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ㅡ아픔의 역사가 낳은 珍珠....옛풍경의 환희
▲헝가리 서부 도시 베스프렘의 언덕 위에 세워진 중세의 성채에서 마을을 내려다본 모습. 뱃머리 모양으로 밀고 나간 바위산을 중심으로 경사면을 따라 붉은 지붕의 집들이 원형 경기장의 관중들처럼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베스프렘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자리다
‘두나(도나우)강의 진주’라 불리는 도시. 여행자들이 그 도시에 가보고 싶어 하는 건 아마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기품있는 야경 때문일 겁니다.
은은한 야경 속에서 중세의 성당과 성채가 떠오르는 곳. 바르 언덕에서 도나우강과 세체니 다리, 첨탑과 돔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국회의사당 건물을 내려다보니 그 황홀한 풍경에 마음이 다 녹아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부다페스트의 화려함은 그러나 밝은 동화 속의 풍경이라기보다는, 좀 쓸쓸하고 무거운 쪽입니다. 비유하자면 수채화보다는 물감을 이겨 바른 유화(油畵)의 풍경에 가깝습니다.
9세기 말 마자르족이 도나우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나라를 세운 이래, 1000년이 넘도록 헝가리는 침략과 합병, 원치 않았던 전쟁과 패전, 그리고 공산화의 역사와 동구권 붕괴의 시간을 거쳐 왔습니다.
제국을 이룬 다른 유럽 도시들이 깃발처럼 자랑스럽게 매단 ‘승리의 영광’ 대신, 헝가리에는 ‘패배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였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만나는 건 지나온 시간이 무너뜨려 버렸던 과거의 공간들입니다.
헝가리를 하고 많은 보석 중에서 하필 ‘진주’에 비유하는 것도 헝가리가 건너온 시간이 아픔의 단단한 결정에 가깝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 헝가리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부다페스트의 야경보다, 해바라기와 밀밭이 가득 펼쳐진 부드러운 헝가리 평원과 그 평원을 지나서 만나는 소도시들이었습니다.
헝가리의 너른 평원을 건너가면 중세의 거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파스텔톤의 오래된 도시가 있었고, 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를 끼고 있는 수도원이 있었으며, 단맛을 품은 와인을 빚는 와이너리가 있었습니다.
구동독의 낡은 ‘트라반트’ 자동차와 말이 끄는 마차가 느릿느릿 오가는 마을의 한적한 오솔길에는 오래된 신문의 흑백사진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장 헝가리다운 풍경들은 어쩌면 수도 부다페스트가 아니라, 이런 중소도시에 오롯이 살아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중세의 풍경이 남아 있는 ‘여왕의 도시’인 베스프렘에서, 구릉 가득 포도밭이 펼쳐진 토커이에서, 그런 풍경들과 수시로 마주쳤습니다.
▲헝가리의 옛 중세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다페스트의 부다 쪽의 모습. 마차시 성당의 높은 첨탑과 고깔 모양의
지붕을 한 어부의 요새가 도나우강을 가로지르는 세체니 다리 왼쪽으로 보인다. 침략과 전쟁,
그리고 공산화를 거치면서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지면서도 도시는 중세의 시간의 깊이를 잃지 않고 있다.
# 오래됐으면서도 새로운 도시…부다페스트
‘오래된 것들의 새로움’. 이율배반의 이 문장이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오래됐으면서 새롭다’는 이율배반을 설명하는 데는 두 가지 풀이가 있다. 하나의 이야기는 부다와 페스트와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부다페스트는 다뉴브강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발전한 ‘부다’와 ‘페스트’가 합쳐진 도시다.
오래전부터 부다는 귀족과 부호의 영역이었고, 페스트는 상인의 무대였다. 두 도시가 19세기 후반에 합쳐졌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지금의 형태가 됐다. 부다도, 페스트도 오래된 도시지만 귀족과 상인의 두 도시가 합쳐진 부다페스트는 새로운 도시인 셈이다.
두 도시가 합쳐진 전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위엄을 갖춘 중세의 건축물들이 우뚝 솟아 있는 부다 지역은 중후하고 묵직하다. 반면 강 건너편 페스트 지역의 유람선 부두와 뒷골목 주점들에서는 분방한 연인과 젊은 예술가들로 활기가 넘친다.
두 번째 이야기는 헝가리가 건너온 수난의 역사로 설명된다. 14세기 무렵 헝가리는 중부 유럽 일대의 평원을 지배하던 강대국이었다. 수십 년에 걸쳐 복원 중인 부다페스트의 부다성을 비롯해 수많은 역사적 건축물이 헝가리의 ‘황금시대’로 일컬어지는 이 무렵에 지어졌다.
