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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경기 인천****기행

인천 강화ㅡ오랜 시간이 머무는 강화 / 이곳은 한권의 歷史책 이다

by 삼수갑산 2022. 1. 31.

강화도(江華島)

오랜 시간이 머무는 강화 / 이곳은 한권의 歷史책 이다

▲매서운 혹한으로 강화의 바다가 꽝꽝 얼어붙은 날이었다. 얼어붙은 바다의 수면이 물고기 비늘처럼 일어났고,

어선들도 얼음 바다에 갇힌 채 얼어붙었다. 강화 땅에서 혹독했던 것이 어찌 날씨뿐이었을까.

 

가까이 있어서 외려 잘 보이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늘 가까이 있기에 무심코 대했던 곳.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도 같았을 때 38년 동안 수도가 됐던 땅 강화입니다. 강화를 흔히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말합니다만, 이 말에 절반만 동의할 따름입니다.강화는 박물관이라기보다는, 강물처럼 쉼 없이 뒤척이며 흘러가며 지금도 쓰이고 있는 ‘역사책’에 더 가깝습니다.

 

건국신화를 간직한 민족의 영지이기도 한 가까운 변방, 그곳의 염하(鹽河)가 만들어낸 물길에 스며 있는시간을 만나기 위해 나선 길입니다.바다가 꽝꽝 얼어붙어 파도 소리가 키질하는 소리로 들리는 민머루 해변이 있는 이곳, 강화입니다.

# 강화, 한 권의 역사책이 되다

강화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강화에 쌓여 있는 시간은 변화와 발전이라는 빠른 유속에도 좀처럼 씻겨내려 가지 않았다. 오전의 빛에, 혹은 스러지는 노을에 드러난 갯골들이 개펄에 그려내는 문양이 마치 상흔 같았다. 갯골 앞에서 시간 위에 역사가 새겨놓은 수많은 음각을 생각한다.

강화 땅에 지천인 고인돌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시간이 너무 멀어 실감이 나지 않는 쪽이라면,삼엄한 차단기 너머 강화평화전망대에서 보이는 예성강 물줄기가 강화만에 합해지는 지류 너머 북녘 사람들 모습은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섬뜩했다.

여기 강화에서 만들어진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이 땅이 건너온 굴곡의 역사와 시간을 질료로 삼았던 건 아니었을까. 팔만대장경은 강화에서 만들어지고 보관되다가 조선왕조가 확립된 이후에 해인사로 옮겨갔다.

 

‘팔만’대장경이지만 정확한 대장경의 경판(經板) 수는 8만1258판이다. 호국을 기원하는 경판의 내용이나 수준이야 익히 알려졌다. 그렇다면 경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팔만대장경의 경판에는 놀라울 만큼의 정성이 스며 있다. 우선 나무 선택부터가 그랬다. 글자를 촘촘히 새겨야 하니 목판의 재질은 너무 단단해서는 안 됐다.

 

그렇다고 무른 재질의 나무를 쓰면 글획의 시작이나 끝부분이 마모되거나 떨어져 나갔다. 깎기는 쉽지만, 새겨놓은 글획은 흐트러지지 않아야 했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낸 나무가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였다.

경판을 만드는 작업은 우선 나무를 베어내서 갯벌에 2년 이상 묻어두는 것에서 시작했다. 갯벌에서 건져낸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뒤에 소금물에 삶았다.

 

목재를 소금물에 삶으면 마른 뒤에도 비틀림이 없고 보풀도 일지 않았단다. 이 과정에 또 1년이 걸렸다. 나무를 베어내고 도합 3년이 지나야 목재를 경판으로 쓸 수 있을지 감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골라낸 나무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새긴 뒤 손잡이에 해당하는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까지 마쳐야 경판이 완성됐다.

몽골의 침입으로 피폐한 백성을 돌보는 대신 수도를 강화로 옮긴 무신정권은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까지 설치하고 대장경을 만드는 데 온 정성을 다했다.

 

자 한 자를 새길 때마다 절을 세 번씩 했다니 8만 장이 넘는 경판마다 빽빽하게 새겨진 글씨를 생각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기원을 바쳤는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대장경은 무신정권이 태평성대를 얼마나 열망했는지를 보여주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게 진정 백성을 위한 것이었는가다

 

▲강화 고려산의 낙조봉을 오르는 길에서 만난 일몰 풍경. 바다 건너 석모도의 낙가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강화도에서 만나는 낙조 풍경은 어쩐지 애잔한 느낌이다.

 

# 항쟁일까, 도피일까… 강화 천도

강화 어디를 가나 돈대(墩臺)가 있다. 돈대란 돌로 쌓은 작은 성을 말한다. 강화 전역에 51개 돈대가
있는데, 19세기에 만든 용두돈대까지 포함하면 돈대의 수는 52개다. 그런데 강화군 자료로 보면 돈대는 53개다.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전술적 가치가 상실돼 철거된 돈대까지 포함했기 때문이다.

