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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경기 인천****기행

경기 양평ㅡ한국의 절집 순례ㅡ용문산 용문사(龍門山 龍門寺)

by 삼수갑산 2021. 11. 24.

한국의 절집 순례ㅡ용문산 용문사(龍門山 龍門寺)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龍門面) 신점리(新店里) 용문산에 있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

 

조계종 제25교구본사인 봉선사(奉先寺)에 속해 있다. 913년(신덕왕 2) 대경 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우왕 때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다. 1395년(태조 4) 조안화상이 중창하였으며,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원찰로 삼으면서 보전을 다시 지었다.

 

1457년(세조 3) 왕명으로 중수하는 등 중 ·개수를 거듭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 때 전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당시 용문산과 용문사는 양평일대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권득수 의병장이 용문사에 병기와 식량을 비축해두고 항일활동을 펼치며 일제에게 타격을 입혔다.

 

반격에 나선 일본군 보병 25연대 9중대와 용문사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1907년(융희 1)8월 24일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러 사찰의 대부분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취운(翠雲)이 사찰을 소규모로 재건하여 유지해 오던 중 그마저 6 ·25전쟁 때 파괴되어 3칸의 대웅전과 관음전 ·산령각(山靈閣) ·종각 ·요사(寮舍) 등만 남게 되었다.

 

1982년부터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절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조선 전기의 정지국사(正智國師)부도 및 정지국사탑비가 있다.

 

부도와 탑비는 함께 보물 제5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 수령이 1,1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이는 마의태자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현재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문사는 649년(진덕여왕 3)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892년(진성여왕 6) 도선국사가 중창했다. 이 창건설 외에 913년(신덕왕 2)에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했다는 설과,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이상의근거는 없고, 913년 대경대사 창건설은 중창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양평군지』에 따르면 창건 당시 당우가 304칸에 300여 스님들이 머물렀다고 하는데, 지금의 터를 살펴보건대 300여칸의 당우가 들어앉기엔 터무니없이 좁은 공간이다. 다만 산내 암자가 넷이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들 암자터까지포함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따름이다.

 

그뒤 약 450년간의 기록은 찾을 수 없고 훌쩍 1378년(우왕 4), 지천(智泉)대사가 개풍 경천사(敬天寺)에 있던, 우왕이원각(願刻)한 대장경판을 이곳으로 옮겨 3칸짜리 대장전을 짓고 봉안했다는 데로 이어진다.

 

1395년(태조 4) 조안(祖眼)대사가 중창하는데, 바로 그해 천마산 적멸암에서 조안대사의 스승 정지(正智)국사가 입적한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한 정지국사 부도가 용문사에 세워진 내력은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곧 천마산에서 다비를치른 며칠 뒤 제자 지수(志脩)의 꿈에 “너희는 어찌하여 사리를 거두지 않고 버려두느냐”고 힐난하여 비로소 수많은사리를 수습하게 된다.

 

이에 조안대사를 비롯해 국사의 제자들이 중창중인 미지산 용문사로 사리를 옮겨 부도와 비를 조성코자 왕께 알리니(무인년 여름), 왕은 권근에게 비문을 짓게 한다.

 

용문사는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의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를 위해 보전(寶殿)을 짓고 불상 2구와보살상 8구를 봉안했으며, 이듬해 경찬회(慶讚會)를 베풀었다.

 

이 경찬회 법회에 참석해 기도하던 수양대군은 불사리의 방광을 목격하고 원찰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어 세조와 성종을 비롯해 왕실에서 종종 중창했으나, 1907년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다가 일본군들이 불태우는 비운을 겪는다.

 

취운스님 등이 재건을 거듭해 내려오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승패의 분수령이 되었던 용문산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피해를 입는다. 용문사의 자취에는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비극이 서려 있다.


1958년 이후 재건해 오늘에 이른 용문사 경내에는 대웅전·산신각·종각·요사채가 있으며, 보물 제531호로 지정된 정지국사 부도와 부도비, 산신각 동쪽에 5기의 부도가 있고, 절마당 아래로는 수령 1,100년쯤으로 추정되는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용문사 은행나무 나이는 대략 1,100여 세. 원효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한 연대를 기준으로계산한 나이다. 그러나 이 은행나무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자랐다고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풀 길 없어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지팡이까지 버리기 위해 꽂아놓고 떠난것이라고도 한다.

 

사실 여부는 알 도리가 없으나 그 어떤 사연이라도 지금에야 처연하도록 아름답기가 매한가지고,천년의 역사를 가지마다매달고 있는 은행나무가 거룩하기만 하다.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라는데 그야 뭐 그리 의미가 있으랴. 그보다 나라에 변고가 일어날 조짐을 먼저 내다보고 울었다거나, 어느 심성 사나운 사람이 도끼를 대었다가 벼락을 맞았다는 흔한 얘기들이 더 흥미를 끄는 ‘영험담’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된 나무가 이 은행나무다. 여름에는 가지와 잎이 무성해 몸체를 보기 어렵지만, 늦가을이나 겨울에 가면 천년 세월을 견뎌온 은행나무의 온전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어디 한 곳 물기를 빨아올릴 것 같지 않은 고사목 같은 나무인데, 봄이면 어김없이 수액을 날라 가지 끝 잎마다 먹여 푸른 잎을 돋게 하는데 외경스럽기까지 하다.

 

▲대웅전(大雄殿)

 

▲지장전(地藏殿)

 

▲범종루(梵鍾樓)

 

▲범종루(梵鍾樓)

 

출처 / blog.daum / 빈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