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Pamplona)ㅡ헤밍웨이가 사랑한 투우 축제의 도시
산티아고 순례길. 이들이 산티아고를 걷는 이유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걷기에 집중하다보면 살아왔던 많은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홀로 걷다보면 내면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아주 사소한 일까지 떠올라 순례하는 동안에는 자기성찰의 시간이 많아진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동행에서 세계 어느 길에서도 느낄 수 없는 따스한 마음을 나눌 수 있다. 또한 순례길 걷는 도중 방문하는 도시에서 아주 특별한 문화를 체험하고 알게 된다. 한마디로 길 위의 인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본출처 / graphicmaps.com
▲매년 7월 6일 산 페르민 축제가 펼쳐지는 팜플로나의 투우장 Plaza de Toros.
◆투우의 도시, 팜플로나
숲과 들을 지나니 중세풍의 느낌이 물씬 나는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도 참 멋지다.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벽 안에는 도시가 숨어 있다. 마치 보물섬 같다. 이곳이 산 페르민 축제로 유명한 팜플로나(Pamplona). 옛 나바라 왕국의 수도이고 현 나바라주의 주도이다.
매년 7월 6일 열리는 산 페르민 축제는 헤밍웨이가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소개해 세계적인 축제로 더욱 유명해졌다. 헤밍웨이가 스페인을 방문한 횟수가 18번인데 그중 9번은 산 페르민 축제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의 산 페르민 축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이다. “투우는 예술가가 죽음의 위험에 처하는 유일한 예술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대표적인 행사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추피나소(Chupinazo), 거인 행렬(Gigantes y Cabezudos), 리아우 리아우(Riau-Riau), 소몰이(Encierro)와 포브레 데 미(Pobre de mí). 가장 인기 있는 행사는 소몰이이다. 소몰이는 축제 기간 중 매일 아침 8시마다 여섯 마리의 소들을 가둔 우리의 문이 열리고 거리로 내몰리며 시작된다.
로차피아 람파르트라고 하는 옛 요새 유적에서 투우장까지 약 875m 거리를 무게 600kg이나 나가는 소들이 평균 시속 25km로 참가자들과 함께 도시 중심을 질주한다. 용기의 시험장이기도 한 소몰이 행사는 숨이 막힐 듯 긴장감을 즐기면서 참가자들뿐 아니라 구경꾼들도 흥분하게 된다.
▲팜플로나의 젊은이들이 도심 거리를 가득 채우고 ‘1유로의 행복’을 즐기고 있다.
산 페르민 축제 기간은 아니지만 팜플로나의 투우장(Plaza de Toros)으로 향한다. 2만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는 투우장을 구경하고 산 페르민 축제 영상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를 흥분하게 하는 붉은 스카프를 매고 환호성을 지르며, 소떼들과 함께 도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투우장까지 내달리는 모습은 영상 속에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실감난다. 많은 사람들이 다치기도 하지만 어김없이 7월이면 이곳 사람들은 이 축제를 즐기며 살아간다.
영상 관람 후에 투우장으로 들어서니 관광객들이 투우 흉내를 내며 놀고 있다.
광장에 있는 테라스 바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모두 숙소로 돌아가고 나는 혼자만의 골목길 여행을 떠난다. 고풍스런 유럽풍의 도시, 팜플로나는 일몰과 함께 황금색 노을빛으로 물들어간다. 종일 걸었어도 도시를 걷는 것이 마냥 즐겁다.
저녁 8시가 넘으니 식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한다. 굳게 닫힌 셔터. 삭막한 모습일 줄 알았는데 웬걸? 셔터에 그려진 그림들이 너무 재미있다.
다양한 모습으로 화려한 색을 입고 있어서 마치 벽화 같다. 그림을 구경하며 골목을 여행하는데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길에 앉는다. 그 숫자가 늘어나더니 시내 중심가는 온통 축제라도 즐기는 분위기로 바뀐다.