그러나 황금시대는 금세 저물었다. 잇단 이민족의 침략에 이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가 이어졌다. 그리고 2차대전과 사회주의 통치 시대를 겪었다. 웅장했던 옛 건물들은 이때 대부분 파손됐다. 패전의 잔해가 된 건물들은 부서진 채로 남겨졌다.
그걸 다시 일으키고, 복원하기 시작했던 게 1980년대 말부터니 불과 30여 년 전이다. 사실 부다페스트에서 오래된 것들은 모두 무너져서 다시 일으켜진 것들이다. ‘오래됐으면서 새롭다’는 건 이런 뜻이기도 하다.
부다페스트가 다른 유럽 도시들과 차별되는 것도 이런 이율배반이다. 귀족의 영역이 상인의 영역과 합쳐지고, 중세의 도시 풍경이 사회주의의 공공의 풍경, 개방 이후의 자본과 만나서 독특한 미감을 빚어내는 것이다. ‘어두운 듯하면서 화려한’ 부다페스트의 독특한 분위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부다페스트를 찾아왔다가 어떤 이들은 장식적이고 아름다운 도시를 보고 가고, 또 다른 이들은 정적이고 무겁고 우울함을 가슴에 선명하게 찍고 돌아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부다페스트가 어떤 장면으로 기억되든, 그 풍경이 더없이 고혹적이라는 것이다. 도시가 보여주는 건 생동감 넘치는 풋풋한 아름다움이라기보다, 풍상을 다 겪고 난 중년여성의 완숙한 아름다움에 더 가깝다.
▲티허니 마을의 베네딕트 성당을 찾은 관광객이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벌러톤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벌러톤 호수는 한쪽의 길이가 70㎞가 넘어 ‘헝가리의 바다’라고 불린다
# 해 저문 부다의 언덕에서 완벽한 풍경을
부다페스트에서 느껴지는 건 오래된 것들이 뿜어내는 ‘기품’이다. 그 기품은 시간으로 닳아버린 풍경을 가진 다른 유럽 도시와는 달리, 무너졌다가 몇 번이고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얻어진 것이다.
오래전에 무너져 버린 풍경을 일으켜 세운 도시는 단번에 ‘중세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도나우강 이쪽의 부다 왕궁과 마차시 성당, 세체니 다리는 물론이고, 강 건너편의 아르누보, 바로크, 네오클래식의 건축물들이 촘촘히 들어선 도시의 분위기가 모두 그렇다.
먼저 부다 쪽부터 둘러보자. 도나우강을 끼고 있는 부다페스트 일대를 가장 장쾌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겔레르트 언덕이다. 이 언덕 위에는 종려나무 잎사귀를 들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다. 2차대전 당시 헝가리를 점령했던 독일을 물리친 소련군이 세운 동상이다.
독일로부터 해방된 헝가리는 자유를 기대했지만 종전 후 소련의 개입으로 사회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사회주의 체제 시절 폭압과 경제난에 시달렸던 헝가리 사람들에게 이 여신상이 달가울 리 없다. 당연히 허물자는 얘기가 나왔지만 ‘오욕의 역사도 간직해야 할 유산’이란 이유로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실 오욕의 공간을 지워 버리겠다면 부다페스트에서 남아 있을 유적이 얼마나 될까. 헝가리-합스부르크 이중제국 시절 지어진 겔레르트 언덕의 성곽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헝가리를 잔인하게 탄압할 때 헝가리인들의 독립운동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초소였다. 도나우강을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는 마차시 성당도 오스만튀르크의 침입으로 유린됐을 때 정복자들의 신전인 이슬람 사원이 됐다.
부다 지역의 관광객들의 동선은 분명하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내려와 부다 왕궁 쪽으로 다시 언덕을 오른 뒤 거리를 따라 마차시 성당과 어부의 요새를 돌아보는 게 거의 정해진 순서다.
이 길 위에서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동선이 아니라 ‘시간’이니 꼭 해질 무렵에 맞춰 찾아가야 한다. 부다 왕궁과 마차시 성당을 지나 어부의 요새에 당도할 때쯤 기울어 가던 해가 넘어가고 도나우 강변의 다리에 하나둘 불이 밝혀졌다.
푸른 어둠이 짙어갈수록 간접조명을 받은 이쪽의 성당과 성채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도나우강이 어둠 속에 잠겨 가면서 국회의사당 건물이 금빛으로 떠오른다.
