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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八道(신팔도)*紀行錄/⊙충남 대전****기행

충남 공주ㅡ백제로 시간여행ㅡ公山城 철죽엔 스러진 백제의 꿈 붉게 여리고...

by 삼수갑산 2022. 5. 10.

백제로 시간여행ㅡ公山城 철죽엔 스러진 백제의 꿈 붉게 여리고

▲옛날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공주 공산성(公山城) 쌍수정(雙樹亭)에서 금강을 내려다본 풍경.인조는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이곳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쌍수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대에 세워졌다는 정자다.

 

▲공주 진남루(鎭南樓)

공산성의 남문.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 대칭형태로 조성한 후,두 석축기단에 걸쳐 누각을 세워 2층과 같은 효과를 냈다.

 

▲1500년 전 백제로 떠나는 ‘시간여행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충남 공주의 공산성. 초저녁 불을 밝힌 금서문 일대에 철쭉이 환하게 피어났다. 공산성은 성곽과 문루가 은은한 조명으로 빛나는 밤 시간의 정취가 으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경관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여행코스 10개가 있습니다. 이른바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입니다. 지역 간 경계를 허물어 10가지 테마에 따라 지역별로 대표적인 관광자원을 한데 묶어낸 여행코스입니다.

 

해당 지역을 다녀온 여행자를 모니터링하고 휴대전화 통신량, 신용카드 매출 데이터, 내비게이션 데이터 등 거대 자료를 분석해 추려낸 곳들입니다.

 

관광지 자체의 존재감뿐만 아니라 프로그램과 교통편의, 전통문화 자원의 가치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해 선정한 코스이니만큼, 여행의 만족도는 다른 곳보다 월등합니다.

 

매력적인 경관뿐 아니라 인문자원과 스토리가 있고, 이동과 숙식의 편의 또한 뒷받침되는 곳들이지요. 여행자로서는 고루 만족할 수 있는 ‘특급 여행 코스’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테마여행 10선’에는 각각 총괄기획자(프로젝트 매니저)가 있습니다. 지역별로 최고의 여행 코스를 찾아내고 해당 지방자치단체, 업계, 학계 등과 의견을 조율해 관광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현장에서 실행을 점검하는 역할을 책임진 이들입니다.

 

총괄기획자들이 오는 14일까지 이어지는 봄 여행주간에 맞춰 10개 권역별로 하나씩 봄 여행에 적당한 대표적인 여행코스를 뽑았습니다. 권역별 명소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이들이 신록이 짙어가는 이즈음에 ‘가장 여행하기 좋은 코스’로 선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내놓은 권역별 10개 코스 중에서 공주-부여-익산으로 이어지는 백제 역사유적지구 코스를 미리 다녀왔습니다. 역사의 자취를 길게 밟아가며, 봄의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는, 고대국가 백제를 여행하는 최고의 여정으로 안내합니다.

 

▲충남 부여의 궁남지는 지금 버드나무의 신록으로 그득하다.

궁남지의 물 가운데 지은 정자 포룡정과 버드나무의 연두색이 데칼코마니처럼 수면 위에 찍혔다

 

# 백제로 가는 시간여행의 문…공산성

충남 공주의 공산성이야말로 1500년 전 백제로 들어가는 ‘시간여행의 관문’으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다.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의 프로젝트 매니저가 백제 역사유적지구로 떠나는 봄 여행을 여기서 시작하자는 것도 이런 뜻일 것이다. 금강의 물길을 끼고서 산자락을 타고 넘어가는 산성은, 사실 역사를 지워버리고 경관으로만 본다 해도 빼어나다. 성벽의 유연한 곡선이 성곽 주변의 신록과 어우러진 풍경이라니…. 게다가 이즈음 공산성의 주 출입문인 금서루 일대에는 붉은 철쭉으로 물감을 뿌린 듯하다.

