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욕(NewYork)
고약했던 첫인상...거부할 수 없는 매력...조울증 같은 감정
...일부가 되고 싶은 욕망
▲자유의 여신상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 마천루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보면 욕망과 좌절, 낭만과 고독 같은 것들이
모두 떠오른다. 저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뉴욕은 노래 때문인지 꼭 두 번 말한다. ‘뉴욕, 뉴욕.’ 뉴욕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에 반복해 불렀을 것이다. 우리는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라며 서울을 세 번 불렀다. 뉴욕, 뉴욕에 대한 내 해석은 이렇다.
첫 번째 뉴욕은 상상했던 뉴욕이고, 두 번째 뉴욕은 현실의 뉴욕이다. 뉴욕은 기대와는 달라 실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세 번 부르길 바란다. ‘뉴욕, 뉴욕, 뉴욕.’ 마지막 뉴욕은 내가 서서히 스며드는 뉴욕이다.
▶그 도시에 스며들기까지
첫인상은 그 어떤 도시보다 고약했다. 100년 전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뉴욕 항구에 닿았던 이민자처럼 나 역시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뉴욕에 도착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갱들이 들끓던 1970년대 뉴욕만큼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어수선했다. 지하철엔 쓰레기가 나뒹굴었고 쥐의 흔적이 분비물로 남아 있었으며 사람들은 먹다 만 맥도널드 봉지를 아무 데나 던졌다.
2만원이나 하는 햄버거 세트를 먹고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식당에서는 별 서비스를 받지 못했는데 매번 20%에 가까운 팁을 내야만 했다.
기금이나 본인 홍보 등의 목적으로 지하철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구석자리에 노숙자는 누워서 깊은 잠을 잤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아 흔한 일인 듯했다.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는 뉴요커 사이에서 나 같은 여행자만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뉴욕엔 암스테르담만큼이나 튤립이 흔하다. 공원에도 가로수 아래에도 레스토랑의 화병에도 튤립이 있었다. 뉴욕의 첫 이름은 뉴암스테르담이다.
네덜란드인은 17세기 초 원주민으로부터 26달러 상당의 물품을 주고 맨해튼을 사들였고 뉴암스테르담으로 이름지었다.
166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후 영국왕 찰스 2세의 동생 요크 공작(Duke of York)의 이름을 따 뉴욕(New York)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뉴암스테르담은 맨해튼 섬의 남쪽 끝부분이었다. 사람들은 가축을 기르고 항구를 통해 무역을 했으며 경계가 되는 북쪽에 벽(wall)을 쌓아 원주민들의 침입을 막았는데 이 경계가 바로 월스트리트다. 과거의 벽은 허물어졌고 지금은 초고층 빌딩들이 월가와 다른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고층빌딩 국립공원’의 풍경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뉴욕 증권거래소 앞엔 ‘두려움 없는 소녀상(Fearless Girl)’이 서 있다. 2017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월가의 상징인 황소상(Charging Bull) 앞에 세워졌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백인 남성(황소)으로 대표되는 월스트리트의 성차별과 인종차별에 항의하기 위한 의미가 있다. 황소상에는 수많은 중국인들이 줄까지 서가며 황소의 고환을 주무르며 부자 되기를 빌고있었는데 소녀상 앞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씁쓸했다.
1920년대 이른바 재즈 시대(Jazz age) 흔적은 뉴욕 곳곳에 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이때 지어졌으며 이후 수많은 고층빌딩이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바꿨다.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뉴욕을 보고 ‘고층건물 국립공원(Skyscraper national park)’이라고 표현했다.
주가지수가 돌아가는 월스트리트나 광고판이 어지러운 타임스스퀘어에 서 있으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잽싸게 흘러가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지금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재즈 시대 뉴욕의 화려한 삶과 들끓는 욕망을 <위대한 개츠비>에 담았다.
전설의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가 활약한 시대이면서 ‘열심히만 일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이민자들이 뉴욕으로 들이닥친 시대다.
자유의 여신상을, 그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아닌 이민자들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가난했던 뉴욕의시작이 보인다. 뉴욕에서 고독을 느껴야 비로소 즐거움을 알 수 있다던 포크록 가수 한대수의 이야기는 온전히 이방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뉴욕을 사랑하게 된 내 경험과도 맞닿아 있다.
▶욕망의 도시가 걸어온 길을 따라
▲과자공장을 개조해 만든 첼시마켓.
맨해튼 도로에는 늘 수증기가 펄펄 끓어오르고 경적 소리로 가득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풍경이다.
소란 속에서도 정적만이 감도는 곳은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 마련된 9·11 메모리얼이다. 높이 솟아 있던 쌍둥이 빌딩의 자리는 테러로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폭포 조형물이 눈물처럼 쏟아진다.
