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ㅡ사막에 피어난 꽃, 항구도시 담맘. 후푸프.
▲싸웁을 걸친 한 남성이 후푸프 시장 옆 골목을 걷고 있다
▲이드라의 외관. 5개 돌멩이를 균형감 있게 쌓아 놓은 듯한 모양이다
“여기가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쉽게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우디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위한 곳이에요.” 이드라 담당 디렉터 파트마(Fatmah)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실로 놀라운 진일보다. 문화라고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던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렇게 멋진 복합문화공간이 생겼다는 것 그 자체로 말이다.
‘이드라(Ithra)’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 기업 ‘사우디 아람코(Saudi Aramco)’에서 만든 시설이다. 공식 명칭은 킹 압둘라지즈 세계문화센터(King Abdulaziz Center for World Culture). 지난 2018년 6월에 문을 연 이곳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는 대규모 문화 공간이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불고 있는 문화 개방의 전초 기지인 셈이다.
▲이드라 도서관에서는 누구나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
범상치 않은 이드라의 모습은 최근 가장 뜨거운 건축사무소로 알려진 노르웨이의 스뇌헤타(Snøhetta)의 작품. 파트마는 이드라 외관이 돌멩이 5개가 서로 지지하고 서 있는 모습이라는데, 어쩐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망울이 보이기도 한다.
▲아라비아반도의 다양한 지질학적 측면을 볼 수 있는 자연사 박물관
파트마가 설명을 이어갔다. “약 8만 제곱미터 부지에 이 시설을 조성했어요. 이곳에서 우리는 여러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기획하고, 소개한답니다.사람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창의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어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모습이지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워크숍과 공연, 전시회 등이 이드라 내 여러 시설에서 꾸준히 열린다. 아이디어 랩이나 지식의 탑, 미술관 등으로 대표되는 창의성 넘치는 공간들도 누구나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다. 스미스소니언, 퐁피두센터, LA 카운티 미술관(LACMA),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문화 기관과 협력해 여러 전시와 프로그램을 기획해 선보이기도 한단다.
▲이드라가 소개하는 이슬람 문화는 우리에게 지금껏 생소했던 것들이다
지난 10월에 진행되었던 ‘탄윈(Tanween)’의 경우처럼 매달 다양한 테마의 프로그램이 관람객을 맞이하기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최대 크리에이티비티 축제인 ‘탄윈’에서는 기업, 과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세미나와 전시회가 열렸다.이드라에서 프로그램 기획 분야를 맡고 있는 압둘라(Abdullah Al Rashid)가 옆에서 귀띔했다.
“내년 2월에는 이곳에서 베트남을 테마로 한 문화 프로그램이 열릴 거예요. 그때 다시 방문해 주세요. 기대해도 좋습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문화를 이곳 이드라에서 모두 즐길 수 있게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정말이지 사우디아라비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킹 압둘라지즈 세계문화센터
주소: 8386 Ring Rd, Gharb Al Dhahran, Dhahran 34461
홈페이지: www.ithra.com
운영시간: 월~수·토요일 09:00~21:00, 목요일 09:00~22:00, 금요일 13:00~22:00, 일요일 휴관
입장료: 관람 무료, 프로그램에 따라 유료로 운영될 수 있음
▲사우디아라비아의 문화, 예술의 꽃이 활짝 피고 있다. 그 시작이 이드라다
●빛의 근원을 찾아서
“사우디아라비아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 이드라에 있어요.” 박물관 담당자 라일라(Laila) 가 말했다. “이드라의 전체적인 구조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지하 가장 깊숙한 곳이 우리의 근원을 상징한다면, 꼭대기는 앞으로 만나게 될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죠.” 우선 1층, 현대 예술을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으로 향했다. 시곗바늘을 조금씩 뒤로 돌려 볼 요량이었다.
라일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작가들의 현대 미술 작품부터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유물들, 이슬람 미술품을 차례로 소개했다. 그녀가 가장 추천하는 구역은 자연사 박물관. “아라비아반도는 세계적으로 특수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며 산업과 무역, 문화 교류를 위한 징검다리가 되었죠.
자연이야 말할 것도 없어요. 사막과 오아시스, 산맥과 바다 등 지질학적으로 다양한 모습이 아라비아반도 곳곳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거든요. 이곳에 그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작품 ‘빛의 근원’. 담맘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장소는 이제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
자연사 박물관을 떠나려는 우리에게 라일라가 이야기했다.“아까 말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근원’이 바로 이 통로 끝에 있어요. 찾아보세요!” 자연사 박물관의 출구와 이어지는 나선형의 복도. 그 중심부에 커다란 나무처럼 보이는 작품 하나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물줄기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
청동과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 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이름은 ‘빛의 근원(Source of Light)’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페노네(Giuseppe Penone)가 만들었다. 라일라가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장소예요. 이드라는 이 최초의 유전을 감싸고 있는 거죠.이 작품은 현대 세계 경제의 성장과 발전이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사우디아라비아 예술의 발전 또한 이드라를 근원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해요.”