이런 풍경을 오롯이 마음에 담자면 어부의 요새 한쪽 끝에 똑같은 고깔 모양의 첨탑을 짓고 새로 문을 연 레스토랑을 찾아가자. 고급식당이라지만 코스 메뉴가 2만∼3만 원 남짓. 사방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레스토랑 위층 노천바에서 샴페인을 앞에 두고 경관을 즐기는 데 드는 비용을 더한 값이니 다른 유럽 여행지의 물가에다 대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다.
어부의 요새에서 강 너머로 건너다본 페스트 지역은 저마다 양식의 우아한 건축물로 둘러싸인 광장과 시장, 박물관, 대학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바치 거리의 흥겨운 골목의 끝에 중앙시장이 있고 시장 끝에는 각국에서 몰려온 청춘들이 모여 술잔을 드는 카페들이 늘어선 골목이 있다. 카페 골목 이쪽 끝에서 저쪽까지 걸으면서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 더 알려진 노래 ‘글루미 선데이’의 흐느끼는 듯한 선율을 세 번쯤 만났다.
▲해가 막 저문 부다페스트 부다 지구의 언덕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의 모습.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해 네오고딕 양식의 돔과 첨탑으로 지어진
국회의사당이 조명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 여왕의 도시 베스프렘에서 중세의 풍경을
헝가리에서 돌아본 몇 곳의 중소도시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었던 곳은 베스프렘이었다. 헝가리를 여행한다면 꼭 기억해둘 만한 곳이다. 베스프렘은 인근 위성도시들을 다 아울러 부르는 주(州)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 중심에 있는 주도(州都)를 일컫기도 한다. 10세기 무렵 로마가톨릭의 중심이었던 베스프렘은 헝가리에서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도시의 중심은 산정의 성곽 위에 있다. 성곽 안에는 초대 헝가리 국왕과 왕비가 살았던 성, 왕비가 결혼 때 축성을 받았던 성당, 페스트 퇴치 기념탑, 화재감시용 망루 등 중세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보존가치가 높은 오래된 건물에는 ‘묌렉(MUEMLEK)’이란 현판을 달아 놓았는데, 거의 모든 건물에 이 표식이 붙어 있었다.
베스프렘의 주인공은 ‘여왕’이다. 독일 출신 왕비 기젤라가 즉위식을 한 뒤 이곳에 줄곧 머물렀고 훗날 마가렛 공주가 6년을 여기서 살았다. 베스프렘이 ‘여왕의 도시’로 불리는 건 이 때문이다.
헝가리의 초대 왕인 이슈트반 국왕의 사후 900년을 기념해 산정의 성곽 끝에 세웠다는 왕과 왕비의 동상은 베스프렘을 상징하는 아이콘과도 같다.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배 모양으로 직벽을 두른 채 길게 뻗어 있는 언덕 너머로 붉은 지붕의 집들을 내려다보는 맛이 그만이다.
▲ 헝가리 동부의 와인 생산지 토커이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주민.
마치 옛 사진 속에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베스프렘주에 속한 위성도시들도 다양한 매력을 품고 있다. 먼저 베스프렘 북쪽 ‘헝가리의 심장’이라 불리는 소도시 지르츠. 12세기 가톨릭 개혁수도회인 시토회성당이 헝가리에서 처음 들어선 곳이다.
350여 년 동안 수도의 전통을 이어 오던 성당은 튀르크족의 침입으로 파괴됐다가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세워졌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파고 들어온 빛으로 성당은 경건함이 넘친다. 성당 뒤편으로는 짙은 숲을 끼고 있는 공원이 있다. 여러 갈래의 트레킹 코스로 이어져 있는 울창한 숲길 중간에는 근사한 호수도 있다. 그곳에서 여행자들이 만나는 건 종교와 자연이 선사하는 위안이다.
베스프렘주 서쪽에는 자그마한 도시 쉬메그가 있다. 쉬메그는 300m 남짓의 봉긋한 산 정상의 그림 같은 성으로 유명하다. 헝가리 중부의 평원에서 이 정도 높이라면 사방을 감시하는 요지 중의 요지였을 것이다. 중세의 유적인 쉬메그성은 개인 소유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직후인 1989년 셈이 빠른 이가 성을 포함한 일대의 땅을 사들여 호텔을 짓고 마상무예쇼를 즐기는 공연장과 중세의 분위기를 갖춘 식당을 열었다.
