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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경기 인천****기행

경기 화성ㅡ가까이 있서 몰라본 華城ㅡ섬이였든 과거가 그리운 육지...뭍에 갇힌 갯벌은 초록바다가 됐다

by 삼수갑산 2021. 11. 14.

가까이 있서 몰라본 華城

섬이였든 과거가 그리운 육지...뭍에 갇힌 갯벌은 초록바다가 됐다

▲시화방조제 건설로 바닷물이 드나들던 드넓은 갯벌이 육지가 된 지 올해로 19년. 그 너른 평원에 갈대와 띠풀,

느티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낯설고 이국적인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경기 화성. 다녀오고서야 알았지만 수도권 가까이 있어서 미처 몰라봤던 곳입니다. 수원의 위성도시로, 고작해야 제부도와 바지락칼국수쯤으로 이해되는 화성에는 그러나 매혹적인 여행 목적지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은 시화방조제와 화옹방조제 건설로 육지가 된 끝 간 데 없는 너른 갯벌이었습니다.

단단해진 갯벌 위로 자란 함초와 갈대, 띠풀, 그리고 초지 위에 드문드문 뿌리를 내린 제법 굵은 나무들이 늘어선 풍광은 마치 생소하고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한때 섬이었으되 이제 덩그러니 드러나 뭍이 되고만 화성의 우음도와 어도, 형도. 그 섬의 연안에 찰랑이던 바닷물이 다 빠져나가고 난 자리에는 1억 년 전 공룡시대의 부화되지 않은 공룡알이 있었고, 오래전 바닷가 사람들의 누대에 걸친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 당집이 남아 있었습니다.

적잖은 해안이 방조제로 닫히긴 했어도 화성은 여전히 아름다운 석양의 바다를 끼고 있습니다. 정박장의 요트 뒤쪽으로 넘어가는 전곡항의 낙조도 황홀했고, 궁평항에서 배를 타고 건너간 국화도와 입파도에서 만난 정취도 보통은 넘었습니다.

 

국화도에서 썰물 때마다 열리는 길을 딛고 해안이 온통 흰 굴껍데기로 뒤덮인 무인도로 건너가 만났던 것은 ‘고즈넉한 평화로움’이었습니다. 화성 땅의 섬은 ‘작정’과 ‘계획’ 없이도 그저 훌쩍 섬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여기다가 건원릉과 용주사의 울창한 소나무와 참나무 숲길을 따라 사도세자와 그 아들 정조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맛도 제법입니다.

아 참, 이즈음 송산면 일대의 구릉에서 한창 익어가고 있는 달큰한 포도의 향기와 탱글탱글하게 살이 오른 맛조개만

넣어 끓여낸 칼칼한 찌개 맛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화성의 궁평항 선착장에서 시민들이 낚시를 즐기는 모습. 항구에는 쾌적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전용 목조덱도 세워져 있다.

 

#바다가 육지가 된 땅에서 마주친 ‘낯선 풍경’들

‘드넓다’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광활하다’는 표현으로도 많이 모자란다. 대단위 간척사업으로 바닷물이 드나들던 연안의 갯벌이 거대한 육지가 된 화성의 시화지구. 화성을 말하면서 시화지구 이야기를 앞세우는 건 그곳의 경관이 펼쳐 보여주는 독특함과 ‘낯섦’ 때문이다.


방조제 건설로 너른 갯벌은 물론이고 파도를 불러들이던 우음도, 어도, 형도 같은 그만그만한 섬들까지 죄다 육지 안에 갇혀 버렸다. 한때 바다였던 갯벌과 섬들은 이제 육지가 돼서 띠풀과 갈대의 초록으로 뒤덮여 가고 있는 중이다.

채 소금기가 가시지 않은 갯벌의 염생식물을 밀어낸 띠풀과 갈대 사이에 어디선가 버드나무와 아까시나무 씨앗이 날아들었다. 그 작은 씨앗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음에도 제법 굵은 둥치로 자라나 활개 치듯 가지를 뻗고 있다.