이드라에서는 탄윈 축제 기간 중 ‘다인 인 더 다크(Dine in the Dark)’라는 팝업 식당을 운영했다. 식당 내부는 시각이 완벽히 차단되는 암흑 세상. 어둠에 익숙한 시각장애인 직원이 손님들을 이끌어 식사를 무사히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방문객에게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공감과 이색적인 경험을 선사하고, 시각장애인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국제적인 프로젝트란다.
방문객들을 차례로 자리에 앉히고 자신을 먼저 소개한 에러딘은 이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서로에게도 인사를 권했다. 국적과 성격이 각기 다른 이들이 모였지만, 에러딘이 맡은 테이블에서는 모든 것이 즐겁기만 했다.
웃고 떠드는 사이 애피타이저 샐러드가 등장했다. 다들 먹는 게 조금 어렵다면서도 곧잘 접시를 비웠다. 메인은 로즈메리에 절인 닭고기와 고수 무스를 얹은 쇠고기 안심구이였는데, 역시 훌륭했다.
1시간 반이 지났다는 사실은 레몬으로 만든 셔벗 디저트까지 깔끔하게 비우고 난 뒤에서야 깨달았다. 유쾌한 에러딘이 우리 모두를 자신의 팬으로 만드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쉽지만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에요. 다들 즐거우셨나요?” 그가 식사의 마지막을 알렸다.
테이블 아래에 고이 보관해 두었던 지팡이를 짚고 일어선 뒤 지시에 따라 오른손을 뻗어 벽을 찾았다. 에러딘을 몇 번이나 더 불러 벽이 느껴지는 방향을 가늠하고서야 비로소 빛을 만났다. 출구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의 식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식료품을 구매하는 현지인. 에누리를 향한 실랑이가 무척 재미있었다
●그저 다를 뿐, 그래도 일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한 늦은 오후. 담맘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후푸프(Hofuf)에서였다. 마치 우리만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았다. 한창 시끌벅적해야 할 시장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고 사람도 쉬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다름 아닌 후푸프는 아라비아반도를 지나 대륙 쪽으로 이동하던 상인들의 근거지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시장의 적막함이 더 어색했다. “살라트(Salah) 시간이에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우리에게 길가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해답을 내놓았다. ‘살라트’는 아랍어로 예배를 뜻했다. 하루 다섯 번 있는 이슬람의 살라트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평범한 일상인 것이다.
▲후푸프 지역의 시장은 오래전부터 아라비아반도를 지나는 상인들의 거점이기도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어디선가 사람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캐비닛에 넣어 두었던 물건을 조심스레 꺼내 선반 위에 올리더니, 가게 문을 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 그렇게 해 왔다는 듯이. 손님들도 등장했다. 향신료를 하나하나 살피는 이들과 식료품을 구매하려는 이들로 시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기도가 끝나고 다시 문을 여는 시장의 모습
한쪽 골목을 따라 들어섰다. 이슬람의 전통 복장인 아바야(Abaya, 여성용)와 싸웁(Thawb, 남성용)을 파는 가게들이 좌우로 길게 자리하고 있었다.낯선 이방인을 바라보던 특유의 시선도 잠시, 상점 주인장들은 우리 일행을 향해 인사를 건네 왔다. 일행 중 몇 명이 싸웁을 입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바로 뒤쪽에 있던 상점 주인이 손짓했다.
자기 매장에서 마음껏 입어 보란다. 싸웁에 관해 하나씩 설명해 주며 차근차근 옷을 입혀 주더니, 급기야 머리에 쉬마그를 둘러 주기까지 했다.영락없는 현지인의 모습이 된 이탈리아인 일행. 우리는 물론, 시장을 오가다 지켜보던 다른 이들까지도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런 유지의 초대
반나절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후푸프를 떠나 다시 담맘으로 향하려던 찰나, 한 지역 유지가 우리 일행 모두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오전에 경마용 말을 육성하는 업체의 초대를 받아 한바탕 대접을 받고 난 터.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행을 태운 차량이 방향을 돌려 생소한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한 저택이다.으리으리한 궁궐은 아니었지만, 분명 범상치는 않았다.
