 치문(요왕. 42세)이 1868년 4월 20일에 인천에서 순교하였고, 형 박서방(58세)이 4월 20일에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박순집 일가에서 16위의 순교자가탄생하였으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의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래서 박 베드로는 가족 시체들을 찾아내어 아버지와 형님 내외분, 백부의 시체를 「둔짐」이란 곳에 안장하였다. 공식적인 박해가 철회된 1876년, 박순집은 교회의 밀사 최지혁(崔智赫. 요한)과 고종의 유모 박(朴) 마르타의 딸 원(元) 수산나 등과 협력하여 드게트(崔) 신부, 블랑(Blanc 白) 신부 등을, 1877년에는 리델(Ridel 李, 제6대 교구장) 주교, 두세(丁) 신부, 로베르(金) 신부 등을 입국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1888년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白) 주교가 프오델(朴) 신부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하자
프오델 신부는 박순집을 불러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자신의 집안과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 법정에서 증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기 권 타대오에게는 한마디도 바꾸지 말고 기록하도록 하여 증언록이 작성되었는데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丙寅事蹟 朴順集證言錄)으로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899년 10월 30일, 박순집의 도움으로 와서에 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학교에 안장되었고, 1901년 10월 21일에 삼성산에 묻혀 있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도 발굴되어 명동성당에 안치되었으며, 1909년 5월 28일에는 노고산에 묻혀 있던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이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과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은 1878년에 홍제원(현 홍제동) 장거리 고개 밑에서 살았는데 교회를 위해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1888년에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 박황월(朴黃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을 수녀회에 입회시켰다.
그래서 박수녀는 조선인 최초 5명의 수녀 중 한 분으로 그가 95세의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이 글에는 자신의 가족들의 순교 행적과 신앙생활, 수도회 역사의 내용으로 아버지 박순집
증언록처럼 교회의 산 기록이 되고 있다.
1889년에는 인천에 사는 한 교우가 박순집을 찾아와서 인천 제물포(濟物浦)로 내려와 전교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자 1890년에 전교의 원대한 포부를 간직하고 아들 식구와 전 가족을 데리고 제물포로 이사했다. 박순집이 제물포에 와서 근교에 교우를 살펴보니 자기를 인천으로 초대한 교우 가정과 또한 가정, 일본인 교우집, 중국인 한 사람이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베드로는 1889년에 한국인 59명, 일본인 25명으로 설립된 답동본당(초대 주임 빌렘 신부) 사목을 도우며 전력을 다하여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1893년에 박순집의 집터가 경인 철도 부설로 인하여 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외곽지역인 주안 숙골(현 도화동)에 밭을 사서 이주하여 생활을 하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 하였다.
그런데 방안에는 향기가 풍기어 장손 요셉이 밖으로 나가 지붕을 올려 보자 동쪽으로 뻗친 두 줄기 광채는 마치 쌍무지개 같았고, 이웃 동네 사람들은 온통 불빛에 쌓여 있는 박 베드로의 집을 보고 불이 난줄로 알고손에 손에 물통을 들고 불을 끄려고 몰려왔다.
그러나 집은 타지 않고 광채의 서기만 있어 모두 놀라 장남 요셉에게 신비스런 현상을 이야기하며 주위를 살피니 박순집 베드로가 선종하면서 나타난 서기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땅에 무릎을 꿇고 박순집 베드로가 성인이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박순집 베드로의 시신은 독쟁이(현 용현동)에 묻었다.
이처럼 박순집 베드로의 일생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한 증언자의 삶이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이주해 와 살은 20여년은 평신도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여 오늘날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이 된 삶이었다.
그래서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는 교구 신자들의 순교자 현양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용현동(독생이)에 묻혔다가 1961년 8월 31일 천주교 서울교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내로 천묘된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서울교구의 도움으로 2001년 5월 24일 그가 말년에 살았던 도화동과 인연이 있는 도화동 성당 내에 봉안하여 순교자 현양 기도 모임을 갖고, 9월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 성지 내에 천묘하였다
▲십자가의 길 1 처
▲십자가의 길 2 처
▲십자가의 길 3 처
▲십자가의 길 4 처
▲십자가의 길 5 처
▲십자가의 길 6 처
▲십자가의 길 7 처
▲십자가의 길 8 처
▲십자가의 길 9 처
▲십자가의 길 10 처
▲십자가의 길 11 처
▲십자가의 길 12 처
▲십자가의 길 13 처
▲십자가의 길 14 처
사진출처 / blog.daum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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