사람의 간섭으로 바다를 육지로 만든 곳. 이른 새벽에 그 풍경을 바라보고 섰다. 차가워진 아침 공기 속에서 낮게 깔린 안개가 초록의 아랫도리를 휘감았다. 풍경은 생소하다. 바다를 막아 육지로 만드는 일이 옳은 판단이었을까, 아니면 자연을 거스르는 잘못된 일이었을까.

 

고백하자면, 그런 생각 대신 엉뚱하게도 거기서 떠오른 건 아프리카 어디쯤의 드넓은 초원이었다. 초지에 드문드문 서있는 나무들이 환기하는 건 그런 이국적인 풍경이다. 광활하고 거대한 초지의 공간은 한편으로는 회화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쓸쓸한 적막감으로 다가온다.

육지가 된 시화지구는 ‘송산그린시티’란 이름의 거대 신도시로 개발될 예정이다. 앞으로 들어서게 될 장대한 위용을, 도시의 규모를 자랑하기 위해 우음도 정상에는 전망대를 우뚝 세워두었고, 기반공사인 하수종말처리장 건설은 이미 시작됐다.

 

주택경기 침체로 신도시 건설이 기약 없긴 하지만 한적한 어촌의 갯벌이 육지로 바뀌었고, 다시 휘황한 도시로 변모를 앞두고 있다. 지금의 시화지구의 낯선 풍경도 시한부인 셈인데, 육지가 돼버린 섬에서 바다를 잃고도 버티며 살아온 주민들도 이제 별 도리 없이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그 드넓은 초지에서 마주쳤던 쓸쓸함의 정체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1억 년 전에 깨어나지 못한 공룡의 알을 보다

시화지구 일대는 방조제 건설 이전에 바다와 갯벌이었지만, 더 오래전에는 육지였던 곳이다. 그걸 증명하는 게 시화지구에서 발견된 공룡알 화석이다. 1억 년 전에 이곳은 공룡이 활보하고 둥지를 틀었던 땅이었다.


공룡알 화석은 시화호 방조제가 세워지고 나서 사암으로 이뤄진 개미섬, 닭섬 등 6개 섬이 모조리 육지가 된 뒤에 발견됐다. 공룡알이 발견된 곳은 호젓하고 이국적인 풍광 탓에 단골 누드사진 촬영지였다는데, 사진 촬영을 나왔던 이들이

노출된 둥근 화석을 발견해 제보하면서 이 화석이 공룡알임이 확인됐다. 일

 

대에서 발견된 노출된 공룡알 화석만 300개가 넘는다. 이곳에서 발견된 공룡알은 두 종류. 여러 퇴적층에서 공룡알이 발견돼 이 지역이 백악기 때 오랫동안 공룡의 집단산란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룡알 화석지까지는 탐방로가 놓여 있다. 갯벌이 단단하게 굳어 초지가 된 땅 위에 나무덱을 놓아 화석지까지 길을 연결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맛이 제법 각별하다. 거대한 평원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도 독특한데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저편에서 일대를 쿵쾅거리며 뛰어다녔을 공룡을 상상하는 재미도 있다.

공룡알 화석은 발굴 당시 그대로 공개되고 있다. 둥근 알의 형태가 제법 뚜렷하다. 돌출된 바위에 박힌 알을 찾아내는 것이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듯하다. 화석 발견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시화지구가 도시로 개발되더라도 일대는 그대로 보전된다.

 

완충지역까지 합쳐 무려 400만 평의 땅이 지금의 모습으로 그대로 남게 되는 것이다. 당초 도시개발계획 수립 당시에 너무 넓은 땅을 보전지구로 지정했다는 이유로 적잖은 논란이 있었다지만, 덕분에 숨 쉴 녹지의 공간은 확보됐다. 1억년 전의 공룡이 낳은, 태어나지 못하고 화석이 돼버린 알이 녹지공간을 지켜준 셈이다.

시화지구에서 또 한 곳 눈여겨볼 곳이 바로 뱃사람들이 제를 지내던 각시당이다. 공룡알 화석지를 목적지 삼아서 시화지구로 들어서면 비포장길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초지 위에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선 버위가 바로 각시당이다.