▲팜플로나시가 헤밍웨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건립한 헤밍웨이 동상.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음료(커피 또는 맥주)와 핀초스를 1유로에 주는 날이란다. 사실 1유로였는지 2유로였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다. 나는 감히 ‘1유로의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팜플로나의 거의 대부분 바르bar에서 이용이 가능하다.
많은 젊은이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항상 유쾌하고 긍정적인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이 드러나는 단면이기도 하다. 나도 그들과 함께 길에 앉아서 ‘1유로의 행복’에 빠진다. 길을 걸으며 우연찮게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이런 시간들은 산티아고를 걷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용서의 언덕, 엘 페르돈
팜플로나 시내 끝자락에 오늘 걸을 코스의 고도표시가 되어 있다. 조금 가파른 오르막. 프랑스 길에서 제일 험한 코스는 피레네산맥 통과하기. 그리고 두 번째가 팜플로나에서 엘 페르돈으로 가는 코스이다. 페르돈은 스페인어로 ‘용서(자비)’를 뜻한다. 8km 정도 계속되는 오르막이 부담스러워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는 순례객이 많다.
도시를 벗어나 외곽으로 나오니 며칠 전에 보았던 다리가 불편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불편한 다리를 보조해 주기 위해 양쪽에 특별히 맞춰진 스틱을 사용해 걷고 있다.
본인의 짐은 동키 서비스로 보내지만 거의 900km에 가까운 거리를 불편한 다리로 홀로 걷고 있는 그녀를 보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그녀뿐 아니라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도전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
엘 페르돈 언덕으로 가는 길은 온통 밀밭이다. 들녘으로 들어서니 양귀비가 바람에 너풀거린다. 밀밭에 양귀비 꽃밭.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과 양귀비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은 벌써 황금빛을 띠기 시작한다. 그 밀밭 한가운데에는 아주 오래된 성이 우뚝 서 있다. 밀레가 그린 한 폭의 풍경화 같다.
노란 유채 꽃밭이 펼쳐지고 작은 마을 사리키에기Zariquiegui 를 통과했다. 마을을 지나도 유채 밭은 계속되고 산등성이에는 풍력발전기가 윙윙 돌아간다. 이제부터 오르막이 계속된다,
한낮의 태양은 이글거리고 이마를 타고 내리는 땀방울이 뜨겁다. 알알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끼며 오롯이 두 발에 의지하며 걷노라니 호흡이 거칠어진다.
▲용서의 언덕, 엘 페르돈에 있는 순례를 주제로 만든 설치작품.
용서의 언덕이란 이름이 주는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문득 ‘누구를 용서할 일이 있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나 자신은 누구에게 용서받을 일은 없는지?’ 나를 성찰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런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다.
언덕을 오르다가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가 걸어온 길이 펼쳐 있다.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데 겨우 오늘 아침부터 걸었던 길이다. 마지막 급경사에서는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고 땀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근육과 내장까지도 움직임이 느껴진다.
걷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피부를 간질이는 바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풀 향기가 그렇게 감미로운지, 새소리가 저렇게 청아한지 온몸의 감각기관이 반응한다. 이런 생명력이 내 안에 약동하고 있다니 그저 놀랍다. 걷는 동안 일어나는 몸의 변화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다.
790m 높이의 엘 페르돈. 세찬 바람 속에 순례를 주제로 만든 설치 작품이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사방이 탁 트인 꼭대기에서 내가 걸어온 밀밭의 전경을 마주하는 순간엔 기나긴 언덕길도 편안하게 보인다. 엘 페르돈에 오른 모든 순례객들은 엄청난 바람을 맞으면서도 마치 순례길을 완주한 것처럼 행복한 모습이다.
정상 바로 옆 스페인 각 지역에서 온 돌들을 전시한 작은 공원을 지나고 나니 이젠 급경사의 내리막길. 일부러 자갈을 쏟아 부은 것 같다. 작은 자갈길이어서 무척이나 미끄럽다. 조심하지 않으면 정말 큰 사고가 일어나기 쉽다. 내 뒤에서 걸으시는 한국인 어르신이 미끄러지셨다.
