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밤 과 낮, 어느쪽이 좋을까?
‘양념이 좋아, 후라이드가 좋아?’ 이후 최대의 난제, 홍콩의 낮 vs 밤.
꾸무적꾸무적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산책하기.
두 가지만 제대로 지킨다면, 홍콩에서 최고의 낮을 보낼 수 있다.
"완탕면 한 그릇과 한낮의 산책.
걸을수록 홍콩과 가까워졌다. 열렬한 햇빛은 늘 함께였다.”
홍콩의 낮을 떠올리면 팝업창처럼 튀어나오는 몇 장면들이 있다. 홍콩에선 아침마다 완탕면을 먹었다. 소고기 완자 반, 새우 완자 반. 첫 끼에 둘 다 넣는 건 역시 무리지 싶었는데, 식욕이 이성을 이겼다. 묵직한 조식, 그득한 배. 걸으려면 넉넉히 먹어 둬야 한다. 그리곤 산책을 했다. 말이 좋아 산책이지, 사실 정처 없이 홍콩 시내를 어슬렁거린 거나 다름없다.
내 굼뜬 걸음과 달리 소호 거리는 늘 바빴다. 빙빙 굴러가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수가 몇 개나 되는지 가늠조차 안 되는 빌딩 사이를 누볐다. 손끝으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건물들도 지났다.
디지털 카메라 대신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찍어야 제맛이 날 것 같은 풍경. 낯설고 신선했다. 반면 페인트도 채 안 마른 새 건물들은 신사동 가로수길 어딘가에서 본 듯 익숙했고. 홍콩에선 낡은 것이 새로운 것이고,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이다.
홍콩을 알고 싶다면 걸어야 한다. 걸을수록 홍콩과 가까워진다.완차이(Wan Chai) 지역에선 의도적으로 길을 잃었다. 그러는 동안 꽤 많은 양의 땀을 흘렸는데, 아주 세세하고 구체적이었던 더위는 지금에 와서야 다 흐릿해지고, 다만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두 볼의 느낌만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햇빛에 눈이 부셔 따끔따끔해지면 정오가 됐다는 뜻이었다. 그럴 때면 익청빌딩에 갔다.영화 <트랜스포머>의 촬영지여서도, 사진 애호가들의 필수 코스여서도 아니었다. 그저 편안해서다. 네모나게 뚫린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ㄷ자 모양의 아파트가 나를 둘러쌌다. 냄새는 좀 구려도, 포근했다.
그 안으로 부드럽게 흘러드는 오후의 햇빛은 내 안의 무언가를 가만히 녹여 주는 것 같았다. 또 어느 날은 보통의 여행자답게 SNS용 명소를 일부러 멀리까지 찾아갔다.그리고 보통의 여행자답게 사진과 다른 현실의 모습에 실망했다. 그래도 좋았다. 여행이란 그런 거니까. 크고 작은 실망마저도 낭만이란 껍데기에 쌓여 너그럽게 덮어지는 것. 분명한 건 홍콩에서 걸었던 모든 산책길에 후회는 없었단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 출근길. 대화행 열차를 기다리는데 어느 한갓진 홍콩의 아침이 팝업창처럼 툭 튀어나온다. 나는 또 침사추이의 한 완탕면 가게에서 에그 누들을 씹고 있다.맛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사실 잘 모르겠다. 누들을 씹고 있지만 마음은 온통 홍콩의 습기 찬 공기에, 노포의 레몬색 대리석 바닥에, 햇볕에 꾸덕꾸덕 말라 가던 생선에, 웃통을 훌렁 깐 아저씨의 뱃살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
돌아보면 내가 씹었던 건 공기와, 바닥과, 생선과, 뱃살뿐인 셈이다.씹고 또 씹어 물러지고 부스러져 소화가 다 됐는데도 자꾸만 되새김질에 곱씹기를 반복한다. 그 겹겹의 여름들을. 너무 씹어 단물이 다 빠진 낮들을 위해, 나는 뱉어 버리면 더 애틋해질까 봐 아껴 둔 그 말을 오늘 꺼내야겠다. 아, 그립다. 홍콩의 낮.