▲아랍과 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찰칵
우리를 초대한 호스트는 아랍 지역 미디어의 이사회 의장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점차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자리를 준비했다며, 편안하게 식사를 즐기란다. 넓은 응접실에 앉아 아랍인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 ‘까흐와(Qahwa)’를 받아 마셨다.
잔이 비어 있는 것 같으면, 어느새 한 잔 더, 또 한 잔 더. 사우디아라비아에 간다면, 모든 집에서 마실 것만 같았던 바로 그 커피였다.테이블 위에는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대추야자가 놓여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에서 귀한 손님을 초대할 때 내놓는다는 캅사(Kabsa)가 이날의 메인 요리. 이미 새끼 양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올려 낸 캅사가 긴 테이블 위에 일정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이렇게나 넓은 테이블이 북적일 정도로 수많은 요리들이 속속 올랐다. 엉겁결에 호스트 가족 사이에 앉았더니, 호스트는 꼭 할아버지가 손자 다루듯 음식을 하나씩 내 접시에 올려 주기까지 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웠던 이날의 양고기는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법한 맛이었다. 갑작스러운 저녁 초대 탓에 숙소에 돌아가는 시각이 꽤 늦어지고야 말았지만, 어쩌랴. 결국은 이들의 환대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을.
▲킹 압둘라지즈 세계문화센터
▶travel info
AIRLINE
대한항공, 에미레이트항공, 에티하드항공 등이 1회 경유를 거쳐 사우디아라비아 담맘 킹파드국제공항까지 주 7회 운항편을 제공한다. 대한항공과 에미레이트항공은 두바이에서, 에티하드항공은 아부다비에서 환승한다.
ABOUT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는 리야드(Riyadh). 담맘은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최대 규모의 산업 지역이다. 담맘은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 최초로 석유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이드라(Ithra) 건물 내 중심부에서 그 장소를 찾아볼 수 있다.
CLIMATE & TIME= 연평균 섭씨 32~34도의 고온 건조한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지역별로 다소 차이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한국 사이에 6시간의 시차가 있다.
CURRENCY= 사우디아라비아는 고정 환율 제도를 채택한 국가다. 1USD당 3.75리얄(SAR)을 적용한다. 한국은 변동 환율로 인해 원-달러 환율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한화로 계산하자면, 현재 1리얄당 300원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VISA= 사우디아라비아가 2019년 9월28일부터 관광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한국 등 49개 국적자에 한해 사우디아라비아 비자 발급 사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현지 공항 내 전자 키오스크를 통해 관광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90일간 체류할 수 있으며 복수 방문도 가능하다. 비용은 440SAR, 한화로 약 13만원대(부가가치세 별도). visitsaudi.com
아랍 문화권 중에서도 보수적인 편인 것으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 조금씩 문을 열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몇 가지 예절을 미리 숙지하고 가는 편이 좋다. 먼저 의상이다. 욕설이 쓰여 있는 옷은 현지인들에게 눈총을 받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얼마 전까지는 외국인 여성도 전통 의상 아바야를 착용해야 했지만, 최근 그 기준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지역마다 아직 그 기준이 정확히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여전히 여성은 어깨와 무릎은 가려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긴 소매 옷과 긴 바지를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공개적으로 과한 애정 표현은 삼갈 것. 주류 판매와 구매, 소비가 모두 불법이며 반입도 금지다.
담맘은 사우디 동부의 중심이자, 원유를 생산하는 유전의 중심지며 수출입을 담당하는 항구 도시, 산업 도시이기까지 하다. 덕분에 관광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호텔은 꽤 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이었다. 코바르 지역에 있는 크라운 플라자 호텔(Crown Plaza Hotel)은 담맘의 주요 지역으로도, 옆 나라 바레인까지 갈 수도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깔끔한 시설과 친절한 서비스는 덤이다.
▲대추야자
▲후푸프 AL HOFUF
담맘 지역은 산업 중심의 도시인 탓에 볼거리가 많지는 않다. 담맘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후푸프를 함께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중심으로 펼쳐진 알 아사 지방은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대부분 지역에 물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오아시스가 있는 곳으로 이를 바탕으로 엄청난 양의 대추야자를 생산해 내는 곳이기도 하다. 예부터 대상이 근거지로 둘 정도로 아라비아반도 내에서는 꽤 깊은 역사를 자랑하기도 하니, 관심이 있다면 찾아가 볼 것.
후푸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생기기 전부터 아라비아반도를 지나는 상인들의 거점인 장소였다. 근처에 오아시스가 있어 쉬어 가기 좋았던 셈.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였고, 시장과 숙소가 생겨났다. 알쿳 헤리티지 호텔은 그중에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텔이다. 약 2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에서는 당시 아랍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객실과 식당이 여전히 손님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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