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소도시 여행ㅡ사랑이든 여행이든, 지금...
에보라 / 코스타 노바 / 코임브라 / 아베이루
▲아베이루 운하를 운행하는 몰리세이루(Moliceiro). 아베이루는 포르투갈의 베네치아로 불린다
◈에보라(Evora)
어느 여행자가 그랬다. “한 번 들은 여행지는 정보가 되지만 두 번 들으면 가야 하는 곳이 된다”고. 그 여행자는 스페인의 코르도바가 그랬고 포르투갈의 에보라가 그랬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리스본에서 에보라로 곧장 버스를 타고 갔다고 했다. 여행자들은 언제나 앞서 간 여행자들과 현지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여행을 하면서 배운 것은 바로 그것. 나도 에보라로 향했다.
▲에보라 성벽에서 맞은 노을.
골목과 카페, 붉은 지붕을 인 집들이 모인 에보라는 포르투갈의 전형적인 풍경을 보여 준다
에보라에 도착하니 그 여행자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됐다. 인구 15만명의 중소도시인 에보라. 호텔에 체크인을 한 후 창문을 열자 붉은 지붕의 아담한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하루라는 일정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사나흘 정도 머물며 느긋하게 여행하고 싶었다. 에보라는 길이 약 6km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데 마음먹고 하루면 다 돌아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작은 도시의 매력은 같은 골목을 가고 또 가는 것 아닐까. 그렇게 익숙해지다 보면 안 보이던 풍경이 보이기도 하는 법이니까.
▲에보라의 정감 어린 골목길
에보라의 가장 큰 볼거리는 아크로폴리스언덕에 있는 디아나 신전이다. 2세기 말에 세워졌는데 현재는 콜로네이드만 남아 있다. 상프란시스쿠 성당에 있는 ‘해골집’으로 불리는 예배당도 볼 만하다.
내부는 실제 사람의 해골로 빼곡하다. 약 5,000명 분의 해골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만연할 때 사람들은 피할 곳을 찾아 성당으로 모여들었고, 그러다 보니 묘지도 부족해 이런 성당이 만들어졌다.
포르투갈에서 많은 식당을 찾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레스토랑은 에보라에서 들렀던 미스터 픽윅(Mr. Pickwick)이다. 에보라 현지인들이 찾는 아주 작은 레스토랑인데 에보라에서 생산되는 와인만 취급한다. 포르투갈의 와인은 저렴한 편이다. 식당에서 5유로 정도 되는 와인만 시켜도 아주 훌륭하다.
▲에보라 광장의 여행객들
포르투갈은 와인 강국이다. 12세기부터 원산지 통제제도를 시행할 만큼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특히 북쪽 지방의 도루 지역이 와인으로 유명하다.
포르투갈 와인은 DOC(최고등급 와인), IPR(프랑스의 AO-VDQS에 해당하는 고급 와인), VR(테이블 와인 중 산지 표기가 가능한 지역, 프랑스 Vdp급), VdM(원산지 표기가 없는 테이블와인)으로 나뉘는데 이 식당에는 VR과 VdM 등급 와인이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미스터 픽윅에서 5유로짜리 와인을 시켜 놓고 골목 풍경을 바라보았다. 골목은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졌고 시간은 그렇게 기분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 오는 건 아쉽지만, 그 아쉬움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여행을 더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않게 해 줄게요 / 코스타 노바(Costa Nova )
코스타 노바는 ‘새로운 해안’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예쁜 마을이다. 일명 ‘줄무늬 마을’로 알려진 이곳에는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줄무늬로 가득 칠해진 집들이 해안가에 일렬로 늘어서 있어서 여행자들은 갖가지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코스타 노바의 예쁜 건물들
마을이 줄무늬로 칠해지게 된 유래는 이렇다. 마을 앞은 바다, 뒤는 호수가 위치한 이 마을은 늘 습했고 안개가 자주 끼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는데, 가장을 먼바다 대구잡이로 떠나보낸 가족들은 늘 마음을 졸이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집이 외벽에 줄무늬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안개 가득한 먼바다에서도 집이 조금이라도 잘 보이도록 해 뱃일을 나갔던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까닭에 집마다 줄무늬의 색이 다 다르다. 각자의 집을 찾을 때 헛갈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들은 해마다 손수 페인트칠을 한다.
이들이 바다로 나가 잡아 온 생선은 대구다. 가난했던 포르투갈 사람들은 북대서양까지 나가는 대구잡이 배를 탔다. 낚시로 잡은 대구는, 오래 보관하기 위해 바로 소금을 뿌리고 말렸다. 지금 포르투갈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요리 바칼라우는 이렇게 시작됐다.
▲코스타 노바 해변에는 줄무늬가 그려진 건물이 이어진다
포르투갈을 여행하면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바칼라우를 먹게 된다. 바칼라우는 365개 요리법이 있어 매일매일 다른 바칼라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집집마다 자신만의 비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포르투갈을 여행하며 똑같은 바칼라우를 먹은 적이 없다.
