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성지ㅡ솔뫼 성지(성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
▲솔뫼 성지, 새로 조성된 입구와 표지석 및 야외 조각작품
이 곳에서 1821년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탄생하셨으며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 한덕동으로 이사할 때인 일곱 살까지 사셨다.
뿐만 아니라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 안드레아(1816년 순교)부친 김제준 이냐시오(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1846년 순교)에 이르기 까지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 "내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이존창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충청도의 천주교 신앙은 일찍이 내포지역에서 시작되어 충청도 전지역으로, 더 나아가 전라도 북부나 경기도 또는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 생활에 전념한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된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그 역시 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전주,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가고 이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 마침내 76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1821년 8월 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골배마실에서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갈 때까지 소년 시절을 보낸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우물과 집터만 남아 있고 대나무들이 주위에 있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의 15년간의 긴 옥중 생활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져만 갔다.
셋째 아들 한현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했다. 둘째 아들 태현은 1827년에 그의 아들 김제준과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문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솔뫼는 김 신부의 신앙과 삶의 지표가 싹튼 곳이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김대건은 이곳(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에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그러나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대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조부 김택현은 대건이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했다.
김대건은 그곳에서 16세 때인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뽑혀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다.
1845년 입국한 김 신부는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힘쓰다 1846년 6월 5일 체포되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의 일이었다.
1859년 9월 24일 가경자, 1925년 7월 5일 복자품, 1984년 성인품에 올려졌다. 김 신부는 조선 최초의 방인 사제이며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외치던 선각자였다. 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양학 유학자이며 조선의 최장거리 여행자이고 연평도에서 상해까지 항해한 최초의 서해 항로 개척자이기도 하다.
1845년 초 우리 나라 최초로 조선전도를 만들었다. 저서로는 22편의 서한이 있고, 한국 교회사에 관한 비망록 등이 있어 79위 시복자료가 되었다. 대전교구에서는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사업으로 김 신부 생가 복원과 박물관 겸 경당을 건축하기로 결의 하였다.
1998년 7월 16일 충청남도는 성 김대건 신부 생가터를 충남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솔뫼 피정이 집은 130여 명이 숙박할 수 있고, 개인 단체 피정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짜여져 있어 전국의 신자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베틀레헴이 그리스도의 이 세상 삶의 첫 출발지였다는 점에서 모든 순례자들의 가슴에 깊은 신심과 감명을 심고 있다면,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이며 내포신앙의 중심지인 솔뫼 성지는"신앙의 못자리"로써 이곳을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박해시대 신앙공동체의 숨결과 이 시대의 순교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솔뫼 성지 위치도
▲2011년 새로 조성된 입구와 표지석 및 야외 조각작품
▲성지 입구
▲김대건신부 생가지 대건당, ‘김대건 신부 탄생지에 관하여’ 김대건 신부 탄생지는 ‘당진 솔뫼’
본 내용은 2010.11.9일 수원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하성래 박사가 "성 김대건 신부와 은이 및 굴암"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데 대해 차기진 박사가 토론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김대건(안드레아) 성인 신부의 탄생지나 거주지를 알려주는 주요 기록으로는 "일성록", "기해.병오 순교자 목격 증언록"(시복 재판 기록), 모방 성인 신부의 "조선 신학생 서약서",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기해 병오 순교자들의 행적" 등이 있다. 한편 교회 전승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가 "면천 솔뫼"라고 알려져 왔다.
이 중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모방 신부가 직접 신학생들로부터 선서를 받으면서 작성한 "서약서"와 김 신부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최양업 신부의 번역문인 "순교자들의 행적"이다. 물론 "일성록"도 1차 사료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김 신부가 시종일관 자신의 행적과 교회 일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모방 신부의 서약서에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를 정확히 '면천 솔뫼'라고 기록하였다. 또 최양업 신부도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충청도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였으며, 훗날의 증언에서도 자주 김신부는 충청도 출신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일성록"에서 김대건 신부가 "자신은 용인 태생"이라고 진술한 내용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마도 김신부와 함께 잡힌 신자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김신부는 용인 사람"이라는 진술이 나왔고, 형관들이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김 신부가 "그렇다"고 인정한 것이 아닐까 한다. 또 "목격 증언록"에 나오는 '용인 굴암'은, 그 증언자가 김신부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 성인이 한때 거주하던 곳을 지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부친이나 선대의 고향을 들어 자신의 고향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모방 신부는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므로 이러한 통례로 김대건 신부의 고향을 기록하였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같은 "서약서" 안에 있는 최신부와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고향도 아주 정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최방제의 부친 최인호(최형 성인의 부친)의 고향은 충청도 홍주인데, 모방 신부는 부친의 고향을 적지 않고 정확히 '남양 태생'이라고 적었다. 반대로 마카오 신학교의 교장 신부는 최방제의 고향을 홍주라고 기록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통례를 따른 것이 아닐까 한다.
김신부의 부친 김제준 성인은 한때 냉담 상태에 있다가 정하상(바오로) 성인을 만나면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냉담 기간 동안에는 고향 솔뫼에 있으면서도 박해를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제준 성인은 신앙을 회복한 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난 것이 분명하다.
그 시기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 이후라고 추정된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기록으로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명집(루도비코)의 순교 행적이 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친척이었는데, 1839년 무렵까지도 '범천면 송산'(즉 면천 솔뫼)에서 살았던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김 신부의 집안이 박해 때문에 일찍부터 솔뫼를 떠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는 용인이 아니라 '면천 솔뫼'임이 분명하다.
그의 집안은 솔뫼에서 살다가 김제준 성인이 신앙을 되찾고 김 신부가 탄생한 이후, '솔뫼 → 청파 → 양지 골배마실 → 용인 굴암(즉 한덕골) → 은이 상뜸이(양지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김대건신부 생가지
▲김대건신부 생가지
김대건신부 생가지 대건당, 김대건 신부는 이곳에서 1821년에 태어나 1830년경까지 살았다.
▲대건당(大建堂)
대건당에는 10세 경의 소년 김대건이 안방에서 조부 김택현, 부친 김제준, 숙부 김제철과 함께, 옆방에서는 조모 이멜라니아, 모친 고우술아, 누나, 동생 김난식과 함께 만과(저녁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인형으로 연출하였다.
▲김대건 신부 생가 뒤 소나무 숲속에 위치한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 탄생지에서 소나무 숲을 따라가면 끝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3미터 높이의 이 청동상은 한국 전통 의상인 갓과 도포를 갖추고 영대를 두른 모습으로 바로 뒤에는 보호자인 성모를 의미하는 흰 탑을 세웠다.
▲솔뫼 아레나
노후화된 솔뫼 피정의 집을 철거하고 야외 공연장이자 문화공간인 솔뫼 아레나(Arena)를 건립해
2011년 5월 축복식을 가졌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앞마당의 대형 십자가
▲오두막 성체조배실
▲기념성당 입구, 기념관 좌편
▲성당 제대
▲감실
▲제대 성인유해
▲성 김대건 신부 초상
▲기념관 전시실 내부
▲기념관 전시실 내부
김대건 신부 신학교 입학 추천서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인 모방 신부가 1836년 12월에 작성한 신학교 입학 추천서 및 서약서이다.
추천서에는 김대건 신부를 충천남도 면천 솔뫼 출신 김 안드레아 라고 기록하였다.
▲라파엘호 도면과 모형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15처
출처 / blog.daum / su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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