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순교자 묘ㅡ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의 무덤은 선산이 있던 가마골에서 1980년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 황사영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써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 호 仁甫, 1757~1801, 토마스)이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혀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으로 처참한 육시형을 당하였다.
▲찾아가는 길
▲양평 해장국 건물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있다
▲의정부교구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표지판
▲의정부교구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표지판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되었다.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은 어렵게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잊혀 왔던 묘를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 등 사료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했다.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토시)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로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면서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령이 내려지자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옹기가마 토굴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박해 상황을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작은 붓으로 명주 천에 적었는데,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가 발각되어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그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순교 후 친척들이 황사영의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던 가마골(현 경기도 남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안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 무덤은 1980년 현지에서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연 조선 시대에 국가 모반죄로 육시(戮屍)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닌 시신을수습하여 정식 무덤에 안장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고,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황사영의 무덤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순교 이후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숙부 석필(錫弼)은 경흥으로, 모친 이윤혜(李允惠)는 거제로,부인 정명련(丁命連, 일명 蘭珠, 1773~1838, 마리아)은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官婢)로,두 살짜리 아들 경한(景漢, 일명 敬憲)은 어린 탓에 교수형을 면하고 전라도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유배가게 되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 하나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다.1801년 신유박해로 수많은 교우들이 희생되었고,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金漢彬, 1764~1801, 베드로),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해 8월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어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명주에 적었다.그는 ‘순교자의 피는 천주교의 씨앗’임을 굳게 믿었고, ‘주님을 위해 진실로 남은 힘을 다하고자 한다.’는 소명 의식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신앙심으로 교회 재건을 위한 방책을 《백서》에 담았던 것이다.그러나 《백서》는 내용상 국가에 해를 끼치려는 방책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위정자들에게는 천주교 신자들의 양박청래운동(洋舶請來運動 ; 서양 선박을 청해 와서외교적 교섭을 통해 선교하려는 운동)과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황사영 백서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 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 문서다.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쓰인 것인데, 모두 122행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이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대안 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된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을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교회 관계 사건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있다.
한편,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대안 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박해의 종식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현했다.그리고 청국 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즉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였다.
◆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합격되어 한림학사로 있었다.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지니고 가던 황심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황경한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출처 / blog.daum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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