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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경기 인천****기행

인천 강화ㅡ강화도ㅡ시린 가슴을 거슬러, 강화 護國墩臺 길

by 삼수갑산 2021. 9. 3.

강화도ㅡ시린 가슴을 거슬러, 강화 護國墩臺 길 

개망초가 가득 핀 여름을 거닌다. 꽃과 바다, 초록 잎을 따라나선 강화도에서 가슴 시린 역사를 지났다.
여느 산책과는 사뭇 다른 무게를 느끼며.

▲초지진은 과거 전쟁으로 모두 허물어져 돈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았던 곳을 복원했다

여름이 왔다. 이토록 싱그러운 잎이 가득 피어나는 계절이지만, 닿아 보지 못하고 하염없이 저물기도 했던 달이다. 매캐한 화약 냄새, 사방으로 튀는 포탄 파편, 그 시절 여름은 여전히 얼룩져 있다.

 

그래서 싱그러운 여름을 맞이한 지금의 우리는, 다시금 그 시절의 6월을 되새겨야 한다. 태극기가 여름 바람에 휘날린다. 호국보훈의 달이었던 6월에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을 다녀왔다.

강화도는 대한민국의 방패다. 한강 하류와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 곳. 고려의 개성 그리고 조선의 서울로 통하는 관문.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침략할 때도 항상 거쳤던 섬이 바로 강화도다.

 

강화도는 지리적으로 방어에 특화된 지역이지만, 취약한 지점도 있었다. 강화도의 북쪽에는 임진강, 예성강, 한강에서 흘러들어온 퇴적물이 만든 습지가 많아 적들이 쉽사리 접근할 수 없고 서해에 맞닿은 서쪽과 남쪽 지역에는갯벌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접근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동쪽은 물살이 빠른 염하가 흐르지만, 육지와 가까워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방어에 취약했다. 그래서 과거 선조들은 강화도의 동쪽 갑곶, 월곶 등에 돈대(墩臺)를 쌓고 방어시설을 구축했다.

 

돈대는 흙을 다지거나 경사면을 잘라 평평한 지대를 만들어 그곳에 쌓은 옹벽이다. 적들이 침입하기 쉬운 요충지에 설치되어 있으며 그 모양은 제각기 다르다. 규모가 큰 돈대는 마치 산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그때 모습 그대로, 오늘날 돈대는 여전히 강화도를 감싸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돈대를 가장 똑똑하게 모아 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호국돈대길을 걷는 것이다. 호국돈대길은 강화나들길 2코스에 해당하는 트레킹 코스로 갑곶돈대를 시작으로 용진진,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으로 이어지는 총 17km의 코스다. 역사가 곧 풍경인 길이다.

 

걷는 내내 바다를 볼 수 있다. 여느 바다처럼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리진 않는다. 염하다. 염하는 강화도와 김포시 사이를 흐르는 좁은 해협인데 바다라고 부르기에는 좁고 물살이 빨라 그 모습이 마치 강처럼 보인다하여 ‘소금이 있는 강’, 염하라고 부른다.

 

조그마한 고깃배가 근근이 보이고, 낚시꾼은 찌를 바다에 던진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바다에 튕긴다. 돈대에 숨는다. 푸릇한 여름 발자국이 호국돈대길을 누빈다.

▲호국돈대길
총거리│17km 소요시간│5시간 50분 코스│갑곶돈대→용진진→광성보→덕진진→초지진
 

▲갑곶돈대의 정자에 오르면 염하가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돈대는 언덕에 위치한다. 하늘과 가까워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한껏 느낄 수도 있다. 지금의 돈대는 강화도에서 가장 전망 좋은 쉼터나 다름없다. 호국돈대길 여행은 갑곶돈대를 둘러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갑곶돈대는 몽고군과의 항전, 병인양요, 신미양요등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으며 수도의 관문을 굳건히 지키던 요새 중 요새였다.