 

썰물이면 드러나는 작은 바위섬에 올라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가 풍랑에 목숨을 잃어 그 넋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내던 곳이다. 이곳이 바다이던 시절에는 음력 2월 초에 각시당에서 굿을 하며 제물로 참빗이며 반짇고리 등을 바쳤다. 당이 있던 자리에는 시멘트로 지은 군 초소가 세워졌다.

1990년대 초반 이 초소에서 근무하던 초병이 밀물 때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길을 잃어 그만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있었는데, 주민들 사이에서는 ‘당집의 각시가 데려간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단다.

 

당집 자리는 족히 40분은 무성한 숲을 헤치고 걸어가야 만날 수 있다. 풀숲이 우거진 바위 위에 올라앉은 무너진 초소 건물이 독특한 미감을 빚어낸다.

 

#내키는 대로 건너가서 즐기는 섬여행

화성에는 도합 마흔한 개의 섬이 있지만 그중 유인도는 세 곳에 불과하다. 시화호 방조제가 놓이기 전에는 유인도가 다섯이었으나, 우음도, 형도가 육지가 되면서 남은 섬은 서신면의 제부도와 우정면의 국화도, 그리고 입파도 등 3개뿐이다.

 

제부도야 수도권 시민들의 가벼운 행락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으니 구태여 여기서 이야기를 더 보태지 않아도 될 일이다. 썰물 때면 콘크리트 바닷길이 열려 차로 드나들 수 있는 제부도를 섬이라고 하기에도 좀 뭣하다.

남은 두 개의 섬이 바로 국화도와 입파도인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국화도의 정취가 훨씬 더 빼어나다. 국화도는 행정구역으로는 화성시에 속해 있지만, 거리로 보면 충남 당진과 훨씬 더 가깝다.

 

화성의 궁평항에서 뱃길로 45분 남짓 걸리고, 당진의 장고항에서는 20분 안쪽에 배가 닿는다. 장고항에서 오가는 여객선의 출입이 훨씬 더 잦아 35가구 70여 명의 섬 주민들 거개가 당진을 생활권으로 두고 있다.

화성의 섬, 국화도와 입파도가 각별한 것은 섬이면서 궁평항이나 전곡항에서 단숨에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찾아가지 않더라도 가닿을 수 있는 곳. 그저 수도권의 항구에서 내키는 대로, 혹은 충동적으로 여객선에 올라서 가볍게 찾아갈 수 있는 매력이 있다는 얘기다. 멀게만 보였던 섬으로의 여정을 이렇듯 가볍게 감행할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

국화도는 작은 섬이다. 섬 크기래야 0.39㎢에 불과하다. 섬을 둘러보는데는 반나절도 채 안 걸린다. 농사지을 만한 땅도 없고, 고기잡이도 신통치 않은 섬이라 주민들은 자그마한 양식장을 운영하거나 낚시꾼이나 관광객들에게 기대서 생계를 잇고 있다.

국화도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매박섬이다. 국화도는 썰물 때면 길이 나는 무인도 두 개를 거느리고 있다. 하나가 토끼섬이고, 다른 하나가 매박섬이다. 토끼섬은 밀물 때만 잠깐 길이 끊기는 곳이고, 매박섬은 썰물이

돼야 길이 열리는 섬이다.

매박섬은 수석처럼 솟은 바위가 멋스러운데 흰 굴껍데기가 쌓여 자그락거리는 해안을 갖고 있다. 썰물 때 책 몇 권 챙겨 들고 건너가서는 물길이 닫힌 뒤 아무도 없는 섬의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 아래 해안에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는

풍류를 즐긴다면 딱 좋을 곳이다. 물길이 열리면 작은 돌 해안에서 지천으로 널린 고둥을 잡는 재미도 즐길 수 있다.

인근의 입파도는 파도(波)가 일어서는(立) 섬이란 이름답게 주변의 파고가 거센 편. 물이 귀한 섬이라 내내 무인도로 남아있다가 근래 들어 간혹 찾아오는 낚시꾼과 피서객들을 상대로 방을 내주거나 밥을 차려주는 것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이 섬을 찾아들어 거주하고 있다.

