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도(喬桐島)ㅡ레트로가 숨 쉰다, 강화 교동도
▲시간이 멎은 듯한 대룡시장의 골목
나는 20분째 엉덩이뼈를 으스러트리고 있는 중이었다. 토요일 오후, 성수동의 한 카페에서. 해골처럼 뼈대가 앙상한 철제의자는 ‘요즘 카페의자’답게 작고 좁고 딱딱했다.
앉으면 여지없이 송곳니 같은 게 양쪽 골반을 쿡쿡 찌르는 듯한 의자. 그런데 사진은 잘 나오는 의자. 예쁜 고문의자. 1시간 웨이팅의 결과가 이거라니. 그러고 보니 카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화이트 톤의 모던한 인테리어에 대기 줄이 길었고, 크로플을 팔았고, 옷 잘 입은 언니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하긴, 요즘 유행하는 카페는 다 그렇다.
▲대룡시장 담벼락에 그려진 정겨운 벽화
최근 내 핸드폰 사진첩은 인스타그래머블 스폿들에게 점령당했다. 신상 카페, 가오픈 맛집 따위를 발견하는 (그리고 자랑하는) 재미에 눈을 뜬 탓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것도 반복적으로 향유하다 보면 어딘가 좀 질리는 구석이 생기기 마련이라, 뭔가 색다른 게 필요했다.
말하자면 일상의 환기 같은 것. 교동도로 떠난 이유를 설명하자면 그랬다.교동도는 강화도에서도 한 뼘 더 깊숙이 위치해 있어, 마치 보이지 않는 벽 너머의 세상을 뚫고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입구에 적힌 문구부터 그랬다.‘여기서부터 민북지역, 검문에 협조 바랍니다.’ 교동도는 북한 땅과 가까운, 민통선(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쪽에 위치한 섬이라 출입신청서를 작성한 후 차량출입증을 받아야만 갈 수 있었다. 검문을 통과하고 교동대교를 건넜다. 여행이란 다른 차원으로 들어서는 일이라고 늘 생각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건 정말이지 ‘여행’이었다.
▲작은 골목도 그냥 지나치지 말 것
교동도에선 시간마저 다르게 흘렀다. 서울보다 좀 더 느릿하고 잔잔했다. 교동향교는 약 9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2021년의 하루를 또 한 겹씩 쌓아 가고 있었고, 대룡시장의 시계는 1960년대의 어느 오후에 분침과 초침이 모두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낡은 이발관 간판과 오래된 극장 건물, 좁은 골목길. 살아 본 적도 없는 시대인데 향수가 생긴다. 그리움이란 감정은 어쩌면 직접적인 경험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북적이는 곳에선 어김없이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난다
시장 골목의 한 다방에는 웨이팅도 크로플도 없었다. 젊은 사람들도 찾아보기 어려웠다.대신 소곤소곤한 말소리와 뜨끈한 쌍화차가 있었다.주인 할머니께 영업시간을 여쭤 보니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라고 하셨다.
정해진스케줄 없이 그저 그만큼 일하고 그만큼 쉰다고. 급할 것 없으니 그뿐이라고.나는 이번 여행에서 이 대답보다 교동도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어느 느직한 일요일 오후. 푹신하고 낡은 다방 소파에 앉아 주인 할머니가 우려 주신 쌍화차를 마셨다.호로록 넘긴 쌍화차 한 모금에, 엉덩이가 모처럼 편안했다.
▲양쪽에서 유혹이 쏟아진다, 뭐부터 먹어 볼까
대룡시장이 교동도를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된 건 2014년, 그러니까 교동대교가 개통된 이후 TV 프로그램 <1박2일>, <알쓸신잡> 등의 촬영지로 거듭 소개되면서부터다.
과거에 시간이 멎어 있는 듯한 대룡시장의 레트로한 모습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여러 번 덧칠된 낡은 간판만 해도 그렇다. 마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다. 군데군데 그려진 정겨운 벽화와 시간이 쌓인 오래된 건물들도 다분히 복고풍이다.
▲뭘 먹을지 고민하는 건 대룡시장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로 즐거운 일이다
대룡시장이 옛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6·25 전쟁 당시 황해도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잠시 피난 온 북한 주민들은 한강 하구가 분단선이 된 이후 귀향하지 못하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시장을 만들었다. 그렇게 지금의 대룡시장이 탄생했다.
