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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아시아*****국가들/⊙요르단*****기행

요르단ㅡ페트라(Petra)ㅡ페트라 유적지 전 코스

by 삼수갑산 2021. 8. 28.

페트라(Petra) 유적지. 전 코스

▲알- 카즈네 입구 

 

 

▲알- 카즈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 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이아인이 건설한 해발 950m의 산악도시로서 최고 높이 300m의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교역로의 교차지점에 있어서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며 번영을 누렸다. 시가지 입구 남쪽의 투그라, 북쪽의 투르크 마니에라라는 3개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곳곳에 뛰어난 기술로 세워진 건축물과 수로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유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카즈네 피라움은 장례사원으로 추정되는 건축물로서 바위산 벽면을 깎아 만들었다. 사원 정면에는 높이 약 30m, 너비 약 25m의 파사드가 있고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다.

 

파사드는 2개의 박공벽, 프리즈, 기둥, 조각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즈네 피라움 오른쪽에는 2세기 초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의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서 약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하였던 규모이다. 극장 왼쪽에는 로마시대의 시가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열주대로가 뻗어 있고 왕궁·신전·공공욕장 등의 유적이 있다.

 

암벽들 사이에는 부조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모습이 사각형이면 나바테아인의 주신인 남신 ‘두샤라(돌 속에 숨은 신이란 뜻)’와 긴 모양의 여신 "알 우짜"를 의미하고, 오벨리스크 모양이면 죽은 이들을 추도하는 기념비를 가리킨다.

 

열주대로의 서쪽 왼쪽에 카스르 엘 빈트 신전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나바테아 만신전의 최고 神 두샤라를 상징하는 표석(神石)을 모시는 신전이다. 본전은 높이 23m로서 열주랑·전실(前室), 지성소로 이루어져 있고 신전 앞뜰에는 야외제단이 치되어  있다.

 

도시의 서쪽 끝에는 장례사원인 앗데이르 유적이 있다. 이 신전에서 좀더 가면 바위 언덕 위에 작은 박물관이 있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인물 부조와조각 등 소품들밖에 별 볼거리가 없다. 198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페트라의 역사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이다.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후 106년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테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룩하였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고이곳 이름을 '하드리안의 페트라' 라 불렀다.

 

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후기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트랜스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 도시로 자리하게 된다.

 

기원후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되었고, 언제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기원후 6세기에 있었던큰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이곳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이곳이 발굴되기시작한 것은 1880년대이다.

 

◆페트라 발굴

 

1812년 젊은 유럽 탐험가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그의 행로중 이곳에 엄청난 유적들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한 부르크하르트가 우여곡절 끝에 페트라를 찾아내었고, 그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유럽인들은 비로소 페트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 연구소의 도미니칸 수도사가 발굴을 시작하면서 1896년에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 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다른이들에 의해 로마시대의 나바테안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은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이루어 졌고, 그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성 입구의 문을 비롯해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나바테안들은 불후의 문명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널리 사용되던 아람(Aramaic)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지금까지 약 4천점에 달하는 나바테안들의 문자 기록이 수집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어서 그들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은 거의 없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나바테안들이 문자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학, 사상과 종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고대 문명이 앉고 있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바테안들은 돌을 깎아 웅장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이곳 페트라에는 암벽을 깎아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암벽 도시의 유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의 경관은 아주 대단하다.

 

이곳에 나타나는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안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건축양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거칠고 투박한 석공의 손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의 문양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었고, 토기의 두께는 2㎜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해 '계란껍질 토기(egg-shell pottery)' 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페트라 유적지 관광

1 Djin Blocks 10 Corinthian Tomb 19 Qasr Al-Bint 28 High Palace of Sacrifice

2 Obelisk Tomb 11 Palace Tomb 20 Unfinished Tomb 29 Lion Monument

3 Al-Siq 12 Sextus Florentinus Tomb 21 Al-Habees Museum 30 Garden Temple Complex

4 The Treasury 13 House of Dorotheos 22 Petra Archeological Museum 31 Triclinium

5 Street of Facades 14 The Nymphaeum 23 Lion Triclinium 32 Renaissance Tomb

6 The Theater 15 Colonnaded Street 24 Al-Deir 33 Broken Pediment Tomb

7 Aneisho Tomb 16 Byzantine Church 25 Turkmanian Tomb 34 Roman Soldier Tomb

8 Urn Tomb 17 Winged Lion Temple 26 Conway Tower 35 Snake Monument

9 Silk Tomb 18 The Arched Gate 27 Moghar Annassara 36 Crusader Fort

 