공연은 매주 수·토요일에 열리는데,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긴 창으로 대결을 펼치거나 중세 분장을 한 무사들이 창과 화살을 쏘고 결투를 벌이는 공연이 제법 볼 만하다. 공연이 끝나면 어둑한 중세풍의 식당에서 전통식 식사를 하는데 포크와 나이프 없이 손으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게 헝가리 전통 식사법이란다.
베스프렘 남쪽의 바다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벌러톤 호수는 서유럽 관광객들에게 인기 높은 곳이다. 동서 80㎞, 남북으로 10㎞에 이르는 호수는 해변 휴양지를 방불케 한다.
관광객들은 호수 위에 요트를 띄우거나 수영, 카약을 즐기고 호반에서 일광욕을 한다. 호수 북쪽 연안의 꽃봉오리처럼 내민 연안의 언덕에는 호수를 굽어보는 베네딕트 성당을 중심으로 자그마한 마을 티허니가 있다. 성당 주변에서 부푼 돛으로 요트들이 미끄러지는 호수의 모습이 마치 한 장의 그림엽서 같다.
# 토커이에서 만난 와인보다 짙은 삶의 향기
부다페스트에서 동북쪽으로 200㎞쯤 떨어진 토커이는 순전히 와인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내에서 토커이 와인을 처음 맛봤다. 헝가리에서 가장 이름난 와인이라고 했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혀끝에 대는 순간,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달았다. 독특하고 부드러운 감미가 오래 입안에 머물렀다.
토커이가 유럽의 다른 와이너리와 다른 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포도를 수확해 와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토커이 와인의 단맛의 비밀은 곰팡이다. 토커이 와인은 곰팡이균 감염으로 귀부병에 걸려 수분이 다 빠져나간 포도로 담근다.
와인을 빚는 이런 독특한 방식 때문에 토커이 일대는 지난 200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세계문화유산에는 1만3000여㏊에 이르는 광활한 포도밭과 곰팡이균으로 습도를 조절하는 와인저장고, 그리고 300년 넘도록 유지해 온 생산과 저장방식 등이 모두 포함됐다.
하필 찾아간 와이너리가 전통적인 방식의 와이너리가 아니라 신식 장비로 가득한 곳이어서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곰팡이균으로 뒤덮인 축축한 저장고에서 익어가는 와인을 둘러보는 투어가 흥미로웠다. 와이너리에서는 토커이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와인 맛을 볼 수 있었다.
단맛은 4개 등급의 숫자로 표시하는데, 같은 등급의 단맛이라도 와인에 따라 혀끝을 스치는 감미가 미묘하게 달랐다. 와이너리에서는 포도밭과 중간중간 심어진 장미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토커이에서 가장 관심이 갔던 것은 와인보다는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주민들이었다. 오래된 스쿠터를 끌고 가는 중절모 차림의 할아버지는 1930년대 사진 속에서 나온 것 같았고, 옛 동독의 자동차 트라반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오크통을 실은 마치를 몰고가는 근육질의 두 남자는 그보다 더 오래전의 풍경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았다.
토커이 일대 마을의 골목도 오래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와인으로 거부가 된 가문이 살았다던 집의 목재 대문은 한눈에도 족히 100년은 넘어 보였다. 수백 년 동안 같은 방식을 고집하며 묵묵하게 와인을 빚어 온 이들의 오래된 삶은 토커이의 와인보다 더 그윽하게 익어 있는 듯했다.
◆육개장 같은 ‘굴라시’ 실패 안해
헝가리는 한국보다 7시간 늦다. 가을 날씨는 한국과 비슷하다. 통화는 헝가리 포린트. 1포린트는 4.4원이다. 물가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국내 은행의 일부 지점에서 포린트화를 환전해 준다. 전압은 220V로 우리 가전제품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
부다페스트 외에 중소도시를 둘러보겠다면 렌터카가 최선의 선택이다. 대중교통 편으로 가자면 부다페스트 중앙역에서 베스프렘까지는 열차를 이동하는 게 편리하다.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베스프렘에서 지르츠까지나, 벌러톤 호반의 도시 티허니까지도 열차가 낫다. 지르츠까지는 30분, 티허니까지는 40분이 걸린다. 베스프렘에서 쉬메그까지는 하루 두 번 버스가 있는데 1시간 40분쯤 소요된다.
음식은 잘 맞는 편이다. 감자와 당근, 쇠고기 등을 굵게 썰어 넣어 매콤하게 끓여 내는 헝가리의 전통 음식 ‘굴라시’는 연하게 끓인 육개장 맛이다. 음식점에서 굴라시 메뉴를 택하면 적어도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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