아무 일 없는 듯 일어나시긴 했지만 오늘 저녁 몸 어딘가는 불편하실 것 같다. 그 지겹고 긴 자갈길이 끝나니 다시 밀밭 평원이 펼쳐진다. 밀밭을 바라보니 언제 자갈길을 걸었냐는 듯이 마음이 평온해진다. 밀밭 사이로 양귀비 꽃밭이 인사를 건넨다. 걷는 발걸음이 사뭇 가볍다.
◆전형적인 스페인 마을, 마네루
밀밭이 끝나고 우테르가Uterga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니 마치 아침에 출발하는 것처럼 몸이 가볍다. 특히 장거리를 걸을 때는 자주 쉬며 에너지도 충전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걷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정오가 되니 볕이 정말 따갑다. 어제부터 점점 날씨가 더워지고 있다. 추운 날씨에 걷는 것도 쉽진 않지만 더울 때는 갈증도 많이 나고 빨리 지친다. 그리 편한 길은 아니지만 길가에 만발한 꽃들에게 위로를 받는다.
오바노스Obanos에 도착. 지금까지 21.7km를 걸었지만 아직 10km 정도 남아 있다. 마을 입구 길바닥에 만들어 놓은 가리비가 길을 안내한다. 이 마을의 성당은 조금 특이하다. 성당 앞에 있는 나무조각상, 예수님 십자가 등이 상당히 해학적이다. 한국적 정서가 많이 느껴진다.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yna(여왕의 다리)에 도착. 여왕의 다리는 여왕이 순례자들을 위해 다리를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물에 비친 아름다운 반영을 바라보며 순례자들이 쉬어가는 모습, 다리 건너편의 전형적인 유럽 마을이 어우러지니 한 장의 그림엽서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런 멋진 모습을 한 장의 사진으로 담고 싶어서 조금 멀리 이동하니 강에 투영된 다리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선다. 사람도 관계도 적당한 거리가 중요함을 느낀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마네루Maneru에 무사히 도착. 한 바퀴 도는 데 30분이면 충분한 아주 조그마한 마을이다. 저녁식사 후 마을 구경을 나선다. 집집마다 대문의 모양이 모두 다르다. 어느 집 대문에 달려 있는 손잡이가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진 찍고 한 번 잡아보고 두들겨보고 그 집의 주인장을 만나보고 싶은 유혹까지 느낀다. 집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접하는 대문. 가장 먼저 만지게 되는 손잡이에 주인장이 쏟은 정성이 감탄스럽다.
이번엔 창틀로 눈길이 옮겨진다. 건물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창틀이 놓여 있다. 대문들 위에는 그 집 가문의 문양들이 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듯하다. 대문과 대문의 손잡이, 창틀이 같은 집이 하나도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겐 참으로 소중한 외국인 친구들을 만들어 주었고, 배려하면서 함께하는 여행을 알게 해준 길이다. 산티아고 북쪽길을 걸었을 때는 바르셀로나에서 온 7명의 친구들과 12일을, 3년 후에는 다시 포르투갈길에서 그들과 만나 15일을 함께 걸었다. 이번 프랑스길에선 바욘에서 모세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서 첫날부터 함께 15일을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무거운 배낭을 메고 땀을 흘리며 걸으니 서로 마음의 문을 쉽게 열고 공동의식이 생겨서 끈끈한 친구가 된다. 특히 첫날부터 함께 걸었다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친구가 된다.
외국인 친구들을 통해 그들 나라의 문화도 알게 되고, 매일 방문하는 스페인 도시의 문화, 역사, 풍속 등을 접하며, 매일 걷는 동안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성취감뿐 아니라 자신감도 얻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인문학 그 자체이다.
글.사진출처 / san chosun.com /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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