▲페트라 입구에서 알-카즈네까지 (지도상의 연두색 표시 1~4번 길)

 

▲페트라 입구에서 알-카즈네까지 

 

▲페트라 유적지 입구 매표소

 

▲입구 승마장, 알카즈네까지 마차가 운행된다(약20불), 협곡 입구까지는 말로 이동할 수있다(무료, 팁 정도)

 

▲유적지 내부 시작

 

▲오벨리스크 무덤(위)과 트리클리니움 무덤(아래)

 

윗층이 오벨리스크 무덤(이집트)이다. 4개의 피라밋 형태는 4 사람의 무덤을 말한다. 아래층은 로마의 ㄷ자 식탁과 비슷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어 트리클리니움 무덤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두 무덤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아래층의 무덤이 시기적으로 훨씬 오래된 것이다

 

▲오벨리스크 무덤과 트리클리니움 무덤

 

▲오벨리스크 무덤과 트리클리니움 무덤

 

▲유적지 내부 협곡(시크) 입구

 

▲유적지 협곡(시크) 시작점

 

▲유적지 협곡(시크) 시작

 

▲유적지 협곡(시크) 시작, 알카즈네까지 약 2km

 

▲유적지 협곡(시크)

 

▲유적지 협곡(시크)

 

▲유적지 협곡(시크)

 

▲유적지 협곡(시크)

 

▲유적지 협곡(시크)

 

▲코끼리 바위

 

▲코끼리상 뒷 부분  

 

▲수로, 입구 부터 계속 연결되어 있다.

 

▲페트라의 수로 시스템

 

강수량이 부족하고 물이 없는 페트라가 물 공급을 받을 수 있었던 페트라 도시의 수로 시스템,

인근 1.5km 되는 모세의 샘(와디무사)을 비롯한 샘에서 수로를 연결하여 물 공급을 받았다.

 

▲페트라의 바위신- 두샤라(남신)과 알우짜(여신)

 

▲주신 두샤라

 

혐곡으로 가는 길 암벽위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 그 모습이 사각형이면 나바테아인의 주신인 남신

‘두샤라(돌 속에 숨은 신이란 뜻)이고 둥근 형태는 여신 알우짜이다. 나바테아인들이 페트라 암벽 협곡에

도시를 세우고 바위속에서 생활하며 장사지내는 모든 것은 바로 그들이 섬기던 바위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신 두샤라

 

▲주신 두샤라

 

▲여신 알우짜

 

▲여신 알우짜

 

▲나바테아 여신 (바위의 여신) 알 우짜

 

나바테아인들이 페트라 암벽 협곡에 도시를 세우고 바위속에서 생활하며 장사지내는

모든 것은 바로 그들이 섬기던 바위여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크 협곡에서 본 알 카즈네

 

높은 암석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균열 부분을 따라 2km 정도를 걸어 들어가면 이 암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크(Siq)' 라고 부른다.

 

▲시크 협곡에서 본 알 카즈네

 

▲시크 협곡에서 본 알 카즈네

 

▲알- 카즈네(보물창고)

 

페트라의 유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전면에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서있는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 정면에는 높이 약 30m, 너비 약 25m의 파사드가 있고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다.

 

파사드는 2개의 박공벽, 프리즈, 기둥, 조각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 출입구 좌우의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고,

2층에 장식된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여인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다.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보고라는 이름이 생겼다

 

▲알카즈네(보물) 신전 위쪽의 보물항아리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의 조각물로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알카즈네(보고)라는 이름이 생겼다

 

▲알카즈네 신전 중앙의 이집트 이시스 여신상

 

이시스는 죽은 자들에게 대하듯 남편 오시리스를 그 날개가 붙은 손으로 어루만져 떠받들고 있거나,

돌로 만든 관 밑에서 울거나, 혹은 항아리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알카즈네 신전 중앙의 이집트 이시스 여신상 

 

▲알카즈네 신전 중앙의 이집트 이시스 여신상

 

▲이시스(Isis, 좌), 호루스(중앙) 오시리스(우)

 

그리스어의 이세트에 해당하는 말로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데메테르, 헤라, 셀레네 등과 동일시되며

후에 이시스와 하토르가 혼동되자 아프로디테와도 동일시되었다.