 

갑곶, 한 번 들으면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갑곶’이란 이름은 삼국시대 당시 강화도를 ‘갑비고차’라 부른 데서

전해 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시대 당시 침략한 몽골군이 이곳을 건너다 실패하고 안타까워하며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바다를 메우면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는 한탄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과거 돈대를 지켰던 포, 웅장하다

강화도로 통하는 관문, 갑곶돈대는 여전히 견고하다. 바뀐 것이라면 꽃이 저물고 피어난 청량한 잎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한적한 시간뿐이었다. 갑곶돈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강화 전쟁박물관이 자리한다.

 

강화 전쟁박물관에는 ‘어재연 장군기’가 전시되어 있다.어재연 장군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를 수비하던 조선의 지휘관으로 당시 수(帥, 장수를 뜻함)자가 새겨진 군기를 사용했다.

광성보 전투는 조선군의 전멸로 끝이 났고 당시 걸려 있던 어재연 장군기는 미군에 의해 전리품으로 강탈되었다. 2007년, 무려 136년 만에 ‘장기대여’ 형식으로 장군기는 우리나라에 반환되었고현재 강화 전쟁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현재 전시 중인 수자기는 복제본이다. 수자기가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강화도에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일이다. 지키기 위해 선택해야만 했던, 선조들의 희생이 강화 전쟁박물관에서 펄럭이고 있다.

▲강화나들길 2코스의 시작점, 갑곶돈대

 

▲돈대의 웅장함은 어느 산성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갑곶돈대의 또 다른 볼거리는 거대한 탱자나무다. 탱자나무의 가시는 날카롭고 억세서 쉽게 헤치고 지나가지 못한다. 이 점을 이용해 과거 선조들은 몽고의 침입을 대비해 갑곶돈대 주변에 수많은 탱자나무를 심었단다. 지금까지 갑곶돈대에서 자라는 탱자나무는 선조들의 국토방위 의지를 지키는 유물인 셈이다.

탱자나무는 열대성 지방에서 자라기 때문에 강화도보다 더 올라가면 기후가 맞지 않아 자생하지 못한다. 탱자나무의 뿌리가 강화도에 깊이 내리기까지, 지금의 여름이 이토록 한적하기까지, 여전히 강화도를 감싼 돈대가 괜히 아리다가 고맙게 느껴진다. 갑곶돈대는 반듯하게 다듬은 산책로가 길게 조성되어 있어 여유롭게 둘러보기 좋다.

●강화도의 자존심 갯벌장어

갑곶돈대에서 광성보로 향하는 길목은 그저 앞만 보고 무작정 걷기에 볼거리, 먹거리가 너무 가득하다. 우선 볼거리로는 더리미 선착장, 용진진, 용당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 등이 있다. 큰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둘러볼 수 있는 작은 규모라 중간중간 들러 잠시 쉬었다 가면 좋다. 특히 더러미 선착장 근처에는 더리미 장어마을 특색음식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더리미 장어마을

장어는 밴댕이, 꽃게와 더불어 강화도에서 손꼽는 3가지 명물 음식 중 하나다. 세계 5대 천연 갯벌로 손꼽힐 정도로 질 좋은 강화도 갯벌에서 자란 장어는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먹이를 먹고 자라 담백하고 쫄깃한 맛이 특징이다.

 

완벽한 자연산은 아니다. 갯벌을 막아 만든 어장에 민물장어를 75일 이상 풀어 키우기 때문이다. 별다른 사료를 주지 않기 때문에 장어들이 갯벌을 누비며 직접 먹이를 사냥하며 운동하고, 그 결과 탱탱한 장어로 거듭나는 것이다.

 

가격은 대략 7~10만원 사이. 더리미 장어마을에서는 장어를 숯불에 굽는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고, 그 고소한 냄새가 마을 전체에 퍼진다.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힘든 마을이다.