게 튀김과 맥주, 택시 드라이버
홍콩의 밤을 표현할 땐 이 세 단어로 충분하다.
무더운 여름, 홍콩의 밤은 대체로 이렇게 흘러갔다.
택시를 탄다→쇼핑을 한다→골목을 걷는다→술을 마신다→늘어지게 잔다. 이런 패턴을 반복하느라 도무지 뉴스며 SNS 따위가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홍콩은 정말 굉장한 도시다. 나는 그 굉장한 도시에서, 매일 밤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썼다.
밤은 낮만큼 바빴다.낮엔 정신없이 걸었다면, 밤엔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일 자주 들락거렸던 곳은 삼수이포의 한 야외 포장마차. 어찌된 일인지 홍콩에선 파리가 많은 곳일수록 음식이 맛있다.
골목의 식당들 중 사람도, 파리도 제일 많은 곳을 골라 앉았다.배를 긁다 웍을 돌리고, 웍을 돌리다 땀을 닦는 아저씨들의 불 쇼가 한창이다. 기름 묻은 메뉴판이 올라온다. 테이블보는 얇은 비닐 한 장이 끝. 모든 동작에 겉멋이 없다. 무심한데 정겹고, 정겨운데 무심하다. 나는 노포의 그런 존재 방식을 사랑한다.
주문을 넣으니 불이 켜진다. 센 화력에 웍이 춤춘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짠 게 튀김과 청경채 볶음 그리고 맛조개 볶음이 차례로 나왔다. 모든 요리는 조리 과정에서 홍고추와 마늘을 실수로 왕창 쏟아 버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좋다. 짜고 맵고 신 홍콩의 맛. 하여튼 기름에 볶으면 다 맛있다.에어컨 하나 없는 끈적한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는 먹었고 안주는 마셨다. 홍콩의 여름밤은 먹고 마시는 데 구분이 없다. 먹을 건 마시게 되고,마실 건 와구와구 먹게 된다. 맥주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노포는 너무 시끄러워서 말소리가 밖으로 멀리멀리 밀려나가는 듯했다.그 속에 나는 부드럽게 섞여 들어가 먹고 웃고 마셨다. 여행자는 더 이상 이 더운 도시의 돌출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맥주로 목을 축일 때마다 천천히 밤에 젖어들었다. 그러다 잊을 만할 때쯤 사방에서 풍겨 오는 향신료 향이 말해 주었다. 넌 지금 홍콩에 와 있는 거라고, 알아?
안 그래도 후끈한 밤은 맥주가 들어가면 더 뜨거워진다. 이럴 땐 걷기보다 달리고 싶다. 빨간 택시를 부른다. 빠르고
시원하게 달리는 덴 택시만 한 게 없으니까. 이런 이유도 있다.
게 튀김을 먹으면 맥주가 따라오고, 한창 취하면 지하철 따위를 타고 싶은 마음일랑 싹 사라지니 택시를 타야 한다.
그러니까 결국 택시 드라이버, 맥주, 게 튀김 순서가 아니라 게 튀김, 맥주, 택시 드라이버 순이어야 맞다.
그해 여름밤은 대체로 붉고 진한 기억뿐이다. 빨간 택시의 창문엔 빨간 2층 트램과 빨간 네온사인 간판이 담겼다
사라졌다.빨간 양념이 묻은 입을 닦고 옷소매에 배인 홍고추의 향을 맡았다.
택시는 더 빠르게 달렸다.그럴수록 나는 웍의 밑바닥에 아주 눌어붙은 감자볶음들처럼, 영영 이 도시의 밤에 눌러앉고
싶단 생각을 했다. 짭짤하고 눅눅하고, 무엇보다 이렇게 뜨끈한 날들이 계속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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