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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국가들/⊙오스트리아*기행

오스트리아ㅡ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트리아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by 삼수갑산 2022. 3. 20.

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트리아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궁전을 넵튠 분수 뒤편에서 조망한 모습.

마리아 테레지아는 중국풍·일본풍·인도풍으로 다양하게 방을 꾸밀 정도로 쇤브룬에 애정을 쏟았다.

 

마리아 테레지아 때문이다. 이곳은 군주로서,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치열했던 그녀의 인생을 오롯이 담고 있다.그녀는 171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首長)인 카를 6세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름다운 소녀였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

 

문제는 그녀에게 남자형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스릴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1740년 카를 6세가 죽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조의 모든 것을 상속받았다. 여자 상속자는 가문이 빈에 자리를 잡은 13세기부터 4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帝國을 상속받다

'처음'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카를 6세도 이에 대비해 자신의 딸이 제국 상속을 가능하도록 명시한 '국본조칙'을 유럽 각국으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국가를 지키는 건 상대방의 선의도, 외교적 수사로 포장된 문서도 아니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힘뿐이었다.

 

카를 6세는 어리석게도 그걸 몰랐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을 침공했다.프로이센의 청년왕은 "슐레지엔만 넘겨주면 다른 적들로부터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슐레지엔을 양보하면 프리드리히 2세는 더 많은 것을 원할 것이며, 합스부르크의 약세를 눈치 챈 프랑스와 바이에른 등 다른 열강들도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것이란 사실을. 그녀는 정치와 군사를 몰랐지만, 과감하게 타협을 거부했다. 전쟁을 선택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패전(敗戰)의 연속이었다.

100년 넘게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자원이 고갈됐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물려받은 오래된 거대 제국이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남편도, 신하들도 협상을 주장했다. 그녀는 분노했다. "돈도, 신용도, 군대도, 경험도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는 적절한 조언조차 구할 수 없었다."(마리아 테레지아의 회고)안으로는 패배주의가 만연하고, 밖으로는 사방에서 적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강철 같은 의지와 탁월한 전략으로 적에 맞섰다. 슐레지엔을 되찾을 수는 없었지만 나머지 제국을 지켜내는데는 성공했다.

◇나라를 위해 딸을 시집보내다

 

기후이상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서울의 사우나 폭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의 여름도 과거보다는 훨씬 더워졌다. 에어컨이 없어도 충분했던 빈의 여름나기가 힘들어졌다. 다행히 이 도시는 습하지 않고 바람도 시원해 그늘에만 들어가면 숨이 트인다. 전체 시(市)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 녹지 덕분일 수도 있다.

빈 여행의 핵심인 링슈트라세(환상도로)는 더 시원하다. 옛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만들어진 환상도로를 따라 가로수가 심어져 있다.그렇게 이어진 나무 그늘을 따라서 돌면 한낮 땡볕 아래에서도 쾌적하게 도심을 둘러볼 수 있다.

 

예외는 링슈트라세의 중심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이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을 감상하려면 나무 그늘을 벗어나야 한다.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단순한 동상이 아니라 한 시대를 상징하는 장중한 기념물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중후반 합스부르크 제국과 유럽을 움직였던 수많은 사람이 기마상으로, 입상으로, 부조(浮彫)로자신을 뽐내고 있다. 어린 모차르트도 보인다. 그리고 그 모두의 위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가 군림하고 있다.

 

고요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그녀에겐 어머니의 인자함이 묻어난다. 실제로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링슈트라세는 1850~1890년대에 개발됐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당연히 왕조가 배출한 군주들의 동상을 여기저기 세울 만했다.

 

그런데 그녀 한 명뿐이다. 모든 남자 황제의 동상은 궁전 뜰에 있거나, 뒷골목에 있거나, 공원 한구석에 있다. 그마저 남기지 못한 황제도 많다.마리아 테레지아만이 링슈트라세의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다. 그녀를 중심으로 영웅광장, 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뮤지엄 콰르테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이 광장 앞에는 대형버스들이 끊임없이 멈춰 서고 수많은 여행객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빈을 만끽하기 전에 예외 없이 그녀 앞으로 걸어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왜? 그녀가 마리아 테레지아이기 때문이다.

◇鐵의 여인, 美의 궁전을 짓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긴 가장 유명한 건축 유산은 쇤브룬 궁전이다. 궁전은 빈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만큼 거대하지는 않지만 단아하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를 상징하는 노란색의 궁전 외관이 초록 숲, 만발한 꽃의 정원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로코코 양식의 궁전 내부는 화려함의 절정이다. 그러나 쇤브룬 궁전이 유명한 건 우아한 외관도, 화려한 내부도, 아름다운 정원 때문도 아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위키피디아

 

제국의 해체는 막아냈지만 한때 온 유럽을 호령하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체면은 엉망이 됐다. 오랜 세월 신하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순순히 슐레지엔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힘으로 빼앗긴 땅을 힘으로 되찾아올 속셈이었다. 복수전은 재상 카우니츠(Kaunitz)와 장군 다운(Daun)에게 맡겨졌다.

 

카우니츠는 300년 가까이 합스부르크의 주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제안했다.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남편을 비롯한 각료 대부분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동맹의 가치를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었다.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적(敵)은 더 이상 프랑스가 아니었다. 적은 바로 슐레지엔을 강탈해 간 프로이센이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을 꺾으려면 반드시 프랑스의 힘이 필요했다.

 

자존심 대신 생존을 선택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1756년 카우니츠를 내세워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이어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시작한 복수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적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너무 뛰어났던 탓이다. 프리드리히 2세를죽음 직전까지 밀어붙였지만 승리까지 따낼 수는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패배를 인정하고 내정 개혁에 몰두했다. 그녀의 치세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늘날 동유럽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영토에 더 깊이 뿌리내렸고, 영토를 굳게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 마리 앙투와네트를 프랑스 왕위 계승권자인 루이에게 시집보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15세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의도대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프랑스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죽을 비참한 운명의 길을 가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보다 먼저세상을 떠났다.마리아 테레지아는 쇤브룬을 사랑했다. 중국풍, 일본풍, 인도풍으로 다양하게 장식된 방들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이 궁에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다.

 

나랏일로 바빴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남편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슈테판 1세와 사랑했고 많은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여자였던 탓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상 그녀만큼 '황제'에 어울렸던 사람은 없었다.

 

그녀만큼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군주도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의 진정한 백미(白眉)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과 쇤브룬 궁전이 그러하듯이.

 

▶마리아 테레지아 자녀 16명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등 대부분 佛 부르봉家와 결혼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제국의 주인인 동시에 아내였고 엄마였다.그녀는 프랑스와 독일 접경지대인 로트링겐이란 작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공작령(領)의 상속자인 슈테판과 결혼했다. 정략결혼이었으나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고, 부부 사이도 아주 좋았다.

 

1737년 첫딸을 시작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16명의 아이를 낳은게 이를 보여 준다 그녀는 재위 초반  16년 동안 전쟁과 국사(國事), 임신과 출산을 병행하다시피 했다. 국익을 위해 자녀 대부분을 프랑스 왕실인 부르봉(Bourbon) 가문 출신과 결혼시켰다.

※그녀의 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막내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로 있다가 혁명 때 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출처 / chosun.com / 송동훈 문명 탐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