 

여기다가 육군 박물관 자료로는 하나가 더 늘어난 54개다. 필시 같은 돈대를 중복해서 셈한 것으로 보인다이렇게 셈하기 힘든 이유는 하나의 돈대에 두 개의 이름이 붙여진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돈대라는 이름에서 돈(墩) 자와 대(臺) 자는 모두 ‘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이라는 의미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강화역사박물관 전시실 초입에 강화도에 있었던 군사시설의 숫자를 적어놓았다. ‘5진 7보 53대’. 대대 정도의 규모인 5개의 진과 소대쯤인 7개의 보, 방위 시설인 53개 돈대를 뜻한다.

 

강화 땅 곳곳에 이처럼 군사 시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는 건, 강화가 그만큼 역사적, 혹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려 무신정권의 강화 천도는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제국을 피해서였다. 몽골의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된 것은 1231년의 일이다. 도성이었던 개경이 쉽게 포위당하자 이듬해 무신정권은 개경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대몽항쟁을 공표한다.

 

고려가 전쟁을 끝내고 몽골과 화의하는 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지 27년 만인 1259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11년 뒤에 무신정권은 개경으로 돌아갔다. 풍수지리의 힘이었을까. 강화로 천도하면서 고려는 칭기즈칸이 정복한 수많은 나라 중 유일하게 국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30년이 넘도록 몽골에 복속되지 않은 지연작전의 공신은 바로 지형이었다. 강화해협이라고도 불리는 염하는400∼1000m 좁은 폭으로 조수 간만의 차가 9m나 되면서 유속의 가늠을 아주 어렵게 한다.

 

게다가 썰물이면 드러나는 갯벌은 진득하게 발을 붙잡는다. 게다가 혹한으로 요즘처럼 바다에 유빙(流氷)까지 떠다닌다면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몽골 전사들의 전의가 물러질 수밖에 없었겠다.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지은 고려궁지는 규모는 작지만 수도 개경을 옮겨 놓은 듯, 뒷산의 이름까지도 송악산으로 붙였다.

단순히 수도 이전만이 아니라 수도 근처의 사찰과 탑까지도 가지고 왔다.

 

터전만 남은 봉은사, 급하게 쌓았을 것이 분명한 강화 하점면의 오층 석탑. 처마는 깨지고 몸돌 두 개와상층부의 장식을 잃었고, 가람 배치의 흔적도 찾지 못했지만 석탑은 어엿한 보물 10호다.

 

▲석모도 낙가산 아래 보문사. 지난해 6월 석모대교가 놓이면서 절집을 찾는 이들이 많이 늘었다.

 

# 억울한 죽음, 그리고 장렬한 죽음

 

강화 천도 와중에 고려 왕이 강화 섬으로 건너갈 때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한다. 왕은 뱃사공 손돌에게 제대로 된 물길로 가라고 했는데, 손돌이 파도가 더 많이 일고 출렁이는 곳으로 배를 몰자 의심했다. 이에 왕은 신하들에게 손돌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손돌은 죽는 순간에도 바가지를 띄워 바가지가 가는 길을 따라 배를 저어갈 것을 유언했다. 바가지가 떠가는 곳으로 배를 몰아 강화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손돌의 유언대로 해서 배가 갯벌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돼 크게 후회하고 손돌의 사당을 지어 억울한 원혼을 달래 줬다고 전한다.

강화 광성보 용두돈대와 김포 망덕진 사이를 뱃사공 손돌의 이름을 따서 ‘손돌목’이라 부른다. 김정호가 펴낸 지리지인 ‘대동지지’에서는 손돌목을 “물밑이 문지방 같고 수세가 매우 급하며 물밑 돌부리가 깊은 낭떠러지 같다”고 표현했다.

 

억울한 뱃사람의 죽음에 대한 전설은 너무도 구체적이다. 훗날 그가 참수됐다는 음력 10월 20일 무렵에 부는 매서운 바람을 ‘손돌 바람’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이번에는 장렬한 죽음. 1871년 6월 10일 토요일 이미 여러 해 전에 일본의 통상조약을 이끌어낸 미 해병대가 함포 사격을 해가며 일주일 이상 정박했다. 이른바 ‘신미양요’다. 쇄국의 조정은 강화도에 군사와 군량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지휘관으로 어재연을 보냈다.

전세는 불리했다. 병사들은 광성보에서 총탄을 막기 위해 초여름 아홉 겹의 무명 솜을 입고서 싸우다 에 불이 붙었다.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을 포함해 최후에는 손에 쥔 흙까지 무기 삼아 장렬하게싸운 병사들이 전멸했다.

 

적군인 슐레이 소령이 수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진지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최후의 한 명까지 격렬했던 국민을 본 적이 없다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였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가로세로 4.5m의 ‘장수 수(帥)’ 한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 깃발이 136년이 지난 2007년에 영구 임대 형식으로 반환돼 지금은 용산전쟁기념관에 있다. 광성보 전투는 신원을 알 수 없는 51구의 전사자가 7기로 분묘된 ‘신미순의총’으로 그 자리에 남았다.

