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Cebu)ㅡ마젤란 십자가. 산토니뇨 교회(어린예수교회)
▲산토니뇨 교회
산토니뇨는 어린예수를 뜻한다. 필리핀의 초대 총독이었던 레가스피와 안드레스 신부에 의해 1565년경 세워졌다. 이후 몇 번의 화재로 손실되고 재건되었으며 현재 보이는 교회 건물은 1740년경에 복원된 것이 대부분이다. 내부는 건립 당시 그리고 추후 개 보수 되면서 만들어진 조각과 장식들이 매우 화려한 편이다.
지금도 예배가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일요일이면 수많은 신자들이 붐비는 곳이다. 세부는 일반적인 크리스트교와 조금 다른 것이 성인 예수보다 어린 예수에 대한 숭배심이 더 강한 곳인데 이 성 어거스틴 교회에 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내부의 유리상자에 ‘어린 예수상’을 보관하고 있는데 교회를 찾은 신자들은 이 어린 예수를 숭배하며 촛불을 켜고 기도하고 유리 상자에 입을 맞추곤 한다.
어린 예수상에 대한 숭배는 전설에서 기인하는데 교회가 전쟁이나 화재로 인해 훼 되었을 때도 조그만 상처 하나 없이 교회에 남겨져 있었다고 해 더욱 신격화 하며 수호신처럼 여긴다. 성어거스틴 교회는 마젤란의 십자가에서 걸어서 5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으며 교회 옆으로는 재래시장과 번잡한 세부 전통의 거리가 이어진다.
▲산토니뇨 교회
▲산토니뇨 교회
▲산토니뇨 교회
▲산토니뇨 교회
▲산토니뇨 교회
▲산토니뇨 교회, 문 옆의 검은 청동판은 교회의 역사를 기재해 놓았다.
▲산토니뇨 교회,
▲산토니뇨 교회 야외 미사 장소
▲산토니뇨 교회 성인 상
▲산토니뇨 교회 성인 상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제대 뒷편
▲내부 성인상
▲십자고상
▲눈물 흘리는 성모상
▲눈물 흘리는 성모상
▲산토 니뇨(어린 예수상)이 있는 예배당 입구
▲어린 예수상, 마젤란이 세부 여왕에게 바친 것이다.
▲어린 예수상
▲판매되고있는 산토니뇨 (어린예수)
▲페르디난드 마젤란(1480 ~ 1521.4.27)
인류 최초의 지구를 일주하는 항해의 선단을 이끌었던 지휘자이다. 1480년 포르투갈에서 출생하였으며 그가 9살때 부모를 잃었다. 그의 이름은 포르투갈어로는 페르낭 데 마갈랴잉시(Fernando de Magalhes)라고 한다. 포르투갈의 하급귀족
출신으로, 마누엘왕에게 출사하여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의 부하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일하였으며, 아프리카와 인도를 연결하는 항해에도 참가하였다(1504∼1511).
1511년 선장이 되어 말라카에서 몰루카제도 무역을 위해 항해했으며 1513년 아자모르 전투에서 무어인을 공격하던중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포르투갈 왕의 신임을 받는 군인이었으나, 모로코에서 현지 무어인과의 불법 무역거래를 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왕의 신임을 잃고 해고되었다. 그후 포르투갈과 인연을 끊고 에스파냐로 갔다.당시 동쪽 항로에 대한 권한은 포르투갈이 독점하였기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마침내 마젤란은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아메리카대륙을 넘어 동남아시아를 항해하는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앙베르의 상인인 전주(錢主)를 만나 재정적 도움을 얻었고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1세에게 자신의 탐험계획을 제안하여 후원을 약속받았다. 1519년 8월 10일 서항로(西航路)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하에 선박 5척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는 행선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하여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남하를 계속하여 1520년 11월 28일 험난한 항해 끝에 해협을 빠져나가 잔잔한 대양(大洋)에 이르자 이를 태평양(太平洋)이라 명명하였고, 지나온 해협은 마젤란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때 선단은 1척이 침몰하고, 1척은 도망하여 남은 것은 3척뿐이었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작은 바다로 예상하고 서진(西進)하였으나, 결과는 3개월 이상이 걸리는 대항해였다.
불안에 떠는 선원들을 통솔하여 계속 서쪽으로 가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아무 섬도 접하지 못했으나, 1521년 3월 6일 괌섬에 도착하여 원주민과 교전하였고, 3월 16일에는 현 필리핀군도 레이테만(灣)의 즈르안섬에 도착하여 세비야에서 연행하여 온 수마트라인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해 4월 세부 섬에서 부족의 왕인 라자 후마본을 만나 그의 정적인 막탄 섬의 라푸라푸 부족과 전쟁을 지원하여 승리하게 도울것을 약속하고 그와 절친한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와 부하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에스파냐왕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다. 이것은 당시 오만했던 유럽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4월 27일, 막탄 섬의 라푸라푸 부족을 얕잡아 보고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매우 강력하고 훈련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고 무려 1500명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마젤란은 집중공격을 받아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부하 12명도 함께 전사하였다. 살아남은 나머지 병사들은 선단으로 달아나 세부 섬을 탈출하였다.
지휘자를 잃은 선단원(船團員)들은 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배 1척(콘셉시온 호)을 불태우고 나머지 2척(빅토리아, 트리니다드 호)으로 필리핀 일대를 운항했으며 마침내 1521년 11월 향신료의 섬 몰루카 제도에 도착하였다.
포르투갈 무역권으로 들어갔는데, 할마헤라섬에서 잔존 2척 중 트리니다드호(號)는 난파하고 나머지 1척 빅토리아호에 향신료를 만재한 뒤에 60명이 귀로에 올라 포르투갈 해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1522년 9월 8일 세비야로 귀항하였다. 이때에 생존자는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an Elcano) 등 18명이었다. 필리핀·마리아나 제도 등의 명명도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마젤란 십자가, 산토니뇨 교회 인근에 있다
▲마젤란 십자가
마젤란이 1521년 4월에 만들었다고 하는 나무 십자가가 있으며, 이의 보관을 위해 산토니뇨 성당 바로 옆에 있는 마젤라스 거리의 팔각정이 1834년에 건립되었다.
1521년 필리핀 최초의 그리스도 교도가 된 추장 라자후마본과 그일족 800명이 세례를 받은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내부의 천장에 그려진 벽화에는 당시의 세례 의식의 광경이 잘 나타나 있으나 현재 육각정에 있는 십자가는
복제품이다
▲팔각정 내부 천장에 그린 세례의식 벽화
▲마젤란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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