어떤 집은 바삭하게 요리해서 냈고, 어떤 집 바칼라우는 촉촉했다. 어떤 집은 김가루를 뿌리고 우리나라 죽처럼 비벼 먹기도 했다. 곁들이는 음식으로는 감자가 나오기도 했고 수란을 올리기도 했다.
코스타 노바 바다가 바라보이는 음식점에서 바칼라우를 먹었다. 가이드가 안내해 준 집은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집이었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바칼라우가 담긴 접시를 내왔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이곳의 집들은 줄무늬가 칠해져 있었고,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바칼라우를 먹었지.” 바칼라우를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답하셨다.
이 집의 바칼라우는 포르투갈에서 먹은 바칼라우 중 가장 맛있었다. 부드럽게 으깬 감자 위에 구운 대구가 얌전히 올라가 있었고, 그 위에는 수란이 얹혀 있었다. 수란을 깨서 바칼라우를 먹으니 입속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멀리 주방 앞에 서 있던 할머니가 눈을 찡긋했다.
바다로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하며 집을 예쁘게 칠했고, 가난해서 먹을 게 없어 먹던 대구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 가운데 하나가 됐다. 우리도 언젠가는 ‘아빠의 아빠의 아빠 때는 힘들었지, 엄마의 엄마의 엄마 때는 힘들었지’ 하며 눈을 찡긋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힘든 시절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공부 좀 해 볼까요 / 코임브라(Coinbra)
코임브라는 포르투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다. 코임브라에는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코임브라대가 있다. 1290년 리스본에서 처음 설립됐는데, 1537년 코임브라로 옮겨와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모두 3만명 정도의 학생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다. 현재 법대 캠퍼스는 과거 포르투갈 국왕의 궁이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코임브라 궁전 내부. 한때 포르투갈의 수도였던 코임브라에는 옛 영화를 추억하는 왕궁이 있다
17세기에 지은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이 광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검은 망토를 두른 학생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실제 영화의 원작자 조앤 롤링은 이 대학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코임브라 대학에서 만난 학생들
법대 캠퍼스도 인기지만 최고의 명소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조아니나 도서관(Joanine Library)이다. 16~18세기의 책 30만권이 보관되어 있다. 도서관은 도서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하다. 이곳에 앉으면 아무리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학생도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만 같다.
◈오늘부터 조금 다르게 / 아베이루(Aveiro)
‘포르투갈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운하가 도시를 에스(S)자로 관통하고 있다. 거대한 석호와 바다 사이에 자리 잡은 아베이루 사람들은 염전과 수초를 생의 수단으로 삼았다.
주민들은 염전에서 캐낸 소금과 호수에서 건져 올린 수초를 옮기기 위해 운하를 만들었다. 몰리세이루(Moliceiro)는 소금과 수초를 실어나르던 배로 ‘수초를 잡은 남자’라는 뜻이다. 베네치아의 곤돌라보다 더 화려한 색감을 자랑한다.
▲아베이루의 저녁 거리
몰리세이루를 타면 입담 좋은 가이드가 운하를 따라가며 보이는 건물에 관해 설명해 준다. 운하 옆에는 아르누보 건물이 꽤 많은데, 과거 소금으로 돈을 번 상인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해 건물을 화려하게 꾸몄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난한 어부들은 짙은 원색으로 소금 창고를 칠했다. 카르카벨로스 다리 주변에 소금 창고가 줄지어 서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 레스토랑으로 운영된다.
몰리세이루를 타고 해 지는 운하를 따라 도착한 어느 레스토랑. 바칼라우와 포르투갈 와인을 마시며 나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떠올렸다. ‘리스본’과 ‘야간열차’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단어 2개를 합쳐 만들어 낸 제목의 이 소설은 지금까지 지켜 왔던 정돈된 삶을 내팽개치고 리스본으로 가는 열차를 탄 라틴어 교사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포르투갈 전통문양을 새긴 타일을 붙인 건물들이 아베이루 운하를 따라 늘어서 있다
57년의 인생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살아왔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고전어에 평생을 바쳐 온 고전문헌 학자다. 여행을 몹시도 꺼렸던 그는 어느 비 오는 날 아침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포르투갈로 떠나게 된다.
리스본을 찾은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포르투갈의 독특한 타일 장식인 아줄레주. ‘작고 아름다운 돌’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몰라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곳이 있다. 반면 지금까지 왜 이런 곳이 있는 걸 몰랐지, 왜 이제서야 이런 곳에 오게 된 거지 하며 억울해하는 곳이 있다. 포르투갈이라는 곳에 이제서야 오게 된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왔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다행스러웠다.
에보라, 코스타 노바, 코임브라, 아베이루. 포르투갈의 소도시를 여행하며 사랑이든 여행이든 우리는 언제나 저지르고 감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그레고리우스의 말대로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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