 

▲얼어붙은 갈대 너머의 갯벌을 눈이 덮었다. 검은 갯벌이 감광된 네거티브 필름처럼 흰 눈밭이 됐다.

 

# 석모도 성당과 교동도 제비집

외포리와 석모도를 부지런히 오가던 여객선은 석모대교가 완공되면서 부두에 정박해 있다. 외포리선착장에서 배는 이제 남쪽의 세 섬, 볼음·아차·주문도를 간간이 다닌다. 석모도 뱃길이 끊기면서 외포 젓갈수산시장은 영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상인들은 아직 탐스러운 젓갈을 좌판 가득 내놓고 있다.

이즈음은 석모도에 새로 생긴 미네랄 온천을 찾는 사람이 많아 보문사로 드는 길에 1시간쯤 차량이 정체하는 일쯤은 흔하다. 차량 한 대당 2000원씩을 받는 주차 요원은 북새통을 이루는 도로를 보면서도 짐짓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오늘은 덜 막히는 편”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차가 많은 날에는 도대체 얼마나 정체가 심하다는 얘기일까.

석모도에서 가장 알려진 명소는 단연 낙가산과 보문사. 석모도에 갔다면 낙가산을 등산하거나 보문사에 들르는 건 필수 코스다. 알려지지 않은 곳 중에서는 전득이 고개 옆의 성모마리아 성당을 추천한다.

 

주소는 강화군 삼산면 삼산동로 17-8. 성당 내부가 열댓 평이나 될까. 성모마리아 성당은 성공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박한 성당이다. 머릿돌을 가린 회양목을 걷어내면 성당 건축연도가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112년 전인 1906년이다. 겨자색 지붕 덕에 지나다가 누구든지 금방 발견할 수 있다. 성당 앞에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활개를 치고 서 있어 벚꽃이 흐드러질 때면 경관이 아름답다.

 

섬에서조차 번잡함을 좇는 것이 싫다면 교동대교를 건너 교동도로 들어가자. 교동도는 석모도와 달리 민간인출입통제선 너머에 있어 신분증을 보여주고 출입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자정부터 오전 4시까지는 통행금지에 묶여 섬 안으로 들어갈 수도, 섬 밖으로 나올 수도 없다. 그러나 교동도는 이런 불편쯤은 감수하고도 남을 정도로 볼거리가 많다.

 

교동도는 강화도 최북단 섬이지만 강화군 전체 경작지보다 면적이 넓다. 황해도 연백의 실향민들이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섬을 간척해서 교동도의 세 섬을 하나로 만든 결과다.

 

교동도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60년쯤에서 시간이 멈춰 선 것 같은 대룡시장에서는 금방 만든 꽈배기와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의 쌍화차도 맛볼 수 있다.

 

한 통신회사가 마을에 기탁해서 자율 운영하고 있는 ‘교동 제비집’도 꼭 들러봐야 하는 장소다. 여기서는 IT 기반의 관광안내를 받거나 자전거와 스마트 워치를 대여할 수도 있다.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은 1인 신문인 ‘교동신문’을 발간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있고, 디스플레이에서 교동도와 북한 황해도 연백 사이 2.6㎞ 거리를 잇는 사이버 다리도 놓을 수 있다. 지금까지 4000명이 넘는 관광객이 디지털 참여로 가상의 다리를 놓았다.

 

강화 가는 길=섬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개다. 하나는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대교를 건너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356번 지방도로를 따라 강화초지대교를 건너는 길이다.

 

강화대교는 섬 북쪽, 초지대교는 섬 남쪽으로 연결된다. 강화대교로 들어가 교동도와 석모도를 둘러본 뒤에 초지대교로 나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주말이나 휴일이라면 석모도 온천 일대의 극심한 교통체증을 감안해야 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강화의 숙소는 거의 대부분이 펜션이다. 모텔급 숙소도 있지만 태반이 노후했다. 강화군시설관리공단이 운영하는 강화평화빌리지(032-930-7058)를 추천한다.

 

독립 별채 객실은 5인실과 10인실 두 가지.  강화의 펜션들은 대부분 바다를 끼고 있는데, 호텔 에버리치(032-934-1688)는 바다가 아니라 산속에 들어선 70실 규모의 리조트호텔이다.

 

남산유스호스텔을 인수한 뒤 리모델링을 거쳐 2014년 문을 열었다. 굿스테이 가맹업소인 한옥 펜션 옛날의 금잔디(070-8262-6731)도 괜찮다.

 

맛집으로는 돌솥비빔밥과 메밀전병, 도토리묵을 내는 강화섬 보리밭(032-937-2982)이 이름났다. 참게 요리를 내놓는 국화호수(032-933-8264)와 꽃게탕을 내는 충남서산집(032-933-1667)도 평판이 좋은 맛집이다

 

출처 / munhwa.com / 강화(인천) = 글·사진 박경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