▲광성보 내부에 길게 뻗어 있는 숲길

갑곶돈대를 지나 광성보로 향하는 길. 길게 뻗은 흙, 얕은 바다가 여전히 흐른다. 길가에는 노란 개망초가 가득 피었다. 나들이 나온 차가 지나갈 때마다 개망초는 파도친다. 꽃, 바다, 풀, 갯벌. 자연이 범벅된 바람이 여름 더위를 식혀 준다. 청량하다.

▲광성보의 돈대는 유난히 단단하게 느껴진다

광성보는 조선시대에 설치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 중 한 곳으로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은 초지진에 상륙해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를 공격했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고군분투하다 전원이순국했다. 광성보 전투에 참전했던 장군이 바로 어재연 장군, 강화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수자기의 주인공이다.

 

▲신미양요 당시 순국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무명용사비, 오른쪽은 쌍충비각

광성보에는 신미양요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250여 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

이 자리한다. 숙연한 과거의 역사와 달리 현재의 광성보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거대한 수목원에 온 듯하다. 새소리가 들리고, 나무가 흔들린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의 양손을 부여잡고 산책하는 새내기 부모, 벤치에 앉아 몸을 기댄 노부부, 무엇에 토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멀찍이 떨어져 걷는 커플. 일상적인 풍경이 광성보를 보듬는다.

돈대로 향한다. 광성보는 호국돈대길에서 가장 멋진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돈대 2곳을 품고 있다. 손들목돈대와 용두돈대다. 손들목은 염하에서 물살이 가장 거칠게 지나는 여울목이다.

 

돈대에 오르면 강화 해안 일대와 소나무숲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에 용머리 모양으로 돌출된 암반 위에 설치되어 있다. 광성보 입구에서 손들목돈대를 거쳐 용두돈대까지는 대략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조선시대 당시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 덕진진

덕진진과 초지진은 호국돈대길의 마지막 코스다. 점심을 먹고 갑곶돈대에서 출발했다면 덕진진과 초지진을 거칠 때쯤이면 벌겋게 달아오른 일몰과 만날 수 있다.

▲덕진진의 입구 천장을 거대한 청룡이 휘감고 있다

호국돈대길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 중 가장 가슴 시린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는 의미기도 하다. 신미양요 당시 미국의 전력은 해병대 1,230명, 대포 85문과 군함 5척이었다.

 

초지진은 함포의 사격으로 함몰됐고, 덕진진은 별다른 교전 없이 점령됐다. 어재연 장군의 광성보 전투는 조선군의 전멸까지 단 1시간 30분이 걸렸다. 당시 미 해군의 기록에 따르면 미군은 3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반면 조선의 군사는 243명이 전사했다.

 

조선군이 사용했던 화승총의 사거리는 120m, 미 해군이 사용했던 스프링필드 소총의 사거리는 914m. 조선군이 사용하던화포의 사거리는 120m, 미 군함에서 사용하는 함포의 사거리는 1,560m였다. 일방적이었고, 선조들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저항했다. 당시 덕진진은 미 해군에 의해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현재의 덕진진은 1976년에 다시 세운 문루다. 초지진 역시 모두 허물어져 성의 기초만 남게 되었다. 현재의 것은 역시 다시 세운 것이다. 모두 사라졌다가 새로 생긴 새것들이다. 헌것은 초지진의 성벽과 소나무에 남은 포탄 파편 상처뿐이다.

▲그 시절 포탄 파편 자국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초지진 소나무

▲초지진 돈대의 벽에서도 포탄 파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호국돈대길을 거닐었다. 돈대는 여전히 지키고 있었고, 바다는 시간처럼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개망초를 지나, 초록 잎을 지나 결국 시린 역사에 도착했다.

 

시작은 선조들의 굳건한 마음에 감탄했고, 끝은 그 처절함에 경외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발걸음은 점점 진지해진다. 호국돈대길은 반드시 기억해야 하기에, 누구나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