 

이시스 신앙은 후세에 매우 대중적이 되어 다른 여신들의 자격을 거의 합해 버릴 정도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나일강 델타 지대의 극히 얌전한 여신이었으며 부시리스 북방에 있는 페르 헤베트 의 여주인이었다고 한다.

 

이 패르 헤베트에는 인접한 도시의 자연의 신 오 시리스의 아내로 불렀고, 그와의 사이에서 생긴

호루스와 더불어 오시리스 의 3인조를 구성했다.

 

오시리스의 신화에서 이시스는 매년 나일강의 범람에 의해 기름지게 되는 이집트의 토양을 상징하고 있으며

나일강을 나타내는 오시리스나 기름진 토양인 이시스와는 정반대인 세트는 사막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스 신앙은 점차 널리 퍼져 마침내는 다른 여신에 대한 신앙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 신앙은

이집트 밖으로까지 퍼져 그리스,로마 시대의 상인들처럼, 뱃사람들은 바다의 별이며 항해자의 보호자인

이시스에 대한 숭배를 라인강 연안까지 전파시켰다.

 

나일강 유역에서는 이시스 숭배가 기독교의 전성기까지 계속되었다. 이집트의 최남단에 있는 이시스의 주요한 성소

필라에의 사원이 폐쇄되고 기독교의 교회로 바뀐 것은 6세기 중엽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치하에 까지 와서였다.

 

이시스를 위해 일년에 두 번(봄과 가을) 거행되는 대축전이나 그때 행해진 화려한 행렬 등에 관해서는

이시스교의 비의(秘儀)를 전수받은 아프레이우스가 그것을 전하고 있다.

 

이시스는 흔히 그 이름의 표의문자인 왕좌를 머리에 얹은 여자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훨씬 뒤의 일이지만

때로는 두 개의 깃을 달고 - 달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 쇠뿔 사이에 원반을 얹은 관을 머리에 쓰고 있고,

때로는 인체에 쇠머리를 얹은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뿔이나 동물의 머리는 당시 사람들이 이시스와 하토르를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대체로 이시스는 조각이나 그림에는 오시리스와 함께 표현되어 있다.

 

그녀는 죽은 자들에게 대하듯 오시리스를 그 날개가 붙은 손으로 어루만져 떠받들고 있거나

돌로 만든 관 밑에서 울거나 혹은 항아리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빈번히 볼 수 있는 표현으로 어머니로서 호루스를 키우는 모습과 나중에는 호루스를 데리고

세트와 싸우는 묘사도 있다

 

▲그리스 아테나 여신상(중앙) 

 

▲그리스 아테나 여신상, 전쟁의 신

 

▲아테나 여신

 

그리스 신화 속의 전쟁과 지성(知性)의 여신. 아테네의 수호신이다.

 

제우스와 해신(海神) 오케아노스의 딸 메티스 사이에 태어났으며, 올림포스 12신(神) 가운데 하나이다.

메티스가 임신하였을 때 지신(地神) 가이아가, 메티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제우스의 지위를 빼앗을

것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제우스는 메티스를 삼켜버렸다.

 

그런데 태어날 시기가 되었을 때 심한 두통을 못견딘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일설에는 헤파이스토스)에게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쪼개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대로 머리를 쪼개자 그 속에서 아테나가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함성을 지르면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레스가 남성 전쟁신(戰爭神)인 데 비해 아테나는 전쟁의 여신으로 알려졌다. 이는 여신이 원래 선주민족의

신으로서 아크로폴리스의 성채(城砦)에 모셔진 데서 유래한다. 정복자인 그리스인도 이를 이어받아 아테나이

(아테네)를 대표하여 국가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영웅들을 지키는 여신으로 모셨다.

 

일반적으로 염소의 가죽으로 만들어지고 괴물 고르곤의 목이 한가운데에 달린 신성한 공격용 방패인

아이기스를 든, 무장한 처녀의 모습으로 상징되고 있다. 올빼미가 여신의 상징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도 옛날의 수신(獸神)숭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차(戰車)를 비롯한 많은 무기를 발명한 여신으로 알려졌으나, 한편 여성이 맡은 일의 신으로서 방적(紡績)과

기직(機織)의 신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기(陶器)와 금세공(金細工) 등, 수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가지

기술의 여신으로도 알려졌는데, 마침내는 지력(知力)의 권화(權化)로 보기에 이르렀다.