뉴욕 테러 희생자 3000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청동 난간에는 누군가가 꽃이나 인형, 카드를 꽂아놓았다. 증오와 좌절, 사랑과 그리움이 한데 있었다.
뉴욕은 탄생부터 욕망의 도시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꿈을 이루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짐짝처럼 끼어 앉아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 넘게 걸려 바다를 가로질러 왔다.
그들이 처음 마주한 것이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다. 고단한 항해의 끝, 이민자들에게 횃불을 치켜든 자유의 여신상은 희망이자 해방의 상징이었다.
‘아메리칸드림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민자들의 마음에 횃불이 일었다. 하지만 도착하고 그들은깨달았겠지. 뉴욕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브루클린 브리지를 걸어서 맨해튼과 자유의 여신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원에 앉아 불이 꺼지지 않는 뉴욕을 바라보았다. 브루클린 브리지도, 초고층 빌딩도, 할렘도, 유대인 마을도, 코리아타운에도 이민자의 고단함이 깔려 있었다.
첼시(Chelsea)에서 허드슨 강변으로 이어지는 거리는 내가 꼽는 뉴욕의 1번지다. 맨해튼 서쪽의 첼시와 허드슨 강변은 거의 100년간 공장과 물류창고 같은 산업시설만 즐비한 부둣가였다.
특히 54번 부두는 ‘신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불렸던 타이태닉호가 정박하려던 곳이다. 침몰한 호화 유람선처럼 첼시는 오랫동안 쇠락의 길만 걸었다.
첼시는 과거 도매 정육시장이 활발해 ‘미트패킹 디스트릭트(Meatpacking District)’라고 불렸고, 뉴욕의대표적인 우범지역이었다. 첼시 사거리에 서니 구글 본사의 로고가 눈에 띄었다.
정보기술(IT) 기업이 이 지역에 많다는 사실은첼시의 미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나비스코 과자공장 자리에 들어선 첼시마켓에서 한 알에 3달러나 되는 신선한 굴에 상큼한 피노누아 와인을 곁들였다.
▶“뉴욕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요”
▲브루클린 브리지를 걷는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우산도, 연인도 부러웠던 날.
우리나라야 줄을 서지만 뉴욕에서는 그다지 대단할 것이 없는 블루보틀에서 커피를 한 잔 사들고 하이라인(The High Line)으로 올랐다. 하이라인은 지금 뉴욕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면서 센트럴파크와 견주는 공원이다.
1980년대부터 고속도로망이 촘촘하게 개발되면서 뉴욕의 철로는 점차 쓸모가 없어졌다. 2.3㎞에 이르는 고가 철로는 철도 용지인 허드슨 야드와 함께 낙후된 채 방치되다가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녹슨 철로엔 꽃과 풀, 나무가 무성하고 예술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민주당 지지도가 높은 뉴욕인 만큼 트럼프를 희화화한 작품을 내건 공방이나 작업실도 눈에 많이 띄었다.
고가 철로여서 대략 빌딩의 4층 높이, 맨해튼의 공중을 부양하니 빌딩에 짓눌러 어지러웠던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브루클린, 흑인만 모여 사는 마을에 머물렀다. 한국인 우버 기사는 하필이면 왜 그런 동네에 숙소를 구했느냐고 타박을 했다.
집주인 낸시는 특유의 흑인 억양이 정겨운 그야말로 ‘스위트’한 할머니였고, 계약상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식빵과 우유, 잼, 과일을 매일 냉장고에 가득 채워주었다. 아침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엔 전단과 담배꽁초, 술병이 나뒹굴어 스산했다.
어느 날 브루클린을 벗어나 맨해튼에 도착하고 나서야 안정감을 느끼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뉴욕에서 실망과 사랑을 반복해 느꼈다. 나쁜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나는 뉴욕에서 조울증을 앓았다. 무질서 속에 엄연히 질서가 있었다.
동서를 연결하는 스트리트와 남북을 연결하는 애비뉴의 숫자만 봐도 위치를 가늠하게 됐다. 더러운 지하철은 의외로 출도착이 정확했고, 귀를 찢는 듯한 소음 속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팁을 기분 좋게 냈다. 동성애자들의 애정표현도 눈여겨보지 않게 됐다. 무단횡단을 자유롭게 하는 여행자가 되어 있었고, 일주일이 지나니 지하철 노선을 대강 외웠다.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뉴욕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뉴욕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요(I want be a part of it New York, New York). 그건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It’s up to you, New York, New York).” 프랭크 시내트라는 내 마음을 부르고 있었다.
출처 / kyunghyang.com / 김 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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