백제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행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자세히 봐야 한다. 공주에서 부여를 거쳐 익산으로 이어지는 백제 역사유적지구에 남아 있는 것들은 사실 덧없이 스러지고 만 것들이다. 공주 땅의 중심에 당당하게 서 있는 백제의 성인 공산성은 그래서 특별하다. 우뚝 솟은 공산성이야말로 한강유역에서 밀려난 백제가 꿈꾸던 융성을 여태 남아서 증명하고 있다.

공산성의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2.6㎞ 남짓의 공산성 탐방코스는 지금처럼 무르익은 봄날이 가장 걷기 좋다. 공북루와 만하루를 지나는 성벽길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의 물줄기도 좋고, 북루와 진남루를 거치고 출발지점인 금서루로 다시 돌아오는 길의 녹음도 초록이 짙다.

 

공산성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야경이다. 푸른 어둠이 내리면서 고대국가의 성벽이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떠오를 때면 성곽과 누각을 따라 켜진 불빛이 금강의 수면 위로 찍힌다.

 

마치 어둠 속에서 고대국가의 시간이 또렷하게 솟아나는 듯하다. 이 모습은 공산성 아래 금강교 철교를 건너서 금강 둔치의 신관 공원에서 보는 게 가장 훌륭하다. 백제의 자취를 찾아 나선 여행이라면 이 경관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 전북 익산 미륵사지의 연못 앞에서 본 동원 구층석탑. 동원의 탑은 워낙 말끔하게 복원돼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아 아쉽다. 지난 2001년 해체된 서쪽의 미륵사지석탑은 오는 11월까지 복원된다.

 

공산성에서 시작한 여정은 송산리 고분군으로 이어진다.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일곱 기의 고분이 늘어선 곳인데 그중에서 7호분인 무령왕릉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무령왕릉은 백제를 포함해 삼국시대의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무덤이다.

공주에서 가장 중요한 백제 유적이 여기 무령왕릉에서 나왔다. 가로 35㎝, 세로 42㎝의 돌에 새긴 이른바 ‘매지권’이다. 매지권이란 묘지를 매입했다는 일종의 매매계약서. 매지권에는 ‘백제 사마왕(무령왕)이 돈 1만 매로 토지신과 2000명의 신하에게 물어 (왕릉) 땅을 샀고 이 문서로 증명을 삼는다’는 글이 새겨 있었다. 이 몇 줄의 글귀가 고대사의 어둠 속에서 무령왕의 이름을 불러낸 것이다.

사실 잘 단장해 놓은 송산리 고분군에서 이런 역사의 무게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무령왕과 백제의 실존감은 왕릉에서 나온 46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박물관 1층의 무령왕릉 전시실 한쪽에 있는 왕비의 치아가 압권이다.

 

죽은 왕비가 남기고 간 것이 1500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 남아 있다는 건 놀라움에 가깝다. 고대왕국의 왕비가 이 땅에서 살고 갔음을, 백제의 시간이 단절 없이 지금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왕비가 남기고 간 사랑니에서 본다.

이렇게 백제의 실존감을 느끼고 나면 화려한 금관 장식이며 세밀한 세공의 은잔을 보는 눈과 마음이 확연히 달라진다. 이런 감동은 역사책이나 유물 도판만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다. 직접 가서 유물을 두고 섰을 때만 생생하게 전해진다는 얘기다.

고마나루의 곰사당은 공주를 찾은 관광객들이 대부분 지나쳐 가는 곳. 구태여 이곳을 일정에 끼워 넣은 것은 여기가 백제 역사의 중심 무대이자 해상교통의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금강변의 울창한 솔숲 속에 돌로 깎은 곰상을 모신 사당이 들어서 있는데, 솔숲의 정취가 빼어나서 부여로 건너가는 길에 들러보면 좋겠다.