교동도는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어 오랫동안 외지인들의 출입이 통제됐고, 덕분에 대룡시장은 골목의 생김새와 넓이, 상점의 간판까지 모두 그 시절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됐다.시장의 규모는 크지 않아 느린 걸음으로 2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고 교동향교, 파머스마켓, 난정저수지 해바라기정원 등 주요 관광지와도 가까워 교동도 여행코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대룡시장 추천 스폿
▲제비 동상을 발견했다면 교동제비집에 잘 찾아왔다는 뜻이다
교동도 여행이 처음이라면, 출발점은 교동제비집으로 정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대룡시장 입구 근처에 위치한 교동제비집은 지역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교동도 관광안내소다. 교동도를 찾은 관광객들을 위해 IT 기반의 다양한 관광안내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1층에는 관광 안내데스크, 체험 공간, 회의실 및 주민 복합문화공간이, 2층에는 카페 쉼터와 전망대가 있다. 1층의 터치스크린을 통해서는 교동도 지도 위에 표시된 관광 명소와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고, VR체험과 교동신문 제작도 직접 해 볼 수 있다. 흑백 사진 촬영 및 자전거 대여도 가능하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서비스가 중단된 상태다.
▲옛날 교복을 입고 흑백 사진을 남겨 볼 수 있는 교동스튜디오
학창시절의 추억을 소환해 볼 수 있는 사진관. 강화군에서 중앙 및 지방정부 협력으로 추진하는 관광객 체험공간으로, 교복 대여와 흑백 사진 촬영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진은 장당 5,000원으로 의상 대여에 사진 인화까지 포함된 가격이라 꽤 합리적이다. 별다른 보정 작업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인화할 사진을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는 게 교동스튜디오의 이용 꿀팁! 현재는 코로나19로 임시 휴업 중이지만, 운영을 재개하면 대룡시장에서 가장 먼저 달려가 봐야 할 곳이다.
▲교동다방의 쌍화차엔 주인 할머니의 인심이 담겨 있다
교동도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이라는 명성에 맞게 인테리어부터 압도적이다. 수십년간 다방을 다녀 간 손님들의 방명록이 천장 가득 붙어 있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7080 노래는 다방의 레트로한 분위기를 한 스푼 더한다. 대표 메뉴는 대추, 잣, 호두 등이 수북이 들어간 쌍화차. 노른자를 톡 터뜨린 뒤 저어서 훌훌 마시면 발끝까지 따뜻해진다. 무더운 여름엔 시원하고 달콤한 오미자차가 좋겠다. 주인 할머니 피셜, 영업시간은 ‘대략 아침 9시 즈음부터 해 질 때까지’다.
▲강만장의 인테리어는 전부 사장님의 솜씨다
바이커들의 성지로 불리는 대룡시장의 바이크 카페. 번쩍번쩍한 멋진 오토바이들이 카페 앞 오토바이 전용 주차장에 줄 지어 있고, 실내에는 헬멧, 라이더 자켓, 바이크 잡지 등 다양한 바이크 관련 용품들이 진열돼 있다. 바이크를 타는 본인을 포함해 가족까지 함께 입장할 수 있으며, 라이더들에겐 커피도 10% 할인해 준다.
‘그냥 북쪽으로 끝까지 달리세요.’ 다소 터프한 카페 위치 설명도 너무나 강만장답다.60년 전통의 황해도 국밥과 냉면을 판매하는 대풍식당과 맞붙어 있으니, 시동을 걸기 전 국밥으로 든든히 배를 채워 봐도 좋겠다.
▲파머스마켓은 대룡시장과 맞붙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지난해 4월, 옛 LG농기계 수리 센터가 창고형 마켓으로 ‘힙’하게 변신했다. 파머스마켓은 강화도의 농산물을 직거래할 수 있는 장터로, 총 30여 개의 점포에서 강화도와 교동도에서 수확한 질 좋은 농산물들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고려산 벌꿀, 찰 보리빵, 강화섬쌀 등 강화도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산품뿐 아니라 추억의 장난감과 간식들을 판매하는 문방구와 뽑기 가게도 눈길을 끈다.
▲옛날 장난감과 간식들을 판매하는 파머스마켓 안 문방구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핫하게 떠오른 ‘교동 밀크티’도 바로 여기, 파머스마켓에 있다. 레트로한 폰트가 적힌 참기름병에 찰랑찰랑 담긴 밀크티는 딱 색깔만큼이나 부드럽고 달달하다.파머스마켓에선 각별히 후각을 조심할 것. 방심하는 순간, 즉석에서 구워 주는 고소한 만두와 각종 튀김 냄새가 사방에서 정신없이 코끝을 강타할 테니. 에코백, 접시 등 아기자기한 소품을 판매하는 플리마켓도 함께 열리니 파머스마켓에 갈 때 필요한 건 두둑한 지갑과 느슨한 허리띠, 두 가지뿐이다.
▲무려 약 900년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교동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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