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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경기 인천****기행

경기 강화ㅡ강화도ㅡ한국의 절집 순례ㅡ정족산성 전등사(鼎足山城 傳燈寺)

by 삼수갑산 2021. 11. 16.

한국의 절집 순례ㅡ정족산성 전등사(鼎足山城  傳燈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는 사찰

 

삼랑성 성안에 있는 절이라서 성문을 지나야 입장할 수 있다. 전등사는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내에 위치해 있으며 고구려 소수림왕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하며 초기에는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1282년, 충렬왕 때 왕명을 받은 인기(印奇) 스님이 송(宋)나라에 가 대장경을 구해오고, 원비가 옥등잔(玉燈盞)을 시주해 대웅전에 밝히니 예전의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절 이름을 고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옥 등잔을 시주해 밝혔다고 절 이름이 바뀌었다기보다는 내 생각에는 등(燈)이란 것이 법(法)이나 진리를 뜻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윤장대(輪藏臺)

 

동문에서 들어가 비포장길을 백미터정도 걷다보면 왼쪽으로 윤장대를 설치해 불심을 다해 돌려보게 만들어 놓았다.

"한번 돌리면 안에 들어 있는 책을 다 읽은 것과 마찬가지로 지혜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는 윤장대는

나 같이 게으른 사람한테 딱 맞는것 같아 순박한 마음으로 3번 돌려 보았다.

 

▲600년된 은행나무

 

조선시대 말기 불교 탄압이 심해 스님들은 국가의 노역에 불려나가거나 절의 특산물은 나라에 바쳐야했다. 수령이 60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풍년이 들어야 열가마니인데 스무 가마를 바치라며 독촉이심해 주지스님은 백련사의 추송선사를 모셔와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구경하던 포졸이 스님의 기도를 비웃자 한 쪽 눈이 멀어버렸다“남섬부주 해동 조선국 강화도 전등사에서 3일 기도를 지성 봉행하여, 두 그루 은행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게 해 주기를 축원 하나이다”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열매가 우수수 떨어져 버리더니 그 후로는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전등사 누각인 대조루(對潮樓)

 

이 누각을 지나면 대웅전이며 이곳 에는 불교서적과 테잎등을 팔지만옛현판과 중수기 같은 작은 판자에

예쁜 작은글씨가 많습니다

 

▲대웅전 (보물제178호)

 

정면3칸,측면3칸 단층 팔작집으로 되어 있으며 법당 내부에 들어가면 고색으로 엄습하는듯한 장엄함을 느끼게 됩니다기둥과 벽 그리고 천정 또 닫집의 색감이 내가 가져간 알량한 디카로 찍으면 실례가 될것 같아 그냥 마음속에 여운과 아쉬움을 새기고 나온것에 만족합니다.

 

 

▲대웅전 불상

 

석가모니불 양 옆으로 약사불과(병을치료) 아미타불이(극락부처)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다.

뒤로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세 부처님을 그린 탱화가 있다.

 

▲대웅전내 경판

 

정수사(淨水寺)개판(改版66)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의 글씨들

 

병인양요의 프랑스함대와 전쟁에 나가기전 병사들의 이름을 절에다 적어놓은 흔적이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긴박한 시간에 대웅전 기둥등에는 자기 이름을 써 넣었을 글씨다벗겨진 단청 사이로 이름이 즐비하다. 그때 그 병사들의 마음은 어떠 하였을까?프랑스군대를 격퇴한 기념비인 양헌수승전비가 동문쪽에 있다 그래서 전등사를 호국 사찰이라고 부르는게 당연하게 들린다

 

▲나부상(裸婦像)

 

엄숙한 절인데도 내 눈으로 보니 발가벗은 여인으로 보입니다.용이나 연꽃이나 도깨비 조각이야 다른 절, 어느 전각에서도 가끔은 볼 수 있지만 부끄럼도 잊은 듯 알몸에 치부를 다 드러내고 머리 높이로 팔을 올리고있는'나부상'은 전등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조각이다

 

전설에 의하면 대웅전을 건축하던 도목수가 사랑하던 여인이 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배반을 당하자 벌거벗은 몸으로 비, 바람을 견디며 무거운 추녀를 짊어지고 있는 고통을 영원히 주고자 조각하였다고 한다. 너무 잔인한 이야기 같지만, 특이한 조각이 처마 네 귀퉁이에 있으며 흥미로운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 여인에게가졌던 증오의 표현일 수도 있고,대웅전 밖의 처마 네귀퉁이에서 설법과 염불소리를 들으며 참회하라는 것 같았으며 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의 표시를 나타내기도하지만, 그것이 보는 사람 (나:我)에게 향한다는 생각이 들으니 부끄러워 진다.

 

▲대조루

 

이안에는 책과 물품을 판매하기도 하지만 여러 편액이 많아 한참 머무렀다

 

▲전등사 약사전 (보물 제179호)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전과 비슷하다. 건물에 비해 지붕이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는것 같다

불상은 역시 약사여래 좌상인데 약간 딱딱 하지만 아담하고 그런대로 잘 조화된 모습이다.불상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기에 속하는 석불로 볼 수 있다.

 

▲범종(보물393호)

 

일제가 세계 제2차대전시 약탈하여 부평(富平) 병기창에 놓아 두었던 것을 광복후(光復後) 독실한 불교신자에의해 다시 전등사에 보관되어 현재에 이른 종이다. 종의 형태는 정상에 쌍룡(雙龍)을 갖추고 용두(龍頭) 주변에는 16개의 연꽃잎을 돌렸으며, 종의 몸체에는 위쪽에8잎을 돌리고, 그 밑으로 여러 개의 옆띠로 위아래를 구분한 다음 종선(縱線)으로 위아래 각 8개의 네모 구획(區劃)을 마련하였다.

 

이 네모 구획과 구획 사이의 길쭉한 공간에는 명문(銘文)을 양각(陽刻)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철제종이보물로 지정된 오직 유일한 종으로 중국제 철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특히 명문(銘文) 중에는 이 종을 주조할 때의 시주인(施主人), 동역인(董役人), 장인(匠人) 등의 성명이 양각(陽刻)되어 있고, 종구 하단(下端) 가까이에는 "대송회주(大宋懷州)…"라는 27자가 있다. 종의 크기는 높이가 1.64m에구경이 1m나 된다

 

▲가궐터

 

바로 왼편으로 정족산가궐지가 있는데 고려 고종이 풍수도참가 백승현이 종족산과 신니동에 가궐을 짓고

마니산 참성단에 제사를 지내면 친조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해서 지었는데평상시에도 왕이 거처하듯이 금침과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정족산 사고(鼎足山 史庫)

 

선원보각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사고와 선원보각지가 나온다. 종적산 사고는 선조 39년에

마니산사고가 효종 4년에 소실되자, 정족산성내에 사고를 짓고 숙종 4년 마니산사고의 남아있던 서책을

이장했고 1910년 조선총독부로 이안되었다가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사고쪽에서 바라본 경치

 

강 같은 저 쪽이 바다이며 새로 건설한 초지대교쪽의 해안이고, 그 건너는 뭍인 김포시다

 

▲왜정시대에 왜놈들이 송진 공출을 독려해

상처 입은곳이 아프지만 시련에도 굳굳한 우리의 토종 소나무

 

▲삼랑성내부 언덕쪽의 소나무

전등사는 대웅전,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 극락암, 대조루, 범종, 범종루, 종각, 적묵당, 삼성각,요사채를 고루 갖춘

그위에 강화사고 자리가 있어 그 자리에서 보면 또 다른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들어오며삼성각 위치에서 보는

경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