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라크ㅡ십자군 시대에 쌓은 거대한 카락성 (케락성)
▲카락성(케락성 )
카락은 고대 때부터 모압 산지의 방어 요새였던 곳으로, 3면이 깊은 계곡으로 둘러 쌓인 천연의 요새 지역이며, 왕의 대로 상에 위치해 있어 여러 시대에 걸쳐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경에는 '길', '길 모압', 가끔은 '길 헤레스'(Kir heres) 또는 '길 하레셋'(Kir hereseth)으로 언급되며, 한때는 모압 왕국의 수도로 이용되었고 그리스 시대와 로마시대의 도시가 자리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지방 도시로 '카르카모바'(Kharkamoba)라 불리웠으며, 로마와 비잔틴 시기에는 중요한 기독교 지역으로 페트라의 대주교는 이곳에 그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1132년 십자군 시대에 이르러서는 예루살렘 공국을 세운 발드윈 1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이곳으로 진출하려는 모슬렘의 세력을 막기 위해 왕의 대로 상에 있는 아카바, 쇼박과 케락에 요새를 건설하고 케락을 그 중심으로 삼았다. 케락은 쇼박과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성경적으로는 모압의 메사 왕이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죽은 후 해마다 바치던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아합의 아들 여호람 왕이 에돔 왕국과 연합하여 모압을 정벌하게 되는데, 당시에 메사왕은 디본에 그의 수도를 두고 있었으나 여호람의 군대가 승전을 거듭하자, 이곳 케락성, 즉 길 하레셋으로 후퇴하여 이스라엘 연합군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장남을 산 채로 불에 태워 모압족의 신이었던 그모스에게 바쳤던 곳으로, 이로 인해 이스라엘 군대가 퇴각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해발 1050m 정상의 케락성은 옛 요새의 한 부분과 십자군이 그 위에 다시 지은 성채의 유적이 남아 있는데, 십자군 당시에 쌓아두었던 성벽이 복원되어 십자군 시대 요새의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요르단 유적지 약도
▲카락성(Kerak castle)
케락성은 십자군 시대에 쌓은 거대한 석축이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72년까지 일곱 차례 유럽의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이슬람 세계와 벌인 전쟁이다.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성지 회복을 향한 메시지에서 “이것은 거룩한 사업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십자군에 참여한 자는 모든 죄가 용서받을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믿음이 두터운 유럽의 영주들이 군자금을 모으고 가병을 파견 이슬람 세계를 정복해나갔다. 십자군이 주둔하면서 기독교 세력의 확산을 노렸던 지역 중 하나가 요르단 소재 케락성이다.
현재의 케락성은 십자군전쟁이 한창이던 1142년 볼드윈 1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멀리 사해와 요르단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케락성은 지하 5층 규모로 완공에 5년이 걸렸을 정도로 견고하다.
지하엔 물 저장고와 병사들이 거주하던 좁은 방,아치형 복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삼면이 좁고 깊은 협곡에 둘러싸인 해발 1000m의 가파른 산정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난공불락의 요새다.
외부에서 성을 함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케락성에 주둔지를 정한 십자군은 이슬람의 전쟁 영웅인 살라딘의 1년여에 걸친 끈질긴 고사작전에도 잘 버텨냈다.
카락성이 함락될 것 같지 않자 살라딘은 자신의 여동생을 투입했다. 살라딘의 여동생은 마치 거리의 여인처럼 십자군 병사들을 유혹하여 카락성의 비밀통로를 알아내게 된다.
결국 비밀통로가 이슬람에게 넘어가자 1년여를 버티며 항전하던 십자군들도 1189년에 손쉽게 무너져버렸다. 뿐만 아니라 마멜룩 시대의 성채의 유적도 남아 있다.
이곳에 대한 발굴작업은 1964∼66년 에밀리오 올라바리가 이끄는 예루살렘과 스페인센터 회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6개의 고고학층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헬라 도자기들이 많다는 것은 BC 3∼2세기에 새로운 거주지가 있었음이 증명됐다. 특히 성안에는 막사와 감옥이 아직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고지에 위치한 이 성의 가장 큰 문제는 식수였는데 우물은 예부터 성 밖에 있었다. 그래서 성읍 바로 밑에 수로로 추정되는 180m 정도의 터널이 있다. 1924년 발굴을 통해 모압인과 로마시대부터 중세 아랍시대의 도기들이 발견되었다.
▲카락성 옆 마을
▲성체 위에서
▲길하레셋(Kir hereseth)
이스라엘이 에돔과 모압의 국경이 되는 세렛 시내를 건넘으로써 실질적으로 광야 40년의 방랑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가나안 입주를 위해 요르단 고원지대로 난 소위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를 따라 북진해갔다.
이 ‘왕의 대로’는 ‘바닷길’(Via Maris)과 함께 민수기 20장 17절에도 언급되는 성서시대의 가장 중요한 2 개의 고속도로 중 하나이다.
이 ‘왕의 대로’변에는 고원지대에 있는 중요한 성읍들이 자리잡았다. 길하레셋((Kir-Hareseth)은 암만에서 118㎞ 떨어져 있다. 길하레셋은 아르논 남쪽 28.4㎞,사해 동쪽 17.6㎞ 지점에 자리한 고대 모압의 수도로 현재의 케라크(Kerak)이다.
해발 933m 고원에 위치한 이곳은 주변의 언덕과 깊은 계곡들로 인해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이사야의 신탁에서 두번 언급되며(사 16:7·11) 예레미야서에서도 두번 나온다(렘 48:31·36). 이사야 15장 1절에 나오는 길(Kir)도 길하레셋으로 본다.
북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은 공물을 거절하고 배반한 이곳을 치기 위해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연합하여 길하레셋을 공격하여 함락 직전까지 갔다. 이때 모압 왕은 성벽 위에서 자신의 맏아들을 자신들의 신에게 번제물로 드리며 전세를 만회하려 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이스라엘 본국에 큰 사건이 생겨 포위를 풀고 귀국했다
▲길하레셋(Kir hereseth)
▲길하레셋(Kir hereseth)
▲카락성 입구
▲카락성 안내판
▲성체 밖 포
▲성체 입구 안 공성전 때 사용하던 돌들
▲성체 내부
▲카락성 안내도
▲카락성 안내도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감옥
▲감옥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체 내부
▲성채 안내판
▲지하통로로 내려가는 길
▲지하 통로
▲지하 통로
▲십자군 병사 숙소
▲박물관 내려 가는 길
▲박물관 앞 광장
▲카락성 박물관, 요르단과 일본의 합작
성 안에는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 마련되어 있어 메사 석비의 사본과 소알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등,
적지만 귀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메사왕 석비
이곳은 사사시대와 왕조시대에도 이스라엘이 통치하였다. 그러나 모압 메사의 성공적인 군사원정의 결과(BC 850년경)로 이곳은 모압 왕국에 병합되었다.
메사 비문에 따르면 메사 왕은 아르논에 대로를 만들고 아로엘을 건설하였다. 그후 이곳은 아시리아의 확장기 동안 다메섹이 몰락할 때까지 시리아의 소유지로 남아 있었다(BC 732년)
▲공성기 돌포탄
▲공성기 모형
▲공성기 모형
▲어느시대 것인지는 불명하나 유해발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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