입파도에서는 섬 북쪽의 붉은 기를 띠고 있는 바위인 ‘홍암(紅岩)’이 명소로 꼽히는데 육지에서 먼 섬인데다 외지인의 발길이 뜸한 곳임에도 ‘화성 팔경’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국화도에서 본 무인도 매박섬의 모습. 썰물이면 섬으로 건너가는 길이 열린다.

 

#사도세자 묘의 석물과 용주사의 부처 그림

화성에는 또 뺄 수 없는 명소가 있으니 다름 아닌 융건릉과 용주사다. 그저 조선시대 왕릉이려니 무심하게 지나치기보다는, 역사를 찬찬히 짚어가며 둘러보는 게 왕릉과 사찰에 스민 뜻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융건릉이란 화산 자락의 이쪽저쪽에 들어선 현륭원과 건릉 두 곳의 능을 말한다. 현륭원의 주인은 사도세자다. 어버지의 미움을 사 뒤주 안에서 비극적인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묘는 본래 양주 땅 배봉산 기슭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부근이다. 묘는 초라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즉위 후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하가 “사도세자의 묘가 좁고 초라해 옮겨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선대 세자의 묘를 옮기는 건 왕이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2품 이상 대신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정조는 신하에게 상소를 낭독시키고는 가슴이 막힐 정도로 울음을 삼키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왕이 피울음을 토하는 상황에서 어떤 신하가 반대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사도세자 묘의 이장이 시작됐다.

현륭원이 들어선 자리는 일찍이 윤선도가 효종의 능침 후보지로 적극 추천했던 명당. 본래 수원부의 읍이 있었는데, 읍성을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까지 이 자리를 택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면서 정성을 다했다.

 

묘에 세워진 석물은 조선후기 석조의 백미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별 초빙한 당대 최고의 조각가 정우태의 솜씨다. 무인석과 문인석은 먼발치에서 봐도 신체 비례감은 물론이고 새긴 솜씨가 뛰어나다.

묘의 장식에는 조선시대 조각의 세련미와 문화중흥의 성과와 수준을 그대로 담았다. 그 바탕은 물론 정조의 효심이었다. 정작 정조가 승하한 뒤 묻힌 건릉은 왕릉임에도 석물이며 무덤 장식은 이보다 못해 보였다.

융건릉의 경내는 우람하게 늘어선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드리운 그늘이 짙다. 능 주위의 잔디도 카펫처럼 잘 가꿔져 있어 초록의 기운 속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간 보람이 느껴진다. 정조가 묻힌 건릉은 연말까지 정자각 보수공사 중이라 번잡해 좀 아쉽긴 하지만, 현륭원에서 건릉까지 이어지는 청정한 기운이 느껴지는 산책로는 꼭 걸어보길 권한다.

융건릉과 함께 둘러볼 곳은 조선후기 최대 왕실의 원찰인 용주사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역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절집.현륭원이 그렇듯 용주사도 정조의 정성이 깃든 곳이다.

전각의 건물부터 소장유물에 이르기까지 건축, 서예, 회화, 조각, 공예 등 정조대의 세련된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대웅전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김홍도와 당대 최고 화가였던 이명기, 김득신이 합작해 그린 명품이니 유심히 볼 일이다.

정조는 탱화 작업을 위해 김홍도와 이명기 등의 화가를 청나라의 북경에 파견했다. 이들 화가는 북경의 천주교회당을 순례하며 서양화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그 기법을 가미해 불화를 그려냈다.

불화에 등장하는 부처는 김홍도의 신선도에서 빠져나온 듯하고, 그림 전체에서는 다른 불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의 깊이감이 느껴진다. 인물의 윤곽선 밖에 어두운 음영을 덧대는 음영법이며, 이마와 콧등, 눈두덩 등을 밝게 처리하는 명암법을 유심히 살피면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다.

 

출처 / munhwa / 박경일 전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