 

또한 포세이돈과 아티카의 땅을 놓고 싸울 때 포세이돈이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염수(鹽)의 못을 만들어낸 데

비해, 그녀는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에 올리브 나무를 자라게 함으로써 승리하였는데, 그 후로는 그녀를

올리브의 여신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팔라스라고도 불리며, 로마 신화의 미네르바, 이집트 신화의 네이트와 동일시되고 있다

 

▲여신상

 

▲신전 중앙 조각 

 

▲신전 입구

 

▲신전 내부, 장례 사원으로 추정된다

 

▲신전 앞 지하 왕족 무덤

 

2003년 알카즈네 지하에서 새로 발굴된 50대의 왕족 무덤,

알 카즈네가 장례를 위한 신전이었음을 알게하는 증거이다.

 

 ▲페트라 알-카즈네 주변에서 알-다이르 산 초입의 박물관까지

 

▲페트라 알-카즈네 주변에서 알-다이르 산 초입의 박물관까지 (지도의 4~22번 길)

 

▲페트라 알-카즈네 주변에서 알-다이르 산 초입의 박물관까지 (지도의 4~22번 길)

 

▲무역상인 숙소

 

▲로마 원형극장으로 나가는 길

 

▲바로의 궁전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바로의 궁전

 

▲바로의 궁전

 

▲무덤

 

▲로마 원형극장

 

알카즈네를 지나 왼쪽에는 2세기 초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의 원형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서 약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하였던 규모이다.

 

▲로마 원형극장

 

▲로마 원형극장 내부 통로

 

▲로마 원형극장

 

▲로마 원형극장

 

▲왕족, 귀족 무덤 

 

▲왕족, 귀족 무덤

 

▲무덤군

 

▲왕족 무덤 (납골당), 비잔틴 시대 교회 추정

 

단층 지괴의 낮은 부분에 있는 무덤이다. 페트라 건축물의 대부분이 바위를 파서 만든 것으로 그 정교함과 우아함은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특히 누비안(Nubian)의 사암(sandstone)이라는 한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구축한 완벽한 조형과 핑크빛, 계피빛을 띄고 있는 절벽과의 색채조화는 자연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왕족 무덤 (납골당), 비잔틴 시대 교회 추정

  

▲왕족 무덤 (납골당), 비잔틴 시대 교회 추정

 

▲왕족 무덤 (납골당), 비잔틴 시대 교회 추정

 

▲베드윈 상가 

 

▲베드윈 상가 

 

▲베드윈 거주지  

 

▲베드윈 사람들이 윷놀이를 하고 있다.

 

▲희생제단, 열주대로, 수도원 가는 길 

 

▲희생제단, 열주대로, 수도원 가는 길

 

▲페트라 시티 센터 입구 석주 기둥 길

 

A.D 106년 나바테아인들이 만든 도시입구의 길로 석주 기둥 길을 따라 상점과 시장이 형성되었다

 

▲페트라 시티 센터

 

▲크사르 알 빈트

 

열주대로의 서쪽 끝에 있는 신전 크사르 알 빈트는 이 도시의 주신(主神)인 두샤라를 모셨던 곳이다.

본전은 높이 23m로서 열주랑·전실(前室)·지성소로 이루어져 있고 신전 앞뜰에는 야외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도시의 서쪽 끝에는 장례사원인 알-다이르 유적이 있다.

 

▲크사르 알 빈트 신전

 

▲크사르 알 빈트 신전 열주

 

▲크사르 알 빈트 신전 열주

 

▲크사르 알 빈트 신전 열주

 

▲바위신에게 희생제물을 드린 곳

 

▲정상의 희생제단 (하이플레이스), 

나바테아 신에게 양이나 염소 등의 희생제물을 드리던 제단

 

▲정상의 희생제단 (하이플레이스)

 

▲정상의 희생제단 (하이플레이스) 피 모으는 곳

 

▲로마의 페트로 합병, AD106년 로마는 페트라의 수로를 차단함으로써 합병에 성공했고 

이로써 페트라는 상업도시의 기능을 잃고 서서히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