# 궁남지에 찍힌 백제인의 발자국

 

▲ 충남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

 

탑 앞에 서면 간결하면서도 품위 있는 백제 특유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부여의 여정은 연못 한가운데 정자 포룡정이 배처럼 떠 있는 궁남지에서 시작한다. ‘백제 무왕 때 궁의 남쪽에 못을 파서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뤄 보면 궁남지는 백제 궁궐의 정원인 셈이다. 궁남지는 또 무왕의 탄생설화와 신라 선화공주와 무왕의 사랑 이야기인 서동요의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궁남지는 연꽃으로도 이름이 높지만, 정작 연꽃 필 무렵인 한여름에는 무더위 탓에 호수의 정취가 눈에 잘 안 들어온다. 지금처럼 깊어진 봄날 버드나무의 신록이 물들 때가 호수와 주변의 경관이 가장 매혹적이다.

지난 1995년 궁남지에서는 백제인의 발자국이 발견됐다. 길이 20㎝, 너비 10㎝의 발자국이 40㎝ 정도의 보폭으로 찍혀 있었다. 이 발자국을 볼 수 있는 곳이 백제시대의 건축물 등을 재현해 놓은 백제문화단지다. 문화단지의 전시실에는 당시 발굴했던 기록 그대로 모형을 떠서 관람로 바닥의 유리판 아래 놓아두었다. 발자국이 마치 어제 찍힌 것처럼 깊고 선명하다.

부여에서는 국보인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빼놓을 수 없겠다. 오층석탑은 한눈에도 ‘잘 생겼다’는 탄성이 나온다. 날렵하면서도 균형이 잡힌 석탑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미의식을 느낄 수 있다.

 

정림사지에는 불교의 나라였던 백제의 불교역사와 정림사지 복원 모형 등을 전시해둔 박물관도 있다.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변에 있는 구드래나루에서 백마강 유람선 등을 타고 건너가 고란사와 낙화암 등을 둘러보는 건 부여 여행의 필수 코스다.

부여의 저녁은 ‘백마강 달밤시장’에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 달밤시장은 지난 4월부터 부여의 전통시장인 부여시장에서 매주 금, 토, 일요일 오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문을 여는 야시장이다. 다른 지역의 야시장과 마찬가지로 시장은 먹거리가 중심인데, 골목형이 아닌 광장형 야시장이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야시장 광장에서는 주말마다 다채로운 공연도 펼쳐진다.

#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보는 백제의 기품

 

백제의 유적이라면 공주와 부여만 떠올리기 쉽지만, 전북 익산에도 뚜렷한 자취가 있다.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대국가 백제의 자취 여덟 중 두 곳, 그러니까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가 익산 땅에 있다.

익산으로 향하는 여정은 먼저 호남고속도로 익산IC 인근의 왕궁보석박물관에서 시작한다. 박물관은 11만여 점이 넘는 진귀한 보석 원석을 소장하고 있다. 보석뿐만 아니라 시대별 각종 화석과 실물 크기의 공룡 골격이 전시돼 있다. 백제의 역사 이야기와 유물을 활용해 만든 다양한 보석 전시물도 만날 수 있다.

왕궁리유적은 박물관에서 가깝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주변에 벚꽃이 피는 이른 봄이 가장 황홀하지만, 꽃이 없어도 텅 빈 공간에서 우뚝 솟은 석탑 한 기가 석양 무렵에 뿜어내는 기운만으로도 훌륭하다. 기품이 넘치는 석탑이 저 뒤쪽의 솔숲을 배경으로 쓸쓸하게 서 있는 풍경이라니….

 

멸망한 고대국가 백제의 옛 땅에 남은 석탑 한 기가 스러지고 만 것들의 애잔한 서정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고대국가의 지고 무너지고 스러진 것들의 기운과 향기가 이렇게 익산 땅에 그윽하다. 덧붙이자면 공주와 부여를 거쳐 익산까지 달려온 여정의 마무리는 지금 온통 꽃잔디로 뒤덮인 늘푸른 수목원의 왕궁다원 한옥에 들어 차 한잔으로 마무리하면 좋겠다.

 

출처 / munhwa.com / 공주·부여·익산 = 글·사진 박경일 기자